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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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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설교비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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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8854 |
윤리신학자의 눈높이 설교- 중앙성결교회 한기채 목사
눈높이 설교
필자는 이야기 식 강해설교의 묘미를 이번에 중앙교회 한기채 목사님(이하 ‘한 목사’)의 설교에서 만끽할 수 있었다. 그는 청중들에게 기독교의 도그마를 독백처럼 되뇌거나 믿음을 권위적인 태도로 강요하는 게 아니라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듯이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있었다. 형식적으로도 그렇고, 내용적으로도 그렇다. 이런 방식의 설교는 청중의 입장에서도 전통적인 설교와 다른 느낌으로 다가간다. 전통적인 의미의 설교에서는 청중들이 “이제부터 설교 들을 준비를 해야 되는구나.” 하고 긴장하기 마련인데, 한 목사의 설교에서는 청중들이 그런 의식 없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말씀 안으로 끌려들어간다. 필자도 그의 설교를 접하면서 이런 느낌이 자주 들었다. 이게 곧 이야기 식 강해설교의 힘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이야기 식 강해설교를 따라할 수 있을까, 하는 게 요즘 필자의 실존적인 관심사다. 왜냐하면 필자의 두 딸이 필자의 설교를 아주 지루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나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한 목사처럼 다양한 방식의 이야기 식 강해설교를 시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남에게 배워서 약간 흉내를 낼 수는 있겠지만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설교를 하기는 쉽지 않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런 이야기 식 강해설교는 그 무엇보다도 설교자의 천부적 성품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청중에게 완전히 열린 태도를, 청중과 전인격적으로 일치하는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이런 성품은 억지로 배워서 얻어지는 게 아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설교자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난다는 로이드 존스의 말이 옳은지 모르겠다. 한 목사의 설교 행위에서는 이런 요소가 스테인 글라스를 통과한 햇살처럼 아름답게 빛을 내고 있었다.
한 목사 스스로는 자신의 설교를 이야기 식 강해설교가 아니라 ‘귀납법적 강해설교’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예수가 선택한 열두 제자 이야기, 7쪽. 이하 ‘예수’). 이 두 개념은 다른 게 아니다. 이야기 식 강해설교는 기본적으로 청중의 입장에서 복음을 바라보기 때문에 보편(전체)에서 구체(부분)로 나가는 연역적 방식보다는 구체에서 보편으로 나가는 귀납적 방식으로 전개되기 마련이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지 한 목사의 설교는 청중과의 소통에 가장 큰 비중을 둔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설교의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한 목사가 동의할는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이런 특징을 살려서 그의 설교를 ‘눈높이 설교’라고 이름 붙이겠다. 이런 눈높이 설교가 한 목사의 설교 행위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 특징을 일단 형식과 내용으로 나누어 설명하겠다.
시청각 설교
첫째, 그의 설교 형식은 철저하게 시청각적이다. 필자가 중앙교회로부터 건네받은 동영상을 포함한 10편의 설교에서만 보더라도 이런 특징은 매우 분명하다. 대형 프로젝터를 통해서 성서 텍스트의 배경이 되는 그림을 보여주는 일은 흔하며(“시날 평지에서”, “아둘람 굴에서”), 2005년 12월11일에 행한 설교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헨델이 전한 복음”에서는 결론 부분에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의 한 곡을 자막과 함께 직접 들려주기도 했다. 이런 시청각적인 설교는 이미 오랜 전부터 한 목사의 독특한 설교방식이었던 것 같다. 그의 설교집 <예수가 선택한 열 두 제자 이야기>에서도 그런 설교가 종종 눈에 뜨인다. “반석이 된 돌 베드로”라는 설교의 한 대목을 보자.
여기 제가 울퉁불퉁한 바위 하나 가지고 나왔습니다만 잘 보십시오(이 설교는 실물 설교로 준비되었습니다. 울퉁불퉁한 바위와 연장들, 그러니까 망치와 톱, 끌과 자와 정을 미리 강대상에 준비해서 보자기로 덮어놓았다가 설교할 때 보조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무엇에 쓰겠습니까? 반석으로 쓰기엔 너무 위로 튀어나와 다른 돌들과 균형을 잡을 수가 없고, 또 너무 굴곡이 심해서 어디에다 중심을 잡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하여간 망치로 손볼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예수 192).
한 목사는 이 설교에서 새로운 단락에 들어갈 때마다 망치로 바위를 콩콩 찍었다. 그런 장면은 그 자리에 있던 청중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을 것이며, 그 과정을 통해서 설교의 배경이 되는 성서 이야기가 그들에게 실감 있게 다가갔을 것이다.
시청각 설교의 압권은 2005년 5월1일 출 13:17-22(참조 시 30:11,12)절을 본문으로 행한 설교 “광야에서 하나님과 함께 춤을”(Dancing with God in the Wilderness)이었다. 한 목사는 설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2002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신인여우상을 받은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를 청중들에게 보여주었다. 뇌성마비 여자인 공주와 사회 부적응자인 남자 종두가 함께 춤을 추다가 키스하는 것으로 끝나는 1분45초 분량의 장면이 예배당 안에서 상영되었다. 그 뒤로도 한 목사는 이 영화에 대해서 3분 정도 보충해서 설명했다. 그가 설명한 영화의 메시지는 청중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필자는 한 목사가 설교 전달 방식을 거의 혁명적으로 개척해나가는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서 지도와 성화, 종교음악과 영화, 그리고 실물에 이르기 까지 한 목사는 설교에서 시청각적인 요소를 입체적으로 도입하고 있었다. 누가 감히 주일공동예배에서 이런 정도로 파격적인 방식으로 설교할 수 있겠나? 약간 당혹스러워하는 신자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것은 받아들이는 입장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지겠지만, 그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매우 다양한 방식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며, 그런 시도가 결국 청중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추려는 한 목사의 설교신학에 기인한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이런 그의 도발적인 시도가 복음전달의 역동화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길잡이가 되기를 기대한다.
