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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과 고난의 비빔밥

예레미야 나무............... 조회 수 3105 추천 수 0 2009.06.15 23:4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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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렘48:11~12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5년 2월 27일 주일3부설교 
“모압은 예로부터 평안하고 포로도 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치 술의 그 찌끼 위에 있고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지 않음 같아서 그 맛이 남아 있고 냄새가 변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그 그릇을 기울일 자를 보낼 것이라 그들이 기울여서 그 그릇을 비게 하고 그 병들을 부수리니”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축복과 고난의 비빔밥’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복음을 증거하는데 일본 목사님 한분이 제게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일본 사람은 밥과 반찬을 비벼서 절대로 먹지 않는데 왜 한국 사람은 밥과 반찬을 비벼서 비빔밥으로 만들어 먹습니까?” 저도 알리가 있나요? 그래서 제가 임기응변으로 대답을 만들어 냈습니다. “아~ 일본은 섬나라여서 역사상 외부의 침략을 받지 않았지만 한국은 반도로써 5천년 역사 중에 대륙에서 5천번 이상의 침략을 당하고 또 일본으로부터 왜구의 침략을 끊임없이 받아서 밥 먹고 반찬 먹을 시간이 없다. 끊임없이 침략에 대해서 대응해야 되고 일해야 되기 때문에 아예 밥에다가 반찬을 섞어서 쓱쓱 비벼서 먹으면 시간도 빨리 먹게 되고 맛도 있다.”고 그렇게 말을 하고 난 다음에 답은 그렇게 했지만 나로서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신앙은 진짜로 하나님께서 축복과 고난의 비빔밥을 먹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본론]
1. 평안하면 찌끼가 끼게 된다

왜냐하면 첫째로, 우리가 너무나 평안하면 찌끼가 끼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물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호수에 가보십시오. 굉장히 이끼가 많이 자라 있습니다. 그러나 출렁이는 바닷가에 가면 결코 이끼가 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옛날에 포도주를 만들 때 큰 통에 포도를 따놓고 발을 씻고 들어가서 막 포도를 짓밟지 않습니까? 포도가 터지기 때문에 포도즙 속에 껍질인 찌끼가 섞여 있지요. 그것을 가만히 잠재워 두면 찌끼는 가라앉고 포도주스는 뜨니까 그걸 다른 그릇에 붓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잠재우고 난 다음 또 다른 것을 더 붓고 이것을 계속하면 나중에 맑고 향기롭고 맛있는 포도주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이 그것을 예로 들어서 모압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모압이란 이스라엘 변경에 있는 나라입니다.그런데 모압은 옛날부터 평안하고 포로도 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치 포도주가 찌끼가 낀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또 저 그릇에서 이 그릇으로 자꾸 부어야 찌끼가 사라지고 냄새가 나지 않고 향기롭게 되는데 “모압은 예로부터 평안하고 포로도 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치 술의 그 찌끼 위에 있고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지 않음 같아서 그 맛이 남아 있고 냄새가 변치 아니하였도다” 그냥 내버려 두니까 모압이란 나라는 옛 습관과 전통에 안주해 있고 그 옛 맛이 남아있고 냄새가 변하지 않고 부패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압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침략을 당하고 고난이 오도록 만들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로 들어서 우리 신앙생활에 적응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모압처럼 편안하고 안이하게 있으면 신앙에 찌끼가 낍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어떤 찌끼가 끼느냐. 영적인 삶에 대한 무관심의 찌끼가 낍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도 아니하고 부귀, 영화, 공명이 그대로 있으면 영적인 생활에 찌끼가 끼어서 영적인 생활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생활에 무관심합니다. 기도에 무관심하고 말씀 읽는 것도 무관심하고 회개하고 전도하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무관심하게 되어 버리고 신앙에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고 했습니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웠는데 세상에 취해가지고서 방탕하고 술 취하고 세상만 추구하다가 영적생활에 무관심한 생활 속에 살다가 갑자기 주님이 오시면 심판을 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에 대한 무관심은 우리의 신앙의 날개를 꺽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뉴질랜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옮길 때 그 한 부분을 남긴 것이 뉴질랜드라고 말합니다. 그 뉴질랜드에는 사나운 짐승이 없어요. 사자도 범도 이리도 사나운 짐승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뉴질랜드만은 양을 칠 때 목자가 없습니다. 그냥 산과 들에 내버려 놓으면 양이 스스로 먹고 자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뉴질랜드에는 희한하게 큰 뜸부기나 키위 등 날지 못하는 새가 다섯 종류나 있습니다. 새는 새인데 날개도 근사하게 달렸고 색깔도 좋은 새가 날지를 못하고 나무 가지에 기어 올라가고 땅에서 걸어만 다닙니다. 왜 그러느냐, 생명을 위협하는 짐승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우도 족제비도 사자도 곰도 없기 때문에 생명을 위협하지 아니하므로 날아야 할 필요가 없어요. 알에서 깨어난 이후로 난 적이 없습니다. 걸어만 다니니까 그만 날개가 퇴화해져서 날지를 못합니다. 또 날려고 생각도 안하는 것입니다. 나는데 무관심합니다. 무엇 때문에 나느냐, 날 필요가 없는데. 서서히 다니면서 먹이만 찾고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꼭 그와 같은 것입니다. 너무 평안을 계속하면 영적인 날개가 퇴화되어 버리고 기도도 말씀 읽는 것도 전도도 복음사업도 다 하지 않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관심의 찌끼가 낍니다.
