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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극복하는 길

마태복음 조용기 목사............... 조회 수 3072 추천 수 0 2009.06.11 16: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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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5:38~41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5년 2월 6일 주일2부설교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원수를 극복하는 길”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남아프리카의 흑인 민권 운동가 넬슨 만델라는 백인정부의 핍박을 받아서 44세에 27년의 세월동안 종신징역을 받아 감옥에서 살았습니다. 젊음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살았으니 그 마음의 고통과 원한이 하늘에 사무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44세에 감옥에 들어가서 72세에 감옥에서 나와 76세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온 세계가 그를 주목했습니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가 당한 한풀이를 백인들에게 행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이 되자 곧 용서와 화해를 선언하고 흑백이 함께 어울려 사는 나라로 만드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가장 성공적으로 원한을 극복한 위인입니다. 원수에 대한 원한을 극복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주님이 명하신 원수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우리가 오늘 성경에 알아보고자 합니다.

[본론]
1. 원수를 갚지 말라

첫째로, 주님은 원수를 갚지 말라고 했었습니다.
로마서 12장 17절로 21절에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원수 갚는 것이 속이 시원하고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으로는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이므로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원수에게 선을 베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원수는 하나님이 갚으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원수 갚는 권리가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보다 앞서서 원수를 갚으면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32장 25절에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은 원수를 돌보아 주라는 것입니다.
잠언서 25장 21절로 22절에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원수에게 우리가 목마르면 마시고 배고플 때 먹이면 핀 숯불을 머리에 쌓아 두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 숯불이란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원수에게 선을 베풀면 베푼만큼 숯불을 그 원수의 머리위에 피워놓는 것이기 때문에 숯불을 머리에 이면 숯불이 타들어가지 않습니까? 반드시 하나님이 심판을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를 주릴 때 먹이고 목마를 때 마시우게 하면 하나님은 선을 베푼 사람에게 복을 내려 주겠다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1960년 당시 에콰도르의 아우카족은 너무 포악해서 아무도 그들에게 접근을 하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를 지원하는 사람들조차 아우카족에게는 가려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휘턴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어트가 보장된 교수직까지 버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아우카족에게 갔는데 얼마 있지 아니하여 그는 아우카족에 공격을 받아 산산히 찢겨서 죽었습니다. 그 시체를 후에 그를 찾아간 사람들이 발견했습니다. 본국에 홀로 남아있던 짐 엘리어트 부인은 그 소식을 듣고 1년간 간호사 훈련을 받은 후에 그 남편이 죽은 곳으로 선교사로 자원해서 나갔습니다. 자신도 남편처럼 그들을 위해서 생명을 받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우카족에게는 여자를 헤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부인이 와서 그들 가운데 움막을 짓고 사는데도 헤치지 않았습니다. 부인은 그곳에 사는 동안 늘 한결같이 병자들을 돌보며 헌신적으로 살았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추장이 하루는 그녀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굽니까? 무엇 때문에 우리를 위해 이렇게 애쓰고 수고합니까?” 그러자 부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5년 전에 당신들이 죽인 그 사람의 아내입니다. 당신들은 제 남편을 죽였지만 저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여러분을 섬기기 위해서 이곳에 와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추장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은 부족 전체에 전해져서 부족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 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그 부족은 모두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되고 말은 것입니다.
원수를 갚는 것은 우리의 권한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원수를 돌봄으로써 사랑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을 베풀어서 악을 이겨라. 우리 사람의 본성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주먹은 주먹으로 갚는 것이 본성이요. 그렇게 하면 속이 시원하고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선을 가지고 악을 압도해서 이겨버려라. 그래야 악의 고리를 꺽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계속해서 악이 그치지 않습니다. 미움을 미움으로 갚으면 미움이 끝이 없습니다. 주먹을 주먹으로 갚으면 끝없는 주먹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누군가는 악의 고리를 끊어야 되는 것입니다.
잠언서 17장 13절에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47년간 목회하면서 악을 가지고 선을 갚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많은 사랑을 받고 선함을 받았는데 오히려 악으로 갚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그 집안에 악이 떠나지 않아요. 사랑과 선을 악으로 갚으면 악이 그 집 대문을 떠나지 않아요.
