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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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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32: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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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468 |
금송아지 아래서
오늘 이야기의 배경은 모세의 십계명 돌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계약을 얻고 그 증거로 돌판에 새겨진 증거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기다리기에는 그 기간이 너무 길었던 것 같습니다. 애굽을 탈출했지
만 애굽에서 살아가던 생활 조건보다 더 열악한 상태에 놓여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자리를 뜬 사이에 금으로 수송아지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이 금 수송아지 형상을 자신들의 신 야훼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에집트에서 데려 내 온 우리의 신이다."(32:4). 그리고 그 앞에서 번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정신 없이 뛰놀았다"(32:6)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동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그 막강한 에집트 군대를 따돌릴 수 있도록 홍해를 가르시고,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길을 인도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신 야훼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그렇게 쉽게 망각하는 그들의 행동 말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에게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구원 행위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할 수 있을 만큼 명시적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서에는 그런 사건들이 명시적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성서 기자들의 영적 감수성에 의해서만 포착된 것이지 일반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한 사건에 불과합니다. 지금도 역시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만 특별히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오늘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은 게 아니라 하나님은 늘 은폐의 방식으로 자기를 계시하는 데 그것을 볼 눈이 있는가 아닌가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대개 이런 영적인 깊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도대체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솔직하긴 하지만 아직 이런 생명의 깊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어린이나 어른들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경험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여곡절 끝에 에집트를 탈출했고 근근히 광야의 유랑생활을 버텨나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시내산으로 들어가서 감감 무소식입니다. 앞으로 자기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는지 아무런 확신이 없습니다. 하나님 야훼가 자기들과 함께 하시는가에 대한 확신도 없습니다. 흡사 부부와 연인과 친구 사이에도 떨어져 있으면 사랑이 식는다는 말과 비슷한 현상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불확실한 상황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으로 수송아지를 만들어 제사를 드리고 정신 없이 뛰놀았다는 것은 그
렇게 해괴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 행동 양식들이 그들에게는 현실성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보이는 금송아지가 그들의 마음을 훨씬 편안하게 만들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정신 없이 뛰놀며, 자녀들을 많이 낳고, 경제성장을 일으키는 일들마저 없으면 그들은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보이는 교회조직과 교회건물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이 모여서 무언가 확실하고 열광적인 행사를 해야만 마음이 편해집니다. 심지어는 연예인을 데려다가 흡사 이벤트를 꾸미듯이 교회 안에서 어떤 행
사를 벌입니다. 물론 이런 행사 자체가 기독교 신앙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 그런 행사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작은 수단으로 도입되는 데 머물지 않고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된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서 제사를 드렸다는 것도 그들이 야훼 하나님을 버리고 노골적으로 우상을 숭배하려는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자신들의 현실적인 불안을 보이지 않은 하나님과 그의 약속에 맡기지 못하고 그런 이벤트를 통해서 해소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문제였습니다.
야훼의 진노
이런 상황 앞에서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장 내려 가 보아라. 네가 에집트에서 데려 내 온 너의 백성들이 고약하게 놀아나고 있다. 저들은 내가 명령한 길에서 저다지도 빨리 벗어나 저희 손으로 보어 만든 수송아지에게 예배하고 제물을 드리며 '이스
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에집트 땅에서 데려 내 온 우리의 신이다'라고 떠드는구나! 나는 이 백성을 잘 안다. 보아라, 얼마나 고집이 센 백성이냐?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진노를 내려 저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리라. 그리고 너에게서 큰 백성을 일으키리라."(32:7-10). 여기서 야훼 하나님은 흡사 사람처럼, 그것도 왕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처럼 실제로 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린아이말고는 없을 것입니다. 아마 모세의 영적 감수성에서 시작해서 이스라엘 예언자의 전승사를 통해서 이런 민담으로 자리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금송아지 제조와 하나님의 진로에 얽힌 이 민담에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리게 되는 역사적 배경이 개입되었다는 게 구약성서학자들의 공통된 입장입니다. 솔로몬 아들 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됩니다. 남유다의 왕은 솔로몬의 아들은 르호보암이었으며, 북이스라엘의 왕은 솔로몬 치하에서 최고위급 장군으로 활동했던 여로보암이었는데, 여로보암의 반역에 의해서 다윗 왕조가 쪼개진 셈입니다. 그 원인은 근본적으로 솔로모의 철권통치에 있었지만 말입니다. 솔로몬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남유다 지역
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의 자기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왕래하다가 그쪽으로 기울어질 것을 염려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대항하는 의미에서 베델과 단에 금송아지 상을 만들어 세웠습니다. 이런 여로보암의 행위는 이스라엘의 역사 대대로 가장 파렴치하고 불신앙적인 것으로 치부되었습니다. 남북을 막론하고 모든 악한 왕들을 빗대어 "여로보암과 같았다"는 관용어가 생길 정도였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보면, 이제 아론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송아지 제조 사건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에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성서 기자들은, 그리고 이런 전승사에 참여한 예언자들은 왜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 앞에서 진노하신다고 생각한 걸까요? 창세기에도 노아 홍수가 일어나기 전에 야훼께서 인간의 죄악을 보시고 인간 창조를 후회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건에서도 하나님
의 진노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에 임하는 모든 불행을 하나님의 진노라고 설명합니다. 주변의 제국에 의한 국가의 위기도 역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이 세상이 결국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으로 끝이 나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고 가르칩니다. 왜 성서 기자들은 이런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헬라의 견유학파나 스토아 학파, 또는 오늘의 이신론자들에게 인간처럼 진노하는 신 표상은 좀 유치하게 보일 지도 모릅니다만 성서의 야훼 하나님은 그렇게 계시되고 있습니다.
