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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먹다

요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147 추천 수 0 2009.05.17 12: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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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6:52-59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8469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오해
요한복음 6장은 요한복음이 어떤 점에서 공관복음서, 즉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 다른가에 대한 전형적인 예입니다. 요한복음 6:1-15에 등장하는 소위 ‘오병이어’ 사건을 공관복음서도 거의 비슷한 구조와 무게로 보도하고 있지만 요한복음만 그것의 심층적 의미를 부연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고도 남은 부스러기가 열 두 광주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과연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오늘 설교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에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이런 현상을 경험한 그곳의 군중들은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고 했습니다. 그 군중들의 행동은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도 인간의 먹는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낼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군중들은 그를 당장이라도 대통령으로, 아니 종신 지도자로 삼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 낌새를 알아채시고 예수님은 산으로 피하셨습니다(요 6:15). 아마 예수님은 산에서 혼자 깊은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자신을 오해하는 군중들을 어떻게 바른 인식으로 끌어내는가 하는 문제를 말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기들의 흥미와 욕망에 따라서 예수님을 이해하고, 일종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군중들의 습성은 지금이나 그때나 매한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오늘의 기독교 신앙도 이런 갈등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천착하기보다는 인간의 욕구에 부응하는 것에 치우쳐 있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기복적인 요소는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심지어는 사회 봉사에 관련된 일들도 역시 그 심층에는 인간의 욕망이 꽈리를 틀고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이 땅에서 살기 위해서 빵을 먹고 돈을 써야하기 때문에 신앙이 아무리 절대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부분을 무시할 수 없긴 합니다만, 우리의 경우에 신앙의 본질은 단지 ‘구색 맞추기’ 정도에 머물고 오히려 물질적 욕망이나 자기 성취가 신앙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적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런 방식을 통한다고 하더라도 교회만 부흥하면 모든 게 용납되는 한국 교회의 풍토가 훨씬 큰 문제입니다. 근본적으로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패러다임이 변화될 때까지 이런 추세는 지속될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예수님이 군중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셨듯이 그런 물결로부터 거리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부정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을 확보해내기 위해서 세속주의적 물결을 잠시 피하는 것뿐입니다. 그 이후에 시간이 되면 다시 현장으로 내려와야 할 것입니다.

