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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2: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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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http://je333.com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미국을 여행 중인 세 소녀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렀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주목하였지만 정작 자신들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식당을 나올 때 소녀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누가 음식값을 지불해버린 것입니다.
“먼저 나간 손님이 내셨는데요. 이것은 그분이 남긴 쪽지입니다.”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빕니다. 당신들의 간절한 모습에 우리는 큰 감동을 받았답니다. 우리 하늘나라에서 만나요(See you in Heaven). 킴벌리 부부”
우리나라는 남북이 갈라져 있고 동서 갈등 또한 심합니다. 교파와 교회간 갈등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민족과 국적이 달라도 주안에서는 한가족인 것을…. 하늘나라의 가족은 서로 사랑하고 나누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막3:35) 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나라는 다른 어떤 국가보다 혈통이나 학연 그리고 지연 같은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요직에 오르면 그와 조금 인연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 몰려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들에게 새로운 인간관계 형성을 제시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이 들렸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모친이며 누가 내 가족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이것은 가족을 부정하는 말씀이 아니라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관계보다 성령으로 맺어진 영적인 가족관계가 더 우선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영적인 가족관계에 대한 인식을 강조해야 합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은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면서도 성령으로 하나된 하나님의 가족은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섬기는 성도들을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누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일까요? 흔한 오해처럼 주님은 그의 가족들을 부인하신 것일까요? 이 물음이 나를 사뭇 고민하게 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만을 믿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핏줄이 중요합니다. 같은 혈통이어야만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같은 핏줄을 가진 형제와 부모인데도 서로 등지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봅니다. 오로지 재물과 욕심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원수가 됩니다. 주님은 핏줄로 얽혀진 관계만을 가족이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누구나 형제요 자매라고 하십니다. 우린 육적 혈통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 믿음의 줄로 이어집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2)고 성서는 말씀합니다.
피아노를 사서 오른편에 놓자, 왼편에 놓자 싸우다가 갈라진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없다로 싸우다 갈라진 교회도 있습니다. 너무 심하게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둥글둥글 다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울 총각과 경상도 처녀가 결혼하였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우리 국수 끓여 먹자”고 말했습니다. 아내가 “국시지 국수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둘이는 국수라는 둥 국시라는 둥 말다툼하다가 이장에게 어느 것이 옳은지 묻기로 하였습니다. 이장이 말했습니다. “국수와 국시는 재료가 다릅니다. 국수는 밀가루로 만든 것이고 국시는 밀가리로 만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부부가 물었습니다. “밀가루와 밀가리는 어떻게 다릅니까?”“밀가루는 봉투에 넣어져 있는 것이고 밀가리는 봉다리에 담겨 있습니다” 또 이 말을 들은 부부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봉투와 봉다리는 어떻게 다릅니까?”“봉투는 기계로 찍은 것이고 봉다리는 손으로 붙여서 만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너무 세세히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일은 그게 그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모두 한 형제요 자매요 가족입니다.
인도양의 외딴섬에 도도라고 불리는 새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도도새는 모습이 너무나 못생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도새를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도도새가 멸종되고 나자 그 섬에서 자라고 있던 갈바리야라는 나무가 더 이상 번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갈바리야라는 나무의 씨앗은 껍질이 너무 두텁기 때문에 도도새에게 먹혀서 배설물로 나와야만 싹이 틀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것에는 나름대로의 존재가치가 있습니다. 사람은 더 더욱 그렇습니다. 쓸모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게 귀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의 교회에서 능력이 뒤떨어지거나 믿음과 행동이 미성숙한 형제 자매가 있습니까?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한 몸으로 부름 받은 교회의 구성원들입니다.
손가락을 다치면 온 신경이 쓰이고 몸 전체가 아프다는 것을 감지하듯이 우리는 몸을 구성하고 있는 어떤 지체도 없어서는 안될 그리고 너무나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똥구멍이 구리다고 베어버리랴'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이로써 모든 사람이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됩니다.(요13:34-35)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고전12:22-23)
어느 숲에 흑사병이 유행해 동물들은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동물의 왕인 사자가 비상회의를 소집했습니다. "하늘이 흑사병을 내린 것은 우리의 죄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들 중 가장 죄 많은 자를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한다. 자, 모두 자기의 죄를 고백하라."
호랑이가 제일 먼저 죄를 고백했습니다. "나는 며칠 전 염소를 잡아먹었다." 그러자 약삭빠른 여우가 거들었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염소가 너무 많으면 초원이 줄어듭니다. 잘 하신 일입니다." 표범과 늑대와 곰이 차례로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동물들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가장 힘이 없고 순진한 노새의 차례였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남의 밭에서 자란 풀을 몰래 뜯어먹은 적이 있어요." 그러자 동물들이 일제히 손가락으로 노새를 가리키며 소리쳤습니다. "유죄!"다.
