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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도움이 어디소 올꼬?

시편 조용기............... 조회 수 2394 추천 수 0 2009.05.14 13:3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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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시121:1~8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4년 7월 11일 주일3부 설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이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시편 121편에서 시편기자는 고난중에서 자기를 도와줄자를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이 시편에 이 시편기자는 말하기를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보리라고 말했습니다. 도움을 얻기 위해서 산을 바라 보았었습니다. 사람들이 맹세를 할 때에 산처럼 변치 아니함을 알리기 위하여 산을 두고 맹세합니다. 산은 믿음직함을 상징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기자가 바라본 산은 자연적인 산이 아니라 태산같은 권력, 태산같은 돈의 힘, 태산같은 명성을 암시합니다. 내가 눈을 들어서 태산같은 권력을 의지해 볼까? 태산같은 돈의 힘, 태산같은 명성을 의지하면 도움을 얻을수 있을까? 그와같은 태산을 의지하여 도움을 구할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지만 곧 그가 깨닫게 된 것은 권력이나 돈이나 명성이란 것은 오늘 있다가 내일 사라지는 것으로 항구적인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에 도움이 있을까요? 시편기자는 곧 말합니다.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야웨께로소이다.” 진실로 옳게 깨달은 신앙고백입니다. 어찌하여 천지를 지으신 야웨께서 우리이 도움이 되실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시고 전지전능, 무소부지하실지라도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알지 못하면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 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어찌하여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 될 수 있습니까?

[본론]
1. 하나님이 사랑으로 도우심

첫째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나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면 나에게 해를 주지 아니하시고 나에게 복을 허락해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이 우리를 사랑하므로 부모께서 우리를 항상 돌보아 주시고 해를 주지 않고 복을 주실 것을 알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모습을 본 사람이 있을까요?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육신의 감각으로는 그 형상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셨으므로 사랑을 체험하고 사랑을 느끼면 바로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2절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이 산에서 저 기도원으로,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방황해도 눈으로 하나님 볼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사랑을 체험하면 하나님을 체험한 것입니다. 사랑을 주면은 하나님을 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인도의 성녀 테레사 수녀가 사랑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테레사 수녀라면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졌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테레사 수녀의 생애를 통해서 볼수가 있었습니다.
1950년 인도의 캘거타 빈민굴에 테레사 수녀가 들어갔을 때 그곳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지옥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굶어서 쓰러지고 병들어 죽어가고 도둑질과 살인이 백주에 난무하며 창녀가 거리를 누비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체구의 여인은 문맹자들을 위해서 여러학교를 세워 7,500명의 청소년을 가르쳐 졸업시켰고 진료소를 지어 96만명의 환자들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또 54개의 나환자 치료소를 만들어 47,000명의 나환자들을 도왔으며, 20개의 고아원을 지어 1,600명의 고아를 길렀으며 죽기만 기다리는 3,400명의 무의탁자를 위해 23개의 숙소를 지어 돌보아 주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을 때 “나는 그런 상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주의 고통을 함께 지고 가는 것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87세로 세상을 떠날 때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습니다. 바로 테레사 수녀의 삶속에 나타난 사랑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디에서 보느냐구요? 테레사 수녀의 생애속에서 하나님을 보고 체험하고 느낄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성자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의 삶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볼수가 있습니다.
