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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호세아 최창모 교수............... 조회 수 4133 추천 수 0 2009.06.07 21:5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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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호13:5-6 
설교자 : 최창모 교수 
참고 : 건국대 히브리중동학/새길교회 2008.11.09 주일설교 

[예레미야 2장 2절, 호세야 13장 5 ~ 6절]

 예루살렘을 동쪽으로 벗어나면서 우리는 매우 색다른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잘 발달된 3,000년 고도인 예루살렘의 밀집된 인구나 고층 건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 끝도 보이지 않은 채 펼쳐져 있다. 문명 세계에 살던 현대인이 갑자기 가장 원시적인 상태의 세계로 타임머신을 타고 건너온 느낌이다. 그곳에서는 소리를 쳐대도 하늘이 놀라거나 발을 굴러도 땅이 움직일 만한 징조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어쩐지 허풍을 떨고 싶어도 허풍을 떨 수 없는 곳이다. 달과 태양은 그대로 산에서 뜨기 시작하여 그대로 산으로 넘어간다. 그저 온 세상이 죽은 것 같은 침침한 적막을 느낄 뿐이다.

 여기가 바로 유다 광야인 것이다. 이 광야를 지나면 우리는 여리고를 비롯하여 사해 쪽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광야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생각하면서 무엇인가 보다 깊은 차원의 의미가 이곳에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유일신 종교의 자궁

 지구상에 존재하는 유일신 종교는 유대교 ? 기독교 ? 이슬람뿐이다. 이 세 종교의 발생지는 공통적으로 ‘광야’였다는 사실은 과연 우연인가? 고대 유대교는 모세를 통하여 시내산에서 토라를 받음으로써 형성되었으며, 초기 기독교는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 요한의 개시와 광야에서 금식하며 시험을 받으신 예수에게서 그 기원을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이슬람은 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하마드가 메디나 사막에서 신의 계시를 받아 ‘마지막 예언자’가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처럼 광야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통한 인류 구원의 터전이었다. 구약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약 60% 가량이 불모지인 사막이요, 현재 이스라엘 인구의 약 7%만이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어떻게 “젖과 꿀이 흐른다는 땅”이 이처럼 형편없는 불모지(不毛地), 박토(薄土)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 사실은 역설적으로 광야의 의미가 단순한 ‘불모지’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광야를 지칭하는 히브리어의 미드바르 ― 히브리어 미드바르는 또 다른 히브리어인 네게브(???)와는 달리 사막(Desert)이라기보다는 광야(Wilderness)에 보다 가까운 개념이다. ― 는 구약성경에서 모두 267회나 사용된다. 이는 주로 ‘농사가 불가능한 지역’(사 35:1; 51:3; 렘 17:6; 50:12; 욥 39:6), ‘경작지와 불모지의 경계’(출 13:20, cf. 민 24:1; 사 27:10), 혹은 단순히 ‘물과 음식이 없는 곳’(왕하 3:8~9; 삼하 17:27~29) 등의 개념을 갖고 사용되고 있다.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 ……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간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 ……. (렘 2:2, 6)

 신약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헬라어 엘레모스(ελεμο?)는 히브리어의 미드바르의 번역으로써 ‘한적한 곳’, ‘외로운 곳’ 등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마 14:13, 15; 눅 9:12; 막 1:45, cf. 욥 38:27).

“돌멩이를 먹고사는 양들”

 이곳을 찾은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광야에서 한적하게 움직이며 이동하는 양떼를 보고 “이곳 양들은 돌멩이를 먹고 산다”고 기록하였다. 아무것도 없는 메마른 사막에서도 무엇인가 먹이를 찾아 나서는 양떼의 모습이 마치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돌멩이들을 먹고사는 것처럼 느껴진 모양이다.

 아무튼 광야는 기본적으로 물이 없다. 물이라고는 1년에 약 10~30mm 정도의 강우량이 고작이다. 물이 없는 곳에는 생물이 살기 어렵다. 한겨울에 내리는 약간의 비를 제외하고는 1년 내내 비가 내리지 않기 때문에 건조하기 이를 데 없다.

