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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두 기둥, 교회력과 해석학-박종화 목사

설교자료 정용섭............... 조회 수 3792 추천 수 0 2009.05.02 19:2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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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설교비평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8919 
설교의 두 기둥, 교회력과 해석학  -경동교회 박종화 목사-

예전과 예배
언제부터인가 전통적 예배의 엄숙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국교회에 도입되기 시작한 소위 ‘열린 예배’의 특징은 청중의 참여도를 극대화한다는 데에 있다. 예배 인도자의 평상복 착용과 애드 립, 감각적인 복음찬송가와 전자악기, 율동을 곁들인 성가대의 찬양, 멀티 시청각 도구 등등이 그런 흔적들이다. 주로 청중들의 감수성에 호소함으로써 예배의 영성을 고취하겠다는 그런 시도가 과연 신학적으로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훨씬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핵심적인 문제를 한 가지만 지적한다면, 그들이 극복하려고 한 기존의 전통적 예배가 청중을 소외시켰다면, 새로운 열린 예배는 하나님을 소외시켰다.
예배의 소외 문제는 매우 예민하기 때문에 일반 신자들은 그 심각성을 눈치 채기 어렵다. 특히 청중들의 소외 현상은 어느 정도 드러났지만, 하나님이 소외되는 열린 예배의 문제점은 묻혀 있거나 오히려 정당한 것으로 와전되어 있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영성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크게 왜곡되어 있기 때문인데, 다른 건 접어두고 열린 예배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복음찬송에 대해서 한 마디 하자. 복음찬송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 행위보다는 신자들의 주관적인 신앙경험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예배의 주체성에 혼란을 초래한다. 청중들의 은혜가 하나님의 영광을 대체한다는 말이다. 마르바 던의 아래와 같은 지적은 옳다.

슬프게도 많은 ‘현대적’ 예배 인도자들이 ‘참된 찬양’과 ‘기쁜 노래’를 혼동하여 하나님의 속성과 행동을 말하는 대신 개인적인 재미나 위로나 행복을 대상으로 삼는다. 때로는 더 오래 된 찬송가들도 똑같은 실수를 하지만(“저 장미꽃 위에 이슬”과 같은 찬송들), 더 공동체 지향적이고 신학적으로 내용이 더 깊었던 예전의 찬송에서는 이러한 자기중심주의(narcissism)를 찾아보기가 훨씬 힘들었다.(마르바 던, 고귀한 시간 ‘낭비’, 이레서원, 251 쪽)