알버츠 슈바이처 박사는 밀림의 성자라고 불리웠습니다. 그는 1875년 독일 알싸스 지방에서 태어나 28세때 이미 철학, 신학, 음악, 의학 네가지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을정도로 뛰어난 천재였습니다. 그런 그가 1913년에 모든 명예와 부를 뒤로하고 아내와 함께 아프리카로 향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덥고 독사와 악어가 들끓기로 유명한 랑바레네라는 곳에 병원을 세우고 그곳 원주민들을 돌보아 주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한 부인이 그를 찾아와 “저는 정말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훌륭한 의사요, 위대한 학자인데 왜 이 아프리카에 와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슈바이처 박사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말로써 사람들을 감동시킬만한 재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베푸는 동안에 저는 하나님을 바로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었고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은 그의 삶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보고, 체험하고, 느낄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그곳에 계십니다. 어디에서 하나님을 느낄 수가 있습니까? 사랑을 느낄 때 하나님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가장 우리 가까이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체험하고 느낄 수가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어머니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른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 어머님의 희생은 가히 없어라.’ 이와같은 사랑이 어떻게 어머니라는 한 여성을 통해서 나올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어머니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어 온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머니속에서 그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고 느낄수가 있습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나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나 대신 세상에 어머니를 보내었노라. 나는 등이 없어서 어머니를 보내서 너희를 업어 길렀노라. 나는 가슴이 없어서 어머니 가슴으로 품에 앉게 하고 따뜻한 손으로 길렀노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어머니가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속에서 우리가 느끼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사랑을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세상에서 잘되고 장수한다. 왜,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시기 때문에 부모를 효도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랑위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나신 곳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몸을 찢고 피와 땀을 다 흘리시면서 고생하는 그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셨습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몸부림치며 고통을 당하고 피를 흘린 그 보혈 속에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하시고 우리에게 영광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씻어 주시고 거룩함과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수많은 머리털보다 많은 허물을 대신 짊어지시고 고통을 통해서 청산한 그 사랑을 보십시오. 그게 바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빌라도의 뜰에서 채찍에 맞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상상하지요. 처참하게 매를 맞고 등과 가슴이 줄기줄기 파헤쳐저 선지피가 흘렀습니다. 그 채찍에 맞으신 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바라볼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나무에 저주를 받아 매달려 고생하는 것을 보십시오. 성경에는 나무에 달린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저주를 받아 나무에 매달린 것은 우리를 저주에서 해방시켜 아브라함의 축복에 참여할 수 있게 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남을 우리가 볼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늘어진 그 모습속에 우리는 사망에서 건져 영생천국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느낄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 안에서 온전히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을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셨구나. 그 사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에서 넘쳐났구나.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게 나타난 것을 볼 때 내가 그 사랑을 받아 들이고 하나님을 믿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도와 주실것이라는 확신을 가질수가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로 12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랑은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미워하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랑은 항상 이꼴(=)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도 없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넘치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계시고 우리를 돌보아 주시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을 받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5절로 37절 우리 다같이 소리내어 읽으십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넘쳐나고 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자가 없으므로 하나님은 그 사랑을 통해서 우리를 도와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외롭고 고달프고 고통속에 빠져 있을지라도 아무도 나를 도와 줄수 없다고 생각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으로 말미암아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했으니 우리가 그 사랑을 마음속에 체험할 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은혜로 도우심
둘째로,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 되신다고 믿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은혜란 값없이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천지와 만물은 다 은혜의 선물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해를 만드실 때 여러분이 같이 짐을 지고 일을 하셨습니까? 달과 별들을 만드실 때 여러분이 하나님과 협조해서 짐을 지시고 일을 하셨나요?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생물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실 때 하나님과 함께 짐을 지시고 여러분 일을 하셨나요? 그런적 없습니다. 하나님 홀로 짐을 지시고 하나님 홀로 일하셔서 다 이루어 놓으시고 난 다음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셨습니다. 태양도 은혜의 선물이요, 달과 별들도 은혜의 선물이요, 바다와 물고기와 짐승과 오곡백과가 다 은혜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감사와 감격으로 이 은혜의 선물을 받아 누려야 될것입니다.
시편 8편 3절로 6절에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라고 감탄했습니다.
