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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13:4-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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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471 |
정용섭 목사
키프러스
유럽 역사에서 지중해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리스와 로마가 이 지중해를 무대로 하는 제국이었으며,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개척했던 대표적인 나라 스페인과 포르투갈도 이 지중해 서쪽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이집트 역시 이 지중해를 머리에 인 형국으로 움직인 나라입니다. 2천년 이상 유럽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나라는 영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중해를 접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역사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약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집트와 바벨론, 또는 페르시아 사이에 끼어서 늘 옹색한 형편을 벗어나지 못했던 이스라엘이 지중해 동쪽 끝에 자리잡고 있다는 지정학적 상황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주로 지중해 연안 국가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는 선교사적 차원에서도 역시 지중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에서 10시 방향으로 소아시아(지금의 터키)가 있는데, 이 소아시아의 남쪽 해상,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서쪽 해상에 키프러스라는 섬이 있습니다. 키프러스는 북동과 남서 방향으로 비스듬하게 놓여 있는 타원형의 섬으로서 긴 쪽의 길이는 210km라고 하니까 대략 경상북도 정도의 크기는 되지 않을까요. 키프러스는 고대 때부터 광물생산으로 유명하고 섬을 가로지르는 강을 중심으로 비교적 비옥한 땅이 있어서 곡물생산으로 썩 괜찮은 형편이었기 때문에 로마의 총독이 임명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키프러스 섬은 지금 바울과 함께 선교 여행에 나선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합니다(행 4:36). 기독교의 역사를 유럽의 중심에 이식시킨 바울의 선교여행이,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세 번에 걸친 선교여행인데, 바로 이 키프러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키프러스의 북동쪽 끝에 있는 살라미스에 도착한 다음, 여러 회당에 들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차츰 남서쪽으로 내려왔습니다. 키프러스 남서쪽 끝자락 바포에 도착하기까지 대략 열흘은 걸렸을 것 같습니다. 키프러스의 총독이 바포에 거주하는 걸 보면 아마 이 바포가 키프러스에서 제일 큰 도시였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비교적 로마와 가깝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곳에 올 때까지는 별로 큰 문제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고향인 바나바 덕분으로 큰 어려움 없이 여행할 수 있었을 테지요. 그런데 바포에서 한 유대인 마술사를 만남으로써 문제가 일어납니다.
본문에 보면 이 사람의 이름은 ‘바르예수’라고 했습니다(6절). 바르예수는 아람어로 부를 때의 이름이고, 그리스어로는 ‘엘리마’라고도 불렸습니다(8절).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이 마술사를 거짓 예언자이며, 또한 키프러스 총독 세루기오 바울로의 시종이라고 설명합니다. 유대인 마술사, 거짓 예언자, 그리고 총독의 시종. 본문에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이 세 가지 정보만으로 우리가 바르예수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해낼 수는 없습니다. 그의 학문적 배경, 그의 철학, 그의 가문, 그의 구체적인 역할이 무엇인지 확증적으로 분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가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이 간단한 세 가지 정보에도 충분히 담겼습니다.
‘유대인 마술사’라는 이 표현에서 우리는 일단 이 사람이 로마 사람 총독과 대칭적 구도에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훨씬 깊고 가깝게 인식하고 있어야 할 사람인데도 그는 결국 로마 사람보다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는 마술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믿어야만 했던 유대인들에게 마술은 가장 꺼림칙한 행위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바르예수라는 사람은 무슨 연유에서 마술사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야 점성술이나 마술 같은 행위들이 일반적이긴 했습니다만 야훼 하나님을 믿던 유대인들에게는 용납될 수 없었던 일입니다.
마술적 신앙
어떤 점에서 마술과 신앙은 종이 한 장의 차이밖에 없을 정도로 관점이 비슷합니다.
