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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이재철............... 조회 수 2779 추천 수 0 2009.05.12 00:08:59
.........
성경본문 : 요21:18∼24 
설교자 : 이재철 목사 
참고 : 주님의교회 주일낮 예배/1998. 6. 7 

뚜렷한 목적과 목표가 없을 때, 사람들은 그같은 행보를 가리켜 방랑 혹은 방황이라고 부릅니다. 방황의 시간이
길고 방랑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 삶이 지치고 고달플 수밖에 없는 것은,목적과 목표를 상실한 삶 속에서는 생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미 없는 삶의 반복은 생의 고갈에 지나지 않기에 그것은 고통 이상일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무릇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분명한 목적과 목표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분명한 목표를 향한 삶만이 하루하루가 생의 보람으로 축적되게 됩니다. 그러나 뚜렷한 목표를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뚜렷하되 바른 목표를 세우는 것입니다. 목표가 바르지 못할 때 보람을 느낄 수는 있으나, 아니 더 진한 보람을 얻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신과 자신 주위 사람의 파멸로 귀결되고 맙니다.
 
한 말단 세무 공무원의 아내가 삶의 목표를 세웠습니다. 10년 이내에 10억원을 모아 큰 평수의 아파트에 대형 자가용차를 굴리며 남부럽지 않게 살겠다는 목표였습니다. 한마디로 그녀의 인생 목적은 떼부자가 되는 것이였습니다.
분명한 기간에 금액까지 설정했으니 얼마나 뚜렷하고 야무진 목표입니까? 그러나 그 여인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가 행상이라도 하면서 돈을 모우려 애쓰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전적으로 의존했던 것은 말단 세무 공무원인 남편이 관내 업체로부터 받아 오는 부정한 뇌물이었습니다.
그녀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남편이 받아 오는 뇌물을 꼬박 꼬박 가계부에 기재하였고, 그 액수가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많자 자신의 목표를 앞당겨 이룰 수 있겠다는 감격의 글귀를 가계부에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날마다 기대 이상의 돈을 모아 가는 그 여인의 삶이 얼마나 보람스러웠겠습니까? 매일 매일 뿌듯하기 그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한 뇌물 위에 세워진 그녀의 인생 목표는 분명하기는 했을망정 바른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변명의 여지없이 그릇된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그 그릇된 목표는 삽시간에 자신의 가정을 파멸시키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부패공무원 자신은 범죄자의 아내, 그들의 자식은 부끄러운 탐관오리의 자식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일이 터지자 그녀는 이렇게 항변했을지도 모릅니다. 이게 어떻게 우리만의 일이냐고,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우리만 억울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참됨과 그릇됨은 결코 다수결에 의해 판가름되지 않습니다. 참됨과 그릇됨은 어떤 경우에라도 절대적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릇된 것은 오늘 흥하는 것 같으나 반드시 그 자체로 썩어 소멸될 뿐이고, 참된 것은 연한 순처럼 이내 이지러질 것 같으나 필경 굳게 영글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이 참된 의미와 보람을 갖기 위해서는 분명할 뿐만 아니라 바른 목표를 지녀야만 합니다. 설령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욕망에 사로잡혀 그릇된 목표를 당연한 듯 추구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와 같은 시류에 휩쓸림 없이 바른 목표를 세우고 이루어 가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밤이 맞도록 공허하게 헛 그물질만 하던 갈릴리 바다―그러나 이제 새벽이 동터 오는 그 바닷가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주님을 사랑한다 함은 주님의 양들을 구별 없이 치고 먹이는 구체적인 삶이어야 함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은 원치 않는 때에 원치 않는 장소에서 원치 않는 방법으로 느닷없이 찾아오게 될 죽음과 죽음의 의미를 직시하며 살아가는 자에게만 가능함과, 결국 그런 자의 삶과 죽음만이 하나님께 영광 일수 있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런 연후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3년전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 잡던 베드로가 처음 주님을 뵙던 날, 주님께서는 그날도 베드로에게 주님을 따라올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 순간부터 베드로는 배와 그물은 물론이요 가정까지 버려둔채 3년 동안이나 밤낮으로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도 3년이나 지난 지금 왜 주님께서는 또다시 `나를 따르라'고 새삼스럽게 명령하고 계십니까?
베드로가 지난 3년동안 주님과 동행했던 동인은 베드로의 욕망이었습니다. 자신의 두눈으로 직접 확인했던 주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3년동안 베드로의 몸은 비록 주님을 따라다녔을 망정, 그의 마음은 반대로 주님을 이리저리 멋대로 끌고 다니려 하였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생각과 상반되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함부러 꾸짖는가 하면(마 16:22), 예수님 앞에서 누가 더 높은지를 놓고 제자들과 버릇없이 다투기도 하였고(눅 22:24), 또 예수님을 면전에서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난 밤만 할지라도 주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밤새도록 헛그물질을 해대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도저히 제자의 행동거지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에 대하여 스스로를 주인이요 스승으로 착각한 어이없는 짓거리였습니다. 지난 3년간 베드로의 몸이 주님을 따라 다녔지만 그 삶이 참될 수도, 진실될수도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사실을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지금, 복음서의 마지막 장 마지막 단락에서 다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냥 `나를 따르라'고 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네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말씀하신 후,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을 향해 두팔을 벌려 항복하고 온 중심으로 주님을 따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 중심이 진리이신 주님을 따를 때에만 그 삶이 진리안에서 참되고 바르게 가꾸어질 수 있음이었습니다. 주님의 이 명령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했었는지를 본문 20절∼21절이 이렇게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20∼21)
 
