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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레2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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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470 |
유대인의 율법이 매우 복잡하지만 관점에 따라서 몇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순전히 종교적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윤리적인 것입니다. 예컨대 제사장의 옷을 비롯한 성전에 관한 제반 규정은 순전히 종교적인 요소이지만, 가난한 사람이 저당 잡힌 옷을 해가 지가 전에 돌려주라는 명령은 윤리적 요소입니다. 이 두 요소가 경우에 따라서 독립적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중복되기도 합니다. 율법이 이렇게 종교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윤리적인 차원까지 아우르고 있다는 사실은 유대교가 야훼 신앙을 그만큼 철저하게 (사회)윤리적인 구도 안에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율법을 다른 관점에서 이렇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여러 율법 항목 중에는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나, 오늘 우리의 기준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 또는 수용해야할 것들이 있습니다. 제사장의 옷에 관한 규정은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으며,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는 명령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이런 요소들은 대개 유대인이 처한 구체적인 삶의 정황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그런 율법 조항들을 무시해도 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 먹을 게 없어서 옷을 저당 잡혔을 때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든지,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명령같이 사회적 약자에 관한 배려는 오늘 우리의 신앙적 삶에도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특히 종교적이면서 윤리적인 요소를 함축하고 있는 어떤 율법은 그들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서도 아주 탁월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의 대표적인 율법이 ‘안식일’입니다. 그것은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레 날에는 쉬라는 야훼의 명령입니다. 유대인들의 이 안식일 전승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사건과 출애굽 사건에 맞닿아 있을 정도로 오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정수를 보여주는 핵심적 율법 조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안식일 전승은 안식년과 희년 개념으로 발전했습니다. 안식년은 육 년 동안 농사를 짓고 칠 년째는 그 땅을 쉬게 하는 제도이고, 희년은 사회질서를 50년마다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제도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주로 안식년에 관한 내용입니다.
땅을 묵혀라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직 가나안 땅에 발을 딛기 전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것입니다. 아직 땅이 없지만 땅을 갖게 되었을 때 견지해야 할 태도에 대한 지침입니다. 4, 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칠 년째 되는 해는 야훼의 안식년이므로 그 땅을 아주 묵혀 밭에 씨를 뿌리지 말고, 포도순을 치지도 말라. 너희가 거둘 때 떨어진 데서 절로 자란 것을 거두지 말고, 순을 치지 않고 내버려 둔 덩굴에 저로 열린 포도송이를 따지 말며 땅을 완전히 묵혀야 한다.”
이미 3천5백 년 전 유대인들이 칠 년마다 땅을 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오늘의 생태학자들에게도 놀라운 일일 것입니다. 안식년 개념은 그런 정도로 매우 생태학적이고 유기적인 세계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땅이 배고프다거나 피곤하다는 말을 하지는 않지만 땅도 무한정 먹거리를 생산해낼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6년 농사를 지었으면 그 다음 한 해 동안 놀리는 게 땅의 힘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씨도 뿌리지 말고, 절로 자란 것을 거두지 말라고 합니다. 아예 손도 대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 조상들도 이런 지혜가 구체적으로 실행되었는지 제가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런 농사의 개념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열 마지기의 땅이 있다면 7등분이나 10등분으로 나누어 돌아가면서 한 부분을 묵히는 제도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농사를 지어야 지력이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산성 일변도로 돌아가고 있는 오늘의 농사법은 이렇게 ‘땅을 묵히는’ 방식을 포기한 지 오래 됩니다. 최대한 땅을 이용해서 얼마나 많은 소출을 올릴 수 있는가, 하는 기준이 농사의 성패를 갈라놓습니다. 이미 여러 환경 단체나 유기농 종사자들이 문제를 제기한 바 있습니다만 비료와 살충제를 과도하게 사용하면서까지 생산성을 높이려는 게 오늘의 농사 현실입니다. 아마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기술을 통해서 2,30% 이상의 소출을 올릴 수는 있겠지만 그게 무한정 지속될 수 있겠습니까? 지력을 돋우기 위해서 기름진 흙을 실어 나르기도 하지만 그런 노력도 한계가 있습니다. 아예 일정 부분을 번갈아 가면서 묵히는 옛 방식을 받아들이는 게 훨씬 지혜로운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농사에 관해서는 제가 아는 게 별로 많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이 정도로 접어두려고 합니다. 그것보다는 유대인들이 이렇게 땅을 묵히는 안식년 제도를 삶의 내용으로 받아들이고 발전시킨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안식년 개념도 결국은 육일 동안 일하고 칠 일째 쉬라는 안식일 개념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땅도 쉬어야 하는데, 하물며 인간이야 두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노동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으로부터의 ‘쉼’이 성서가 안식일과 안식년 제도를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인식시키려고 한 핵심입니다.