평자가 인터넷으로 참여한 경동교회의 예배는 청중들의 종교적 나르시시즘에 매몰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청중들의 영성을 왜소화하는 정숙주의에 빠지지도 않았다. 대중추수(大衆追隨)주의가 교회 예배마저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오늘날 신학적으로나 영성적으로 바른 예배를 드리고 있는 교회가 우리와 함께 한다는 건 다행한 일이다. 경동교회의 예배가 이렇게 중심을 잡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예전(liturgy)에 철저했기 때문이다. 이런 예전적 예배는 열린 예배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새로운 대안적 예배가 아니라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와 영적으로 소통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통적 예배’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예전 예배를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는 분들도 제법 있는 것 같다. 청중들을 예배의 감격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일정한 형식에 의해서 진행되는 예배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이다. 그 염려를 구체적으로 나누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예전 예배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미사처럼 일종의 형식주의나 권위주의로 흐를지 모른다는 것이다. 청중의 영성을 건조하게 만드는 형식주의는 경계해야 하겠지만 예전 예배가 형식주의와 일치한다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예배의 주체이신 성령은 자유로운 영이면서 동시에 질서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예전 예배가 자칫 지성주의나 엘리트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염려이다. 물론 엘리트주의는 예배의 영성을 위축시킬 가능성이 높지만, 그리스도교의 예배가 소비자 대중들의 상품 구매욕을 높이기 위한 종교 쇼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온전히 영광을 돌리는 행위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런 염려를 일단 옆으로 제쳐놓아야 한다. 평자의 생각에 예전 예배는 청중들의 영성을 부박한 감각의 표층에 머물게 하지 않고 신비로운 생명의 심층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에 생명의 영으로 찾아오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예전 예배가 꾸준히 수행된다면 비록 지성적이지 않은 신자라고 하더라도 예배의 영적 깊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교회력과 설교
경동교회의 예배가 예전적이라는 사실에서 예측할 수 있듯이 박종화 목사의(이하 ‘박 목사’) 설교 역시 교회력에 충실하다. 성공회 신부들과 일부 루터교회 목사들을 제외한다면 경동교회의 박 목사가 우리 프로테스탄트 교회 설교자 중에서 가장 철저하게 교회력 중심의 설교를 하는 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일반적인 대다수의 목사들은 교회력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절기감사헌금을 드리는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은 떠들썩하게 지키지만 그 이외의 절기는 건성이다. 심지어 대림절마저 못 본 체 하는 설교자들이 비일비재한 실정이니 한국교회에서 교회력이 얼마나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는지는 불을 보듯 분명하다.
설교가 왜 교회력에 의존적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긴 말은 하지 않겠다. 개인 설교자보다 지난 2천년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교회의 역사가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게 그 대답이다. 거꾸로 교회력을 무시한 채 설교자가 원하는 주제에 치우쳐서 설교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영성이 역사적 교회의 영성보다 뛰어나다는 자만심의 발로다. 청중의 영혼 구원에 대한 절박성 때문에 자유로운 주제로 설교한다고 변호하실 분들이 있을 것이다. 영혼구원의 절박성은 나름으로 호소력이 있지만, 그런 생각은 기본적으로 구원의 신비를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 안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평자가 보기에 교회력을 무시하는 설교자들은 대개가 섹트(sect) 기질이 강했다. 그런 열정으로 일정 부분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긴 역사 과정에서는 생명력을 유지하기 힘들다.
얼마 전에 나온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10년 전(1995년)에 비해서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약간 줄어서 8백6십2만 명이고, 로마 가톨릭 신자는 75%가 늘어서 5백 1십4만 명이라고 한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는 교회력을 무시하는 스타 설교자들과 거기에 몰려드는 청중들의 열기가 하늘을 찌를듯한데 비해서 가톨릭교회에는 강론으로 이름을 낸 신부가 없고 특별한 대형 성당도 없다. 그런데도 교회 성장에 관해서 지난 10년간의 현상만 놓고 본다면,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과 게임이 안 되었다. 앞으로 이런 추세로 10년이 지난다면 절대적인 숫자에서도 아마 가톨릭교회가 프로테스탄트를 앞지를 것이다. 지금 평자는 교회성장 자체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게 아니라, 교회력에 의한 설교와 즉흥적인 설교 사이에 모종의 역학관계가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교회력에 의한 설교를 꾸준하게 밀고나가는 것이 곧 개 교회와 개인 설교자를 초월하시는 성령을 의존하는 태도이며, 그것이 곧 교회와 설교자가 사는 길이라는 말이다.
