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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을 보며, 꿈을 꾸며

요엘 최만자............... 조회 수 2451 추천 수 0 2009.05.12 20:3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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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욜2:28-29 
설교자 : 최만자 자매 
참고 : 2008.08.10 새길교회 주일설교 

요엘서 2 : 28 ~ 29, 사도행전 2 :17 ~ 18]

오늘의 성서본문 요엘서에 관심이 간 것은 이 예언자 요엘도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과 그 심판 후의 구원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어 심판과 구원이라는 예언의 도식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는 구원의 날에 아들, 딸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며 노인들은 꿈을 꿀 것이라는 좀 특별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빛을 잃으며 먹을 것이라곤 한 톨의 곡식조차 구경할 수 없는 재앙으로 심판하신 하나님이 이제는 그 모든 손해를 보상하며 풍성한 오곡백과의 수확과 온 자연의 무성한 푸르름을 약속하면서 이제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리니 아들 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예언자 요엘의 활동시대를 대체로 후기 페르샤 시대로 보는데 그 당시의 유대교의 정신적 종교적 상황은 신정론적 정신태도와 종말론적인 태도라는 두가지 흐름을 가졌습니다. 신정론의 중요 자료는 역대기 학파의 역사서입니다. 그 사고는 유랑생활이라는 심판을 통해 정화된 자들과 이 심판에서 구원을 받아 고향에 돌아온 자들과 그 후손을 제외하면 참 이스라엘은 없다는 사고였습니다. 참 이스라엘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앗시리아에 멸망하여 그들의 이주정책으로 혼혈이 된 사마리아 지방 사람들은 배교자로 제거됩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과 유대라는 두 집단으로 이루어지는 민족은 끝나고 오직 유대만이 남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유대도 죄를 지었지만 포로생활을 통해 정화되어 참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포로생활 이후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오는데 곧 페르시아의 고레스의 해방으로, 잡혀 온 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성전의 재건을 지시하게 된 것입니다. 저들의 반 사마리아적 사고에 더하여 이제 심판의 시대는 지나갔고 구원의 시대가 왔다는 반 종말론적 사고가 합해졌습니다. 예언은 이미 성취되었으며, 이제 혼란과 폭동의 온갖 쓰라린 경험과 가혹한 고통으로 인한 실망의 세월은 끝이 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사고는 제사문서에서 윤곽이 지워지고 역대기 학파에 의해 반사마리아 사상이 첨예화되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 공동체가 그렇게 중심이 되었고 신정론의 율법은 왕의 법이요 페르샤 법이었습니다.

 이에 대립된 사상이 종말론적 사상이었습니다. 지금은 구원이 다 이루어진 때가 아니며 야훼의 날 종말에 이스라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종말에는 이스라엘이 영광 중 회복되고, 세계 만방으로부터 유대인들이 돌아오거나, 우주적 사건과 모든 무신론적 세력들이 멸망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철저한 회개를 해야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이것은 사실 그 시대에 대한 더욱 급진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의 외침이었습니다. 어느 세상에서이건 현재의 질서와 현상을 안정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과 그 세대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급진적 사고의 사람들이 생각을 달리하며 각각 그 시대를 살아내려한 모습들로 보여집니다. 사실 사람들이 시대의 징조가 크게 바뀌리라는 생각을 할 때마다 종말론적인 사고는 급격히 밑바탕에서부터 다시 떠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538년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정복한 이후부터 알렉산더의 페르시아 원정시대(334-330)까지의 사이에는 수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으며 그 역사적 사건들의 굽이마다 종말론적 표지들이 예시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두 사상의 갈등과 대립은 ‘누가 참 이스라엘인가’라는 공동관심의 주제를 중심으로 더욱 깊어졌는데 신정론자들은 현존 공동체로 헌법에 인정되고 외국으로부터 보장받는 공동체를 참 이스라엘로 보는가 하면 종말론자들은 참 이스라엘이 실현되는 종말을 바라는 사람들이 참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대립, 갈등, 분열, 추방이라는 대결의 세월을 보내면서 화해를 이루어 내지 못하였다고 사가는 전하고 있습니다.

