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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사랑하느냐(II)

요한복음 이재철............... 조회 수 2364 추천 수 0 2009.05.05 20: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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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21:15~17 
설교자 : 이재철 목사 
참고 : 주님의교회 주일 설교 1998년 4월 26일 

 우리말로는 전혀 구별이 되지 않지만, 신약성경을 기록한 헬라어는 의미와 대상에 따라 사랑 을 네 단어로 구별하고있습니다. 첫째는 '에로스'란 단어로 이것은 남녀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성 간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로 가족간에 주고받는 사랑은 '스토르게'라 합니다. 세 번째로 친구간의 사랑 즉 우정은 '필리아'입니다. 이 세 가지 사랑의 공통점은 모두 조건적이라는 것입 니다. 남녀간에 이루어지는 에로스적 사랑의 생명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까닭은 에로스 자체가 본래부터 조건적이기 때문입니다. 조건이 변함과 동시에 에로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 입니다. 흔히 가족간의 사랑엔 조건이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세월이 흘러 갈수록 부모 자식간의 갈등이 왜 점점 더 커져가기만 합니까? 한 부모의 몸 속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남남보다 더 못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형제들이 어찌 그다지도 많습니 까? 가족간의 사랑인 스토르게 역시 조건적 사랑 이상 일수가 없는 탓입니다. 같은 학교에 다녔 다고 해서 모두 다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서 참된 친구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게됩니다. 친구지간의 사랑인 필리아 또한 조건적인 사랑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조건적인 사랑과 구별하여 사용되는 헬라어의 네 번째 단어가 바로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란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상대의 상태나 수준, 나에 대한 상대의 태도여하에 상관없이 행하는 헌신적인 사랑입니다. 이처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을 뜻하는 헬라어 동사는 'agapao'입니다. 이동사의 본뜻은 '진심으로 기뻐한다' '진정으로 잘되기를 바랍니다' '중심으로 귀하게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누구를 기뻐하다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싫어진다 면, 불현듯 상대의 승승장구에 배가 아프도록 시기심이 인다면, 느닷없이 어떤 형태로든 상대를 한 번 짓밟아 버리고 싶어진다면, 그것은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었음을 의 미합니다. 아가페는 조건을 따지지 않기에 오직 아가페만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나 변함없는 사 랑일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할 사랑이 바로 이 아가페의 사랑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구별할 수가 없지만 그러나 헬라어 원전을 보면, 본문이 사랑을 분 명히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됩니다.

새벽이 동터오는 갈릴리바닷가―제자들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침묵을 지 키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 지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새벽녘 갈릴리의 정적과 고요를 가르시며 제자들의 대표격인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조건없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는 물음이었습니 다. 주님께서는 길이요 생명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을 조건없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 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은 곧 이런 뜻이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어떤 경우에도 이 길을 진심으로 기뻐하느냐?' '네가 변함없이 진리가 흥왕하기를 진정으로 즐거워하느냐?' '네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영원한 생명을 중심으로 귀하게 여기느냐?' 이것없이는 이 세상속에서 참 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원한 삶을 바르게 추구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주님을 필리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이것이 베드로의 답변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앞에 계신 주님께서는 여자가 아니었기에 베드로는 이성간의 사랑인 에로스의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고백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가족관계가 아니었으므로 가족 간에 주고받는 스토르게의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아가페의 참뜻을 알지 못했던 베드로로서는 주님을 향해 친구지간의 사랑, 즉 필리아의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고백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서는 그것이 주님께 드릴 수 있었던 최고의 사랑의 고백이었던 것 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토록 자신 있게 고백한 그 필리아의 사랑이란 실은 조건적인 사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이 그처럼 조건적인 사랑이었 기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더 이상 쓸모 없는 존재로 보였을 때, 주님을 배신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 베드로는 무지하고 있었습니다. 그처럼 조건을 따지는 사랑으로서는 얼마든지 주님을 또다시 배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베드로는 전혀 인식치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 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두 번째로 다시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조건 없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나 베드로 는 이번에도 주님께서 던지시는 질문의 진의를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다시 주님께 대답 을 드렸습니다.

