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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침묵 -헨리 나우웬

수도관상피정 나우웬............... 조회 수 2568 추천 수 0 2009.05.23 23:03:09
.........
출처 :  

Henri Nouwen, The Way of Heart,
이봉우 역, 마음의 길 (경북 칠곡: 분도, 2005. 7쇄) pp. 43-68.

본문 중에서 가톨릭 용어로 개신교 용어로 고쳐야 할 부분이 있어 몇 곳은 고쳤습니다.(예: 하느님→하나님 등) 그리고 가톨릭 용어라도 그대로 두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예: 강복. 사목 등을 축복, 목회 등으로) 고쳐도 문제는 없겠으나 저자의 뜻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대로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대로 옮깁니다. 대부분은 이해하기 어려움이 없을 듯하며 조용히 읽고 묵상하면 큰 도움이 될 줄 압니다.   -고려수도원-

서론

에집트 사막의 고독과 자신의 지위와 부(富)를 맞바꾼 로마의 교육자 아르세니우스(Arsenius)가 "주여, 저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소서" 하고 기도하자, 그는 "침묵을 지켜라"라는 말소리를 들었다. 침묵은 고독을 보강하며 완전하게 한다. 이것이 사막의 교부들이 공유한 확신이다. 수도원장 마카리우스(Abbot Maca- rius)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는 이 주장을 아주 훌륭하게 입증한다. :

한때 그 수도원장 마카리우스는 스케테에 있는 교회에서 형제들에 강복을 준 후에 그들에게 말하기를 "형제들이여, 피하라"고 했다. 연장자 중의 한 사람이 그에게 대답하기를, "우리가 이곳 사막에 있는 이상, 어떻게 이곳보다 더 멀리 피할 수 있겠읍니까?" 라고 했다. 그때 마카리우스는 손가락을 자신의 입에 대고 "이 입에서 피하라" 고 말했다. 그렇게 말한 다음 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침묵은 고독을 현실의 것으로 만드는 길이다. 사막의 교부들은 침묵을 하나님께 나아가는 가장 안전한 길로서 찬양했다. 아르세니우스는 말하기를 "나는 종종 말한 것을 후회 한다. 그러나 여전히 침묵하지 못한다"라고 했다. 하루는 대주교 테오필루스(Theophilus)가 압바 팜보(Abba Pambo)를 방문하기 위해 사막에 왔다. 그러나 압바 팜보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형제들이 팜보에게 "사부님, 대주교님께 무언가를 말씀하십시오. 그래야 그분이 교화되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대답하기를 "그분이 나의 침묵으로 교화되지 않는다면 나의 말로도 교화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침묵은 영적 생활에 있어서 절대 필요한 규율이다. 일찍이 야고보가 혀를 "세상살이의 악의 덩어리"로, 그리고 침묵을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린 것으로 기술한 이래(약 3:3-6) 크리스찬들은 침묵을 자기 통제의 방법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해 왔다. 분명히 침묵은 다른 많은 상황에서, 즉 가르치고 배우는 데서, 방문하고 상담하는 데서 요구되는 규율이요 수련이다. 침묵은 우리의 모든 사목적 제 직무에 있어서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규율이며 또한 유용한 수련이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한적한 곳으로부터 사목직 안으로 옮겨질 수 있는 이동식 방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침묵은 행동으로 실천하는 고독이다.

이 논평에서 나는 우선, 어떻게 해서 우리의 세계가 말이 많게 되었는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 다음에 나는 이 말많은 세계에서 침묵이 지니는 위대한 가치를 기술하고 싶다. 끝으로 나는 어떻게 침묵이 사목직의 다양한 형태 안에 실재하는 하나님의 현존의 표지일 수 있는지를 알리고자 한다.

우리의 말많은 세상

우리는 지난 몇 십 년에 걸쳐 말의 홍수로 침식되어 왔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 말에, 즉 부드럽게 속삭이는 말과 큰 소리로 선언하거나 혹은 성이 나서 꽥 소리를 지르는 말에, 구두로 하거나 낭송을 하거나 혹은 노래로 하는 말에, 기 록 문서나 책이나 벽이나 혹은 하늘에 있는 말에, 많은 소리, 많은 색깔 혹은 많은 형태로 표현되는 말에, 들리고 읽히고 보이거나 혹은 지나가는 말에, 명멸하고 서서히 움직이고 춤추고 뛰어 오르거나 혹은 우물쭈물하는 말에 둘러싸여 있다. 말, 말, 말! 그들은 우리 존재의 바닥과 벽과 그리고 천장을 장식한다.