여러분 또한 구원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하여 값없이 선물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주셨습니다. 우리 구원을 베풀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몸을 찢고 피와 땀을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우리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졌나요? 예수님 고난 받았을 때 우리가 물한사발 대접했나요? 우리가 손수건으로 땀 한방울 닦아 드렸나요? 주님 홀로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고난의 열매로 구원을 우리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
값없이요, 용서와 의를 얻게 된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제가 미국 선교여행 중 하와이에서 캐나다 사업가 한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제게 와서 “목사님 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고생고생 끝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거부가 되었습니다. 제 나이 48이지만 더 이상 일할 필요가 없어서 지금 은퇴하고 별장에서 사냥과 낚시로 소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생하면서 열심히 살때는 몰랐는데 시간과 돈이 있고 여유가 있으니까 이제 말할수 없는 인생의 공허함을 느낍니다.” 그의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그랬더니 그는 “나는 열렬한 카톨릭신자입니다. 나는 성당에 열심히 나갑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을 얻었으면 인생의 공허함을 느낄수 없을텐데요.” 그렇게 묻자 그분은 “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공짜로 얻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값을 지불하고 피땀을 흘렸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나는 예수님께 구원을 받을만한 많은 좋은 일을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돈벌이 한다고 거기에만 치중했기 때문에 아무 공로도 세우지 못하고 아무일도 못했으므로 나는 아직까지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성당에 나가기는 해도 구원은 못받았어요.” 그래서 내가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지 값을 지불하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조목사님! 대가를 치르지 않고 구원받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제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피와 눈물과 땀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아무것도 이 세상에서는 받지 못하지 않아요. 비록 저는 구원은 받지 못해도 그저 자손들이나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성당에 가서 기도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한가지 물어봅시다. 부형님은 저 찬란한 태양빛을 매일같이 받고 있는데 햇빛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공기를 안마시면 4분도 못사는데 이 공기의 은혜를 돈주고 마십니까? 당신을 길러주신 부모의 사랑을 당신은 대가를 지불하고 받았습니까?” 그러니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목사님! 그런 것을 어떻게 값으로 매길수가 있습니까? 값으로 매긴다해도 너무 비싸서 대가를 지불할 수없지요.” 그래서 제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햇빛과 공기와 부모님의 사랑같은 것들은 너무 귀하고 비싸기 때문에 값으로 매길수가 없습니다. 그저 선물로 받을뿐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해와달과 별과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부모를 지으신 그 하나님 아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고 피흘려 우리의 죄를 대신 갚았는데 값으로 계산할 수 있습니까? 당신 값으로 계산할 수 있어요?” 저를 물끄러미 보더니 “계산 못하지요.” 그러니 계산 못하는 것은 당신이 노력을 하고 수고를 해서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공짜로 믿음으로 은혜로 선물로 받아 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햇빛도 선물로 받고 공기도 선물로 받고 부모의 사랑도 선물로 받는데 거기에 비교할 수 없이 값비싼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을 통해서 주시는 구원을 대가를 지불하고 살수 없습니다. 오직 선물로 받아들일 따름입니다. 지금 믿으면 당신은 구원받을수 있습니다.“ 즉시로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아버지, 이런 큰 은혜의 선물을 주신줄 몰랐습니다. 나는 내가 좋은 일을 해야 구원받는 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예수님의 사랑의 은혜의 선물로 구원을 받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고 그 자리에서 구원을 받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값없이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 우리의 짐을 지시고 우리의 일을 해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천지와 만물만 선물로 준 것이 아니라 구원만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우리의 삶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시편 68편 19절 다같이 읽으십시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어제도 아니요, 오늘만 아니요, 내일만 아니요,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같으면 뭐라고 했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떠나갈찌어다. 너희들이 안와도 내짐도 나는 너무 무겁다.” 그렇게 말할 것인데 예수님은 온 인류를 향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 오라.”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짐을 지시고 우리의 일을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은혜 아니고 뭡니까? 우리가 잘나서 그런것도 아니요, 하나님께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인 것도 아닙니다. 