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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아니하실 찌라도-나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

다니엘 김시원............... 조회 수 2250 추천 수 0 2009.05.12 20: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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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단4:13-18 
설교자 : 김시원 목사 
참고 : 성민교회 교육목사/ 2008.07.27새길교회 주일설교 

 ‘느부갓네살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오라 명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 하였느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심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우리를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예수 믿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조롱받는 세상입니다. 제가 2년 반 전에 목사 안수 받을 때 KNCC 부총무 임흥기 목사님이 축사하시면서 그날 안수 받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축하해야 할지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라는 것이 존경 받기는 커녕 우스꽝스러운 시대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0이 다 된 나이에 새삼스럽게 왜 목사가 되어야 하는지 저도 스스로 많이 물었습니다. 목사가 사업가가 장사꾼처럼 여겨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 믿는 사람들은 독선적이라고 비난받는 세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고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구원을 받는 길이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 말고는 다른 신은 없고, 그래서 다른 신을 믿는 사람들은 다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함께 구원받게 하기 위하여, 또 예수님이 마태복음 28장에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말씀하셨기에,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는 일을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년에 아프가니스탄에 단기간 선교 갔던 사람들이 피납 되었을 때 그 사람들 모두 민족적인 죄인이 되었습니다. 남의 종교를 무시하고 그렇게 해외여행 가듯이 단기 선교 가는 일에 대해 같은 예수를 믿는 우리들도 당당할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또 위선적이라고 비난받는 세상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 속았다는 사람, 사기 당했다고 하는 사람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랜드 회장이 교회에 엄청나게 헌금하는 장로임에도 비정규직에게 얼마나 가혹하게 했는지를 한 동안 대중매체를 통해 들으면서 우리는 뭐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끼리는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샤머니즘화 하여 기복주의 신앙으로 빠져 개인구원 물질의 축복만을 구한 결과라고 자아비판 하기도 하고, 또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너나 잘 하세요” 라는 말을 듣는 세상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비이성적이고 비윤리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세상에서 지금 우리가 삽니다. 더 이상 기독교인이 늘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 교회 저 교회 방황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 된 직후에 소망교회에 일주일에 천 명 가까이 등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소문도 듣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른 교회에서 옮겨간 사람들이건 새로 교회 다니려고 하는 사람들이건,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유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슬람권에 단기 선교여행 간 적이 없어도, 내가 교인이라고 순진한 척 하면서 남에게 사기 친 적 없어도, 또 교회 다니는 것을 이용하여 치부하거나 출세하려고 한 적이 없어도, 이런 상황에 대해 우리가 서로를 탓하거나 아니면 우리를 욕하고 비난하는 바깥사람들을 탓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나는 깨끗합니다 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유죄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유명한 말씀입니다. 유년주일학교에서 믿음의 위인들 이야기 나올 때마다 단골소재가 됩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졌던 이야기와 나란히 가르쳐지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들어있는 다니엘서는 1장에서 6장까지는 바벨론 포로기를 배경으로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 뒷부분은 베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이 앞으로 올 시대에 대하여 묵시적인 예언을 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학자들은 다니엘서가 바벨론 포로기에 쓰인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바벨론 왕과 페르샤 왕 이름과 연대 등 역사적인 사실에서 오류가 많을 뿐더러, 다니엘서 뒷부분의 묵시문학적인 서술 형식은 포로기 후기 시대 말기에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서의 배경은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에게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있던 시기라기보다는, 그 뒤로 약 사백년 지나서 알렉산더 대왕 이후의 헬레니즘 시대에,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가혹한 지배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항거했던 마카베오 전쟁 중에 쓰인 것이라고 말해집니다.

 다니엘서의 저작 시기가 바벨론 포로기이든, 그 사백년 후인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학정 하에서든지 간에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금지되거나 위협을 받던 시절을 배경으로 합니다. 지금 우리는 물론 오늘 말씀에 나오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우리의 신앙을 위협받는 시대에 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의 자유가 차고 넘칩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붙잡혀가거나 사자 굴에 던져지는 일이 없습니다. 일제시대  처럼 신사에 참배 안한다고 잡혀가거나 금신상에 절 안 한다고 불구덩이에 던져지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도전을 합니다. 그동안 우리 민족은 19세기 말부터 시작한 민족적인 출애급 이후에 일제시대, 6.25전쟁, 군부독재 등 눈물 나는 광야 생활의 고난을 거쳐 물질적으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가나안에 우리가 들어왔습니다. 우리 사회에 아직도 빈곤계층이 있지만 그리고 빈부 격차가 점점 심해지는 것을 우리가 한탄하지만, 우리나라 전체적으로는 전 인류의 10% 안에 드는 부를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광야 생활 동안 하나님을 섬기던 신앙을 가나안에 들어와서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일로 바꾸어버렸던 이스라엘 민족처럼 우리도 이제 어느새 물질과 세상이라는 우상을 섬기게 되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풍요의 신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세상이 말하는 이것저것을 많이 기웃거렸습니다. 하나님이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포로로 내어주셨듯이, 세상에 한 눈 팔고 있는 우리를 하나님은 이 시대 문명과 사회에 포로 되게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느부삿넷살 왕이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하는 위협과 조롱은 이 시대 이 사회가 오늘 우리에게 하는 비난과 조롱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았다고 노하고 분해합니다. 그리고 설득합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줄 테니 절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위협합니다. 이래도 절 안하면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고 말입니다.