 요엘 예언자의 예언도 물론 종말론적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또한 그 새대를 급진적으로 본 예언자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요엘 예언자의 예언 내용이 가진 특이함 곧 마지막 날에 일어나는 이상적 현상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종말 사상에서는 엄격한 회개의 요구가 비중을 크게 차지하는 것에 비하여 보면 요엘은 특이한 현상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요엘도 회개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상당히 강도 높은 회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너희는 진심으로 회개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금식하고 통곡하고 슬퍼하면서,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 그리고 ‘주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예언자들의 공통된 호소를 간곡히 하고 있음에서는 예외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본문 구절에 충실하여 요엘이 바라본 꿈과 환상이 어떤 것인가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우리도 이 시대에 꾸어야 할 꿈을 생각해 보기를 권유하려는 것입니다.

 요엘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영을 받는 상태에서 아들 딸은 예언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이상적 세상을 상상한다는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예언이나 꿈이나 환상이나 모두 미래의 상태를 말합니다. 아마도 종말의 날에 이루어질 세상을 상상하고 꿈꾸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 예언과 꿈과 환상은 어떤 것들인지 궁금한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그 자세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성서 이사야 11장에 보면 하나님의 영이 가득한 지도자의 통치 아래 이루어지는 세상을 매우 유토피아적으로 그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주의 영이 그에게 내려오신다.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를 경회하게 하는 영이 그에게 내려오시니, 그는 주를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재판하지 않으며,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결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을 바르게 논죄한다. 그가 하는 말은 몽둥이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가 내리는 선고는 사악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는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명 곁에서 장난하고 적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평화의 세상’이라는 제목이 붙혀 지고 있는 이 본문은 그야말로 메시야가 오셔서 통치하여 이루는 세상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헨델의 ‘메시야’ 곡 가운데 한편을 차지하여 노래되고도 있는 이 본문은 정말 우리 모두가 꿈꾸고 환상으로 보고 예언을 할 세상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유토피아의 핵심은 더불어 사는 세상, 공존의 세상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가난한 사람, 억눌린 사람을 바르게 공의로 재판하고 정의와 성실의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세상, 온 생명들이 공존하고 서로 더불어 평화를 이루며 해침이 없고 파괴가 없고 주님을 아는 지식이 가득한 세상’을 꿈꾸고 환상으로 보며,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공존동생 곧 함께 생존하고 같이 살아 나가는 상태로 참으로 서로 다르고 서로 해치고 폭력과 죽임이 발생할 관계의 것들이 평화롭게 사는 세상, 공존의 유토피아입니다. 메시아의 출현 때 일어나는 종말론적 이상입니다. 의로운 왕의 통치가 이루어져 자연안에 나타나는 평화를 말하는데 하나님의 영의 통치는 만물의 평화 상태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적 평화는 원초적 평화로 동물과 인간을 포용하는 낙원입니다. 현실적으로 모든 상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세상에의 동경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현실적 희망을 얘기하는 것이지요. 이 유토피아적 평화는 종말론적 희망의 표현일 것입니다. 그 유토피아적 세상은 힘있는 것의 자기 힘의 포기, 힘의 행사의 금지, 불가능, 이런 것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왕의 의로운 통치에서 이루어지는 공존의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의의 실현, 공의의 실현은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정의와 공의 의식의 문제임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약한 것들의 공존에 우선정책이 서야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예언, 꿈, 환상은 우리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으며 우리 현실의 투영입니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얼마만큼 약한 것들에 우선하는 정책이 서고 있는가? 이러한 기준으로 우리 사회, 교회, 학교 등 모든 집단을 평가해 보아야 하고 그 평가에서 의로운 세상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일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대해 말해야하고 증언해야 하는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의 세상을 꿈꾸고 예언해야 하는 것입니다. 베트남의 평화 승려 틱냣한은 공존종의 계율을 말하는데 (열네가지) 이것을 어린이들에게는 두 가지로 요약하여 지키게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사람과 동물과 식물의 목숨을 지키고 사랑하게 되도록 자비를 기를 것을 약속, 두 번째, 사람과 동물과 그리고 식물과 조화 속에 살게 되도록 이해를 기를 것을 서약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비, 사랑, 이해의 진리의 정수라고 합니다.