성서기자들이 하나님을 진노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대략 두 가지라고 봅니다.
그들의 눈에 이 세상의 불의가 그만큼 심각했다는 것이 하나입니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 그런 게 다 세상을 사는 이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의 악이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예언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그런 구조적인 악한 질서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요? 대통령 선거를 한다면 명분으로 정당이 한 기업에서 무려 300억원 이상을 불법 정치자금으로 수수하고, 그 중에 상당한 액수가 개인에 의해서 유용 되었을지도 모르는 이런 우리의 현실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는 도저히 바뀔 수 없다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정 능력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결국 다른 힘에 의해서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성서기자들은 그 힘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라고 보았습니다.
'모조리 쓸어버린다'(10절)는 표현은 좀 지나쳐 보이긴 하지만 우리의 현실에서 일어날 개연성이 많은 진술입니다. 사실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에서 이렇게 번영하고 산다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 이전 훨씬 오랜 세월 동안 지구를 지배하던 생명체가 많았
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공룡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오늘 성서의 표현처럼 '모조리' 사라졌습니다. 인간이 지구상에서 모조리 사라지는 일은 바람만 한번 불면 가로수 밑의 낙엽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햇빛의 양이 약간만 줄어들
거나 공기의 혼합 비율이 약간만 달라져도 모조리 사라집니다. 그래서 성서기자들은 인간의 생명이 전적으로 야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그 분만을 의지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가 만든 금송아지만을 확실한 것으로 믿고 삽니다.
모세의 반론
본문 11절부터 모세는 하나님께 탄원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무턱대고 용서해달라고 하지 않고 몇 가지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는 이스라엘의 멸망이 곧 야훼 하나님의 명예에 손상이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에집트 제국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능력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들이 광야에서 몰살했다고 한다면 그 백성들이
믿는 야훼 하나님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 모세의 탄원이 그럴 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예가 손상될까 염려해서 자신의 뜻을 거두어들인다고 생각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런 탄원 기도에서 핵심은 야훼 하나님을 향한 모세의 자세입니다. 그가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으로 어리석고 교만하기 때문에 멸망당해 싸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백성들이 생존하는 게 옳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명예가 온 세계에 드러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속으로 고민이 참으로 많았을 것입니다. 온갖 위기를 거치면서 에집트를 탈출하고 가나안 땅을 향해서 가고 있는 마당에 다시 에집트를 그리워하고 금송아지나 만들면서 물질적인 확실성을, 오늘의 말로 자본주의적 확실성만을 추종하고 있는 자기 민족을 포기하는
가, 아니면 계속해서 그들을 이끌고 나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들의 멸망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서 더 이상 어떤 희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노예 공동체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해체되는 것보다는 가나안에 입성하여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해 나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했겠지요.
둘째로는 야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랐던 믿음의 조상들,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야훼 하나님에게 자기 조상들의 믿음을 기억해 달라고 탄원 기도를 드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그것을 기억하려는 것입니다. 모세가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당장 모조리 죽을 짓을 하고 있긴 하지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탄원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모세에게서 배울 수 있는 참된 신앙의 자세입니다. 왜곡된, 또는 절망적인 현재의 상황에만 치우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야훼 하나님의 약속을 거듭해서 기억하는 그의 자세 말입니다. 이런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에 별 볼 일 없는 민족이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야훼 하나님이 계시되시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그 민족을 통해서 오시게 되었습니다.
