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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4: 7-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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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4년 6월 6일 주일2부설교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더불어 ‘용서하고 잊어 버리고 사랑하라’ 이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율법은 죄인을 정죄하고 정죄된 사람은 죄의 왕인 마귀의 지배를 받아 온갖 욕심과 정욕과 탐심의 노예가 되고 그 결과는 사망을 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죄인을 용서하여 죄인을 의롭게 만드시고 성령을 모시도록 하여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구약의 율법시대가 아닌 신약의 은혜 시대입니다. 은혜의 시대에 사는 이상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의 생활중에 용서와 잊음과 사랑을 실천하기를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원하시고 계십니다.
[본론]
1. 용서를 생활화 하라
첫째로, 용서를 생활화 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하나님 명령이십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 같이 우리는 서로 인자하며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윌리암 워드는 말하기를 “살인자는 짐승같은 사람이고 평범한 사람은 남을 쉽게 판단하나 남을 용서하는 자는 신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잠언 19장 11절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생각하기를 죄를 용서하는 것은 나의 수치요, 연약이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남을 용서하는 것은 나의 영광이 된다고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생애가운데 뛰어나게 두 번 용서한 사건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주님께서 성전 뜰에서 말씀을 증거할 때 모세의 제자들인 서기관 바리새 사두개 교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 앞에 내동댕이 치고 “주님 모세 율법에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이라 했는데 주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들 손에 손에 돌을 들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두려워서 벌벌 떨고 눈은 울어 충혈되고 머리는 산발이 되고 온 몸에 옷은 다 흐트러지고 신발은 벗었습니다. 예수님은 허리를 숙여 글을 적고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그들이 “주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강요하니까 주님이 고개를 들어 큰자로부터 작은자까지 눈을 맞추어 보시고 난 다음 장엄한 음성으로 ”너희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그러시고 주님이 또 글을 적었습니다. 틀림없이 그들의 감추인 죄를 적어 내려갔습니다. 예수님 어깨 너머로 손가락에 기록된 글을 보고 한사람 두사람 다 돌멩이를 던져 놓고 도망을 쳤습니다. 한참후에 예수님이 고개를 드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돌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를 보시고 ”여인이여, 고개를 들라.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놀라서 벌벌 떨며 주위를 살핀 그 여인은 ”주여 없나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 11절에 기록하기를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그 놀라운 능력과 은혜로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여인을 구원하여 주시고 용서하여 주신 사건이 있습니다. 그 다음 예수님이 용서하신 장엄한 사건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침뱉고 고개를 흔들고 온갖 모욕을 다 하는 그 무리를 향해서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23장 34절에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온갖 참소와 모욕을 다하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저주하지 아니하시고 협박하지 아니하시고 공갈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 앞에 그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저희를 사여 주옵소서라고 용서를 하신 것이 주님의 사랑이요, 주님의 정신인 것입니다.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내가 짊어져야 됩니다. 고통은 내가 담당해야 용서를 해줄수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인 아키발드 하트는 말하기를 “용서란 말을 해친 사람에게 내가 원수를 갚을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분명히 원수를 갚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바로 용서라고 말한 것입니다. 미움은 십자가에 못박지 않고는 용서할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로 45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라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축복을 받으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내 자신이 십자가에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펄펄 살아있는 이상은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내 이해 관계를 통해서 생각할때는 원수를 사랑할수도 없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할수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음속에 받아 들일 때 비로소 이 모든 미움과 원한을 극복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축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용서에 빚진자들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12절로 15절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용서는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하나님이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혼자서는 살지 못합니다. 이웃과 더불어 사는데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여러 가지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입기도 하는데 이를 용서해야 하나님이 우리도 용서해 주십니다. 내가 이웃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과실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있어서 우리의 기도가 막혀 버리고 말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용서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하나님께 은혜받고 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어찌할 도리없이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이웃을 용서해야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로 22절에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