그냥 공짜로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짐을 지시고 우리의 일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하고 믿고 의지하고 하나님을 섬기기만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33장 2절로 3절에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도저히 상상을 할수 없는 크고 비밀한 방법으로 우리를 어려움에서 도와 주겠다고 했으니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은혜 베풀 때 너를 들어주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와서 너의 짐을 내가 짊어지고 너의 일을 내가 해주겠다고 하셨으니 이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이요, 이런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을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사랑해 주시고 내게 은혜 베풀기 위해서 두손을 활짝 내미시고 내게로 오라고 청하시는 이 하나님의 계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수가 있고 우리는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살수가 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작가인 데일 카네기는 헨리포드가 임종하기 몇해전에 그와 회견을 했습니다. 카네기는 회견에 앞서 세계 최대의 회사를 창립하고 경영하면서 겼어야했던 온갖 풍파가 헨리포드의 얼굴에 새겨져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78의 나이이고 그 나이에도 너무나 밝고 온화한 표정을 담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아니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카네기가 포드에게 “회사를 경영하면서 피로를 느끼거나 걱정되는 일은 없습니까?”라고 묻자 포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없었습니다. 나는 모든 짐을 져주시고 모든 일을 해주시는 주님, 나를 주관하시는 주님이 책임지고 돌보시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모든일을 맡기고 짐을 맡기고 나는 기도하고 편안하게 주님을 의지하고 섬기면 주님이 다 형통하게 해줄껀데요. 내가 뭘 걱정할 것 있습니까? 나는 한번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친히 우리의 짐을 지시고 우리의 일을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일을 맡기고 그의 은혜속에서 마음에 쉼을 가지고 살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행복의 가장 기초가 마음의 평안입니다. 아무리 부귀, 영화, 공명이 다 있어도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근심걱정이 떠나지 아니하면 행복은 없습니다. 초가삼간에 살아도 마음에 평안에 행복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어지러운 세상속에 마음에 평안을 가질수 있습니까? 헨리포드같이 큰 회사를 경영하면서도 얼굴에 주름살없이 해맑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 비결이 바로 하나님께 일을 맡기고 하나님께 짐을 맡기고 그는 하나님께 의지해서 평안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짐을 지시고 우리를 일을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순종하고 믿고 의지하고 하나님을 섬기기만 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 되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전능하심으로 도우심
셋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려울 때 부모가 우리의 도움이 되면 참 좋지 않아요? 부모는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값없이 주기를 원하지만은 그러나 우리를 늘 도울수 없는 것은 부모가 늘 능력이 있지 않습니다. 부모는 사랑도 있고 은혜 베풀기를 원해도 부모가 전지전능, 무소부지 하지 않은 이상 부모가 어떻게 도와 줍니까? 한없는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없는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없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고 무소부제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시분 한번 손들어 봐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없네요. 다 하나님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는 아프리카 선교사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가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한 부족에게 전도를 했는데 늘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부족의 우상을 믿지 말고 귀신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는데 추장이 회개를 하고 예수를 믿었는데 큰 시험이 다가왔습니다. 추장 아들이 열병에 걸렸습니다. 열이 펄펄 끓는데 뭐 얼마있지 아니하면 그 열로 말미암아 뇌가 파괴되든지 심장병이 걸립니다. 그 아들이 만일 그래서 죽든지 병신이 되면 그 추장 휘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반대하고 믿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의 열을 내리기 위해서는 얼음이 필요한데 그 아프리카 오지에 어디에서 얼음을 실고 올수 있습니까? 얼음을 실고 오면 다 녹아 버릴 것이요. 시간이 늦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손을 비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추장은 태연하게 와서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시고 전지전능하시다고 하셨으니 하나님께 얼음 달라고 기도하시오.” 그래 이 선교사님이 자기가 설교는 그렇게 해놓고 난 다음 너무나 마음이 초조하더랍니다. 세상에 이 아프리카 오지에 이 뜨거운 태양 아래서 어디에 얼음을 구합니까? 그러나 추장은 “아~ 당신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얼음을 주실터이니 무슨 걱정할 것 있어요? 얼음을 달라고 기도하세요.” 할수없어서 그 청년 누워있는 침상 옆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아버지여, 얼음을 주시옵소서. 이 아프리카 오지에 냉장고도 없고 얼음생산 공장도 없습니다. 얼음을 실고 올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얼음이 없으면 죽습니다. 어찌할까요? 얼음을 주시옵소서.” 그런데 갑자기 주위가 컴컴해지더니만 막 천둥번개가 치고 그 다음 다다다 하는 소리에 보니까 이렇게 큰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추장하고 그 밑에 있는 사람이 뛰어 나가서 소쿠리에 얼음을 잔뜩 담아와 가지고서 선교사에게 주면서 “내 아들에게 열을 내리게 해주십시오.” 선교사가 그 얼음을 가지고 열을 내리고 그 청년을 구원하고 그 추장과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아프리카 오지에 더운 여름에 얼음 공장으로 얼음을 수송한 것은 하나님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나타낼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도 우리 주님께 기도하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이루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없는 것도 있게 만들 수 있고 있는 것도 없게 만들 수가 있지 않습니까?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했었습니다.