여기에서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란 이미 아는바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중 사도 요한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은 베드로는 앞에 계신 주님께 대답을 드리는 대신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등뒤에 있는 동료 요한을 발견하고는 주님을 향하여 도리어 질문을 던졌습니다.―`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이 질문이야말로 주님의 명령에 대한 베드로의 일종의 항변이었습니다.― `왜 제게만 주님을 따르라 명령하십니까?' `왜 요한에게는 두팔을 벌려 주님께 항복하고 온 중심으로 주님을 따르라 명령치 않으십니까?

' `보십시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적당히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저만입니까?
베드로의 이 항변에 대하여 본문 22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22)
 베드로의 항변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지극히 간단했습니다. 즉 주님께서 요한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시건 그것은
베드로와는 아무른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가 온 중심으로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은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주님께 등을 돌린다 할지라도 너는 절대적으로 진리 되신 주님만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진리의 절대성 자체가 어떤 경우이든 상대화될 수 없는 까닭이었습니다. 이 이후 베드로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우리는 먼저 사도행전을 통하여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앉은뱅이로 태어나 마흔 살이 되기까지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거지가 베드로에 의해 주님의 이름으로 치유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에 귀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리고 서기관들이 한데 모여, 사도들에게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그 어떤 일도 행치 말 것을 엄하게 명하였습니다. 만일 어길 경우 생명이 온전치 못할 것이라 위협하면서 말입니다. 수적으로는 대제사장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적어도 다수결 원칙에 의한다면 사도들은 대제사장 측의 명령을 따라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의 명령을 다음과 같이 일축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것보다 옳은가 판단 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 4:19-20)
 
사도행전의 막이 오름과 동시에 이미 베드로는 절대적으로 진리이신 주님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삶을 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니 만약 베드로가 절대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삶을 추구하지 않았던들, 베드로가 사도행전의 서막을 여는 주역이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19절 ∼21절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주님을 절대적으로 따르다가 설령 그로 인해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진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조금도 개의치 않는 반석과도 같은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외경속에서는 말년의 베드로를 만나게 됩니다. 정경인 성경 속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복음과 관련하여 중요한 문서들을 따로 엮어 외경이라 부르는데, 그 외경의 베드로행전은 베드로의 말년의 모습을 전해주고있습니다. 폭군 네로에 의한 기독교 대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베드로 역시 로마에 있었습니다. 로마 당국이 당시 기독교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베드로의 색출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로마를 떠나 피신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변장을 한 뒤에 도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베드로 행전 35장이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성문에 다다렀을때에 베드로는 주님께서 로마로 들어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향해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셨습니다.―`나는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로마로 들어간단다.' 베드로가 주님께 또 물었습니다.―주여, 주님께서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실 작정이란 말입니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그렇단다. 베드로야, 내가 또 십자가에 못 박힐 수밖에 없구나.'
그때 베드로는 정신이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크게 기뻐하며 주님을 찬미하면서 로마로 되돌아갔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로 베드로 자신에게 일어나야 할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를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진리를 증거 하는 것만이 주님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임을 깨닫는 즉시 베드로는 로마로부터 도망치던 길에서 돌아서 로마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길은 죽음의 길임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에게 있어 그 길은 절대적인 길임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영감을 얻은 작가 생케비치가 쓴 소설이 그 유명한 `쿼바디스'입니다.
 
이상에서 살핀 사도행전과 베드로전서 그리고 외경의 베드로행전은 무엇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까? 그 동안 상대적으로 주님을 따랐던 베드로가, 새벽이 동터 오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을 절대적으로 따르기 시작한 이래 중년을 거쳐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그 삶이 흔들림 없이 지속되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를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진리는 상대화 할 수 없고 절대적으로 수용해야 함을 바르게 안 이상, 일평생 주님을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그의 삶의 목적과 목표는 추호도 흔들릴 수 없었습니다.
 