여러분 이 말에는 의미가 굉장히 깊습니다. 베드로는 일곱 번 용서하는 것은 대단히 큰 용서라고 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용서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보면 바리새인은 두 번 용서했습니다. 랍비는 세 번 용서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누가 거듭해서 잘못했을 때 “참는 것도 한두번이지”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한두번밖에는 참고 용서하지 않습니다. 세 번 용서하는 사람없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자기딴에는 “바리새인은 두 번 용서하고 랍비는 세 번 용서하는데 나는 일곱 번 용서하면 대단히 용서를 많이한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아니야~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 그것은 한없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인간적인 한계를 가지고서 말씀했는데 한계없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황해도 봉산군에 있는 개동교회는 6.25 전후하여 장로 7명중 네명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중 강덕희 장로는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잡혀 나무에 매달려 눈을 뽑히고 개처럼 얻어 맞았습니다. 눈에서 피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그래도 찬송을 부르니까 공산군이 와서 개버리판으로 턱을 때려서 이빨이 다 빠지고 턱이 부서져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얼마후에 국군이 진격해 올라왔을 때 미쳐 도망가지 못한 공산당원들이 사로잡혔습니다. 강장로의 이야기를 들은 군인들은 그 사건을 주도했던 공산당원을 잡아서 나무에 묶어 놓고 강장로의 아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 여기 당신 아버지를 무참하게 죽인 원수가 있으니 당신 마음대로 죽이십시오.“ 그리고 총을 주었습니다. 강장로의 아들은 그를 보는 순간 아버지의 죽어가는 모습이 떠올라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겁에 질려서 벌벌 떨고 있는 공산당원에게 그는 천천히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지만 우리 아버지는 그래도 당신들을 용서하고 축복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뜻을 쫓아 당신을 용서하고 사랑하겠습니다.“ 그에게는 원수갚을 기회가 주어졌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권리를 포기하고 원수를 용서한 것입니다. 이처럼 용서라는 것은 나를 헤친 사람에게 원수 갚을수 있는 권리를 포기해 버리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책속에 손양원 목사님은 일평생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여수의 애양원에서 6년동안 나병 환자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또 손목사님은 사랑과 용서의 삶을 모범적으로 보여줬습니다. 1948년 여수 순천반란사건때 공산당들이 그 두아들 동인이와 동신이를 총살했습니다. 그리고 국군이 들어와서 그 총살한 사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를 죽이려고 할 때 손양원 목사님이 탄원을 했습니다. ”내 아들이 이 사람에 의해서 총살 당했지만 내가 또 이사람을 죽이는데 동의한다면 우리 아들의 죽음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용서하여 주십시오.“ 손목사님은 두 아들의 장례식때 나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을 낳게 하여 주시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남과 차남을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내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하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는 탄원해서 그 두 아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다가 총살당한 그 아들을 죽인 흉악한 범죄자를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친 아들처럼 그를 회개시키고 사랑하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는 6.25때 인민군에게 끌려가 심한 매를 맞고 1956년 9월 28일 순교했는데 자기를 총살하는 인민군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다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했던 손양원 목사님은 사랑, 봉사, 용서, 충성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그러므로 손양원 목사님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은 길이길이 흠모 당하고 수많은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변화를 일으켜 준것입니다. 가마리엘 배일리는 ”가장 많이 용서하는 자가 가장 많이 용서를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나는 매일 용서하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말했습니다. 로버트 브라우닝은 ”용서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잊어 버리는 것은 더욱 좋다.“고 말했습니다. 스배치는 ”인간의 마음에는 언제나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를 생활화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같이 용서하고 용서받고 살아야 됩니다. 늘 아내를 용서해야 됩니다. 남편을 용서해야 됩니다. 부모를 용서해야 됩니다. 자식을 용서해야 됩니다. 이웃을 용서해야 됩니다. 우리는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인간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용서로 말이암아 새출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고 우리의 죄를 청산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출발하게 만들어 주셨으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가지고 끊임없이 우리의 삶속에 용서를 생활화해야 됩니다. 용서할 만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할수 없는 자를 내가 십자가를짊어지고 내가 차라리 마음에 고통을 당하면서 용서를 해주는 것이 진실한 용서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용서인 것입니다.