복음의 연성화(軟性化)
둘째, 한 목사의 설교 내용은 복음의 원초성보다는 복음의 문화적 적용에 쏠려 있는 편이다. 이는 곧 그가 구원론과 기독론, 칭의론과 성화론, 또는 창조론과 종말론이라는 복음의 원초적 성격을 직접적으로 선포하기보다는 그것의 문화적 의미를 풀어내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는 말이다. 이것이 곧 복음의 연성화이다. 이 말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의 설교가 기본적으로 복음적이지 않다거나 그의 모든 설교가 문화적인 속성에만 무게를 둔다는 말도 아니다. 다른 목사들에 비해서 한 목사에게 이런 성향이 매우 두드러진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그가 시청각 재료를 눈부시게 활용한다는 사실도 역시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설교에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이런 복음의 연성화도 역시 청중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추겠다는 설교신학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 목사는 2005년 6월5일 “여유 있어 보이는 당신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본문은 이삭이 불레셋 사람들에게 우물을 양보했다는 보도(창 26:12-22)와 오른 뺨을 치는 사람에게 왼뺨도 돌려대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마 5:38-48)이었다. 그는 이 설교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모든 부분에서 좀 여유를 갖고 살아야 한다고 외쳤다. 한 목사가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목회할 때 매 학기마다 빚을 진 상황이었지만 조금도 궁색한 티를 내지 않고 살았다는 예를 들기도 했다. 이 설교는 기독교 신앙이 신자들의 삶과 태도에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주었다.
7월17일 주일에 행한 “내 안의 또 다른 나인 그림자와 친밀해지자”는 제목의 설교는 다윗의 너그러움에 감복해서 회개하는 사울 왕에 대한 보도(삼상 24:16-22)와 자신 안에 또 다른 자아가 괴롭히고 있다는 바울의 고백(롬 7:15-25)을 본문으로 한다. 한 목사는 이 설교에서 칼 융의 정신분석을 끌어들이면서 인간의 내면에 숨어 있는 부끄러운 부분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권면했다.
그림자를 통합하는 방법은 다음에 설명하기로 하고, 우선 그림자와 다각도로 대화를 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그림자에게 말을 걸어 보십시오. 아니면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자신의 그림자에 대해 말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의 그림자에 대해 말씀드리고 그를 더욱 신뢰하므로 그림자를 자신의 인격에 건설적으로 통합하는 노력을 해 보십시오.
한 목사는 이 설교에서 인간의 인격적인 통합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그것의 해결 방법까지 차근히 제시했다. 그는 정신분석과 문학작품을 통해서 인간 자아의 이중성을 아주 정교하게 분석했으며, 또한 통합적인 인격의 필요성을 설득력 있게 역설했다. 문화가 복음의 옷이라는 폴 틸리히의 말을 빌린다면 한 목사의 설교는 복음에 옷을 입히는 작업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런 설교현상들이 바로 필자가 한 목사의 설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복음의 연성화다.
한 편의 설교만 더 보자. 12월11일에 행한 설교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헨델이 전한 복음”은 헨델의 <메시야> 2곡의 텍스트인 이사야 40:4절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를 본문으로 한다. 한 목사는 이 설교에서 음악 전공자 못지않은 발군의 실력으로 헨델의 이 노래에 얽힌 사연과 의미를 해명했다. 이 곡에는 바로크적인 ‘가사 그리기’(word painting) 기법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가사와 음악이 긴밀하게 융합되어 있다는 뜻이다. 한 목사에 따르면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골짜기처럼 패이거나 높은 산과 언덕처럼 높아진 것을 편편하게 다듬어 주시는 분이다. 설교 후반부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예수님을 우리 삶의 중심부에 모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심과 의기소침의 골짜기를 믿음으로 돋우어야 합니다. 그리고 분노와 괴로움의 산들은 용서와 사랑으로 깎아 내려 낮아지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삐뚤어진 생각들과 거친 감정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평탄케 만들어야 합니다. 죄의 돌, 불순종의 바위, 우상숭배의 산, 불신앙의 골짜기들이 다 정지되어 예수님께 가는 길에 거침이 없어야 합니다.
비뚤어진 생각과 거친 감정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평탄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은 결국 한 목사가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데서도 우리는 복음이 상당히 부드럽게 해석되고 전달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위에서 필자가 인용한 한 목사의 설교 세편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6월5일의 설교는 기독교인의 여유 있는 삶의 태도를, 7월17일의 설교는 기독교인의 내면에 숨어 있는 어두운 그림자가 통합된 인격으로 승화되는 길을, 그리고 12월11일의 설교도 역시 훼손된 인격의 도야를 강조하고 있었다. 다른 설교도 역시 큰 틀에서는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곧 한 목사가 신자들의 영적인 상처를 심리학적으로 싸매며, 신자들의 인격을 문화적으로 승화하는 것을 설교의 중심축으로 삼고 있다는 의미이다. 지나치게 복음의 원초적 내용에 치우침으로써 신앙의 열정은 강화할 수 있었지만 성숙한 인격은 견인해내지 못했던 과거의 전통적 설교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 목사는 문화적인 방식으로 복음의 연성화를 시도하고 있는 중이다.
지난 100년 성결교회의 역사에서 제4 세대(?)에 속하는 한 목사가 이제 감성과 문화가 화두로 대두되는 21세기를 항해해야 할 설교자로서 복음의 연성화를 시도한다는 것에 대해서 필자는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다. 이런 시도가 혹시나 기독교 복음의 근본을 취약하게 만드는 결과를 빚으면 어쩌나, 하는 염려이다. 그렇지만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에 충실한 한 목사의 설교에 대해 그런 염려를 한다는 건 순전히 필자의 노파심에 불과할 것이다.