말이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오래 전에는 라디오와 텔리비전, 혹은 정지표지, 양보 표지, 합병 표지, 펌퍼 스티커 그리고 가격의 오름이나 특별 판매를 가리키는 발표들이 없던 때도 있었다. 지금 전체 도시들을 말로 가득 채우고 있는 광고들이 없던 때도 있었다.

최근 나는 로스앤젤레스 시에서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거대한 사전을 지나 운전하는 듯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어디를 보든 거기에는 나의 눈을 길에서 떼어 놓게 하는 말들이 있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나를 사용해 보시오, 나를 데려가시오, 나를 사시오, 나를 마시시오, 나를 냄새 맡아보시오, 나를 만져보시오, 나에게 키스를 하시오, 나와 함께 잠을 자시오"라고 했다. 이러한 세상에서 과연 누가 말에 대해 존경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 모든 사실은 나 자신의 말을 포함한 모든 말이 그들의 창조적인 힘을 잃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말의 한없는 증가는 우리로 하여금 말에 대한 신뢰를 잃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가끔 "그것들은 말뿐이다"라고 생각하게 한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6년, 12년, 18년 그리고 때로는 24년 동안 말을 한다. 그러니 학생들은 흔히 "그것들은 말뿐이었다"라는 느낌을 가진다. 설교가들은 몇 주나 몇 년 동안 그들의 강론을 설교한다. 그러나 그들의 신도들은 여전히 같은 상태로 있고, 흔히 "그것들은 말뿐이다"라고 생각한다. 또한 정치가, 사업가, 아야톨라스(회교 시아파의 고위 성직자들), 그리고 교황들은 "사시사철 때를 가리지 않고" 연설을 하며 성명을 내는데, 듣는 사람들은 "그것들은 말뿐이다‥‥또 하나의 자기느낌의 표현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결과는 말의 중요한 기능인 의사전달이 더 이상 실현되지 못하고 친교를 촉진하지 못하며 공동체를 만들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말은 이제 생명을 주지 못한다. 말은 이제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사회를 건설할 수 있게 하는 데 있어 신뢰할 만한 바탕을 제공하지 못한다.

내가 과연 과장해서 말하는 것일까? 잠시 동안 우리는 신학교육에 주의를 집중해 보자. 신학교육의 목표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에 보다 충실할 수 있도록 주님이신 하나님께로 우리를 좀 더 이끄는 것 이외에 무엇인가? (마 22:37) 신학원과 신학대학은 신학생들이 늘 하나님과 그리고 동료 인간들과 깊은 친교를 이루어 갈 수 있도록 그들을 인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신학교육은, 신학생들의 전인격이 그리스도의 뜻에 더욱더 일치되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그들의 기도하는 방식과 믿는 방식이 하나가 되게 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그러나 신학교육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흔히 신학을 배우거나 가르치는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토론이나 논쟁 그리고 논증과 같은 복잡한 올가미에 걸려들어서, 하나님과의 단순한 대화나 하나님께 대한 단순한 대면이라는 "하나님 문제들"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해지게 되었다. 우리로 하여금 많은 구분을 할 수 있게 하는 우리의 강화된 말의 능력은 때때로 생명이신 말씀에 대한 진정한 헌신의 초라한 대용품이 되고 있다. 이것은 비판적인 지능작용과 그것이 요구하는 명석한 구별에 의거한 신학적 훈련이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말이 세상을 창조하고 구속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더 이상 반성되지 않는다면, 그 말들은 그들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제리톨(Geritol: 일종의 종합비 타민제)이라는 약을 파는 데 사용되는 말들과 같이 유혹하는, 그리고 사람들을 그릇되게 하는 것이 된다.

신학교육을 위한 보다 훌륭한 환경이 수도원이었던 때도 있었다. 거기서는 말이 침묵에서 태어나고 사람을 보다 깊이 침묵 속으로 인도할 수 있었다. 비록 수도원들이 더 이상 신학교육의 가장 일반적인 곳은 아닐지라도 침묵은 과거에 있어서와 같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수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원한 침묵에서 생겨났고, 우리가 증언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침묵에서 나온 이 말씀이다.