양측이 모두 현실 너머에 있는 어떤 새로운 현실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마술사의 긴 모자 속에서 비둘기도 나오고, 토끼도 나옵니다. 마음만 먹으면 마술사들은 입에서 끊임없이 돈을 꺼낼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단지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새로운 현실이라 할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 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종이 한 장의 차이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마술은 마술사의 속이는 기술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신앙은 그런 사람의 기술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에게 자신을 맡기는 결단입니다. 이런 점에서 마술은 우리에게 매우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신앙은 자칫 건조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마술은 상장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을 칼로 잘라도 죽지 않은 채 살아나게 만들기 때문에 흥미진진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이름으로는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는 모두 죽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런 죽음 너머에, 또는 그런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마술을 통해서 수 백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도 결국에는 완전히 죽어야 하지만, 신앙으로 사는 사람은 참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술을 신앙인 것처럼, 거꾸로 기독교 신앙을 마술로 혼동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보다는 마술이 우리를 화끈하게 사로잡을만한 매력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입니다. 흡사 마술사의 모자 속에서 무엇이 새로 나올 것인가 숨을 죽이고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기독교인들이 그런 수준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기도를 많이 드리면 사업이 잘되고, 자식들이 출세하고, 죽을병이 나을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마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교회의 관심이 늘 교회 확장에만 있다면 이것 또한 마술사의 모자에서 달걀과 꽃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더욱이 결정적인 문제는 우리의 신앙이 마술처럼 사람의 기술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중을 완벽하게 속일 수 있을 정도로 마술을 습득하려면 손동작으로부터 시작해서 도구 사용법까지 매우 오랫동안 숙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술학교까지 생겼다고 하는군요. 신앙은 근본적으로 마술과는 다른데도 그런 기술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다는 욕망이 작동하기 때문이지 신앙이 기술의 문제로 처리되고 있습니다. 일전에 지예 말을 들어보니까 어떤 사람들이 집에 찾아와서 종교에 관한 설문조사를 하더랍니다. 안식일이 토요일이냐, 일요일이냐, 또는 성탄절이 기독교적인 전통이냐, 로마 태양신의 전통이냐, 대충 이런 질문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차츰 성서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는 오늘의 기독교는 문제가 있으니까 성서 말씀대로 사는 여호와의 증인을 따르라는 요구를 합니다. 그들은 종교 설문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자기들의 종교를 전파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전도의 열정이야 다른 사람이 가타부타 따질 일은 아
니지만 신앙을 그런 기술, 일종의 노하우로 생각한다는 사실이 문제였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 정통 교회에서도 아주 일반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입니다. 전도 강습회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모임은 거의 외판원들의 방법론을 그대로 차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언젠가 제가 한번 언급했다고 보는데, 요즘 목사님들이 ‘상담학’에 경도되어 있다는 사실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어용 종교
바르예수가 마술사이긴 했지만 요즘 우리가 티브이 같은 데서 보는 그런 전문적인 마술사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마 정치인 세루기오 바울로를 종교적으로 보좌하는 예언자, 또는 신학자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바르예수를 거짓 예언자라고 설명했습니다. 거짓 예언을 통해서 총독의 시종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풀어본다면 어용 신학자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정치인들은 그런 종교를 필요로 합니다. 자신의 정치 행위를 종교적으로 합리화시켜주는 그런 종교인 말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는 유신시대였습니다. 박정희 군사독재에 의해서 꾸려지던 그 시대가 얼마나 혹독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되풀이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군사독재 시대에 기독교가 가장 크게 부흥했으며, 그런 탓인지 국가를 위한 조찬 기도회가 시도 때도 없이 열렸습니다. 1980년에는 전두환 국보위 의장을 위한 기도회를 열 정도니까 두말 할 필요도 없겠지요. 조찬기도회가 반복해서 열리다 보니 기독교는 국가 원수가 독재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무조건 그를 위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기도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요즘도 보수 교단 중심으로 국가를 위한 기도회가 간혹 열립니다. 반 김정일, 반핵, 더 나아가 한미동맹 강화를 위한 기도를 드립니다.
종교가 국가를 배척할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호국종교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국가를 비판하는 기능을 발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자칫 자기를 절대화하는 길로 빠져들기 쉽기 때문입니다. 히틀러의 나치즘 앞에서 독일 교회가 보인 태도에서 우리가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독일의 개신교회는 ‘고백교회’와 ‘독일기독교인’으로 양분되었습니다. 고백교회는 히틀러의 나치즘에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독일기독교인은 대충 묵인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고백교회의 숫자는 매우 소수였기 때문에 결국 나치즘에 대한 책임이 독일 교회에 남게 되었습니다. 요즘 미국 교회는 어떤지 정확한 정보가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9.11 테러 이후 애국 지상주의로 흐르고 있는 미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참된 예언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것에 부화뇌동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미국 교회 자체가 보수적이고, 특히 부흥하는 교회가 거의 보수적이기 때문에 국가주의의 깃발을 들지 않을까 추측이 갑니다. 평소에도 미국 교회당에는 성조기가 있다고 하더군요.