박 목사는 거의 완벽하게 교회력을 중심으로 설교하는 목사이다. 기본적인 절기는 물론이고, 연초의 주현절이나 9월로부터 거의 세 달에 이르는 창조절까지, 한해의 모든 교회력을 일일이 챙기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의 설교가 얼마나 진지하게 교회력 지향적인가를 알 만하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그의 설교가 성서일과에 철저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설교의 내용 또한 교회력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런 특징이 박 목사의 설교에 어떻게 드러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이제 그의 설교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평자는 2005년 1월2일 첫 주일 부터 12월 마지막 주일인 성탄절 예배까지 박 목사가 경동교회 주일공동예배에서 행한 설교를 그 대상으로 삼았다. 이 자료는 경동교회 홈페이지에서 얻은 것이며, 평자가 설교내용을 인용할 때 표시한 월과 일은 모두 2005년을 가리킨다.
박 목사의 설교는 교회력의 성서일과에 따라서 주어진 구약성서, 서신서, 복음서를 모두 설교 본문으로 삼는다. 아무리 교회력을 따르는 설교자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세 본문을 설교구성의 확실한 근거로 삼는 경우는 드문 법인데, 박 목사는 이런 점에서 매우 철저했을 뿐만 아니라 아주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구약과 서신서와 복음서를 설교의 주제에 따라서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능력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설교는 자칫 아전인수로 떨어지거나 짜깁기에 불과할 경우가 많은데, 박 목사의 설교에는 그런 부분이 전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신구약 전체의 통전성이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였다. 설교학 교수들께서는 신대원 설교학 수업 시간에 박 목사를 특별강사로 초청하는 건 어떨는지.
한 대목만 살펴보자. 1월23일 설교 “사마리아의 샘물”은 문둥병을 치료받은 나아만 장군 이야기(열왕기하 5:9-15)와 믿음을 통한 구원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롬 1:16,17), 그리고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 이야기(요 4:7-14)를 본문으로 한다. 박 목사의 설교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아만 장군은 사마리아에 사는 엘리사에게 가서 병을 치료받았다. 그가 요단강에서 몸을 씻고 저주스러운 병에서 놓임을 받을 수 있었다는 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낸다. 그는 “병을 고쳐 주시는 분은 사마리아 땅에 있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 분인 것을 알고 감사를 드립니다.” 이 사건이 있은 지 80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태어났다. 그는 어느 날 사마리아 땅에서 이전에 다섯 명의 남편을 두었던 한 여자를 만난다. 절망하고 있던 이 여자는 예수에게서 생명의 물을 얻는다. 놀랍지 않은가? 박 목사는 800년의 시차를 두고 사마리아 땅에서 일어났던 두 역사적 사건을 하나로 묶어내고 있다. 나아만 장군은 요단강 물에서, 이 여자는 예수의 영적인 샘물에서 구원을 얻었다. 이렇듯 그의 설교에는 성서 텍스트에 대한 통시적 관점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박 목사는 로마서 말씀을 이렇게 연결했다.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구원 받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라는 사람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면 여섯 번이 아니라 열 번 시집갔던 사람도, 따돌림을 당했던 사람들도, 아무리 흉악한 죄인도 용서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오면 율법과 이념과 인종과 성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든지 구원을 베푸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설교에서 구약과 서신과 복음서가 “사마리아의 샘물”이라는 주제 안에서 일치를 이루었다. 서로 다른 세 물줄기가 한 군데로 모여 큰물을 이루듯이, 그의 설교에서 세 본문의 고유한 세계가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가다머의 해석학적 개념을 빌려 설명한다면 ‘지평융해’를 일으킴으로써 생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의 모든 설교는 거의 이런 구조로 진행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예를 들지는 않겠다. 대신 세 본문을 통합적인 시각으로 다룰 수 있는 그 저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살펴보는 게 좋겠다.