침묵

침묵은 말의 고향이다. 침묵은 말에 힘과 풍부한 결실을 준다. 우리는 말을 그들이 나온 침묵의 신비를 폭로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도교(道敎)의 철학자 장자(莊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식으로 잘 표현한다:

물고기를 잡는 통발의 목적은 물고기를 잡는 데 있고 물고기가 잡히면 그 통발은 잊혀진다. 토끼를 잡는 덫의 목적은 토끼를 잡는데 있으며 토끼들이 잡히면 그 덫은 잊혀진다. 말의 목적은 생각을 전하는 데 있다. 그 생각이 전해지고 이해되면 그 말은 잊혀진다. 나는 말을 잊어버린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는 내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다.

"나는 말을 잊어버린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이 말은 사막의 교부들 중 한 분이 말한 것일 수도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말은 현재 세계의 도구이며 침묵은 미래 세계의 신비로 간주된다. 말이 결실을 거두려면 그것은 미래의 세계에서 현재의 세계에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사막의 교부들은 그들이 사막의 침묵으로 가는 것을 미래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했다. 그 미래의 세계에서 그들의 말은 결실을 거둘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거기서 그들의 하나님의 침묵의 힘이 충만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막의 교부들이 하신 말씀들 가운데서 우리는 침묵의 세 측면을 식별할 수 있다. 그 말씀들은 모두 침묵이 미래 세계의 신비라는 중요한 견해를 심화하고 강화한다. 첫째로, 침묵은 우리를 순례자로 만든다. 둘째로, 침묵은 우리 내면에 있는 불을 지킨다. 세째로, 침묵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가르친다.

침묵은 우리를 순례자로 만든다.

일찌기 압바 티토에스(Abba Tithoes)는 말하기를 "순례는 사람이 자기 혀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순례 한다는 것은 침묵하는 것이다" ( peregrinatio est facere )라는 표현은 침묵이 미래 세계에 대한 최상의 예지라는 사막의 교부들의 확신을 말해 주고 있다. 침묵에 대한 가장 흔한 논의가 있는데 그것은 말이 사람을 쉽게 죄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죄에서 떠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이러한 관계는 사도 야고보에 의해서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표현되었다 :

‥‥우리는 모두 실수하는 일이 많습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약 3:2).

야고보 사도는 죄를 짓지 않고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만일 우리가 영원한 고향으로 가는 우리의 여정에서 세상의 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채로 남아 있고 싶으면 침묵이 가장 완전한 길이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따라서 침묵은 영적생활의 중요한 수련들(규율들) 가운데 하나이다. 서방 세계 수도생활의 창시자요 유럽의 수호성인인 성 베네딕도는 당시의 여러 가지 규율 가운데서 침묵을 대단히 강조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편 작가의 말을 인용 한다:

혀를 함부로 놀려
죄를 짓지 아니하리라.
악한 자 내 앞에 있는 한
나의 입에 재갈을 물리리라(시편 39,1).

성 베네딕도는 당신 형제들에게 악한 말을 하지 말도록 경고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그들에게 착하고 거룩한 말, 그리고 교화하는 말들도 피하라고 일렀다. 그것은 잠언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 많으면 실수하게 마련이기"(잠 10:19) 때문이다. 말을 하는 것은 위험하고 우리를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러한 금욕적인 가르침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견해는, 말하는 것이 우리를 세상사에 말려들게 하고 세상에 얽매이게 하기 때문에 세상에 의해 오염되지 않고 그것과 관련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이다. 사막의 교부들과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모든 사람은 "모든 대화는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흥미(관심 )를 갖게 하고, 마음으로 그들을 이곳에 낮선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더욱 일반시민으로서 있게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세속을 초월한 듯한 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대화나 토론, 사교적 모임, 또는 사업상의 만남에서 입맛이 쓴 채로 나오는 경우가 얼마나 흔한가?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말 가운데 차라리 말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 우리는 세상의 제 사건에 대 해 말하지만 과연 얼마나 우리는 그것들을 보다 낫게 바꾸어 놓는가? 우리는 사람들과 그들의 상태에 대해 말을 하는데 과연 얼마나 우리의 말이 그들이나 우리들에게 도움이 되는가? 우리는 마치 모든 사람이 우리의 견해와 감정에 관심 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과연 우리는 얼마나 그것 들이 진실하게 이해되고 있다고 느끼는가? 말들은 흔히 우리에게 정신적 패배감을 안겨 준다. 그들은 우리에게 마비감과 수렁에 빠져 있는 감정까지 만들 수 있다. 그들은 자주 우리를 가벼운 우울상태나 우리의 마음의 창문을 가리운 서리 안쪽에 남겨 둔다. 간단히 말해서 말은 우리가 여행하는 작은 마을 가운데 한 곳에 너무 오래도록 멈추어 있는 것 같은 감정을, 그리고 봉사 의해서 보다는 호기심에 의해서 더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 말은 흔히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여행하는 우리에게 들어오도록 초대 한 소명을 받은 순례자들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한다. 순례한다는 것은 침묵하는 것이다. "침묵을 하는 것은 우리를 순례자의 상태로 머물게 한다."