마술사의 시력상실
총독 세루기오 바울로는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던가 봅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초청해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했습니다. 누가도 그를 영리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이 마술사는 총독의 개종을 막으려고 바나바와 바울을 방해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방해 공작을 했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상당히 유치하고 비겁한 방식으로 방해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바울이 그를 그렇게 몰아붙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원래 바울은 논쟁을 즐겨하기는 하지만 상대방을 독선적으로 공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본문의 설명에 따르면 바울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그 마술사를 쏘아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기만과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악마의 자식아, 너는 나쁜 짓만 골라 가면서 하는 악당이다. 언제까지 너는 주님의 길을 훼방할 셈이냐? 이제 주님께서 손으로 너를 내리치실 것이다. 그러면 너는 눈이 멀어 한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10.11). 이 말이 떨어지자 이 마술사에게 ‘안개와 어둠’이 내리 덮쳐 앞을 더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사건의 역사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학자들에 따라서 이 이야기를 누가의 창작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는 누가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서 전해들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헨헨의 설명에 따르면 만약 이 이야기가 누가의 창작이라고 한다면 이 마술사를 ‘바르예수’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아람어인 바르예수는 ‘예수의 아들’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감히 이런 이름을 붙일 까닭이 없습니다. 바울이 그 장면에서 실제로 이렇게 말했는지 우리가 완벽하게 증명할 수는 없지만 거의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이미 이런 현상은 바울 스스로 경험한 바의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러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눈부신 빛을 보고 쓰러져서 앞을 보지 못하다가 다메섹의 아나니아에 의해서 다시 시력을 회복한 일이 있습니다(행 9:1-9). 정신적으로 극심하게 불안한 중에 어떤 충격을 받게 되면 일시적으로 시력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아마 바울은 바르예수라는 마술사의 정신상태를 꿰뚫어보았을 것이며, 바울 자신에게서 발산되는 어떤 카리스마가 마술사를 순간적으로 쇼크 상태에 빠지게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문 기자의 사실보도를 읽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누가는 거짓 예언자이며 유대인 마술사인 이 바르예수가 성령에 가득 찬 바울에 의해서 굴복 당했다는 이 사실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마술은 신앙에 의해서 허물어집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누가는 선교 초장에 이런 사건을 보도함으로써 복음이 마술과 속임수와 사이비 예언으로 무장한 이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있습니다.
마술을 넘어서
어떤 점에서 신앙이 자리를 잡고 있는 이 세상은 바르예수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반드시 남을 속이는 부정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성실한 것으로 평가되는 삶의 모습들도 그것이 결국 우리로 하여금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많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거의 전 세계가 경제만을 부르짖고 있는 이런 시대정신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과 평화를 외면하게 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바르예수와 비슷한 현상입니다. 대학사회도 머리 터질 정도로 경쟁하다가 결국 모든 교육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사랑과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교회도 역시 그렇구요. 같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한쪽 교회는 헌금이 넘쳐 나면서도 교역사 생활조차 힘든 이웃 교회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힘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복음은 결국 이런 세력을 굴복시킬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감동시킴으로써 과감하게 마술사들이 지배하는, 그래서 물적 토대만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런 세계와 용감하게 싸워나가게 할 것입니다. 누가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보도합니다. “이 광경을 처음부터 보고 있던 총독은 주님께 관한 가르침에 깊이 감동되어 신도가 되었다.”(12). 이 구절이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야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이 명실상부하게 주님으로 인정되는 그런 세상이 올 것입니다. 마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전하신 사랑과 평화가 완벽하게 지배하는 그런 세계가 올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향한 희망을 줄기차게 유지하는 것이 곧 우리의 기독교 신앙입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으로 살아갑니까? <2004.3.7>