또 평안이 계속되면 게으름의 찌끼가 낍니다.
누가복음 21장 36절에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다면 영적으로 부지런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41절에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고 주님이 탄식하셨습니다.
잠언서 19장 15절에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고난 당할 때는 아침 새벽 일찍 일어나서 새벽기도도 나오고 철야도 하고 혹은 금식도 하고 기도원에도 가지만 편안해지면 게으름의 찌끼가 끼어서 그 다음에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괴로워서 새벽기도를 그만둡니다. 철야, 그것은 옛날에나 하는 이야기지 이제는 안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회에도 가지 않습니다. 게으름이 들어와서 영적으로 그만 굶주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전 미국 플로리다주의 한 해변에서 있었던 이상한 일입니다. 그 해변에 그 많던 갈매기들이 굶어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왜 갈매기가 굶어 죽었을까? 해변에 잔잔한 물고기도 많고 얼마든지 물고기를 잡아먹을 수 있는데 왜 갈매기들이 굶어 죽었는지 조사를 했습니다. 그 해변은 조그마한 어촌 항구로써 많은 새우잡이 배들이 그곳에 와서 그물을 털고 그물에 끼어있는 새우들을 흐트려 놓고 그물을 깁고 그리고 새우잡이를 나갔습니다. 그러므로 그 수많은 갈매기들이 그물에서 떨어진 새우를 공짜로 주워 먹었기 때문에 고기 잡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고깃배가 들어와서 그물에서 떨어뜨리는 새우를 잡아먹었는데 얼마 후 기후의 변화로 해류가 달라져서 새우가 남쪽으로 몰려갔으므로 배들이 전부 남쪽으로 옮겨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항구에는 더 이상 새우잡이 배가 오지 않고 새우잡이 그물이 그곳에서 털어지지 않기 때문에 공짜 새우가 더 이상 생기지 않았습니다. 늘 공짜로 주워먹고 게으르던 이 갈매기들이 거기에 습관이 되어가지고서 새우가 생기지 않으니까 이제는 먹을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물에는 작은 물고기들이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게을러서 물고기를 잡아먹지 않고 차라리 자살해 버리자. 굶어서 떼를 지어 갈매기들을 죽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게으름이란 이렇게 무섭습니다. 눈앞에 물고기가 있어도 게으름에 연달되었으니까 더 이상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너무 평안하면 게으름의 찌끼가 들어와서 더 이상 성경 읽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려고 하지 않아요. 교회도 겨우 일주일에 한번 오다가 말다가 그것도 집어 치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게으름이란 무서운 찌끼가 끼게 되는 것입니다. 평안이 계속되면 참으로 여러 가지 더러운 찌끼들이 많이 끼어요. 안셀무스는 말하기를 ‘태만은 살아있는 사람의 무덤’이라고 말했습니다. 태만이 들어오면 탐욕의 찌끼도 낍니다. 편안하면 탐욕이 들어옵니다. 부지런히 일하면 탐욕이 들어올 시간이 없습니다. 게으른 마음은 마귀의 공장이라고 말했습니다. 게으르기 때문에 편안하기 때문에 마귀가 들어와서 탐욕을 가져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타락했습니까? 생활이 어렵고 고통스러워서 타락했나요? 하나님이 에덴 낙원을 지으시고 먹을 것도 있을 곳도 너무나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까지 할 일이 없습니다. 게을렀습니다. 그래서 마귀의 말을 듣고 탐욕이 마음속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게으른 마음속에 탐욕이 들어오지 부지런히 일하는 마음속에 탐욕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얼토당토 안하게 사람인 그가 하나님이 되려고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4절로 15절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했었습니다.