성서 텍스트와 해석학
평자의 생각에는 박 목사가 성서 텍스트를 다각적이고 중층적인 시각으로 접근한다는 게 핵심이다. 박 목사는 6월12일 설교에서 그 사실을 이렇게 진술한 적이 있다.

우리는 말씀을 읽을 때 깊이도 생각해보고 행간도 살펴보고 문서도 비판해보고 영적으로 해석도 해 보고 쓰신 분들의 의도도 생각해보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박 목사의 성서 텍스트 읽기는 말씀의 깊이, 행간, 문서비평, 영적 해석, 저자의 집필의도와 연관되어 있다. 물론 이런 요소들은 모든 목사들이 신학교에서 어느 정도 배운 것들이지만 교회 현장에서는 완전히 망각된다. 그 이유는 설교자들이 텍스트 자체보다는 청중을 지나치게 의식하기 때문이다. 설교자들이 교회성장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됨으로써 성서 텍스트에 대한 관심은 축소되고 오직 청중을 다루는 기술에만 마음을 두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설교자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한다. 성서 텍스트인가, 아니면 청중인가? 그게 그거 아니냐, 청중을 제외한 설교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청중이 은혜 받는 게 곧 설교의 목적이 아니냐,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평자는 그런 주장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 설교자는 철저하게 성서 텍스트에만 자신의 운명을 걸어야 한다. 왜 그런가?
성서 텍스트는 초등학생들의 국어교과서처럼 어떤 하나의 표면적인 사실전달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지평에서 해석되어야 할 하나님의 구원론적 언어 사건이다. 그 사건은 이미 완료된 상품이 아니라 늘 새롭게 움직이는 세계이다. 우리가 도구적으로 이용할 수 없고, 종교적으로 소비할 수 없는 존재론적인 세계라는 말이다. 예술작품과 명작들도 이와 비슷한 세계를 갖고 있다. 예컨대 렘브란트의 그림은 렘브란트의 손을 떠난 뒤에 자신의 길을 간다. 그 길은 곧 사건이며, 세계이다. 톨스토이의 <부활>은 저자의 손을 떠난 다음에 자기의 고유한 길을 간다. 톨스토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정신세계가 그 작품에서 새롭게 열린다. 성서 텍스트도 이처럼 전승과 집필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 다음에는 그것이 형성된 역사를 초월하여 자신의 길을 간다. 만약 성서 텍스트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기만 한다면 성서는 은폐되었던 영적인 세계를 드러낼 것이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성서 텍스트의 세계를 해석할 수 없는 사람 앞에서 성서는 침묵한다. 성서가 말을 걸지 않는다는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한 설교자들은 결국 청중들을 닦달하는 것에 설교의 승부를 걸 수밖에 없다. 성서 텍스트의 침묵과 청중 닦달은 정비례한다.
성서 텍스트의 침묵현상과 해석학의 문제는 설교자들에게 중요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예를 들어 조금 더 설명해야겠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텍스트를 중심으로 설교한다고 하자. 설교자는 물론이고 웬만큼 교회생활을 한 평신도들은 이 텍스트에서 무슨 설교가 나올는지 예상할 수 있다.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 믿음을 보시고 다른 제물을 준비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정답이다. 좀 심한 설교자들은 이 텍스트에 근거해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고 청중들을 위협하기도 한다. 인간의 실증적인 논리를 뛰어넘는 믿음의 신비를 신자들에게 설명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성서 텍스트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 준비가 된 설교자라고 한다면 그 텍스트를 새로운 지평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모리아 산 사건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높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인신(人身)제물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일지 모른다. 근동의 여러 종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듯이, 생존에 불안을 느낀 아브라함은 어느 한 순간에 야훼 하나님이 인간의 피까지 원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을지 모르며, 성서 기자는 그것의 어리석음을 지적했다는 말이다. 지금 평자는 이런 해석의 신학적 정당성 여부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인간 삶과 역사와 존재의 신비를 안고 성서 텍스트를 해석하지 않으면 성서 텍스트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결과적으로 우리의 설교가 죽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뿐이다.
박 목사의 설교는 성서 텍스트의 세계를 새롭게 열기 위한 해석학적 관점이 풍부하다. 몇 대목만 간추려보겠다. 위에서 인용했던 설교 “사마리아의 샘물”(1월23일)에서 박 목사는 우리에게 부정한 여자의 대명사로 일컬어진 이 수가성 우물가의 여자를 전혀 새롭게 해석했다. 이전에 다섯 명의 남자와 살았다가 이제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는 이 여자는 “바람둥이라서 수많은 남편과 살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유대 땅이나 사마리아 땅에서의 여성은 율법적으로 지위 보장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남자는 아내가 싫으면 이혼 증서만 써 주고 얼마든지 내쫓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강제로 이혼당하고 내쫓김을 당한 여성은 먹고 살 길이 없어서 굶거나 죽기가 일쑤였습니다.” 과부인 이 여자가 최소한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남의 남자에게 가서 등록되지 않은 첩의 하나로 사는 것이며, 그렇게 살다가 다시 쫓겨나는 것이다. “오늘 이야기에 나오는 과부도 다섯 번째 남편한테 갔다가 구박당하고 다시 여섯 번째 남편과 살지만 법적인 남편일 리가 없습니다. 그냥 목에 풀칠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일 뿐입니다.” 박 목사의 해석에 의하면 이제 이 여자를 향한 기존의 시각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 남자를 밝히는 여자가 아니라 생존의 위기에 봉착한 여자일 뿐이다. 이런 새로운 시각이 주어진다면 구원이 누구에게 가장 절실한지에 대한 대답도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처음으로 읽으신 이사야의 예언인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씀도(눅 4:18) 이에 해당될 것이다.
“밀과 가라지”라는 설교(2월6일)는 예수님의 그 유명한 비유(마 13:24-30)를 주제로 한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추수 때까지 가라지를 솎아내지 않는 이유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헤칠까 염려되기 때문이라는 정형화한 대답을 알고 있다. 우리 주변의 악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뜻이 바로 이 비유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 목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곡식과 가라지의 판단이 마지막 때까지 유보되어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새롭게 해석했다.

이런 예수의 말씀은 역설적입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은 빨리 복음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지만, 유대교인들, 당신들은 율법에 매여서, 율법을 이념화하고, 화석화함으로써 개방성을 잃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당신들이 마지막에는 가라지가 된다. 예수의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이 설교는 세상을 선악이원론으로 재단하던 기존의 사고방식을 뒤집는다. 종말론적 시각에서 기존의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판단을 뚫고 나감으로써 성서 텍스트의 고유한 영적인 지평을 우리에게 새롭게 열어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박 목사의 해석학은 종말론적이라 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은 진술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인간은 머리로 아는 것과 삶으로 경험한 것을 기준으로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판단합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사실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세계는 우리가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을 우리의 자그마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판단할 때에는 엄청난 오류를 범합니다. 하나님은 지식 속에도 있고 우리의 경험 속에도 존재하시지만, 동시에 미지의 세계의 주인이시고 미경험의 세계의 주인이시기도 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2월6일)

