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계1:4-8 |
---|---|
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467 |
재림의 신앙
요한은 소아시의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신약성서의 여러 문서들 중에서 이 요한 계시록은 유별납니다. 다른 문서들은 일상적 용어와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이라는 아주 이질적인 문학장르로 짜여져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소합니다. 물론 구약성서에도 이런 장르의 글들이 있기도 하고, 신약성서의 다른 문서에도 부분적으로 이런 장르의 내용이 부분적으로 끼어 있기는 하지만 요한계시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외형상 요한계시록에는 역사가 없으며 삶의 내용도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으로는 도저히 따라잡기 힘든 세계가 극단의 상징적 언어로 묘사되어 있을 뿐입니다. 로마 헬라 신화보
다도 훨씬 이질적인 세계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간단한 인사말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묵시사상적 특징이라는 점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신약성서의 다른 편지는 단순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임하기를 바란다고 되어 있지만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그분과 그분의 옥좌 앞에 있는 일곱 영신께서, 그리고 진실한 증인이시며, 죽음으로부터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시며, 땅 위의 모든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께서 여러분에게 은총과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4,5절).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분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그거야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는 표현이 아닌가, 하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 자신이 그런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존재를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는 말을 쉽게 합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영원한 삶을 약속 받았다고 간단히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을 좀더 따져보겠습니다. 현재 계시고 과거에 계신 분이라면 굳이 장차 오실 필요는 없는 것 아닐까요? 이미 오셨고 지금도 존재하는 분인데 미래에 다시 오신다는 것은 어딘가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이는 흡사 하나님이 본질적으로는 하나인데, 인격적으로 셋이라는 삼위일체론과 마찬가지로 모순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모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비입니다. 단지 피상적인 차원에서만 바라보면 모순이지만 훨씬 깊은 자리에서 바라보면 존재와 생명의 신비를 담아내는 언어학입니다. 성서는 바로 우리의 일상에 신비한 방식으로 내재해 있는, 그리고 그렇게 활동하고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비의 책입니다. 신비한 책을 통해서 그 신비의 리얼리티가 무엇인지를 읽어내는 게 곧 성서읽기며 설교이며 해석학이고 신학입니다. 단순히 신비하니까 이것에 대한 비판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문자주의나 근본주의가 아니라 성서가 인식한 하나님의 리얼리티를 바른 의식으로 접근해야만 합니다. 물론 우리의 인식이 더 이상 나갈 수 없는 단계에 이른 다음에는 하나님의 계시를 기다려야 하겠지요. 이런 방식으로 성서와 계시의 역사는 종말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신비가 현재, 과거, 미래와 연관해서 설명되고 있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특히 미래의 차원에 관심을 갖습니다. 요한이 7절에서 구약 다니엘을 인용하면서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미 과거에 계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지만 그분은 장차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말입니다. 현대 학문을 어느 정도 받은 사람이라면 이런 구절 앞에서 매우 당혹스러울 것입니다. 예수님이 손오공인가, 구름을 타고 다니시게.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셨다고 믿었습니다. 특히 승천 당시의 광경에 대한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구름에 싸였다고 합니다. 흰옷 입은 사람 둘이 갑자기 제자들 앞에 나타나서 이
렇게 말했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너희는 여기에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곁을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행 1:11). 이런 전승과 다니엘 전승에 기대서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기록했습니다.