 유토피아적 지향은 우리가 이상으로 꿈꾸는 세상을 창조적 상상력으로 가져보는 일입니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일들을(예를 들어 통일된 세상은 어떠해야 될까 등) 상상하고 꿈을 꾸어야 합니다. 유토피아적 꿈은 현실 뒤집기의 힘을 갖습니다. 우리 민담에 종과 주인이 죽어 종은 주인이 되고 주인은 종이 되는 현실 역전의 이야기 등 현실 뒤집기 이야기가 있는데 일종의 창조적 상상의 현실 뒤집기 이야기로 생각됩니다. 창조적 상상의 세계를 꿈꾸는 것은 그런 세상을 오게 하는 힘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엘서 이 본문은 사도행전 2장에서 그대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성령강림의 사건이 일어난 상황이며 여기서부터 교회가 시작되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오순절이 되어 그들은 모두 한 곳에 모였다. 세찬 바람이부는 듯 소리가 하늘에서 나더니 온 집안 가득 채웠고, 불길 솟아 오르는 것 같은 혀들이 갈래 갈래 갈라지며 나타나 각 사람 위에 내려 않았고 성령으로 충만해서 가가각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유대 사람이 세계 각국으로부터 와서 자기네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갈릴리 사람들이 말하는데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된 일이요 라고 하면서 베드로가 해설하기를 바로 요엘 본문을 인용합니다.

 ‘마지막 날에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주겠다. 그들도 예언을 할 것이다.

 요엘서가 인용된 사도행전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말해 줍니다. 그것은 교회의 처음 시작이 기초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처음 시작을 새삼 확인하는 것은 오늘 우리교회의 모습을 거기에 비추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강림의 첫째 사건은 완전한 열림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준다는 것입니다. 남녀, 주종, 노소 모두가 참여되는 세상을 보여줍니다. 모두가 어우러지는 세상, 모두가 주인이 되는 세상, 평등하게 자기 삶을 여는 세상, 이는 마치 갈라디아서 3:28을 연상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도 헬라인도, 자유인도 종도, 남자도 여자도 모두 하나이다.’ 인종, 계급, 성의 차별이 없어진 완전 열림의 세상입니다. 이전까지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졌던 율법이 이방세계에 전적으로 열려져 전달되는 전 세계의 구원의 날이며, 전 세계의 구원의 기회를 말합니다. 종말의 때- 이것은 사실은 원래의 회복이 아닐까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둘째로는 다양한 현장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사람들이 모여왔고 각기 다른 언어의 사용자들이며 경험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았다는 현장의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다양함을 성령강림 현장으로 설정한 것은 의미있습니다. 유대민족 주의를 넘어서 이방의 세계로 확산되어져 나가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현장에서 부딪히는 우선적 문제가 다양함의 수용이었을 것입니다. 서로 다른 것에 대한 수용의 능력을 성령을 통해 가지게 하는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도 다양함의 수용이란 중요한 문제이며 특히 새길교회처럼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는 집단도 드물 것이기에 더욱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로 생각됩니다.

