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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내게 축복입니다.

빌립보서 김경희 교수............... 조회 수 2571 추천 수 0 2009.06.07 22: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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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빌4;1 
설교자 : 김경희 교수 
참고 : 목원대학교 교수/ 새길교회 2008.12.14주일설교 

먼저 부족한 저에게 새길교회의 강단에 서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새길교회는 많은 문제들을 노출시키고 있는 기성교회의 틀을 과감히 벗어나서 주님의 진정한 제자도를 실천해 나가고자 한국의 최고의 지성인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교회로 알고 있으며 제가 지금까지 깊은 존경감과 동경을 품고서 늘 한번 예배에 참석해 보기를 꿈꾸던 교회였습니다. 서울에 살았더라면 분명히 이 교회를 옛날에 와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꿈꾸던 교회였기에 별 생각 없이 처음에 설교청탁을 받고 승낙을 하고 나서는 곧바로 후회를 했던 것입니다. 그 기라성 같은 분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내가 감히 무슨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저는 설교자라기보다는 마치 심사자 앞에서 면접시험을 치루는 수험생으로 서 있는 듯한 떨리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남은 생을 어떻게 하면 의미롭게 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은퇴 이후에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이따금 하게 됩니다만,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행복과 불행을 규정하는 여러 요소들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아닐까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예컨대 여러 통계를 보면 직장인이 스트레스를 느끼는 경우는 업무의 어려움 보다는 오히려 직장 내 동료나 상관과의 인간관계에서 오는 경우가 더욱 많다고 합니다. 만일 한 사람이 그 가까이 있는 동료와 부드럽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행복의 지수는 높아지는 반면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못할 경우, 그 사람은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 옳은 것 같습니다. 저도 직장생활을 해 봤지만 때로는 동료 때문에 신경을 쓴다든가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간혹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회의 중에 내 말이 묵살 당한다든지 대화 중에 내가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가질 때였습니다. 물론 알게 모르게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준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피차 나이들이 들으니 사람들의 태도도 점잖아지는지 그런 경우들이 사라질 뿐 아니라 또 내 주위에서는 내가 가장 연장자의 위치에 있게 되니 사람들이 좀더 점잖게 대해준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나이가 먹는 것도 좋은 것이구나 생각될 정도로 요사이 와서는 직장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만 많은 젊은 사람은 아마도 여전히 크든 적든 이러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비단 직장생활 뿐이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생활하게 되는데 어떤 가정은 화목하여 서로에게 힘이 돼주고 위로와 격려를 주는 관계를 이루고 사는가 하면 어떤 가족은 남편과 아내, 며느리와 시어머니, 부모와 자식, 형제 사이에 크고 작은 조그만 갈등들이 있어 열 받으며 속 터지며 소리 지르며 살아갑니다. 학교에서도 동급생끼리, 상급생과 하급생 사이에, 학생과 선생 사이에, 사람들은 행복과 평안을 느끼기도 하고 스트레스, 분노와 불행을 느끼기도 하면서 살아갑니다. 친구와의 관계에서, 가까운 이웃과의 관계에서, 교회생활에서 그 이외의 수많은 사회적 관계에서 사람들은 때로는 행복을, 때로는 불행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저는 고등학교와 대학시절에 강원용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경동교회에 다녔는데 당시 설교를 열심히 받아쓰기도 했지만 지금 구체적인 내용들은 거의 생각나는 것이 없고 단지 목사님께서 언제나 강조하셨던 중요한 몇 가지 메시지가 생각나는데 “무관심이 죄”라든가 기독교인의 삶은 “타자를 위한 삶”이란 말씀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그 말씀을 저항 없이 쉽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으며 그러니까 기독교인인은 나의 이익, 나의 기쁨과 행복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노력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스스럼없이 받아들였으며 지금까지도 그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삶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데 추호의 의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타자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이나 2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우연히 책을 읽다가 “지옥은 타인이다”라는 문구를 발견하고서였습니다. 