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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경험

요한복음 나무............... 조회 수 1917 추천 수 0 2009.06.18 00:2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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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2:1-12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8480 

jys.jpg 정용섭 목사

포도주 사건

오늘 우리가 선택한 본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비교적 잘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가나'라는 곳에서 열린 혼인 잔치에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특이하게도 예수님의 어머니까지 초대를 받아서 참석했습니다. 본문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정황을 우리가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참석한 걸 보면 가까운 친인척의 결혼식이었던 것 같은데,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에 대한 언급이 없는 걸 보면 요셉은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누구나 결혼 잔치에 참석하면 즐겁습니다. 사람들이 바쁜 중에서도 결혼식을 좇아 다니는 이유는 평소 생존경쟁에서 쌓인 긴장을 이런 데서 풀어낼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혼 잔치에 참석한 순간만큼은 모든 걱정과 근심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긴장을 풀고 즐거운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 이유는 결혼이라는 사건이 주는 흥겨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흥겨움을 훨씬 고조시키는 술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술이 없는 결혼 잔치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 일행이 참석한 가나의 결혼 잔치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직도 잔치가 끝나려면 멀었는데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포도주가 잔치 중간에 떨어진다는 건 흔한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신랑의 부모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릅니다. 포도주 문제를 마리아가 간섭하고 나섰다는 사실이나 포도주로 변한 물맛을 본 잔치 진행자가 신랑의 부모를 찾지 않고 신랑에게 말을 건넨 사실에서 이를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예수님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4절).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린 정확한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만약 포도주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으면 가게에 가서 사오든지 옆집에서 빌려와야 할텐데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예수님에게 그런 초능력이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약간 부정적인 대답을 받았는데도 마리아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하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5절).
어머니 마리아의 부탁을 받은 예수님은 일단 그런 일에 참견하지 않겠다는 말을 했지만 실제로는 행동에 들어갑니다. 본문의 설명에 의하면 그곳에 두세 동이들이 돌 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손님이 왔을 때 손발을 씻을 수 있도록 항아리에 물을 준비해놓았습니다. 밥을 먹기 전에도 반드시 정해진 순서에 따라서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그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잔치 진행자에게 갖다 주라고 했습니다. 물은 어느새 포도주로 변해 있었습니다. 포도주 맛을 본 잔치 진행자는 신랑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좋은 포도주는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다음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 법인데 이 좋은 포도주가 아직까지 있으니 웬 일이오!"(10절). 이 사람의 말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손님이 취한 다음에는 품질이 떨어지는 포도주를 먹이는 게 일반적인 데 이번 잔치에는 여전히 좋은 포도주가 나오니까 신기했던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의 고급 술집에서도 손님들이
크게 취하면 가짜 양주를 진짜처럼 제공한다고 하는데, 이런 못된 장난질이 2천년 전서부터 시작되었군요. 

사태의 진상

이 이야기를 듣고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이 본문을 통해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영적인 교훈을 찾으려고 합니다. 하나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예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단순한 마음으로 그렇게 믿는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을지 모르지만 믿기 힘든 일을 무조건 믿으라는 것은 바람직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도대체 물이 포도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그것도 그 짧은 순간에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설명합니다. 포도를 일정한 기간 발효시키게 되면 포도주가 되는데,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그 기간을 단축시킨 것에 불과하니까 크게 놀랄 일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저도 성서의 내용을 무조건 믿는 게 기독교 신앙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연과학이나 그것에 기초를 둔 인간의 합리주의라는 게 그렇게 절대적인 진리가 못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물이 순식간에 포도주로 변화했다는 사실을 아직도 받아들일 수 없고, 그것을 믿는 것이 곧 기독교 신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합리적 생각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요한복음이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우선하는 것은 성서가 말하려는 근본이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작업입니다. 그것이 밝혀진 다음에 그것을 믿을지 아닐지가 선택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간혹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강요함으로써 기독교 신앙과 인간의 인식활동 사이에 건널 수 없는 틈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얻는 또 하나의 다른 영적인 교훈은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처럼 우리도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을 가리켜 '알레고리칼' 해석이라고 하는데, 이런 해석은 성서 본문의 핵심과는 거리가 먼,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흐리게 만들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 이외에도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우리가 순종함으로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과 같은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만 생각한다면 이렇게 해석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결국은 성서의 세계가 열리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우리가 경계해야 할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무엇을 읽어야만 할까요?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일단 성서 본문이 말하려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다는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 이 이야기만이 아니라 요한복음에 나오는 대개의 보도는 공관복음과 매우 다른 차원에서 서술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공관복음서도 역시 예수님의 객관적 사실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예수님에게서 일어났던 메시아 사건에 대한 신앙에 관심을 두고 있지만, 요한복음은 그런 신앙을 철학적으로 변증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자료는 초기 기독교의 전승에만 머무르지 않고 헬라 사상에까지 확장됩니다. 가장 단적인 예로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로고스'라는 용어가 그렇습니다. 철저하게 헬라 철학적 개념인 로고스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변증하려는 것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었다는 이 이야기도 이미 헬라 신화에 등장합니다. 디오니시우스 신(神)은 포도나무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고대 유럽 사회에서는 포도주가 인간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생명의 음료였기 때문에 이에 얽힌 설화는 많습니다. 예컨대 오디세이에도 외눈박이 거인을 포도주에 취하게 만든 다음 격퇴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헬라 철학과 신화의 많은 개념과 사건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 전승에서 결혼 잔치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로 설명되고 있으며(마 22:1-14, 25:1-13),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 제자들은 결혼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과 같습니다(막 2:19). 그리고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넣어야만 했습니다(눅 5:37-38). 요한은 자신이 알고 있는 교회 밖의 자료들과 교회의 전승을 함께 다루면서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여기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요한복음서의 이야기들은 모두 가짜라는 말인가? 그게 모두 요한의 창작물이라는 말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객관적인 사실이 있고, 성서 기자에 의해서 편집된 것들도 있습니다. 사실 여기에 바로 우리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의 이야기 중에서 역사적인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완벽하게 재구성해내는 작업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국 완벽하게 해결할 수 없다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합니다. 저도 그런 주장에 기본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아직은 충분할 정도로 성서의 이야기를 재구성해낼 수 없다고 해서 그런 문제를 그냥 덮어두어서는 상황이 더 나빠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성서의 실체적 진실을 풀어나가야 하며,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 성서의 세계는 우리에게 점진적으로나마 열려지게 될 것입니다. 성서에 대한 좋은 신앙이라는 것이 성서가 원래 말하려는 것과 아무 상관없는 것까지 믿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포도주 이야기의 핵심

