|
|
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
장애물 뛰어넘기(Overcoming Obstacles)
Sara Park McLaughlin, Meeting God in Silence,
전의우 역, ?침묵기도?,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0) pp. 175-196.
1. 침묵하는 법을 배우라
우리 습관에서 다른 모든 변화가 그렇듯이, 침묵에 들어가는 법을 배우는 데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항상 해오던 일을 계속하는 편이 더 쉽다. 따라서 침묵의 공간과 시간을 구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면, 처음에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타고난 발레리나가 열렬한 팬에게 했던 말이 자주 떠오른다. 공연이 끝난 후 무대 뒤에서, 팬은 발레리나의 공연을 극찬하면서 말했다.
"당신처럼 춤을 출 수 있다면 뭐든지 포기할 겁니다."
"아뇨, 그렇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무엇이든 기꺼이 희생하려 했다면, 나처럼 이미 춤 외에는 모든 것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나는 가정과 그 밖의 선택들과 나의 젊음을 포기했습니다. 모두 발레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포기했으며 그 대가를 아는 사람에게 '뭐든지 포기할겁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어떤 새로운 노력이든 첫걸음이 가장 힘들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일단 홀로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 일이 우리의 영적 성장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경험하게 되면, 기꺼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이다.
나는 예배 중에 침묵을 권장하는 교단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침묵의 온전한 넓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어려서 침묵의 가치를 경험한 것은 참으로 행운이었다.
침묵의 감동을 처음 경험한 것은 어릴 때였다. 늦은 밤 뒤뜰에 누워 별들을 바라보길 좋아했는데, 우주 속에 빨려드는 듯한 유쾌했던 느낌이 기억난다. 끝없는 어둠 속을 바라보노라면, 반짝이는 별들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하나님께서 천체를 움직이게 하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안전하게 느껴졌다. 무한한 공간의 하나님은 무한한 침묵의 하나님이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그분은 공간과 시간의 한계를 초월해 계시기 때문이다. 그 늦은 밤의 경험들을 통해,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침묵은 그분의 임재를 잉태하고 있었다.
열다섯 살에, 처음으로 감독 교회에 갔다.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침묵이 느껴졌다. 속삭이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자리에 앉거나 무릎을 꿇은 채 완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침묵은 낯설거나 공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침묵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담겨 있었다. 그 침묵이 거룩이나 초월을 구현했다는 것이 가장 근접한 묘사일 것이다. 성령께서 그 성소에 임재해 계신 것 같았다. 사람들이 잡담하고 있었더라도, 성령께서는 어쨌든 그곳에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소음 속에서, 경건치 못한 분위기에서 그분의 임재를 인식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에서 침묵을 찾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일 때가 있다. 어떤 장애물을 예측한다면,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
정신을 산만케 하는 물리적인 것에는 전화벨 소리,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소리, 다른 사람의 말소리 등이 있다. 각각의 경우에, 최선의 해결책은 그러한 환경을 피해 보다 덜 소란스런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정신 집중을 요하는 소득세 계산이나 긴급한 사업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면, 우리들 대부분은 조용한 침실로 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적 활동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행동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 피하기 어려운 것은 정신적인 장애물, 곧 불신앙, 죄책감, 피로, 낙담, 정신을 산만케 하는 생각들 등이다. 이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도 가운데 이것들을 하나님께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이것들을 하나님께 드릴 때, 이것들은 잠긴 문이 아니라 다리가 될 수 있다. 비록 이 문제들에 대해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 해도 어쨌든 말씀드려야한다. 그래야 이것들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낮이나 밤 시간에 침묵을 위한 스케줄을 짜는 일이 처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진료 약속에서 가족간의 모임과 식사시간에 이르기까지 다른 모든 스케줄을 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당신이 나와 같다면, 스케줄이 짜여진 활동들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스케줄이 짜여지지 않은 활동들은 물거품이 되는 경향이 있다. 나중에는 시간과 장소에 대해 그렇게 엄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습관이 되면, 낮 동안에 혼자만의 시간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단과 훈련이 필수적인 열쇠이다.