미래의 시간까지 통치하시는,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미래의 힘으로 오늘의 역사를 규정하시는 야훼 하나님이 곧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시다. 종말론은 휴거로 표상되는 초월적 피안에 관한 가르침이라기보다는 과거의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일어난다는 기계적인 역사관을 뛰어넘어 전혀 새롭게 열리는 생명의 세계를 지시하는 가르침이다. 박 목사의 설교에 내재해있는 종말론적 해석학은 그의 대림절 설교에서 정점을 이룬다.  

오시는 하나님
박 목사는 2005년 대림절 동안 “오시는 하나님”이라는 오직 한 가지 주제에 매달리고 있었다. 대림절 첫째주일의 설교 “생명의 나팔소리”(11월 27일)에서 그는 아래와 같은 언급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우리는 미래가 우리를 향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너무나 멀리 있는 미래를 향하여 우리가 힘들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미래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향해서 다가오고 계신 하나님, 그리고 그 분의 미래. 이제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하고 미래를 담을 그릇을 만들기 위한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림절을 맞이하는 우리가 꼭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은 강원룡 목사님이 설교하셨다. 셋째 주일(12월 11일)의 설교 제목은 “오신 분-오실 분”이었다. 여기서 박 목사는 2천 년 전, 역사 안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와 앞으로 심판주로 오실 재림주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해명하면서, 하나님의 비밀이 미래의 힘에 놓였다는 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조상은 살았다가 없어지고 회상해서 다시 가져올 수 있지만, 하나님은 거꾸로 우리가 가야할 머나먼 미래, 내일의 주인이 이미 과거에 왔고 오늘도 오시게 하십니다. 우리는 역사가 미래를 향하여 사는 능력을 가졌지만, 하나님은 거꾸로 미래가 역사에 오고 과거에 오고 현재에 오고 미래가 오게 하는 역사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넷째주일(12월18일)의 설교 “곧 오신다.”의 본문은 사 52:7-10, 빌 4:4-7, 눅 1:46-55였다. 이 설교는 단지 대림절 절기를 기리는 설교로서만이 아니라 박 목사의 신학과 삶, 그리고 목회 전반을 담고 있기 때문에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다. 여기서 박 목사는 바벨론 포로로부터 해방되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해서 간략하면서도 소상하게 설명하면서 “곧 오신다.”는 이 예언의 신학적 의미를 정확하게 풀어냈다. 이스라엘은 페르시아의 고레스에 의해서 해방을 맞고 예루살렘 성전을 새롭게 수축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지만 고레스가 그들에게 메시아는 아니었다.

세월이 지나서 한참 후에 보니 이사야가 예언했던 놀랍고도 반가운 희소식을 전하는 메시야, 그 분은 곧 온다고 약속을 했는데 고레스 왕이 온 뒤에도 완벽하게 메시야는 못 왔고, 그 뒤 500년이 지난 베들레헴 한 말구유간에 예수란 이름으로 메시아가 오셨습니다. 곧 오신다던 메시야의 “곧”이 500년 걸렸습니다.

박 목사에 의하면 메시아가 곧 오신다는 이사야의 예언이 5백년이나 지체된 것처럼 곧 다시 오신다던 예수의 약속도 역시 2천년이나 지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곧이 얼마나 걸리면 되겠습니까?” 지금 박 목사는 청중들에게 신학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그리고 일상적으로 아주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중이다. 왜 예수의 재림이 지체되는가, 도대체 시간은 무엇인가, 현재 우리 삶과 역사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박 목사에게 종말론적 시간은 넓이가 아니라 깊이이며, 속도가 아니라 느림이며, 소유가 아니라 존재이고, 양이 아니라 질이며, 형식이 아니라 의미이다.

제가 신문에서 성경 66권을 단시일 내에 다 섭렵할 수 있는 속도 읽기라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성경 한 구절이 내 삶을 주장하고, 내가 성경말씀과 대화해서 의미를 찾고 싶은데 66권을 빨리 읽으면 무엇 합니까? 의미도 없이 가볍게 스쳐가는 말씀을 무엇 때문에 읽습니까? 왜 이렇게 빨리 읽어야 합니까? 왜 스쳐지나가야 합니까? 인간의 진지함은 어디 있으며, 그 속에 있는 삶의 의미는 어디 있습니까? 속도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것은 삶 속에,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우리 인생 속에 들어 있는 진한 삶의 가치와 의미는 어디론가 가고, 그냥 빨리 빨리 가려는 것입니다. 저는 속도 대신 삶과 시간 속에 주어진 아름다운 창조주의 가락을 따라, 박자를 따라, 리듬을 따라 즐기고 웃고 울며 아름다운 삶의 진수를 맛 볼 수 있는 여유를 원합니다. 이것이 메시아가 바라는 삶의 여유입니다.