또한 평안하면 교만의 찌끼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언제나 상대에 경쟁자가 없이 내가 편안하게 살 때 교만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100미터 학교 대표선수였습니다. 항상 100미터는 제가 일등을 했습니다. 중등학교 들어와서는 800미터 학교 대표선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코치가 제게 하던 말이 있습니다. “임마! 너 잘 뛴다고 교만하지 말아라!” “제가 교만 안했는데요.” “교만한 것은 네가 뛰다가 뒤를 돌아보는 것이다. 앞에 다른 사람이 뛰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발꿈치를 보고 열심히 따라가지만 너는 앞서서 뛰다가 뒤에 따라 오는 사람이 없으니까 교만해져 가지고서 얼마나 따라왔는가 보려고 뒤를 돌아본다. 한번 뒤를 돌아보는데 3,4초 시간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면 뒤에 사람이 너를 제키고 앞에 나가게 된다. 그러므로 뒤를 돌아보지 말아라. 너는 1등으로 달리면 교만해져서 자꾸 뒤를 돌아본다.” 그런 말을 자꾸 하는 것이 지금도 마음속에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교만하면 패합니다.
성경에 잠언서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했습니다.
호세아 13장 6절에 “저희가 먹이운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며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
배가 불러지니까 하나님 찾는 것을 그만두고 하나님을 잊어 버렸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평안하면 교만의 찌끼가 끼게 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 평안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세상 쾌락의 찌끼인 것입니다.
편안하면 음탕하게 되고 술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에게 어찌 음탕한 마음이 들어오며 술 취하고 방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부하고 귀하게 되면 술 취하게 되고 음탕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계속적인 평안에 좋지 않은 것입니다. 미국에 저의 좋은 친구가 있는데 딸만 셋이 있어요. 과년한 딸이 있는데 저보고 하루 이런 말을 합니다. “조목사는 딸이 없기 때문에 나처럼 이런 걱정이 없지만 나는 딸이 셋이고 이제 시집갈 날이 다가왔기 때문에 걱정이 많다.”고 합니다. “무슨 걱정이 있느냐? 좋은 신랑감 택해서 시집보내면 될 것 아니냐?” 그러니까 “그런말 하지 말아라. 나도 알다시피 조목사도 알다시피 똑똑하고 눈알이 바로 박히고 성공한 신랑감을 얻어 놓으면 얼마 있지 아니하여 나중에 바람피운다. 우리 딸의 가슴에 못을 박게 된다. 그러나 눈알이 헬렐레하고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놈을 신랑으로 삼으면 우리 딸에게 짐이 된다. 똑똑한 놈은 바람피울까 겁이 나고 못난 놈은 우리 딸에게 짐이 될까 겁이고 그러니 중간쯤 되는 신랑감을 찾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고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이야기 했지만 저의 마음속에 그 말이 늘 기억이 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편안해지고 영적생활을 추구하지 아니하면 육체의 일이 현저하게 나타납니다. 육체의 일은 틀림없이 술취하고 방탕하고 음란하고 호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안이라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무렵 하루는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을 전멸시키기 위한 작전에 대해서 부하들로부터 보고를 받았는데 부하 귀신 한 놈이 와서 마르틴 루터가 꿈에 볼 때 사탄에게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대장님! 저는 성도들을 사막을 걸어가게 했습니다. 삶이 사막처럼 어려운 그러한 환경을 만들어 놓고 사자를 보내어서 그들을 물고 찢게 만들었는데 한결같이 더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고 더 열심을 내어서 실패했습니다. 둘째 귀신이 와서 저는 성도들로 하여금 인생에 큰 풍랑을 만나게 했습니다. 배가 파산할 정도로 위기에 처해 있는데 그럴수록 더 고함을 쳐 기도하고 노래하고 인생의 암초에 부딪혔을 때 더 그들은 주님을 열심히 찾는 것을 보고 실패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 세 번째 귀신이 ”허허~“ 웃으면서 ”대장님! 저는 한 10년 동안 무풍지대로 만들었습니다. 모든 일이 잘되고 시험을 당하지 않게 내가 솔선수범해서 막아서 잘 먹고 잘 입고 편안하게 살도록 만들었더니 열에 열명 다 세속적인 사람이 되고 육체의 향락을 따라 나가서 타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보고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축복만 계속되면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복에는 그대로 계속하고 편안하게만 하면은 삶의 찌끼가 반드시 낀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2. 고난은 변화를 가져온다
그러면 둘째로,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좋은 술을 만들기 위해서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자꾸 가라고 하면서 부어야 된다고 했는데 가라고 하면서 붓는 것이 고난인 것입니다.