설교와 윤리학
이런 염려는 붙들어 매놓고, 대신 필자는 한 목사가 한국의 기독교 윤리학계를 대표하는 소장파 신학자라는 점을 감안해서 그의 설교에 윤리학적인 특징이 얼마나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지를 잠시 살펴볼 생각이다. 물론 기독교 윤리학을 전공했다 하더라도 설교단에 올라선 사람이라고 한다면 윤리학을 강의하는 게 아니라 복음을 선포해야 하지만, 우리가 그의 설교에서 풍성한 윤리학적 영성을 경험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설교에 대해서도 질문할 수 있다는 게 한 목사의 지론이니까(예수 101) 필자는 편안한 마음으로 이렇게 질문하려고 한다. 한 목사의 설교에 윤리학은 살아있는가? 솔직히 말해서 이 질문에는 복음의 연성화에 대한 필자의 노파심이 조금 담겨 있다.
한 목사는 “여유 있어 보이는 당신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는 설교에서 예수님을 “참 여유로운 분”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소위 오병이어 사건에서 5천명이 먹고 12광주리가 남았다는 사실을 들어서 여유 운운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이건 매우 한가한 발상이다.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보도하고 있는 성서 텍스트가 그의 설교에서 단지 여유로운 삶의 차원으로 축소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이 대목은 그의 설교에서 크게 다루어진 게 아니니까 그렇다 치고, 그가 윤리와 신앙의 변증법적 관계에서 매우 진지하게 해석되어야 할 산상수훈을 여유로운 삶의 태도로 너무나 간단명료하게 풀어냈다는 건 의외였다. 한 목사는 그 설교에서 세 가지의 여유를 역설했다. 오른뺨을 치는 이에게 왼뺨을 돌려대라는 말씀은 마음의 여유를 뜻하며, 속옷을 달라는 이에게 겉옷까지 주라는 말씀은 물질적인 여유를 의미하고, 오리를 함께 가자는 이에게 십리를 가주라는 말씀은 시간의 여유를 가리킨다고 한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이런 설명 자체는 크게 문제가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실제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신앙을 통해서 여유를 보이며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나. 그러나 필자는 인간의 삶이라는 게 늘 이런 일반론의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지울 길이 없다. 신앙이 아무리 돈독하더라도, 한 목사의 주장처럼 아무리 마음의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오른뺨을 치는 사람에게 왼뺨을 대줄 수는 없다. 이런 일은 필자도 못하고, 한 목사도 못하고,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못한다. 그러나 왼뺨을 대라는, 그래서 친구만이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아포리즘은 진리이다. 윤리학자는 바로 이 딜레마를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아니 윤리학자 이전에 설교자는 늘 이런 서로 다른 현실, 즉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과 오늘 우리가 구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 사이에서, 또한 텍스트의 현실과 콘텍스트의 현실 사이에서 치열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중층적이어서 현묘(玄妙)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인간 삶의 신비를 세밀하게 들여다보지 않고 쏟아내는 설교는 일종의 ‘공자왈’로 떨어지고 만다. 좀 심하게 말해서 한 목사의 설교에서는 윤리학자의 날카로운 시각을 찾아볼 수 없고, 그저 두루뭉술한 당위성만 ‘나이브’하게 외쳐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필자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그래도 그런 설교가 청중들에게 은혜가 되는 것 아닌가, 하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면, 한 목사의 윤리적 시각이 나이브하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그의 따뜻한 성품과 맞물려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스도인이 모범적으로 살아야 하며,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한다는 생각이 선천적으로 강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윤리의 일반론으로, 혹은 규범론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한 목사는 자신이 기독교 윤리학자라는 사실을 마음에 담고 설교하는 사람이다. 목사들을 대상으로 윤리학을 강의하는 본인이 실제로 윤리적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늘 의식한다는 말이다. 그는 윤리의식과 자기성찰이 결벽증처럼 강한 사람이다. 배우는 학생으로 있던 25년 동안 한 번도 결석이나 지각을 하지 않을 정도로(제자 118) 모범적으로 살아온 사람답게 그는 ‘어떻게’ 사는가를 설교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한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위대함이 아니라 섬김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됨의 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섬김의 가치라는 사실을 일러주십니다. “무엇이 되느냐”보다는 “어떻게 살겠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지요.(제자 62).
이렇게 섬김의 윤리를 강조하는 한 목사는 끊임없이 기질을 바꾸거나(제자 107), 인격을 도야하거나 성품을 가꾸어나가는 것(“바나바의 사역”, 2004년 5월7일)을 신앙생활의 요체로 생각하는 것 같다.
필자는 한 목사의 이런 섬김의 윤리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것이 일반론으로 떨어지는 경우에 과연 설교로서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이 말은 곧 우리가 일반적인 의미에서 착하게 살기 위해서, 그리고 인격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 혹은 마음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솔라 피데’(sola Fide)라는 종교개혁자의 신학적 착상에 기대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특히 행위에 중심을 둔 율법이 아니라 존재에 중심을 둔 복음에 신앙의 토대를 놓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윤리 문제도 역시 존재론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바울도 역시 율법적인 성취와 도덕적인 성취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론적으로 새로워지는 피조물이 곧 그리스도인의 실존이라고 생각했다. 설교자들은 여기서 우리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초점을 맞추어서 설교해야 한다. 다른 설교는 몰라도 주일공동예배의 설교만은 기독론적인 설교, 즉 케리그마가 선포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수양과 성품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설교와 성서해석학
이 글쓰기가 본격적인 학문적 담론을 펼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또한 일부의 설교만으로 한 목사의 입장을 충분하게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은 이 정도로 접겠다. 다만 위에서 필자가 지적한 문제들이 바로 한 목사의 성서 해석학과 연결된다는 점은 아무래도 한번 짚어야겠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한 목사는 성서 텍스트를 실제로 해석(hermeneutics)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알고 있는 대답을 삶에 적용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일까? 이건 비단 한 목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흡사 얍복강 나루터에서 천사와 씨름하다 탈골상을 입은 야곱처럼 성서 텍스트와 대결해야 할 숙명을 짊어진 우리 모든 설교자들에게 주어진 질문이기도 한다.