 또, 낮과 밤의 기온 차이가 너무 커서 견디기가 매우 어려운 곳일 뿐만 아니라, 맹수와 독충들이 활동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광야는 한낮의 기온이 평균 섭씨 40~50도에 이르며, 밤에는 기온이 뚝 떨어져 10~15도에 이른다. 일교차는 인간이 적응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보이지 않는 이 광야에는 각종 야생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점박이 호랑이인 레오파드를 비롯하여 하이에나, 살쾡이, 그리고 각종 뱀과 전갈 등 독충들이 많다. 곳곳에 있는 작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물과 먹이를 얻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명기 1장 19절에서는 광야를 “크고 두려운 광야”라고 칭하고 있다. 광야를 탐험하는 젊은 사람들조차 종종 사고를 당하는 곳으로 광야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위험한 곳이다.

 종합하면 “광야란 인간의 의지로는 살 수 없는 곳, 따라서 하나님(절대자)의 절대적인 도움만이 요청되는 곳”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힘센 장정(壯丁)이라도 광야에 버려지면 72시간 이상을 살아남기 어렵다. 인간의 한계가 여지없이 드러나며, 인간의 자존심의 옷이 벗겨지는 곳이 바로 광야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그 어떤 인간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의지나 힘에 의존해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절대자의 힘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그런 곳이다.

 이러한 광야의 개념과 의미를 가장 잘 말해 주고 있는 성경의 시대는 당연히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온 40년간의 광야 시대다. 광야 시대야말로 광야를 가장 잘 경험하게 되는 시기로써, 광야에 대한 신앙적 개념이 가장 확고하게 형성되었다.

하나님의 사랑, 인간의 반역

 먼저, 광야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반역이 교차되는 삶의 현장이다. 출애굽의 과정에서 나타난 사건들을 요약하면 광야에서 만나와 생수로 먹이시며,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은혜를 저버리며 불평하고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민 11:1~31:20)이 교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나와 홍해를 육지같이 가르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직접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3일이 채 못 되어 불평하기 시작한다. 도무지 하나님의 능력을 올바로 이해한 민족인가를 의심케 해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기적과 이사(異事)를 목도하고, 이를 직접 체험한 이 백성들이 어떻게 3일(민 10:33)도 채 되지 못하여 반역과 불평을 일삼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태도는 광야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반영해 주고 있는 행동이라는 점에서 성경은 너무도 정직하게 기록되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무리 의지가 강한 인간도 광야에서는 72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기껏해야 인간의 의지는 작심삼일(作心三日)인 셈이다. (우리 또한 삶의 현실에서 한계에 막혀 좌절한 적이 얼마이던가?!)

 그래서 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3일 길을 가다가 반역하고,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죽고, 회개를 통하여 다시 용서받는 구조가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궁극적 구원과 사랑이 인간의 반역과 교차되면서 인간의 역사는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개인적인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이러한 반복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어찌할 수 없는 인생이 종종 광야에 비교되는 것이다.

신앙의 유격장

 둘째, 과도기로서의 광야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광야 생활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피할 수 없는 기간이요, 훈련의 장소였다. 이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치적 ? 군사적 ? 사회적 ? 행정적 조직을 정비했고, 신앙적으로 무장을 했다. 이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기 전에 광야에서 40년간 훈련받은 사실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만일 모세의 생애 가운데 광야 40년의 세월이 빠져 있었다면 그는 분명히 폭군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노예들 사이에서 노예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 평생을 치욕과 비애로 얼룩진 자신의 삶을 조롱하며 마감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광야에서 철저히 훈련시키셨다. 불과 이집트로부터 2주일이면 건너갈 수 있는 가나안에 이르는 길을 40년 동안이나 방황하게 하시고, 그 과정을 통하여 철저히 훈련시키셨던 것이다. 430년간을 이집트의 노예로 세월을 보냈으니 히브리인들은 노예근성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에 살면서 종종 “우리가 어찌하여 이집트에서 나왔던고”(민 11:20b),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 14:3b), “이집트에는 먹을 것이 있는데, 우리가 이 광야에서 주려 죽게 되었구나!” 하며, 모세에게 불평을 토로하기도 했던 것이다.