삶의 깊이에서 만날 수 있는 이 하나님의 시간은, 즉 하나님의 오심은 현재적 종말 사건이다. 그래서 박 목사는 성서일과에 제시된 마리아의 찬양을 그의 설교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오시는 하나님의 그 시간은 가난한 자, 눌린 자, 포로로 잡힌 자들이 해방을 맞을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연대하고 투쟁하는 순간이다. 이런 점에서 성탄은 낭만적인 즐거움에 몰두하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오시는 하나님을 현재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도전의 시간이요, 위기의 시간이기도하다.

하나님이 곧 오신다는 의미는 모두에게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심을 반가워할 줄 아는 회개와 자기결단이 없이 왜 메시야가 즐겁습니까? 성탄이 왜 즐겁습니까? 성탄은 무서운 도전입니다. 불의한 사이에 예수님이 오시면 불의를 고친다는데, 불의에 희희낙락하는 사람이 왜 메시야를 좋아합니까.

이제 우리는 박 목사의 종말론적 해석학을 어느 정도 따라잡은 셈이다. 본인이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평자가 보기에 박 목사의 종말론적 해석학은 실존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미래적 종말론, 또는 우주론적 종말론의 지평을 포기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고 마지막 다 뒤집어서 새로운 나라를 만드실 것을 압니다. 우주의 역사의 종말이 올 것을 압니다. 역사도 끝나고 우주도 끝나는 것을 압니다.”는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하나님의 우주론적 심판과 통치가 현실화할 그 종말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 그렇지만 전반적인 설교의 무게는 역시 “마리아를 객관화하지 마십시오. 오늘 내가 마리아입니다.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마리아입니다. 마리아의 찬가가 여러분의 노래가 되시기를 바랍니다.”는 결론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 여기”의 실존에 놓여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케리그마와 프락시스
박 목사의 설교에 내재하는 종말론적 해석학의 실존론적 특징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기독론적 성격이며, 다른 하나는 실천적인 성격이다. 전자는 그의 설교에 케리그마가 매우 명확한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는 뜻이며, 후자는 프락시스가 강조된다는 뜻이다. 이 두 요소가 한 설교자에게서 균형을 이룬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대개의 설교자들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다. 그뿐만 아니라 아예 기독론의 신학적 개념조차 모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설교의 케리그마적 토대가 부실하다. 예수를 믿고 죄 용서 받아 구원받는다는 기초적인 케리그마가 단지 장광설로만 작용할 뿐이지 실제로 설교에서 해석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프락시스의 문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은총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복음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종교적인 행위와 도덕적인 행위를 거의 목적론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들이 케리그마를 단순히 독단적인 교리로만 선포함으로써 신자들을 교리적 독선에 빠지게 하고, 청교도적 모범을 강요함으로써 도덕주의에 빠지게 하는 이유는 케리그마와 프락시스의 신학적 의미와 그것의 연관성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박 목사가 한신대 교수로 재직 중에 펴낸 <평화신학과 에큐메니칼 운동>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주로 민족통일, 인간 존엄성에 근거한 교회의 과제, 교회일치 문제에 관심이 크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강원룡 목사님이 오랫동안 설교한 경동교회의 화려한 역사를 전제한다면 박 목사의 설교에서 케리그마가 중심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평자에게 의외(?)였다. 그는 보수적인 성향의 설교자들보다 훨씬 진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에 설교의 무게를 두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에게 프락시스는 그것 자체로 또 하나의 중심 주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십자가와 부활 신앙에 의한 당연한 귀결이다. 이런 점에서만 본다면 그의 설교는 근본주의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근본주의는 축자영감설과 성속이원론에 근거한 수구적 신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역사와 종말의 변증법적 긴장관계로 해석함으로써 참된 생명의 리얼리티를 확보하려는 2천년 기독교 역사의 메인 스트림과 연결되는 정통적 신앙을 말한다.
“잃은 것-찾는 것”(6월 5일)이라는 설교는 주로 잃은 양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박 목사에 따르면 한 마리 잃은 양을 찾는 것은 곧 하나님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인데, 그것은 일상의 자리와 순간인 바로 “지금 여기서” 일어나야 한다. 바로 지금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기쁨이 현실화해야 한다.
“생명의 만나”(7월 3일)에서 박 목사는 한 가족이 하루 먹을거리만 거두어들여야지 더 이상을 거두어들였을 경우에 썩고 만다는 성서 텍스트의 보도를 설명하면서 경제정의를 역설했다. 그의 설교에서는 이 만나사건도 역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과 만난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통해서 만나를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공유하시는 생명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는 것도, 십자가에 죽는 것도, 부활의 축복도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이 만나를 오늘 받으십시오. 하나님과 공유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매일같이 베풀어 주시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십시오. 생명의 축제. 이것이 오늘 여러분의 성만찬 축제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한 편의 설교만 더 살피자. “오늘 속에 내일을”(11월 6일)은 노아 홍수에 관한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박 목사는 앞으로 더 이상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징표인 무지개를 바로 예수의 십자가와 연결시키고 있다.  