한 목사는 “시날 평지에서: 바벨과 오순절 사이”라는 설교에서 그 유명한 바벨탑 사건(창 11:1-9)을 본문으로 선택했다. 그날 한 목사는 알베르트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를 소개하는 것으로부터 설교의 문을 연 다음, 바벨탑 사건의 원인과 비극적인 결말을 전문가다운 식견으로 해명했다.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하늘에 닿아보자는 인간적 욕망이 결국 언어혼란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말이다. 한 목사에 의하면 이런 언어 혼란의 역사는 사도행전에 보도되어 있는 성령강림 사건이후에 회복되었다. 그는 이제 인간의 교만과 자기 집착이 아니라 성령에 의지함으로써 참된 삶의 길을 가야 한다고 외쳤다.
한 목사에 의하면 바벨탑은 “인간의 죄와 탐욕과 교만과 불신앙과 인간적인 방법이 동원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의 수단이 아닌 인간으로부터 올라가는 반역의 탑”이다. 오늘의 바벨탑은 좀 더 구체적으로 “유전공학-게놈프로젝트, 인간복제, 정보통신-인터넷, 우주공항” 등이다. 바벨탑 본문을 이런 정도로 풀어내는 것만 하더라도 성서와 세계를 보는 한 목사의 통찰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한 목사가 사회 윤리학을 전공한 학자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오늘 본문을 다시 들여다보려고 한다.
이 사건을 전승하고 있는 최초의 사람들의 눈에 이 바벨탑은 무엇으로 보였을까? 물론 한 목사의 설명처럼 인간의 죄, 탐욕, 교만의 상징물로 비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주어진 대답에 머물지 말고 성서 텍스트가 놓인 구체적인 ‘삶의 자리’를 좀 더 세밀하게, 열린 눈으로 살펴보자. 바벨탑은 바벨론이라는 제국에서 벌어진 토목공사였다. 성서 기자들이 바벨탑을 거론한 이유는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독점하고 있는 집단이 바로 바벨론 제국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명확하게 보았다는 데에 있다.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성전을 농락한 바벨론 제국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쳤는지는 이미 구약성서가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구약성서를 구성하고 있는 두 기둥인 출애굽과 바벨론 포로귀환에서 볼 때도 역시 바벨탑 전승은 인간 일반의 죄성보다는 구체적인 제국의 악한 질서와 연결된다. 따라서 오늘 바벨탑 사건을 해석해야 할 설교자는 자기 자신을 모든 진리의 준거로 강제하는 제국주의적인 힘의 주체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질문해야 할 것이다. 특히 사회 윤리학자들에게는 이런 예언자적 상상력(영성)이 훨씬 날카로워야 하지 않을는지. 필자는 지금 오늘의 복잡한 국내외의 정치 경제 영역에서 벌어지는 기술공학적 문제, 또는 이념논쟁을 들추어내자는 게 아니다. 설교 시간에 정치 문제를 시시콜콜하게 언급하는 것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성서 해석학이 설교자의 영적 시야에서 바르게 작동하지 않으면 성서 텍스트가 일방적으로 관념화하거나 개인의 종교적 실존에 포박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이었다.
설교자와 시인
성서 텍스트를 중심으로 선포되는 설교 행위에서 확보되어야 할 해석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 마디만 하겠다. 성서 텍스트는 과거에 완료된 것이 아니라 종말을 향해 열린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죽어있는 언어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고유하고 새로운 길을 스스로 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서는 과거 역사에서 발생했던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보도일 뿐만 아니라, 아직 최종적으로 발생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성육신과 부활 사건에서 선취(先取)된 종말론적 생명을 담고 있는 예언이기 때문에, 즉 성서 안에서 과거와 미래가, 창조와 종말이 신비의 방식으로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청중들에게 전달될 때는 당연히 역사적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지금 필자가 너무 현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약간 다른 방식으로 부연해야 할 것 같다. 언어사건에서 인간이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언어가 말한다.”는 하이데거의 진술을 따른다면, 설교자는 자기 생각을 청중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성서를 주관적으로 다루는 게 아니라 성서 언어가 청중들에게 말을 걸 수 있도록 길을 내는 사람이다. 자신의 설교에 청중들이 은혜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설교자들은 자신들의 설교행위가 이미 성서를 해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들이 성서 텍스트의 지평을 뚫고 들어가려는 노력과 그런 경험과 능력이 없는데도, 그래서 결국 설교 언어 세계가 그렇게 진부한데도 불구하고 성서가 해석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설교가 성서해석의 세계에 들어갔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려면 일단 자신의 설교가 시인들의 시작(詩作)처럼 늘 세상과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열어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설교자는 상품 판매에 모든 목표를 설정하고 이미 주어진 매뉴얼만 신바람 나게 외쳐대는 외판원이 아니라 자기의 전 존재를 언어의 세계에 완전히 던지는 시인과 비슷하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는 걸 용서하시라.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으로 무엇을, 어떻게 설교하든지 교회만 부흥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오늘 우리의 강단을 지배하고 있다. 여기서 설교자들은 아주 쉽게 성서의 도구주의에 빠져들기 마련이다. 이런 성서 도구주의를 하루 빨리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설교자는 교회 성장과는 별개로 성서 텍스트의 고유한 영적인 길을 열어가는 한 가지 사실에 자신의 온 영혼을 집중해야만 한다. 그것만이 목사를 설교자로 지탱시켜주는 진정한 의미의 카리스마이며, 배타적인 영성이리라.