2. 용서한 것은 잊어버려라
둘째로, 용서한 것은 잊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옛말에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는 것입니다. 은혜받은 것은 물에 새겨서 떠내려가고 다 없어집니다. 원한은 돌에 새겨서 두고두고 보고 이를 갈고 주먹을 불끈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잊어 버리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8장 12절에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장 17절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우리가 회개하고 보혈로 씻으면 하나님은 다시 기억도 안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용서받은 죄를 기억나게 하는 것은 마귀의 일이요, 성령의 일은 아닌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인데 하나님이 용서한 것을 성령이 와서 다시 기억나게 하고 다시 기억나게 해서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하지 않습니다. 용서받은 죄를 자꾸 기억나게 하고 다시 마음에 정죄하는 것은 사탄이 와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용서한 죄를 다시 기억나게 하거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그 사탄을 물리치게 되시기 바랍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에 깨끗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다신 불의가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부모는 자식의 잘못을 기억하지 않잖아요. 자식은 두고두고 부모가 잘못한 것 기억하고 있어요. “어머니 아버지가 날 이렇게 했지.” 자식은 부모의 잘못을 기억하고 있지만 부모는 자식의 잘못을 기억 안할뿐 아니라 기억 안하려고 합니다. 자식이 여간 부모에게 잘못한 것도 부모는 다 씻어 버리고 다 잊어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자식을 항상 불쌍히 여기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가나안 양로원에 전에 할머니 한분이 들어왔습니다. 그 할머니는 버림을 당했는데 보따리 하나를 안고 우리 양로원에 들어왔는데 도무지 자기의 자식의 이름과 주소를 함구하고 말은 안합니다. “자식이 어디에 살며 무엇합니까?” 절대 말을 안해요. 우리 가나안 양로원에 있으면서 그 보따리 하나를 늘 가슴에 안고 있습니다. 밤에 잘때도 베고 잡니다. 아무도 그것 손못대게 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 그 할머님이 세상을 떴습니다. 우리가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서 그 보따리를 푸니까 보따리에 돈이 5백만원이 있습니다. 거기에 자기 아들 주소와 전화번호, 이름을 적어 놓고 “내가 죽거든 우리 아들에게 전달해 달라”고. 그 아들은 어머니를 버려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그 어머니는 버린 그 아들을 용서하고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고 자기의 전재산을 보따리에 싸서 가슴에 안고 죽을 때 아들에게 주려고... 그래서 우리가 그 아들을 찾으니까 고등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선생님이면서도 어머니가 치매증세가 있으니까 어머니를 차에 싣고 우리 양로원 있는데 와서 내 버리고 갔어요. 그 버린 아들에게 전달해 달라고 그 돈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 돈을 전달해 주니까 장례식날 찾아 오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그 할머니가 너무나 마음속에 원망스러워서 내가 이야기를 합니다. 그 돈 양로원에 바치지 왜 그 아들에게 주고 갑니까? 두고두고 내가 생각하면 원망스럽습니다. 우리가 친어머니같이 양로원에서 돌보아 주고 목욕시켜 주고 치료해 주고 옷갈아 입혀주고 했는데 양로원에는 한푼도 안내놓고 버린 자식에게 돈주고 갔습니다. 그것이 부모인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항상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영의 부모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10절로 14절에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보세요.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식의 잘못을 잊어 버리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회개한 죄는 깨끗이 잊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빨래한 옷을 입으면 더러웠던 것 잊어 버립니다. 빨래해서 깨끗한 옷을 입고서 늘 과거에 더러웠다. 기억하는 사람 없습니다. 씻어서 다 떠내려 버리고 깨끗한 옷이 되었으면 깨끗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었으면 깨끗하게 되었은즉 자기도 자기 죄를 용서하고 기억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미가 7장 19절에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라고 말했었습니다.