잠언서 24장 17절에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은 도대체 원수를 원수로 갚지 말고 선으로 갚으라. 선으로 악을 압도하라. 원수갚는 것은 하나님의 권리요, 권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리요, 권한에 침범하지 말고 하나님께 다 내어 맡기라. 때가 이르면 하나님이 갚으신다고 했습니다.
시편 37편 1절로 2절에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
그런 일은 하나님이 하시지 우리 사람이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으로써 악을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중국의 유명한 복음 전도자였던 위치만 리가 젊은 시절에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하루는 그가 밤늦게까지 논에 물을 대놓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니 논에 물이 다 빠지고 없었습니다. 알아보니 아래 논 주인이 논두렁을 탁 잘라가지고서 자기 논에 댄 물을 다 뽑아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 논두렁을 메꾸고 물을 채워 놓았는데 그 다음날 또 가니 또 논두렁을 잘라서 물을 다 뽑아갔습니다. 분이 치솟아 올랐습니다. 그 다음 또 논두렁을 고쳐서 물을 대놓으니까 또 가니 또 논두렁을 잘라서 물을 다 뽑아가 버렸습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하니까 마음속에 아주 분논가 생겼습니다. 아래쪽 주인을 찾아가서 그는 항의를 했습니다. “내가 물을 애써서 퍼가지고 내 논에 채워놓은 것을 어떻게 당신은 수고도 아니하고 도랑을 잘라서 내 논에 물을 다 가져 가느냐? 그럴 수가 있느냐?”하고 항의하니까 그 사람이 잘못했다고 사과를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기도를 하는데 마음이 편치 않아요. 워치만 리는 아주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정정당당하게 항의했는데도 왜 내 마음에 평안이 없는가 하나님께 자꾸 기도하니까 “이 사람아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고 예수믿는 사람이 아닌가? 그러니까 자꾸 네 논에 물을 논두렁을 잘라서 물을 뽑아가거든 네가 네 논에 물을 대기 전에 그 사람 논에 먼저 물을 가득히 대어주고 난 다음에 네 논에 물을 대면 안그럴 것 아니냐? 네가 나의 일부터 먼저 생각하고 그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니까 원망이 생기지 않느냐? 그러니까 마음이 편치 않은 것 아니냐?” 그래서 “아이고, 하나님 알았습니다.” 그는 그 이튿날 아침 일찍 나가서 펌프를 가지고 열심히 물을 퍼서 아랫 논에 물을 찰랑찰랑하게 대주고 난 다음 그 다음에 자기 논에 물을 댓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밑에 논 주인이 자기 논두렁을 안자릅니다. 그런데 아랫논 사람이 점점 마음이 달라져서 상냥하게 인사도 하고 선물도 가져오고 하더니만 회개하고 온가족 전체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간증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악은 선으로 이겨야지 악을 악으로 갚으면 악이 자꾸 더 성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원수를 사랑하라고까지 했습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기도 힘든데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굉장히 힘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고 했는데 세상 사람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거역하고 배반하고 대적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침을 뱉고 머리를 흔들며 욕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축복을 해주었습니다. “하나님 저들이 알지 못해서 저러니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 주옵소서.” 도저히 인간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주를 구주로 모시고 주를 따라오는 사람에게 주님처럼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안돼요. 저는 매일같이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거기까지는 하기 쉬운데 그 다음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것같이 우리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이 말은 안나옵니다. 하나님 내게 죄지은 사람을 내가 용서해 주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그러니까 하루는 성령께서 말씀하기를 “십자가를 끌어안고 보라. 네 힘으로는 용서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사람이 어떻게 자기에게 죄 지은자, 상처 입힌 자를 용서해 줄 수 있느냐? 그러나 십자가를 끌어안고 보라.” 그래서 제가 십자가를 끌어안고 보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원수까지 용서해 주시고 나같은 죄 많은 사람을 용서해 주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끌어안고는 내 원수를 용서해 주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끌어안지 않고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데 십자가를 끌어안고는 주께서 나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러니 나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 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한 것처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십자가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는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왜,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로 48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러한 말씀들은 굉장히 읽으면 마음에 갈등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담의 자손으로써 너무나 자기중심으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내 길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나는 내 갈 길로 가고 내 길로 가겠다고 하고 살아왔는데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주님은 네 길로 가지 말고 이제는 내 길로 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길을 버리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 가려고 하니까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굉장한 갈등이 생깁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했습니다. 