키프러스
유럽 역사에서 지중해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리스와 로마가 이 지중해를 무대로 하는 제국이었으며,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개척했던 대표적인 나라 스페인과 포르투갈도 이 지중해 서쪽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이집트 역시 이 지중해를 머리에 인 형국으로 움직인 나라입니다. 2천년 이상 유럽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나라는 영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중해를 접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역사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약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집트와 바벨론, 또는 페르시아 사이에 끼어서 늘 옹색한 형편을 벗어나지 못했던 이스라엘이 지중해 동쪽 끝에 자리잡고 있다는 지정학적 상황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주로 지중해 연안 국가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는 선교사적 차원에서도 역시 지중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에서 10시 방향으로 소아시아(지금의 터키)가 있는데, 이 소아시아의 남쪽 해상,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서쪽 해상에 키프러스라는 섬이 있습니다. 키프러스는 북동과 남서 방향으로 비스듬하게 놓여 있는 타원형의 섬으로서 긴 쪽의 길이는 210km라고 하니까 대략 경상북도 정도의 크기는 되지 않을까요. 키프러스는 고대 때부터 광물생산으로 유명하고 섬을 가로지르는 강을 중심으로 비교적 비옥한 땅이 있어서 곡물생산으로 썩 괜찮은 형편이었기 때문에 로마의 총독이 임명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키프러스 섬은 지금 바울과 함께 선교 여행에 나선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합니다(행 4:36). 기독교의 역사를 유럽의 중심에 이식시킨 바울의 선교여행이,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세 번에 걸친 선교여행인데, 바로 이 키프러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키프러스의 북동쪽 끝에 있는 살라미스에 도착한 다음, 여러 회당에 들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차츰 남서쪽으로 내려왔습니다. 키프러스 남서쪽 끝자락 바포에 도착하기까지 대략 열흘은 걸렸을 것 같습니다. 키프러스의 총독이 바포에 거주하는 걸 보면 아마 이 바포가 키프러스에서 제일 큰 도시였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비교적 로마와 가깝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곳에 올 때까지는 별로 큰 문제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고향인 바나바 덕분으로 큰 어려움 없이 여행할 수 있었을 테지요. 그런데 바포에서 한 유대인 마술사를 만남으로써 문제가 일어납니다.
본문에 보면 이 사람의 이름은 ‘바르예수’라고 했습니다(6절). 바르예수는 아람어로 부를 때의 이름이고, 그리스어로는 ‘엘리마’라고도 불렸습니다(8절).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이 마술사를 거짓 예언자이며, 또한 키프러스 총독 세루기오 바울로의 시종이라고 설명합니다. 유대인 마술사, 거짓 예언자, 그리고 총독의 시종. 본문에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이 세 가지 정보만으로 우리가 바르예수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해낼 수는 없습니다. 그의 학문적 배경, 그의 철학, 그의 가문, 그의 구체적인 역할이 무엇인지 확증적으로 분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가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이 간단한 세 가지 정보에도 충분히 담겼습니다.
‘유대인 마술사’라는 이 표현에서 우리는 일단 이 사람이 로마 사람 총독과 대칭적 구도에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훨씬 깊고 가깝게 인식하고 있어야 할 사람인데도 그는 결국 로마 사람보다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는 마술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믿어야만 했던 유대인들에게 마술은 가장 꺼림칙한 행위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바르예수라는 사람은 무슨 연유에서 마술사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야 점성술이나 마술 같은 행위들이 일반적이긴 했습니다만 야훼 하나님을 믿던 유대인들에게는 용납될 수 없었던 일입니다.
마술적 신앙
어떤 점에서 마술과 신앙은 종이 한 장의 차이밖에 없을 정도로 관점이 비슷합니다.