성서의 신앙은 바로 하나님과의 약속, 즉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에 놓여 있습니다. "너희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땅을 다 너의 후손에게 주어 길이 유산으로 차지하게 하겠다"는 야훼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구체적인 영
토와 주권을 의미하겠지만 우리에게는 참된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은 늘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생명에 집중하는 우리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생명의 약속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생명을 인간이 생산해내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만큼 큰 착각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 16:26). 또한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느냐?"(마 7:27)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을 이해하기 어렵다면 일단 그것을 행복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키도 크고 건강하고 외모도 잘 생기기만 하면 행복할까요? 현대인들은 그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성형수술에 열을 내는 것 같습니다. 상당히 많은 여고생들이 대입시만 끝나면 대학에 들어가기도 전에 쌍커플 수술을 한다고 합니다. 조금 여유가 있는 집의 아이들은 지방 흡입수술도 하겠지요. 그런 외모로 정말 행복할 수만 있다면 누가 그런 일을 마다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으로 행복해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이거나 아니면 현실과 비현실을 착각하는 알콜중독자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이런 범주에서 벗어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사회적 명성을 얻은 것으로 참된 생명을 얻었다거나 진정한 행복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위선이나 착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삶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무엇인가를 많이 소유하고 자기를 확대시키는 일을 통해서는 생명과 행복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 참된 생명이, 또한 그것으로 인한 참된 행복이, 또는 구원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질는지 지금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질 종말론적 생명의 선취사건이라고 믿습니다. 의학이 발달하여 우리가 영생불사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을 예수님의 부활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곧 참된 생명이며 구원 사건입니다.
오늘 모세는 그 야훼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현실만 보면 구역질이 날 정도로 역겹지만, 그래서 당장 하나님의 진노가 내렸으면 좋겠지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신 하나님의 계약을 기억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그런 기억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나를 믿
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때가 되면 우리에게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런 생명의 세계가 새롭게 시작될 그 순간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본문의 모세 시대처럼 금송아지 앞에서 춤추고 먹고 마시며 흥청거리는 오늘의 현실에도 야훼 하나님은 우리와 맺은 약속을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잊지 않는 한 그 분도 잊지 않으십니다. <2004.2.15>
오늘 이야기의 배경은 모세의 십계명 돌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계약을 얻고 그 증거로 돌판에 새겨진 증거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기다리기에는 그 기간이 너무 길었던 것 같습니다. 애굽을 탈출했지
만 애굽에서 살아가던 생활 조건보다 더 열악한 상태에 놓여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자리를 뜬 사이에 금으로 수송아지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이 금 수송아지 형상을 자신들의 신 야훼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에집트에서 데려 내 온 우리의 신이다."(32:4). 그리고 그 앞에서 번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정신 없이 뛰놀았다"(32:6)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동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그 막강한 에집트 군대를 따돌릴 수 있도록 홍해를 가르시고,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길을 인도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신 야훼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그렇게 쉽게 망각하는 그들의 행동 말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에게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구원 행위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할 수 있을 만큼 명시적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서에는 그런 사건들이 명시적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성서 기자들의 영적 감수성에 의해서만 포착된 것이지 일반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한 사건에 불과합니다. 지금도 역시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만 특별히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오늘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은 게 아니라 하나님은 늘 은폐의 방식으로 자기를 계시하는 데 그것을 볼 눈이 있는가 아닌가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대개 이런 영적인 깊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도대체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솔직하긴 하지만 아직 이런 생명의 깊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어린이나 어른들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경험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여곡절 끝에 에집트를 탈출했고 근근히 광야의 유랑생활을 버텨나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시내산으로 들어가서 감감 무소식입니다. 앞으로 자기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는지 아무런 확신이 없습니다. 하나님 야훼가 자기들과 함께 하시는가에 대한 확신도 없습니다. 흡사 부부와 연인과 친구 사이에도 떨어져 있으면 사랑이 식는다는 말과 비슷한 현상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불확실한 상황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으로 수송아지를 만들어 제사를 드리고 정신 없이 뛰놀았다는 것은 그
렇게 해괴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 행동 양식들이 그들에게는 현실성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보이는 금송아지가 그들의 마음을 훨씬 편안하게 만들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정신 없이 뛰놀며, 자녀들을 많이 낳고, 경제성장을 일으키는 일들마저 없으면 그들은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보이는 교회조직과 교회건물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이 모여서 무언가 확실하고 열광적인 행사를 해야만 마음이 편해집니다. 심지어는 연예인을 데려다가 흡사 이벤트를 꾸미듯이 교회 안에서 어떤 행
사를 벌입니다. 물론 이런 행사 자체가 기독교 신앙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 그런 행사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작은 수단으로 도입되는 데 머물지 않고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된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서 제사를 드렸다는 것도 그들이 야훼 하나님을 버리고 노골적으로 우상을 숭배하려는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자신들의 현실적인 불안을 보이지 않은 하나님과 그의 약속에 맡기지 못하고 그런 이벤트를 통해서 해소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문제였습니다.