정의보다 힘, 약자보다 강자가 판을 치는 사회는 부패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십자가 신앙입니다. 따라서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웃을 미워하고 멸시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균형을 이룰 때 십자가 신앙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중요하지 않은 말씀이 없지만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기신 말씀은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끼리는 서로가 시기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가장 크냐 하는 것 때문에 서로 다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을 떠나려 하는 예수님께서는 이제 너희가 사랑할 대상은 정확히 말해서 너희 '서로'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향한 수직적인 사랑은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는 수평적인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주님이 오시기 전에도 있었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에 보면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말씀된 옛 계명인데 왜 예수님은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이 계명을 새로운 차원, 새로운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계명에서 새로운 대상을 얻게 되었습니다. 레위기의 말씀이 유대인더러 자기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이웃은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영적인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웃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느 누구나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계명에서 새로운 척도를 발견합니다. 요한이 쓴 첫 번째 편지 4장 1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 사랑의 척도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발견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했습니다. 주님이 가지고 오신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새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계명은 새로운 능력에 의해서만 지켜질 수 있습니다. 이 능력은 성령의 능력, 각 성도 안에 계신 주님의 생명 자체입니다. 우리에게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랑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저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데 있어서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조금 전에 본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에서 사랑이란 말 대신에 예수라는 말을 넣으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는 오래 참고 예수는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예수는 자랑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 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예수는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랑의 화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예수님의 사랑하신 방법을 말씀하셨는데 우리도 그런 식으로 사랑한다면 예수님 대신 우리 이름을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말 대신에 '나' 라는 말을 넣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는 오래 참고 나는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나는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우리가 그런 식으로 읽으려면 스스로 겸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지 못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랑을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 주여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지식 가운데서 자라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 다.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고 하신 주님의 말씀보다 너희가 이제 나를 찾을 터이나 라고 하신 말씀에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해가 지난 후에 성령께서 요한복음서 기자인 사도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이 쓴 요한일서는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의 강해서라고도 말할 수 있는 책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이 십자가의 죽음을 피부로 느끼게 된 그런 긴장된 순간부터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마지막 떠나는 장면에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실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저희가 기다리는 메시야인 줄 믿고 3년 동안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예수님이 너무도 맥없이 처참하게 십자가에 처형된다고 생각하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이 들리지도 않았을 수가 있습니다. 정말 사람이 다급하게 되면 스승도 버릴 수 있고 믿음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같은 사람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은 정신적인 위기와 영적인 위기에서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 어려운 순간들을 꿋꿋이 버텨 나갈 수 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보셨습니다. 제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사랑밖에 없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새 계명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 앞에도 사랑만이 우리를 붙들어 주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사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랑의 진가는 어려울 때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법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하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고 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변함 없는 사랑, 끝까지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할 수 없다고 포기하지 말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알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사랑할 때뿐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제자는 선생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을 닮아야 합니다. 선생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선생 되신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거창하게 인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까이 있는 남편이나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함께 예배드리는 옆에 있는 믿음의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구태여 멀리 있는 사람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은 가까운 데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많은 사랑은 혀끝에 있지만 진짜 사랑은 손끝에 있습니다.
성경은 형제 사랑의 어떤 권고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첫째, 서로 사랑할 것을 권합니다.(요일4:20, 21)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요일 2:9- 10)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약4:11)
둘째, 연약한 형제를 권면하고 안위하고 붙들어 줄 것을 말씀합니다.(롬15:1)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살전5:14)
셋째, 서로 비방하지 말고(약4:11), 업신여기고 판단하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롬14:13- 15)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14:10)
넷째, 범죄한 형제를 위해서 기도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나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5:16)
다섯째, 궁핍한 형제를 도와주고, 기회 있는 대로 착한 일을 할 것을 권면합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약2:15,16)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요일3:17)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6:10)
여섯째,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할 것을 권합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벧전1:22)
일곱째, 서로 먼저 할 것과 지속될 것을 권고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12:10)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히13:1)
어떻게 하면 믿음의 형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에는 일반적인 다섯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둘째는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셋째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사랑을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더 깊게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2∼47)
험한 세상 속에서 서로 돕고 격려하며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관계가 될 때 참 믿음의 형제가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참 믿음의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은사를 받을 때 더 기쁘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말씀 속에서 주시는 사명을 깨달을 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믿음의 형제를 갖기 바랍니다. 서로 희생하며 양보하며 좋은 믿음의 관계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 기도: 사랑의 주님, 제게 많은 형제와 자매를 허락하셨습니다. 저들을 섬기기에 부족함 없게 하옵소서. 참 믿음의 형제를 갖는 축복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묵상: 당신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삶에서 실천하고 있습니까?