양측이 모두 현실 너머에 있는 어떤 새로운 현실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마술사의 긴 모자 속에서 비둘기도 나오고, 토끼도 나옵니다. 마음만 먹으면 마술사들은 입에서 끊임없이 돈을 꺼낼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단지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새로운 현실이라 할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 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종이 한 장의 차이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마술은 마술사의 속이는 기술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신앙은 그런 사람의 기술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에게 자신을 맡기는 결단입니다. 이런 점에서 마술은 우리에게 매우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신앙은 자칫 건조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마술은 상장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을 칼로 잘라도 죽지 않은 채 살아나게 만들기 때문에 흥미진진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이름으로는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는 모두 죽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런 죽음 너머에, 또는 그런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마술을 통해서 수 백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도 결국에는 완전히 죽어야 하지만, 신앙으로 사는 사람은 참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술을 신앙인 것처럼, 거꾸로 기독교 신앙을 마술로 혼동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보다는 마술이 우리를 화끈하게 사로잡을만한 매력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입니다. 흡사 마술사의 모자 속에서 무엇이 새로 나올 것인가 숨을 죽이고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기독교인들이 그런 수준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기도를 많이 드리면 사업이 잘되고, 자식들이 출세하고, 죽을병이 나을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마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교회의 관심이 늘 교회 확장에만 있다면 이것 또한 마술사의 모자에서 달걀과 꽃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더욱이 결정적인 문제는 우리의 신앙이 마술처럼 사람의 기술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중을 완벽하게 속일 수 있을 정도로 마술을 습득하려면 손동작으로부터 시작해서 도구 사용법까지 매우 오랫동안 숙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술학교까지 생겼다고 하는군요. 신앙은 근본적으로 마술과는 다른데도 그런 기술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다는 욕망이 작동하기 때문이지 신앙이 기술의 문제로 처리되고 있습니다. 일전에 지예 말을 들어보니까 어떤 사람들이 집에 찾아와서 종교에 관한 설문조사를 하더랍니다. 안식일이 토요일이냐, 일요일이냐, 또는 성탄절이 기독교적인 전통이냐, 로마 태양신의 전통이냐, 대충 이런 질문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차츰 성서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는 오늘의 기독교는 문제가 있으니까 성서 말씀대로 사는 여호와의 증인을 따르라는 요구를 합니다. 그들은 종교 설문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자기들의 종교를 전파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전도의 열정이야 다른 사람이 가타부타 따질 일은 아
니지만 신앙을 그런 기술, 일종의 노하우로 생각한다는 사실이 문제였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 정통 교회에서도 아주 일반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입니다. 전도 강습회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모임은 거의 외판원들의 방법론을 그대로 차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언젠가 제가 한번 언급했다고 보는데, 요즘 목사님들이 ‘상담학’에 경도되어 있다는 사실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어용 종교
바르예수가 마술사이긴 했지만 요즘 우리가 티브이 같은 데서 보는 그런 전문적인 마술사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마 정치인 세루기오 바울로를 종교적으로 보좌하는 예언자, 또는 신학자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바르예수를 거짓 예언자라고 설명했습니다. 거짓 예언을 통해서 총독의 시종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풀어본다면 어용 신학자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정치인들은 그런 종교를 필요로 합니다. 자신의 정치 행위를 종교적으로 합리화시켜주는 그런 종교인 말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는 유신시대였습니다. 박정희 군사독재에 의해서 꾸려지던 그 시대가 얼마나 혹독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되풀이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군사독재 시대에 기독교가 가장 크게 부흥했으며, 그런 탓인지 국가를 위한 조찬 기도회가 시도 때도 없이 열렸습니다. 1980년에는 전두환 국보위 의장을 위한 기도회를 열 정도니까 두말 할 필요도 없겠지요. 조찬기도회가 반복해서 열리다 보니 기독교는 국가 원수가 독재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무조건 그를 위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기도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요즘도 보수 교단 중심으로 국가를 위한 기도회가 간혹 열립니다. 반 김정일, 반핵, 더 나아가 한미동맹 강화를 위한 기도를 드립니다.
종교가 국가를 배척할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호국종교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국가를 비판하는 기능을 발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자칫 자기를 절대화하는 길로 빠져들기 쉽기 때문입니다. 히틀러의 나치즘 앞에서 독일 교회가 보인 태도에서 우리가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독일의 개신교회는 ‘고백교회’와 ‘독일기독교인’으로 양분되었습니다. 고백교회는 히틀러의 나치즘에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독일기독교인은 대충 묵인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고백교회의 숫자는 매우 소수였기 때문에 결국 나치즘에 대한 책임이 독일 교회에 남게 되었습니다. 요즘 미국 교회는 어떤지 정확한 정보가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9.11 테러 이후 애국 지상주의로 흐르고 있는 미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참된 예언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것에 부화뇌동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미국 교회 자체가 보수적이고, 특히 부흥하는 교회가 거의 보수적이기 때문에 국가주의의 깃발을 들지 않을까 추측이 갑니다. 평소에도 미국 교회당에는 성조기가 있다고 하더군요.