고난은 찌끼를 없애고 냄새를 없애고 향기롭게 만듭니다. 고난은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고난 당하면 회개하게 되요. 편안할 때 누가 회개합니까? 고통스러우면 누구든지 회개하게 되죠. 탕자를 보십시오. 아버지의 돈을 받아서 큰 재산가가 되어서 먼 나라에 갔을 때 얼마나 허랑방탕했습니까? 돈이 있을 동안에는 많은 친구들과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고 호위호식하고 허랑방탕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 큰 기근이 오고 있는 돈이 다 떨어지고 빈손 들게 되었을 때 그가 직장을 구했는데 시골에 가서 돼지를 치는 직장을 구했습니다. 돼지를 치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 돼지 쥐엄열매를 먹으려고 하다가 돼지에게 물려서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고통과 괴로움이 엄습하자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 아버지 집에는 먹을 양식이 풍족하고 종들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굶어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이렇게 해야 되겠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하나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이제는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그렇게 하고 돌아가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탕자가 부귀, 영화, 공명이 있을 때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 자랑을 따라 살았지만 고난이 다가오자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호세아 5장 15절로 6장 1절에 보면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허랑방탕할 때 주님이 얼굴을 감추고 숨어 있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고난을 당하여서 괴로울 때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찾고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은 도와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우리를 회개시키는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존 번연은 말하기를 “시험과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틴루터는 말하기를 “시련이 없고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가 가장 위험한 시련이다. 왜냐하면 그때 인간은 하나님을 망각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시련을 주시기 않을 때는 열 가지 시련을 받을 때 보다 더 두려워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시련을 당하면 사람들이 긴장하고 열심을 내지만 시련없이 평안하면 긴장을 놓아 버리고 게을러지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고난당하면 반성하게 됩니다. 세상과 탐욕을 벗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세상을 따라가고 탐욕을 따라 가다가도 고난이 심히 다가와서 고통을 당하면 탐욕과 세상을 벗어 버리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고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107절에 “나의 고난이 막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베드로전서 4장 2절에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이 고난당할 때 옛 습관을 벗어 버리고 새로워지라는 것입니다. 삶의 캄캄한 터널을 지날 때 사람은 변화 받는 것입니다. 평안하고 좋을 때 변화 받지 않습니다. 삶의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변화를 받고 새사람이 되어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은 우리를 반성시키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고난 받을 때 깨어집니다. 그릇은 깨어지면 못쓰지만 사람은 깨어져야 쓰이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에 서고 자기 고집대로 살고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사람도 설수 없고 하나님도 설수 없습니다. 세상에 깨어져야 사람은 사람답게 살수 있습니다. 깨어진 남편, 깨어진 아내, 깨어진 자녀, 깨어진 이웃과 함께 살면 서로 이해하고 동정하고 인내하고 사랑하며 양보하고 살수 있습니다. 깨어지지 아니하면 자기중심으로 살고 자기 고집으로 살지요. 고난이 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호도를 어떻게 깹니까? 망치로 때려야 깨지지 않습니까? 호도를 그냥 손으로 비벼서는 깨지지 않습니다. 호도처럼 딱딱한 우리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고난의 망치로 때려야 되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워야 우리가 깨어져서 주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요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원수의 나라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니까 하나님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배 밑창에 들어가서 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심한 폭풍우를 보내어 사공들이 모두다 벌벌 떨고 누구 때문에 이 고난이 다가왔는가 찾아보니 요나 때문에 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도 요나는 그 폭풍에도 회개하지 않고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한 것입니다. 요나를 바다에 던지니까 물고기가 마셔 버렸는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도 하루 동안 회개 안했습니다. 버텼습니다. 이틀 동안 물고기 뱃속에서 고난당해도 버텼습니다. 사흘째도 물고기 뱃속에서 버티고 있는데 하나님이 죽도록 허락안하니까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도 소화가 안 됩니다. 생각해보니 자기가 영원히 물고기 뱃속에 있어야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난당하니 깨어져서 그때야 하나님께 회개하고 자복하고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물고기가 요나를 토해내게 하고 다시 하나님이 사명을 다하게 만든 것입니다.