그건 왜냐, 야곱은 자기를 죽이러 오는 형들을 피해서 처자와 재산을 다 내버리고 달아나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자기 길입니다. 야곱의 길은 달아나려고 하는데 밤에 주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처자에게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강을 건너가서 돌아가라! 그것이 하나님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길로 도망치려고 하고 하나님은 돌아가서 처자와 함께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고 책임을 지라고 하나님 길로 가라니까 씨름이 붙었습니다. 야곱은 자기 길로 가려 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길로 가라고 서로 씨름이 붙어서 밤새도록 씨름했습니다. 아침이 될 때 하나님이 안되니까 환도뼈를 쳐버렸습니다. 절름발이가 되어서 쓰러지고 이제는 도망 칠수 없으니 그가 하나님께 항복하고 하나님 길로 가겠다고 복을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의 길로 간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여태까지 우리 길로 살았는데 하나님이 우리 길을 버리고 하나님 길로 가라고 하니 우리는 마음속에 갈등을 느낍니다. 주님과 씨름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점점 내 길을 버리게 되고 하나님의 길을 쫓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이것이 안 됩니다.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과 반드시 씨름을 하게 되고 많은 상처를 입고 환도뼈가 어그러지는 체험을 하면서 점점 내 길을 버리고 주님의 길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 여러분 그것은 내 길이 아닙니다. 내 길은 원수를 보복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갚는 것입니다. 원수를 짓밟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네 길로 가지 말고 내 길로 오너라. 내 길은 원수를 복 빌어 줘라! 축복해줘라! 선으로써 악을 이겨라!” 아마 이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그냥 뛰어 넘어가려고 한 사람 많을 것입니다. 너무 힘이 드니까.
누가복음 6장 27절로 28절에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아이고, 하나님 나는 못해요. 나는 예수는 믿어도 이것은 못해요.” 그것이 얍복강에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듯이 우리도 씨름해야 되는 것입니다. “못해요. 하나님!” 그러나 성경은 기록된 그대로 있습니다. “이것은 지워 주십시오. 하나님! 이 성경 이 페이지는 없애버려 주십시오. 내 마음에 도저히 맞지 않습니다.” 그래도 성경은 그대로 있어요. 그러면 “내 앞에서 이 말씀은 물리쳐 주십시오.” 성경은 물러가지 않습니다. 결국은 내가 물러가야 되고 내가 거꾸러져야 되고 내가 항복해야 되고 내가 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나의 길을 버리고 주의 길을 따라가는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왜 미국의 16대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이 그렇게 위대했습니까? 아브라함 링컨은 좋은 신자로써 그는 초등학교도 못나온 사람이지만 주님을 잘 믿고 살아오는 과정에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고생을 많이해서 그를 통해서 자기 길을 버리고 하나님 길을 따라가는 사람으로써 대통령이 된 것입니다. 시련과 고난없이 자기 길을 버리지 않습니다. 편안한 사람은 다 자기 길로 갑니다. 고난을 당할 때 자기 길을 버리고 하나님 길을 택하지요.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많은 삶의 시련을 통해서 이미 자기 길을 버린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길로 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에 입후보 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의 정적 중에 스텐턴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선거기간 내내 링컨을 중상모략하고 없는 말을 만들어 비방했습니다. 심지어는 링컨의 생김새를 문제삼아서 “저 원숭이 같이 생긴 새끼”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모욕을 당하고 짓밟힘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링컨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난 후에 스텐턴을 육군 장관이라는 요직에 임명했습니다. 링컨의 측근들은 그토록 링컨을 모함하던 스텐턴에게 육군장관이라는 중요한 자리를 내어준 것에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링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나의 강한 원수이기 때문에 보다 강한 사랑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비록 그가 내게는 원수일지라도 미국 국민에게는 원수가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남북전쟁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필요한 사람은 스텐턴같은 유능한 능력이 필요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개인적인 원수 된 감정은 극복해야 됩니다.” 이후 육군장관으로 임명된 스텐턴은 링컨 대통령에게 없어서는 안 될 충실한 장관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링컨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누구보다도 슬퍼했던 사람이 이 스텐턴이었습니다. 그는 링컨의 시신앞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별이 떨어졌다.”고 통곡했습니다. 만일 링컨 대통령이 원수를 그대로 미워했다면 그 두 사람은 영원한 원수가 되어서 서로 원한을 풀지 못한 채 무덤 속에 들어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악을 이기는 것은 오직 선입니다. 선만이 악의 고리를 꺾을 수 있지 악으로써 악의 고리는 꺾어지지 않습니다. 선으로써 악을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서양의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의 일이요,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사람의 일이요,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행동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것은 우리 길이 아니고 하나님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길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마귀가 하는 짓이고 보통 사람이 하는 짓인 것입니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 주님이 하는 일이고 주의 백성들이 바로 따라가야 할 길이 바로 그 길인 것입니다.