구름 표상에 대한 오해
그 당시 기독교 신자들은 '구름 타고 오신다'는 이 요한의 편지를 읽고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이 구름을 실제 구름으로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단순한 상징으로 생각했을까요? 이런 질문은 그 당시의 기독교 신자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역시 해당됩니다. 성서를 읽는 오늘의 많은 기독교 신자들 중에서 아주 일부의 사람들은 실제 구름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 우리가 공중으로 들림 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신앙의 연장선 속에서 하늘나라를 우주 공간의 어느 한 곳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서의 내용을 무조건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매우 신앙심이 깊은 것 같지만 합리적인 교육을 받은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렇게 지혜로운 사람들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을 무조건 믿는 거라고 주장하면 할수록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설득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강도만 따진다면 이단과 소종파가 한 수 높습니다. 제가 현풍에서 목회를 할 때 통일교 신자 한 분이 우리 교회에 와서 2,3년간 신앙생활을 하다가 결국은 떠났습니다. 그분이 그러더군요. "목사님의 설교나 가르침이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꿈을 꿀 때마다 문선명 선생이 나타나서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다시 통일교로 가야겠습니다." 자기 교주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만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고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진리의 길을 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런 맹목적인 믿음은 거꾸로 믿음이 상실될지 모른다는 불안의 역반응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불안을 쉽게 처리해버리려는 편이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저는 그런 분들의 소박하고 열광적인 신앙을 무조건 백안시하거나 비난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서의 보도를 단순히 고대인들의 무지에 의한 결과일 뿐이라고 무시하는 가벼운 현대주의보다는 그들이 비교적 낫기 때문입니다. 아니 덜 나쁘기 때문입니다. 계몽주의와 자연과학적 합리주의로 대표되는 현대적 교육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요한계시록의 '구름'을 기독교 신앙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인 보도들은 성서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신화적인 이야기보다는 도덕적인 가르침을 부각시켜야만 기독교가 살아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보다 문자주의자들이 그래도 희망이 있는 이유는 그들에게는 기독교 전승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바르게 해석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텍스트가 보존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주의자들에게는 그런 기독교의 전승과 텍스트 자체가 상실되고 말기 때문에 훨씬 위험합니다.
이런 현대주의자들이 '구름'과 같은 신화적 요소를 백안시하는 이유는 신화가 근대주의적 사고방식과 어긋난다고 보기 때문인데, 사실은 이것 자체가 그들도 역시 성서의 리얼리티를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성서 문자주의들은 무식해서 성서의 리얼리티를 모른다면, 현대주의자들은 너무 유식해서 모르는 것뿐입니다. 아니 유식한 척 할 뿐이지 그들도 역시 무식한 것인지 모릅니다.
구름과 생명
'구름'의 리얼리티가 무엇일까요? 이게 바로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요한을 비롯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무슨 생각으로 예수님이 구름 타고 다시 오신다고 주장할까요?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모두 정신 이상 된 사람들이 아니라고 한다면 사람이 구름을 타고 다닌다고 생각했을 까닭이 없습니다. 구름이라는 단어가 여기에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성서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하늘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좀더 실감 있게 묘사하기 위해서 구름을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하늘을 그릴 때 구름을 함께 그리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신다는 말은 곧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땅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오신다는 뜻입니다. 구름이라는 단어가 단지 하늘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장식용어이지만 그렇게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 개념을 훨씬 리얼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늘도 우리들도 여전히 그런 전승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다시 한번 더 구체적으로 질문해 봅시다.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부터 다시 이 땅에 재림하신다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어떤 리얼리티를 담고 있습니까? 궁극적인 생명은 우리에게서 생산되는 게 아니라 절대적인 곳으로부터 우리에게 온다는 게 바로 이 전승이 담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리얼리티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사건에서 이런 절대적인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에게 드러났던 예수님의 생명 사건은 다시 은폐되었습니다. 그게 곧 예수의 승천입니다. 예수님이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이 곧 사도신경에 적시되어 있듯이 '하나님 우편'입니다. 이제 때가 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시 오십니다.