이제 오늘의 글쓰기를 마쳐야겠다. 한 목사가 중앙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부임하여 설교하기 시작한 게 2년이 채 안 되었기 때문에 사실 그의 설교를 총체적으로 평가할만한 단계는 아니었다. 그리고 필자가 정확하게 보았다고 자신할 수도 없다. 혹시 잘못 본 부분이 있다면 삼가 해량(海量)을 바란다. 성결교회 100주년이 바로 중앙교회 100주년이라는 명예가 좋은 결실로 맺어지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활천, 2006년 5월호)
눈높이 설교
필자는 이야기 식 강해설교의 묘미를 이번에 중앙교회 한기채 목사님(이하 ‘한 목사’)의 설교에서 만끽할 수 있었다. 그는 청중들에게 기독교의 도그마를 독백처럼 되뇌거나 믿음을 권위적인 태도로 강요하는 게 아니라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듯이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있었다. 형식적으로도 그렇고, 내용적으로도 그렇다. 이런 방식의 설교는 청중의 입장에서도 전통적인 설교와 다른 느낌으로 다가간다. 전통적인 의미의 설교에서는 청중들이 “이제부터 설교 들을 준비를 해야 되는구나.” 하고 긴장하기 마련인데, 한 목사의 설교에서는 청중들이 그런 의식 없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말씀 안으로 끌려들어간다. 필자도 그의 설교를 접하면서 이런 느낌이 자주 들었다. 이게 곧 이야기 식 강해설교의 힘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이야기 식 강해설교를 따라할 수 있을까, 하는 게 요즘 필자의 실존적인 관심사다. 왜냐하면 필자의 두 딸이 필자의 설교를 아주 지루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나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한 목사처럼 다양한 방식의 이야기 식 강해설교를 시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남에게 배워서 약간 흉내를 낼 수는 있겠지만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설교를 하기는 쉽지 않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런 이야기 식 강해설교는 그 무엇보다도 설교자의 천부적 성품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청중에게 완전히 열린 태도를, 청중과 전인격적으로 일치하는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이런 성품은 억지로 배워서 얻어지는 게 아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설교자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난다는 로이드 존스의 말이 옳은지 모르겠다. 한 목사의 설교 행위에서는 이런 요소가 스테인 글라스를 통과한 햇살처럼 아름답게 빛을 내고 있었다.
한 목사 스스로는 자신의 설교를 이야기 식 강해설교가 아니라 ‘귀납법적 강해설교’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예수가 선택한 열두 제자 이야기, 7쪽. 이하 ‘예수’). 이 두 개념은 다른 게 아니다. 이야기 식 강해설교는 기본적으로 청중의 입장에서 복음을 바라보기 때문에 보편(전체)에서 구체(부분)로 나가는 연역적 방식보다는 구체에서 보편으로 나가는 귀납적 방식으로 전개되기 마련이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지 한 목사의 설교는 청중과의 소통에 가장 큰 비중을 둔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설교의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한 목사가 동의할는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이런 특징을 살려서 그의 설교를 ‘눈높이 설교’라고 이름 붙이겠다. 이런 눈높이 설교가 한 목사의 설교 행위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 특징을 일단 형식과 내용으로 나누어 설명하겠다.
시청각 설교
첫째, 그의 설교 형식은 철저하게 시청각적이다. 필자가 중앙교회로부터 건네받은 동영상을 포함한 10편의 설교에서만 보더라도 이런 특징은 매우 분명하다. 대형 프로젝터를 통해서 성서 텍스트의 배경이 되는 그림을 보여주는 일은 흔하며(“시날 평지에서”, “아둘람 굴에서”), 2005년 12월11일에 행한 설교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헨델이 전한 복음”에서는 결론 부분에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의 한 곡을 자막과 함께 직접 들려주기도 했다. 이런 시청각적인 설교는 이미 오랜 전부터 한 목사의 독특한 설교방식이었던 것 같다. 그의 설교집 <예수가 선택한 열 두 제자 이야기>에서도 그런 설교가 종종 눈에 뜨인다. “반석이 된 돌 베드로”라는 설교의 한 대목을 보자.
여기 제가 울퉁불퉁한 바위 하나 가지고 나왔습니다만 잘 보십시오(이 설교는 실물 설교로 준비되었습니다. 울퉁불퉁한 바위와 연장들, 그러니까 망치와 톱, 끌과 자와 정을 미리 강대상에 준비해서 보자기로 덮어놓았다가 설교할 때 보조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무엇에 쓰겠습니까? 반석으로 쓰기엔 너무 위로 튀어나와 다른 돌들과 균형을 잡을 수가 없고, 또 너무 굴곡이 심해서 어디에다 중심을 잡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하여간 망치로 손볼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예수 192).
한 목사는 이 설교에서 새로운 단락에 들어갈 때마다 망치로 바위를 콩콩 찍었다. 그런 장면은 그 자리에 있던 청중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을 것이며, 그 과정을 통해서 설교의 배경이 되는 성서 이야기가 그들에게 실감 있게 다가갔을 것이다.
시청각 설교의 압권은 2005년 5월1일 출 13:17-22(참조 시 30:11,12)절을 본문으로 행한 설교 “광야에서 하나님과 함께 춤을”(Dancing with God in the Wilderness)이었다. 한 목사는 설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2002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신인여우상을 받은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를 청중들에게 보여주었다. 뇌성마비 여자인 공주와 사회 부적응자인 남자 종두가 함께 춤을 추다가 키스하는 것으로 끝나는 1분45초 분량의 장면이 예배당 안에서 상영되었다. 그 뒤로도 한 목사는 이 영화에 대해서 3분 정도 보충해서 설명했다. 그가 설명한 영화의 메시지는 청중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필자는 한 목사가 설교 전달 방식을 거의 혁명적으로 개척해나가는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서 지도와 성화, 종교음악과 영화, 그리고 실물에 이르기 까지 한 목사는 설교에서 시청각적인 요소를 입체적으로 도입하고 있었다. 누가 감히 주일공동예배에서 이런 정도로 파격적인 방식으로 설교할 수 있겠나? 약간 당혹스러워하는 신자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것은 받아들이는 입장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지겠지만, 그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매우 다양한 방식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며, 그런 시도가 결국 청중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추려는 한 목사의 설교신학에 기인한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이런 그의 도발적인 시도가 복음전달의 역동화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길잡이가 되기를 기대한다.