시편 119편 67절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히브리서 5장 8절로 9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저는 저의 47년간의 목회 생활을 돌아볼 때 제게 가장 큰 유익이 된 때가 고난당할 때였습니다. 평안할 때는 그냥 즐기고 할렐루야하고 지냈지만 고난 당할 때는 내 스스로를 살펴보고 회개하고 통회하고 자복하고 부르짖고 주님을 찾기 시작하므로 영적으로 자라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게 되고 신앙이 성숙하게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우리의 삶에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고난을 받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면 파멸 당합니다. 요사이 유명한 배우도 실업가들도 자살하는 것 보았지요. 인생에 꿈과 소망을 잃어버리면 스스로 절망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믿던 사람은 고난당하면 자멸하거나 스스로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고난이 하나님을 찾아 부르짖게 만듭니다.
시편 50편 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편 64편 1절에 “하나님이여 나의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시편 119편 153절에 “나의 고난을 보시고 나를 건지소서 내가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사람이 얼음 속에 빠지면 춥지 않습니까? 사람이 고난당하면 자기를 건져줄 자가 하나님 밖에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요. 그리고 고난 당할 때에 신앙의 열심을 더 찾게 됩니다. 그렇게 뜨겁게 주를 잘 믿고 섬기던 사람도 생활이 축복을 받고 편안해 지면 신앙이 미지근해지고 그 다음 점점 세상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축복을 받을수록 뜨거워지면 좋겠는데 축복을 받을수록 신앙이 식어져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6.25사변 이후로 한국교회가 얼마나 뜨거웠습니까? 한국성도들이 세계 처음으로 새벽기도 열심히 했습니다. 새벽 4시 반에 다 모여서 부르짖어 기도하고 세계에서 처음으로 철야기도를 매주간마다 하고 산 기도를 하는 것은 한국교회가 처음입니다. 산에 기도처를 세워서 올라가서 금식하고 부르짖으며 얼마나 열심을 내었습니까?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복 내려 주시고 한국성도들을 축복해 주시고 동시에 한국에도 복을 주셔서 이제 잘 먹고 잘 입고 잘살고 편안하게 되니까 한국교회가 게을러지고 말은 것입니다. 그 뜨겁던 새벽기도, 철야기도, 산기도가 점점점 형식화되어 가고 한국교회가 제자리 걸음을 하고 더 발전하지 않습니다. 신앙에 열심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열심을 되찾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열심을 내게 하는 방법으로 둘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을 부어 주셔서 열심을 내게 하고 다른 하나는 핍박을 가해서 주님께 부르짖게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핍박을 당하기 전에 부르짖어 회개하고 성령으로 충만함 받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6절에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11절에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우리가 스스로 오늘날 근심해야 됩니다. 우리가 어쩌다가 신앙의 열심을 잃어 버렸는가! 하나님께 열심하고 충성하던 신앙인이 어디에 갔는가? 근심하고 열심을 내면 환난을 당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복구시켜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 원인을 발견 못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조개삿갓의 엄청난 집착력입니다. 나는 해녀들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들이 바닷 속에 깊이 잠수해 들어가서 이 조개나 그런 조개류를 캡니다. 캐는데 더욱이 전복같은 것은 약간 건드리면 칼로써 아무리 떼내려고 해도 떼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위는 깨뜨리면 깨뜨렸지 바위에 찰싹 붙은 이 전복을 떼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짝 가서 마음을 놓고 있을 때 싹 칼로 떼야지 그것을 서투르게 떼었다가는 절대로 전복을 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대게 바위나 배밑창에 붙어 사는데 얼마나 단단하게 붙어사는지 바위자체를 깰 수는 있어도 거기에 붙은 조개삿갓을 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조개삿갓이 이렇게 바위에 강하게 붙은 이유는 오랫동안 파도와 싸운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견디는 파도의 힘은 시속 484km의 바람과 같습니다. 엄청난 힘이 그들을 떼낼려고 하는데 거기에 저항하기 위해서 매일 바위에 들러붙습니다. 바다만 출렁거리면 바위에 들러붙습니다. 이래서 조갯삿갓이 힘 있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열심을 내어서 하나님을 낳아 열심히 찾고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안에 우리의 신앙은 점점 열심을 내고 힘이 있게 되어서 어떠한 시험과 환난이 와도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연단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입니다.