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인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에게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은 구름을 타십니다. 우리가 전혀 예상할 수 있는 그런 생명의 세계로부터 오시기 때문에 그 방식도 역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구름타기의 방식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런 신화적 방식으로, 묵시사상이라는 장르의 방식으로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생명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지금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런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구름 타고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이런 기독교의 신앙은 근본적으로 생명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며, 따라서 승천한 그가 다시 와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생각이 옳습니까? 물론 옳다고 믿으니까 기독교인이 되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런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기초에 충실하려면 이런 신앙 형식과 연관된 문제들을 훨씬 깊이 있게 인식해야만 합니다. 하늘로부터 이 땅의 우리에게 온다는 이 생명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생명에 대한 질문이라는 차원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또한 사회이념이나 사회과학과 경쟁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토대
자본주의가 극대화되어 가는 오늘 우리에게서 생명은 아마 경제문제와 직결되어 있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잘 살 수만 있다면 그 이외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것처럼 살아갑니다. 여기에 길이 없다는 사실은 약간만 생각하면 곧 답이 나옵니다. 경제적인 힘이 우리를 편리하게 하는 것 같지만 어느 때가 되면 그것은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 것입니다. 소비는 생산을 부추기고, 그 생산은 또 하나의 소비자들을 찾아내고, 그런 소비와 악순환의 질서를 교묘하게 확대시킴으로써 자본주의는 자라납니다. 이런 과정에서 인간은 결코 만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얼마 가지 않아서 이 모든 토대가 허물어 질 것입니다. 경제적인 힘은 결국 궁극적인 생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쪽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제구조, 정치구조, 온갖 오락과 즐김의 문화가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제공하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그것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게 분명합니다.
이런 분석은 생명의 본질과 연관된 유전공학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그런 과학의 발달을 통해서 인간과 생물의 모든 유전자 지도를 완성시키고, 모든 질병의 싹을 도태시킬 수 있는 데까지 나갔다고 합시다. 사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불가능한 생명의 힘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학이 어떤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를 박멸시켰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변이가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현대인류에게 재앙이 될지도 모르는 조류 독감만 해도 그렇습니다. 지구의 마지막날까지 우리 인류는 미생물과 싸우겠지요.
어쨌든지 의학의 발달로 그런 모든 재앙을 제거했다고 합시다. 그것으로 우리의 생명이 완성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2천년 전, 오늘 우리의 자연과학 지식과 비교해서 아주 미개한 사람들이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참된 생명이 사람들을 통해서 생산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주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특히 예수님의 사건에서, 그의 십자가와 부활로 집중되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서 그런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시면 이 세상에 궁극적인 생명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재림을 모든 신앙의 토대로 삼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태도에는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인식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들은 하늘만 쳐다보면서 이 세상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또는 이 세상의 고난을 도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난 날 기독교가 민중들에게 아편처럼 작용하던 때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근본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차안에서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를 간단히 피안적인 방식으로 외면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생명 형식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생명의 근원에 의해서만 오늘의 생명이 완성될 수 있다고 인식하고 그렇게 믿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훨씬 깊은 차원에서 이 세상의 생명운동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잠시 유행처럼 다가왔다가 사라지는 사상이나 사회과학 운동이 아니라 훨씬 근본적인 변화를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이처럼 '구름' 타고 오신다는 요한의 진술이 가리키는 핵심은 우리의 현재 삶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그런 절대적인 생명의 근원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고백입니다.
