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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부터 온 사람/솔로몬>중에서


1.세례 요한

세례 요한, 그는 예수님의 생애를 말함에 있어서 결코 제외해 놓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성경이 주님의 생애를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오늘날 조국 교회는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이론에만 밝은 서기관들이 아니라,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한처럼, 그 인생이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매인, 선지자와 같은 사람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비록 악한 자의 칼에 죽었으나 짧은 생애, 오로지 그리스도만 가리켰던 그의 삶은 오늘도 무디어진 우리의 심령을 흔들어 깨워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사역자의 삶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2.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박하게 필요한 것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박하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떠나 있는 교회들이 복음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극히 어려운 교회의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심히 혼미하고 어지러운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교회는 형식적인 신자들로 봄비고, 신자들은 세상을 향한 사랑과 결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있는 교회시대의 특징은 영적인 것들에 대한 무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리가 가리워져 있고, 잠들어 있는 자들에게는 역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한 이해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떠난 교회들에 대한 그분의 애통하는 마음을 압니까? 교회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진지한 검증과 고뇌가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기도 속에 깃들여있습니까? 

3.조국 교회를 깨울 선지자를 기다립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증거는 희박하고, 그리스도를 떠나 있는 증거는 뚜렷합니다. 죄를 책망하고 중생케 하던 위대한 복음의 능력은 뚜렷이 감퇴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능력을 이 땅으로 불러 내리던 영적인 거목들의 후예가 그쳐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사교행사를 좋아하고, 신령한 영적 은혜보다는 우정에 넘치는 분위기를 좋아하며, 교인들은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축복기도를 좋아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누가 예루살렘을 위해 목놓아 우시던 주님의 심정(눅19:41)에 관심이 있습니까? 저마다 예수 믿고 복 받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 중 다수는 복음 앞에서 깨어지고 영혼이 변화되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방 신상 앞에서나 구하는 탐심과 부패한 욕망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기독교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습니다. 이런 무지함이 우리 속에 있는 한, 우리들과 우리의 교회는 여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자들입니다. 이러한 조국 교회를 깨워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선지자와 설교자를 역사는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4.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라

세례 요한, 그는 결코 큰 자로 태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크게 될 것이다" 미래입니다. 그는 큰 자가 되어갈 것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으로 교육을 받았고, 광야에서의 대부분의 시간도 하나님의 말씀을 교육받고 연구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말씀의 지식을 가진 자들은 예루살렘 거리에도 부지기수로 많이 있었습니다. 율법의 조항을 외우며 경문을 차고 백성들에게 구약의 지식을 가르쳐주고, 사람의 유전을 교습해 주던 자들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가 광야에서 회개와 천국을 외치는 "큰 자"가 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일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에게 임함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하나님의 눈앞에 큰 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 시대 백성들이 깨닫기를 원하셨던 메시지를 그 입술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마음에 불붙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현듯 능력으로 임했고 세례 요한은 말씀에 사로잡힌 자가 되었습니다. 

5.가슴에 불붙는 말씀이 임하기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고 믿으면서, 소정의 신학과정을 마치고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세상으로 보내시기 전에는, 먼저 그의 영혼에 말씀을 주셔서 설교자로 삼으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을 보십시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스스로 선지자직을 지망했기 때문에 세상으로 나간 자는 없습니다. 그들이 세상에 나가기 전에 먼저 그들 가슴에는 외치지 않을 수 없는 불같은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소정의 과정을 마치면 신학교는 졸업장을 줍니다. 필요한 절차를 마치면 노회는 안수를 주고, 교회는 그들을 목자로 초빙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어학 훈련을 마치면 수료증을 받고 선교지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하나님을 떠난 패역과 불 신앙이 소용돌이치는 이 세상이 변화되기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가슴에 불붙는 말씀이 임하기를 기도하십시오. 이 시대를 향해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자로 부름을 받은 우리들의 영혼을 불 같이 일깨우기를 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지식을 습득하고, 온갖 신학을 통달하였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우리가 설교자로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결코 하나님을 떠난 세상을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6. 광야에서 경험한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광야에 있던 요한에게 임했습니다.
왜 향기로운 제사가 드려지는 화려한 성전이 아니었을까요?
왜 랍비들이 열심히 율법을 강론하던 회당이 아니었을까요?
왜 따뜻한 부모의 사랑이 있는 가정이 아니었을까요?
왜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는 예루살렘의 거리가 아니었을까요?
왜 율법을 낭독하던 그의 공부방이 아니었을까요?
이것은 실로 이 시대에 복음을 위해 수고하겠다고 세상으로 달려나가기에 바쁜 우리들의 옷자락을 붙잡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빈 들"이 어떤 곳입니까? 낮에는 뜨거운 햇볕이 있지만 해가 지면 모닥불을 지펴 추위를 피해야 하는 곳입니다. 한 마디로 빈들이 의미하는 바는 "세속으로부터 분리된 고적함" 입니다. 세상의 온갖 속된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홀로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그런 곳을 말합니다.