앞서 살았던 기독교 사상가들은 고독을 하나의 훈련으로 개발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경우, 처음에는 이상하게 느껴지고 혼자 있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우리 마음이 일상생활의 다급함을 잊고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우리 마음에서 그분을 가로막는 것들을 정리할 때 이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홀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위해 사막이나 동굴로 은둔할 수 없다 해도, 그렇게 할 수 있다.1)
준비
홀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위해 매일 일정한 시간-30분에서 1시간-을 떼어놓아라.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바쁜 일들이 엄습하기 전인 이른 아침에 이런 시간을 갖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잠들기 전에 이런 시간을 갖길 좋아한다.
주말에 시간을 내어 조용히 하나님과 함께해 보라. 아무 말 없이 혼자 걷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기에 좋은 시간이다. 작은 새소리나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만 있을 뿐 정신을 산만케 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고독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중요하다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면서 혼자 있고 싶어할 때 그들을 멀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라.
가정에서 소음과 자극에 노출되는 것을 제한하라.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오락을 위해 습관적으로 켜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을 세밀하게 엄선하여 켜라. 또한 십대들에게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꽃고 락 음악을 들으라고 요구하라.
고독의 시간이 들어 있는 교회 수련회에 등록하라.
왜 고독이 인간의 영혼에 중요한지 밝혀주는 책들을 읽어라. 헨리 나우웬의 영혼의 길(The Way of the Heart), 토마스 아 젬켐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tionof Christ, -생명의말씀사 역간)는 기독교 서적 가운데 탁월한 책들이다. 영국 심리학자 앤소니 스토어의 고독(Solitude)은 심리학적 견지에서 고독의 가치를 학문적으로 조명한 훌륭한 책이다.2)
묵상
침묵은 하나님과 연결되는 자연의 아이콘이다.
2. 어떻게 침묵해야 하는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일정 시간 기도하지만 침묵이 그들의 기도 생활에 줄 수 있는 유익을 완전히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요한계시록에서 침묵에 관한 매혹적인 구절을 발견했다.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 시 동안쯤 고요하더니"(계 8:1). 문맥에서, 침묵은 일련의 대재앙의 전주곡이다. 이 경우에서는 침묵이 폭풍전야를 상징한다 해도, 또 다른 관점으로 보면 침묵은 중요한 사건들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침묵은 말하자면 무대를 세운다.
우리는 침묵이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콘라드 에이컨의 단편 "고요히 내리는 눈, 몰래 내리는 눈" (Silent Snow, Secret Snow)의 주인공은 현실에 적응할 수 없게 되자 상상 속의 눈세계에 들어가는 괴로운 소년이다. 그는 부모님의 소리가 작아지고 자신의 방에 눈이 온다고 상상한다. 소년은 때때로, 병적이지는 않다 해도, 성숙하지 못한 태도로 학교 활동에 참여하고 싶지 않을 때는 조용한 자신의 상상의 세계로 물러난다. 에이컨의 등장 인물이 혼자 있고 싶은 열망을 낮 동안의 적절한 시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현실 도피의 핑계로 사용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이 그에게 끼친 진정한 효과는 누구에게나 같은 효과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의 유익을 누리기 위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세계로 물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개인기도 시간을 신중하게 선택하여 침묵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무대를 세우고 싶어 한다.
한 친구가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때때로(거의 항상) 하나님과 가깝고 개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보다 평범한 생활에 안주하는 것이 더 쉬워. 나는 매일 일, 에어컨 수리, 정치 문제, 휴가 여행, 잡지 주문 등 틀에 박힌 일들에 매달려 낑낑거리고 있어. 너는 어떠니?
내 대답은 하나님과 가깝고 친밀한 관계를 갖는 일에 우선순위를 둔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일을 선택적인 활동으로 취급하거나, 에어컨을 고치거나 잡지 구독을 신청하는 일과 같이 상대적인 중요성을 갖는다고 보는 것과는 다르다.