마술사의 시력상실
총독 세루기오 바울로는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던가 봅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초청해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했습니다. 누가도 그를 영리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이 마술사는 총독의 개종을 막으려고 바나바와 바울을 방해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방해 공작을 했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상당히 유치하고 비겁한 방식으로 방해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바울이 그를 그렇게 몰아붙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원래 바울은 논쟁을 즐겨하기는 하지만 상대방을 독선적으로 공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본문의 설명에 따르면 바울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그 마술사를 쏘아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기만과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악마의 자식아, 너는 나쁜 짓만 골라 가면서 하는 악당이다. 언제까지 너는 주님의 길을 훼방할 셈이냐? 이제 주님께서 손으로 너를 내리치실 것이다. 그러면 너는 눈이 멀어 한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10.11). 이 말이 떨어지자 이 마술사에게 ‘안개와 어둠’이 내리 덮쳐 앞을 더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사건의 역사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학자들에 따라서 이 이야기를 누가의 창작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는 누가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서 전해들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헨헨의 설명에 따르면 만약 이 이야기가 누가의 창작이라고 한다면 이 마술사를 ‘바르예수’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아람어인 바르예수는 ‘예수의 아들’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감히 이런 이름을 붙일 까닭이 없습니다. 바울이 그 장면에서 실제로 이렇게 말했는지 우리가 완벽하게 증명할 수는 없지만 거의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이미 이런 현상은 바울 스스로 경험한 바의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러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눈부신 빛을 보고 쓰러져서 앞을 보지 못하다가 다메섹의 아나니아에 의해서 다시 시력을 회복한 일이 있습니다(행 9:1-9). 정신적으로 극심하게 불안한 중에 어떤 충격을 받게 되면 일시적으로 시력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아마 바울은 바르예수라는 마술사의 정신상태를 꿰뚫어보았을 것이며, 바울 자신에게서 발산되는 어떤 카리스마가 마술사를 순간적으로 쇼크 상태에 빠지게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문 기자의 사실보도를 읽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누가는 거짓 예언자이며 유대인 마술사인 이 바르예수가 성령에 가득 찬 바울에 의해서 굴복 당했다는 이 사실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마술은 신앙에 의해서 허물어집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누가는 선교 초장에 이런 사건을 보도함으로써 복음이 마술과 속임수와 사이비 예언으로 무장한 이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있습니다.
마술을 넘어서
어떤 점에서 신앙이 자리를 잡고 있는 이 세상은 바르예수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반드시 남을 속이는 부정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성실한 것으로 평가되는 삶의 모습들도 그것이 결국 우리로 하여금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많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거의 전 세계가 경제만을 부르짖고 있는 이런 시대정신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과 평화를 외면하게 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바르예수와 비슷한 현상입니다. 대학사회도 머리 터질 정도로 경쟁하다가 결국 모든 교육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사랑과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교회도 역시 그렇구요. 같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한쪽 교회는 헌금이 넘쳐 나면서도 교역사 생활조차 힘든 이웃 교회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힘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복음은 결국 이런 세력을 굴복시킬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감동시킴으로써 과감하게 마술사들이 지배하는, 그래서 물적 토대만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런 세계와 용감하게 싸워나가게 할 것입니다. 누가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보도합니다. “이 광경을 처음부터 보고 있던 총독은 주님께 관한 가르침에 깊이 감동되어 신도가 되었다.”(12). 이 구절이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야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이 명실상부하게 주님으로 인정되는 그런 세상이 올 것입니다. 마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전하신 사랑과 평화가 완벽하게 지배하는 그런 세계가 올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향한 희망을 줄기차게 유지하는 것이 곧 우리의 기독교 신앙입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으로 살아갑니까? <20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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