2. 원수로부터 공격을 당할 때
둘째로, 그러면 우리가 원수에게 공격을 당할 때 가만히 있으면 원수가 와서 우리를 다 물고 찢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우리 힘으로 갚지 않고 저항하지 않을 때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싸워주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원수를 갚겠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안 갚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원수를 갚습니다. 하나님께서 최후심판 때에 사탄과 그 사자들을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지지 않습니까? 마지막 심판 때에 주를 반역하고 거역하는 사람들을 모두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오랫동안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지 전혀 원수를 그대로 내버려 놓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리석게 원수를 갚을까 싶어서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이 갚을 테니까 우리가 하는 일은 선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공격당할 때 어떻게 할까요?
시편 91편 1절로 3절에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는 매일같이 이 성경을 외웁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시라 하리니 저가 나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라.” 매일 이 성경을 외웁니다. 왜,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에 평화를 누리고 원수를 갚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원수가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주께서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요셉의 마른 우물이 그의 무덤이 되지 않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양식을 가지고 갔는데 그 음식을 빼앗고 난 다음 형들은 달려들어서 “저놈의 꿈이 어떻게 되는가 보자”하고 잡아서 마른 우물에 던져 넣었습니다. 거기에서 굶주리고 목말라서 죽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형들이 원수가 되어서 요셉을 죽이려고 했으나 그러나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원수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형들은 요셉을 완전히 죽이기로 작정했고 그 광야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데 형들의 손에서 마른 우물에 던졌으니 그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원수의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왜? 요셉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요, 하나님 앞에서 꿈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미디안 상고들이 그 길을 지나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형들의 마음속에 욕심이 생겼어요. “저놈을 우물에 빠뜨려 죽이지 말고 미디안 상고에게 우리가 은20냥으로 팔아먹고 종으로 보내버리고 말자” 그 생각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집어 넣어준 생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마른 우물에서 끄집어내어서 은 20냥을 받고 종으로 애굽에 팔아버렸었습니다. 원수가 요셉을 죽이려고 했으나 원수의 마음대로 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배후에서 역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창세기 50장 20절에 먼 훗날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고 난 다음에 그 앞에 엎드린 형들을 보고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악을 선으로 바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같이 계신 것입니다. 운명을 바꾸는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배경으로 삼고 우리가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원수 마음대로 안 됩니다. 원수가 마음대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킬 수 있나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고 있는데. 여러분 항상 생각하십시오. 원수가 공격할 때 최악을 최선으로 비극을 희극으로 악을 선으로 바꾸는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갇혔을 때 그들은 절망이요, 애굽의 군대들은 이스라엘이 이제는 갈 길이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곧 최악의 경우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최선으로 바꿨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가고 홍해를 따라가다가 물이 덮여서 애굽 군대가 다 죽었습니다. 최악을 최선으로 바꾸는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리석게 그들의 힘으로 애굽의 바로와 초강대국 군사들과 싸우려고 했더라면 전멸 당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하나님께 의탁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이가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을 선물로 주지 아니하시겠는가. 하나님은 최악을 최선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느부갓네살의 분노의 풀무불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태우지 못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천하에 대왕이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도 떨어뜨려요. 그 권세 앞에 아무도 입을 열수 없었습니다. 생사여탈권이 그의 손에 있었습니다. 그가 두라평지에 금우상을 만들고 모든 문무백관을 다 불러서 그 상냥식에 절을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상냥식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유대에서 잡혀온 바벨론도의 장관들은 절을 안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왕이 분노해서 그들을 호령했습니다. “내가 다시 기회를 줄테니 내가 만든 우상에 음악이 연주될 때 절하라.” 그들은 “우리는 절대로 절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일곱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내 주실 것이다. 또 건져내지 않을지라도 절 안합니다.”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분해 벌벌떨면서 풀무불을 일곱 배나 더 뜨겁게 하라 했습니다. 얼마나 불이 뜨거웠던지 풀무불을 지피는 군인들이 타죽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불풀무에 던져 넣었는데 보니까 저 네번째 사람이 와서 함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묶였던 모든 밧줄을 탔지만 그들은 옷도 머리카락도 타지 않았어요. 느부갓네살이 너무 놀라서 “하나님의 종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여 불에서 나와라” 나와서 보니까 불탄 냄새도 안 나고 흔적도 없었습니다. 그때 왕이 고백했습니다.