요한이 기본적으로는 기독교 전승의 중심에 있지만 헬라 신화적 자료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물과 같이 밍밍한 맛으로 살던 우리가 포도주처럼 달콤하고 짜릿한 맛으로 변화 받아야한다는 걸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손에 붙들리면 포도주 같이 변화된다는 말씀인가? 아니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물과 같은 이 세상을 포도주로 변화시켜야만 한다는 가르침인가? 요한은 무엇을 말하려고 요즘 우리의 세계관으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다행스럽게도 요한은 포도주 설화의 핵심을 명시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 행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11절). 가나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첫 기적은 곧 예수님의 영광을 증명하는 것이었으며, 그 영광을 경험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포도주 이야기를 읽는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도 역시 예수님의 영광인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기도 합니다. 좀더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나타났다는 의미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에게서 그런 영광을 경험했으며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영광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정결 예식에 필요한 물 항아리는 유대교의 율법을 의미합니다. 항아리 숫자가 여섯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그것을 의도했는지 모르지만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일곱이라는 완전한 숫자보다 하나 적은 숫자를 택했다는 것은 곧 율법이 불완전하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 여섯 항아리 안에 들어 있는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사실은 이제 불완전한 율법의 시대가 가고 완전한 복음의 시대가 왔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이야말로 율법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르침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대충 우리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영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만족할만한 대답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영광'이라는 단어 자체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영광이라는 용어를 성서에서 읽기도 하고, 그런 찬송을 부르기도 합니다만 대개는 굉장히 좋은 것, 거룩한 것, 우리와는 다른 어떤 고상한 것쯤으로 생각할 뿐이지 구체적으로 생각하지는 못합니다. 오늘 저도 여러분에게 영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설명할 수 없듯이 영광을 설명하기도 힘듭니다. 이 문제가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깊이 생각하기를 포기하는데 우리는 힘들더라도 계속해서 생각해야만 합니다.
요한은 1:14절에서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말씀(로고스)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오늘 본문도 역시 1:14절에 진술되어 있는 영광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영광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가 곧 역사적 인물인 나사렛 목수 예수였다는 사실 말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 역사적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영광을 의미하는 헬라어 '독사'는 헬레니즘 시대에 일반적으로 '의견', '평판'이라는 뜻이며, 동사로는 '생각하다', '상상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용어가 성서에서는 '영광', '영광을 돌리다'는 뜻으로서, 신의 현현 뒤에 나타나는 어떤 보이는 것을 가리켰습니다. 구약성서에서는 이 단어가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졌으며, 신약에서도 그런 종말론적인 뜻으로 쓰이면서도 경우에 따라서 선취적인 것으로, 즉 현재적인 것으로도 쓰였습니다. 오늘 요한도 역시 궁극적으로는 종말론적인 영광이 선취적으로 역사적 예수님에게 나타났다고 진술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포도주 사건이 그런 영광을 증명하는 근거로 설명되었습니다만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이 그 근거입니다. 부활로 인한 예수님의 영광을 경험한 요한에 의해서 이제 부활 이전의 사건들이 새로운 차원에서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흡사 마술사의 속임수처럼 보일 수도 있는 포도주 사건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요한복음서 안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아마 요한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런 헬라 신화적인 요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어떻게 변증할 것인가?

예수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증명하기 위해서 신약성서 시대에는 그런 신화적 표상이 당연히 필요했지만 신약성서와 전혀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포도주가 변했다는 그 사실에만 머물러서 하나님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겉으로 돈독한 신앙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외면하고 주변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기 때문에 참된 신앙도 아니고 지혜로운 신앙의 태도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새로운 변증학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새로운 인식론적 도구가 필요합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도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시대가 변화할 때마다, 즉 존재론과 인식론이 심화될 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접근 방식이 달라져야 하듯이 아직은 결정적으로 말할 단계는 아닙니다. 다만 리가 영적인 감수성을 예민하게 열어놓아야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지동설과 진화론을 통해서 이 세계를 이해하는 패러다임이 달라졌을 때 신학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고대 시대의 신화적 표상을 고집함으로써 결국 기독교의 하나님을 해명해낼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걸 신앙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신앙이 자칫 인간의 영적 감수성을여는 게 아니라 닫는 것인지 모릅니다.
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적 인식도 달라져야 한다는 말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현대적 감각에 따라서 하나님이 달라져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달라진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인식하는 우리의 생각이 깊어진다는 뜻입니다. 시대의 진보에 따라서 우리의 하나님 인식이 깊어지려면 우선적으로 성서가 무엇을 증언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의 포도주 사건이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셨나요? 예수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이해하십니까? 아니 그런 영광에 대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생각하기는 하는 걸까요? 성서의 증언을 통해서 그것을 경험한 사람은 오늘 이 시대에 전혀 새로운 깊이에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그런 영광을 경험할 것이며, 더 나아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2004.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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