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성령과 불의 세례' - 깨달음의 삶

누가복음 오강남............... 조회 수 2177 추천 수 0 2009.05.06 23:41:39
.........
성경본문 : 눅3:16 
설교자 : 오강남 교수 
참고 :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 2008.05.28 새길교회 주일설교 

본문 :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오.” [누가복음 3 : 16]

두 가지 믿음
성경에 보면 적어도 두 가지 믿음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백부장과 같은 믿음입니다. 육체적 필요에 근거한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셨는데, 로마의 한 백부장이 찾아와 자기 종이 중풍으로 고생하고 있으니 좀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가보자고 하시니, “주님, 나는 주님을 내 집으로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마디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 종이 나을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을 듣고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마8:5-11) (눅7:1-10, 요4:43-54 참조)

 둘째는 사마리아 여인의 믿음입니다. 영적인 필요에 따른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야곱의 우물 가에 계시다가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온 것을 보시고 그 여자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께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렇게 말문을 트고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그 여인은 드디어 예수님께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결국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참으로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알고 그를 믿게 되었습니다. (요4:1-42)

 현재 한국 교회 그리스도인들 상당수가 첫 번째와 같이 육체적 필요 때문에 믿는 이들이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른바 기복 신앙입니다. 믿어서 건강이나 재정 형편이 좋아지고,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을 바라는 믿음입니다. ‘잘 살아 보자’ 믿음입니다. 저는 이것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일로 인도하는 중요한 동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저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이런 기복 신앙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 세례
여기 본문에서도 분명히 두 가지 세례가 있다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 스스로 자기가 주는 세례는 물로 받는 세례이고, 이후 예수님이 주시는 세례는 성령과 불로 받는 세례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물로 받는 세례만으로는 세례 요한의 종교에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님의 종교로 발 돋음 하려면 물로 받는 세례외에 ‘성령과 불로 받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 따르미라면 예수님 스스로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받는 세례’(막10:38)를 받고 예수님을 따르는 영적 차원의 종교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봅니다.

제2의 세례
여기서 그리스도교 초기 역사를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물로 받는 세례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하여 다시 제2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 두 번째 받는 세례를 ‘아폴루트로시스(apolutrosis)’라 불렀습니다. 해방, 놓임, 자유, 해탈입니다. 영적으로 새로 태어남입니다.

 이들은 일반 교인들을 자기들의 모임에 초청해서 몇 가지 특별한 성경 절을 가지고 토론하다가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소지가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별도로 선별해서 오랜 기간 준비를 시키고, 이제 정말로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 제2의 세례, 아폴루트로시스를 받게 하여, 다른 일반 신도들과 구별되게 하였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을 ‘영적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렀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물로 받는 세례만을 받은 사람은 하느님을 창조주로 경배하고 거룩한 심판자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지만, 성령과 불로 제2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음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어머니로, 만물의 근원으로, 궁극적으로 이런 모든 형상을 초월하는 ‘하나’로 볼 수 있게 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또 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자기들을 하느님의 ‘종’으로 생각하지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자기들을 하느님의 친 자녀요 상속자(갈4:7)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아폴루트로시스’는 이처럼 종의 신분에서 ‘풀려남(release)’을 뜻했습니다.

감추어진 비밀의 말씀
제2세기 교부 이레네우스 같은 초기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제2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기들을 보통 그리스도인들과 구별하는 사람들을 교회 내에 분열을 조장하는 위험한 무리라 보고 ‘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여 정죄했습니다. 이런 초기 지도자들의 박해와 억압 때문에 이처럼 새로운 ‘깨침’을 얻어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경험을 강조하는 흐름이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지하로 숨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제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소집된 니케아 공의회이후, 단순한 믿음만이 아니라 ‘깨침’을 강조하고, 성령과 불로 받는 세례를 주장하는 복음서들은 금서로 취급당하고 결국에는 파기 처분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대부분 파기 처분되었지만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부근에 있던 한 고대 수도원의 수도승 중에서 파기처분 대상이 된 금서들을 수도원 도서관에서 몰래 빼내어 항아리에 넣고 땅 속에 묻어 두었습니다. 그것이 1600년 동안 땅 속에 감추어져 있다가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Nag Hammadi)라는 곳에서 어느 농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교 앤드류 하비 교수 같은 이는 1945년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은 같은 해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맞먹는 폭발력을 가진 사건이라 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던 다른 복음서들, 예를 들어 빌립복음서,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 진리복음서, 도마복음서 등 여러 가지 복음서가 들어 있었는데, 그 중 제일 잘 알려진 것이 도마복음서입니다. 도마복음서는 첫머리에 이 복음서는 ‘살아계신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디두모 유다 도마가 받아 적은 비밀의 말씀들’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등장하시는 예수님은 무엇보다 ‘깨침’ 혹은 ‘깨달음’을 강조하는 예수님이십니다.