전혀 다른 생명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그런 신앙의 상상력이 결정적으로 부족합니다. '구름 타고 오신다'는 이런 진술을 통해서 드러내려 했던 그런 생명의 상상력 말입니다. 상상력은 단지 없는 것을 억지로 꾸며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 너머를 생각하는 게 곧 상상력입니다. 그것이 아무런 논리도 없고 이기적인 것이라면 망상이 될 것이고, 참된 리얼리티를 담고 있다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기껏해야 교회를 크게 짓는다거나 선교사를 보낸다거나 아니면 복지회관을 짓는 정도, 좀더 바람직한 태도라 할 생태학적 관심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생명을 완성시키시는지, 우리의 의식에 불을 켜
고 기다려야 합니다. 부활로 궁극적인 생명을 선취하신 예수님은 은폐된 생명의 세계인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오십니다. 그 사실을 요한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2004.2.1>
요한은 소아시의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신약성서의 여러 문서들 중에서 이 요한 계시록은 유별납니다. 다른 문서들은 일상적 용어와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이라는 아주 이질적인 문학장르로 짜여져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소합니다. 물론 구약성서에도 이런 장르의 글들이 있기도 하고, 신약성서의 다른 문서에도 부분적으로 이런 장르의 내용이 부분적으로 끼어 있기는 하지만 요한계시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외형상 요한계시록에는 역사가 없으며 삶의 내용도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으로는 도저히 따라잡기 힘든 세계가 극단의 상징적 언어로 묘사되어 있을 뿐입니다. 로마 헬라 신화보
다도 훨씬 이질적인 세계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간단한 인사말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묵시사상적 특징이라는 점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신약성서의 다른 편지는 단순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임하기를 바란다고 되어 있지만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그분과 그분의 옥좌 앞에 있는 일곱 영신께서, 그리고 진실한 증인이시며, 죽음으로부터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시며, 땅 위의 모든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께서 여러분에게 은총과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4,5절).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분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그거야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는 표현이 아닌가, 하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 자신이 그런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존재를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는 말을 쉽게 합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영원한 삶을 약속 받았다고 간단히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을 좀더 따져보겠습니다. 현재 계시고 과거에 계신 분이라면 굳이 장차 오실 필요는 없는 것 아닐까요? 이미 오셨고 지금도 존재하는 분인데 미래에 다시 오신다는 것은 어딘가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이는 흡사 하나님이 본질적으로는 하나인데, 인격적으로 셋이라는 삼위일체론과 마찬가지로 모순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모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비입니다. 단지 피상적인 차원에서만 바라보면 모순이지만 훨씬 깊은 자리에서 바라보면 존재와 생명의 신비를 담아내는 언어학입니다. 성서는 바로 우리의 일상에 신비한 방식으로 내재해 있는, 그리고 그렇게 활동하고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비의 책입니다. 신비한 책을 통해서 그 신비의 리얼리티가 무엇인지를 읽어내는 게 곧 성서읽기며 설교이며 해석학이고 신학입니다. 단순히 신비하니까 이것에 대한 비판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문자주의나 근본주의가 아니라 성서가 인식한 하나님의 리얼리티를 바른 의식으로 접근해야만 합니다. 물론 우리의 인식이 더 이상 나갈 수 없는 단계에 이른 다음에는 하나님의 계시를 기다려야 하겠지요. 이런 방식으로 성서와 계시의 역사는 종말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신비가 현재, 과거, 미래와 연관해서 설명되고 있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특히 미래의 차원에 관심을 갖습니다. 요한이 7절에서 구약 다니엘을 인용하면서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미 과거에 계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지만 그분은 장차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말입니다. 현대 학문을 어느 정도 받은 사람이라면 이런 구절 앞에서 매우 당혹스러울 것입니다. 예수님이 손오공인가, 구름을 타고 다니시게.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셨다고 믿었습니다. 특히 승천 당시의 광경에 대한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구름에 싸였다고 합니다. 흰옷 입은 사람 둘이 갑자기 제자들 앞에 나타나서 이
렇게 말했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너희는 여기에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곁을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행 1:11). 이런 전승과 다니엘 전승에 기대서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기록했습니다.
