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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는 한 가지 방법

갈라디아 윤진수 형제............... 조회 수 3224 추천 수 0 2009.06.07 22: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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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갈3:26~29 
설교자 : 윤진수 형제 
참고 : 새길교회2008.11.23 주일설교 

전북 전주에는 예수병원이라는 병원이 있습니다. 이름을 보면 짐작 하실 지도 모르겠는데, 이 병원은 선교사들이 세운 병원입니다. 1898년에 세운 것이니 이제 110년이 된 역사가 오랜 병원입니다. 이 병원 옆에는 선교사들의 주택 단지가 있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저희 아버님이 이 병원에서 근무하셨고, 저희 집도 병원 근처여서 선교사 주택 단지에 자주 가서 친구들과 놀았습니다. 집들이 띄엄띄엄 서 있고, 공지가 많아서 아이들이 놀기에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이 주택단지 정문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라고 큰 글씨로 쓰여 있어서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장로교가 있으면 북장로교도 있나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정말 북장로교도 있었더군요. 남장로교와 북장로교는 한국의 지역을 나누어서 선교를 했는데, 호남 쪽은 남장로교가 맡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장로교와 북장로교가 왜 생겼나 했더니, 미국의 노예제를 둘러싼 논쟁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남북전쟁 때 장로교 교단에서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고, 남부 주들의 연방 탈퇴를 비난하자, 노예 제도를 옹호하던 남부의 교회들이 1861년에 기존 교단을 탈퇴하여 세운 교단이 남장로교이고, 기존의 교단이 북장로교입니다. 이들 교단들은 명칭을 바꾸어 가며 계속 존속하다가, 1983년에야 Presbyterian Church USA라는 한 교단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이처럼 노예제도를 둘러싸고 교단이 분열된 것은 장로교에 한하지 않았습니다. 1844년에 침례교단이 노예소유자는 선교사가 될 수 없다고 결의하자, 남부의 침례교회가 침례교단을 탈퇴하고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큰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웃에 대한 사랑을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이 인간의 존엄을 깨뜨리는 노예제도를 옹호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노예제도를 앞장서서 반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정을 자세히 살펴보고, 또 성경을 대조해 보니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더군요.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노예제 옹호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는 방법이 달랐습니다.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서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 말씀증거는 그 당시에 어떤 논쟁이 있었는가를 소개하고, 이러한 논쟁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과연 성경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미국의 노예제도의 역사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에는 1776년에 독립하기 전부터 노예가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붙잡아 와서 노예로 부려먹은 것이지요. 이러한 사정은 미국이 독립하고 나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미국 독립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지난 주에 오바마의 자서전을 사서 보니까 그 첫 페이지에도 이 말이 실려 있더군요.

 이 독립선언문은 버지니아 출신의 토마스 제퍼슨이 기초한 것입니다. 그런데 버지니아는 노예제도를 인정한 주였고, 남북전쟁 때도 남부의 중심이었으며, 제퍼슨도 노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버지니아 주 샬롯츠빌이라는 도시의 근교에는 몬티첼로라는 제퍼슨의 집이 있는데, 제가 그곳을 갔을 때 백인 안내인이 이 독립선언서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제퍼슨으로서는 흑인이 모든 사람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고 비웃듯이 이야기하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렇지만 제퍼슨의 명예를 위해 한 말씀 드리자면, 제퍼슨도 노예 폐지론자였고, 독립선언서의 초안에도 노예제를 비난하는 구절이 있었는데 노예를 인정하는 주의 반대로 빠졌다고 합니다. 다만 제퍼슨은 빚이 많아서 노예들을 담보로 잡혔기 때문에 노예를 해방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당시 노예는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요? 수학적으로 말한다면 백인의 3/5 대접을 받았습니다. 왜 3/5인가 하면, 미국 헌법을 만들 당시에 남부의 노예주와 북부의 비노예주가 대립을 하였는데, 양자의 타협으로 남부 주에서는 노예 제도를 인정하고, 그 대신 하원의원을 선정하는 기준이 되는 각 주의 인구를 정함에 있어서, 노예는 노예 아닌 사람의 3/5만큼 쳐주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 후에도 노예제도를 둘러싸고 남부와 북부 사이에 대립이 계속되다가 1860년에 노예제도 폐지론자인 링컨이 당선되자 1861년에 남북전쟁이 일어났고, 전쟁 와중인 1863년에 링컨이 노예 해방령을 공포하였으며, 1865년 북부의 승리로 남북전쟁이 끝나서 비로소 노예제도가 폐지된 것은 여러분들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고 해서 흑인에 대한 차별이 없어진 것은 절대 아니었지요. 1967년에 만들어진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는 영화를 보면 백인 여자(캐서린 호튼)가 흑인 남자(시드니 포이티어)를 데리고 집에 와서 아버지(스펜서 트레이시)와 어머니(캐서린 헵번)에게 결혼하겠다고 소개를 하자 난리가 나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흑인과 백인이 결혼하면 처벌을 하는 주가 있었고, 이는 1967년에야 연방대법원이 위헌이라고 해서 비로소 없어졌습니다. 이제 흑인인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니, 그야말로 상전이 벽해가 된 셈입니다.

