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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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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면-클로즈업 [기독교 가정신문 2008년 5월 7일 수요일 제205호(통권237호)
하나님과 연합(일치)하는 관상의 삶을 이루는 것은 내적수련에 있으며 내적수련의 중심은 관상기도이다.
수도원교회·고려수도원 박노열 목사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말씀의 실천이 가능한가? 그렇다. 관상가들은 이 말씀의 실천을 위하여 수도한다. 그렇다면 일반성도가 관상가가 되는 길이 있는가? 질문할 것이다. 대답은 간단하나 실천이 중요하다. 관상(觀想)하는 사람이 되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매일 기도를 위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여, 개인적이고 관상적인 기도를 실제로 하는 것이다.
관상이란 “우리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사랑하도록 하시는 성령의 기도에 동의함으로 하나님과 일치(연합)을 이루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이다.”
관상기도는 하나님의 은총과 정기적인 거룩한 독서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전한 것으로, 모든 사고와 단어와 정서를 넘어 절대 신비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가슴과 마음을 열어 드리는 것이다.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를 잘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알고 있는 그 하나님께 우리의 인식을 열어 드리는 것이다. 관상기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수도원교회·고려수도원 박노열 목사를 만나 들어봤다. (편집자 주)
‘관상기도는 인본주의’라는 말은 일부 이해의 부족으로부터 오는 오해이다. 먼저 이해를 돕기 위하여 관상기도의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관상기도는 두 가지의 흐름이 있다.
근본적으로는 주 예수님으로부터 사도요한 그리고 초대교회로 전해졌다. 이는 초대교회 3세기 안토니오, 5세기 무지의 구름(부정의 기도, 주부적 관상기도), 6세기에 시작된 베네딕토회는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중세는 복잡하나 크게 두 흐름 즉, 주류와 개혁파를 볼 수 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의 제수잇(예수회)교단은 도덕주의와 절대론을 주창하며 교황에게 충성맹세를 한 주류측으로 개혁주의를 탄압하는 일에 앞장 선 가톨릭 최대의 교단이었다. 반면에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은 갈멜수도회에서 신본주의 개혁을 주창하였다.
그리고 20세기의 토마스 머튼 그리고 현세에 이어지고 있다.한편으로 1,000년경에 분리된 동방교회는 지금까지 예수기도라는 관상기도를 시행하고 있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중세에 절대주의와 도덕주의를 주창하며 교황에 충성파인 인본주의와 신본주의 개혁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각기 자기들의 영성에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이냐시오가 설립한 가톨릭 최대교단인 제수잇(예수회)교단을 중심으로 교황에게 충성하는 인본주의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들 제수잇의 영성은 습득식 관상기도의 영성으로 가톨릭의 주류를 이룬다고 볼 수 있으나 오늘날 많이 변화되고 있다.
반면,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에 의한 갈멜수도회는 신본주의를 주장하는 중세개혁파로 가톨릭의 소수인 갈멜교단으로 이들의 영성은 신본주의를 주창하는 주부식 관상기도이다. 이어서 근대에 아빌라의 테레사와 십자가의 요한의 영향을 받았으며, 후에 노리지의 줄리안을 좋아한 20세기의 토마스 머튼은 신본주의 주부적 관상기도를 발전시켰으며 오늘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관상기도란 무엇인가?
관상기도가 한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집중기도, 침묵기도, 마음의 기도, 구심기도, 단순기도, 사랑의 집중기도, 관상기도 등 그 보는 관점에서 여러 가지로 불리워지고 있다.
예를 든다면 중심을 향한다하여 향심기도,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라하여 마음의 기도, 침묵가운데 드리는 기도라 하여 침묵기도, 구심을 이루는 기도라 하여 구심기도, 마음을 집중한다 하여 집중기도 등으로 부르나 이들 모두 관상기도이다. 이것만이 관상기도라는 것은 잘못이다.