구름 표상에 대한 오해
그 당시 기독교 신자들은 '구름 타고 오신다'는 이 요한의 편지를 읽고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이 구름을 실제 구름으로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단순한 상징으로 생각했을까요? 이런 질문은 그 당시의 기독교 신자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역시 해당됩니다. 성서를 읽는 오늘의 많은 기독교 신자들 중에서 아주 일부의 사람들은 실제 구름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 우리가 공중으로 들림 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신앙의 연장선 속에서 하늘나라를 우주 공간의 어느 한 곳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서의 내용을 무조건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매우 신앙심이 깊은 것 같지만 합리적인 교육을 받은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렇게 지혜로운 사람들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을 무조건 믿는 거라고 주장하면 할수록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설득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강도만 따진다면 이단과 소종파가 한 수 높습니다. 제가 현풍에서 목회를 할 때 통일교 신자 한 분이 우리 교회에 와서 2,3년간 신앙생활을 하다가 결국은 떠났습니다. 그분이 그러더군요. "목사님의 설교나 가르침이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꿈을 꿀 때마다 문선명 선생이 나타나서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다시 통일교로 가야겠습니다." 자기 교주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만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고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진리의 길을 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런 맹목적인 믿음은 거꾸로 믿음이 상실될지 모른다는 불안의 역반응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불안을 쉽게 처리해버리려는 편이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저는 그런 분들의 소박하고 열광적인 신앙을 무조건 백안시하거나 비난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서의 보도를 단순히 고대인들의 무지에 의한 결과일 뿐이라고 무시하는 가벼운 현대주의보다는 그들이 비교적 낫기 때문입니다. 아니 덜 나쁘기 때문입니다. 계몽주의와 자연과학적 합리주의로 대표되는 현대적 교육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요한계시록의 '구름'을 기독교 신앙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인 보도들은 성서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신화적인 이야기보다는 도덕적인 가르침을 부각시켜야만 기독교가 살아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보다 문자주의자들이 그래도 희망이 있는 이유는 그들에게는 기독교 전승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바르게 해석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텍스트가 보존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주의자들에게는 그런 기독교의 전승과 텍스트 자체가 상실되고 말기 때문에 훨씬 위험합니다.
이런 현대주의자들이 '구름'과 같은 신화적 요소를 백안시하는 이유는 신화가 근대주의적 사고방식과 어긋난다고 보기 때문인데, 사실은 이것 자체가 그들도 역시 성서의 리얼리티를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성서 문자주의들은 무식해서 성서의 리얼리티를 모른다면, 현대주의자들은 너무 유식해서 모르는 것뿐입니다. 아니 유식한 척 할 뿐이지 그들도 역시 무식한 것인지 모릅니다.
구름과 생명
'구름'의 리얼리티가 무엇일까요? 이게 바로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요한을 비롯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무슨 생각으로 예수님이 구름 타고 다시 오신다고 주장할까요?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모두 정신 이상 된 사람들이 아니라고 한다면 사람이 구름을 타고 다닌다고 생각했을 까닭이 없습니다. 구름이라는 단어가 여기에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성서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하늘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좀더 실감 있게 묘사하기 위해서 구름을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하늘을 그릴 때 구름을 함께 그리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신다는 말은 곧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땅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오신다는 뜻입니다. 구름이라는 단어가 단지 하늘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장식용어이지만 그렇게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 개념을 훨씬 리얼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늘도 우리들도 여전히 그런 전승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다시 한번 더 구체적으로 질문해 봅시다.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부터 다시 이 땅에 재림하신다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어떤 리얼리티를 담고 있습니까? 궁극적인 생명은 우리에게서 생산되는 게 아니라 절대적인 곳으로부터 우리에게 온다는 게 바로 이 전승이 담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리얼리티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사건에서 이런 절대적인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에게 드러났던 예수님의 생명 사건은 다시 은폐되었습니다. 그게 곧 예수의 승천입니다. 예수님이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이 곧 사도신경에 적시되어 있듯이 '하나님 우편'입니다. 이제 때가 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시 오십니다.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인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에게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은 구름을 타십니다. 