7.사역자들의 초라한 영력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기에는 우리의 마음이 너무나 자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빼앗기고 있습니다. 또한 쓸데없는 일들에 대한 과도한 탐심에 들뜬 나머지, 우리의 마음은 눈을 들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하고자 하는 갈망을 못 느끼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강단의 쇠약한 영성은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교회를 지키기엔 너무나 약합니다. 우리 앞에 있는 그 많은 신학의 이론과 교회성장의 방법론들만으로는 파도처럼 밀려드는 세속의 물결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순결하게 보호하기에는 너무나 연약합니다. 사회개혁의 몸부림은 있어도 불 신앙의 이 시대로 하여금, 자신의 죄악을 인하여 괴로워하게 하는 거룩한 고민을 불러일으키는 말씀의 능력은 보기 어려워졌습니다.
진리는 들어도 곧은 목을 숙이지 아니하는 이 시대에, 진리에 관한 이야기는 많지만 죄인의 심장을 찔러 쪼개는 진리의 능력은 파장이 그쳐가고 있습니다. 설교의 내용은 화려하여 파도처럼 보여도 그 물은 죄인들의 발목만 적시고 빠져나갑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사역자들의 박약한 영성에 있습니다. 초라한 영력에 있습니다.

8.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함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한 여러가지 계획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훌륭한 비전과 계획들을 저마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를 위해 살기를 원하는 갸륵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그분을 위한 그럴듯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주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에 대해 늘 골몰해 하지만 주님은 우리들 자신 속에서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함'을 먼저 찾으십니다. 나실인이나 세레 요한이 보여주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만 드려지는 헌신이고 또 하나는 속된 것과 완전히 구별된 온전한 거룩함입니다. 그러나 헌신은 익숙하게 알려지고 있으나 거룩함은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헌신과 거룩은 결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데 우리는 이것들을 따로 떼어놓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9.거룩한 삶은

설교자라는 직분이 설교하는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어 줄 수 없습니다.
그 사람 안에 있는 거룩한 일들에 대한 계획들이 그를 거룩하게 만들어 줄 수 없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설교자는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일은 거룩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거룩한 일들도 말씀의 사역자들을 거룩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선포하는 입술의 말들을 통하여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 속에 들어와 우리를 변화시키는 말씀의 능력을 경험함으로 비로소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함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그분과 만나고 교제함으로써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거룩함에 대한 경험들은 보다 완전한 경건을 향하여 우리를 목마르게 합니다.

10.하나님의 거룩함에 사로잡힌 사람

세례요한을 보십시오 그의 등장은 초라하였고, 외모는 볼품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학위도, 길목 좋은 목회지도, 유명한 사람의 추천서도 없이 설교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선포를 시작한 곳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예루살렘의 거리나 회당이 아니라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황량한 벌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들을 보내어주셨습니다. 그의 선포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회중들의 영혼을 두드리는 강한 설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그 단순하고 투박한 설교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듣는 이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설교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비록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드렸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거룩함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1 성직자의 권위주의

역사적으로 볼 때 성직자의 권위주의는 항상 교회의 참된 영적 권위가 사라질 때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으로 교회가 하나님이 세우신 특별한 기관임을 보여 주는 일에 실패 할 때, 교회는 건축 양식이나 예배당의 구조 및 복잡한 성직 제도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권위를 강요하는 일에 골몰하여 왔습니다. 요란한 색깔의 후드를 두른 설교자, 강단 위에 켜진 촛불, 카톨릭의 미사를 즐겨 부르는 성가대, 구약적인 예배의 순서 등과 같은 예배 환경도 이러한 논의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강단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매진하고 설교자들이 외치는 진리가 회중들의 가슴에 능력 있게 다가오던 시대에는 설교자가 자신을 제사장인 것처럼 내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가 선포하고 있는 말씀은 그가 영적인 사람임을 입증해 주었고, 그가 증거하는 진리는 하나님의 기운이 깃들여 듣는 자로 하여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영적 권세를 드러내 주었기 때문입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진실성과 영성이 감퇴하게 되자 교회는 참된 권위를 잃어버리게 되었고 설교자들은 그 직무상 자기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람들로 하여금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진정한 영적 권위를 대신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마치 구약 시대의 제사장의 후예인 체 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이런 일들은 행해지고 있습니다.

