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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이사야 나무............... 조회 수 2153 추천 수 0 2009.06.15 23:4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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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53:1~8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5년 3월 20일 주일3부설교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서론]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인간의 상상을 훨씬 초월한 상식에 어긋난 사건을 당했을 때 우리는 말합니다. “도대체 이와 같은 일을 누가 믿겠는가!” 예수님의 탄생과 그 생애에 관한 계시를 받았을 때 이사야는 어안이 벙벙하여 탄식을 했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어 주겠는가!”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의 탄생은 처음부터 너무나도 비극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사야는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마른 땅에서 난 연한 순같고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세상적으로 볼 때 흠모할만한 아름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마른땅 같은 빈민촌 나사렛의 가난한 집 처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연약한 어린 아기로 태어났기 때문에 융성한 집안이나 고관대작의 집에서 태어난 아기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고 흠모하고 찬양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슬프도록 보통 아기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를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싫어버림을 받았다.” 정말로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이나 바리새교인, 사두개교인, 교법사들, 사회지도층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의 삶은 풍찬노숙을 하고 가난신고를 많이 겪었으며 인간의 질고 때문에 마음이 늘 아팠습니다. 제2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이처럼 푸대접을 받으실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 옛날 선지자 이사야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 것처럼 오늘 우리도 이 소식을 전할 때 입을 딱 벌리고 당치 않는 말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오시기 약 7백년전에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당할 고난을 소상하게 환상으로 보고 오늘날 신문기자가 사건을 보고하듯이 이사야 53장에 그 사건을 잘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따라보면

[본론]
1.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첫째로,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53장 3절로 4절에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3분의 2는 병 고치는데 보내셨습니다. 주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하시고 곧장 하신일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사역과 치료의 사역은 분리하려고 해도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로 24절에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은 치료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이 전도하신 하늘나라는 치료의 나라입니다. 천국은 치료에 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할 때 우리가 하늘나라를 전하면 치료를 반드시 전해야 되는 것은 천국의 기초가 치료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12제자와 70인의 제자 그리고 후에 모든 믿는 자에게 주님은 병자를 고치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에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나가서 복음 증거 할 때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요소 중에 치료는 반드시 함께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죄사함을 받으라는 것과 예수 믿고 병고침을 받으라는 것은 손의 등과 안쪽과 같습니다. 분리할래야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70명 제자들을 둘씩 둘씩 보내면서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마지막 부활에서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부탁한 것을 보면 마가복음 16장 17절로 18절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마어마한 집착을 가지고 병을 고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냥 종교적인 의식으로 형식으로 병을 고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마음속에 큰 부담을 가지시고 병든 자를 보면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느꼈습니다. 병든 자와 같은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병의 고통에 동참하셨습니다. 어찌하든지 병든자를 고치려고 애를 쓰신 것입니다. 성경에 스블랑커니조마이라는 헬라어가 있는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민망히 여기사 또는 불쌍히 여기사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 12번 나오는데 그중에 여덟 번이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했습니다. 다섯 번은 병자와 죽은 자를 보셨을 때 세 번은 굶주려 고통받거나 목자없는 양같이 방황하는 백성들을 보셨을 때 느끼신 감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병들어 고생하는 사람을 볼 때 마음에 깊은 슬픔을 느꼈습니다. 그냥 ‘아~ 불쌍하구나!’