우리가 전혀 예상할 수 있는 그런 생명의 세계로부터 오시기 때문에 그 방식도 역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구름타기의 방식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런 신화적 방식으로, 묵시사상이라는 장르의 방식으로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생명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지금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런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구름 타고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이런 기독교의 신앙은 근본적으로 생명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며, 따라서 승천한 그가 다시 와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생각이 옳습니까? 물론 옳다고 믿으니까 기독교인이 되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런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기초에 충실하려면 이런 신앙 형식과 연관된 문제들을 훨씬 깊이 있게 인식해야만 합니다. 하늘로부터 이 땅의 우리에게 온다는 이 생명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생명에 대한 질문이라는 차원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또한 사회이념이나 사회과학과 경쟁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토대
자본주의가 극대화되어 가는 오늘 우리에게서 생명은 아마 경제문제와 직결되어 있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잘 살 수만 있다면 그 이외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것처럼 살아갑니다. 여기에 길이 없다는 사실은 약간만 생각하면 곧 답이 나옵니다. 경제적인 힘이 우리를 편리하게 하는 것 같지만 어느 때가 되면 그것은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 것입니다. 소비는 생산을 부추기고, 그 생산은 또 하나의 소비자들을 찾아내고, 그런 소비와 악순환의 질서를 교묘하게 확대시킴으로써 자본주의는 자라납니다. 이런 과정에서 인간은 결코 만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얼마 가지 않아서 이 모든 토대가 허물어 질 것입니다. 경제적인 힘은 결국 궁극적인 생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쪽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제구조, 정치구조, 온갖 오락과 즐김의 문화가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제공하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그것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게 분명합니다.
이런 분석은 생명의 본질과 연관된 유전공학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그런 과학의 발달을 통해서 인간과 생물의 모든 유전자 지도를 완성시키고, 모든 질병의 싹을 도태시킬 수 있는 데까지 나갔다고 합시다. 사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불가능한 생명의 힘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학이 어떤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를 박멸시켰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변이가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현대인류에게 재앙이 될지도 모르는 조류 독감만 해도 그렇습니다. 지구의 마지막날까지 우리 인류는 미생물과 싸우겠지요.
어쨌든지 의학의 발달로 그런 모든 재앙을 제거했다고 합시다. 그것으로 우리의 생명이 완성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2천년 전, 오늘 우리의 자연과학 지식과 비교해서 아주 미개한 사람들이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참된 생명이 사람들을 통해서 생산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주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특히 예수님의 사건에서, 그의 십자가와 부활로 집중되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서 그런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시면 이 세상에 궁극적인 생명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재림을 모든 신앙의 토대로 삼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태도에는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인식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들은 하늘만 쳐다보면서 이 세상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또는 이 세상의 고난을 도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난 날 기독교가 민중들에게 아편처럼 작용하던 때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근본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차안에서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를 간단히 피안적인 방식으로 외면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생명 형식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생명의 근원에 의해서만 오늘의 생명이 완성될 수 있다고 인식하고 그렇게 믿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훨씬 깊은 차원에서 이 세상의 생명운동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잠시 유행처럼 다가왔다가 사라지는 사상이나 사회과학 운동이 아니라 훨씬 근본적인 변화를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이처럼 '구름' 타고 오신다는 요한의 진술이 가리키는 핵심은 우리의 현재 삶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그런 절대적인 생명의 근원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고백입니다.
전혀 다른 생명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그런 신앙의 상상력이 결정적으로 부족합니다. '구름 타고 오신다'는 이런 진술을 통해서 드러내려 했던 그런 생명의 상상력 말입니다. 상상력은 단지 없는 것을 억지로 꾸며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 너머를 생각하는 게 곧 상상력입니다. 그것이 아무런 논리도 없고 이기적인 것이라면 망상이 될 것이고, 참된 리얼리티를 담고 있다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기껏해야 교회를 크게 짓는다거나 선교사를 보낸다거나 아니면 복지회관을 짓는 정도, 좀더 바람직한 태도라 할 생태학적 관심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생명을 완성시키시는지, 우리의 의식에 불을 켜
고 기다려야 합니다. 부활로 궁극적인 생명을 선취하신 예수님은 은폐된 생명의 세계인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오십니다. 그 사실을 요한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2004.2.1>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