노동의 의미
창세기에 따르면 노동은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징벌의 의미가 있습니다. 선악과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 하나님이 이브에게는 아기를 낳는 산고가, 아담에게는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는 노동의 고통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전통에서는 여성의 산고와 남성의 노동을 당연한 죄의 결과로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두 가지 요소가 인간에게 없다면 인간은 멸종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창세기 기자가 이 문제를 명시적으로 죄와 연결시켜서 설명하고 있긴 하지만 에덴동산을 상실한 인간에게는 오히려 이것이 구원의 통로입니다. 제가 이 부분에 대해서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에덴동산이 아니라 현실에서 살아가야 할 인간에게는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절대적인 행위는 없습니다. 이 두 문제를 구원론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해석해낼 수 있다면 인간의 행복은 그만큼 가까워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로테 죌레라는 독일의 여성신학자는 ‘사랑과 노동’이라는 책에서 사랑과 노동을 인간 구원의 핵심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사랑과 노동을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말입니다. 죌레는 현대의 사랑이 일종의 상품으로 변질되었고, 노동도 역시 금전적인 차원에서만 논의된다는 점에서 현대인은 구원과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옳습니다. 우리 모두 경험하듯이 사랑의 결과도 허무하고 노동의 결과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혼율이 3,40%가 된다는 믿기 힘든 보고서가 있습니다. 노동 문제는 이 세계 모든 나라에게 가장 골치 아픈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과 인간의 노동을 창조적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랑과 노동이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본래의 의미를 회복해야만 합니다. 비록 성서는 아기를 낳는 산고와 땅을 파며 땀을 흘리는 노동을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에덴동산이 아닌 현실의 삶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며 구원이라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노동이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성서의 전통 때문인지, 또는 노동 자체에 대한 인간의 나쁜 경험 때문이지 노동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별로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가능한 대로 땀을 흘리는 육체노동보다는 머리를 쓰는 일을 선호합니다. 실제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보다는 서비스업이나 관리직에 있는 사람들이 돈을 더 받기도 합니다. 요즘 청년 실업 때문에 걱정들이 많습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육체노동을 하는 현장에는 사람 구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결국 오늘의 노동의 의미는 완전히 훼손되었습니다. 가능한대로 땀 흘리지 않고 편하게 사는 것만을 목표로 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노동으로부터 소외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 노동에서 창조성을 경험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칼 마르크스의 중심 사상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의 여망이기도 하고, 안식일 개념과 연관해서 기독교의 중요한 구원론에 속합니다.
성서 시대에도 육체노동을 업신여기는 현상은 일반적이었을 것입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나 전쟁 후에 노예로 잡혀 온 사람들은 인생을 힘든 노동에 바쳐야만 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안식일에는 그 집의 손님이나 일군과 노예들까지 모두 노동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이런 강제 규정을 통해서라도 노예들을 쉬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노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였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생산성을 높이는 데 혹사되는 것으로는 어느 누구도 인간다움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최소한의 쉼이 있어야만 인간은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땅도 쉬고, 공장도 쉬고, 사람도 쉬어야 합니다.