관상기도에는 열두 가지도 넘는 방법들이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예수기도, 거룩한 독서, 관상기도 3가지를 들 수 있다. 더욱더 넓게는 방언, 예언, 통변, 입신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관상기도라 함은 좁은 의미에서 위의 3가지 ‘예수기도, 거룩한 독서, 관상기도’를 말한다.
더 정확하고 엄밀하게 말한다면 ‘관상기도란 없다’고 말하고 싶다. 관상기도라 하는 기도는 모두 ‘관상에 이르기 위한 기도’일뿐이다.
관상은 하나님의 크신 은총으로 우리에게 하나(혹은 연합, 일치)되어 주시는 상태이다.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하나 되어 주시는데 거침이 없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통상적으로 관상기도라고 말하는 관상에 이르는 기도이다.
우리는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관상기도의 어떤 부분이 인본주의이고 무엇이 신본주의 인지를 말이다. 관상기도의 인본주의적인 부분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관상기도는 신본주의라는 점도 아울러 강조한다. 가르치는 교수들의 일면을 보면, 잘은 모르지만 유해룡 교수는 그의 저서를 보면 이냐시오식을 따르는 경향이 있음을 본다. 그리고 한신대 권명수 교수는 그의 글과 수련회에서 가르침을 보면 주부식 관상기도의 편에 있다.
나는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 평가할 처지에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묻는다면 “현재로는 습득식 관상기도가 더 개신교적(실천적)이다”고 말하고 싶다. 다소 다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부분은 그리하고 있지 않는가? 그 실천적인 것이 과연 신본주의인지는 인본주의인지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것을 추천하고 싶은가? 물으면 “신본주의적(신학적)인 주부식 관상기도를 당연 추천 한다”
관상기도는 기독교적이다.
많은 분들이 관상기도는 가톨릭기도라고 한다. 그것은 이해의 부족이라 느껴진다. 관상기도야 말로 기독교적이다. 관상기도가 기독교적이 아니라는 것은 잘못이다. 중세와 종교개혁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위에서 말한 교황에게 충성맹세를 한 무리들이 개혁자들을 잡아 죽이기까지 핍박을 하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개혁자들은 수도원과는 거리를 두었다. 아니 철저한 단절을 기했다. 당연히 수도원의 핵심영성인 관상기도를 버릴 수밖에 더 있었겠는가? 관상기도는 천주교에서 가지고 오지 않았다. 관상기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초대교회로 이어져 중세를 거쳐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다만 잠시 개혁자들에 의해 단절되어 있었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버린 영성을 되찾아 와야 할 때가 되었다. 언제까지 이것달라 저것달라 축복달라는 거지신앙으로 살 수는 없다.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와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영성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관상기도에는 훈련이 필요하다.
비록 짧은 기간이라도 관상기도 하는 법을 배우는 데는 훈련이 필요하다.
마치 ‘다이어트’와 같다. 시작하기 어렵고 결과를 보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노력의 구체적인 결실을 맺는다.
개인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라는 예수님의 기도처럼 되는 것이다.
묵상에서 관상으로
묵상기도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일깨워주는 사려 깊은 기도로서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인 관상에로 나아가는 지름길을 열어준다 할 것이다. 이 기도는 은혜를 입은 인간이 노력하여 하나님을 탐색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관상은 하나님의 현존(임재)에 대한 체험이 아니라 인식의 문제이며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시다. 다시 말하면 탐색(묵상)을 완성하는 것이 하나님과 관상적 연합(일치)이다.