오늘날의 무지개는 무엇일까요. 힘든 과거를 지난 후에 아름다운 미래를 약속해주는 오늘날의 상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갈보리 언덕에 달린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합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끌어내서 오늘의 삶에 현재화시킵니다. 그리고 십자가 속에 잉태한 부활의 생명, 하늘나라 축복을, 즉 내일을 미리 끌어다가 맛볼 수 있습니다.

박 목사처럼 십자가와 부활을 일관되게 설교의 중심에 두고 있는 설교자는 드물다. 꽤나 보수적인 설교자들도 허울만 십자가와 부활이지 실제로는 그것을 설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 축복받고 잘 살기 위한 주문이나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구호 역할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십자가와 부활의 오용과 남용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십자가와 부활을 언급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케리그마를 살리는 설교는 결코 아니다. 그 주제가 실제로 설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십자가의 리얼리티와 그 의미가 해석되어야 하며, 부활의 리얼리티와 그 의미가 종말론적인 지평과 실존적 지평에서 늘 해석되어야 한다. 평자가 보기에 박 목사의 설교에는 이런 기독론적 해석학이 아주 또렷하게 살아있었다. 이런 해석학적인 접근으로 인해서 그의 실천 강조는 단순한 행동주의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교의 가장 핵심적인 구원론의 차원으로 승화한다.  