침묵은 마음속에 있는 불을 지킨다.

침묵의 보다 적극적인 둘째 의미는 그것이 내적인, 즉 영적인 불을 지킨다는 것이다. 침묵은 종교적인 정서의 내적인 불을 지킨다. 이 내적인 열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생명이다. 따라서 침묵은 하나님의 내적인 불을 보살피고 살아있도록 하는 수련이다.

포티키(Photiki)의 디아도쿠스(Diadochus)는 우리에게 아주 구체적인 이미지를 제공한다:

증기탕의 문이 계속 열려 있으면 안에 있는 열은 급속히 그 문을 통해 나가 버린다. 마찬가지로 영혼은 많은 것을 말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가 말한 모든 것 이 비록 좋은 것일지라도 말문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기억을 상실하게 된다. 그 후 지성은, 그 영혼으로 하여금 어떤 환상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신에 대한 이해를 지니게끔 하는 성령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적합한 생각이 없을지라도 만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혼동된 사상을 퍼붓는다. 귀 중한 생각은 언제나 수다를 피하는 것으로서 혼동이나 환상과는 무관한 것이다. 적시의 침묵은 매우 귀중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장 현명한 생각의 어머니와 같기 때문이다.

디아도쿠스의 이와같은 말은 "나눔"이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는 현대의 생활양식의 비위에 거슬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감정·정서 그리고 우리 영혼의 내적인 충동까지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고 믿어 왔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저와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을 당신과 나누게 되어 기쁩니다"라는 표현은 우리의 증기탕의 문이 거의 대부분 열려져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사실 자신의 내면생활을 비밀로 해 두기를 좋아하고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불안을 조성하는 경향이 있고, 또 흔히 억제되고 비사교적인 사람으로 혹은 단순히 괴짜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우리의 분별없는 나눔의 태도가 덕이라기보다는 강박적인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를 제기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것들은 공동체를 조성한다기보다는 우리의 생활을 모두 단조롭게 하는 경향이 있다. 가끔 우리는 나눔의 모임에서 귀중한 무엇인가를 빼 앗긴 것같은 느낌이나 거룩한 땅이 짓밟힌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집으로 온다. 해너이(Jamesfannay)는 사막의 교부들의 말씀에 대해 논평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입은 어떤 악이 들어오는 문이 아니다. 귀는 눈과 같이 하나의 문이다. 입은 다만 나가는 문이다. 그들(사막의 교부들)이 내보내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문을 열어 놓으면 도둑이 마굿간에서 말을 끌어내 가는 것처럼 누군가가 그들의 마음에서 훔쳐 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나? 그것은 종교적 감동력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 있다.

지켜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영적 생명이다. 특별히 세상에 하나님의 영의 현존을 증거하고자 하는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불을 최대한도로 조심하여 지킬 필요가 있다. 많은 사목자가 지쳐 떨어지게 된 사례나, 많은 말을 하고 많은 체험을 나누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그들 마음속에 계신 하나님의 영의 불이 죽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삶의 지루함이나 옹졸한 생각 그리고 감정밖에 더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것이 아니다. 때때로 우리의 많은 말은 우리의 신앙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자신이 느끼는 회의의 표현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의 마음에 접촉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 는 그들을 일시적으로 도와주어야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 불을 끄는 것은 바로 이 말많은 불신앙이다.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인 과제는 마음의 불을 충실하게 돌보는 것이다. 그것은 길 잃은 여행자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으로서 그들에게 따뜻함과 빛을 제공할 수 있다. 이것을 화란의 화가인 고호(Vincent van Gogh)보다 더 확신을 가지고 표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영혼에는 큰 불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찌기 아무도 그 불에 쬐어 몸을 녹이려고 온 사람은 없다. 통행인은 굴뚝에서 나오는 작은 연기를 보고는 자신들의 길을 갈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누구나 영적인 불을 돌보아야 하고 마음속에 소금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군가가 와서 앉거나 머무를지도 모르는 그때를 위해 얼마나 많은 간절한 소망을 갖고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하는가?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조만간에 다가올 그때를 기다리도록 하자.

