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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완성

갈라디아 길희성............... 조회 수 1716 추천 수 0 2009.04.30 17: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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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갈5:13-14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2008.03.09 새길교회 주일설교 


여러분은 종교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매 주일 모이며, 무엇 때문에 한국교회가 그 많은 물질과 정성, 노력과 시간을 종교에 바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엇 때문에 엄청난 문화재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만들어졌으며, 무엇 때문에 수많은 전쟁이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지, 또 무엇 때문에 수도자들은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며 피나는 수행에 정진하는지, 종교라는 것이 정말 인간의 삶에 필요한 것인지 평생 종교를 공부해온 사람이지만 종종 자문해보곤 합니다. 종교의 참 목적, 참 정신은 무엇일까요?

  저는 종교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자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교나 불교와 같은 고등종교를 두고 보면 그렇습니다. 무슨 자유입니까? 종교만이 줄 수 있는 자유는 세상으로부터의 자유, 세상의 질서와 가치를 초월하는 초월적 영성에서 오는 자유입니다. 이 초월적 영성이 없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를 세상의 종살이, 세속의 가치관과 욕망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졌다면서 이러한 초월의 자유와 기쁨을 모른다면 신앙생활을 헛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세상 근심걱정에 얽매여 살고, 세상살이에 아등바등한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종교와 신앙이 필요하겠습니까?

  신앙은 세속적 욕망을 더 잘 채우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과 세상을 과감히 부정하고 초월하고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졌다면서 조금이라도 세속적 가치에 초연하지 못하고 세상살이에 종이 되어 산다면, 누가 그런 사람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 하겠습니까? 초월적 영성에서 오는 자유와 여유를 모르는 사람은 결코 참다운 신앙인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적 욕망, 세속적 욕망에만 국한 된 말이 아닙니다. 신앙인들이 제아무리 하느님의 이름으로 옳은 일을 한다 해도, 제아무리 사회정의를 위해 헌신하고 투쟁한다 해도, 초월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을 모르고 독선적이 되어서 자기가 하나님 노릇하려 한다면, 이 역시 초월의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것입니다. 정의를 위해 투쟁한다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은 없고 분노만 가득 차 있다면, 그런 사람은 결코 신앙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위한 공간을 남겨두지 않기 때문이며, 그런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설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을 향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봐. 나도 있어, 나는 안 보여?”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초월적 영성에서 오는 자유와 여유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싸운다 해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위해 투쟁하기 쉽습니다. 자신을 절대화하고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 들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의 특권, 그리스도인의 자랑이 현실의 노예나 얄팍한 현실주의자가 되지 않고 하나님나라의 시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미 하늘에 속한 백성, 하나님의 자녀임을 깊이 자각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질서나 가치에 노예가 되지 말고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기준에 따라 사는 초월적 삶,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야 말로 신앙인의 특권과 기쁨인 것입니다.