뱀과 비둘기
모두 114절로 되어 있는 이 도마복음을 제가 요즘 한 절 한 절 풀이를 해서 <기독교사상>에 연재하고 있는데, 저는 오늘 여기 새길 교회 말씀 증거의 주제와 관계하여 그 중 몇 절을 놓고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해보고저 합니다. 첫째 도마복음서 제39절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깨달음에 이르는 열쇠들을 가져다가 감추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여러분은 뱀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순진하십시오.”

마태복음(23:13)과 누가복음(11:52)에도 나오는 말입니다. 여기서 제가 ‘깨달음의 열쇠’라고 옮긴 말을 한글 개역이나 표준 새번역에는 ‘지식의 열쇠’라 번역했습니다. 물론 ‘그노시스(gnosis)’를 ‘지식’이라 번역할 수 있지만, 여기 언급하는 그노시스는 보통의 지식이 아니라 통찰, 예지, 직관, 꿰뚫어 봄 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깨달음’이나 ‘깨침’이 원의에 가까운 번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깨달음에 이르는 열쇠를 종교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감추었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혹은 율법 교사들은 이런 깨침의 진리에 무지하거나, 비록 무지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런 깊은 차원의 진리를 짐짓 외면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런 ‘깨침’의 진리를 이야기하거나 그리로 사람들을 인도하려는 사람들을 방해하거나 박해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이런 ‘깨침’의 가르침보다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고, 또 그것으로 사람들을 좌지우지하여 자기들의 세속적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무조건 율법에 순종하면 복 받는다는 단순하고 기복적인 차원의 종교만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른바 ‘사회적 통제(social control)’ 수단으로서의 종교가 무엇보다 중요하였습니다. 이처럼 ‘깨침’의 열쇠를 자기들도 사용하지 않으니 자기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 이런 열쇠가 있는 줄도 모르는 일반인들도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이들을 조심하라고 한 것입니다.

 어떻게 조심해야 합니까?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진하라’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뱀과 비둘기는 서로 양립 불가한 반대 개념이라 여겨질 수도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뱀처럼 되고 비둘기처럼 되는 것입니까?

 이 복음서가 쓰이어질 당시 뱀과 비둘기가 무엇을 상징하고 있었는가를 알아보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뱀은 일반적으로 배로 땅에 기는 형태를 가졌을 경우 사람의 발꿈치나 무는 불길한 것, 사악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머리를 하늘로 향해 올라가는 모양을 가지고 있을 경우 그것은 의식의 변화와 치유를 상징하는 좋은 동물입니다. 뱀은 특히 허물을 벗기 때문에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변화, 좀 더 구체적으로 신체의 최 상층부 에너지 근원이 열리면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변화를 상징합니다. 이집트 왕들이 머리에 뱀의 모양을 달고 있는 것이나,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한 뱀이 ‘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 가장 지혜로웠다’고(창3:1) 한 것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막에서 십자가에 달린 뱀을 쳐다보고 나았다고 하는 것이나, 지금도 의사협회 문양에 뱀이 그려져 있는 것이 모두 그 이유입니다.

 비둘기는 물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순결, 순진, 평화, 전령 등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쓰일 당시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성령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을 때 ‘성령’(눅3:22)이, 혹은 ‘하나님의 영’(마3:17)이, ‘비둘기’의 모양으로 내려왔다고 하는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는 바와 같습니다.