또한 성령 공동체의 메리 크리스타벨 자매의 제안에서도 도움을 받았다. 최근에 그녀는 다음과 같은 조언의 글을 썼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여행-내적 여행-을 시키신다. 이 여행은 거룩한 독서를 통해 방향을 안내받고 영양분을 공급받는데, 그 중에 성경이 가장 풍성한 자료이다. 이러한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천천히 읽고 일정한 침묵의 시간을 가지며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도록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렇게 천천히 읽는 것은 시를 읽는 방법과 매우 비슷하다. 빨리 읽기는 적절치 않으며 우리는 "정보"를 위해 읽는 것도 아니다. 사실과 정황을 알기 위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영적 독서보다는 "연구"에 더 적합하다‥‥‥
침묵은 본문이 가슴에서 마음으로 내려갈 수 있게 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살고 활동하시며 존재하시는 내적인 삶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적인 이동은 각자에 따라 다를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특별함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수세기를 통해 인식된 하나의 패턴, 진보, 즉 4단계 과정이 있다‥‥‥우리는 본문을 천천히 읽기로 시작하며 한두 문장만 읽으면 어떤 단어나 어구가 우리에게 크게 와 닿는다. 우리는 본문에 친숙해진다. 그러면 본문을 내려놓고,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묵상하기 시작한다. 본문을 숙고하고 곱씹으며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실지 모르는 것을 듣기위해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묵상을 통해 작고 고요한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우리는 본문에 대해 자신을 열며, 본문이 우리의 경험을 통해 조명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려고 애쓴다. 말씀이 우리의 내적인 삶 깊은 곳에 자리하여 계속적으로 우리를 자극하고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도 우리에게 영양분을 공급한다.
곧 우리의 마음도 포함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며,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을 본다. 우리의 마음은 이러한 발견으로 따뜻해지며,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를 너무나 깊이 사랑하시며 우리를 가까이 이끌기 원하시는 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응답하기 위해 말로 또는 말없이 기도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며, 명상한다. 자주 우리는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 인도하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때로는 한 단계가 생략되고, 때로는 기도내내 한 단계에 머물게 되기도 할 것이다. 때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의 내적인 삶 깊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몇 시간, 며칠, 또는 몇 주후에 그 증거가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자신만의 특별하지만 결코 딱딱하지 않은 리듬이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선택하는 매체는 우리가 그것을 묵상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예를 들면, 복음서 이야기에서 상상은 서신서의 보다 추상적인 부분들에는 유효하지 않은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구약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접근을 요구할 것이다. 바른 길은 없으며,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우리의 길이 있을 뿐이다. 바른 응답은 없으며 다만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한우리의 반응이 있을 뿐이다.3)
준비
앞에서 말한 천천히 묵상하는 독서를 해보라.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복음서 가운데 몇 구절을 선택해서 저어 보라.
묵상
“오 하나님, 주님의 아들 예수님은 주님의 백성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그분을 알게 하시고 그분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게 하소서. 그분은 주님과 성령과 함께 영원히 거하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멘."4)
3. 침묵과 묵상에 대한 관심이
비기독교적인 행위로 이어지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려 섞인 말로 이 질문을 하곤 한다. 오늘날 묵상(명상)이라는 말은 기독교보다는 뉴에이지 운동이나 동양 종교들과 관련하여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묵상이 다른 유형들과 얼마나 다른지 살펴보고 나면, 비기독교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은 근거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공허 자체를 조장하는 명상 학교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것을 한쪽으로 제쳐두는 것은 하나님이 첫째가 되시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이러한 자기 비움은 하나님의 임재를 더 세밀히 알려고 하는 적극적인 단계이다. 이 단계를 성취하고 나면, 하나님께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는 데 진전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본능적으로 동양의 신비주의를 꺼리는 것은 동양 종교들은 기독교와 정반대 되기 때문이다. 동양의 비기독교 종교들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독교와 다르다.