그것은 당시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요 문학가로 명성이 높았던 사르트르의 “닫힌 문”이라는 희곡에 나오는 문구였는데 이 말은 저에게 상당히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왜냐 하면 저는 그와 같은 생각은 그 책을 읽기 전에는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저는 그러한 경우를 실제로 목격한 바 있었습니다. 제가 독일에 유학할 때 한번은 제 하숙방 옆방에 어떤 노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과 마주친 적이 없지만 내 방에 앉아 있으면 벽을 통해 그들의 말소리가 똑똑히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싸웠습니다. 나이는 둘 다 한 칠팔십 넘은 듯 했는데 그 어떤 말이든 증오와 분노에 차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분노에 차서 무슨 말을 하면 상대방이 뭐라고 소리지르며 쏘아붙이고 그러면 처음 사람이 뭐라고 증오에 차서 되쏘고 그러면 상대방은 또 뭐라고 악에 받쳐 되쏘고 그렇게 서로를 소진시키며 끝없이 서로 증오에 차서 잡아먹을 듯이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하숙방에 두 달쯤 살았는데 그 노부부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렇게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아, 정말 지옥이 따로 없구나 생각이 되었습니다. 저렇게 온종일 싸우면서 저렇게 서로를 증오하면서 평생을 함께 보내다니, 정말 끔찍하더군요. 그 후 저는 저의 가까운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도 유사한 경우들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부부는 원수가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는 격이라고 누가 말했다는데 그렇게 서로 원수와 같이 미워하며 사는 부부들을 보았습니다. 물론 그렇게 서로 싸우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 사이가 좋아지는 경우도 더욱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타인이 지옥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타인 자체라기보다는 내가 그렇게 만드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나의 행동과 태도로 내가 타인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물론 내가 아주 어려운, 가령 심리 장애나 정신 질환에 걸린 상대를 만나면 속수무책으로 상대방이 지옥이 되겠으나 많은 경우 나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나는 타인과의 관계를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로 만들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타인에 관해 이와는 아주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말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타인의 눈이 나를 완성한다”라는 발언이었습니다. 이 말은 바흐친이라는 러시아 철학자가 했다고 합니다. 제가 철학적인 배경지식이 별반 없는 사람으로서 이 말을 생각해 보니 이 말 역시 상당히 깊은 통찰을 보여주는 말인 듯 보였습니다. 사실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결함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타인의 눈으로 볼 때 나의 결함과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고 그 과정을 통해 비로소 나는 좀더 바람직한 나로 성장하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하겠지요. 그러므로 나의 완성을 위해 타인의 시선은 필수가 되겠습니다. 지옥은 타인이라는 명제에서는 타인의 시선은 나의 주체성의 실현을 방해하는 무엇이었는데 졸지에 지금은 자아의 완성을 위해 타인의 시선은 필수적이 된 것입니다. 참 이런 것을 보면 철학자들은 우리 삶의 어떤 진실의 일면을 어쩌면 이처럼 끄집어내어 정확히 한 마디 말로 표현해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야말로 촌철살인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쓴 한국인에 대한 인상들이 우리 한국인이 쓴 글들보다 더 한국인을 잘 묘사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이라는 한 일본인이 쓴 책을 본 적이 있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우리들의 문제점을 콕 집어 정확히 해부해 놓았는지 놀랄 정도였습니다. 이 제목을 본 따서 요새는 또 “맞아죽을 각오로 쓴 기독교인 비판” 같은 책들이 나오는 모양입니다만, 우리는 정말 가능하면 나 자신의 완성을 위해서라도 나와 동질의 사람들 보다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달동네사람들을, 젊은이들은 노인들을, 교육을 많이 받은 엘리트들은 고등 교육받지 못한 하층 계급의 노동자들을, 도시사람들은 농촌 사람들을, 강남사람들은 강북사람들을, 건강한 사람들은 병든 사람들을, 상관은 아랫사람들을, 기독교인은 타종교인들을, 한국인은 외국인을, 며느리들은 시어머니들을, 남자들은 여자들을, 여자들은 남자들을 많이 만나 얘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얘기를 경청하고 상대방의 눈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봐야 할 것입니다.