설교의 완성도에 관해서
평자는 지금까지 박 목사의 설교에 교회력과 해석학이 두 기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셈이다. 교회력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말은 그가 지난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와 소통하고 있다는 뜻이며, 해석학적인 특징을 보인다는 말은 그가 오늘의 세계와 부단히 대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평자는 이런 방식의 설교가 바로 개신교 설교자들이 따라야 할 가장 모범적인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설교의 완성도가 경우에 따라서 느슨해진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1월9일 주현절에 박 목사는 “하나님의 얼굴 빛”이라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예민한 설교를 했다. 한국교회 강단에서 이런 주제의 설교는 경동교회가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는 교회력에 따른 세 텍스트를 중심으로 예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빛을 보아야 한다는 점을 설명해나갔다. 예수의 십자가는 고통의 빛이며 부활은 영광의 빛이다. 고통과 영광은 모두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빛이다. 평자는 숨을 죽이고 그의 설교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아이큐(IQ)와 이큐(EQ)가 등장했다. 박 목사는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빛을 아는 것은 아이큐로 가능하지만 함께 느끼는 건 이큐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율법에 대해서 비슷한 해석을 내렸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아이큐로만 지켰을 뿐이지 감동을 자아내는 이큐로 살려내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려는 의도를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그 지식이 감동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는 진술이 말하듯 그는 이 대목에서 지성과 감동이 결합된 신앙을 제시한 것이다. 이것은 현대 지성적 그리스도인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설명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얼굴 빛”이라는 전체 주제와 별로 상관이 없다. 우회적으로는 연결이 되겠지만 직접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주제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삼위일체론적 신비 안으로 조금 더 깊이 들어가야 할 바로 그 순간에 지성과 감정의 결합을 강조했다는 것은 박 목사가 그날의 주제를 나이브하게 대했거나 아니면 작위적으로 대했다는 증거이다. 평자의 생각에 박 목사는 그날 두 편의 설교를 한 셈이다.
“살아있는 기도”(7월31일)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에 대한 예수의 비유(눅 18:9-14)를 본문으로 한다. 박 목사는 기도의 당위성을 매우 호소력 있게 전달했다. 하나님이 바리새인의 기도를 받지 않은 이유가 그의 기도가 자기 의에 사로잡힌 ‘혼잣말’이었다는 박 목사의 설명은 예리한 통찰이다. 물론 ‘혼잣말’이라는 단어가 본문 비평적으로 얼마나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다. 참고적으로 개역성서나 공동번역에는 그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바리새인이 자기 의에 사로잡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혼잣말에 대한 박 목사의 강조는 크게 문제는 안 될 것이다.
그 뒤로 박 목사는 본문을 정확하게 풀어나갔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업적에 사로잡혔지만, 세리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열었다. 업적보다 인간이 중요하다는 지적은 백번 옳다. 여기에 근거해서 그는 인간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삶의 여유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퇴근 후에 공원 앞을 지나면서 잠시 의자에 앉아서 하늘도 보고, 나무도 바라보면서 “나는 누구이며 하나님께서는 누구신지” 찬찬히 생각해보라고 한다. “여러분,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하나님께 여유롭게 기도해보십시다. 거대 담론 속의 작고 짧은 여유. 저는 이 시간이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목사는 이런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1993년 5월에 체코의 하벨 대통령을 방문했던 일화를 전했다. 하벨은 대통령의 바쁜 업무 중에서도 경호관이나 비서실도 모르게 혼자 나와서 “해변가 또는 강가, 작은 주막집 등에서 시인 친구들과 만나서 술 한 잔을 기울이거나 파이프 담배를 피면서 음악과 미술과 하늘을 논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평자는 박 목사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이심전심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자기 의와 자기 업적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훨씬 집요하게 풀어내야 할 대목에서 “한 순간의 여유” 운운은 설교의 긴장감을 훼손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관한 예수의 비유는 기도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세리처럼 회개하라는 가르침이나 하나님과 진정한 마음으로 대화하라는 권면이 아니라 자기 의에 떨어진 사람들의 허위의식에 대한 통렬한 풍자다. 안타깝게도 평자는 그 설교에서 이런 주제가 심화해나가는 영적 동력을 느끼지 못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왜 자신을 심정적으로는 세리와 일치하면서도 실제로는 바리새인처럼 사는지에 대한 문제를 기도의 본질과 더불어서 심층적이고 통합적으로 해명하려는 치열성이 부족해보였다는 말이다. 박 목사의 아래와 같은 결론은 결국 신앙의 일반론으로 떨어진 게 아닐는지.

십자가를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실 때에 그 뒤에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부활과 새 생명의 은총이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과의 대화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정리한다면, 평자는 박 목사에게 설교의 완성도가 간혹 떨어지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했다. 하나는 별로 밀접한 연관성이 없는 주제가 결합되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설교가 앞으로 치고 나가지 못하고 제 자리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그의 설교에서 벌어졌는지에 관해서 분석할만한 능력이 평자에게는 없다. 단순히 직관적인 느낌으로만 간단히 말한다면, 이것은 교회력에 의해서 주어진 텍스트를 종합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그에게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한다. 세 성서일과를 어떻게 해서라도 한편의 설교에 구겨 넣으려는 의욕을 보이다보면, 한 텍스트의 움직이는 신학적 동선(動線)을 추적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어쩌면 설교의 완성도에 대한 문제 제기는 순전히 평자의 주관적인 관점일지 모르며, 더구나 목회적인 측면을 감안하지 못한 평자의 단견일지 모른다.
끝으로, 이번 설교비평은 평자에게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주었다. 즐거움은 실로 오랜만에 설교다운 설교를 접했다는 데에 있다. 고통이라는 건 어느 한편의 설교도 그냥 흘려버릴 수 없을 정도로 신학적 깊이와 자신의 신앙적 실존을 충실하게 담고 있기 때문에 설교읽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는 데에 있다. 한국교회의 강단개혁을 위해서라도 박 목사의 설교가 속히 책으로 묶여 나왔으면 한다. 2005년은 경동교회 창립 60주년이자 박 목사 회갑 되는 해였다고 하니, 양쪽 모두 천생연분인 해방둥이인 셈이다. 예언자적 소임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경동교회와 말씀의 진정성을 추구하는 박 목사에게 내리는 주님의 은총이 늘 7월의 숲 같기를 기도한다. (기독교사상, 2006년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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