다니엘서 3장 28절에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그 울분을 품은 왕조차 무릎을 꿇었습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나님이 정말 멋있게 원수를 갚았던 것입니다. 느부갓네살같은 포악한 왕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만군의 하나님을 경배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파사왕 다리오 때 사자굴 속에 던져진 다니엘을 압니다. 다니엘은 국무총리였는데 그의 동료들이 시기해서 다니엘을 모함해 가지고 사자굴에 던졌습니다. 다니엘은 죄 없이 사자굴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다니엘을 굶주린 사자굴 속에 던져 넣었으니 다니엘은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한밤이 지나고 난 다음 이른 새벽에 다리오왕이 사자굴 앞에 와서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희가 항상 섬기던 하나님이 너를 지켜 주었더냐?” 그러니까 안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다니엘서 6장 22절로 23절에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하였습니다.
원수가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죽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기회가 더 승급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풀무불 사건 이후에 그 계급이 높아졌어요. 다니엘은 파사에서 임금 다음가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여러분 원수 갚는 것이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갚는데 하나님이 갚으실 때는 멋있게 갚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처럼 피투성이로 갚으시지 않습니다. 멋있게 원수를 굴복시키시고 영광을 더하는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4절로 8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하고 원수에게 선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선을 베풂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고 선을 베풀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원수에게 보복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갚고 피투성이가 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주시는 조건도 없고 하나님이 원수에게 보복할 수 있는 조건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선을 베푸니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에게 복을 줄 수 있는 조건이 되지 않습니까? 또 우리가 원수에게서 복을 베풀고 선을 베푸는데도 원수가 계속 대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수를 심판할 수 있는 조건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주무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무책임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값비싸게 우리를 샀습니까? 그 아들을 주시고 우리를 샀습니다. 그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우리 값 주고 샀는데 보통 우리가 귀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하나님이 던져 버릴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독립 운동가였던 로버트 브루스는 참으로 신앙이 좋은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코틀랜드가 영국에서 독립하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영국 군인들이 그를 끊임없이 죽이려고 따라 다녔습니다. 하루는 그가 정적들에게 쫓겨서 달아나다가 너무 급한 나머지 산속에 작은 동굴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는 동굴 벽에 몸을 붙이고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피할 곳이 없습니다. 뒤에 내 원수들이 따라 오는데 나는 동굴 속에 들어와서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지켜 주십시오.” 그런데 조금 후 그를 쫓던 사람들이 발자국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들은 동굴 앞에 멈춰 서더니 서로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설마 여기 숨지는 않았겠지?” “아니야~ 들어가 보자!” “사람이 여기 들어간 흔적이 없잖아.” “어떻게 알아?” “하긴 여기 숨어있으면 입구가 이렇게 거미줄이 쳐있을 리가 없지.” 그러면서 산을 내려가 버렸습니다. 꼼짝없이 잡혔다고 생각하던 로버트는 산을 내려가는 그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동굴 입구로 나와 보니 순간적으로 하나님이 수백 마리의 거미를 보내셔서 동굴 앞에 거미줄을 쳐버렸습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지 않습니까? 들어갈 때 거미줄이 없었는데 수백 마리의 거미를 예비하신 하나님이 순식간에 거미줄을 동굴 입구에 쳐놓으니까 원수들이 와서 보니 거미줄이 잔뜩 쳐있는데 거기에 숨을 리가 만무하잖아요. 그래서 목숨을 건졌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은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하나님의 성호는 야웨 이레라고 했습니다. 야웨 이레는 하나님이 미리 아시는 고로 예비하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예비해 놓은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함과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상상을 초월해서 야웨 이레 하나님은 미리 아신고로 미리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군대를 의뢰하는 것보다 낫고 마병을 의뢰하는 것보다 나은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원수에게 공격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신비한 방법으로 자녀를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3. 원수가 오면 복도 온다