쉼
요즘 도시 생활은 밤과 낮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끊임없이 돌아갑니다. 인간이 전기를 발견한 이후에 밤은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밤을 낮처럼 사용함으로써 생산성을 제고시켰습니다.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비함으로써 인생을 즐겁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이 어쩔 수 없이 이런 메커니즘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런 구조 속에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게 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현대사회라는 고속열차에 몸을 싣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이미 오래 전에 현대화의 길을 걸었던 유럽보다 우리가 훨씬 심각한 것 같습니다. 미국은 잘 모르겠지만 유럽, 그 중에서도 독일의 밤은 매우 조용합니다. 특별한 경우만 제외한다면 모든 일은 낮에 처리하고 해가 지면 모두 집으로 일찍 돌아가서 쉽니다. 청소년들도 밤에 돌아다니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물론 슈퍼마켓도 일찍 문을 닫습니다. 해만 지면 도시가 썰렁할 정도로 사람들이 외출을 꺼리고 있습니다. 아마 그런 데서 살던 사람이 한국의 대도시에 와 보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서울 같은 곳에는 새벽까지 청소년들이 길거리에 득실거립니다. 고 3학생들이 밤 11시까지 학교에서 공부하고 그 다음에 학원에 간다는 사실은 해외 토픽감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쉼이 별로 없다는 것은 사회현상일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도 흡사 수능시험을 앞둔 학생들이 밤새워 공부하듯이 그렇게 치열하게 진행됩니다. 어느 정도 인정받을 정도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직장이나 학교 등 자기의 직업에 쓰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교회에 쏟아 부어야만 합니다.
자기 시간을 쓸데없는 일에 소비하는 것보다는 교회에서 보내는 게 훨씬 좋은 게 아니냐, 하고 말할 수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앙생활에 쉼이 없다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한 게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곧 참된 ‘쉼’을 얻자는 것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핵심은 하나님 앞에서만 인간에게 참된 쉼이 보장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정신적인 쉼을 발견했고, 이를 통해서 참된 평화를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여기서 무엇을 쉼이라고 생각합니까? 무조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인가요? 그럴 수도 있긴 합니다만 근본적으로는 어떤 의무감, 또는 성취감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합니다. 대개 우리는 자기가 계획한 것을 성취하는 것이 곧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힘을 쏟다가 결국 불안과 불만에 빠집니다.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이 곧 쉼입니다. 이런 점에서 참된 쉼은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는 힘의 근거인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쉼을 통해서 생명을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땅을 묵히라는 야훼의 명령을 그대로 따른다면 당연히 먹거리의 7분의 1이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렇게 땅을 묵히는 이유는 “너희 뿐 아니라 너희 집에 머무는 너희 남종과 여종과 품꾼과 식객까지 모두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너희 가축과 너의 땅에 사는 짐승도 땅에서 나는 온갖 소출을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6,7절). 참으로 이상한 셈법입니다. 생산량이 줄어들면 여러 사람이 살기 힘들 텐데, 성서는 오히려 그래야만 모든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 모든 사람들 속에는 남종과 여종, 가난한 사람들, 장애인들, 더 나아가서 짐승들까지 포함됩니다. 이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더불어서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바로 땅의 쉼에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안식년의 가르침을 오늘 우리가 기계적으로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7년 단위로 하든지, 10년 단위로 하든지, 또는 전혀 색다른 방식으로 하든지, 그것은 오늘 이 시대에 맞는 방식을 찾으면 됩니다. 다만 우리 삶의 토대를 단지 생산성 향상에만 맞추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참된 쉼의 근거인 하나님 안에서 우리 삶의 구조를 새롭게, 끊임없이 갱신해 나가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더불어서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쉼을 얻는 것 이외에 우리가 생명을 얻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현대적 삶의 구조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쉼의 의미를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자기들도 모르게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것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세속주의라고 표현해도 좋습니다. 노련하게 재테크를 발휘해서 돈을 축적하고, 온갖 취미생활을 하고, 여가를 즐기는 것으로 이미 구원받은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구원받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큰 착각입니다. 반대로 종교 열광주의도 해결책은 아닙니다. 세속주의를 피한다면서 또 하나의 종교적 피안의 세계로 도피하는 방식으로는 참된 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속주의가 세속의 방식으로 자기를 소진시킨다면, 열광주의는 종교적인 방식으로 자기를 소진시킬 뿐입니다.
