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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의 역사적 의미

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2734 추천 수 0 2009.06.19 20: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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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1:4-5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02-003 / 1988.01.10, 17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니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1:4,5)

성경에는 메시야가 오신다는 대망, 큰 기다림이 있습니다. 이것을 조금 나누어 보면 메시야가 오신다라는 약속과 성령이 임하신다는 약속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둘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약속 속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크게 봐서는 하나고 둘로 나눌 수도 있습니다.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타락한 이후 창섹기 3:15에서 이미 여자의 후손에서 인류를 구원할 자가 오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구약은 후렴처럼 메시야가 오신다고 예언하며 신약은 메시야가 오셨다고 선언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아직도 유대인들은 오신 메시야를 인정하지 않고 앞으로 오실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주님의 오심을 두 번에 걸쳐서 설명합니다. 즉 처음에는 영적인 차원에서의 자녀들의 회복인 영적인 회복과 두 번째는 역사적인 회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도 이것을 오해하고 있어서 메시야가 오시면 그들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리라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것으로는 저들이 바라는 메시야 개념과 일치하지 않기에 아직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한 선지자로 인정은 하지만 오신 메시야이신 하나님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만을 믿으며 그들을 유태교라고 해서 기독교와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있는 것같이 우리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의 십자가 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끼치는 여러 가지 특권들 중의 하나인 성령강림을 약속하고 있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이렇게 주님께서 이 세상 역사에 종지부를 찍으시고 거룩한 나라를 새로 완성하시며 죽음이 없고 해함이 없는 나라를 시작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오신다! 오신다! 하는 구약 이야기에서부터 오셨다 하는 복음서, 그 다음 사도행전에서는 승천하시고 다시 오신다로, 요한계시록의 예언된 인류 미래사는 아직도 다 완성되지 않아서 아직도 남아 있는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오셨고 주께서 다시 오실 그 사이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여 모든 신자의 마음 속에 임재하시는 사건이 여기 약속되어 있고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실현되었고 지금 여기에 앉아 계신 분들에게도 실제로 성령님께서  내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오늘 본문을 통하여 확인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많은 힘과 위로가 될 것을 기대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지난 시간에도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이루시려고 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 내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인된 신분으로부터, 벌 받아 지옥에 갈 처지로부터 하늘 나라에서 영원토록 복락을 누리는 복된 자리로 인도해 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며 완성하시며 그 일을 역사 속에서, 시간 곳에서 만들어 가고 계시는 것이 있다는 동적인 신앙 개념을 갖기를 여러분에게 촉구했습니다.

물론 그 하나님의 나라는 죄도 없고 악한 것도 없고 상하는 것도 없고 해하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선포되고 거룩과 의와 축복된 모든 환경이 마련되어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나라의 주인공이 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백성들의 초대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든 신자들이 알고 있고 지금까지 널리 사람들에게 전파된 기독교의 핵심되 내용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를 더 많이 부르시는 일에 우리를 동역자로 쓰고 계시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는 자체에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고 계시다는 엄청난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그도께서 오셔서 죄와 사망 권세를 깨뜨려 우리를 죄 사슬로부터 풀어 내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같이 우리의 입술에, 우리의 인생에, 우리의 존재에 빛과 생명을 허락하사 우리의 인생, 말, 우리의 행동을 통하여 죽어가던 영혼들을 구원해 내시는 일에 우리를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그 일에 동참함으로써 내가 하나님 나라에서 수준이 깊어져 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지금 우리와 함께 만들어져 가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있어서는 우리가 거기에 살 집을 짓고 먹을 우물을 파고 다닐 깃을 만들고 하는 것 이상으로 거기에서 살아야 할 백성들이 백성다와지는 것이 가장 큰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즉 그 곳에 나무를 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난방 시설을 하고 꽃을 피게 하는 것 이상으로 그 곳에서 살아야 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흠도 점도 주름 잡힌 것도 없는 자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 속에서, 역사 속에서 만들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동적인 개념에서 천국을 바라보고 우리 인생을 바라보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점진적인 데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주께서 오십니다. 오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고 있는 권세자, 이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기 위한 작업을 십자가로부터 시작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죄값을 치르는 동시에 우리를 붙잡고 있는 권세자를 없이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고 히브리서 2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마임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오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14-16절)