 노예란 그저 먹거리만 배부르게 주면 언제든지 주인에게 복종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닌가? 노예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라든가 미래를 위한 고상한 삶, 건강한 정신이라는 것은 모두 거추장스러운 액세서리에 불과한 것이며, 다만 하루하루를 배부르게 먹고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사고와 생활방식에 길들여진 존재들이 아닌가? (지금도 더 많이! 더 배부르게! 만을 외치다가 잘못된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히브리 노예들을 통하여 어떻게 인류 구원이라는 엄숙한 하나님의 계획을 진행시켜 나갈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시키시면서 노예의 근성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로서의 자격과 자질을 키워나가신 것이다. 때로는 채찍으로, 때로는 생수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면서 훈련시키셨다. 급기야 이집트 노예 세대는 모두 광야에서 죽이시고, 새 세대를 통하여 새 땅 가나안에 들어가도록 세대를 교체시키셨던 것이다. 지도자 모세조차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겨져야 한다는 말씀대로 가나안에 들여보내지 않으신 하나님이었다. 광야란 철저한 신앙적 훈련장이었다. 아니 신앙의 유격장이었다.

광야 같은 인생길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우리 신앙인들이 겪는 여러 가지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훈련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훈련받음으로써 지구상의 그 어떤 민족들보다 강하고 위대한 민족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크고 중요할수록 우리를 철저하게 훈련시키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셋째, 광야란 신적 계시의 장소다. 출애굽 사건 이후 광야 40년간의 생활의 절정은 시내산 사건일 것이다.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계시를 체험하게 되며, 신앙적 핵심인 토라를 얻게 된다(출 16:10; 19~20장). 모세가 호렙 산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하나님 야훼(????)를 만나는 체험을 한 후, 이집트에 돌아가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켜 광야로 나오게 할 수 있었다면, 히브리 노예들은 광야에서 그에게 나타났던 하나님과의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비로소 민족 공동체적 신앙고백이 생겨났다. 이 고백을 바탕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시작된 것이다. 율법과 계약을 중심으로 한 신앙이 이 광야에서 기원되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출애굽 사건”과 “시내산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결합되어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이곳 외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하나님과의 밀월(密月)의 시대로 이해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가서 예루살렘 거민의 귀에 외쳐 말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 (렘 2:2)

광야, 40년의 추억

 출애굽 사건에 있어서는 물론 가나안 정착 이후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광야란 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기준이 되고 있음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 즉,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광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징벌을 받았던 사실을 언제나 기억나게 해주고 있다:

 내가 광야 마른땅에서 너를 권고하였거늘 저희가 먹인 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 (호 13:5~6)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의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추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추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의롭게 행한 것을 알리라. (미 6:5)

 또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한 징벌의 한 표현으로 “애굽으로 다시 돌려보내며”(호 8:13; 9:3; cf. 신 28:68), “거친 광야로 데리고 가서”(호 2:14) 그곳에서 행했던 것과 같이 행하시리라고 말하였다.

샘이 있는 사막, 꽃이 피는 광야

 마지막으로 이사야의 메시지에는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불순종’의 개념은 빠져 있으며, 전혀 새로운 광야의 개념이 발전되어 나온다. 이는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한 표현으로 ‘사막이 낙원이 되는’ 환상을 그리고 있다.:

 가련하고 빈핍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 내가 자산의 강의 열며 골짜기 가운데 샘이 나게 하며 광야로 못이 되게 하며 마른땅으로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 내가 광야에는 백향목과 싯딤나무와 화석류와 들 감람나무를 심고 사막에는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을 함께 두리니……. (사 41:17~19)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이 영광과 갈멜과 샤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사 35:1~2)

 지금도 평소에는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광야일지라도 겨울철에 약간의 비(광야의 1년 강우량은 약 30mm 정도에 불과하다)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얼마 후에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아름다운 목초로 변하게 된다. 이사야의 환상을 실제로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한 알의 작은 씨앗으로부터 작은 풀들이 솟아나고, 그곳에서 피는 작은 들꽃들이 광야를 가득 메우고, 그곳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떼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은 낙원이 아닐 수 없다.