 따라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진하라는 말은, 서로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라, 둘 다 우리의 의식이 바뀌는 ‘깨침’의 체험을 하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깨침의 비밀을 감추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종교 지도자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격의 그런 사람들을 의존하지 말고, 제자들이 직접 깨침의 경지로 들어가라는 말이라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 대부분은 이런 ‘깨침의 열쇠’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있는지도 모르는 현실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그 동안 너무 오래 감추다가 이제 아주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린 셈입니다. 오늘 우리가 도마복음의 가르침에서 뭔가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이처럼 종교지도자들이 감추거나 잃어버린 ‘깨침의 열쇠’를 다시 찾아 활용하라는 권고를 따르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깨달음의 어려움
그러나 이렇게 깨달음/깨침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도마복음 제23절에 보면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택하려는데, 천 명 중에서 한 명, 만 명 중에서 두 명입니다. 그들이 모두 홀로 설 것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천 명 중 한명’, 심지어 ‘만 명 중 두 명’ 꼴이라니 그야말로 가물에 콩 나기 보다 더 어려운 셈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7:13, 눅13:24)는 말씀이나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불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생각이 있습니다.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음으로 성불하겠다는 선(禪)불교의 길을 보통 ‘난행도(難行道)’라고 하고 아미타불의 원력을 믿고 ‘나무아미타불’하면서 그의 이름을 부름으로 서방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토(淨土)종의 길을 ‘이행도(易行道)’라고 합니다. 물론 참선하겠다는 사람보다 염불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더 많습니다.

 불교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마디만 덧붙이고 싶습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불교의 경우 믿음을 강조하는 불자들이 비록 자기들은 깨침에 이를 수 없지만, 깨침을 강조하는 불자들을 우러러 보거나 존경할망정, 결코 이단이라 정죄하거나 박해하지 않는 반면,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레네우스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역사적으로도, 그리고 요즘 우리 주위에서 보는 것처럼 현실적으로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깨침을 얻겠다’는 사람들을 보면 이단이라 여길 뿐 아니라 아예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정죄하고 박멸하려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리스도교 초기에도 ‘깨달음’에 이르므로 모두 예수님처럼 자유의 사람이 되도록 하라는 도마복음 식 기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도마복음서 자체에서도 도마복음 식 기별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수의 상근기의 사람들을 위한 밀의적(esoteric)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어떻습니까? 옛날에는 비록 상근기를 가지고 태어났어도 교육의 기회가 없어서 이런 ‘난행도’ 같은 것을 접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문맹률이 97퍼센트 이상이던 고대 사회에서 누가 옆에서 말해주지 않으면 도마복음의 기별 같은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교대 사회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최근까지도 사정은 비슷했습니다. 한 가지 예로 미국인 리처드 베이커(Richard Baker)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보스턴에서 일본 교토(京都)로 건너가 선사 스즈키 순류(鈴木俊降) 밑에서 선 수행을 하고 선사(禪師)가 되어 샌프란시스코 선원(禪院)의 주지가 되었는데, 하루는 도마복음을 전문으로 하는 프린스턴 대학교 일레인 페이젤스 교수와 이야기하다가, “제가 도마복음을 미리 알았더라면 구태여 불자가 되어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도마복음의 가르침이 선불교의 그것과 너무나도 닮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이런 가르침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한 두 세대 전에만 해도 알 길이 별로 없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릅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고등 교육을 받았고, 인터넷 등 대중 매체의 발달로 정보화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한 세대만 먼저 태어났으면 그리스도교에 깨달음/깨침을 강조하는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지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이제는 들을 귀, 알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 요엘서에 보면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2:28)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후’가 오늘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지적·영적 환경 속에서는 ‘가물에 콩 나듯’이가 아니라 이제 가마솥에 ‘콩 튀 듯’하리라 말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20세기 가톨릭 최대의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도 21세기 그리스도교는 ‘신비주의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신비주의적’이라는 말은 물론 깨달음을 강조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독일의 신학자로서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오래 가르친 도로테 죌레(Dorthee Soelle)도 최근에 펴낸 그의 책 Silent Cry에서 신비주의 체험이 역사적으로 특수한 몇몇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무엇이 아니라 이제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서 있을 수 있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이른바 ‘신비주의의 민주화(demoncratization of mysticism)'을 주장했습니다.

 오늘처럼 정보화된 시대에 교육의 기회도 많고,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특별히 박해받는 일도 사라진 21세기에는 종교가 무조건 믿어라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음을 강조하는 신비적 경향성을 띠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교도 믿음과 함께 깨침을 함께 강조하는 폭넓은 종교로 변해야 하고, 이리하여 ‘무조건 믿으라’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아하!’를 연발하며 갈 수 있는 깨침의 길도 열려 있음을 알릴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둘을 하나로
이제 오늘 같이 변화된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할 때 그 깨달음의 결과는 무엇인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도마복음 2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젖을 먹고 있는 아이들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젖 먹는 아이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이들처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둘을 하나로 하고...”