참된 쉼을 통해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제가 여러분에게 맞춤형 해결책을 제공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다만 현재 여러분의 영혼이 참된 쉼을 맛보고 있는지 아닌지 성찰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존재의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의 내면에 가득하다면, 또는 조금씩 심화 확대된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그 길을 계속 가십시오. 혹은 거꾸로 그런 세계가 허물어져 있다면 예수님이 약속하신 참된 ‘쉼’을 얻을 수 있도록 자기 목표 지향성을 포기하고 성령에게 자신을 맡겨보십시오.
<2004.2.29>
이 율법을 다른 관점에서 이렇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여러 율법 항목 중에는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나, 오늘 우리의 기준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 또는 수용해야할 것들이 있습니다. 제사장의 옷에 관한 규정은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으며,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는 명령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이런 요소들은 대개 유대인이 처한 구체적인 삶의 정황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그런 율법 조항들을 무시해도 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 먹을 게 없어서 옷을 저당 잡혔을 때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든지,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명령같이 사회적 약자에 관한 배려는 오늘 우리의 신앙적 삶에도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특히 종교적이면서 윤리적인 요소를 함축하고 있는 어떤 율법은 그들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서도 아주 탁월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의 대표적인 율법이 ‘안식일’입니다. 그것은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레 날에는 쉬라는 야훼의 명령입니다. 유대인들의 이 안식일 전승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사건과 출애굽 사건에 맞닿아 있을 정도로 오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정수를 보여주는 핵심적 율법 조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안식일 전승은 안식년과 희년 개념으로 발전했습니다. 안식년은 육 년 동안 농사를 짓고 칠 년째는 그 땅을 쉬게 하는 제도이고, 희년은 사회질서를 50년마다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제도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주로 안식년에 관한 내용입니다.
땅을 묵혀라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직 가나안 땅에 발을 딛기 전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것입니다. 아직 땅이 없지만 땅을 갖게 되었을 때 견지해야 할 태도에 대한 지침입니다. 4, 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칠 년째 되는 해는 야훼의 안식년이므로 그 땅을 아주 묵혀 밭에 씨를 뿌리지 말고, 포도순을 치지도 말라. 너희가 거둘 때 떨어진 데서 절로 자란 것을 거두지 말고, 순을 치지 않고 내버려 둔 덩굴에 저로 열린 포도송이를 따지 말며 땅을 완전히 묵혀야 한다.”
이미 3천5백 년 전 유대인들이 칠 년마다 땅을 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오늘의 생태학자들에게도 놀라운 일일 것입니다. 안식년 개념은 그런 정도로 매우 생태학적이고 유기적인 세계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땅이 배고프다거나 피곤하다는 말을 하지는 않지만 땅도 무한정 먹거리를 생산해낼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6년 농사를 지었으면 그 다음 한 해 동안 놀리는 게 땅의 힘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씨도 뿌리지 말고, 절로 자란 것을 거두지 말라고 합니다. 아예 손도 대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 조상들도 이런 지혜가 구체적으로 실행되었는지 제가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런 농사의 개념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열 마지기의 땅이 있다면 7등분이나 10등분으로 나누어 돌아가면서 한 부분을 묵히는 제도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농사를 지어야 지력이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산성 일변도로 돌아가고 있는 오늘의 농사법은 이렇게 ‘땅을 묵히는’ 방식을 포기한 지 오래 됩니다. 최대한 땅을 이용해서 얼마나 많은 소출을 올릴 수 있는가, 하는 기준이 농사의 성패를 갈라놓습니다. 이미 여러 환경 단체나 유기농 종사자들이 문제를 제기한 바 있습니다만 비료와 살충제를 과도하게 사용하면서까지 생산성을 높이려는 게 오늘의 농사 현실입니다. 아마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기술을 통해서 2,30% 이상의 소출을 올릴 수는 있겠지만 그게 무한정 지속될 수 있겠습니까? 지력을 돋우기 위해서 기름진 흙을 실어 나르기도 하지만 그런 노력도 한계가 있습니다. 아예 일정 부분을 번갈아 가면서 묵히는 옛 방식을 받아들이는 게 훨씬 지혜로운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농사에 관해서는 제가 아는 게 별로 많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이 정도로 접어두려고 합니다. 그것보다는 유대인들이 이렇게 땅을 묵히는 안식년 제도를 삶의 내용으로 받아들이고 발전시킨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안식년 개념도 결국은 육일 동안 일하고 칠 일째 쉬라는 안식일 개념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땅도 쉬어야 하는데, 하물며 인간이야 두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노동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으로부터의 ‘쉼’이 성서가 안식일과 안식년 제도를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인식시키려고 한 핵심입니다.