미국을 여행 중인 세 소녀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렀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주목하였지만 정작 자신들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식당을 나올 때 소녀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누가 음식값을 지불해버린 것입니다.
“먼저 나간 손님이 내셨는데요. 이것은 그분이 남긴 쪽지입니다.”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빕니다. 당신들의 간절한 모습에 우리는 큰 감동을 받았답니다. 우리 하늘나라에서 만나요(See you in Heaven). 킴벌리 부부”
우리나라는 남북이 갈라져 있고 동서 갈등 또한 심합니다. 교파와 교회간 갈등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민족과 국적이 달라도 주안에서는 한가족인 것을…. 하늘나라의 가족은 서로 사랑하고 나누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막3:35) 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나라는 다른 어떤 국가보다 혈통이나 학연 그리고 지연 같은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요직에 오르면 그와 조금 인연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 몰려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들에게 새로운 인간관계 형성을 제시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이 들렸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모친이며 누가 내 가족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이것은 가족을 부정하는 말씀이 아니라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관계보다 성령으로 맺어진 영적인 가족관계가 더 우선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영적인 가족관계에 대한 인식을 강조해야 합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은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면서도 성령으로 하나된 하나님의 가족은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섬기는 성도들을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누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일까요? 흔한 오해처럼 주님은 그의 가족들을 부인하신 것일까요? 이 물음이 나를 사뭇 고민하게 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만을 믿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핏줄이 중요합니다. 같은 혈통이어야만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같은 핏줄을 가진 형제와 부모인데도 서로 등지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봅니다. 오로지 재물과 욕심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원수가 됩니다. 주님은 핏줄로 얽혀진 관계만을 가족이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누구나 형제요 자매라고 하십니다. 우린 육적 혈통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 믿음의 줄로 이어집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2)고 성서는 말씀합니다.
피아노를 사서 오른편에 놓자, 왼편에 놓자 싸우다가 갈라진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없다로 싸우다 갈라진 교회도 있습니다. 너무 심하게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둥글둥글 다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울 총각과 경상도 처녀가 결혼하였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우리 국수 끓여 먹자”고 말했습니다. 아내가 “국시지 국수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둘이는 국수라는 둥 국시라는 둥 말다툼하다가 이장에게 어느 것이 옳은지 묻기로 하였습니다. 이장이 말했습니다. “국수와 국시는 재료가 다릅니다. 국수는 밀가루로 만든 것이고 국시는 밀가리로 만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부부가 물었습니다. “밀가루와 밀가리는 어떻게 다릅니까?”“밀가루는 봉투에 넣어져 있는 것이고 밀가리는 봉다리에 담겨 있습니다” 또 이 말을 들은 부부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봉투와 봉다리는 어떻게 다릅니까?”“봉투는 기계로 찍은 것이고 봉다리는 손으로 붙여서 만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너무 세세히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일은 그게 그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모두 한 형제요 자매요 가족입니다.
인도양의 외딴섬에 도도라고 불리는 새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도도새는 모습이 너무나 못생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도새를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도도새가 멸종되고 나자 그 섬에서 자라고 있던 갈바리야라는 나무가 더 이상 번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갈바리야라는 나무의 씨앗은 껍질이 너무 두텁기 때문에 도도새에게 먹혀서 배설물로 나와야만 싹이 틀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것에는 나름대로의 존재가치가 있습니다. 사람은 더 더욱 그렇습니다. 쓸모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게 귀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의 교회에서 능력이 뒤떨어지거나 믿음과 행동이 미성숙한 형제 자매가 있습니까?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한 몸으로 부름 받은 교회의 구성원들입니다.
손가락을 다치면 온 신경이 쓰이고 몸 전체가 아프다는 것을 감지하듯이 우리는 몸을 구성하고 있는 어떤 지체도 없어서는 안될 그리고 너무나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똥구멍이 구리다고 베어버리랴'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이로써 모든 사람이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됩니다.(요13:34-35)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고전12:22-23)
어느 숲에 흑사병이 유행해 동물들은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동물의 왕인 사자가 비상회의를 소집했습니다. "하늘이 흑사병을 내린 것은 우리의 죄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들 중 가장 죄 많은 자를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한다. 자, 모두 자기의 죄를 고백하라."
호랑이가 제일 먼저 죄를 고백했습니다. "나는 며칠 전 염소를 잡아먹었다." 그러자 약삭빠른 여우가 거들었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염소가 너무 많으면 초원이 줄어듭니다. 잘 하신 일입니다." 표범과 늑대와 곰이 차례로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동물들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가장 힘이 없고 순진한 노새의 차례였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남의 밭에서 자란 풀을 몰래 뜯어먹은 적이 있어요." 그러자 동물들이 일제히 손가락으로 노새를 가리키며 소리쳤습니다. "유죄!"다.