엿새 만에 천지를 지었습니다.
시편 89편 11절에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실뿐 아니라 만물을 운행하십니다. 하나님이 지어놓고 내버려 놓은 것 아닙니다. 운행을 하고 계세요.
히브리서 1장 3절에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도 붙들어 주시고 지구도 만물도 주님이 붙들어서 운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위대한 기적을 우리가 기억하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수가에 왔을 때 애굽의 바로가 군대를 동원하여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혼비백산했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3절로 14절에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야웨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친히 싸워 주시겠다. 왜, 전능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떻게 싸우시느냐. 홍해를 갈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육지처럼 건너가게 한것입니다. 사람의 상상을 초월한 기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능력이 있어서 못할 일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만에 예수님이 오셔서 그를 살렸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9절로 4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언제나 인생에 한계점을 느낍니다. 인간으로써 상상할 수 없는 것은 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성으로 살지말고 믿음으로 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할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하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믿을 때 하나님이 능력을 나타내시므로 도움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너무나 두려워하고 불안해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감당하지 못할일이 다가오면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좌절하고 절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문제보다도 어려움보다도 더 크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므로 우리가 도움을 받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1장 10절로 13절을 우리 다같이 소리내어 읽어 보십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네가 찾아도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허무한 것 같이 되리니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오른손을 붙잡고 우리에게 이르시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이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고 이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고 계시고 이런 전능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우리가 두려움에서 해방될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두려움이란 우리에게 무시무시한 파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어느날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는 마차위에 할머니 한분이 올라탔습니다. 마부가 물었습니다. “이 마차는 알렉산드리아로 가는데 당신은 누굽니까?” 그 귀신 할멈이 말하기를 “난 호열자요.” “그렇다면 마차에서 내리세요. 내가 왜 호열자 마귀할멈을 태우고 들어갑니까?” “여보 젊은이 내가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꼭 세 사람만 잡아 갈테니까 제발 나를 태워다 주시오.” “세사람이상 죽게 되면 어떻게 하시겠소?” “그때는 이 칼로 나를 죽이시오.” 마부는 할머니가 주는 칼을 받았습니다. 할머니는 마차가 성에 도착하자마자 마차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얼마 후 알렉산드리아시에 호열자가 유행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습니다. 세 사람만 죽은 것이 아니라 수백명이 죽어갔습니다. 단 세사람만 죽게 하겠다는 약속을 한 할머니가 수많은 사람을 죽이자 마부는 화가나서 칼을 들고 할머니를 찾아 나서 성문에서 할머니를 만나 죽이려고 하자 할머니는 “왜 나를 죽이려 하오?” 물었습니다. 마부는 화가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당신은 내게 세 사람만 죽이겠다고 했는데 지금 저렇게 무수한 사람들이 죽었으니 약속대로 당신을 죽이겠소.” 그때 그 할머니가 하는 말이 “여보시오. 내가 죽인 사람은 단지 세 사람에 지나지 않았소. 나머지는 호열자란 말만 듣고 놀라서 지풀에 죽은 사람들이 다 이렇게 많아.” 그말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볼만한 합니다. 세 사람이 호열자에 걸려 죽으니까 소문이 나서 호열자가 돈다니까 사람들이 모두다 두려워해서 제풀에 죽었습니다. 오늘날 두려움은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말합니다. 한국에 정치가 불안하다. 경제가 불안하다. 사회가 불안하다. 사실은 정치나 사회나 경제가 나쁜 것 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불안하다고 말하는 그 심성에 있는 것입니다. 욥은 말하기를 “내 무서워하던 것이 내 몸에 미치고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내게 다가왔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무서워하고 불안하고 두려워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사회에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인 불안과 공포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믿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이가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을 선물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면 우리 마음속에 평안을 가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이 복 주심으로 도우심
넷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 의지를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부모의 부모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잘되기를 원하잖아요. 자식 못되어서 빌어먹기를 원하는 부모가 이 땅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식 잘되기를 부모는 다 원합니다. 부모는 자식이 잘되기를 원하는 그 뜻이 있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도 우리가 축복받기를 원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절대로 우리가 망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려하되 더 풍성히 주려고 왔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한다고 말했습니다.