노동의 의미
창세기에 따르면 노동은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징벌의 의미가 있습니다. 선악과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 하나님이 이브에게는 아기를 낳는 산고가, 아담에게는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는 노동의 고통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전통에서는 여성의 산고와 남성의 노동을 당연한 죄의 결과로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두 가지 요소가 인간에게 없다면 인간은 멸종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창세기 기자가 이 문제를 명시적으로 죄와 연결시켜서 설명하고 있긴 하지만 에덴동산을 상실한 인간에게는 오히려 이것이 구원의 통로입니다. 제가 이 부분에 대해서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에덴동산이 아니라 현실에서 살아가야 할 인간에게는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절대적인 행위는 없습니다. 이 두 문제를 구원론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해석해낼 수 있다면 인간의 행복은 그만큼 가까워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로테 죌레라는 독일의 여성신학자는 ‘사랑과 노동’이라는 책에서 사랑과 노동을 인간 구원의 핵심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사랑과 노동을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말입니다. 죌레는 현대의 사랑이 일종의 상품으로 변질되었고, 노동도 역시 금전적인 차원에서만 논의된다는 점에서 현대인은 구원과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옳습니다. 우리 모두 경험하듯이 사랑의 결과도 허무하고 노동의 결과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혼율이 3,40%가 된다는 믿기 힘든 보고서가 있습니다. 노동 문제는 이 세계 모든 나라에게 가장 골치 아픈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과 인간의 노동을 창조적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랑과 노동이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본래의 의미를 회복해야만 합니다. 비록 성서는 아기를 낳는 산고와 땅을 파며 땀을 흘리는 노동을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에덴동산이 아닌 현실의 삶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며 구원이라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노동이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성서의 전통 때문인지, 또는 노동 자체에 대한 인간의 나쁜 경험 때문이지 노동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별로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가능한 대로 땀을 흘리는 육체노동보다는 머리를 쓰는 일을 선호합니다. 실제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보다는 서비스업이나 관리직에 있는 사람들이 돈을 더 받기도 합니다. 요즘 청년 실업 때문에 걱정들이 많습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육체노동을 하는 현장에는 사람 구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결국 오늘의 노동의 의미는 완전히 훼손되었습니다. 가능한대로 땀 흘리지 않고 편하게 사는 것만을 목표로 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노동으로부터 소외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 노동에서 창조성을 경험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칼 마르크스의 중심 사상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의 여망이기도 하고, 안식일 개념과 연관해서 기독교의 중요한 구원론에 속합니다.
성서 시대에도 육체노동을 업신여기는 현상은 일반적이었을 것입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나 전쟁 후에 노예로 잡혀 온 사람들은 인생을 힘든 노동에 바쳐야만 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안식일에는 그 집의 손님이나 일군과 노예들까지 모두 노동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이런 강제 규정을 통해서라도 노예들을 쉬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노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였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생산성을 높이는 데 혹사되는 것으로는 어느 누구도 인간다움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최소한의 쉼이 있어야만 인간은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땅도 쉬고, 공장도 쉬고, 사람도 쉬어야 합니다.