 저는 목원대학에 재직하면서 제가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부류의 기독교인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실 방언이나 입신체험, 또는 통성기도 같은 이런 것들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학대학에 온 학생들 절대 다수가 방언 체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드문 경우지만, 환상 중에 저에 관한 계시를 받았다며 찾아오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저를 위해 기도를 해 주겠다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언젠가 무슨 영성수련회를 따라간 적이 있는데 학생들이 그룹을 지어 각 교수들 주위에 빙 둘러서더니 열정적으로 큰 방이 떠나가도록 크게 소리 지르며 통성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둘러싼 교수님을 위한 기도였으며 어떤 학생은 눈물까지 흘리며 몇 분간 기도하였습니다. 저는 졸지에 열광적으로 기도하는 한 무리의 학생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어 그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기도가 끝나니 교수님 사랑합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치는데 제 솔직한 느낌은 당혹감이었습니다. 그럴 때면 내가 참 이상한 곳에 와 있구나, 내가 이상한가, 그들이 이상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성서근본주의적인 아집에 젖은 학생들과 수업 중에 그야말로 씨름을 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성서에 나온, 혹은 교회의 전통적 교리의 내용을 문자대로 믿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예수천당 불신지옥, 귀신의 존재, 천당과 지옥, 이적이야기들, 6일만의 창조, 종말에 일어날 일들, 예수에 대한 구약의 예언 등입니다. 방언이나 입신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은 성령을 안받은 것으로 본다든지, 어떤 학생은 매일 새벽 4시에 부부가 똑같은 시간에 그날 있을 일을 환상으로 본다는 둥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과 부대끼며 저는 그때까지 제가 가져왔던 부정적인 생각들 중 상당수는 편견임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깊은 신앙의 열정과 하느님께 충성하고자 하는 열의로 차 있으며 냉랭한 지식 있는 기독교인들 보다 훨씬 깊은 신앙으로 늘 하느님과 교류하며 살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너무도 나와는 달랐던 그들의 모습을 통해 저는 하느님에 대해 그들의 열정에 비해 미지근하고 무기력한 나의 신앙의 모습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옛날이었다면 광신도로 치부했을지 모를 학생들, 나와는 정말 다른 그들이지만 예수님과 하느님을 위해 자신의 온 몸을 던져 순종하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을 마주하며 존경감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그들 역시 그들과 많이 다른 저와 부대끼는 가운데 적어도 자신들의 신앙만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태도를 벗어나서 다른 사람들의 신앙,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관용해야 하고 타종교인의 신앙도 존중해야 한다는 점을 수긍하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와 나의 학생들은 서로의 다름으로부터 서로를 완성한다는 거창한 경험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으며 또 그로써 서로 조금씩 변화해 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올해 봄에 가까이 지내던 친척언니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그 언니는 저의 집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살았기 때문에 같이 동네 뒷산에 산책도 자주 같이 하고 또 가까운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서 봄에는 벚꽃 구경, 가을에는 단풍구경도 다니고 또 여기저기 등산도 많이 다녔습니다. 가까운 계룡산, 식장산, 대둔산으로부터 설악산, 지리산은 물론이고 속리산, 두타산, 주왕산 등 많은 산들을 함께 다녔으며 선운사, 강천사, 내소사, 거제도, 남해, 서해안 등 많은 곳을 함께 여행도 하며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렇게 가깝게 지나던 언니였는데 돌아가시기 일년 전에 암 말기 판정을 받고 일년여 투병생활 하면서 항암치료를 받는 중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시게 된 것이었습니다. 주변사람들 모두 언니가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항암치료가 끝나고 조금은 더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고 저 역시 힘든 항암치료 후에 조금 기운을 차리면 같이 가벼운 여행이라도 함께 하려고 계획했기에 고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을 받았고 상당 기간 충격과 슬픔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웠습니다. 동네 뒷산에 산책을 하게 되면 곳곳에서 언니와 함께 다니던 생각과 그러면서 이제 다시는 고인과 같이 이 길을 산책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하면서 제게 떠오른 생각은 고인의 존재, 고인이 저와 함께 했던 시간이 저의 인생에 축복이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가까웠던 사람을 잃은 경험을 가져 본 적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가 살아있었을 때는 몰랐으나 그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고 나서 그때에야 그의 존재가 내 삶에 얼마나 크나큰 축복이었는지 비로소 확연히 깨닫는 경험을 한 적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결코 영원히 다시는 있을 수 없는 그의 존재를 그리워하며 그가 함께 했을 때 좀더 그에게 잘해주었을 걸 하고 후회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원히 미련한 존재입니다. 항상 뒤늦게, 돌이키는 것이 불가능할 때에야 비로소 깨달으니까요.