제가 기독교 이외의 종교 가운데서 특히 불교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불교의 초세간성, 그 초월적 영성에 있습니다, 속세를 부정하고 초월하는 데서 오는 자유와 청정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종교 지도자들이라는 사람을 만날 때, 가끔 실망하는 것은 그들의 얼굴과 행동에 세속의 때, 탐욕과 집착의 때가 진득진득 묻어나는 것을 볼 때입니다. 그야말로 구역질이 날 정도로 때 묻은 종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그러면 이해가 가지만 목사, 신부, 스님, 수도자들이 그럴 때 우리는 종교에 대해 깊은 실망감과 회의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초월적 영성, 초세간적 성격이 강한 불교나 그리스도교 같은 종교는 종종 세상사를 멀리하고 피한다는 '도피주의'의 유혹에 빠지기 쉽고, 세상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외면한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하지만 저는 종교가 설령 ‘현실도피’라 해도, 종교를 세속적 욕망을 충족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오히려 이러한 순수한 세계부정, 순수한 도피주의적 영성조차 우리나라 종교계에서 찾아보기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계, 한국 종교계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세상은 악하고 세상 영광은 다 허망한 것이니 세상을 멀리하라는 도피주의가 아니라, 정작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말끝마다 죄악세상을 들먹이고 세상 유혹과 육신의 정욕을 멀리 하라 하지만, 정작 교회와 지도자들의 행태는 그 반대입니다. 일반 사람들보다도 더 속되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물론 비단 오늘의 일만은 아닙니다. 서양의 중세 수도원들이 부패하여 부와 권력을 탐했고, 불교 사원들이 신라, 고려 시대 거대한 토지와 수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귀족생활을 하다가 조선조에 들어와서 된서리를 맞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물욕, 권력욕, 명예욕 앞에서는 우리 사회와 종교계의 이른바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다 똑 같은 것 같습니다. 신앙의 순수성을 가장 많이 외치고 고집하는 보수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일수록 권력을 탐하는 것을 보게 되며, 사회정의를 위해 싸우고 인권 운동, 민주화 운동, 시민운동 한다고 앞장섰던 사람도 권력을 탐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 다 그 놈이 그 놈이라는 소리를 듣는가 봅니다. 무슨 좋은 일, 무슨 사회운동 같은 것을 한다고 나서는 사람이라도, 저 자가 또 무얼 바라고 저렇게 설치는지, 저 교수가 본업인 공부는 안 하고 무얼 하려고 저렇게 텔레비전에 열심히 얼굴을 내밀고 신문에 열심히 칼럼을 쓰는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모두가 순수성이 의심 받은 지 이미 오랩니다. 최근 청문회에서 곤욕을 치루는 장관 후보자들을 보면서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드셨을 겁니다, 저렇게까지 망신을 당하면서도 장관을 꼭 해야 하는지 보통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의 최상류층 가운데서 깨끗한 양심으로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심이 되기도 합니다.

  여하튼 우리나라의 종교계는 혼탁한 세상을 정화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 같습니다. 정화는커녕 세속과 한통속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한국종교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한 번도 철저한 중세적 세계부정의 정신을 배우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한 번도 세속을 멀리하는 순수한 초월적 영성의 세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현실도피가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 매몰될 현실주의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기복신앙, 무속적 한풀이 신앙이 종교의 이름으로 판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초세간성을 본령으로 삼는 불교가 초월적 영성을 가르쳤어야 했지만 실패했고, 기독교도 하나님나라의 초월적 질서를 심는데 실패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속을 부정하는 초월적 영성과 사후의 영생과 복락을 바라는 내세신앙을 혼동합니다. 내세신앙은 진정한 초월적 영성이 아닙니다. 내세를 단지 현세의 연장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세의 욕망을 내세에서도 충족시키고 영원히 누리려는 더 큰 현세적 욕망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내세에서도 현세의 행복을 구하는 내세신앙이야말로 기복신앙의 토대입니다.

  우리 사회에 종교가 그렇게 번창하고, 기독교 신자 불교 신자가 그렇게 많은데도, 사회가 변하지 않고 혼탁한 이유는 신앙인들의 정신, 인생관, 가치관, 인격 같은 것이 별로 변하지 않고 세상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차라리 현실도피라는 비판을 받을지언정 우리나라의 기독교, 불교가 순수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로 세속을 멀리하는 순수한 초세간성을 추구하는 종교가 되었으면 합니다. 대처승보다 비구승이, 목사님들보다 신부님들이 더 영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 시가지를 활보하며 다니는 승복 입은 사람들보다 토굴이나 독방에서 두문불출 치열하게 자기와 싸우면서 도를 닦고 있는 수행자들과 구도자들이 더 존경스럽게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한국종교의 최대 문제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세상의 종살이를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성직자, 평신도,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모두가 함께 세속의 똥통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지나친 말일까요?