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닙니다. 병들어서 고통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마음에 슬픕니까? 그 슬픔을 주님은 같이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병든 사람을 건져 주어야 되겠다. 고쳐 주어야 되겠다는 강박관념을 주님은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냥보고 지나칠 수가 없어요. 주님이 똑같이 그 마음속에 깊은 슬픔을 느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은 굶주려 고통 받거나 목자 없는 양같이 방황하는 백성을 보며 마음에 깊은 슬픔을 느낀 것입니다. 주 예수보다도 귀한 분은 없네. 왜? 예수님은 나의 슬픔과 고통과 괴로움을 함께 짊어지고 우리의 삶에 동참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은 방관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철학이나 종교나 가르치는 선생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고통에 동참하고 함께 멍에를 짊어지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그는 진실로 우리의 구주가 되시고 우리 마음에 큰 감동을 갖다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인간의 병 때문에 항상 무거우셨고 질고를 지고 슬픔에 동참하셨습니다. 주님은 들어가나 나오나 병자들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질고의 슬픔에 동참했습니다. 병든 자식을 둔 부모님은 집에 들어오나 집밖으로 나가나 그 자식의 병 때문에 마음이 늘 무겁고 그 자식의 질고의 슬픔에 동참해서 함께 마음이 찢어진 듯이 괴롭지 않습니까? 친자식이 아닌 이웃사람이 볼 때는 “아~ 병들었구나! 불쌍하구나! 나았으면 좋겠다.” 그런 정도로 생각하지요. 그러나 친 부모는 병든 자식을 볼 때에 그 마음속이 얼마나 무겁고 병고의 슬픔에 동참을 하고 함께 피를 흘린 예수님은 이웃사람이 구경하듯이 우리의 병 앓는 것을 본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의 병을 보듯이 그 마음속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마음에 피를 흘리는 슬픔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35절로 36절에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마태복음 14장 14절에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병자를 보실 때에 그 마음깊이 부담을 느끼시고 슬픔을 느끼시고 연민의 정,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느끼신 것입니다. 또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병을 주님께서는 짊어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기어코 채찍에 등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매를 맞고 우리의 병고를 대신 갚으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주님께서 로마의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난 다음에 군인들이 있는 지역으로 끌려 나와서 얼마나 세차게 매를 맞았습니까? 그때 매를 때릴 때는 채찍 끝에 쇠고랑이 달려 있습니다. 그 쇠고랑이 몸을 휘어 감고 당기면 몸이 밭갈 듯이 갈라졌습니다. 선지피가 쏟아졌습니다. 왜 주님이 그 채찍을 맞았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의 병을 대신 청산해야 되겠다. 병의 대가를 지불해야 되겠다고 깊이 결심했기 때문에 그 몹쓸 고통과 괴로움을 참으신 것입니다. 내가 고통을 당하고 내가 괴롭더라도 내 백성의 병을 고쳐야 되겠다. 병의 대가를 지불해야 되겠다.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대가를 지불해야 치료를 값 주고 살 수 있으니까 예수님은 살이 찢어지고 피를 쏟으므로 우리의 병을 대속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병을 앓으면 안 됩니다. 병을 이겨야 됩니다. 주님이 그처럼 고통을 당하시고 애쓰시고 마음에 번민을 하시고 우리의 병을 결국에는 채찍에 맞으시므로 청산하셨으니 예수님의 그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우리는 병을 이겨야 되고 병을 내어쫓아야 되고 병고침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병고침이라는 것은 단지 지나가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렇게도 간절히 소원하는 소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여러분의 몸에 병든 것을 보시면 마음 무거워하시고 슬퍼하시고 고통스러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이름으로 우리는 병고침 받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우리 병을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단호하게 물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병은 불법입니다. 병은 나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낫게 되어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2천년전부터 이미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 것을 우리가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병에서 놓여남을 받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병드는 것이 주님 영광이 아니라 병에서 놓여남을 받는 것이 주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병은 주님의 슬픔입니다. 병은 주님 마음에 고통입니다. 주님의 슬픔과 고통을 제할 수 있는 길은 병을 쫓아내어 버리는 것입니다.
