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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힘에서 열림으로!

마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482 추천 수 0 2009.05.16 20:4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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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7:31-37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8466 
고대 사회에서는 종교, 과학, 질병 치료가 거의 하나로 묶여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고대 종교의 한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무당들의 주된 업무가 바로 육체적 질병을 비롯해서 인간의 악한 운명을 제거하는 데 있다는 사실과,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또는 인도네시아, 뉴질랜드 원시림 깊은 곳에서 원시의 상태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주술적인 방식으로 병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고대 헬라인들이나 유대인들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대로 예수님도 공생애 중에 질병과 장애 치유에 많은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이를 근거로 해서 요즘도 어떤 기독교 집단에서는 환자 치유를 가장 중요한 업무로 삼고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의 구원이 인간의 마음만이 아니라 몸까지 포함한다는 점에서 소위 '신유(神癒)'를 기독교 신앙의 한 부분으로 삼아야 하겠지만 이미 전문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의료 행위를 무시하거나 그들과의 경쟁구도를 유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교회가 독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의료 기술적인 부분에서 전문가들과 경쟁할 필요는 없지만 인간의 통전적 구원이라는 점에서는 훨씬 심원한 차원을 제공해야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질병과 장애 치유 사건은 우리가 늘 새겨듣고 해석해야 할 생명의 말씀입니다.