 셋째로는 소통의 사건이 혁명적으로 일어난 현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데 모두 소통하게 되었습니다. 언어의 장벽에 의해 여러 민족으로 나뉘어 적대해 온 인류가 이제는 영의 능력으로 하나가 되어 인류를 구원할 하나의 복음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언어 장벽의 파괴사건이 일어났고 모두가 소통되는 세상을 연 것이 성령강림의 첫 사건이며 교회의 시작의 현장이 바로 이 소통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과 대조됩니다. 바벨탑 사건은 언어의 장벽을 이루어 서로 적대적 관계를 만들어 놓음로 갈등과 분열과 폭력과 죽임의 온갖 악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영의 통치의 시작, 교회의 시작은 모든 언어의 장벽의 파괴이며 소통의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소통은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이해하고 관용하며 대화하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것이 아니고 쌍방적인 것이며 결과와 업적을 목적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과 교감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받고 싶어합니다. 특히 방언은 성령을 받은 징표로 이해되어 방언하기를 소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강림절의 성령의 역사는 열림과 다양함의 수용과 소통의 교감을 가지는 사건이었던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성령받음은 무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진정 열린 사람인지, 다양함을 수용할 능력이 있는지, 소통의 감수성이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성령을 받은 사람의 조건으로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오늘 말씀증거 시간에 모두 눈을 감고 진정으로 바라는 새길의미래를 꿈을 꾸든지 명상을 하든지 해보자고도 생각했습니다. 지금 무슨 말을 얼마나 더 하여야 우리가 새길을 찾아온 사람이 되겠습니까?

 요엘 예언자가 말한 예언과 꿈과 환상은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하는 것이며 그것들은 그래서 유토피아적이기도 하고 대단히 성숙한 차원의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교회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실제적인 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을 받고 꿈을 꾸기 위해서는 사실은 먼저 회개의 과정을 가져야 함을 상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요엘 예언자도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고 회개를 먼저 촉구하였다고 앞에서 말하였습니다만 그냥 우리 자신을 아니 나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될 것 같습니다. 나의 모든 것이 사랑에 근거한 것이었는지를 생각하면서 먼저 깊이 한번 나를 성찰 한 후에 그리고 새길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십시오, 노인들은 꿈을 꾸십시오, 우리의 아들 딸들은 예언을 하십시오.

 저는 오늘 말씀증거를 위해 몇몇 자매님들에게 요청을 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새길교회에 바라는 것’ 혹은 ‘새길교회의 미래 모습’ 혹은 ‘새길에의 꿈’ 같은 것들을 얘기 해 줄 것을 부탁 했습니다. 그냥 소박한 바램들을 듣고 싶었습니다.

‘홈페이지에 멀티미디어 기능이 강화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하는데 기존교회에서 왜곡해 가르치는 것들을 바로잡아 주는 그런 강좌를 듣고 싶어요’
‘기존교회에서 질리도록 듣던 이야기를 또 들으려고 새길에 나오지는 않았는데요’
‘청년들의 진보적인 신앙을 포용하고 신앙과 생각이 다양함을 적극 포용하는 새길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예배 형식에 너무 얽배이지 않고 국악찬송도 가끔하면 좋겠어요‘
‘이론적인 하나님 설명이 아니고 현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교회면 좋겠습니다. 현실적 삶에 대한 참여의식과 그 개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삶의 현실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사상과 오늘의 세계를 이해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신앙생활의 기쁨을 교회 성원끼리만 나누지 말고 사회 경제적 약자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과 나누는 교회되기를 바랍니다.
 ‘삶이 만만치 않은데 삶을 터 놓고 나눌 수 있는 곳이면 좋겠어요. 같은 믿음을 나누는 곳이니 모두 편한 친구가 되는 그런 교회이길 바래요.’
‘지혜로운 믿음을 가지도록 앎을 공유하기 위해 일방적 가르침 보다는 앎을 함께 나누는 교회
 ‘머리만 큰 교회가 아니고 우리가 사는 사회현실 속에서 실천하는 교회, 교회안에서 또한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였으면 합니다’
‘과거의 지도력과 현재의 지도력이 잘 이어지는 교회, 교인의 의무(헌금, 시간바침, 헌신 등)들에 충실한 교인들이 모인 교회, 앞서가는 신앙인이라 착각하지 않는 교회, 토론이나 대화 후 실천하는 교회, 남을 비평하거나 값싼 칭찬을 하지 않고 영적 성숙을 위해 서로 돕는 교회’,
‘사회와 교회의 노인을 위한 복지관 운영, 젊은이들의 만남의 공간 마련, 여가시간 교우들의 봉사처 제공이 되는 교회’,
‘세대간의 교류가 선순환 되는 교회,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넘치는 곳, 새로운 얼굴들이 많이 ㅡ 그리고 자주 보이는 교회, 찬양과 기도, 눈물의 예배가 있는 곳, 하나됨을 체험하는 살아있는 영혼의 공동체, 서로 너무 사랑해서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한 주라도 안보면 안되는 뜨거운 우리네 사이가 되는 교회,’
‘끊임없이 젊음을 추구하여 젊은 새길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젊은이들의 사회참여가 시행착오 있더라도 공동체 안에서 성숙해 갈 수 있도록 토양을 마련해 주는 교회’
‘전통적 예배형식에서 벗어난 다양한 실험적 예배형식으로 역동성 갖고 안주 않고 끊임없이 새길을 모색하며, 젊은이들을 돕는 그런 교회’.
‘넓은 신학, 깊은 신앙의 실현을 하는 곳. 다양한 말씀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듣는 자신에게 ’품음의 시간‘을 가져 생각하고 돌아보는 훈련이 되는 교회’,
‘다양한 구성원이 서로를 보완하여 장점으로 승화하는 공동체로 되는 것.
대가족 한집에 사는 것 같이 애증이 함께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한 방향을 바라보며 동행하는 의미를 알아가는 것이 소중합니다. 갈등 대립도 있지만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고 이해를 노력하는 교회.