순복음가족신문 2004년 5월 8일에 실린 은평대교구 송문근 권사님의 간증을 읽고 크게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권사님은 혈압이 높은 것 이외에는 다른 병이 없이 건강하게 살고 있었는데 2003년 5월경 갑자기 눈에 띌 정도로 살이 빠지는 바람에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검사결과 간암말기였습니다. 의사는 암이 폐까지 전이가 되어 이제 가망이 없으니 집에 가라고 했습니다. 나이가 많기 때문에 항암치료나 방사선치료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권사님은 암으로 인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음식은 물론 물도 넘기기가 어려워 때로는 각혈에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는 정도였습니다. 너무나 급하기 때문에 가족들이 3일 작정기도회를 가졌고 교구에서도 합심하여 21일 동안 다니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권사님은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채찍에 맞아 등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피를 흘리는 모습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주님께서 저렇게 고난당하면서 내 병을 대신 짊어지셨으니 병든 것은 주의 뜻이 아니다. 이것은 마귀가 가져온 것이다. 단호하게 예수 이름으로 거듭거듭 마귀를 쫓았습니다. “너 암의 원수귀신아 물러가라!” 그리고 제게 왔어요. 제가 간절히 안수하며 기도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집에 돌아가는데 신기하게도 권사님의 고통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기침도 그치고 각혈도 그치고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고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해 12월에 병원에 가서 재검사를 받았는데 의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했습니다. “혹시 우리 병원말로 다른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셨나요? 아니면 지금 다른 약 드시는 것이 있습니까?” 그래서 권사님이 아니라고 대답했더니 의사는 촬영한 사진을 보여 주면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진을 보니 처음 찍은 사진에는 명확하게 암이 간과 폐에 전이되어 있었는데 두 번째 찍은 사진에는 암의 흔적도 간과 폐에 없었습니다. 깨끗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등이 갈기갈기 찢어진 것은 우리의 모든 질고를 대신 짊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고 기도하면 오늘날도 예수님은 기쁘게 그 손을 내밀어 안수하고 치료해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고난 주간에 이사야가 예언으로 말한 것 처음이 저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질병을 지고 슬픔을 주님께서 대신 당했습니다. 그 대가는 뭡니까? 치료와 건강이 그 대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치료 받아야만 됩니다. 우리는 건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이 당하신 고통에 대한 응답이 되고 보답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병에서 고침받는 것이 주님의 완전한 뜻이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말고 믿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둘째로, 성경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양손과 양발에 대못이 박히시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썼습니다. 우리는 손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발로 얼마나 죄를 많이 짓고 생각으로 얼마나 죄를 많이 짓습니까? 허물투성이입니다. 이 세상에 허물이 없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지요. 먼지 털어서 옷에서 먼지 안 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허물진 인생 그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절대로 설수 없어요.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하고 착한 일을 하고 고행을 한다 해도 허물없이 세상에 살 수 있습니까? 세상 자체가 죄악의 수렁인데 이곳에 사는 사람 죄의 허물을 짓지 않고는 살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이 현실의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외적 육체의 찔림은 우리 육체로 지은 허물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했으며 13장 12절에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이 손과 발에 흘리신 그 피로 우리 일생의 허물을 다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때까지 일생의 허물을 주님이 다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실 때 너희 허물을 영원히 청산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적 내적인 상함은 우리 범죄 때문입니다. 바깥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만 속 상처는 눈에 안보입니다. 우리는 자랄 때 아홉 형제간이 자랐는데 일정시대 말기에서부터 6.25사변을 거치면서 자랐기 때문에 얼마나 가정생활이 궁핍하고 어렵고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지요. 그러니 어머니가 이 아홉자녀들을 키우는데 너무나 많은 괴로움을 겪어서 항상 저보고 하는 말이 “속이 상해 죽겠다. 내 심장이 터지려고 한다.” 그래서 내 속으로 속이 상했는지 안상했는지 내가 어떻게 압니까? 안보이니까··· 어머니가 “아이고 내가 속이 상해 못살겠다.” 하는데 아무리 봐도 상한게 안보입니다. “내 심장이 터지겠다.” “어머니 심장이 왜 터지느냐?” 그러나 속이 상하고 심장이 터질정도로 괴로운 것은 사람들 눈에 안보여도 눈에 보이는 상처보다 사실상 더 괴로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힐 때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억울하게 누명을 덮어쓰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의 속이 상한 것은 말로다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속은 너무나 상하고 예수님의 심장이 갈라졌습니다. 그런 고통을 겪은 것입니다.
이사야 52장 14절에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라고 말했습니다.
너무나 상했습니다. 주님을 본 사람들이 다 놀래서 입을 딱 벌어졌습니다. 저렇게 상할 수가 있느냐. 사람이 속이 상하면 얼굴로 다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속이 완전히 상해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습이 다 이그러지고 말로다 할 수 없었습니다.
시편 22편 14절에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은 우리가 곁에서 보는 그런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인간을 지으신 책임, 인간에 대한 끊지 못할 사랑 때문에 주님이 이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고통을 짊어진 것입니다.