선불교도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명상을 하고, 논리적인 생각에 대한 강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들은 자기의식을 버림으로써만 만물의 거룩을 알고 만물과 하나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깨달음은 자신이 절대적인 존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의식을 낳는다. 명상을 통해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후, 선불교도들은 자신이 죄와 고통에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한다. 깨달음이 이들의 구원이다.5)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은 깨달음은 우리의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이시다. 선불교도들은 자신의 생각들을 왜 버려야 하는지는 제대로 몰랐으나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는 제대로 알고 있었다. 한 선불교 대승이 제자에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었다. 선(禪)에 대해 배우고 싶어 스승을 찾아온 제자는 자기 말을 계속할 뿐 스승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스승이 차를 따랐다. 그는 제자의 잔이 넘치는데도 계속해서 차를 따랐다. 제자가 잔이 넘친다고 불평하자, 스승은 제자도 그 잔처럼 이미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제자가 빈 잔을 내밀지 않으면, 채워지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6)
비기독교적 신비주의와 기독교 신비주의는 똑같이 하나님(신)을 직접 체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신비 체험은 혼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침묵 속에서 일어난다. 동양인들에게 있어, 신비 체험의 목적은 거룩, 정결, 지혜의 통일된 의식을 갖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은 힌두 신비주의는 존재의 부정과 무위(無爲) 자체를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는 데 반해, 기독교 신비주의는 보다 활동적이며 삶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그 목적이 고통의 회피가 아니라 고통의 포용이라는 점에서 적극적이다.7)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는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마 16:2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죽음뿐 아니라 부활에까지 참여할 것을 요구하신다.
침묵 속에서 묵상할 때 기적적인 체험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전율을 구하는 것이 침묵의 목적은 아니다. 동양과 서양의 신비주의까지도 환상이나 무아지경(자신 밖에 있다는 느낌) 같은 체험들을 적극적으로 구해서는 안 된다는 데 일치한다. 침묵 속에서 우리 자신을 드리는 가장 큰 목적은 아무런 기대 없이 무조건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8)
선불교는 묵상(명상)과 깨달음을 가장 크게 강조한다. 어떤 저자는 어느 한쪽도 묘사를 통해서는 알 수 없다면서 선불교도의 명상 체험을 수영에 비유했다. 그러나 묘사는 인간이 줄 수 있는 최선이다. 실제적인 이해는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그는 또한 수련을 통해, 명상 중에 얻어진 고요는 일상생활로 옮겨진다고 했다. 조용한 영혼과 자신의 본성과 실재에 대한 통찰력을 얻는 것도 명상의 목적이다.9)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목적 모두가 훌륭하다는 데는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목적이 명상의 자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결과라고 주장할 것이다. 평안과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존경받는 수련회 강사인 앤드류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인 것은 두 번 듣고 한 번 말하기 위해서이다'라는 중국 속담이 있다. 우리가 수련회에 참석하는 진짜 이유는 침묵하며, 피조물의 소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기 위해서이다."10)
준비
그리스도와 성경에 기록된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라. 당신이 노력해야할 일은 영혼이 영양분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평온히 침묵시키는 것뿐이다. 하나님께 평안과 지혜를 달라고 구하라.
묵상
예수께서는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를 더 잘 아신다. 그분은 우리의 동기를 아신다. 개인 기도에 묵상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추가한다면,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를 위한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4. 나의 발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주시는 것을 잴 수 없다. 자신이 통제권을 가지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이러한 깨달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러나 잠시 멈추고 기도 생활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생각해 보자. 웨인 오츠는 자신의 책에 "침묵 실천 테스트"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실었다. 다음 질문들에 답하면서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살펴보라.
1. 당신이 매일 반복되는 일과들 가운데 침묵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한 장소나 시간은 어디며 언제인가?
2. 당신의 삶에서 누가 가장 큰 소란과 혼란과 스트레스를 야기하는가? 당신은 이것을 바꾸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가?