본문설명

예수님이 여러 곳을 거쳐 갈릴리 호수로 돌아오셨을 때 사람들이 귀먹은 반벙어리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개역성서는 이 장애인을 귀먹고 어눌(語訥)한 사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완전히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더듬는다는 뜻입니다.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은 예수
님이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시기를 바랬다고 합니다. 오늘 사건 전체가 그런 것처럼 손을 얹는 행위는 그 당시의 일반적인 치유 방식이었습니다. 요즘도 기(氣)치료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교회에서 안수하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처럼 손을 얹음으로써 어떤 치유의 힘이 작용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방식입니다. 이런 치유 방식은 여러 관점에서 타당성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접어두고 할머니들이 배 아픈 손자들의 배를 쓰다듬어주는 것만 봐도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이런 방식은 의학적인 근거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데리고 온 이 장애인을 따로 불러냈습니다. 그 당시 주술가나 영적인 치료사들이 자기의 치료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 비밀스러운 행동을 보인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에는 이 장애인의 심리적 상태를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결정적
인 약점이 사람들에게 다시 확인된다는 것은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며, 그런 심리적 억압 상태에서는 치유의 효과도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성서 신학자들의 주석에 따르면 예수님이 이 장애인을 고치시는 그 행위는 헬레니즘적인 기적 행위위자의 치유기법이라고 합니다. 손가락을 그의 귓속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셨다고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장애인을 고친 라비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사람의 침에 치유의 효과와 액막이의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한민족에게도 그런 민간요법이 있습니다. 옛날 우리의 어머니들은 침을 아이의 상처에 발랐는데, 그게 일정한 치료 효과를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종의 퍼포먼스를 보인 다음에 숨을 깊이 내쉬고 '에파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는 아람어로 추정되는 이 단어를 분명하게 번역합니다. 에파타는 '열려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헬레니즘적인 전통에서는 이런 일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성서학자들의 주석에 따르면 예수님의 치유는 그 병이나 장애 자체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과의 관계에 놓여 있다고 합니다. 에파타는 장애 현상을 향한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을 향한 말입니다. 그게 바로 헬레니즘적 전통과 구별되는 점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
해서 이 장애인은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막힘의 현상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장애인의 문제는 그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도 여전히 이런 장애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귀먹었다는 것은 바로 귀가 닫혔다는 말이고, 말을 더듬는다는 것은 혀와 혀를 관장하는 신경의 흐름이 닫혔다는 말인데, 우리에게 이런 일은 허다합니다. 무슨 이유인지 현대인들의 신경이 막히고 혈관이 막힘으로써 건강을 잃게 되는 일도 자주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의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대화가 막혀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그대로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고,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상황이 오늘 우리가 처해있는 이 사회의 모습입니다.
물론 현대사회 구조가 외적으로는 참으로 말을 매끄럽게 하는 형식으로 굴러갑니다. 티브이나 라디오를 틀기만 하면 입담이 좋은 사람은 사람들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합니다. 탤런트나 성우나 아나운서들처럼, 또는 정치인들처럼 똑똑하게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게 모두 정상적으로 들리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난 설날 처가 식구들과 대화하는 중에 어쩌다가 정치와 사회 문제에 들어갔습니다. 간혹 티브이 시사 토론을 보면서 느꼈던 그 생각이 가까운 식구들 사이에서도 확인되었습니다. 그분들은 개인적으로 상당한 지적 수준과 사회적 신분을 갖추고 있었지만 소통의 문을 닫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비교적 오랫동안 그런 대화를 나누었지만 대화의 흐름이 앞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말은 많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대화는 없었습니다. 막힘의 한 현상이었습니다. 아마 저에게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겠지요.
이런 대화의 단절, 그 막힘이 어디 가족이나 친구들 사이에서만 벌어집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학교 사회에서도 말문이 막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중고등학교 학생들도 자기 선생님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 경험을 적지 않게 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와 종교 사이에, 그리고 같은 신앙을 갖고 있는 신자와 신자 사이에도 그렇습니다. 목사와 목사 사이에도 영적인 문이 막히는 경우는 적지 않습니다. 이는 흡사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영적인 문이 막혀 있었던 것과 비슷합니다. 종교 현상이라는 점에서는 바리새인들이야말로 가장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영적인 세계를 인식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신앙 안에 결정적인 문제가 놓여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막힘의 현상은 더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도 역시 똑같이 적용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파괴를 말하고 있듯이 오늘 우리 현대인들의 삶은 자연과 소통의 관계가 아니라 막힘의 관계에 빠져 있습니다. 아직은 여기서 숨쉬고 물을 마시고 살아가니까 우리의 피부
에 와 닿지 않겠지만 생산과 소비의 악순환 안에서만 유지되는 오늘 현대인들의 삶이 그 방향을 전환하지 않으면 결국 생태계를 질식시킬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토대인 자연을 장애 상태에 빠뜨리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막힘의 원인
사람 사이의 대화가, 바로 그 관계가 막히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여러 차원에서 진단이 가능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어느 한쪽이, 또는 양쪽이 자기를 절대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며칠 전 제가 경험한 그 대화 과정을 보면 이 사실이 분명합니다. 그분들은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서 어떤 가치 있거나 의미 있는 것을 찾겠다는 생각은 없고, 자기의 개인적인 경험만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내세우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북한은 지금도 적화야욕에 불타고 있다거나, 현재의 남한 정부는 북한의 전술에 말려들었기 때문에 믿지 못하겠다는 식입니다.
어쩌면 그분들의 생각이 옳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와 입장이 다른 상대방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해야만 대화가 막히지 않는다는 근본을 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태도에는 문제가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과의 대화가 불가능했던 바리새인들의 문제도 역시 여기에 있었습니다. 율법을 절대화하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언행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입장
에서 아예 대화의 주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렇게 자기와 자기의 경험을 절대화함으로써 모든 주변과의 관계를 막히게 합니다. 성서는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것은 자기를 절대화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소통을 막았다는 뜻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자기 행위를 설명합니다. 좋은 뜻에서, 또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대개 그런 설명들은 자기를 절대화하고, 성취하려는 욕망에 대한 변명에 불과합니다.