세상의 종노릇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 종교, 특히 기독교가 종교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자유를 주기는커녕 사람들을 종교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이중의 종살이를 하고 있는 셈이지요.

  진정한 종교는 세상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줄 뿐 아니라, 종교의 속박으로부터도 자유를 줍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사람들을 교회에 묶어 둡니다. 신자들로 하여금 종교를 위해, 교회를 위해 살도록 만듭니다. 하나님나라 대신 교회를 섬기고 교회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교회생활이 곧 신앙생활이고, 교회생활 잘하는 것이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생활은 열심히 하지만 세상에서는 일반인들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성도이지만 일단 교회 밖으로 나가면 세상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이 생활합니다. 그래서 고 장공 김재준 박사는 한국 기독교인들은 신앙생활보다는 생활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생활신앙보다 중요한 것은 세속을 거부하고 멀리하는 초월적 영성과 자유입니다. 이것이 일차적입니다. 이런 순수성 없이는 아무리 우리가 생활신앙으로 세상 속에 뛰어든다 해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사회참여를 열심히 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처럼 세속에 빠져 함께 허우적거릴 뿐입니다.

  종교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될 때 가장 타락합니다. 가장 위험합니다. 종교라는 우상숭배는 세속적 우상숭배보다도 더 위험합니다. 그것이 우상숭배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위해 하는 일, 신앙을 위해 하는 일, 목사님의 말이면 무조건 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종교를 우상화하기보다는 차라리 종교가 없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세상은 가난한데 교회는 살이 찌고, 세상은 고통 속에 있는데 교회는 비대해지고 사치와 영화를 누린다면, 종교가 무슨 의미, 무슨 존재이유가 있겠습니까? 힘없는 자들의 고통은 날로 더해 가지만 교회의 권력, 성직자들의 권력은 높아만 갑니다. 권위주의와 교권으로 신자들 위에 군림하며 낡은 교리와 사고로 사람들의 상식과 지성을 억압합니다.

  종교는 자칫하면 초월적 자유는 고사하고, 건전한 이성의 비판능력마저 마비시키고 사람들을 맹종적, 맹목적 신앙인들로 만듭니다. 하나님을 믿는 대신 종교를 믿게 만들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 교회를 사랑하게 만들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대신 성직자들에 대한 복종을 가르칩니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야 할 종교가 인간을 도리어 비인간화 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비판능력을 마비시키고 창의성을 박탈하는 것이지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종교가 그래도 스스로 자신의 병폐를 의식하고 스스로를 고발하고 정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매우 소수이고 극히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종교는 가끔 진정한 하느님 신앙으로, 진정한 초월적 가치와 자유로써 종교의 세속화와 우상화를 고발하고 개혁의 불을 지르기도 합니다. 종교의 종교 비판, 생각만 해도 후련하고 통쾌한 것입니다. 세상이 종교를 비판할 때는 종교는 꿈적도 하지 않지만,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종교가 종교를 비판할 때는 제법 큰 힘을 발휘합니다. 종교의 자기비판은 인류역사의 가장 위대한 성취이며 정신적 유산입니다.

  최근 MBC 텔레비전에서 기독교계의 타락한 모습과 비리를 고발하는 프로그램을 많이 방영해서 세간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고 계시리가 믿습니다. 기독교의 타락상, 아는 사람은 이미 다 아는 일이기에 별로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일반 사람들에게, 그리고 맹종적이고 맹목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약간의 충격을 주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 교회가 변하겠습니까? 세상이 종교를 비판하면, 신앙인들은 '종교탄압'이라고 아우성칩니다. 핍박이라고 맞대응합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더 똘똘 뭉치지요. 그러기 때문에, 더 바람직스러운 것은, 종교의 자기비판이고 자기정화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교회를 비판할 때, 교회는 할 말을 잃게 됩니다. 회개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 잘못을 인정하게는 되기 때문입니다.