고호는 여기서 사막의 교부들의 지성(mind)과 마음(heart)을 갖고 말한다. 그는 통행인이 굴뚝을 통해 나오는 연기만이 아니라 불을 볼 수 있도록 모든 문을 열고 싶은 유혹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또한 그는 만일 이런 일이 생겼더라면 그 불은 죽었을 것이고 아무도 따뜻함과 새로운 힘을 얻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도 확실히 이해했다. 그 자신의 삶은 이 영적 불에 대한 그의 이야기에 충실한 공감을 주는 대표적 예이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도 그의 불에 와서 앉지 않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수많은 사람이 그의 스케치와 그림과 편지들에서 위안과 위로를 얻고 있다.

사목자로서 우리의 가장 큰 유혹은 너무 많은 말에 대한 것이다. 많은 말은 우리의 신앙을 약화시키고 우리를 냉담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침묵은 성령을 지키는 거룩한 규율이요 수련이다.

침묵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가르친다.

침묵이 미래 세계의 신비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셋째 방법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가르침으로써이다. 힘 있는 말은 침묵에서 나온 말이다. 결실을 맺는 말은 침묵에서 나와서 침묵으로 돌아가는 말이다. 침묵으로부터 나와서 우리를 그 침 묵으로 다시 인도하는 침묵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말이다. 침묵에 바탕을 두지 않은 말은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고전 13:1)와 다를 것이 없는 약하고 힘없는 말이다.

이 모든 것도 말이 나온 침묵이 아니라, 사랑이 안전하게 쉬는 신성한 침묵일 때만 들어맞는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시는 신비, 침묵과 말씀을 통해 참여하는 위대한 신비를 어렴풋하게나마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원한 침묵에서 말씀하셨고, 이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시고 재창조하셨다. 처음에 하나님은 육지와 바다와 하늘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을 말씀하셨다. 또 그분은 식물과 새들, 물고기와 들짐승 그리고 집짐승을 말씀하셨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말씀하셨다. 그리고 때가 차자 그분을 통해 모든 것이 창조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되시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능력을 주셨다. 이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침묵을 깨뜨리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의 침묵의 헤아릴 수 없는 풍요함을 드러내신 것이다.

수도자들은 에집트의 사막으로 들어감으로써 신성한 침묵에 참여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백성의 요구에 대해 이 침묵에서 말함으로써 신성한 말씀의 창조와 재창조에 참여 하고자 노력 했다.

말은, 그들이 나온 침묵을 어떤 형태로 나타낼 때에만 친교를 조성할 수 있고 그림으로써 새로운 삶을 창조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말로써 남의 이목을 끌려고 하거나, 우리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해치기 위해 말을 사용하면, 그 말은 더 이상 침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말이 치유와 침묵의 정적의 회복을 불러일으킬 때는 실상 말이 거의 필요치 않다. 즉,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침묵은 미래 세계의 신비이다. 그것은 우리를 순례자로 남게 하여 우리를 이 시대의 걱정에 얽매이지 않게 한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거처하시는 성령의 불을 지킨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의 말씀의 창조적이고 재창조적인능력에 참여하는 말을 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침묵의 사목

이제 우리에게는 우리의 말이 하나님의 침묵의 충만을 말할 능력을 가진 침묵의 사목을 어떻게 실천하느냐는 문제가 남아 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말많은 세상에 오염되어, 우리의 말이 우리의 침묵보다 중요하다는 거짓된 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목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도하는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수련이 요구된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과제이다. 예수님의 전 사목은 자신을 떠나서 당신을 보내신 성부께로 향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요 14:10).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는 자신에게 주의를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 성부께로 가는 길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왔다가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 돌아간다(요 16:28),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려 한다.‥‥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같이 있게 하겠다(요 14:2-3).