관상기도로 돌아가라
헨리 나우웬의 저서 ‘관상기도로 돌아가라’ 글 중에서 “요즘 보면 교회들이 교황권, 여성 안수, 성직자의 결혼, 동성애, 산아 제한, 낙태, 그리고 안락사와 같은 이슈를 다룰 때, 주로 도덕적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단지 도덕적 기준에서 어느 편이 옳고 그른지를 투쟁을 벌인다. 우익, 복고주의, 보수주의, 좌익이니 하는 말들은 사람들의 입장을 나타내는 말이다. 많은 논쟁들이 진리에 대한 영적 탐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벌어지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도 모든 인간관계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하나님의 첫째 사랑을 경험하면 없어질 수 있다. 크리스천 리더는 이 시대를 달구는 이슈에 대해서만 박식한 의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영속적이고 친밀한 관계에 뿌리를 두고 어떤 말로 충고하고 가르쳐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지속적인 관상 기도를 통하여 사랑의 음성을 거듭해서 듣는 훈련을 해야 한다. 또한 어떤 이슈가 주어지든지 능히 대처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도 사랑 안에서 찾는 훈련을 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 관계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세상의 이슈들을 다루다가는 자칫 자아가 분열되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어진 주제에 대해 자의식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생명의 원천에 우리의 인격적 친밀함이 견고하게 뿌리 내리고 있다면, 적대적이지 않으면서도 유연할 수 있으며, 독단적이지 않으면서도 확신에 차 있을 수 있고, 교활하다는 평판을 얻지 않으면서도 진정한 증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참 열매를 맺는 리더가 되고자 한다면 도덕적인 사람이 아닌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영적 리더는 지속적인 관상기도를 통하여 사랑의 목소리를 거듭해서 듣는 훈련을 해야 한다. 또한 어떤 이슈가 주어지든지 대처할 수 있게 그분의 사랑 안에서 지혜와 용기를 찾는 훈련을 해야 한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왜 관상기도를 전하는 일에 정성을 기울이는가?
내가 관상기도에 심취하고 이의 전파를 사명으로 알고 전하는 이유는 몇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무엇보다 주께서의 관상에로 부르심이다.
둘째, 기도의 온전(혹은 회복)을 위해 한 방울의 새로운 물결이 되기를 원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의 기도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하고 뜨겁다. 이 뜨거운 기도는 올라가는 기도, 외치는 기도, 간구 혹은 중보의 기도라고 말하고 싶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나도 이전에는 그러했다.
나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한다.
개신교 성도들이 너무도 열심히 구해서 주께서 감탄하시어 주시려고 내미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하고 가버리니 “주께서 민망해 하신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을 듣는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에 너무 열성적인 것을 누가 아니라 하겠는가만, 한 가지 오히려 부족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헤아려 순종하는 일에 부족하다.
나는 이 부분을 깨우치고 보충해 교회와 성도가 온전한 기도를 함으로 온전한 영성이 개발되어 온전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본 고려 수도원에서는 관상기도 정기수도회 초급과정과 심화과정을 운영한다. 현제 초급과정은 매월 첫 주일 지난 월요일 10:00~22:00 진행하고 있으며, 심화과정은 매월 둘째 주일 지난 월요일 10:00~22:00 으로 첫째 주일 지난 월요일은 기초과정, 둘째 주일 지난 월요일은 심화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 1년에 3회(9-11월, 1-3월, 5-7월, 매주 첫 주일 지난 화요일 오후 2:00~7:00) 각 12주과정의 관상기도 아카데미를 계획하고 있다.
동 고려 수도원에서는 칼빈주의 입각한 개혁주의 신학(Reformed Theology)을 근본이념으로 하여,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교리적 표준으로 하고, 장로교 헌법의 정치적 원리를 가지며, 사도들을 거쳐 우리에게 베푸신 예수님의 가르침(Didache)을 실천하여 교회의 성례전적 전통과 권위 및 질서를 지켜오고 있다.
또한 관상기도 수련을 통하여 하나님과 일치하며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의 삶을 추구하며, 초대교회와 같은 성도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관상기도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박노열 목사 편저 ‘관상기도(도서출판 한울사 펴냄)’나 고려수도원 홈페이지(www.koabbey.com) 참조하면 된다. (문의: 02)955-6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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