 자매님들의 꿈은 성령강림절의 사건들과 매우 공통된 내용을 기지고 있었습니다. 열림, 다양함의 수용, 소통의 감수성 등이 모두 언급되었음을 보았습니다. 새길은 정말 성서적 근거에 선 교회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이제 노인이 된 저는 혼자 이런 꿈을 꾸어봅니다.

 서울 어느 근교에 제법 되는 땅을 함께 사서 공동주택을 짓고 한편에는 교회 예배처소를 만들고 공동식사를 할 식당도 짓고 노인들을 품을 복지관도 짓고 어린이 놀이터도 만들고 양지바른 녘에 납골당도 꾸미고, 노인들 끼리 옛날 회상하고 손주들 자랑늘어놓고, 다음세대에 의해 교회는 아름답게 진행되어 나가고,

 주일에 젊은이들이 오고 손자뻘 아이들이 모두 모여 축제같이 예배를 드리고 그들에게서 촛불집회 다녀온 이야기도 듣고 함께 앉아 정치며 사회 이야기도 하고 명상이나 기도가 필요 할 때 기도처소에 가서 명상이나 기도를 하고 함께 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계획하기도 하고 거동이 불편하신 어른들을 돌보아 드리고 나도 또한 돌봄을 받고, 등 등 등.......

이제 새길은 미래의 꿈을 나눌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젊은이들이 마음껏 환상을 볼 수 있도록 돕고 그들의 환상을 엿보면서 노인들은 자신들의 꿈을 함께 모여 꾸어 봅시다. 온 세대가 남녀가 모두 참여하여 환상을 보고 꿈을 꾸며 새길의 미래를 찾을 때인 것 같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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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엘 이상을 보며, 꿈을 꾸며 욜2:28-29  최만자 자매  2009-05-12 2451
1531 에스겔 1 + 1 = 1 겔37:15~22  이상익 형제  2009-05-12 1773
1530 다니엘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나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 단4:13-18  김시원 목사  2009-05-12 2250
1529 요한복음 빛이 비치니 요1:5  박경미 교수  2009-05-12 1853
1528 요한복음 부족할 줄 아노라 요21:25  이재철 목사  2009-05-12 2477
1527 요한복음 하신 것이 아니라 요21:18∼24  이재철 목사  2009-05-12 1872
1526 요한복음 너는 나를 따르라 요21:18∼24  이재철 목사  2009-05-12 2779
1525 요한복음 죽음으로 영광을 ―성령강림주일/성찬주일 요21:18∼24  이재철 목사  2009-05-11 3014
1524 요한복음 내양을 먹이라, 치라 요21:15∼17  이재철 목사  2009-05-11 5278
1523 갈라디아 거짓신앙과 참 신앙의 차이 갈6:1-14  박홍섭 목사  2009-05-11 2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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