  종교계가 세속의 언론에 의해 고발당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믿는 신앙의 형제들이 자기들의 분쟁을 세속의 법정까지 끌고 가지 말라고 했는데, 한국 교회는 그런 치욕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종교가 세속의 법정에 서지 않으려면 종교 스스로 자신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능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제일 좋은 일입니다.

  종교에 의한 종교 비판은 성서와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위대한 정신적 유산 가운데 하나입니다. 개신교는 문자 그대로 ‘protestant', 즉 '항의하고 저항하는'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세속적 이성이나 도덕적 잣대로 항의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신앙의 이름으로 잘못된 신앙을 비판하고 항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에 의한 종교 비판, 신앙에 의한 신앙 비판의 전통을 시작한 사람은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에 의한 종교 비판을 '예언자적 정신'(prophetic spirit)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예언자적 정신을 이어받아서, 당시 이스라엘 종교계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특히 인간을 얽어매고 죽이는 율법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가장 신랄한 종교비판이 담겨 있습니다. '안식일'이라는 단어는 이스라엘의 종교와 율법과 전통과 제도를 대표하는 말이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그것은 단지 안식일 하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당시 유대교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잘못된 태도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에는 율법주의에 빠진 당시의 유대교, 나아가서 모든 종교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고. 더 나아가서는 모든 인간의 이념과 사상, 제도와 관습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비판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종교비판에도 불구하고 종교, 예수의 이름으로 창시된 기독교는 그 후도 여전히 인간을 지배하고 군림하고 억압하는 기제로 지속되다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종교의 지배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기독교는 아직도 계몽주의 이전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종교로부터 해방시킨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계몽주의 이후의 세속적 합리주의와 휴머니즘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세속적 휴머니즘에는 예수님의 종교비판의 정신, 해방적 메시지가 숨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예수님의 종교비판의 정신, 율법주의 비판의 정신은 사도 바울에 의해 계승되고, 루터와 칼뱅 등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계속되면서 서양사회를 중세적 종교의 질곡에서 해방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18세기 이후 계몽주의 사상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지금 이슬람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서양의 종교개혁이나 계몽주의 사상 같은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생활 전체를 지배하는 중세적 이슬람 율법 - 유대교 율법의 성격과 매우 유사한 - 과 세속화된 사회의 성숙한 윤리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갈라디아서의 저자 사도 바울에게도 예수님의 예언자적 정신은 이어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이전의 신앙생활이 180도 전환되게 되었습니다. 그의 회심은 그의 종교관, 신앙관, 하느님을 이해하는 신관 자체의 일대 전환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율법의 하나님이 아니라 은총의 하나님, 인간을 율법과 제도의 종살이 시키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한 없이 자유롭게 하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사람을 추궁하고 정죄하는 엄격한 가부장적 하나님이 아니라 조건 없이 용서하고 한 없이 품어주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의 신앙생활은 그로부터 율법의 종교,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를 성취하고 보여주고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신앙이 아니라, 그런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는 은총의 신앙, 자유인의 신앙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의 표현대로, ‘종’이나 노예의 신앙이 아니라 ‘아들’의 신앙과 자유를 발견했습니다. 한없이 자비로운 ‘아빠’ 하느님 앞에서 한없이 귀여운 딸과 아들들이 무엇을 내세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의 신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은총의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가 신앙생활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자유는 자유를 위한 자유가 아니었습니다. 자유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봉독한 갈라디아 5장의 말씀은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자유는 새로운 헌신으로,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삶 -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는 삶 - 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유가 사랑으로 이어지고 완성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다”고 바울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이나 그리스어 본문에는 ‘fulfill' 즉 꽉 채운다. 완성한다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은 많이 부족하고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번역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는 것에 의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자신의 가르침을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곧 율법의 참된 정신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사랑의 실천이라고 예수님을 말씀하십니다.