12.
전도 설교를 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이미 구원을 받았고 이제는 교육을 받기만 하면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회중들 가운데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있고 이들은 불신자와 다름없다고 생각하며 제시하는 선명한 전도설교를 접하기 어려워지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설교는 불신자들을 구원하는 일을 위하여 제대로 기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야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형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언제나 제사가 있었고 절기가 있었고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종교적인 형식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 곧 당신을 향한 신앙심이나 경외심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설교자들은 언제나 자기의 설교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그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신앙의 상태를 점검하여 언제나 말씀 앞에 깨닫고 하나님께로 자신을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이 오늘날 설교에서 매우 소홀하게 취급되고 있습니다.

13.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설교자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분 곁에 있다 온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채취와 기운이 배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숨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 곁에 있다 온 사람의 가장 뚜렷한 표징은 그가 하나님에 관해 증언할 때 드러납니다. 하나님 곁에 있다 온 사람들의 하나님에 관한 증언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변론과 뚜렷이 구별됩니다. 하나님 곁에 있다 온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체취와 영적 분위기는, 그가 어느 본문을 설교하든지 숨길 수 없이 베어 나오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에 관하여 증언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에 관한 것인 한, 그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확증과 신념에 넘치는 언어가 있습니다.
설교자가 아무리 자기를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강변할지라도, 그의 선포가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설교를 위하여 준비된 설교 내용이, 어린 학생들이 골방에서 성경을 읽고 명상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그의 권위는 검은 예복과 강단의 촛불에 기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4.
성경의 첫 장을 열 때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우리는 성경의 첫 장을 열 때마다 장엄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습니다. 천지창조를 설명하거나, 사람들을 설득하는 대신 인간들의 모든 철학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선언하는 바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 존재를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지한 인생이라도 드넓은 우주와 밤하늘의 광대함을 바라보노라면 자신들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이며 이 세상은 그것을 지으신 그 누군가의 손에 의존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임마누엘 칸트는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다. 밤하늘의 빛나는 별과 내 마음에 반짝이는 도덕률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증거하고 있다." 

15.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들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시지만 하나님 홀로 그 역사를 움직이지 아니하시고, 당신이 택한 사람들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의 한 장을 여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새롭게 여실 때마다 거기에는 그분의 손에 붙잡혀 유감 없이 하나님의 뜻을 드러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초라했지만, 그들을 붙드신 하나님의 손이 위대했기에 그들은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 놓고야 말았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세례 요한과 같은 설교자들이었습니다.

16.
 증거 하러 온 사람

 저는 하나님이 우리들을 설교자로서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이 결코 교리나 논리에 그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이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임을 모든 이들이 알 수 있었던 것처럼, 설교자 역시 설교 사역에 있어서 자신을 보내신 이가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사실을 성도들이 인정할 수 있을 만한 그 어떤 영적인 권위와 표징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았다면 그는 마땅히 하나님 곁에 있다 온 사람임을 그의 영적 삶과 변함 없는 헌신과 말씀 선포를 통해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이 설교자의 영혼 속에 담겨지고, 그 진리가 설교를 통하여 선포됨으로써 회중들을 하나님 면전 앞에 세워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성도들은 그 설교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특별한 사람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17.
영적인 빈약함

오늘날 왜 강단에서는 청교도 시절에 볼 수 있었던 생사를 건, 진지한 말씀 선포가 보기 힘들어졌습니까? 설교자들이 자기가 설교하는 내용들을 깊이 느끼지 못하고 단지 지적으로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그런 냉담함은 무엇때문입니까? 어떤 설교학자는 "오늘날의 설교는 정신훈화 수준으로 내려갔다"라고 말했는데 진리를 선포하는 담대함과 진지함, 무엇보다도 그 진리 때문에 죽고 사는 것과 같은 설교자의 다급함과 정염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때문입니까?
이 모든 이유는 설교자들의 영적인 빈약함에 있습니다. 설교자들이 영적 경험이 부족한 상태에서, 단지 지식적으로 정리된 내용들을 설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설교 내용이 설교자를 뜨겁게 사로잡고, 설교하고자 하는 본문 속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의 체험이 없이 성급하게 설교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18.
스펄전의 설교