나는 어느 부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식을 낳아서 길렀는데 자식이 잘못되었습니다. 이놈이 이혼하고 그리고 술취하고 방탕하고 도박하고 부모재산도 다 팔아먹고 그래서 부모의 마음이 말로다할 수 없이 괴로웠습니다. 하루 저녁에는 부부간에 서로 쳐다보면서 “여보,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 자식 때문에 이렇게 고통을 당하니 뭐 안낳았다고 생각하십시다. 우리 이 자식 안낳았다고 생각하고 오늘부터 잊어버리고 우리는 우리대로 편안히 사십시다. 이 자식 때문에 우리가 자꾸 끌려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까? 이제는 자식은 자식이고 우리는 우리입니다. 안 낳았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오늘부터 잊어버리십시다.” “맞아요. 오늘부터 이제는 다 잊어버리고 우리는 우리대로 사십시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어갔는데 한참동안 있어보니 남편도 안자고 부인도 안잡니다. 한숨을 푸~욱 쉬면서 있습니다. 그 부인이 남편보고 “여보, 왜 안 낳은 줄 생각하고 잊어버리고 편안하다고 했는데 왜 한숨을 쉬어요?” “안 낳은 것처럼 하려고 해도 낳았는데 어떻게 하노? 아무리 안 낳은 것 처럼 생각을 해도 내가 낳은걸 어떻게 하냐? 아무리 잊어버리려고 해도 끈질긴 인연으로 묶여 있으니 내가 잊을 수가 있느냐?” 부모와 자식관계는 이런 끈질긴 인연이 묶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끊을 수가 없어요. 안 낳은 것처럼 생각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생각이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안 만든 것처럼 생각을 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찌할 도리 없이 우리에게 인연으로 묶인 것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책임, 인간에 대한 끊지 못할 끈질긴 사랑이 하나님의 마음을 괴롭힌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타락 때문에 너무나 오랫동안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신 것입니다. 내가 잘못했는데 하나님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것은 자식이 부모보고 하는 말과 한가지입니다. “내가 잘못했는데 아버지, 어머니가 왜 괴로워해요?” “야 이놈아! 너도 장가가서 자식 낳아 보아라. 알 것이다.” 그렇게 부모는 자식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탄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탄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 때문에 마음 괴로워하는 것을 우리 이해 못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신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탄식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음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는 다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천방지축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 아들 예수님께 덮어 씌워서 대신 심판을 베풀고 그 흘리신 피로 우리를 용서하고 의롭다하고 우리를 다시 구원하려고 애를 쓰는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시편 103편 13절에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것은 아무리 지워 버리려고 해도 지워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고민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끊을래야 끊어지지 않는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가 고민하시고 독생자를 보내 주시고 예수님께서 기어코 우리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신 것입니다.
민물에 사는 생물중에 가시고기라는 물고기가 있어요. 한때 가시고기라는 책도 출간되어서 나왔지 않습니까? 이 가시고기는 산란때가 되면 수컷이 정성을 다해 수초 속에 자리를 마련하고 암컷은 알만 낳고 난 다음 도망을 치고 돌아오지 않습니다. 수컷이 그 알을 보호하기 위해서 밤낮 자지 않고 있습니다. 다른 물고기가 와서 알을 먹을까 싶어서 그 알을 지키고 계속해서 지느러미를 놀려서 신선한 산소가 꽉 들어찬 물을 공급시킵니다. 먹지도 아니하고 자지도 아니하고 쉬지도 아니하고 알을 지키고 알에게 신선한 산소를 공급하려고 애를 쓰다가 나중에 알이 부화되어 나오면 수컷은 지쳐서 죽어 버립니다. 그러면 새끼들이 전부 그 아버지 된 수컷의 몸에 붙어서 그 살을 뜯어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시고기입니다. 가시고기의 부성애는 놀랄만합니다. 자기의 목숨을 바쳐서 새끼를 부화시키고 새끼를 자라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주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 이상의 사랑으로 우리의 고통에 하나님은 동참하신 것은 하나님의 그 끈질긴 사랑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가시고기라는 하나의 민물 물고기도 새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인생을 위해서 그 아들 예수님의 목숨을 버리게 하신 것입니다.

3.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셋째로, 성경은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린다고 말했습니다.