3. 축복과 고난의 비빔밥
그러면 셋째로 신앙인의 삶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축복과 고난의 비빔밥을 먹어야 되는 것입니다. 밥 따로 반찬 따로 먹으면 안돼요. 축복도 받고 고난도 받는 비빔밥을 먹어야 됩니다. 고난만 계속하면 낙심하고 좌절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깊은 고난에 들어가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이 꿈과 환상을 주고 위로를 줍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부모, 형제, 처자가 다 떠나고 내가 실패와 낭패를 당하여 사망의 가장 음침한 골짜기로 내려갈지라도 기도할 때 하나님이 “내가 여기 있다. 내가 함께한다.” 놀라운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지 않는 사람하고 믿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내려갈지라도 하나님이 “내가 여기 있다.” 하나님이 큰 은혜로 꿈과 환상을 주시고 위로를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 위로를 통해서 축복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당할 때 꿈과 소망을 주시고 복을 주신다는 확신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고난만 당하게 한다면 누구든지 꿈과 희망을 잃어버리고 자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잠시 동안 고난을 당하게 하고 난 다음에 깨어지고 회개하면 마침내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또 축복만 계속해도 하나님을 떠납니다.
사람이 너무 편안하면 안일하여 게을러지게 됩니다.
신명기 8장 11절로 16절에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찌어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우리 하나님도 참 골치 아픕니다. 고난만 주면 낙심해서 나자빠지고 축복만 주면 게을러서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그러니 계속 축복을 주실 수도 없고 계속 고난을 줄 수도 없고 축복과 고난의 비빔밥을 먹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처지인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국제회의에서 어떤 아프리카 대표가 강연을 하면서 말하기를 자기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출세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러느냐? 영국이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점령하고 난 다음 엘리트들을 데려다가 영국에서 대학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대학학위를 얻고 석사, 박사를 받고 아프리카로 돌아오면 95%에서 99%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영국 것을 공부한 사람들이 타락을 하고 하나님을 저버리고 신앙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영국가서 공부해서 학위를 얻고 아프리카로 돌아와서 신앙을 잃어버리고 타락할 바에는 차라리 출세하지 않고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 좋겠다고 그분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평안한 삶을 살다보면 믿음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안할 때 늘 깨어있어야 됩니다. 이러므로 신앙의 비빔밥을 우리는 늘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고난당할 때는 하나님이 축복의 희망을 준다는 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 축복의 은총의 손길이 있어 고난당할 때도 축복의 비빔밥이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 19절로 22절에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예레미야 애가 3장 32절에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희망입니다. 극한 고난을 당하고 절망하려고 해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은혜와 축복과 소망이 또 따라 온다는 것입니다. 고난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케 하시는 이가 하나님인 것입니다. 칠흙같이 어두운가 하면 광명한 빛이 내 앞에 비치게 되는 것입니다. 갈 길이 없는 캄캄한 동굴에 들어갔는가 하면 그 동굴에 하나님이 터널을 보여 주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믿는 사람들의 역설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악에 부딪혔는가 하면 선으로 바꾸는 기적을 주십니다. 