예수님의 이름에 의한 사목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목이 말을 넘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를 가리키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이 소란한 사회에서 침묵이 매우 두려운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침묵은 근질거림과 신경질을 일으킨다. 많은 사람이 침묵을 충만하고 풍요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공허하고 속이 빈 것으로 체험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침묵은 그들을 삼키려고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심연과 같다. 한 사목자가 예배의식 중에 "우리 잠시동안 침묵을 지킵시다" 하고 말하면, 곧 사람들은 불안해지고 "이 시간이 언제 끝날 것인가?" 하는 한 가지 생각에 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강요된 침묵은 흔히 적개심과 분노를 일으킨다. 자신들의 예식에서 침묵을 시험해 본 많은 사목자는 침묵이 신성한 것이라기보다는 마력을 지닌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에 그 침묵을 "계속 이야기를 하십시오"라고 말 할 신호로 즉시 이해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목의 형태는 침묵이 자아내는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즉시 침묵을 회피하는데 이것은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목의 목적은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서가 아니라 사랑이신 분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친절하고 조심스럽게 공허한 침묵을 충만한 침묵으로, 염려스러운 침묵을 평화로운 침묵으로, 그리고 불안한 침묵을 편안을 주는 침묵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통해 이 변형된 침묵 안에서 사랑하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됨으로써 성취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말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침묵과 친구가 될 수 있게 한다면 우리의 말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을까?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몇 가지 구체적인 길을 기술해 보고자 한다.

침묵과 설교

우리의 설교가 훌륭하면 관심을 끌거나 혹은 감동을 준다. 그것은 지성과 마음을 자극하여 새로운 느낌에로 인도한다. 이것은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필요하기도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 다른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것은 작은 집 단과 함께 작업을 할 때 특별히 적절한 것으로서, 사람들이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내적인 공간을 마련하도록 하기 위하여 성서의 말씀을 때때로 짧은 주석과 함께 조용히 그리고 논리정연하게 반복하는 설교방식이다. 만일 성서의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도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 말씀을 단순히 관심을 끌거나 감동시키는 말로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우리가 사랑하시고 배려하시는 친절하신 하나님의 현존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영역을 조성하는 말로서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설교를 듣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교하는 사람을 똑바로 주시한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자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그 말로 주의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이 런 방식으로 말해 진 그 말이 서서히 주의를 설교대에서 듣는 사람의 마음으로 옮겨가, 거기서 그 말이 있기에 안전한 내적 침묵을 드러내는 것도 가능하다.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다"라는 단순한 말은 그 말이 하나님의 보살핌을 의식할 수 있는 뜰 주위에 쳐지는 울타리와도 같이 그런 식으로 조용히 그리고 끊임없이 행해질 수 있다. 처음에는 한낱 흥미 있는 은유처럼 보일 수 있는 이 말은 서서히 지성(머리)에서 마음으로 내려올 수 있다. 거기서 이 말은 하나님에 의해 모든 인간적인 말과 개념을 초월해서 내적인 변형이 일어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할 수 있다. 그래서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다"라는 말은 우리를 그분의 사랑하는 현존 안에 있을 수 있는 조용한 목장으로 인도한다. 이러한 명상적인 설교는 침묵의 사목을 실천하는 한 방법이다.

침묵과 카운슬링

카운슬링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을 보다 나은 자기 이해와 보다 큰 독립심으로 인도하는 방법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사목자와 내 담자인 신자가 함께 하나님의 사랑이 깃든 침묵으로 들어가 거기서 치유를 기다리는 방법일 수도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협조자로 일컬어진다.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식별)하기 위해 온 사람들의 생활 안에 적극적으로 현존하신다. 이것이 인간적인 상담자들이 그들의 내담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협조자의 활동을 의식하도록 도와주고 아무 두려움 없이 그분의 활동을 따르도록 격려하는 일을 그들의 첫째 과제로 삼아야 하는 까닭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사목상담은 두려움에 차 있는 신자들을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도하고, 그들이 서서히 성령의 치유하시는 현존을 깨달으리라는 것을 신뢰하고 거기에 익숙해지도록 도우려는 노력이다.