자기죄도 하나님이 발로 밟으시고 깊은 바다에 던져 버렸으니 하나님이 용서한 것 자기도 용서해야 되고 남의 죄도 용서하고 잊어 버려야 됩니다. 하나님이 용서해준 사람을 왜 우리가 그 죄를 기억해야 됩니까?
이사야 43장 25절에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중세 한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수도원 원장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사를 받아서 기도만 하면 사람을 투시해 봅니다. 과거의 죄를 다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한 수도사가 들어왔는데 옛날에 죄를 많이 지어서 그 마음이 굉장히 괴로웠습니다. 물론 하나니께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 원장앞에 오니까 벌벌 떨립니다. 내 마음을 다 꿰뚫어 보고 있겠지 싶어서 그 원장이 와서 “원장님! 원장님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 한사람의 과거의 죄를 다 보여 주셨는데 내 죄를 보여 주십니까?” 그러니까 원장이 “며칠후에 오시오. 내가 하나님께 기도해 볼테니까.” 며칠후에 원장님실에 가니까 원장님이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당신이 죄 없다고 그러시던데요?” “아니요. 내가 과거에 죄를 많이 지었는데.” “당신 회개했어요?” “회개했어요.” “회개했으면 하나님이 보혈로 씻고 잊어 버렸어요. 하나님께 기도해 보니 하나님은 당신의 죄가 없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데 왜 당신 자꾸 있다고 그래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지 마시오.” 그래서 그는 완전히 죄사함을 받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용서받은 죄를 다시 기억나게 하는 것은 마귀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용서하신 죄는 다시 기억지 아니하십니다. 동이 서에서 먼것같이 멀리 옮기시고 깊은 바다속으로 던져 버리고 다시 떠오르지 못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한 정신과 의사의 연구에 따르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의 절반정도가 자신이 진정으로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즉시 퇴원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국민일보 2002년도에 나온 기사입니다. 용서는 이처럼 정신건강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병자를 치료하실 때 “내 죄가 용서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시고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용서받았다고 확신하게 되면 놀라운 치료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이 피로 씻음받지 못할만큼 큰 죄는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우리의 죄는 이미 다 용서받고 그리고 이 죄를 주님께서 다 잊어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고 잊어버린 죄를 도로 파내어서 자꾸만 죄있다고 말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3. 서로 사랑하라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서로 사랑하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요한일서 4장 7절로 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만물을 지었기 때문에 만물이 다 사랑을 그리워 하고 사랑을 갈급하게 찾고 있는 것입니다.
쥐와 사랑에 관한 실험을 한적이 있습니다. 버클리 대학 연구팀이 한 재미있는 실험을 했는데 그들은 세종류의 흰쥐에게 먹이를 주었습니다. 먼저 한 마리 쥐에게는 혼자서 실컷 먹도록 해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다섯 마리 쥐를 한꺼번에 모아놓고 먹이를 줘서 다섯 마리가 서로 몸을 비벼 가면서 먹게 했습니다. 마지막 쥐는 사람이 애정을 가지고 정성있게 떠먹여 줬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쥐는 뇌의 세포활동이 둔하여 뇌의 크기가 작아졌고 6백일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혼자 먹던 쥐입니다. 두 번째 다섯명이 서로 함께 섞여서 먹던 쥐는 약간 활동적인 뇌로 7백일을 살았으며 그러니까 혼자 먹던 쥐보다 백일을 더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쥐는 활발한 세포활동을 보이는 무거운 뇌로 950일을 살았습니다. 원인을 조사한 결과에 사랑이라는 에너지가 동물의 몸에 들어가 뇌 세포의 성장 호르몬 생성을 자극하여 뇌세포가 증식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혼자 음식을 먹게 한 쥐보다 사람이 떠먹여줘 사랑을 보여준 것이 3백일이나 더 살았습니다. 혼자는 6백일 살았는데 떠먹여준 쥐는 950일을 살았습니다. 사랑이 말못하는 짐승에게도 큰 생명의 은총을 베풀어 준것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동물도 사랑을 받으면 세포에 생기가 나서 오래 사는 것입니다. 나는 켈리포니아의 오렌지 재배 농장에 농사 짓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오렌지를 심어 놓고 매일 아침 오렌지 밭을 지나가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참 이쁘다. 너무나 잘자란다. 정말 정말 고맙다.” 이렇게 칭찬을 해주면 오렌지가 벌레도 안먹고 병도 안들고 그렇게 잘자란답니다. 그러면 오렌지도 칭찬하고 사랑해 주면 잘 자라는데 하물며 사람은 말할 필요가 없지요.