야훼의 진노
이런 상황 앞에서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장 내려 가 보아라. 네가 에집트에서 데려 내 온 너의 백성들이 고약하게 놀아나고 있다. 저들은 내가 명령한 길에서 저다지도 빨리 벗어나 저희 손으로 보어 만든 수송아지에게 예배하고 제물을 드리며 '이스
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에집트 땅에서 데려 내 온 우리의 신이다'라고 떠드는구나! 나는 이 백성을 잘 안다. 보아라, 얼마나 고집이 센 백성이냐?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진노를 내려 저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리라. 그리고 너에게서 큰 백성을 일으키리라."(32:7-10). 여기서 야훼 하나님은 흡사 사람처럼, 그것도 왕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처럼 실제로 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린아이말고는 없을 것입니다. 아마 모세의 영적 감수성에서 시작해서 이스라엘 예언자의 전승사를 통해서 이런 민담으로 자리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금송아지 제조와 하나님의 진로에 얽힌 이 민담에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리게 되는 역사적 배경이 개입되었다는 게 구약성서학자들의 공통된 입장입니다. 솔로몬 아들 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됩니다. 남유다의 왕은 솔로몬의 아들은 르호보암이었으며, 북이스라엘의 왕은 솔로몬 치하에서 최고위급 장군으로 활동했던 여로보암이었는데, 여로보암의 반역에 의해서 다윗 왕조가 쪼개진 셈입니다. 그 원인은 근본적으로 솔로모의 철권통치에 있었지만 말입니다. 솔로몬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남유다 지역
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의 자기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왕래하다가 그쪽으로 기울어질 것을 염려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대항하는 의미에서 베델과 단에 금송아지 상을 만들어 세웠습니다. 이런 여로보암의 행위는 이스라엘의 역사 대대로 가장 파렴치하고 불신앙적인 것으로 치부되었습니다. 남북을 막론하고 모든 악한 왕들을 빗대어 "여로보암과 같았다"는 관용어가 생길 정도였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보면, 이제 아론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송아지 제조 사건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에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성서 기자들은, 그리고 이런 전승사에 참여한 예언자들은 왜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 앞에서 진노하신다고 생각한 걸까요? 창세기에도 노아 홍수가 일어나기 전에 야훼께서 인간의 죄악을 보시고 인간 창조를 후회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건에서도 하나님
의 진노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에 임하는 모든 불행을 하나님의 진노라고 설명합니다. 주변의 제국에 의한 국가의 위기도 역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이 세상이 결국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으로 끝이 나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고 가르칩니다. 왜 성서 기자들은 이런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헬라의 견유학파나 스토아 학파, 또는 오늘의 이신론자들에게 인간처럼 진노하는 신 표상은 좀 유치하게 보일 지도 모릅니다만 성서의 야훼 하나님은 그렇게 계시되고 있습니다.
성서기자들이 하나님을 진노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대략 두 가지라고 봅니다.
그들의 눈에 이 세상의 불의가 그만큼 심각했다는 것이 하나입니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 그런 게 다 세상을 사는 이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의 악이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예언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그런 구조적인 악한 질서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요? 대통령 선거를 한다면 명분으로 정당이 한 기업에서 무려 300억원 이상을 불법 정치자금으로 수수하고, 그 중에 상당한 액수가 개인에 의해서 유용 되었을지도 모르는 이런 우리의 현실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는 도저히 바뀔 수 없다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정 능력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결국 다른 힘에 의해서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성서기자들은 그 힘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라고 보았습니다.