그리고 셋째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원수가 오면 복이 굴러 온다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5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자 원수의 목전에 있어요. 원수가 없는데는 상도 안 베풀어 주지요. 원수의 목전이라고 했습니다. 원수의 눈뜨고 뻔히 보는 앞에서 하나님이 무슨 상주는 것이 상이 아니고 진수성찬 먹는 진수성찬을 차려 주시고 기름으로 머리에 발라 잔이 넘치게 해주는 것입니다. 원수가 오지 아니하면 밥상도 없어요. 원수가 오면 밥상을 차려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바로가 보는 앞에서 광야에서 하나님이 밥상을 차렸습니다. 바로는 생각하기를 “아~ 저들이 홍해는 건넜지만은 광막한 광야에 들어갔으니 물도 없고 양식도 없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하니 스스로 다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바라보는 그 앞에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진수성찬 차렸습니다.
시편 105편 39절로 41절에 “여호와께서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낮에는 광야에서 너무나 뜨거우니까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는 추우니까 불로써 밝히고 훈훈하게 해주시고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로 오게 하시며 또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도다 반석을 가르신 즉 물이 흘러나서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
바로의 눈앞에서 바로는 그들이 광야로 갔으니 낮에는 너무나 뜨겁고 밤에는 너무나 추우니 타죽고 얼어 죽고 굶어죽을 줄 알았는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구름덮개로 덮어주시고 밤에는 뜨끈뜨끈한 화염이 일어나서 훈훈하게 만들어 주시고 메추라기를 보내어 먹게 하시고 만나를 보내어서 양식을 삼아 주시고 바위를 터져서 물이 나오게 하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진수성찬을 차리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대개 하나님은 변역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광야생활을 한다고 안 믿는 사람들이 저 사람은 이제는 예수 믿고 저렇게 살다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안 죽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진수성찬을 차려주시는 것입니다. 원수가 오지 아니하면 진수성찬을 안 차리지만 원수의 기대를 충족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수성찬을 차려 주시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시는 것입니다. 기름이란 무엇입니까? 기름을 바르면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삼손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사사기 14장 6절에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으나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고”다고 했습니다. 사자가 덤비니까 염소 새끼 잡듯이 쫙 찢어 버렸습니다. 기름 부으심이란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원수가 오면 원수를 대적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기름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셔서 능력을 더하여 주신다. 그리고 기름 부으심이란 것은 기쁨입니다. 기름부음이 오면 마음에 기쁨이 넘칩니다. 원수가 오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고 좌절하고 우울할 줄 알았는데 원수 앞에 성령의 기름을 부어서 마음이 기쁨에 들뜨게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1장 3절에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기름을 부으면 희락이 와요. 성령의 기름을 부으면 마음이 기뻐지지 않아요?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큰 힘이 마음의 힘입니다. 마음에 힘을 잃어버리면 육체가 아무리 건강한 장사라도 쓰러지고 말아요. 엘리야가 낙심하니까 로뎀나무 밑에서 이제는 넉넉하니 죽여달라고 했었습니다. 마음에 힘은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기도할 때 “하나님! 내 마음에 성령으로 기름부어서 기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뻐야 주부도 행복하게 가정 일을 돌볼 수 있고 기뻐야 남편도 가장도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일할 수 있고 기쁨이 있어야 자녀들도 건강하고 잘 자라고 공부도 잘합니다. 마음에 기쁨은 우리에게 굉장한 보화인 것입니다. 돈 많다고 기뻐지는 것이 아니에요. 지위가 높아졌다고 기뻐하는 것도 아니에요. 돈 많은 부자도 자살하잖아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도 자살하잖아요. 하나님의 성령이 오시면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해야 돼요.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 너희가 없는 것은 구하지 아니함이라. 