 느부갓넷살은 하나님을 섬기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금신상에게만 절하라고 명령내리지도 않았습니다. 온갖 악기를 연주할 때 그 소리에 맞추어 금신상에게 절하라고 했을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필요하면 다른 신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종교의 신이든, 과학이든, 물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우리가 섬길 유일한 대상이 아니라, 여럿의 신들 중 하나로 만들기를 이 세상은 원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은 이것을 제일 끔찍하게 싫어하십니다. 오죽하면 하나님 스스로 나는 질투의 하나님이라고 말했을까요.(출20:5 그것들에게 정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출34: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요즈음처럼 다양성을 추구하고 혼자만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 우스워 보이는 세상에서 얼마나 별 볼일 없 어 보이는 신인지요 하나님이. 신이 되어가지고 너그럽지 못하고, 옹졸하게 다른 쪽에 눈길을 돌리면 질투를 하겠다고 아예 선언을 하는 하나님이 이 시대에서 보면 참 별 볼일입니다. 작년에 인기 있었던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에서처럼 배우자가 바람을 피면 그 배신감에 속으로 치를 떨지언정, 자존심 때문에 난리를 치기 보다는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하고 이혼해주는 것이 훨씬 지성적이고 이성적으로 보이고 박수를 받는 세상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 말고는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걸 믿든지 안 믿든지 둘 중 하나이지 중간은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중간이 있다고 말합니다, 느부갓넷살처럼. 때에 따라 이쪽저쪽 섬기면 된다고 말하며 우리를 설득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부하면 화를 내고 위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간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독선적인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아니면 그런 하나님이라면 믿고 싶지 않습니까? 좀 더 이성적으로 여유 있고 너그러운 근사한 하나님을 믿고 싶습니까?

 느부갓넷살은 불에 던지겠다고 위협하면서 그 세 친구를 조롱합니다. 너희를 어떤 신이 내 손에서 건져낼 능력이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우리도 그런 조롱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어도 세상에서 오는 고난이나 질병이나 고통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않습니다. 자연재해로부터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셔서 세상만민을 구원하시려 자기 아들을 죽게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고 세상은 우리에게 따집니다. 내 안에도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쓰나미나 태풍 지진 등으로 수많은 인명이 죽어가는 것을 왜 내버려두시는지. 하나님이 정말 사랑의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이런 의문은 태초에 이브가 사탄에게 받은 질문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 하시더냐 라는 질문에, 정말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주고서 치사하게 그 나무 과실만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정말 이상하다 그래서 이브는 대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짝 바꿉니다. 하나님은 그 과실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반드시 죽으리라 말씀하셨는데, 이브는 하나님이 죽을까 하노라 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하자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으로 바꾸어놓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게 이상한 분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일 하나 따먹었다고 반드시 죽는다고 하는 것은 너무 인간적이지 못하고 또 비이성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믿지 않는 친구들로부터도 이 이야기에 대한 조롱을 듣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따먹을 것을 몰랐을 리 없고 알면서 왜 만들었냐고. 심술쟁이냐, 미리 함정을 만들어놓고 죄졌다고 동산에서 내쫓고 나중에 또 그 죄에서 구원해준다고 스스로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다고 하고 정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로서는 영 믿기 어려운 하나님입니다. 신학에서 창세기의 이야기를 근동의 창조설화에서 유래를 찾고 이리저리 설명해주지만 세상 사람들을 설득해서 믿게 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까지도 창세기 말씀은 그냥 세상이 어떻게 처음 시작되었는지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설화 형식쯤으로 생각하고 맙니다.

 느부갓넷살이 세 친구들에게 하는 질문을 세상은 우리에게도 지금 던지고 있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냐, 선하기는 하시냐.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이 당당하고 좋습니까? 아니면 요즈음 세상에서 하나님 믿는 것이 창피합니까?

 이런 느부갓넷살의 요구, 협박 조롱에 대해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느부갓넷살 왕에게 대답합니다.