이것은 성서의 말씀이 하나님의 침묵에서 나와 특수한 환경에 처한 특수한 사람들에게 명령한 말씀으로서, 인간적인 상담자는 이 성서 말씀에 대해 매우 민감해야 한다는 사실이 요구됨을 시사한다. 상담자는 내담자인 신자가 성서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특별한 순간에 말함으로써, 그 말씀이 참으로 무서운 거대한 벽들을 부수고 기대하지 않았던 전망까지도 열리게 하도록 할 수 있다. 그때 이러한 말은 그 말이 나온 침묵, 즉 신성한 침묵을 불러일으키고 그 침묵으로 다시 돌아간다.

침묵과 조직

끝으로, 나는 사목자가 자기 자신의 생활과 다른 사람들의 생활을 조직하는 제 방법에 있어서 침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초대와 오락들이 대단히 중요한 첫째 임무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사목자들 역시 다른 사람들과 분주하게 지내는 것을 그들의 첫째 과제로 간주하는 사람들의 부류에 참가하려는 유혹을 받고 있다. 그리고 사목자들은 자주 그들이 하는 것보다 더 해야 할 어떤 것을 제공하는 사람들이나 기관들과 격심한 경쟁 상태에 처해 있다.

그러나 우리의 과제는 오락과는 반대의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사람들이 그들의 생활 안에서, 하나님의 적극적인 현존의 실재에, 그러나 흔히는 감추어져 있는 그 사건에 집중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본당)의 모든 조직적 인 활동을 지도함에 있어서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는 어떻게 사람들을 분주하게 하느냐가 아니라, 그들이 침묵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어떻게 분주하지 않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함께 부르는 것은 그들을 어두운 세계에서, 즉 단편화시키고 산란하게 하는 많은 말에서, 그 자신들과 서로를 그리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침묵으로 불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조직은 친교가 가능하게 되고 공동체가 발전할 수 있는 공간의 창조로 볼 수 있다.

설교와 카운슬링 그리고 조직에 있어서 침묵의 이러한 예들은 어떻게 침묵이 우리의 사목직의 실천적인 모습을 결정하도록 도울 수 있는지 를 예증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에 대해 너무 자구(字句)에 구애되지 않도록 하자. 결국 마음의 침묵은 입의 침묵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압바 포에멘(Abba Foeme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사람이 말없이 있을 때 그가 침묵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의 마음이 다른 사람을 단죄하고 있으면 그는 끊임없이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야기하는 또 하나의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그는 참으로 침묵하고 있다.

침묵은 원래 영원히 성장하는 자비(사랑)에로 인도하는 마음의 성향이다. 한번은 방문객이 수행자(修行者)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규칙을 깨뜨리게 해서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 수도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의 규칙은 나를 보러 온 사람들에게 환대의 덕을 행하고 그들을 편안히 집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침묵이 아니라 자비(사랑)가 영적 생활과 사목의 목적이라는 데 대해서 사막의 모든 교부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결론

이것은 침묵에 관한 나의 반성을 끝내게 한다. 말이 전달 능력을 잃어버린 우리의 수다스러운 세상에서 침묵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우리의 지성과 마음(감성)을 미래의 세계에 고정하도록 돕고 거기에서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세계에 창조적이고 재창조적인 말을 하도록 한다. 그래서 침묵은 또한 우리에게 사목직 수행에 있어서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할 수도 있다.

분명히 사막의 교부들은 단순히 말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한 지침이라는 사실을 믿었다. 우리의 말들은 너무나도 자주 불필요하고 진실하지 않으며 그리고 피상적이다. 만일 사람들이 우리의 말들에 의해서보다는 우리의 침묵에 의해서 보다 나은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각각의 새로운 상황에 의아하게 여기는 것도 좋은 수련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사실을 인정 할 때엔 우리는 사막에서의 보다 중요한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 즉, 침묵은 우선 첫째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도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는 마음의 성향이라는 것이다. 또한 침묵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 휴대하는 이동식 방이며, 침묵에서 우리는 곤궁한 사람들에게 말하고, 우리 의 말들은 결실을 거둔 후에 침묵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침묵 속에 깊이 빠져 있다는 것은 바로 이 이동식 독방을 의미한다. 침묵의 사목에 관한 마지막 문제는 우리가 말을 많이 하느냐 적게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말들이 하나님께서 친히 보살피는 침묵을 불러일으키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 침묵에 불림을 받았다. 말은 현재 세계의 도구이지만 침묵은 미래 세계의 신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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