시편 103편 기억하시지요.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축복의지를 가지고 계시므로 우리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위하여 에덴 낙원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서 빈민굴을 짓지 않았습니다. 에덴에 낙원을 지었습니다. 상함도 해함도 없습니다. 보기에도 아름답고 먹기에도 좋은 실과들이 많이 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들을 위하여 천국 낙원을 예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천국이 빈민굴이면 누가 가기를 원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말씀하기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주님이 우리를 데려가기를 원하시는 곳은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이별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앓는 것이 없는 낙원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곳에 우리를 데려 가서 영원 무궁토록 살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좋은 에덴을 만들고 좋은 천국을 예비하신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 아닐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말합니다. “현재 내가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과 고난을 당하는데 왜 좋은 하나님이면 이런 시험과 환난과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까?” 여러분 어린아이가 유치원에 가고 초등학교, 중등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갑니다. 시험을 치고 시험공부를 하고 괴롭습니다. 왜 학교 보내서 이렇게 괴로움을 주는가. 날보고 놀게 해주지 왜 이렇게 괴롭게 하느냐. 여러분 그것은 괴로운 것이 아니라 그 교육과정을 통해야 나중에 세상에서 출세하고 잘살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 과정은 잘살수 있게 하기위한 준비과정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시험과 환난과 고난당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그릇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도 마침내 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시험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기 위해서 그릇 준비한 것입니다.
신명기 8장 11절로 16절 다같이 소리내어 읽어 보십시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찌어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어떠한 시험과 환난과 고난이 다가와도 하나님의 뜻은 마침내 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믿지 않는 사람에게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환락과 복을 마귀가 주는 것 같아도 마침내 지옥으로 데려가기 위함이라. 끝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시험과 환난과 고통이 있더라도 그를 통해서 우리를 변화시키고 예비시켜 마침내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복을 주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은 종국적으로 축복에 있습니다.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을지라도 내가 걸어가는 곳에 밤이 다가오고 폭풍우가 다가오고 가시밭길이 오고 험산준령을 지날지라도 마침내 하나님은 복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을 알기 때문에 울면서도 웃을수 있고 가슴을 치면서도 소망을 가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큰 축복을 위해서는 큰 고난을 당해야 됩니다. 적은 축복을 위해서는 적은 고난의 길을 통해서 준비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복과 영광을 주시기 위한 그릇 준비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로마서 8장 17절로 18절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지금 우리가 당하는 조그마한 고난은 앞으로 다가올 큰 영광과 비교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로 13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1장 7절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시험과 환난과 고통을 당하며 살지 않습니까? 내 앞길이 칠흙같이 어둡고 답답할 때 우리는 고함칩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그러나 태산같이 믿는 돈이나 지위나 명예나 권세도 우리를 도울수 없습니다. 그러나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되시는 것입니다.

[결론]
내가 하나님을 도우심으로 삼고 꿈을 갖고 소망차고 긍정적이며 감사와 찬양을 갖고 살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게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믿을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믿을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믿을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축복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도움을 받을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버림을 당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무시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나를 사랑하는 주님이 함께 계시고 내게 은혜 베푸시는 주님이 함께 계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나에게 복을 종국적으로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돌보시고 여러분을 이끌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여러분 항상 순종하고 믿고 의지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기도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이 세상 살이가 편한곳이 어디가 있겠습니까? 우리 아버지 밤이 오면 또 밤이오고
폭풍우가 오고 난 다음에는 또 폭풍우 다가오고 가시밭길을 지났는가 하면 또 다가오고
험산준령을 넘었는가 하면 또 험산준령이 다가오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도움을 바랄곳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도움을 구할 수가 있고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 때문에 도움을 구할 수가 있고
전능하시 때문에 도움을 구할 수가 있고
우리가 잘되기를 종국적으로 원하시기 때문에 도움을 구할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마음에 평안을 갖고 큰 기쁨으로 살수 있게 역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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