오늘날 사람들이 영혼의 기쁨을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영혼에 복을 주소서. 기쁘게 하여 주옵소서. 야곱이 얍복나루터에서 환도뼈가 어그러졌을 때 하나님의 사자를 붙잡고 내게 복을 주시옵소서. 내게 복을 주지 아니하면 당신을 놓지 않겠나이다. 얼마나 붙잡고 부르짖었든지 하나님이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야곱은 사기꾼, 내 길로 가는 사람.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나님과 다투고 이긴 자란 뜻이다” 얼마나 부르짖었든지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안 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나 손들었다. 손들었다. 복주겠다. 너는 이스라엘 하나님과 다투어서 이긴 자다.” 우리에게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복을 달라고 부르짖어야 되는 것입니다. 복은 달라고 해야 주지 안달라고 하는데 복주는 사람 봤어요? 복 달라는 것은 절대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은 복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어요? 우리 영혼에 큰 복이 제일 큰 복입니다. 마음에 기쁨과 평안, 마음에 사랑 이러한 마음에 넘치는 복이 있으면 여러분 어떠한 역경도 이겨나갈 수가 있어요. 기쁨과 평안과 사랑과 같은 마음에 넘치는 복이 있으면 가정도 잘 꾸려 나갈 수 있고 사업도 잘할 수 있습니다. 매일같이 하나님이여 내 영혼에 복을 주시옵소서. 내 영혼에 기름을 부어서 희락의 기쁨으로 넘치게 채워 주시옵소서.
시편 30편 11절에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상속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상속이에요. 안 믿는 사람은 기쁨을 고할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어요? 술 먹고 아편, 담배, 육체적인 향락 이러한 것은 여러분 순식간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분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주신다. 원수들이 와서 우리를 두렵게 하고 좌절하게 하고 낙심하려고 하는데 원수 앞에서 기쁨이 넘쳐난다. 그래서 힘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생기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잔이 넘치게 한다. 잔이 넘친다는 것은 만족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잔이 조금밖에 안 찬 것, 잔이 찰랑찰랑하는 것이 아니고 넘쳐나니까 만족하고 나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이웃과 나눕니까? 절망적인 사람이 예수믿고 소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용서와 의와 영광으로 옷 입고 거룩함과 성령충만으로 옷 입고 치료와 건강으로 옷 입고 아브라함의 축복과 형통으로 옷 입고 부활과 영생과 축복으로 옷 입고 나니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고 성공을 얻었으므로 이 잔이 넘치므로 이것을 이웃과 나눠야 된다는 것입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사람하고 우리가 잔이 넘치니까 나누는 것입니다. 이웃과 나누고 자연과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나누는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잔을 넘치게 주시므로 나누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원수 앞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잔이 넘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16절에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잔이 넘치는 것은 만족한 삶인데 그 만족한 삶 중에 하나가 장수하게 해서 만족케 해주시고 시편 103편 5절에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좋은 것을 주어서 만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북한을 머리에 이고 살았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대를 이어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했습니다. 우리 한국에 정치, 경제, 교육, 문화, 군사, 산업 모든 것이 북한과의 연결 속에서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어찌할 수 없이 우리 삶 전체가 북한과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이 문제를 가지고 보수와 진보가 갈라지고 사회갈등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믿는 사람이 볼 때는 북한이 원수가 되어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킬려고 노력을 했지만 우리 한국에 5만 교회, 10만주의 종, 1,200만 성도가 있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기 때문에 주님이 그 백성들을 위해서 원수 앞에서 진수성찬을 차려 준 것입니다. 우리가 뭐 잘난 것 있습니까? 정치를 잘했습니까? 우리가 사업을 잘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에서 88올림픽도 하고 세계박람회도 하고 하나님이 축복을 해주셔서 우리의 국민소득이 순식간에 만 불이 넘게 되고 IMF당해도 그것을 극복하고 나오게 되고 어떠한 시련도 극복하게 됩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하나님이 진수성찬 차리시고 기름으로 머리에 발라서 능력 있게 해서 세계에서 12대 무역대국이 되고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기쁨을 넘치게 주고 소망을 채워 주십니다. 이런 역사를 베풀어 주고 만족함을 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아무것도 안돼요.