 그러면 과연 성경은 노예제도에 관해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일까요? 노예제도 옹호론과 폐지론의 근거를 차례로 보겠습니다.

 노예제도 옹호론은 구약과 신약의 여러 구절을 노예제도의 근거로 들고 있습니다. 예컨대 18세기 영국의 토마스 톰슨이라는 사람은, 성경을 열고 읽어보기만 하면 성경이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레위기 25장 45 - 46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45 너희는 또, 너희와 함께 사는 외국인 거주자의 자손 가운데서나, 너희의 땅에서 태어나서 너희와 함께 사는 그들의 가족 가운데서 종을 사서, 너희의 소유로 삼을 수 있다. 46 너희는 또 그 종들을 너희의 자손에게 영원한 유산으로 물려줄 수도 있다. 바로 이들은 너희가 종으로 부려도 된다. 그러나 너희의 동포 이스라엘 자손들끼리 서로 고되게 부려서는 안 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신약의 빌레몬서를 근거로 들기도 합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빌레몬서는 바울이 빌레몬이라는 신자에게, 빌레몬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면서, 그를 잘 맞아 달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노예제 옹호론자들은 이를 남북전쟁 전에 미국에서 실행되었던 이른바 도망 노예법, 즉 도망 나온 노예를 붙잡아서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법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았습니다.

 이 외에도 노예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많은 구절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출애굽기 21장 1절에서 11절은 노예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히브리 종을 사면 6년 동안 종살이를 하고, 7년째에는 자유의 몸이 되는데, 주인이 그에게 아내를 주어서, 그 아내가 아들이나 딸을 낳았으면, 그 아내와 아이들은 주인의 것이므로, 그는 혼자 나가지만, 그러나 그 종이 '나는 나의 주인과 나의 처자를 사랑하므로, 혼자 자유를 얻어 나가지 않겠다' 하고 선언하면, 주인은 그를 하나님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의 귀를 문이나 문설주에 대고 송곳으로 뚫으면 그는 영원히 주인의 종이 된다고 합니다. 또한 신약의 많은 구절도 노예제를 인정하는 근거로 인용됩니다. 가령 골로새서 3장 22절은, 종으로 있는 사람들은 모든 일에 육신의 주인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자, 이렇게 보면 성경이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명백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남북전쟁 당시 남부의 목사들은 전쟁을 성경에 충실한 남부와, 신앙이 없는 북부의 싸움으로, 진실과 오류의 대결이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다른 한편 미국의 노예는 흑인이었기 때문에, 흑인을 노예로 삼는 데에도 근거가 필요했습니다. 이때 주로 인용된 것이 창세기 9장 20절 이하에 나오는 함의 저주입니다. 노아의 아들이고 가나안의 아버지인 함이, 아버지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는 것을 보고 나와서 셈과 야벳에게 이르자, 그들이 들어가서 얼굴을 돌린 채로 아버지의 몸을 덮어 드렸고,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된 노아가,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 것이고, 가장 천한 종이 되어서, 저의 형제들을 섬길 것이라고 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셈과 가나안이 흑인의 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 자체 근거가 박약한데, 왜냐하면 셈과 가나안이 흑인의 조상이라는 것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쨌든 성경에서 직접 노예제도를 부정하거나 이를 폐지하라고 하는 구절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은 구체적인 성경 구절들보다는 성경의 기본 정신이 무엇인가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산상수훈에 나오는, 이른바 황금율이라고 하는 말씀, 즉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부터 흑인이건 백인이건 자신과 똑같이 대접하라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복음이라는 씨앗을 신약에 몰래 심어서, 이것이 점점 자라서 19세기의 노예 폐지를 주장하는 기독교가 되었다고도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강력하게 폈던 사람으로 잘 알려진 것은 헨리 워드 비처라는 목사입니다. 이 사람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소설을 쓴 스토우 부인의 동생입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보아서 이처럼 성경에 의존하여 노예제도를 부정하려고 하는 주장이 당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직접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것보다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스토우 부인이 쓴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과연 성경은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문제에 직접 들어가기 전에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그 하나는 흑인 영가이고, 다른 하나는 흑백 인종분리에 관한 미국 헌법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법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 자리에 잘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 직업병이라고 생각하고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신학과 법학은 기본적으로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많습니다.