 한 알의 씨앗이 보여줄 수 있는 힘은 솔직히 말해서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인간의 두개골보다 더 단단하게 굳어 있는 광야의 비좁은 돌멩이의 틈 사이를 완벽하게 밀고 올라와, 그 땅에 뿌리를 박고 땅 위를 향해 올라오는 불가항력적인 들풀의 힘을 이 광야에서는 볼 수 있다. 생명이 존재하고자 할 때 이와 같은 힘이 나타나는 것이다. 일종의 오랜 항전을 통해 길러진 탄력성과 목적을 위한 끊임없는 도전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런 자갈밭에 떨어진 씨앗은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거나 비관하지 않는다. 경쟁자가 있을 때 보다 강해지듯이, 장애에 부딪칠 때 단련의 힘이 생기듯이, 들풀의 생명력은 생명이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투쟁을 배우는 것인가? 이런 들꽃을 어찌 온실 속 화초의 화려한 웃음에 비할 수 있을까? 광야의 이러한 변화는 참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문학적 상상력이 엄연한 눈앞의 현실로 경험토록 한다.

 바빌로니아 포로기 이후에 시작된 메시아에 대한 이해는 마카비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의 활동과 사상에서 극치를 이룬다. 즉, 마카비 시대의 경건한 유대인들, 즉 하시딤은 “의와 공의를 찾아 정착할 곳, 곧 광야”로 나아갔으며(마카비상 2:29~38), 유다 마카비 자신도 후에는 광야에 나아가 숨어 있었다(마카비하 5:27). 이로써 광야는 본격적으로 메시야 운동과 관련되어 이해되었으며, 많은 활동들이 기록되어 나온다.

거짓 메시아의 활동무대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수많은 군중들을 이끌고 광야에 나타나 스스로를 메시야로 자처하며 활동한 여러 묵시문학적 그룹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벨릭스 총독 시대(52~60 C.E.)에 4,000명을 이끌고 광야에 나타난 한 이집트 사람(고대사 20:168~172; 유대 전쟁사 2:261~263; 행 21:38), 같은 시대에 역시 많은 군중을 이끌고 광야에 나타난 익명의 사람(고대사 20:167~168; 유대 전쟁사 2:259), 그리고 베스도 총독 시대(60~62 C.E.)에 역시 광야에 나타난 한 익명의 사람(고대사 20:188) 등이 그들이다.

 한편, 제2차 유대 반란(132~135 C.E.)을 이끌던 바 코크바(Bar Kokhba) 역시 유다 광야에서 활동하였으며, 최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그들 사이에서 주고받던 편지들이 와디 무라밭(Wadi Murabaat)과 나할 헤벨(Nahal Heber) 등에서 발견되었다.

 오늘날 사해 남서쪽 가파른 경사를 따라 세워진 천연적인 요새 마사다의 역사는 바로 광야에서의 메시아 운동의 마지막 보루였다.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당하던 날, 수년 동안 함께 싸우던 열심당원들 또는 자객들은 이곳에 모여 최후의 일각까지 항쟁을 계속하였다. 로마의 총독 실바는 요새 주변에 토성을 쌓고 공성기를 앞세워 공격해 들어왔다. 이스라엘을 이끌던 엘리에젤 벤 야이르(Eliezer Ben Yair)는 동지들에게 이렇게 마지막 연설을 하였다.:

 나의 충성스런 동지들이여, 우리는 지금까지 참되고 의로우신 하나님 외에 그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았소. 그러나 이제 우리는 로마인의 노예가 되는 일을 면할 수 없게 되었소 ……. 나는 스스로 자유롭고 용감하게 죽을 수 있는 힘이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생각하오 ……. 우리의 아내가 더럽혀지기 전에, 우리의 자녀들에게 노예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기 전에 세상을 떠나게 합시다. 그리고 우리도 서로 영예로운 죽음을 죽게 합시다 …….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합시다 ……. (유대 전쟁사 7:6)

 쿰란 공동체는 사해 서편 광야에 나아가 종말론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면서 종말에 광야에서 일어날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녀들의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말하고 있으며(1QM 1:2~3), 또한 그들 스스로를 “광야의 회중”이라고 불렀다. 이들의 광야 생활의 동기는 순전히 종교적 이상주의에 기인된 것이었다.