복음의 연성화(軟性化)
둘째, 한 목사의 설교 내용은 복음의 원초성보다는 복음의 문화적 적용에 쏠려 있는 편이다. 이는 곧 그가 구원론과 기독론, 칭의론과 성화론, 또는 창조론과 종말론이라는 복음의 원초적 성격을 직접적으로 선포하기보다는 그것의 문화적 의미를 풀어내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는 말이다. 이것이 곧 복음의 연성화이다. 이 말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의 설교가 기본적으로 복음적이지 않다거나 그의 모든 설교가 문화적인 속성에만 무게를 둔다는 말도 아니다. 다른 목사들에 비해서 한 목사에게 이런 성향이 매우 두드러진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그가 시청각 재료를 눈부시게 활용한다는 사실도 역시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설교에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이런 복음의 연성화도 역시 청중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추겠다는 설교신학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 목사는 2005년 6월5일 “여유 있어 보이는 당신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본문은 이삭이 불레셋 사람들에게 우물을 양보했다는 보도(창 26:12-22)와 오른 뺨을 치는 사람에게 왼뺨도 돌려대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마 5:38-48)이었다. 그는 이 설교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모든 부분에서 좀 여유를 갖고 살아야 한다고 외쳤다. 한 목사가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목회할 때 매 학기마다 빚을 진 상황이었지만 조금도 궁색한 티를 내지 않고 살았다는 예를 들기도 했다. 이 설교는 기독교 신앙이 신자들의 삶과 태도에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주었다.
7월17일 주일에 행한 “내 안의 또 다른 나인 그림자와 친밀해지자”는 제목의 설교는 다윗의 너그러움에 감복해서 회개하는 사울 왕에 대한 보도(삼상 24:16-22)와 자신 안에 또 다른 자아가 괴롭히고 있다는 바울의 고백(롬 7:15-25)을 본문으로 한다. 한 목사는 이 설교에서 칼 융의 정신분석을 끌어들이면서 인간의 내면에 숨어 있는 부끄러운 부분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권면했다.
그림자를 통합하는 방법은 다음에 설명하기로 하고, 우선 그림자와 다각도로 대화를 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그림자에게 말을 걸어 보십시오. 아니면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자신의 그림자에 대해 말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의 그림자에 대해 말씀드리고 그를 더욱 신뢰하므로 그림자를 자신의 인격에 건설적으로 통합하는 노력을 해 보십시오.
한 목사는 이 설교에서 인간의 인격적인 통합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그것의 해결 방법까지 차근히 제시했다. 그는 정신분석과 문학작품을 통해서 인간 자아의 이중성을 아주 정교하게 분석했으며, 또한 통합적인 인격의 필요성을 설득력 있게 역설했다. 문화가 복음의 옷이라는 폴 틸리히의 말을 빌린다면 한 목사의 설교는 복음에 옷을 입히는 작업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런 설교현상들이 바로 필자가 한 목사의 설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복음의 연성화다.
한 편의 설교만 더 보자. 12월11일에 행한 설교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헨델이 전한 복음”은 헨델의 <메시야> 2곡의 텍스트인 이사야 40:4절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를 본문으로 한다. 한 목사는 이 설교에서 음악 전공자 못지않은 발군의 실력으로 헨델의 이 노래에 얽힌 사연과 의미를 해명했다. 이 곡에는 바로크적인 ‘가사 그리기’(word painting) 기법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가사와 음악이 긴밀하게 융합되어 있다는 뜻이다. 한 목사에 따르면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골짜기처럼 패이거나 높은 산과 언덕처럼 높아진 것을 편편하게 다듬어 주시는 분이다. 설교 후반부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예수님을 우리 삶의 중심부에 모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심과 의기소침의 골짜기를 믿음으로 돋우어야 합니다. 그리고 분노와 괴로움의 산들은 용서와 사랑으로 깎아 내려 낮아지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삐뚤어진 생각들과 거친 감정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평탄케 만들어야 합니다. 죄의 돌, 불순종의 바위, 우상숭배의 산, 불신앙의 골짜기들이 다 정지되어 예수님께 가는 길에 거침이 없어야 합니다.
비뚤어진 생각과 거친 감정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평탄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은 결국 한 목사가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데서도 우리는 복음이 상당히 부드럽게 해석되고 전달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위에서 필자가 인용한 한 목사의 설교 세편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6월5일의 설교는 기독교인의 여유 있는 삶의 태도를, 7월17일의 설교는 기독교인의 내면에 숨어 있는 어두운 그림자가 통합된 인격으로 승화되는 길을, 그리고 12월11일의 설교도 역시 훼손된 인격의 도야를 강조하고 있었다. 다른 설교도 역시 큰 틀에서는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곧 한 목사가 신자들의 영적인 상처를 심리학적으로 싸매며, 신자들의 인격을 문화적으로 승화하는 것을 설교의 중심축으로 삼고 있다는 의미이다. 지나치게 복음의 원초적 내용에 치우침으로써 신앙의 열정은 강화할 수 있었지만 성숙한 인격은 견인해내지 못했던 과거의 전통적 설교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 목사는 문화적인 방식으로 복음의 연성화를 시도하고 있는 중이다.
지난 100년 성결교회의 역사에서 제4 세대(?)에 속하는 한 목사가 이제 감성과 문화가 화두로 대두되는 21세기를 항해해야 할 설교자로서 복음의 연성화를 시도한다는 것에 대해서 필자는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다. 이런 시도가 혹시나 기독교 복음의 근본을 취약하게 만드는 결과를 빚으면 어쩌나, 하는 염려이다. 그렇지만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에 충실한 한 목사의 설교에 대해 그런 염려를 한다는 건 순전히 필자의 노파심에 불과할 것이다.