 먼저 흑인 영가입니다. 확실히 노예들에게는 기독교가 그들의 지친 영혼을 위로해 주는 복음이었습니다. 이는 흑인 영가 가운데 “깊은 강(Deep River)”이나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과 같은 것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깊은 강”은 요단강을 건너면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는 흑인들의 희망을,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는 예수님만이 자신들의 고통을 알아주실 것이라는 바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흑인영가가 이처럼 소극적으로 자신들의 고통만을 달랬던 것은 아닙니다.

 “모세여 내려가라(Go Down, Moses)”라는 노래는 모세에게 이집트 파라오에게 가서 내 백성을 가게 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젠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노예를 해방시킬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는 흑인 노예들의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이 노래들을 부른 흑인들은 분명히 성경이 노예제도를 명하는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참고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을 보니까, 자신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바하의 마태 수난곡과 같은 종교음악을 들으면 자신도 감동한다고 써 놓았더군요.

 이처럼 기독교가 흑인들에게 영감을 준 것은 이 경우에 한하지 않습니다. 1963년 미국 워싱턴 디시의 링컨 기념관 앞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이라는 연설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면서 흑백평등을 역설한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에게도 성경 말씀이 용기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리고 흑백 인종분리란 “분리하되 평등(separate but equal)”이라는 모토로 표현되는데, 남북전쟁이 끝난 뒤에도 흑인과 백인은 교통시설이나 학교 등을 같이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즉 흑인 학교와 백인학교가 분리되어서, 흑인은 백인 학교에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흑인은 백인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같이 어울릴 수 없다는 백인들의 생각에서 나온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흑인들이 이에 대하여 불평등하다고 도전했지만, 미국 연방대법원은 분리되었다 하더라도 똑같이만 처우한다면 불평등한 것은 아니라고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954년에 유명한 Brown 판결에서 미국 연방대법원은, 이러한 흑백 인종분리는 “법의 평등한 보호”를 규정한 미국 헌법수정 제14조에 어긋난다고 하여 위헌이라고 선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재판 과정에서, 이 헌법 조항이 연방의회에서 만들어질 당시인 1868년에는 연방 의회가 위치하고 있던 워싱턴 디시에서도 흑백 인종 분리 교육이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로 되었습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당시 위 헌법조항을 만들었던 의회 의원들도 흑백 인종분리가 문제로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연방대법원은 그것은 중요하지 않고, 헌법 조항을 현재의 상황에 맞추어 해석해야 된다고 하여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헌법을 단순히 만들어진 때의 상황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재 가지는 의미를 고려하여 해석하는 것을 헌법을 살아있는 문서(living document)라고 본다고 합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노예제도에 관하여 성경은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헌법과 마찬가지로 성경도 살아있는 문서(living document)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여 성경은 반드시 문자적으로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그 의미가 고착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쓰여진 때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을 대조하여 그 심층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사도 바울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사도 바울이 노예제도를 없애라거나 노예 소유자에게 노예를 해방시키라고 한 일은 없습니다. 다만 노예주들에게 노예를 자신의 형제와 같이 대우하라고 하였습니다. 빌레몬서에서도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대우하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바울에게는 영혼의 문제가 더 중요했을 것입니다. 또 바울이 당시 로마제국의 법을 거스르고 노예제도를 부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본뜻은 오늘 성경의 본문에서 말한 것처럼,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에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영적으로만 종과 자유인에게 차별이 없고, 육신에서는 차별이 있어도 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결국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비록 성경의 개개 구절만 본다면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종과 자유인, 남자나 여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면, 현실적인 차별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참된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이제까지 장황하게 100년도 넘은 미국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과거의 역사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까요? 저는 이것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우리나라에도 요새 인종차별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이주노동자를 우리나라에서 싼 값에 부려먹으면서, 그 인권을 보호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의 성경 말씀에 부합하는 일일까요?

 다른 하나는 성경을 겸허하게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성경을 자신에게 맞추어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미국 남부의 노예 주인들이 성경이 노예제도를 옹호한다고 보았던 것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추어 성경을 읽은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일은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는 좌냐 우냐, 진보냐 보수냐에 관계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것은 성경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도 살아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러한 성경 말씀을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깊이 고민하는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인가는 제가 말씀드리기에는 너무 어려운 주제입니다. 다만 저의 소박한 생각을 여러분들과 함께 고민하여 보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오늘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성경 말씀을 저희가 자주 오해하고, 저희 편한 대로 해석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때가 많습니다. 저희에게 겸손한 마음을 베풀어 주시고, 또 성경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성경 말씀에서 깨달은 지혜를 가지고 예수 따르미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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