 언니의 죽음은 다시 한번 타인의 존재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타인의 존재란 내게는 축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애인, 남편, 아내, 부모, 형제자매나 친구와 함께 할 때 그것은 얼마나 큰 축복의 순간이겠습니까?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내게 도움을 주는 사람은 얼마나 내게 축복의 존재일 것입니까? 그러나 때로는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 그 역시 내게는 축복의 존재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내게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경험한 바이지만 사람은 자기가 남을 도왔을 때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부탁하거나 물어보려 할 때, 다른 사람에게 혹시 폐가 되지는 않을까, 혹시 짐이 되지나 않을 까 하고 몹시 신경을 씁니다. 이러한 걱정은 대개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욱 많이 가지는 듯합니다. 그런데 제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나를 도와주었을 경우 내게 대한 태도가 훨씬 우호적이고 친절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경험한 바로는 사람들이 자신이 도움 받은 사람을 대할 때보다 자신이 도와준 사람을 만날 때 훨씬 행복해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편안하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돕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행복을 선사하는 것임을 발견합니다. 저 자신을 보아도 제가 도움 받은 사람과 제가 도움을 준 사람 중 제가 도움을 준 사람이 더 내게 행복감을 안겨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다른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도움을 청하십시오. 신세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에게 돕는다는 행복감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여러분은 똑같이 여러분에게 도움을 청하는 다른 사람을 축복의 존재로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내가 당신에게, 그리고 당신이 내게 축복이 되어주는 것, 저는 그것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서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사람들아”라고 빌립보 교회 신자들을 지칭할 때 사도 바울은 바로 이와 같은, 서로가 서로에게 축복이 된, 인간관계를 표현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으므로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고 그들이 전함 받은 복음에 신실했기에 그들은 바울에게 축복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타자의 존재를 인간관계의 차원을 넘어 좀더 넒은 의미로 확장시켜 보고자 합니다. 저는 유학생활 중에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나라들의 높은 문화수준과 사회제도 등을 많이 부러워도 했지만 그러나 한 가지 우리나라가 더 좋은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문화의 다양성이었습니다. 서양에서는 도처에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서양음악만을 들을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는 서양 고전음악과 더불어 한국음악, 가야금산조라든가 판소리, 시조 등의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미술의 영역도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는 동양화, 서양화 다 즐길 수 있고 문학도 마찬가지로 서양문학, 쉐익스피어,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이광수, 황순원, 박경리 등 우리 문학을 다 즐길 수 있습니다. 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의 서양철학도 배우지만 우리는 공자, 노자, 장자에 관한 전통을 가까이에 접하고 삽니다. 특별히 제가 우리나라에서 좋게 생각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의 종교의 다양성입니다. 서양에서는 오로지 기독교 문화 하나입니다만,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기독교와 함께 불교, 선종, 원불교, 유교, 천도교 등 얼마나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합니까? 특히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나라가 이처럼 다양한 종교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진정 축복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제가 비록 깊이 공부해 보지는 못했지만 불교, 특히 선종, 그리고 천도교는 참으로 위대할 뿐만 아니라 정말로 매력적인 종교인 것 같기에 말입니다. 물론 내가 궁극적으로는 기독교에서 나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또한 성서적 정신을 나의 삶의 지침으로 삼는다 해도 제 경험으로 볼 때 때로는 성서의 어떤 텍스트보다도 불교의 어떤 텍스트가 제 마음을 다스리는 데 더 도움이 된 경우가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로지 성서와 기독교 전통 하나에서만 이 복잡한 인생사에 대한 해답을 구해야만 한다면 사실 좀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온갖 인생의 잡다한 경우들에 우리는 다른 종교의 가르침들 안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교와 그 경전들, 스님들 그리고 모든 불자들은 우리에게 얼마나 축복의 존재로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축복이 된다면 우리 역시 그들에게 당연히 축복의 존재가 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예수를 따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가 아닐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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