당신은 소란과 침묵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좋아하는가?
3. 당신은 보다 조용히, 보다 느긋하게 일을 성취하기 위해 무슨 일을 하는가? 당신의 일과 중에 신경을 거스르는 과도한 짐들을 내려놓으려고 애쓰는가?
4. 당신의 일터 중에서 침묵의 장소들을 열거해 보라.
5. 최근에 무언(無言)의 언어가 사용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경우였는가?
6. 당신이 첫말과 끝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 결코 말싸움에서 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구체적으로 바뀌었는가?
7. 당신이 활동하는 곳에서는 어떤 잡담을 하는가? 또 당신은 당신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소음을 줄이기 위해 무엇을 하는가?
8. 청각뿐 아니라 다른 네 감각-시각, 촉각, 미각, 후각-까지 동원해서 귀를기울여 본 적이 있는가?
9. 텔레비전, 전화, 라디오, 오디오 등에 대한 중독에서 벗어나는 데 있어 어느정도 발전이 있었는가?
10. 친구, 가족 등에게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하는가?
11. 단절된 자신의 과거와 어떤 식으로든 다시 연결되었는가?
12.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깔보거나 얕보는가? 아니면 전혀 그렇지 않은가?
13. 피로에 지치고, 객관적인 시각을 잃으며, 형편없는 판단을 내리고, 혼란에 빠진 적이 있는가? 그 즉시 자신을 위해 침묵의 시간을 가졌는가?
14. 고독감을,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침묵을 구하고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과 의견을 형성할 권리를 행사하라는 도전으로 받아들였는가?
15. 개인적이며 혼자만을 위한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와 의식을 만들기 위해 어떤 자발적인 행동을 취했는가?
16. 시끄럽고 과도한 업무에서 벗어나 침묵을 경험하기 위해 하던 일을 제쳐두고 한적한 곳으로 피한 적이 있는가?
17. 자신이 덜 보기 싫은가?자신을 더 존경하는가?왜 그런가?
18. 가족의 침묵에 귀를 기울인 적이 있는가?
19. 일터에서, 예전에는 말이 많았으나 지금은 전혀 말이 없는 사람은 누구인가? 왜 그 사람에게 그런 변화가 일어났는가?
20. 최근에 분명한 이유도 없이 친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적이 있는가?
21. 자신의 이상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비판하기에 바쁜가?
22. 개인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침묵의 임재를 알고 있는가?11)
오츠는 자신의 책 전체에서 우리는 시끄러운 우리 마음을 침묵시킬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내적인 소란, 용서의 부재와 참견에서 나오는 내적 소란을 묘사하기 위해 "시끄러운 가슴"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잠을 이룰 수 없다고 말한다. 오츠는 자신은 의사로서 불면증의 원인이 우유부단함에 있는 것을 자주 보았다고 말한다. 그는 불면증이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양심을 살펴 자신들이 내려야 할 결정이 무엇인지 찾아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찾을 수 없다면, 다음날 아침까지 결정을 내리지 않기로 결정할 수 있다. 이러한 행동은 기도할 수 있도록 마음을 깨끗이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삶에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현함으로써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라고 독려한다. 그는 원수들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우리 역시 그들을 시기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유익을 얻는다고 말한다.12)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아는 친지와 친구들의 일에 지나치게 간섭한다. 오츠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뒤로 물러나 그들을 혼자 둘 것을 제안한다. 우리가, 실제적인 것이든 가상적인 것이든 간에, 바쁜 삶의 모든 요구들을 그대로 두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더 나은 기도 생활을 발전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오츠는 기도하러 방에 들어가기 전에 항상 외투를 문밖에 걸어두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외투는 세상의 염려를 나타내며, 세상의 염려는 자신이 기도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동안 밖에 남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13) 우리는 그의 조언을 따른다면 영적 성장의 큰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앞에서 소개한 사람과 비슷한 교훈을 얻음으로써 나의 발전을 잴 수 있었다. 잠자리에 드는 것과 밤에 기도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을 때, 이렇게 했다. 눈을 뜰 때마다 일어나 나를 괴롭히는 것들을 적어 내려갔다. 그런 다음 다시 누워 혼자 이렇게 말하곤 했다. 지금 기록한 것은 그 무엇도 잊어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제는 기도하고 잠자리에 들 수 있어.