쉼
요즘 도시 생활은 밤과 낮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끊임없이 돌아갑니다. 인간이 전기를 발견한 이후에 밤은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밤을 낮처럼 사용함으로써 생산성을 제고시켰습니다.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비함으로써 인생을 즐겁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이 어쩔 수 없이 이런 메커니즘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런 구조 속에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게 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현대사회라는 고속열차에 몸을 싣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이미 오래 전에 현대화의 길을 걸었던 유럽보다 우리가 훨씬 심각한 것 같습니다. 미국은 잘 모르겠지만 유럽, 그 중에서도 독일의 밤은 매우 조용합니다. 특별한 경우만 제외한다면 모든 일은 낮에 처리하고 해가 지면 모두 집으로 일찍 돌아가서 쉽니다. 청소년들도 밤에 돌아다니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물론 슈퍼마켓도 일찍 문을 닫습니다. 해만 지면 도시가 썰렁할 정도로 사람들이 외출을 꺼리고 있습니다. 아마 그런 데서 살던 사람이 한국의 대도시에 와 보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서울 같은 곳에는 새벽까지 청소년들이 길거리에 득실거립니다. 고 3학생들이 밤 11시까지 학교에서 공부하고 그 다음에 학원에 간다는 사실은 해외 토픽감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쉼이 별로 없다는 것은 사회현상일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도 흡사 수능시험을 앞둔 학생들이 밤새워 공부하듯이 그렇게 치열하게 진행됩니다. 어느 정도 인정받을 정도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직장이나 학교 등 자기의 직업에 쓰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교회에 쏟아 부어야만 합니다.
자기 시간을 쓸데없는 일에 소비하는 것보다는 교회에서 보내는 게 훨씬 좋은 게 아니냐, 하고 말할 수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앙생활에 쉼이 없다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한 게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곧 참된 ‘쉼’을 얻자는 것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핵심은 하나님 앞에서만 인간에게 참된 쉼이 보장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정신적인 쉼을 발견했고, 이를 통해서 참된 평화를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여기서 무엇을 쉼이라고 생각합니까? 무조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인가요? 그럴 수도 있긴 합니다만 근본적으로는 어떤 의무감, 또는 성취감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합니다. 대개 우리는 자기가 계획한 것을 성취하는 것이 곧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힘을 쏟다가 결국 불안과 불만에 빠집니다.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이 곧 쉼입니다. 이런 점에서 참된 쉼은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는 힘의 근거인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쉼을 통해서 생명을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땅을 묵히라는 야훼의 명령을 그대로 따른다면 당연히 먹거리의 7분의 1이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렇게 땅을 묵히는 이유는 “너희 뿐 아니라 너희 집에 머무는 너희 남종과 여종과 품꾼과 식객까지 모두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너희 가축과 너의 땅에 사는 짐승도 땅에서 나는 온갖 소출을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6,7절). 참으로 이상한 셈법입니다. 생산량이 줄어들면 여러 사람이 살기 힘들 텐데, 성서는 오히려 그래야만 모든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 모든 사람들 속에는 남종과 여종, 가난한 사람들, 장애인들, 더 나아가서 짐승들까지 포함됩니다. 이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더불어서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바로 땅의 쉼에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안식년의 가르침을 오늘 우리가 기계적으로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7년 단위로 하든지, 10년 단위로 하든지, 또는 전혀 색다른 방식으로 하든지, 그것은 오늘 이 시대에 맞는 방식을 찾으면 됩니다. 다만 우리 삶의 토대를 단지 생산성 향상에만 맞추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참된 쉼의 근거인 하나님 안에서 우리 삶의 구조를 새롭게, 끊임없이 갱신해 나가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더불어서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쉼을 얻는 것 이외에 우리가 생명을 얻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현대적 삶의 구조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쉼의 의미를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자기들도 모르게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것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세속주의라고 표현해도 좋습니다. 노련하게 재테크를 발휘해서 돈을 축적하고, 온갖 취미생활을 하고, 여가를 즐기는 것으로 이미 구원받은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구원받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큰 착각입니다. 반대로 종교 열광주의도 해결책은 아닙니다. 세속주의를 피한다면서 또 하나의 종교적 피안의 세계로 도피하는 방식으로는 참된 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속주의가 세속의 방식으로 자기를 소진시킨다면, 열광주의는 종교적인 방식으로 자기를 소진시킬 뿐입니다.
참된 쉼을 통해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제가 여러분에게 맞춤형 해결책을 제공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다만 현재 여러분의 영혼이 참된 쉼을 맛보고 있는지 아닌지 성찰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존재의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의 내면에 가득하다면, 또는 조금씩 심화 확대된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그 길을 계속 가십시오. 혹은 거꾸로 그런 세계가 허물어져 있다면 예수님이 약속하신 참된 ‘쉼’을 얻을 수 있도록 자기 목표 지향성을 포기하고 성령에게 자신을 맡겨보십시오.
<2004.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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