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너의 이웃을 너의 몸처럼 사랑하는데 있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율법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나쁜 것을 하나님께서 왜 주셨겠습니까? 율법이 나쁜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가 나쁜 것입니다. 종교가 나쁜 것이 아니라 종교의 우상화가 나쁜 것입니다. 율법이 사람을 살리는데 사용되지 않고 사람을 옭아매고 죽이는 데 악용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 새로운 율법, 사랑의 율법을 그리스도의 율법(갈 6:2)이라고 표현합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는 사랑의 윤리가 새로운 율법이며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율법의 노예, 종교의 노예가 되는 삶이 아니라 은총의 자유를 누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의 삶이지만, 이 자유는 새로운 율법, 즉 사랑의 율법에 의해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율법은 매우 성숙한 윤리입니다. 종의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의 윤리입니다. 그것은 강제적 헌신이 아니라 자유에 입각한 자발적 헌신, 율법에 의해 강제된 율법이 아니라 사랑의 자발적 윤리, 의무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거저 받은 은총에 대한 감사에서 오는 사랑의 봉사와 헌신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대체하자면, 아빠 하나님, 은총과 사랑의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써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걱정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에 앞장서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에 비추어 창립 21돌을 맞는 오늘의 새길 교회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방종으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삶을 살라는 갈라디아 교회에 하신 바울 사도의 권면을 들으면서 새길의 오늘을 생각합니다. 자유는 그 자체를 탐닉하면 결국 방종이 되고 맙니다. 공허한 자유는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고 매우 위험합니다. 마치 일곱 귀신에 들렸던 사람이 귀신이 나갔다가 빈집으로 되돌아와서 더 큰 행패를 부리게 된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이 율법주의의 귀신이 빠져나간 후 새로운 사랑의 율법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이전보다도 더 큰 재앙을 초래할지도 모릅니다. 자유를 얻은 후에는 반드시 새로운 율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말씀하시기를,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고 경고와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길교회는 자유의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율법주의에 매인 교회는 아닙니다. 화석화된 교회 전통이나 교리를 맹종하는 교회도 아닙니다. 성 차별하는 가부장적 남성주의 교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공연히 권위를 부리는 사람이나 권력을 행사하려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각종 행사로 교인들을 일주일 내내 교회에 묶어두는 교회도 아니지요.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봉사에 참여하는 교회입니다. 헌금을 강요합니까, 교리 공부나 성경 공부를 요구합니까? 율법주의, 교조주의, 권위주의, 성 차별주의, 이 모든 것이 새길교회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자유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자유가 너무 많아 탈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유를 어디에다 사용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지나 않는지, 자유에서 오는 남는 에너지를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새로운 율법, 그리스도의 율법,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일은 하지 못하고, 아직도 억압에서 풀려난 자유만을 만끽하거나 기존 교회를 비판하는 일만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freedom-from)는 얻었지만 무엇을 위한 자유(freedom-for)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됩니다. 힘과 능력은 있는데, 이 능력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는 일에는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자유를 얻는 데서는 성공했지만 새로운 사랑의 헌신에서는 실패한 교회, 혹은 무력한 교회는 아닌지요? 한국교회의 율법주의, 권위주의, 형식주의적 신앙은 곧 잘 비판하지만 그들만큼 신앙의 열성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일반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열성과 헌신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율법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듯, 교인들의 훈련과 교회 생활의 질서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닙니다. 열심과 노력과 시간과 물질이 엉뚱한 데로 잘못 사용되는 것이 문제이고, 훈련과 질서가 교회생활 자체를 위한 것이 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제 새길교회는 다른 교회에 대한 비판은 그만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춘기적 반항은 나이 21살이 된 새길교회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습니다. 자유를 위한 자유, 공허한 자유의 방황은 더 이상 안 됩니다. 자유가 또 하나의 율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자유가 더 뜨거운 헌신과 더 풍성한 사랑의 열매를 맺을 때에만, 우리는 다른 교회들을 비판할 자격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의 의가 바리사이사람들보다 너 낫지 않으면 결단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의 헌신과 사랑이 율법주의에 매여 있다는 다른 교회들의 열성과 헌신보다 못하다면 예수님의 질책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교회를 흔히 ‘삼무교회’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저는 솔직히 여태껏 새길교회가 목사 없고, 교회당 없고, 교단 없는 삼무교회라는 사실을 한 번도 자랑으로 여긴 적이 없습니다. 교단이 필요하면 교단에 가입해야 하고, 목사가 필요하면 목사를 모셔야 하고, 교회 건물이 필요하면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유능한 목사 한 분을 모실 수 없을 정도로 재정이 열악하다면, 또 교회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 없을 정도로 교인들의 열성이 부족하다면, 삼무는 자랑이 아니라 수치가 됩니다.