설교와 윤리학
이런 염려는 붙들어 매놓고, 대신 필자는 한 목사가 한국의 기독교 윤리학계를 대표하는 소장파 신학자라는 점을 감안해서 그의 설교에 윤리학적인 특징이 얼마나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지를 잠시 살펴볼 생각이다. 물론 기독교 윤리학을 전공했다 하더라도 설교단에 올라선 사람이라고 한다면 윤리학을 강의하는 게 아니라 복음을 선포해야 하지만, 우리가 그의 설교에서 풍성한 윤리학적 영성을 경험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설교에 대해서도 질문할 수 있다는 게 한 목사의 지론이니까(예수 101) 필자는 편안한 마음으로 이렇게 질문하려고 한다. 한 목사의 설교에 윤리학은 살아있는가? 솔직히 말해서 이 질문에는 복음의 연성화에 대한 필자의 노파심이 조금 담겨 있다.
한 목사는 “여유 있어 보이는 당신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는 설교에서 예수님을 “참 여유로운 분”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소위 오병이어 사건에서 5천명이 먹고 12광주리가 남았다는 사실을 들어서 여유 운운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이건 매우 한가한 발상이다.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보도하고 있는 성서 텍스트가 그의 설교에서 단지 여유로운 삶의 차원으로 축소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이 대목은 그의 설교에서 크게 다루어진 게 아니니까 그렇다 치고, 그가 윤리와 신앙의 변증법적 관계에서 매우 진지하게 해석되어야 할 산상수훈을 여유로운 삶의 태도로 너무나 간단명료하게 풀어냈다는 건 의외였다. 한 목사는 그 설교에서 세 가지의 여유를 역설했다. 오른뺨을 치는 이에게 왼뺨을 돌려대라는 말씀은 마음의 여유를 뜻하며, 속옷을 달라는 이에게 겉옷까지 주라는 말씀은 물질적인 여유를 의미하고, 오리를 함께 가자는 이에게 십리를 가주라는 말씀은 시간의 여유를 가리킨다고 한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이런 설명 자체는 크게 문제가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실제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신앙을 통해서 여유를 보이며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나. 그러나 필자는 인간의 삶이라는 게 늘 이런 일반론의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지울 길이 없다. 신앙이 아무리 돈독하더라도, 한 목사의 주장처럼 아무리 마음의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오른뺨을 치는 사람에게 왼뺨을 대줄 수는 없다. 이런 일은 필자도 못하고, 한 목사도 못하고,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못한다. 그러나 왼뺨을 대라는, 그래서 친구만이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아포리즘은 진리이다. 윤리학자는 바로 이 딜레마를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아니 윤리학자 이전에 설교자는 늘 이런 서로 다른 현실, 즉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과 오늘 우리가 구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 사이에서, 또한 텍스트의 현실과 콘텍스트의 현실 사이에서 치열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중층적이어서 현묘(玄妙)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인간 삶의 신비를 세밀하게 들여다보지 않고 쏟아내는 설교는 일종의 ‘공자왈’로 떨어지고 만다. 좀 심하게 말해서 한 목사의 설교에서는 윤리학자의 날카로운 시각을 찾아볼 수 없고, 그저 두루뭉술한 당위성만 ‘나이브’하게 외쳐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필자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그래도 그런 설교가 청중들에게 은혜가 되는 것 아닌가, 하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면, 한 목사의 윤리적 시각이 나이브하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그의 따뜻한 성품과 맞물려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스도인이 모범적으로 살아야 하며,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한다는 생각이 선천적으로 강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윤리의 일반론으로, 혹은 규범론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한 목사는 자신이 기독교 윤리학자라는 사실을 마음에 담고 설교하는 사람이다. 목사들을 대상으로 윤리학을 강의하는 본인이 실제로 윤리적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늘 의식한다는 말이다. 그는 윤리의식과 자기성찰이 결벽증처럼 강한 사람이다. 배우는 학생으로 있던 25년 동안 한 번도 결석이나 지각을 하지 않을 정도로(제자 118) 모범적으로 살아온 사람답게 그는 ‘어떻게’ 사는가를 설교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한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위대함이 아니라 섬김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됨의 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섬김의 가치라는 사실을 일러주십니다. “무엇이 되느냐”보다는 “어떻게 살겠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지요.(제자 62).
이렇게 섬김의 윤리를 강조하는 한 목사는 끊임없이 기질을 바꾸거나(제자 107), 인격을 도야하거나 성품을 가꾸어나가는 것(“바나바의 사역”, 2004년 5월7일)을 신앙생활의 요체로 생각하는 것 같다.
필자는 한 목사의 이런 섬김의 윤리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것이 일반론으로 떨어지는 경우에 과연 설교로서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이 말은 곧 우리가 일반적인 의미에서 착하게 살기 위해서, 그리고 인격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 혹은 마음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솔라 피데’(sola Fide)라는 종교개혁자의 신학적 착상에 기대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특히 행위에 중심을 둔 율법이 아니라 존재에 중심을 둔 복음에 신앙의 토대를 놓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윤리 문제도 역시 존재론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바울도 역시 율법적인 성취와 도덕적인 성취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론적으로 새로워지는 피조물이 곧 그리스도인의 실존이라고 생각했다. 설교자들은 여기서 우리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초점을 맞추어서 설교해야 한다. 다른 설교는 몰라도 주일공동예배의 설교만은 기독론적인 설교, 즉 케리그마가 선포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수양과 성품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설교와 성서해석학
이 글쓰기가 본격적인 학문적 담론을 펼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또한 일부의 설교만으로 한 목사의 입장을 충분하게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은 이 정도로 접겠다. 다만 위에서 필자가 지적한 문제들이 바로 한 목사의 성서 해석학과 연결된다는 점은 아무래도 한번 짚어야겠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한 목사는 성서 텍스트를 실제로 해석(hermeneutics)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알고 있는 대답을 삶에 적용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일까? 이건 비단 한 목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흡사 얍복강 나루터에서 천사와 씨름하다 탈골상을 입은 야곱처럼 성서 텍스트와 대결해야 할 숙명을 짊어진 우리 모든 설교자들에게 주어진 질문이기도 한다.