성경 복음서에 보면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께 나올 때 제자들이 이를 꾸짖자 예수님이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10:14, 마19:14, 눅18:16)고 하셨습니다. 도마복음과 다른 점은 여기 공관복음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갓난아기라는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마복음은 그것이 젖을 먹고 있는 갓난아기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또 공관복음서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천국 가는 이유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도마복음은 단도직입적으로 그 이유를 밝히며, 이 젖먹이 갓난아기들이야 말로 ‘둘을 하나로’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문제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면 좋겠지만, 둘을 하나로 한다는 말의 가장 핵심적인 뜻은 하느님과 내가 둘로 떨어져 있던 상태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양에서 말하는 신인합일, 천지합일의 사상입니다. 인내천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중세 신비주의 사상가 니콜라우스(Nicolas of Cusa, 1401-1464)가 말하는 ‘양극의 조화(coincidentia oppositorum)’를 뜻합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불이(不二)의 경지에 이르라는 것입니다.

 사실 세계 여러 종교에서 ‘양극의 조화’처럼 중요한 개념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음양의 조화를 말하는 태극 표시는 말할 것도 없고, 위로 향한 삼각형과 아래로 향한 삼각형을 포개놓은 유대교의 ‘다윗의 별’이라든가, 수직선과 수평선을 교차시킨 그리스도교의 십자가나, 두 원을 아래위로 반반씩 겹쳐놓고 그 중 겹쳐진 부분을 잘라 만든 초기 그리스도교의 물고기(ΙΧΘΥΣ) 상징, 불교 사찰에서 보는 만(卍)자 등이 모두 이런 양극의 조화를 이상으로 삼고 있다는 역사적 증거들입니다.

메타노이아의 약속
저는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약속하신 깨달음의 약속을 믿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도마복음 28절을 인용합니다. (개역식 번역)

 “나는 내 설 곳을 세상 가운데 두고, 육신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났노라. 나는 저들이 취해 있음을 보았지만, 그 누구도 목말라하는 것을 보지 못하매, 내 영혼은 이런 이들로 인해 아파하노라. 이는 저들이 저들 마음의 눈이 멀어 저들이 빈손으로 세상에 왔다가 빈손으로 세상을 떠나려 하는 바를 알지 못함이라. 그러나 지금은 저들이 취해 있지만, 깨면 저들은 회개하리라.”

 여기서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육신의 몸으로 오신 목적을 천명합니다. 그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려는 것이 아닙니다. 술 취한 상태, 잠자는 상태에 있는 인간들을 일깨우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 실존의 한계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 세계만을 실재로 알고 있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인간들에게 현상계 너머에 있는, 혹은 그 바탕이 되는 실재, 그리고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보도록 깨우쳐 주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피를 흘려 그 피 값으로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믿는 이른바 ‘대속적 기독론(substitutionary Christology)’과 현격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구절은 종교사적으로 너무나도 중요한 발언입니다. 여기에서 ‘그들이 술에서 깨면 그들은 그들의 의식을 바꿀 것’이라고 할 때 ‘의식을 바꿀 것입니다’라고 번역한 이 말의 원문은 콥트어 판에서도 그리스말을 그대로 사용하여 ‘메타노이아(metanoia)’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고 외쳤을 때 그 ‘회개’에 해당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 동안 여기 저기 책이나 논문에서 계속해서 이 말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습니다만, ‘메타노이아’는 어원적으로 ‘의식(noia)의 변화(meta)’를 의미합니다. 단순히 옛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작정한다는 식의 회개라는 뜻 이상입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이분법적 의식을 변화시켜 초이분법적(trans-dualistic) 의식을 갖게 된다고 하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공관복음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하는 예수님의 ‘천국 복음’이란 결국 잠에서 깨어남, 깨침입니다.

 문제는 메타노이아입니다. 여기 이 절은 이 메타노이아의 체험이 우리에게 가능하다는 것을 보장하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기가 막힌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맺는 말
저는 오늘 새길 자매형제들에게 바라고 싶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을 이미 아시고 계시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됩니다만, 다시 한 번 매일 매일 깨달음 혹은 깨침의 경험을 하면서 사는 것이 예수님께서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바라시는 최대의 소원이라는 것을 깨달으시고, 이런 한 단계 높은 종교적 삶에서 더욱 깊은 의미와 기쁨을 발견하게 되시기 빕니다. 감사합니다.