생명의 살
이 일이 벌어진 다음날 예수님은 다시 군중들을 만났습니다(22절). 요한은 22절부터 예수님과 군중들과의 담론을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주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군중들의 반론이 제기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논지는 이렇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다시 찾아온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관심이기보다는 배불리 먹은 빵 때문이오. 그러나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썩어 없어질 이런 빵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는 하늘의 빵을 얻으려고 애쓰시오. 그러자 군중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 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십시오.”(34절). 예수님의 말씀이 계속됩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 군중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못마땅했습니다. 웅성거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터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 왔다니 말이 되는가?”(42). 그들이 그렇게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단지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에서만 확인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아니면 좀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예언자로 알았겠지요.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니, 아무리 좋게 생각하고 싶어도 말이 안 되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더 심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51).
이 말씀이 있자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첫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유대인들은 서로 이렇게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
”(52).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왜 이렇게 생각했을까요? 고대 어떤 밀의종교 집단은 직접 사람의 살을 나누어 먹었을지 모릅니다. 아프리카 어느 원시 종족들도 죽은 조상의 살을 먹음으로써 조상들의 혼을 물려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이런 일은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행위였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 곧 자기 살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들이 몰랐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떻게 살을 먹는다는 것인가에 대한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대답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53절 이하의 말씀을 읽으면 그것이 곧 성만찬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54). 아마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성만찬 전승이 결합되어 오늘의 본문이 형성된 것 같습니다. 비록 시기적으로 다른 사건과 전승들이 결합되기는 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실체적 진실은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시행되던 성만찬 요소가 예수님의 이런 말씀에 담겨 있으며, 또한 성만찬 의식 속에 생명의 양식이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진리는 시간의 차이를 뛰어넘어 소통됨으로써 생명의 세계를 열어 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생명의 지평에 대한 인식
이제 우리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생명의 관계를 아직 인식하지 못했기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의아하게 생각했으며, 결국 십자가에 처형당하도록 몰아세웠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이런저런 말로 트집을 잡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하나님이 자신들의 생명을 보장해준다는 가장 확실한 역사적 증거는 광야의 만나 사건이었습니다. 아무런 호구지책에 대한 대비 없이 애굽을 탈출한 이들 유대인들에게 당장 생명을 이어갈 먹거리 문제는 절박했습니다. 그때 야훼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허락하셨고, 적당하게 마실 물도 허락하셨습니다. 특히 만나는 야훼 하나님을 신뢰할만한 가장 대표적인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5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 간 그런 빵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인식할 수 없었던 한계는 바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그런 삶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살은 양이나 소처럼 우리의 실제적인 먹거리에 불과합니다. 이런 먹거리는 아무리 맛있게 먹어도 결국 우리는 죽습니다. 영원한 생명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늘 생명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역시 2천년 전 예수님과 논쟁하고 있던 유대인 군중들보다 별로 낫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대의 흐름이 전반적으로 그렇습니다. 낮은 단계의 생명만을 절대화하는 이런 추세는 옛날에 비해서 오늘이 훨씬 강한 것 같습니다. 생존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먹고살기 위해 모든 힘을 돈 버는 일에 쏟는 것은 그런 대로 이해가 갑니다만 그런 생존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돈 버는 일에만 눈에 불을 키는 것은 참으로 보기에 민망합니다. 노무현 정권 1년을 평가하는 설문조사와 시사토론이 최근에 자주 벌어졌는데, 대개는 경제문제에 대한 아쉬움이 제일 많았습니다. 우리가 잘먹고 잘사는 것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대학도 역시 대학의 발전, 그것도 거의 외형적 발전만을 절대적인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시대정신은 우리만이 아니라 이 세계 전체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흐름을 바꾸기가 간단치 않기는 합니다만 우리의 경우에는 그 강도가 너무 심하다는 점에서 반성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이런 수준에서만 생각하고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영원한 생명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기껏해야 약간 건강하게 살거나 약간 좋은 식사를 하거나 약간 세련된 방식으로 살아갈 수는 있을 겁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보다 나은 빵을 확보하기 위해서 ‘만인을 향한 만인의 투쟁’에 휩싸일지도 모릅니다. 흡사 그렇게 잘 사는 미국이 석유 확보를 위해 이라크를 침략하듯이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런 국력과 군사력만 있다면 오래 전 우리 조상 고구려의 땅이었다고 생각하는 만주를 강제로 빼앗으려고 욕심을 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런 방식으로라도 질 좋은 빵을 확보하는 것을 생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생명 안에서
예수님은 그런 오해 때문에 자기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군중들을 피해서 산으로 오르셨다가 다시 내려오셔서 영원한 생명의 비밀에 대해서 그들과 담론을 나누고 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라고 말입니다(54).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옳습니까? 옳다면 무슨 근거에서 옳습니까? 기독교의 토대는 바로 이 한 가지의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명제의 타당성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기독교 공동체는 이 사실을 증명하는 데 모든 힘을 경주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증명하기에 앞서서 자신이 명증하게 인식하고 신뢰하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일단 성서가 말하는 생명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우선 56절과 57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오늘 설교 제목처럼 예수님을 먹어야 우리가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밥과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생명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표현이 경박하기는 합니다
만 그것은 곧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얻으려면 생명과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경험이 예수님에게 먼저 있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게 무엇인지 경험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인류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과 하나 되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며 따라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힘으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만으로 영원한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초월적인 하나님은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지평의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 그리고 그 육체 안에서 불안과 모순과 한계를 안고 사는 인간이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과 직접 만날 수는 없습니다. 성서는 그래서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하나 되신 예수님의 힘으로 이제 우리도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증거
지금 당신의 설명에 무슨 근거가 있는가, 하고 질문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는 증거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비슷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구원을 선포한 사이비 예언자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박태선이나 문선명 씨 같은 이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 이외에도 자신을 구원자로 내세우는 교주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일방적인 자기 해명만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궁극적인 문제는 증명의 차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단계에서는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바르게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길일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에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증거를 대라고 요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만 예수님은 그들이 인정할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단 한 번뿐이었던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결정적인 증거는 종말에 가서야 완전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런 논리도 없이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 전체와 기독교의 역사에서 계시의 사건들, 그리고 우주론적 역사 전체가 밝혀주고 있는 진리
사건들을 열린 마음으로 전망할 수 있다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자연과학의 세계도 그렇습니다만 그 어떤 증거라는 것도 절대적인 것이 못되기 때문에 증거 만능주의는 또 하나의 독단에 빠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창조과학회에 속하는 사람들이 구약성서의 모든 현상을 과학적 증거로 증명하려는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일도 벌어질 테니까 말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전반적인 신뢰가 우리에게 있는가에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무엇이 예수님의 말씀인가에 대해서는 늘 예민하게 역사 비평적으로 분석해야 합니다.

일상에 긷든 생명의 능력
오늘의 본문 말씀 앞에서 선 우리가 천착해야 할 질문은 과연 내가 예수님 안에서 살고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상투적인 질문인 것처럼 생각되시죠? 약간 다르게 질문해 봅시다. 나는 과연 생명 안에서 살고 생명이 내 안에서 살고 있나요? 실제로 우리의 일상에 생명의 능력이 샘솟듯이 솟아나고 있나요? 우리의 질문을 좀더 발전시켜 봅시다.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생명의 능력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 즉 성령이기 때문에 아무도 한 두 마디로 규정해버릴 수 없습니다. 그 생명의 능력은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활동함으로써 우리의 일상을 평화와 기쁨과 희망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비누방울처럼 순간적으로 허무
하게 이 세상을 살다가 사라지지만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한다는 약속을 기억나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과정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먹고 배불러야 할 생명 자체이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에서 예수를 먹는 일, 즉 예수님과 하나 되는 일보다 더 긴급하고 소중한 일은 없습니다.      <2004.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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