이천년전 구라파와 중동 그리고 북부 아프리카까지 지배하던 거대한 로마제국에 비한다면,당시 베드로란 존재와 그가 행한 일이란 미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이 소멸되지 않고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욱
공고해짐은, 이천년전 그의 목표가 어떤 경우에도 주님만 따르는 참되고 바른 목표―절대적인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돈이나 권력을 목표로 했다면 그의 삶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에게 돈이나 물질이 필요했다면 그것이 목적이거나 목표여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주님을 따르기 위한 도구로 삼기 위함이 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바른 목적과 목표가 있다면, 생의 전반에 걸쳐 주님만 따르는 절대적인 삶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모두를 향하여, 세상 사람이 다 그릇 되이 산다 할지라도 `너는 나를 따르라'고 절대적으로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절대적으로 명령하시는 까닭은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절대 진리를 절대목표를 삼는 삶만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살아 남기에, 그 영원한 삶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문자 그대로 맨손으로 상경하여 15년 동안 엄청난 돈을 벌었던 교우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돈을 버는 비결을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검은 돈을 조성하여 어디에 얼마를 뿌리면 얼마만큼의 돈이 들어온다는 확실한 공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돈을 벌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치부 방법을 나쁘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거의 모든 세상 사람이 다 그런 식으로 돈을 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진리이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진리의 잣대로 자신을 재어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불의하고 거짓된 방법으로 치부한 자신의 모습이야말로 진리의 거울 속에서 도둑으로 비쳐졌던 것입니다. 지금처럼 돈을 번다는 것은 돈을 벌면 벌수록 점점 더 지옥에 가까워지는 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돈 자체를 목표로 삼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씀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황금같은 15년을 허망한 욕망으로 인해 죄와 맞바꾸었다는 사실을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 순간부터 삶의 목표를 바꾸었습니다.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불의하게 돈을 벌던 방법을 완전히 청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떨어지기 시작한 매출은 ¼까지 떨어졌습니다. 정직하게 회사를 경영함으로 인하여 매출이 무려 75%나 감소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라진 75%를 아쉬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직하게 살고도 남아있는 25%에 만족하였습니다. 하루는 중역이 그에게 간곡히 당부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같이 총체적으로 부패한 사회 속에서 큰돈을 벌려면 어쩔 수 없으니 옛날 방식대로 사업하자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 하였습니다. 설령 억만금을 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된 그가 예전 도둑으로 되돌아갈 수는 절대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두(冒頭)에 부정한 뇌물을 받아 떼부자가 될 목표를 갖고 있던 말단 세무 공무원 부부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말단 공무원이 불과 몇 년만에 몇억원을 치부한 그 사건이 터졌을 때 세상의 여론은 그 부부를 도둑 다루듯 했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사실 도둑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이신 주님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삶을 목표로 갖지않는한, 그 도둑 같은 부부와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 보시기에는 다 똑같은 도둑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중 제8계명을 통하여 `도적질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이미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전과자들에게만 국한된 계명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삶의 목표로 삼지 않는 우리 모두를 향한 명령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도적처럼 살라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도둑의 삶을 청산하고 절대 진리를 목표로 하는 새 사람으로 살게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거짓되이 사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된 우리는 진리를 절대적으로 따르기를 포기치 맙시다. 절대 진리를 목표로 삼는 참된 그리스도인 10명만 있으면 세계의 역사가 새로워질 수 있음이 이미 2천년에 증명되었음을 상기하며 용기를 가집시다. 거짓과 타협하는 불의한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합니다.―`털어서 먼지 않나는 사람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털어서 먼지 날 수 밖에 없는 옷이난 물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격과 양심을 갖춘 인간입니다. 그렇기에 털어서 먼지 않나는 사람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 장본인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따르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그 동안 주님을 따르기보다는 세상을 따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짓되이 살고있음으로인해 우리의 거짓된 삶을 정당화시켜 왔습니다. 그 결과 도적처럼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이 도적이라는 사실을 자각치도 못하는 한심한 인간이었습니다.
주님! 나는 요행히도 아직 수갑만 차지 않았을 뿐, 내가 바로 도적이었음을 이 시간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도적 같은 나로 인해 대한민국이란 이 사회가 이처럼 총체적으로 부패한 사회가 되었음을 회개 드립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식들 역시 이 부패한 사회속에서 우리처럼 거짓되고 불의한 방법으로 살기를 진정코 원치 않습니다. 이 시간 이후로, 우리 삶의 목표가 새로워지게 하옵소서. 절대 진리를 변함없는 목표로 삼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주옵소서.
그리스도인된 우리로 인해 이제 이 사회가 맑아지게 도와주시옵소서.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불의하게 모은 재산이 아니라, 절대 진리 되신 주님을 따른 바른 믿음의 삶뿐임을 기억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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