'내가 주님을 필리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처음과 똑같은 답 변이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답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베드로는 자신 있게 처음의 대답을 되풀이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베드로의 한계요 수준이었습니다. 3년 동안이나 베드로와 숙식을 함께 하시면서 베드로를 가르치셨던 주님의로서는 참으로 한심하실 수밖에 없는, 무어라 질책치 않을 수 없는, 정녕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는 놀랍게도 베드로에 게 세 번째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필리아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주님께서는 또다시 조건 없는 아가페의 사랑을 다그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 여태 그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고 질책하 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정말 네가 친구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고 물어주심으로써 베드 로의 불완전한 고백을 고스란히 수용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에 베드로가 다다르지 못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베드로의 수준으로 당신 자신을 낮추어 주신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조건 없는 아가 페의 사랑을 일방적으로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조건 없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베 드로를 사랑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한심함에도 불구 하고, 베드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베드로를 'agapao'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처럼 형편없는 베드로를 진심으로 기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아가페의 사 랑이란 상대가 나의 수준에 맞추어 주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수준에 나를 맞추어 주 는 자발적인 자기 부인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인간을 'agapao' 한다는 것은 그의 모든 허물과 유치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재 있는 그대로의 그의 전 존재를 먼저 수용하는 것입니다. 아가페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베드로의 수준으로 당신을 낮추어 주셨을 때 베드로는 어떻게 되었습니 까? 그는 자신의 수준이 최고의 경지라 착각했습니까? 자신이 모든 면에서 완성된 존재인양 오해 하는 교만에 빠졌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17절 상반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 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의 수준에 당신을 맞추어 주셨을 때 베드로가 근심하였다고 본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에 나타나 있는 단어 'lupeo'는 근심 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다거나 비탄에 빠진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지를 물었을 때 엉뚱하게도 필리아의 사랑을 두 번씩이나 그토록 당당하게 고 백했던 베드로가, 주님께서 베드로의 수준에 당신을 맞추어주셨을 때 더욱 의기양양해지기는 커 녕 오히려 그는 가슴에 찢어지는 아픔을 느낌과 동시에 말할 수 없는 비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베드로 자신도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 까? 베드로에게 당신의 수준을 맞춰 주시는 주님의 베드로에 대한 조건 없는 아가페의 사랑이 베드로에게, 베드로 자신의 실상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세 번째에도 베드로가 아가페의 수준에 이르기를 요구하시는 질문을 던졌다 면, 주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답변은 계속 평행선을 그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필리아의 답을 하고서도 변함없이 당당하기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조건 없는 사 랑으로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 가시어 있는 그대로의 베드로를 온전히 품어 주셨을 때, 그 사랑 앞에서 그 사랑에 의해 베드로는 자신의 허물과 부족함을 보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불완전함과 형편없음과 한심함을 처절하게 확인했던 것입니다. 불과 열흘여전에 그는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 인하여 저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주님을 버리고 배신치 않았습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지난밤, 아니 몇 시간 전까지만 할지라도 주님을 까맣게 잊은 채 공허한 갈릴리가 마치 인생의 모든 것인 양 헛그물질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향해 두 번씩이나 주님을 사랑하노라 그토록 당당하게 고백했으니 자기란 인간은 얼마나 뻔뻔스러운 존재 입니까? 베드로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과 자신에 대한 비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처절함 속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17b)
처음과 두 번째 그의 대답은 이러 하였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당당하기 짝이 없는 답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세 번째 답변 속에서는 방금 전의 당당함 을 찾아볼래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여전히 아가페의 사랑이 아닌 필리아의 사랑으로 고백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본질적인 의미 는 먼저 두 번의 고백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먼저 두 번의 답변이 자기 수준을 완전하다 착 각하는 자의 교만한 자기 과시라 한다면, 마지막 답변은 자기 수준의 불완전함을 깨달은 자의 겸 손한 자기 회개로써 바로 다음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께 등을 돌렸던 배신자였습니다. 아직도 저는 허물투성이입니다. 주님을 향 한 저의 사랑은 여전히 부족하기 짝이 없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아가페의 사랑이 무 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사랑을 다하여 주님을 진심으로 사 랑하기 원하는 저의 중심을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비록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저의 그 중 심을 주님께서 열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드렸던 숱한 고백 중에서 가장 진실 된 그리고 겸손한 고백이었습니다. 그 렇다고 해서 베드로가 계속하여 이 고백의 수준, 다시 말해 필리아의 사랑의 수준에 안주해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이후 베드로가 사도행전의 막을 올리는 진정한 사도가 되었다는 것은 필 리아의 수준에서 벗어나 아가페의 수준에 이르렀음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의 막은 아가페에 의 해서만 열려지는 까닭입니다. 베드로의 수준이 이처럼 장성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조건 없 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형편없는 베드로의 수준에 맞추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는 자신의 수준으로 내려와 주신 주님의 사랑에 의해, 그 사랑을 힘입어, 그 사랑에 이끌려 아가 페의 수준에 다다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당신을 낮추시어 'agapao' 해 주시지 않 았던들 결코 있을 수 없는 오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아침 우리가 추구해야 할 아가페의 사랑을 다시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 니다.―'아가페의 사랑이란 상대의 수준에 나를 맞추어 주는 자발적인 자기부인의 능력인 동시 에, 나를 주님의 수준에 다다르게 하는 능동적인 힘이다.'