절망인가 하면 또 소망의 문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낭패 되었다가 하면 또 성공의 문도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축복은 언제나 비빔밥으로 같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축복받을 때는 또 고난의 채찍도 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축복만 늘 있다고 할렐루야 하지 마십시오. 축복 가운데 게을러지지 않게 하나님은 계속 고난을 주어서 축복과 고난의 비빔밥을 먹게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히브리서 12장 10절로 11절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당할 때는 축복을 생각하고 기뻐하고 축복을 당할 때는 하나님이 징계의 채찍을 때리므로 잠들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을 기뻐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에도 축복과 함께 비빔밥을 축복에도 고난과 함께 비빔밥을 먹는 다는 것을 잊지 말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식물학자의 말에 의하면 겨울이 지난 후에 춘삼월이 다가오면 강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춘삼월 꽃샘추위가 오고 바람이 불잖아요. 왜 바람이 부느냐? 겨울동안 잠이 푹 들은 나무가 뿌리에서 춘삼월이 와도 물기를 끌어 올리려고 생각하지 않고 잎이 트고 꽃이 피고 꽃피고 열매 맺으려고 생각을 안합니다. 나무를 잠에서 깨우는 것이 바람입니다. 바람이 불어서 막 흔들어 놓으면 뿌리채 흔들리니까 “어~ 벌써 봄이 왔느냐?” 잠에서 깨어나서 그래서 뿌리가 “아유 이쯤부터 물기를 빨아 올려야 되겠다. 싹이 돋아야 되겠다. 잎 피고 꽃펴야 되겠다.” 그래서 나무가 다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한가지입니다. 우리가 무풍지대로 있으면 잠들어 버리고 맙니다. 세상 잠에 푸~욱 빠져 버립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 우리를 흔들면 우리가 세상 잠에서 깨어나서 “아~ 이것 큰일 났구나! 정신 차려야 되겠구나!” 그래서 기도를 해서 성령의 생수를 받아들이고 잠에서 깨어나고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집사님에게 참 좋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집사님이 노란 꽃을 피우는 넝쿨장미를 사서 마당에 심어놓고 정성을 다해 가꾸며 꽃이 필 날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꽃 한 송이도 피지 않아요. 집사님은 넝쿨장미를 정성을 다해서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잘 돌보아 주었는데 장미 넝쿨은 푸르청청하게 잘 자라는데 꽃은 전혀 피지 않아요. 그래서 그가 장미넝쿨을 산 묘목장사에게 가서 “아니 당신 노란 넝쿨장미를 내게 팔았는데 내가 정성을 다해서 비료도 주고 물도 주고 북을 돋아 주었는데 이것 뭐 줄기만 무성하게 담을 꽉 둘러 진치지만 꽃은 안피니 왜 그렇습니까?” 그러니 그 장사가 허허 웃으면서 “넝쿨장미에게 비료를 주고 물을 주었기 때문에 장미가 꽃을 안피지요. 넝쿨장미를 꽃피게 하려면 비료를 다 걷어치우고 부드러운 흙을 다 제하고 모래 흙에다가 자갈을 섞어서 아주 고난스럽게 만들고 물도 적게 주고 가지는 사정없이 잘라서 전지를 하고 그렇게 핍박을 가하면 봄철에 아름다운 노란 꽃이 핍니다.”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돌아와서 막 뒤져서 거름을 제하고 모래에다가 자갈섞은 척박한 흙으로 그 넝쿨장미 뿌리를 가득 채워 놓고 가지를 사정없이 잘라 가지고서 몽당가지를 만들어 놓았더니만 그해 노란꽃이 그렇게 탐스럽고 아름답게 피더랍니다. 그래서 그는 그 넝쿨장미 앞에서 크게 깨달았다는 말이 “축복만 주면은 사람들이 세상으로만 아주 번창하게 되지만 기도의 열매, 전도의 열매, 헌신의 열매, 충성의 열매의 꽃은 안 피운다. 축복과 함께 환난과 시험이 다가와서 고통이 오면 그때는 기도의 꽃도 피우고 아름다운 열매도 맺고 헌신과 충성을 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항상 평안해도 안 되고 항상 환난을 받아도 안 되는 것입니다.

[결론]
축복받을 때는 방심하지 말고 내가 안주하면은 고난의 바람이 불고 가시밭길을 걸어가게 된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아야 되고 고난당할 때는 회개하고 희망을 굳게 붙잡고 삶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이 얼마 있어 축복을 준다는 것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언제나 축복과 더불어 고난이 오고 고난이 왔는가 하면 또 축복이 오는 비빔밥 신앙이라는 것을 반드시 마음에 알고 굳세게 서게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를 교육하고 키우듯이 키워 주심을 감사합니다.
너무 잘해주어도 안되고 너무 못하게 해주어도 안 되고 잘해주고 또 채찍도 때리시고 또 채찍도 때리시는가 하면 또 축복도 해주어서 골고루 잘자라게 해주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원만한 신앙인격자가 되어서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선한 자녀들이 다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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