돌이켜볼 때, 매일 찾아오는 염려거리들을 목록으로 작성하는 즐거움을 누렸다는 생각을 하면 재미있다. 그러나 이러한 속임수는 효과가 있었다. 마침내 습관을 통해 자신을 훈련시켜 마음의 생각들을 훨씬 쉽게 종이 위에 버릴 수 있게 되었다. 능률은 놀랍게 증가했으며, 거의 다시는 잠에서 깨어 목록을 추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어쨌든 기도가 염려보다 훨씬 더 생산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염려는 흔들의자를 흔드는 것과 같다. 염려는 당신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지만 당신은 그 어느 곳에도 이를 수 없다."
침묵
테스트를 해보라. 당신의 대답들을 살펴보고 어느 부분에서 가장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보라. 당신을 제지하는 것이 관계인가 습관인가?
묵상
앤드류 신부는 초연함을 고무풍선에 비유한다. 그는 모든 실이 잘려지지 않은 채 한 가닥이라도 풍선에 매여 있으면, 바람이 불 때 풍선은 터지고 만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사물을 소유하려는 욕망, 불만과 분노,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야망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14)
-------------------------
1) Peggy Easrman, "Way christians Need Solitude," Washington Diocese (December, 1991.) 5.
Sara Park McLaughlin, "Meeting God in Silence", 전의우 역, ?침묵기도?,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0) p, 178.
2) ibid.
3) The Sister Mary Christable. C. H. S., "From the Sister for Associates: A Letter," The Community of the Holy Spirit Associate Newsletter (June 1992), 3-4. Sara Park McLaughlin, "Meeting God in Silence", 전의우 역, ?침묵기도?,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0) p, 184.
4) Book of Common Prayer(New York: The Seabury Press, 1979, 성공회 공동기도서), 225 Sara Park McLaughlin, "Meeting God in Silence", 전의우 역, ?침묵기도?,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0) p, 185.
5) Zen Budhism (Mount Vemon:Peter Pauper Press, 1959), 6-7. Sara Park McLaughlin, "Meeting God in Silence", 전의우 역, ?침묵기도?,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0) p, 186.
6) Ibid., 30.
7) S. Radhakrishnan, Eastern Religions and Western Thought (New York:Oxford University Press, 1959), 63-65. Sara Park McLaughlin, "Meeting God in Silence", 전의우 역, ?침묵기도?,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0) p, 187.
8) Ibid., 79.
9) Paul Wienpahl, Ther Matter of Zen:A Brief Account of Zen(New York:New York University, 1964), 4, 26, 41. Sara Park McLaughlin, "Meeting God in Silence", 전의우 역, ?침묵기도?,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0) p, 188.
10) Father Andrew, In The Silence:Four. Retreats(New York:Morehouse-Corham Co., 1947), 54. Sara Park McLaughlin, "Meeting God in Silence", 전의우 역, ?침묵기도?,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0) p, 188.
11) Wayne E. Oates, Nurturing Silence in a Noisy Heart (Garden City, N. Y.:Doubleday. 1979), 112-113. Sara Park McLaughlin, "Meeting God in Silence", 전의우 역, ?침묵기도?, (서울: 생명의 말 씀사, 2000) p, 194.
12) Ibid., 71-74.
13) Ibid., 34.
14) Father Andrew. 77-79.
Sara Park McLaughlin, "Meeting God in Silence", 전의우 역, ?침묵기도?, (서울: 생명의 말 씀사, 2000) p, 194.
|
혹 글을 퍼오실 때는 경로 (url)까지 함께 퍼와서 올려 주세요 |
자료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 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