일본의 파동학자인 에모도 마사로의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에 의하면 물도 사랑에 반응한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물을 향해서 “너 죽여 버리겠다.” 그렇게 말하면 물의 결정체가 흉악하게 깨어져서 아주 형편없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물에다가 “악마”라는 글자를 써서 붙여 놓으면 결정체 가운데 보기 흉한 구멍이 뚫립니다. 그런데 물을 바라보고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긍정적인 말을 하면 물의 결정체가 아름다운 육각형을 띠고 그 다음 물을 보고 “너 사랑해”라고 말하면 가장 아름다운 결정체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주파수가 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생명이 없는 물도 사랑을 받으면 생기가 나고 아름다워 집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60%가 물입니다. 사람은 60%가 물로 되어 있는데 사람이 서로 미워하고 저주하고 분노하면 물이 흉악하게 무질서해지고 구멍이 뚤리고 파괴적이 되어서 60%가 물인 인간속에 온갖 병이 다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감사합니다. 훌륭합니다. 사랑합니다.” 격려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을 하면 아름다운 육각형의 물이 되어 온 몸에 건강과 생명이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랑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여러분의 생명과 건강에 직결되는 것입니다.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빨리 죽으려면 사랑하지 마십시오. 오래 건강하고 아름답게 살려면 사랑하면서 사랑의 말을 사용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간은 사랑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오직 타락과 부패가 미움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안에 계시고 마귀는 미움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미워하면 알아야 될 것은 마귀가 들어왔다고 아십시오. 사랑하면 하나님이 와서 계신다고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본자가 없으되 사랑안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타난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에베소서 3장 17절로 19절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높습니까? 높고 높은 하늘을 지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하늘 보좌까지 높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습니까? 그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어서 무덤에 들어갔을 때 그 영혼이 음부까지 내려 갔습니다. 땅아래 음부까지 내려 갔으니 그 사랑의 깊이는 음부까지 내려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깁니까? 예수님은 영혼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영혼까지 계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은 영혼에서 영혼까지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넓습니까? 온 지구를 품에 안고 있으니 그 넓이는 말로 다 할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높고 깊고 넓고 깁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벗어날 아무런 처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 믿음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역사하는 것입니다. 미워할때는 절대 믿지 못해요. 사랑할때는 믿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믿고 사랑받기 때문에 믿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에 대하여 어떤 사랑을 가지고 있는지 이 말씀을 들어 보십시요.