  어느 집 없는 가난한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가다가 남의 집이 불타는 것을 보고, 얘야, 우리는 집에 불이 날 염려가 없으니 좋지 않냐 하고 아들을 위로했다는 우수개 소리가 있습니다. 할 수 있는 데도 필요가 없어서 안 하는 것 하고, 필요한데도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 하고는 천지차이지요. 21년을 지난 오늘 저는 솔직히 우리 교회가 후자에 속하지나 않는지 염려와 두려움, 그리고 실망감이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를 시작했던 사람 중 한 사람으로 자책감과 자괴감도 듭니다. 저 자신부터 본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이제는 더 이상 ‘삼무’라는 말처럼 무엇이 없다는 것이 새길의 정체성이 되어서는 안 되겠고, 무엇이 있는 것으로 우리의 정체성이 형성되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부정적, 소극적 정체성이 아니라 긍정적, 적극적 정체성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주일 하루 모여서 예배만 드리고 마는 교회가 아니라, 사랑과 봉사를 위한 뜨거운 헌신과 열정이 넘치는 교회, 교우들 각자의 재능과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참다운 그리스도의 정신을 이 땅 위에 실천하여 풍성한 사랑의 결실을 맺는 일하는 공동체, 움직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유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이 필요합니다. 은총의 자유에 사랑의 율법을 더할 때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건물이 필요하면 건물을 지어야 하고, 십일조가 아니라 십이조, 십삼조도 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몇 년 가도 헌금 이야기 한번 안 하고 지나갑니다. 자랑이라면 자랑이지만, 그것이 나태와 사랑과 헌신의 부족으로 이어지다면 심각하게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헌금은 우리 신앙의 가장 직접적이고 정직한 표현입니다. 헌금은 경제생활이 어느 정도는 부담이 될 정도가 되어야 신앙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자기희생이 될 정도가 되어야 헌금이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과부의 동전 두 닢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가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마가 12:41-44). 일반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신도들 가운데 누가 얼마나 헌금을 하는지 다 알고 있지요. 다 지켜본다는 말이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교회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지켜보신다는 생각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 한다면서, 자유롭고 성숙한 신앙생활을 한다면서, 쓰다 남은 몇 푼 정도 헌금이라고 내거나 취미생활 정도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바친다면,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지 말라는 바울 사도의 경고는 바로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우롱하는 일이며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지요. 둘 다 불가능합니다.

 스물한 번 째 생일을 맞는 새길 교회, 자축해야 할까요? 아니면 반성해야 할까요? 둘 다이겠지요. 종교와 율법주의로부터 자유로운 교회가 된 것은 자축해야 할 일이지만, 사랑의 종노릇 하는 일에서는 크게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게으름이 자유의 방종에서 온 것이라면,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았기 때문이라면, 우리 모두가 더욱더 뼈아프게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아니, 우리의 게으름과 방종이 세상으로부터의 자유도 제대로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면 더욱 마음 아픈 일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세상 재미에 빠지고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 사랑의 헌신이 모자랐다면, 창립 21주년을 맞는 새길교회는 더욱 심각하게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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