징계란 잘못에 대한 대가로 고난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회사에서 징계받으면 월급이 깍이든지 직급이 낮아지든지 쫓겨나든지 하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징계를 받습니다. 예수님의 33년 동안의 지상 삶이란 인간을 위한 징계의 삶입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쫓아 천지를 직접 지으신 이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천국과 천사들이 다 무릎을 꿇고 다 경배한 그분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인간으로 세상에 오시고 인간으로써 이 세상에 33년동안 사셨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고통이요, 괴로움이요, 슬픔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가 징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징계하심으로 쫓겨난 인생들을 예수님을 통해서 도로 하나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만든 세상은 저주받은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저주받은 세상을 다 끌어안고 주님께서 저주를 청산하시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하신 예수님의 초라한 모습 그리고 버림받아 십자가에 매달린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왜 저렇게 초라하게 십자가를 짊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침뱉음을 받고 로마군인들의 발길에 차이면서 십자가를 끌고 골고다로 올라가셨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징계를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 벌 받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마가복음 15장 34절에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창세 이후로 하나님과 분리된 적이 없습니다. 늘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육신이 되어 오신 이후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는 하나님이 등을 돌려 버렸습니다. 버림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더구나 극진히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림을 당할 때 그 고통이란 말로다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당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당했습니다. 온 세상 죄를 다지고 도저히 하나님이 눈뜨고 볼 수 없는 죄인이 되어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그 예수님, 하나님이 진노의 심판을 퍼부을 때 하나님은 등을 돌려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적막강산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버림받고 인류들에게 버림받고 사탄들의 조롱 속에 매달렸을 때 주님은 그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외친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늘 아버지라고 하셨지,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고통 속에 극한 시기에는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버림받았으니까 이제 아버지가 아닙니다. 엄한 심판주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통곡을 하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에 시편 22편 6절에 그 상황을 설명하기를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라고 통탄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형을 단순히 나무에 사람을 못 박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연구결과에 의하면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맨 마지막 순서로 하는 것이고 그 형벌은 심한 채찍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합니다. 게다가 당시 사용하던 채찍의 끝에는 납이나 동물의 뼈 같은 것이 붙어 있어서 한번 맞으면 살 속에 박혀 살을 찢고 뼈를 상하게 했습니다. 그 고통 또한 엄청나서 그때 충격으로 매를 맞다가 즉사한 죄인들이 많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날씨가 더웠기 때문에 채찍에 맞은 상처에서는 곧바로 진물이 흐르고 염증이 생기기 시작해서 죄수의 몸은 불같이 열이 활활 났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채찍으로 때렸는데 거기에 염증이 생겨서 피고름이 생기고 그로 말미암아 온 몸에 불덩어리와 같이 열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고통이 말로다 할 수 없지요. 그 상태로 자신이 못 박힐 2미터 길이의 무거운 나무를 끌고 사형장소까지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야 십자가 형이 집행됐는데 이 십자가형의 고통은 우리의 상상을 완전히 초월합니다. 캔버스 대학의 해부학 교수인 하워드 네츠키 교수는 십자가형의 고통을 의학적으로 분석해서 이렇게 발표했습니다. 몸의 체중이 두 손에 박힌 못에 매달려지기 때문에 살이 찢어지고 많은 피를 쏟으며 통증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슴으로부터 팔에 이르는 근육들이 극도로 늘어져 팽창하므로 호흡장애를 일으켜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근육이 움직여져야 숨을 쉬는데 매달려 있으니까 숨을 쉴 수가 없고 산소가 부족하니까 온몸에 경련이 일어납니다. 죄수가 이 증세를 조금이라도 완화시키기 위해 몸을 위로 치켜 올리려고 하면 이 때마다 체중이 발등에 꽂힌 못에 실리므로 그 고통은 더 가중됩니다. 그러니 설상가상입니다. 그대로 매달려 있자니 너무나 고통스럽고 손은 찢어지고 근육이 당겨서 숨을 쉴 수가 없고 숨을 쉬자고 발을 치켜 올리니 못 박힌 발이 상처가 말할 수 없이 쓰리고 고통스럽습니다. 주님은 이 고통을 6시간 동안 당하셨습니다.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혀 10시, 11시, 12시 그리고 12시에 주님이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주님께서 1시, 2시, 3시까지 매달려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외칠때까지 6시간 동안 인간으로써 극한 상황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저는 한때 기도하다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힌 모습을 본적이 있습니다. 기도하는데 갑자기 너무나 슬픔이 다가와서 제가 엉엉 울었어요. 울다가 갑자기 환상가운데 갈보리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의 형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고함을 치고 말이 달리고 창검이 번쩍이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욕을 하고 고함고함 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외롭게 매달려 있는데 그 모습은 너무나 처절해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늘 배경에서 노래 소리가 들려요. ‘얼마나 아프셨나. 못 박힌 그 손과 발. 죄 없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하늘도 모든 땅도 초목들도 다 울고 해조차 힘을 잃고 온누리 비치잖네. 아 아 끝없어라 주의 사랑 언제나 아 아 영원토록 구원의 강물 넘치네.’ 저는 너무나 너무나 감격했습니다. 이 음악소리가 들리면서 예수님이 못박히는데 나는 일단의 무리곁에 서서 막 울었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여자들이 모여가지고서 막 통곡을 하고 울어요. 예수님을 따라온 여자들이 통곡하고 우는데 나도 그 가운데 섞여가지고서 막 눈물을 흘리고 고함을 치고 울다가 환상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받아 적은 것이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얼마나 아프셨나” 이 찬송입니다. 우리 1절 다같이 불러 보십시다.