 신약성경에서도 중간기의 유대 사상과 같은 맥락에서 광야를 이해하고 있다. 세례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설교하였으며(마 3:1; 11:7; 눅 7:26, cf. 사 40:3), 예수도 광야에서 40일간 금식 후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마 4:1~11; 막 1:12~13; 눅 4:1~13). 예수는 종말에 있을 현상들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라”(마 24:26)고 경고하고 있다. 이는 광야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종말론적 운동의 배경이 되고 있음을 잘 말해 주고 있으며, 동시에 이 운동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사건 이후 3년 동안 아라비아 광야에 머문다(갈 1:17~18). 요한계시록 12장 6절, 14절에는 종말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 광야”에서 1,260일(3년 반) 동안 머물게 됨을 언급하고 있다. 여전히 광야는 묵시문학적 사건의 현장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나님이 숨어 계신 곳

 초기 기독교의 수도원 운동은 많은 수도사들이 하나님의 영적 계시의 장소인 광야에서 살면서, 그곳에서 종말론적 미래의 삶을 현재적으로 실현시킨 구체적인 현장으로 이해하고 있다. 5세기 이후 유다 광야와 네게브 지역에는 적어도 200개가 넘는 수도원이 세워졌다.

 결국 신약 시대의 광야는 단순히 싸움을 피해 숨어 사는 도피처가 아니라, 구약의 후기 예언서가 말하고 있는 묵시문학적 기대와 관련되어 해석되고 있으며, 종말에 있을 메시아 운동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구약 시대부터 이해된 광야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 해석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야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全) 역사 과정을 통하여 경험된 인생의 현주소이며, 단순히 ‘버려진 땅’이 아니요, 젖과 꿀이 흐르는 참 가나안의 과거요, 현재요, 미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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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 사도행전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행17:22~29  길희성 형제  2009-06-07 2383
1593 고린도후 강한 자가 되라 고후12:7-10  강종수 목사  2009-06-07 2414
1592 고린도전 대화로서의 기도 고전14 : 15  임영수 목사  2009-06-06 2138
1591 사도행전 하나님의 희망 속에 있는 공동체 행2:37∼47  임영수 목사  2009-06-06 2176
1590 요한복음 보혜사 성령 요16:5∼16  임영수 목사  2009-06-06 3202
1589 마가복음 자기를 부인하는 삶 막8:34∼38  임영수 목사  2009-06-06 3155
1588 마태복음 구원의 현실성 마11:25∼30  임영수 목사  2009-06-06 1752
1587 시편 인간의 길 시1:1∼6  임영수 목사  2009-06-06 2270
1586 고린도전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고전15:1-11  정용섭 목사  2009-06-03 2004
1585 마가복음 본질의 변질 막11:15-19  정용섭 목사  2009-06-03 2131
1584 시편 나는 왜 감사해야 하는가? 시50:22~23  조용기 목사  2009-06-01 2992
1583 베드로전 눈에 안 보이는 대적 벧전5:5~9  조용기 목사  2009-06-01 1996
1582 고린도후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지요? 고후5:8-9  조용기 목사  2009-06-01 2068
1581 갈라디아 내 인생을 누가 살아주나? 갈2:20절  조용기 목사  2009-06-01 2635
1580 열왕기하 육의 눈과 영의 눈 왕하6:14~17  조용기 목사  2009-06-01 2825
1579 마태복음 주께 업혀서 사는 삶 마11:28~30  조용기 목사  2009-06-01 2336
1578 마가복음 버려야 얻는다 막10:28~31  조용기 목사  2009-06-01 2180
1577 고린도전 방언 기도의 유익이 무엇인가? 고전14:39~40  조용기 목사  2009-06-01 3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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