로마서 8장 38절로 39절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어마어마한 끈질긴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끈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냐 칼이랴. 이 모든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에베소서 3장 19절에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하셨는데 율법주의자가 하나님으로 충만한자가 아닙니다. 율법은 늘 다른사람을 벗기고 다른 사람을 할퀴고 다른 사람을 흙칠하려고 짓밟는 것이 율법인데 율법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으로 충만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인 의식을 잘 지키는 자가 하나님으로 충만한자가 아닙니다. 열심히 종교적인 의식을 충실히 시행했다고 해서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자, 사랑이 가득한 자가 하나님으로 충만한 자인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2절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요한일서 4장 16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아무리 열정적으로 율법을 지키고 종교의식을 행하고 불길같은 신앙심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가짜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엉터리요, 조작품이요, 모조형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비천하고 못난 사람이라도 뜨거운 사랑이 넘쳐나면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왜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이 있고 사랑을 실천하면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미국의 한 가정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들은적이 있습니다. 그 가정에 금지옥엽으로 키우던 아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뺑소니 차에 치여서 죽었습니다. 그 부모가 너무나 원통하고 절통해서 가슴을 치고 울었는데 이 뺑소니 운전사가 잡혀서 감옥에 들어갔으나 재판을 받고 보석이 되어 나왔습니다. 너무나 원통해서 아버지가 권총에 총알을 장전해서 감옥에서 나오는 그를 쏘았습니다. 그런데 부상만 입히고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살인미수죄로 잡혀서 그 아버지는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너무나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해서 그 부인은 가슴을 치고 몸부림을 치다가 정신병자가 되어서 정신병원에 들어갔습니다. 미움 때문에 온 가족이 풍비박산이 되었습니다. 아들이 죽은 것은 사실입니다. 아들을 죽인 그 사람에 대해서 원한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 원한이 다른 사람을 해치기 전에 자기들 가족을 먼저 풍비박산 만들었습니다. 남편은 살인미수자가 되고 부인은 정신병자가 되고 자식은 이미 죽었고 가정은 무너지고 만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고 용서해 줄수 있었다면 남편도 아내도 그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갈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고 미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십자가를 끌어안는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수양과 도덕으로 안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끌어 안을 때 예수님이 무지막지하고 주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까지 용서하고 사랑해 주신 그 사랑을 우리가 받아 들여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용서하고 사랑할수 있는 사람이 되고 사랑하므로 우리도 살고 남도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미움안에는 마귀가 있어 이처럼 사람을 멸망시키고 파멸시키는 일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가 미움을 통해 우리를 틈타지 못하도록 항상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미국 데일리 뉴스 예방의학 전문가인 피터 한센 박사는 건강을 위한 보고서를 다음과 같이 발표했습니다. 건강을 유지하는 3대 비결은 음식절제해서 먹고,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술, 담배, 과로, 수면부족 등 해로운 습관을 버리면 건강의 50%는 지킨다는 것입니다. 나머니 50%의 건강관리법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 신체의 저항력이 강해져 병균을 물리치는 힘이 생깁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건강상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한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몸은 건강해지고 우리의 마음은 행복해 진다고 피터 한센박사는 말했습니다. 여러분 심슨은 사랑이라는 친절이나 호의같은 것이 아니고 순진한 성질을 가진 희생이 곧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무디 선생은 “거짓 사랑은 혀 끝에 있고 참 사랑은 손 끝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일본 하천풍은 “사랑이란 내 자신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루터는 “사랑은 하나님의 모습이다. 사랑없는 인생은 죽은것과 같다.”고 말을 했습니다.
[결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은 이웃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처럼 이웃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한두번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곱 번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의 허물을 용서했으면 기억지 안아야 됩니다. “너 아무때 나에게 이렇게 했지? 용서해도 잊어 버릴수는 없어. 두고보자.” 그것은 진실한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하면 원한을 물에 떠내려 보내야 되는 것입니다. 나뭇잎을 따서 물에 던지면 두둥실 떠서 떠나가 버리듯이 원한은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겨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원한은 잊어 버리고 은혜는 두고두고 기억하고 은혜는 갚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하고 기억치 말아야 되겠어요.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전심전력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허물을 덮어 주어 이웃을 격려하고 도와주며 긍정적으로 대하며 용기를 주고 잘해주는 사랑의 실천을 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켜 주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용서하고 잊어 버리고 사랑하라”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계명이요, 삶의 법칙인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이땅에 살면서 스스로는 하나님께 용서받기를 원하면서도 이웃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므로 가정에 파괴가 다가오고 원한이 들어차게 되고 이웃과 물고 찢고 상처를 입게 되고 나라와 나라는 전쟁을 하게 되옵니다. 용서하게 하여 주시옵시고 용서한 것을 잊어 버리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아버지여 해와 달과 별들도 사랑하기를 원하고 초목, 곤충도 사랑을 원하는데 하물며 우리 사람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도 사랑하면 아름다운 육각형 물이 됩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는 오늘부터 용서하고 잊어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마음에 각오와 결심을 하게 복을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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