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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멸시하였나이까?

말라기 이장우 목사............... 조회 수 1818 추천 수 0 2009.06.18 08: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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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말1:6-14 
설교자 : 이장우 목사 
참고 : 늘푸른교회 2007. 11. 7 

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14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지난주에 본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였다고 하시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하면서 대들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어렵게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성전이 재건되고 나자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열방의 보배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오기를 기대하였는데 전혀 그럴 조짐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는가 하는 항의였습니다. 여기에 대한 답변을 야곱과 에서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멸시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멸시하였는가 하며 또 대드는 것입니다. 6절 말씀을 봅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을 공경하여야 할 제사장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아버지신데 공경함이 어디 있으며 주인이신데 두려워함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자간으로, 주인과 종으로, 남편과 아내로, 목자와 양으로, 왕과 백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1: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이스라엘 백성을 자식으로 양육하였는데 소나 나귀보다 못하다고 하십니다. 짐승들을 주인을 알아보는데 어떻게 너희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가 하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에 대하여 6절 끝에 보시면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주의 이름을 멸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7절을 봅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주의 이름을 멸시하지도 않았고 주님을 더럽게 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주님의 이름을 멸시하고 주님을 더럽게 여긴 것인지, 이어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주의 상을 경멸히 여길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때를 따라 제사를 드리기에 결코 멸시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들의 제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멸히 여기는 죄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8절에서 눈먼 희생을 드리는 것과 저는 것과 병든 것으로 드리기에 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어떤 제물을 드려야할지를 율법에서 명시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22:17-25절에 보시면, 여호와께 예물을 드릴 때에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리라고 합니다. 또한 흠이 없이 온전하여야 되는데 눈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이나 괴혈병 있는 것이나 비루먹은 것을 여호와께 드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것은 열납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에서 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총독이 너를 기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12-14절입니다. 6-10절을 다시 강조하면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고 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성의 없는 제사마저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는 것입니다. 번폐스럽다는 것은 귀찮고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코웃음 치면서 훔친 것,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온 것입니다. 짐승 떼 가운데 수컷이 있지만 사기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10절에서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성전 문이 닫히면 제사가 없어지고 제사가 없어지면 속죄제를 드릴 수가 없으니 저주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제사를 드리는데 이렇게 되어버렸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재물을 처음에는 정성껏 드렸을 것입니다. 성전이 재건되고 나자 솔로몬의 성전과 비교하여 초라하지만 그러나 나중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클 것이며 열방에서 보배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몰려올 것이라는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기다리면서 바르게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리라는 영광은 나타나지 않고 어려움만 가중되니 이렇게 제사를 드려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그런 마음이 든 것입니다. 여전히 이방 나라는 강대국이고 자기 나라는 힘을 쓰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사를 드려도 별 소용이 없다는 마음이 들면서 자연히 형식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성껏 절기를 지키며 제사를 드려도 복을 주지 않는데 이렇게 할 필요가 있는가 하면서 형식적이 되고 마음이 빠져버리니 총독도 받지 않을 예물을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멸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하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모릅니다.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멸시하였는가 합니다. 그러면서도 여호와께 은혜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9절을 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겨달라고 한들 하나인들 받겠느냐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여 사함을 받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입니다. 이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면서도 언약궤를 메고 가면 전쟁에서 이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언약궤 앞에서 죽임 당하고 언약궤는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홉니와 비느하스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게 제사를 멸시하고서도 은혜를 구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모습을 점검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물론 구약처럼 제사를 지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봉사를 합니다. 여러 모양의 봉사를 할 때에 우리의 태도가 어떠합니까? 교회에 잘하고 목사에게 잘하면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와 그런 것이 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복이 주어진다는 말을 들을 때의 우리의 태도가 어떻게 달라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종교적인 열심이라도 내면서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하였는데 그런 것은 다 예수님이 완성하셨기에 예수님의 공로로 의롭다 함을 받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다 예수님의 공로라는 것을 알게 되니 그 동안의 열심들이 시들해 진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는 만큼 복이 주어진다는 것과 그렇게 열심히 하여도 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말라기 선지자의 고발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는 영광과 하나님께서 나타내실 영광이 다른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면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들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세상에서 핍박받고 고난당하는 것은 외면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더딜지라도 기다려야 하는데 그런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한 대로 복을 받지 못할 바에야 무엇을 하려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예물을 드리고 절기를 지킬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모습이 여호와를 경멸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저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며 삶의 일순위입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까?

디도서 1:16절입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이것이 가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지만 그들의 행위로 여호와를 멸시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우리도 저주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까? 11절입니다.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릴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14절에서도 하나님은 큰 임금이기에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이방 민족에게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온 열방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는 때가 언제입니까?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일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새로운 예배의 시대를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도 사마리아도 아닌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장소와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를 믿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을 봅니다. 마침 ‘신앙상담’란에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예배에 대한 질문이 있어서 답변을 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0장을 찾아보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에서 율법을 따라 드리는 제사의 온전하지 못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짐승의 피가 죄를 능히 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도 연약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대로 한 몸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온전한 제물이 되심으로 자신의 몸으로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온전한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죽임을 당하였거늘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받을 형벌이 얼마나 중한지 너희는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나 오늘 우리나 간에 사람들의 행위로 보자면 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더 이상 저주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온전한 제사장의 역할을 믿지 않는 것이 이 시대의 저주요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호와를 멸시하는 것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저주라고 고린도전서 16:22절에서 말씀합니다. 부디 하나님을 멸시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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