 첫째,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둘째,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우리를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셋째,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어떤 신이 풀무불에서, 내 손에서 너희를 건져낼 것이냐고 빈정거리는 질문에 대한 첫째 대답은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대답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공격이나 빈정거림이나 야유에 대답하느라, 때로는 하나님을 변명해주느라 바쁘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은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합니다. 이 친구들의 대답이 그러나 정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변호하고 변증해주는 것이 필요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홀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도움이나 설명이 필요 없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하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하시는 일을 모두 안다면 우리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한한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무한한 창조주라 입니다. 유한함에 무한함을 담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심이 우리의 유한한 한계 속에 알려지는 것만 우리가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욥이 고난을 당할 때 위로하러 온 친구들이 욥과 논쟁을 벌이면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저런 분이다 하고 말을 한 것에 대해 하나님은 노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저렇다 말한 욥의 세친구의 말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왜 욥이 고난당해야 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설명하시지 않습니다. 너희가 나에 대해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느냐가 하나님이 욥기에서 대답해주는 전부입니다. 성경말씀에서는 왜 라는 질문에는 답을 찾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거의 모든 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두 번째 대답은 우리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어떤 신이 너희를 구해 내랴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에 관한 논증을 하거나 변명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리를 능히 불 속에서도 왕의 손에서도 구해내시리라는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친구들처럼 우리도 세상의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방법은 나의 믿음을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이 우리의 믿음을 조롱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해서까지 시비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질문이, 그리고 이 세 친구들의 대답이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다고 믿는 말씀대로 믿고 사느냐고 말입니다. 크리스챤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 우리 신앙의 integrity, 신앙의 안과 밖이 같으냐에 관하여 의문을 던지고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산다면, 세상 사람들 하는 대로 따라가며 산다면, 세상은 우리를 조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내가 편리한대로, 내 좋을 대로, 내 삶의 조건에 맞추어 하나님을 적당히 바꾸어가면서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줄 착각하며, 때로는 노골적으로, 바알을 섬겼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실은 세상의 풍조를 그대로 따라갈 때 우리는 느부갓넷살의 질문, 세상의 조롱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조롱받는 소리는, 그래서 사실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가 책임을 지고 대답해야 할 질문입니다. 네가 정말 나를 믿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하나님에 대한 이 세 친구들의 절대 신뢰의 믿음을 우리도 회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다시 나를 구원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만이 풀무불에서 우리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대답은 하나님이 나를 풀무불에서 구원 아니 하실 찌라도 느부갓넷살의 명령에 따르지 않겠다는 결단의 대답입니다. 절대 신뢰에서 나올 수 있는 결단의 대답입니다. 이 결단은, 죽어도 좋다는 이 결단은, 죽어도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부활을 믿어야 나올 수 있는 결단입니다. 이 결단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의 죄를 구원하시기 위해 나를 대신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다는 신앙고백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세기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미국 방문 시 그의 방대한 교회교의학을 쓴 이유를 말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요한복음 3장 16절,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죽어도 다른 신을 절대로 섬길 수 없다는 고백을 세상은 좋아하지 않지만, 이렇게 결단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을 세상은 무서워합니다. 이 세상에서 죽어도 좋다고 하는 사람처럼 무서운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자 밥이 되면서도 찬송을 부르며 조용히 앉아 있는 초기 크리스챤들을 로마인들은 무서워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종교사적으로 여러 가지 설명을 할 수 있지만 로마를 뒤집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크리스챤의 믿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죽어야 사는 사람들입니다. 죽어야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내 배우자에게 지지 않으려고 악을 쓰며 싸운다거나, 내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공부가 뒤쳐질 때 배가 아파서 어쩔 수 모르는 모습을 보인다거나, 어떤 일에도 절대 양보 안하고, 이익이 걸리면 끝까지 해보는 모습을 보이는 크리스챤, 절대로 양보 없고 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크리스챤을 세상은 무시합니다. 그런 모습 속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보여줄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무어라고 용서하고 말고 할 자격이나 있나요 라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절대로 용서 못하고 꽁꽁 쌓아두고 그래서 절대로 기뻐하지 않는 크리스챤을 보면서 세상은 감동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사랑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우리 모두 죽어야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죽어야 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너희를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말씀을 믿고 그대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믿고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세상이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래서 세상에 대해서도 죽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 조직처럼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세친구들처럼 그리 아니 하실 찌라도 하나님만 믿겠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죽을 각오할 때 하나님이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우리를 살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서워 할 것은 세상의 비난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죽음이 아니라 네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를 물으실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그리 아니 하실 찌라도 나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때 우리가 풀무불에서 걸어 나오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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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9 요한복음 빛이 비치니 요1:5  박경미 교수  2009-05-12 1853
1528 요한복음 부족할 줄 아노라 요21:25  이재철 목사  2009-05-12 2477
1527 요한복음 하신 것이 아니라 요21:18∼24  이재철 목사  2009-05-12 1872
1526 요한복음 너는 나를 따르라 요21:18∼24  이재철 목사  2009-05-12 2779
1525 요한복음 죽음으로 영광을 ―성령강림주일/성찬주일 요21:18∼24  이재철 목사  2009-05-11 3014
1524 요한복음 내양을 먹이라, 치라 요21:15∼17  이재철 목사  2009-05-11 5278
1523 갈라디아 거짓신앙과 참 신앙의 차이 갈6:1-14  박홍섭 목사  2009-05-11 2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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