베드로가 주님을 향해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던 이날로부터 30여년이 흐른 뒤, 노인이 된 베 드로는 베드로전서 4장 7절∼8절을 통하여 이렇게 호소하였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는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서로 필리아의 사랑으로 우정을 쌓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가페의 사랑으로 서로 'agapao'하라는 말입니다. 아가페의 사 랑 속에서만 허물투성이인 상대의 수준까지 내려갈 수 있고 그를 그리스도의 수준까지 끌어 올려 줄 수 있기에, 아가페의 사랑 아니고서는 누구도 참 사랑을 아는 참 사람다울 수 없음을 자신의 삶을 통하여 확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가페를 알지 못했을 때 그는 주님과 사람을 동시에 배 신하는 짐승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에베소서 4장 15절 말씀이 누구에게든 가능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어떻게 우리 같은 하찮은 인간이 범사에 그리스도에게 까지 다다를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 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아예 포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사랑 안에서' 가능하다고 증 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사랑 역시 아가페의 사랑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오직 아 가페의 사랑 안에서 주님의 수준에까지 이를 수 있음은, 그 사랑 안에 거할 때 그 사랑의 원천 되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수준으로 내려오시사 우리를 범사에 걸쳐 당신의 수준으로 끌어 올려 주 심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 안에서 사람과 주님을 동시에 바르게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바른 사람 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암울하기 짝이 없는 현실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아가페 의 사랑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오늘도 주님께 서 당신 자신을 우리의 수준으로 낮추어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위하여서 입니까? 지금 현 재의 나를 그대로 품으시사 당신의 수준을 향해 또 한 단계 끌어올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바로 그 아가페 속에 거하십시오. 그 아가페를 힘입어 사람을 향해서는 땅 아래에까지 내려 가십시다. 그 아가페의 능력으로 위로는 주님에게까지 올라가십시다. 신앙이란 이처럼 주님의 아 가페 안에서 우리의 수준을 확장시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확장 없이는 내몸에서 태어난 자 식도, 내게 생명을 주신 부모님도 바르게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행복은 결코 겅제나 소유 그 자 체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목적으로서의 경제와 소유는 인간의 행복을 파괴하는 흉기일 뿐입니 다. 행복은 언제나 지금 나의 수준을 깨트려 가는 존재의 완성 즉 참사람이 되어 가는 속에 있고 그것은 아가페의 사랑 속에서만 가능하기에, 결국 인간의 행복은 아가페 안에만 존재하는 것입니 다. 그렇기에 2천년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은 단순히 베드로 개인 을 향한 질문이 아니라 실은 우리 모두를 주님의 아가페로 초청하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의 고백인 것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도 우리는 주님 앞에 설 수조차 없는 부끄러운 죄인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오 늘도 우리의 수준으로 친히 내려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를 또 다시 끌어 올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 오늘 이 아침이 2천년전 갈릴리 바닷가의 새벽이 되게 해 주시옵 소서. 베드로처럼 이 사랑에 우리 자신을 완전히 내어 맡기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 사랑을 힘 입어 아래로는 사람을 향해, 위로는 주님을 향해 우리 수준의 폭이 매일 확장되게 하옵소서. 이 사랑 속에서 사람과 주님을 바르게 사랑하는 희열을 맛보게 하옵소서. 이 사랑을 힘입어 나의 수 준을 끊임없이 탈피하여 그리스도의 참사람 되어 가는 행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이 사랑에 이끌 려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이 암울한 사회속에서 새 역사의 막을 올리는 이 시대의 사도행전이 되 게 하옵소서.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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