한 목사는 “시날 평지에서: 바벨과 오순절 사이”라는 설교에서 그 유명한 바벨탑 사건(창 11:1-9)을 본문으로 선택했다. 그날 한 목사는 알베르트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를 소개하는 것으로부터 설교의 문을 연 다음, 바벨탑 사건의 원인과 비극적인 결말을 전문가다운 식견으로 해명했다.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하늘에 닿아보자는 인간적 욕망이 결국 언어혼란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말이다. 한 목사에 의하면 이런 언어 혼란의 역사는 사도행전에 보도되어 있는 성령강림 사건이후에 회복되었다. 그는 이제 인간의 교만과 자기 집착이 아니라 성령에 의지함으로써 참된 삶의 길을 가야 한다고 외쳤다.
한 목사에 의하면 바벨탑은 “인간의 죄와 탐욕과 교만과 불신앙과 인간적인 방법이 동원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의 수단이 아닌 인간으로부터 올라가는 반역의 탑”이다. 오늘의 바벨탑은 좀 더 구체적으로 “유전공학-게놈프로젝트, 인간복제, 정보통신-인터넷, 우주공항” 등이다. 바벨탑 본문을 이런 정도로 풀어내는 것만 하더라도 성서와 세계를 보는 한 목사의 통찰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한 목사가 사회 윤리학을 전공한 학자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오늘 본문을 다시 들여다보려고 한다.
이 사건을 전승하고 있는 최초의 사람들의 눈에 이 바벨탑은 무엇으로 보였을까? 물론 한 목사의 설명처럼 인간의 죄, 탐욕, 교만의 상징물로 비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주어진 대답에 머물지 말고 성서 텍스트가 놓인 구체적인 ‘삶의 자리’를 좀 더 세밀하게, 열린 눈으로 살펴보자. 바벨탑은 바벨론이라는 제국에서 벌어진 토목공사였다. 성서 기자들이 바벨탑을 거론한 이유는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독점하고 있는 집단이 바로 바벨론 제국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명확하게 보았다는 데에 있다.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성전을 농락한 바벨론 제국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쳤는지는 이미 구약성서가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구약성서를 구성하고 있는 두 기둥인 출애굽과 바벨론 포로귀환에서 볼 때도 역시 바벨탑 전승은 인간 일반의 죄성보다는 구체적인 제국의 악한 질서와 연결된다. 따라서 오늘 바벨탑 사건을 해석해야 할 설교자는 자기 자신을 모든 진리의 준거로 강제하는 제국주의적인 힘의 주체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질문해야 할 것이다. 특히 사회 윤리학자들에게는 이런 예언자적 상상력(영성)이 훨씬 날카로워야 하지 않을는지. 필자는 지금 오늘의 복잡한 국내외의 정치 경제 영역에서 벌어지는 기술공학적 문제, 또는 이념논쟁을 들추어내자는 게 아니다. 설교 시간에 정치 문제를 시시콜콜하게 언급하는 것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성서 해석학이 설교자의 영적 시야에서 바르게 작동하지 않으면 성서 텍스트가 일방적으로 관념화하거나 개인의 종교적 실존에 포박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이었다.
설교자와 시인
성서 텍스트를 중심으로 선포되는 설교 행위에서 확보되어야 할 해석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 마디만 하겠다. 성서 텍스트는 과거에 완료된 것이 아니라 종말을 향해 열린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죽어있는 언어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고유하고 새로운 길을 스스로 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서는 과거 역사에서 발생했던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보도일 뿐만 아니라, 아직 최종적으로 발생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성육신과 부활 사건에서 선취(先取)된 종말론적 생명을 담고 있는 예언이기 때문에, 즉 성서 안에서 과거와 미래가, 창조와 종말이 신비의 방식으로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청중들에게 전달될 때는 당연히 역사적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지금 필자가 너무 현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약간 다른 방식으로 부연해야 할 것 같다. 언어사건에서 인간이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언어가 말한다.”는 하이데거의 진술을 따른다면, 설교자는 자기 생각을 청중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성서를 주관적으로 다루는 게 아니라 성서 언어가 청중들에게 말을 걸 수 있도록 길을 내는 사람이다. 자신의 설교에 청중들이 은혜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설교자들은 자신들의 설교행위가 이미 성서를 해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들이 성서 텍스트의 지평을 뚫고 들어가려는 노력과 그런 경험과 능력이 없는데도, 그래서 결국 설교 언어 세계가 그렇게 진부한데도 불구하고 성서가 해석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설교가 성서해석의 세계에 들어갔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려면 일단 자신의 설교가 시인들의 시작(詩作)처럼 늘 세상과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열어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설교자는 상품 판매에 모든 목표를 설정하고 이미 주어진 매뉴얼만 신바람 나게 외쳐대는 외판원이 아니라 자기의 전 존재를 언어의 세계에 완전히 던지는 시인과 비슷하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는 걸 용서하시라.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으로 무엇을, 어떻게 설교하든지 교회만 부흥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오늘 우리의 강단을 지배하고 있다. 여기서 설교자들은 아주 쉽게 성서의 도구주의에 빠져들기 마련이다. 이런 성서 도구주의를 하루 빨리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설교자는 교회 성장과는 별개로 성서 텍스트의 고유한 영적인 길을 열어가는 한 가지 사실에 자신의 온 영혼을 집중해야만 한다. 그것만이 목사를 설교자로 지탱시켜주는 진정한 의미의 카리스마이며, 배타적인 영성이리라.
이제 오늘의 글쓰기를 마쳐야겠다. 한 목사가 중앙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부임하여 설교하기 시작한 게 2년이 채 안 되었기 때문에 사실 그의 설교를 총체적으로 평가할만한 단계는 아니었다. 그리고 필자가 정확하게 보았다고 자신할 수도 없다. 혹시 잘못 본 부분이 있다면 삼가 해량(海量)을 바란다. 성결교회 100주년이 바로 중앙교회 100주년이라는 명예가 좋은 결실로 맺어지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활천, 2006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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