마태복음 5장 38절로 41절에 보면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저는 오랫동안 이 말씀이 싫었어요. 이 성경구절이 나오면 얼른 뛰어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성자들이나 주님이나 하실 일이지 나 같은 별 볼일 없는 신자는 이런 것을 못 견딘다.” 그러나 늘 이 말씀이 마음속에 걸렸습니다. 늘 걸렸어요.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크고 작은 원수와 안 부딪힐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 말씀이 마음에 거슬리는 것입니다. 눈은 눈으로 갚으면 좋고 이는 이로 갚으면 좋고 주먹은 주먹으로 갚으면 좋겠는데 주님은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고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주고 송사를 그치고. 억지로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까지 가고. 양보의 미덕을 쌓으라. 그래서 저는 늘 말했습니다. 너무나 무력하고 패배주의같은 이 말씀을 보고 “주님 이런 패배주의로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 이것은 완전히 패배주의고 인생을 무기력하게 사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는 못살아요. 이렇게는 못살아요.” 그러나 주님이 하신 말씀이 “십자가에 달린 나를 보라. 얼마나 무기력하고 패배주의 같으냐? 모든 원수들이 고함을 치고 박수를 치고 발바닥을 구르고 손바닥을 치고 이제 우리 원수를 죽였다. 나는 하늘과 땅을 지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면서 십자가에 축 늘어져서 몸 찢고 피 흘려 죽었다. 무기력하고 패배한 것 같지만 사흘 만에 부활해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고 말았다. 내 말 한마디에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흔들린다.” 우리는 무기력한 것 같지만 우리를 다시 생기로 넘치게 채워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원수가 오른뺨을 치고 나도 왼쪽 뺨을 때리면 하나님이 할 일이 없어지잖아요. 나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는 자에게 겉옷 움켜쥐고 속옷도 도로 빼앗고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안가고 오리도 안가겠다고 하면 하나님이 그곳에 개입할 곳이 없잖아요. 우리가 오른뺨 맞고 왼뺨을 돌려대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할 말이 생기는 것입니다. 속옷을 빼앗을 때 겉옷까지 주고 나면 하나님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나요. 오리를 가자할 때 십리까지 내가 가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개입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봐라! 내 백성 내 자녀 보아라! 네가 오른뺨을 치니 왼뺨도 돌려대지 않았느냐 겉옷을 달라 하는데 속옷을 달라고 하는데 겉옷도 주고 오리를 가자고 했는데 십리가지 않느냐? 그러므로 내가 내 백성에게 복을 주는 것이 마땅하고 내가 내 백성을 대신해서 너에게 벌을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하나님이 간섭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결론]
그렇기 때문에 우리 예수 그리스도 믿는 신앙은 패배주의가 아닙니다. 무기력자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더 큰 행보를 하므로 말미암아 인생에 하나님이 와서 개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닫고 보면 진정으로 원수를 극복하고 승리하며 사는 삶이 바로 이 길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 길로 살 것이냐, 하나님의 길을 걸어갈 것이냐, 하나님의 길을 택하면 하나님이 같이 계시고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하나님이 손잡고 함께 행할 수 있는 하나님에게 공간을 마련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으니 하나님께 맡기고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고 헐벗으면 입혀주고 원수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악을 선으로 갚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인생을 살아갈 동안에 사람의 길이 있고 하나님의 길이 있사옵니다. 우리는 다 사람의 길로 살도록 훈련되어 있고 그곳에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오신 이후로부터 우니는 하나님의 길을 제시 받음으로 마음에 갈등을 가지고 몸부림을 칩니다. 야곱처럼 씨름을 합니다. 아버지 사람의 길을 가고자 하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길을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처럼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주먹은 주먹으로 갚으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사랑으로 보답하라고 말합니다. 우리 아버지여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받아 들이게 도와 주시옵소서. 인간의 길, 사람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 들여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이 되게 만들어 주시옵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싸우게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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