'모조리 쓸어버린다'(10절)는 표현은 좀 지나쳐 보이긴 하지만 우리의 현실에서 일어날 개연성이 많은 진술입니다. 사실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에서 이렇게 번영하고 산다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 이전 훨씬 오랜 세월 동안 지구를 지배하던 생명체가 많았
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공룡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오늘 성서의 표현처럼 '모조리' 사라졌습니다. 인간이 지구상에서 모조리 사라지는 일은 바람만 한번 불면 가로수 밑의 낙엽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햇빛의 양이 약간만 줄어들
거나 공기의 혼합 비율이 약간만 달라져도 모조리 사라집니다. 그래서 성서기자들은 인간의 생명이 전적으로 야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그 분만을 의지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가 만든 금송아지만을 확실한 것으로 믿고 삽니다.
모세의 반론
본문 11절부터 모세는 하나님께 탄원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무턱대고 용서해달라고 하지 않고 몇 가지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는 이스라엘의 멸망이 곧 야훼 하나님의 명예에 손상이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에집트 제국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능력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들이 광야에서 몰살했다고 한다면 그 백성들이
믿는 야훼 하나님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 모세의 탄원이 그럴 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예가 손상될까 염려해서 자신의 뜻을 거두어들인다고 생각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런 탄원 기도에서 핵심은 야훼 하나님을 향한 모세의 자세입니다. 그가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으로 어리석고 교만하기 때문에 멸망당해 싸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백성들이 생존하는 게 옳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명예가 온 세계에 드러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속으로 고민이 참으로 많았을 것입니다. 온갖 위기를 거치면서 에집트를 탈출하고 가나안 땅을 향해서 가고 있는 마당에 다시 에집트를 그리워하고 금송아지나 만들면서 물질적인 확실성을, 오늘의 말로 자본주의적 확실성만을 추종하고 있는 자기 민족을 포기하는
가, 아니면 계속해서 그들을 이끌고 나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들의 멸망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서 더 이상 어떤 희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노예 공동체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해체되는 것보다는 가나안에 입성하여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해 나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했겠지요.
둘째로는 야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랐던 믿음의 조상들,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야훼 하나님에게 자기 조상들의 믿음을 기억해 달라고 탄원 기도를 드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그것을 기억하려는 것입니다. 모세가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당장 모조리 죽을 짓을 하고 있긴 하지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탄원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모세에게서 배울 수 있는 참된 신앙의 자세입니다. 왜곡된, 또는 절망적인 현재의 상황에만 치우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야훼 하나님의 약속을 거듭해서 기억하는 그의 자세 말입니다. 이런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에 별 볼 일 없는 민족이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야훼 하나님이 계시되시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그 민족을 통해서 오시게 되었습니다.
성서의 신앙은 바로 하나님과의 약속, 즉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에 놓여 있습니다. "너희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땅을 다 너의 후손에게 주어 길이 유산으로 차지하게 하겠다"는 야훼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구체적인 영
토와 주권을 의미하겠지만 우리에게는 참된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은 늘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생명에 집중하는 우리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생명의 약속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생명을 인간이 생산해내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만큼 큰 착각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 16:26). 또한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느냐?"(마 7:27)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을 이해하기 어렵다면 일단 그것을 행복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키도 크고 건강하고 외모도 잘 생기기만 하면 행복할까요? 현대인들은 그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성형수술에 열을 내는 것 같습니다. 상당히 많은 여고생들이 대입시만 끝나면 대학에 들어가기도 전에 쌍커플 수술을 한다고 합니다. 조금 여유가 있는 집의 아이들은 지방 흡입수술도 하겠지요. 그런 외모로 정말 행복할 수만 있다면 누가 그런 일을 마다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으로 행복해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이거나 아니면 현실과 비현실을 착각하는 알콜중독자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이런 범주에서 벗어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사회적 명성을 얻은 것으로 참된 생명을 얻었다거나 진정한 행복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위선이나 착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삶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무엇인가를 많이 소유하고 자기를 확대시키는 일을 통해서는 생명과 행복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 참된 생명이, 또한 그것으로 인한 참된 행복이, 또는 구원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질는지 지금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질 종말론적 생명의 선취사건이라고 믿습니다. 의학이 발달하여 우리가 영생불사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을 예수님의 부활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곧 참된 생명이며 구원 사건입니다.
오늘 모세는 그 야훼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현실만 보면 구역질이 날 정도로 역겹지만, 그래서 당장 하나님의 진노가 내렸으면 좋겠지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신 하나님의 계약을 기억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그런 기억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나를 믿
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때가 되면 우리에게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런 생명의 세계가 새롭게 시작될 그 순간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본문의 모세 시대처럼 금송아지 앞에서 춤추고 먹고 마시며 흥청거리는 오늘의 현실에도 야훼 하나님은 우리와 맺은 약속을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잊지 않는 한 그 분도 잊지 않으십니다. <200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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