열림으로!
저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장애인의 형편을 보면서 하나님과 소통되어야 할 우리의 영적인 길이 막혀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친구와의 단절, 가족과의 단절, 더 나아가서 생태계와의 단절은 어느 정도 통찰력이 있기만 하다면 쉽게 잡아낼 수 있지만 하나님과의 소통이 막힌 것에 대해서는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숨'(루아흐)을 받은 영적인 존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적인 차원이 막혀 있으면 모든 게 막히게 됩니다. 거꾸로 영적인 막힘이 열리게 된다면 모든 문제가 열릴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문제가 그렇게 기계적이고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원칙적인 면에서는 그렇습니다. 이는 흡사 사랑에 빠진 사람은 모든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앞에서 한번 지적한대로 본문의 장애인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인 '에파타'는 곧 예수님과 장애인의 인격적인 만남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애인과 예수님 사이에 고유한 소통의 길이 뚫렸습니다. 장애의 극복은 이런 열림에 의한 결과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결과
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이런 사건의 근본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애가 풀리는 그 핵심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과의 영적인 소통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런 상태를 일컬어서 은혜가 충만하다고, 또는 영성이 풍부하다고 말합니다.
다시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봅시다. 우리의 삶에 은혜와 영성이 충만한가요? 우리 한국교회가 이런 은혜와 영성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긴 합니다만 왜곡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다른 교회에 대한 비판은 가능한대로 하지 않는 게 좋지만, 그리고 그 비판이라는 게 인간의 심리적 작용일 경우가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지만 은혜와 영성의 왜곡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몇 마디 언급하려고 합니다. 서울 강남 지역에 있는 '사랑의 교회'에서 작년에 새벽기도회 운동이 불길 같이 타올랐습니다. 새벽 기도회에만 수천명 씩 모였다고 합니다. 이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새벽 2시에 일어나서 나오는 이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그런 일들이 오늘처럼 개인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시대에도 가능하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회의 슬로건이 '자녀의 새벽기도 부모의 노후보장, 부모의 새벽기도 자녀의 평생축복'(?)이었다고 합니다. 아마 그런 자극적인 표어를 내세움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기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려는 것이었겠지요. 저는 일단 그것이 그들 교회만의 독특한 신앙교육이라는 점을 긍정적인 면에서 인정할 수 있습니다. 소종파나 이단들의 열광주의적 행태도 일단은 이해해야 한다는 것과 비슷한 차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결국 이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죽어서 천당 가는 것쯤으로 매도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약간 불편했습니다.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도구로 인식합니다. 최고급 노후보장, 또는 건강보장 보험에 드는 것쯤으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소통이 정상적으로 열릴 수 없습니다. 한 평생 신앙생활을 해도 그들의 영적인 수준은 부모님에게 용돈이나 얻어 쓰는 것으로 만족하는 어린아이 상태를 면하지 못합니다.

생명의 신비로!
하나님과의 영적인 소통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곧 생명의 신비에 자기 삶을 완전히 맡긴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곧 생명의 창조자이며 그 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 우리는 그 생명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런 뜻에서 생명은 신비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생명의 신비를 단지 유전공학적인 차원에서, 또는 생태학적 차원에서만 생각합니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훨씬 심원한 차원에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생명운동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입니다.
생명의 신비, 즉 하나님의 신비에 마음을 열어두고 있는 사람은 결코 자기 자신과 자기의 성취를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훨씬 겸손한 마음의 상태가 되고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며, 진정한 의미에서 소통의 길을 열고, 궁극적으로 사랑의 힘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장
애인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진정한 의미에서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됩니다. 즉 생명의 세계에 돌입한다는 말입니다.

제대로 말하기
들음과 말함에서 장애를 졌던 이 사람이 제대로 말하게 되었다는 이 마가의 보도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변화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제대로 말하는 것의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자기 딴에 말을 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정작 귀담아 들어볼 만한 말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일종의 장애를 갖고 있으면서도 장애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훨씬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던 마가는 제대로 말을 하기 시작한 장애인 전승을 보도함으로써 제대된 말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는 게 아니었을까요?
성서가 제시하고 있는 제대로 된 말은 예수님 사건에 관한 것입니다. 36절에서 예수님이 이 장애인 사건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지만 그럴수록 더 널리 퍼졌다고 합니다.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이렇게 경탄하여 마지않았다고 합니다. "귀먹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
리도 말을 하게 하시니 그분이 하시는 일은 놀랍기만 하구나." 예수님의 메시아성에 대한 표현입니다. 즉 예수님이야말로 그리스도라는 고백입니다. 장애치유가 케리그마 사건으로 새롭게 해석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과 세계의 구원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며 살든지 그것은 곧 인간과 세계의 구원문제와 연결되어 있어야 하며, 그 구원이 바로 역사적 예수님에게서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한 고백과 증명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런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의 신비에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들은 기가 막힌 이 세상의 질서를 영적인 사랑의 세계로 열어갈 것입니다. 생명은 막힘이 아니라 '에파타', 즉 열림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200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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