정의보다 힘, 약자보다 강자가 판을 치는 사회는 부패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십자가 신앙입니다. 따라서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웃을 미워하고 멸시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균형을 이룰 때 십자가 신앙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중요하지 않은 말씀이 없지만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기신 말씀은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끼리는 서로가 시기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가장 크냐 하는 것 때문에 서로 다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을 떠나려 하는 예수님께서는 이제 너희가 사랑할 대상은 정확히 말해서 너희 '서로'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향한 수직적인 사랑은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는 수평적인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주님이 오시기 전에도 있었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에 보면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말씀된 옛 계명인데 왜 예수님은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이 계명을 새로운 차원, 새로운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계명에서 새로운 대상을 얻게 되었습니다. 레위기의 말씀이 유대인더러 자기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이웃은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영적인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웃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느 누구나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계명에서 새로운 척도를 발견합니다. 요한이 쓴 첫 번째 편지 4장 1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 사랑의 척도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발견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했습니다. 주님이 가지고 오신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새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계명은 새로운 능력에 의해서만 지켜질 수 있습니다. 이 능력은 성령의 능력, 각 성도 안에 계신 주님의 생명 자체입니다. 우리에게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랑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저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데 있어서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조금 전에 본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에서 사랑이란 말 대신에 예수라는 말을 넣으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는 오래 참고 예수는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예수는 자랑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 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예수는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랑의 화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예수님의 사랑하신 방법을 말씀하셨는데 우리도 그런 식으로 사랑한다면 예수님 대신 우리 이름을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말 대신에 '나' 라는 말을 넣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는 오래 참고 나는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나는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우리가 그런 식으로 읽으려면 스스로 겸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지 못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랑을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 주여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지식 가운데서 자라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 다.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고 하신 주님의 말씀보다 너희가 이제 나를 찾을 터이나 라고 하신 말씀에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해가 지난 후에 성령께서 요한복음서 기자인 사도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이 쓴 요한일서는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의 강해서라고도 말할 수 있는 책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이 십자가의 죽음을 피부로 느끼게 된 그런 긴장된 순간부터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마지막 떠나는 장면에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실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저희가 기다리는 메시야인 줄 믿고 3년 동안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예수님이 너무도 맥없이 처참하게 십자가에 처형된다고 생각하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이 들리지도 않았을 수가 있습니다. 정말 사람이 다급하게 되면 스승도 버릴 수 있고 믿음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같은 사람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은 정신적인 위기와 영적인 위기에서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 어려운 순간들을 꿋꿋이 버텨 나갈 수 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보셨습니다. 제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사랑밖에 없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새 계명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 앞에도 사랑만이 우리를 붙들어 주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사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랑의 진가는 어려울 때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법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하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고 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변함 없는 사랑, 끝까지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할 수 없다고 포기하지 말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알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사랑할 때뿐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제자는 선생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을 닮아야 합니다. 선생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선생 되신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거창하게 인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까이 있는 남편이나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함께 예배드리는 옆에 있는 믿음의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구태여 멀리 있는 사람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은 가까운 데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많은 사랑은 혀끝에 있지만 진짜 사랑은 손끝에 있습니다.
성경은 형제 사랑의 어떤 권고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첫째, 서로 사랑할 것을 권합니다.(요일4:20, 21)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요일 2:9- 10)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약4:11)
둘째, 연약한 형제를 권면하고 안위하고 붙들어 줄 것을 말씀합니다.(롬15:1)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살전5:14)
셋째, 서로 비방하지 말고(약4:11), 업신여기고 판단하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롬14:13- 15)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14:10)
넷째, 범죄한 형제를 위해서 기도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나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5:16)
다섯째, 궁핍한 형제를 도와주고, 기회 있는 대로 착한 일을 할 것을 권면합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약2:15,16)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요일3:17)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6:10)
여섯째,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할 것을 권합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벧전1:22)
일곱째, 서로 먼저 할 것과 지속될 것을 권고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12:10)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히13:1)
어떻게 하면 믿음의 형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에는 일반적인 다섯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둘째는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셋째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사랑을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더 깊게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2∼47)
험한 세상 속에서 서로 돕고 격려하며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관계가 될 때 참 믿음의 형제가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참 믿음의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은사를 받을 때 더 기쁘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말씀 속에서 주시는 사명을 깨달을 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믿음의 형제를 갖기 바랍니다. 서로 희생하며 양보하며 좋은 믿음의 관계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 기도: 사랑의 주님, 제게 많은 형제와 자매를 허락하셨습니다. 저들을 섬기기에 부족함 없게 하옵소서. 참 믿음의 형제를 갖는 축복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묵상: 당신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삶에서 실천하고 있습니까?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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