기도
하느님, 저희들 참된 깨달음을 통해 천국이, 당시의 임재하심이 우리 속에 있음을 발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처럼 저희들이 당신과 하나임을 깨닫는 깨달음을 통해 저희의 삶이 매일 매일 뿌듯하고 보람된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sort 조회 수
16626 요한복음 요한의 아들 시몬아 요21:15∼17  이재철 목사  2009-05-05 4648
16625 요한복음 내 어린양, 내 양, 내 요21:15∼17  이재철 목사  2009-05-05 2193
16624 요한복음 예수 따라 살기 요14:8-14  윤여성 형제  2009-05-06 1711
16623 사도행전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 행2:37-38  최광진 형제  2009-05-06 1885
» 누가복음 '성령과 불의 세례' - 깨달음의 삶 눅3:16  오강남 교수  2009-05-06 2177
16621 출애굽기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출32:1-5  김기동 자매  2009-05-06 2176
16620 야고보서 욕심의 양면성과 가난한 욕심 약1:15-16  노은기 형제  2009-05-06 1882
16619 창세기 버리고 포기하라 창13:5-18  한태완 목사  2009-05-07 1755
16618 마태복음 왜 선교해야 하나? 마28:18-20  조용기 목사  2009-05-07 1902
16617 사무엘하 속죄제와 속건제 삼하21:1-9  조용기 목사  2009-05-07 3930
16616 마태복음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면 마7:12  조용기 목사  2009-05-07 3079
16615 설교자료 설교의 해석학적 요청-김세진 목사 설교비평  정용섭 목사  2009-05-08 2978
16614 설교자료 큐티 식 설교의 효율성과 미숙성-최영기 목사 설교비평  정용섭 목사  2009-05-08 6002
16613 설교자료 말씀의 숨과 결-대한성서공회 민영진 목사 설교비평  정용섭 목사  2009-05-08 3526
16612 설교자료 사람다운 사람이 그리운 사람 -송기득 교수 설교비평  정용섭 목사  2009-05-08 3246
16611 설교자료 토종목사가 전하는 토종복음의 정체 -방인근 목사 설교비평  정용섭 목사  2009-05-08 2814
16610 마태복음 바른 기도의 중심 마6:33-34  강종수 목사  2009-05-10 2279
16609 고린도전 이웃을 판단하지 말라 고전4:5  한태완 목사  2009-05-10 2551
16608 빌립보서 긍정적 마음과 자세를 갖자 빌4:11-13  한태완 목사  2009-05-10 2573
16607 마태복음 신앙생활과 받은 달란트 마25:14-30  한태완 목사  2009-05-10 2417
16606 잠언 부모와 자녀 교육 잠13:1  한태완 목사  2009-05-10 2039
16605 창세기 죄의 유혹 창39:7-20  한태완 목사  2009-05-10 2099
16604 갈라디아 거짓신앙과 참 신앙의 차이 갈6:1-14  박홍섭 목사  2009-05-11 2467
16603 요한복음 내양을 먹이라, 치라 요21:15∼17  이재철 목사  2009-05-11 5227
16602 요한복음 죽음으로 영광을 ―성령강림주일/성찬주일 요21:18∼24  이재철 목사  2009-05-11 3011
16601 요한복음 너는 나를 따르라 요21:18∼24  이재철 목사  2009-05-12 2774
16600 요한복음 하신 것이 아니라 요21:18∼24  이재철 목사  2009-05-12 1868
16599 요한복음 부족할 줄 아노라 요21:25  이재철 목사  2009-05-12 2473
16598 요한복음 빛이 비치니 요1:5  박경미 교수  2009-05-12 1851
16597 다니엘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나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 단4:13-18  김시원 목사  2009-05-12 2247
16596 에스겔 1 + 1 = 1 겔37:15~22  이상익 형제  2009-05-12 1765
16595 요엘 이상을 보며, 꿈을 꾸며 욜2:28-29  최만자 자매  2009-05-12 2434
16594 요한일서 용서하고 잊어버리고 사랑하라 요일4: 7-12  조용기 목사  2009-05-14 2399
16593 전도서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 전3:1-12  조용기 목사  2009-05-14 1865
16592 마태복음 왜 선교해야 하나? 마28:18-20  조용기 목사  2009-05-14 1731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