‘얼마나 아프셨나. 못박힌 그 손과 발. 죄없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하늘도 모든땅도 초목들도 다울고 해조차 힘을 잃고 온누리 비치잖네. 아 아 끝없어라 주의 사랑 언제나 아 아 영원토록 구원의 강물 넘치네.’
여러분 예수님은 이미 채찍질과 수없는 주먹질로 몸이 완전히 지친 상태에서 십자가에 매달리셨고 호흡곤란과 과다출혈, 순간순간 그치지 않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어 가셨습니다. 우리가 받을 징계를 대신 받으시며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이란 뭡니까? 사랑이란 증명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말로만 시적으로 하는 사랑이 사랑이 아닙니다. 증명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한다는 것을 절절하게 증명하여 주신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읽어 보았습니다. 한 시골에 부자가 살았는데 남편은 아침 일찍 일하러 나가면 밤늦게 돌아왔습니다. 생활은 부요했지만 부인은 외로웠습니다. 남편이 자기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아니하고 자기는 필요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이 우울하고 슬펐습니다.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그 결과 맹장염이 걸렸고 아픈데도 그대로 자기를 포기했는데 맹장이 터져서 복막염이 되었습니다. 시골병원에 가니까 이미 늦었습니다. 수술을 했으나 살아날지 의문이고 또 피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쇼크사로 죽을 수 있습니다. 남편이 뛰어 왔습니다. 다행이 남편의 혈액형이 부인의 혈액형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피가 부족해서 자리에 누워있는 혼수상태에 빠진 그 부인에게 남편 팔을 걷어내고 의사는 직접 남편 혈관에 주사를 꽂았습니다. 그리고 플라스틱관을 통해서 부인의 팔에 혈관에 주사를 꽂았습니다. 남편이 손을 쥐었다가 놓았다가 하는데 남편 몸에서 뜨거운 피가 이 플라스틱 관을 통해서 부인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피가 조금 흘러들어가자 정신이 희미하게 된 부인이 보니까 남편이 자기 곁에서 있는데 남편의 팔뚝에서 생피가 플라스틱 관을 통해서 자기 몸에 흘러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 부인은 깊은 충격을 느꼈습니다. ‘아~ 내가 오해했구나! 난 우리 남편이 나에게 무관심하고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죽게 되니까 자신의 피를 혈관에서 지금 내 혈관으로 직접 뽑아 주는구나! 우리 남편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렇다면 내가 살아야지. 그리고 남편을 위해서 헌신을 해야지.’ 그는 새로운 결심을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용기를 얻어서 그 어려운 고난을 이기고 그 다음부터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고 섬길 수가 있었다는 간증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가 평소에는 남편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남편이 자신이 고난당할 때 직접 피를 팔에서 뽑아서 자기에게 넣어 주는 것을 보고 사랑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사랑이란 체험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증명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징계를 통하여 인간의 반역을 청산하시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화목과 평화를 가져오신 것이니 예수님은 정말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여 버림을 받아야 마땅하고 천번만번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들을 위해서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대신 징계를 받고 모든 죄악을 청산하고 그 보혈로 카페트를 깔아서 하나님 보좌 앞으로 우리가 다 나가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2절에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께 나가면 아버지는 무조건하고 우리 죄를 청산하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두 손을 펼쳐서 우리를 품어주시고 자녀로 삼아 주시고 아버지의 영인 성령을 부어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는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로운 행동이나 고행으로써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 슬픔을 당했으며 저가 찔림은 우리 허물을 인함이요 저가 상함은 우리 죄악을 인함이라 저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주님의 희생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결론]
이사야 53장 7절로 8절에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2천년전 팔레스타인의 한 외진 곳에서 로마 총독 빌라도의 심판을 받고 처형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의 참된 의미를 너무나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성경은 탄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마땅히 형벌 받아 지옥에서 멸망 당해야할 여러분과 나의 허물과 죄 때문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하나님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영영히 하나님과 천국에서 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멸망받아야 될 죄악의 자식들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영원히 지옥불에 떨어져야 될 우리들을 대신해서 예수님이 필설로 표현할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여 우리의 죄를 다 청산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다 어린양 같이 각기 제길로 갔는데 우리 무리의 죄악을 주님이 대신 짊어지시고 청산해 주셨으므로 이제는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우리 아버지여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미하고 주님의 은혜속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사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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