찰스 스펄전은 엄청난 양의 설교를 남겼습니다. 현존하는 설교문이 3400여편이나 된다고 하니 녹음기도 없었던 시대에 필사자들이 얼마나 공을 들여서 그의 설교를 받아쓰고 보존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3400여편의 설교 중 어느 설교도 중복되는 본문을 갖고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경 곳곳을 누비며 마른 땅과 같은 본문에서 샘을 길었고 돌덩어리 같은 한 본문을 쪼개어 생수를 길어 올렸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가 살았을 때 설교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한 수 보다 죽고 난 후에 기록으로 남은 그의 설교를 읽다가 주님을 영접하게 된 사람들의 수가 훨씬 많다고도 합니다.
심지어는 찢어진 스펄전의 설교문으로 포장된 소포를 배달하던 우편배달부가 소포 포장지에 기록된 스펄전의 설교를 읽다가 회심하였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19.
두 종류의 칼빈주의자

칼빈주의자 가운데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뇌된 칼빈주의자이고 또 하나는 경험한 칼빈주의자입니다. 세뇌된 칼빈주의자, 세뇌된 복음주의자는 자신의 체험적인 확신 때문에 그러한 신학적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을 배우고 익히며 다른 사상들을 거절하는 데 숙달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크게 쓰임을 받았던 훌륭한 설교자, 그리고 교회를 죄의 잠으로부터 각성시키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능하였던 사람들은 한결 같이 그리스도의 성품에 대한 특별하고도 신령한 영적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설교자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그러한 신령한 체험은 그들로 하여금 은혜로운 정서가 충만한 설교를 하게 하였습니다.

20.
믿게 하려 함이라

모든 설교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설교를 듣기 전에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던 사실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계시와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의 근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이지(理智)가 많이 깨이고 과학이 발달한 시대입니다. 저마다 많은 정보들을 얻고 홍수처럼 넘치는 지식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계산에 능하고 자신들의 이성을 가장 신뢰합니다. 이성은 언제나 그들의 삶의 주인이 되고 사람들은 그 이성의 판단과 지식을 따라서 삽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처럼 단지 이성이 설복 당하기만 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설교는 단지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갖게 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21.
코카콜라 영업 판촉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은 어느 교회에 부임해서 몇 해 동안을 부교역자들과 함께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하루 16시간씩 교회에 근무하면서 교회가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한 결과 600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하였고 그 목사님은 주위에서 교회 행정에 가장 능한 목사로 인정을 받아 여러 모임의 강사로 불려 다녔습니다.
그러나 양적으로는 성장되었지만, 교인들은 여전히 어린 아이들과 같았습니다. 젖병을 물려주고 기저귀를 갈아주어야 하는 교인들만 늘어났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모여 있을 때는 무엇인가가 되어 가는 것 같은데 교인들이 모두 흩어져 돌아가고 나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은 불안을 경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교회의 양해 하에 두 주간 정도 산에서 기도하는 중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가 교인들을 모으는 것과 코카콜라 회사가 콜라를 팔기 위하여 영업 판촉을 하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
진리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자신의 역사 하심이 결핍된 결과입니다.

22.
설교자의 기대와 소망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다음과 같은 희망 내지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자기의 준비가 어떠하든지 또 자기가 무엇을 말하든지 성도들이 귀를 기울여 관심을 가지고 듣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 말씀에 감화를 받아 오래도록 잊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설교자 자신은 어떻습니까? 자기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붙들고 살아가기 위하여, 또한 성도들이 그렇게 그 말씀을 흘려버리지 아니하고 붙잡고 살아감으로 그 말씀에 의해 지속적으로 영향 받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얼마나 많이 기도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참된 말씀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칼날과 같은 양심 위에 서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23.
우리의 믿음

우리의 믿음은 이것입니다. 진리가 올바르고 능력 있게 선포되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라도 복음이 능력있게 설교되고 그리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고 기뻐하게 되면, 그들은 더 많은 사람들을 그 설교자 앞으로 데리고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으로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게 하기에 능한 설교자들이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로 사람들을 보내실 것입니다. ⓒ김남준 (열린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