우리를 꺼내기 위하여 우리를 붙잡고 있는 주인을 없이 하고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전리품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고 있는 주인을,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권세자를 깨부수고 우리를 거기서 해방시켰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 작업이 있는 이후에, 즉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과 그 자리에 소속되었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20:17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갖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주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려 그 권세 아래서 신음하고 종노릇 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그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꺼내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초대하십니다. 초대보다는 입적했다는 것이 더 적당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가리켜 형제라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물인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시켰다는 사실입니다. 내 자녀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외적인 환경과 조건의 개선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공부 잘하게 하려면 뭐부터 해야 합니까? 우선 환경을 조성해 줍니다. 자녀가 고3이면 부모도 고3이 됩니다. 공부 잘하도록 모든 배려를 해야 하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방을 따로 주고 새벽에 먼저 일어나 따뜻한 밥 해주고 독서실에 데려다 주고 잘 때도 시끄러울까봐 막아주고 감기 걸리지 않게 주의하며 1년을 지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말을 물 가에까지 끌어갈 수는 있어도 말에게 물을 먹일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과정을 잘 보십시오. 우리를 붙잡아 죄를 짓게 하고 악한 일을 시키던 주인을 깨부수고 우리를 구해내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줬습니다. 아무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외적 조건의 개선으로 사람이 사람다와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 조건이 성숙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신 훈화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왜 국토 방위에 전념하여 충성을 해야 하는가 내적인 동기 부여가 됩니다.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었더니 우리 자녀들이 독서실 간다면서 오락실 갔다 올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마음에 어떤한 생각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이 부분에서 바로 성령강림이 갖는 가장 커다란 목적이 등장하게 됩니다. 에레미야 31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었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31-33절)

이것이 유명한 새 언약에 대한 예언입니다. 옛날에 세운 언약과 다르다고 합니다. 그러니 새 언약입니다. 이 새 언약의 내용은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입니다. 이것은 옛 언약이든지 새 언약이든지 내용상으로는 변화가 없습니다. 옛 언약도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그런데 왜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고 구별했느냐 하면 그 언약의 성취 방법에서 변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은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렘 31:32). 이것이 새 언약을 주는 이유가 됩니다. 옛날에는 그의 약속을 완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외적 조건을 완벽하게 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안 듣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은, 내용은 같아도 내적 조건을 바꾸는 방법으로 달리 쓰겠다는 것입니다.

외적 조건인 공부방에 녹음기와 비데오, 미국인까지 붙여서 공부하게 해줘도 효과가 없으니 속을 고치는 도리 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바로 속을 고치는 방법으로 성령께서 내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원이 옛날에는 벌 받을 자리에서 예수 믿어서 복받게 되었고 죽으면 천국 가고 이제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하면 구하는 대로 응답받는다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 목적, 한 완성을 향하여 어떤 과정을 가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완성하시는 것을 이 세상 역사 속에서, 즉 시간 속에서 추진해 가고 계십니다. 역사 속에서 주께서 오시며 또 그 속에서 죽으시며 부활하시며 승천하시며 역사는 끝나도 시간은 계속해서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구원 사역에 있어서 중요하게 우리가 대비할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창세기 3장으로 가면 인간이 맨 처음 타락을 하자 하나님이 인간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노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22-24절)

인간이 타락하고 범죄하자 하나님과 같이 있지 못하게 하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화염검으로 오는 길을 막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뭡니까? 예수님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 내용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 찾아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범죄한 것은 우리인데 하나님께서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미시며 그 화해를 방해하는 모든 난관을 하나님 쪽에서 지금 해결해 나가고 계신 것입니다. 찾아 오셔서 임마누엘이 되십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는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6장을 보시면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1-3절). 인간이 밤낮 나쁜 짓만 하니까 이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던 자리에서부터 우리를 완전히 내버려 두고 떠나가셨습니다.

구약성경이 인간의 타락을 이야기를 할 때 중요한 두 가지 내용으로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던 장소로부터 쫓겨 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모든 교제의 끈이 끊기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와 계시던 성령님도 떠나고 이제 우리와 영원히 있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떻게 회복시키나 보십시오. 내쫓기고 함께 있기를 거부당했던 우리에게 하나님이 오셔서 임마누엘이 되셨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회복시키실 것을 구약에서 예언하시고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성취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엘서 2장을 보시면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28-30절). 하나님께서 말일에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신을 충만히 부어서 우리와 함께 있으시겠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을 어떤 시각으로 봐야 하느냐 하면 예수를 믿으면 성령의 은사를 받는다!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못 고칠 병도 낫고 못 붙을 학교도 붙고 사업도 되고 하는 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지금도 만들어 가고 계시고 완성하고야 말 것이며 그 일을 진행하는 중에 드디어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성령님도 드디어 오셨다 하는 시각에서 이 사건을 평가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들 대학입시 준비를 언제부터 시킵니까? 보통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합니다. 국민학교 때부터 서두르는 사람이나 고3 때도 느긋해 하는 사람이 있다면 비정상일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 나가는 눈금들을 보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이루시고야 말 것이며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고 이루어져 가고 있는 동적인 신앙을 가지고 그런 의미의 진지함과 엄숙함, 긴장감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눈금이 어디까지 왔나 하는 눈길이 없으면 나 혼자 살다가 문제에 부딫힐 때면 하나님을 찾고, 해결되면 다시 태엽이 풀리고 또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찾는 반복적인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의 신앙이 어떤 초점을 향하여 모아지거나 쌓여가지 않고 흩어져 있는 코코블럭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늘 이런 문제에서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밤새도록 기도하다가도 다른 분야에서는 어림없는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도무지 인격이나 사고방식이 어떤 방향성으로 모아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하나는 반짝이지만 모아지지 않고 전부 흩어져 있습니다. 성령님이 오셨다는 사건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언제나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린도 전서 15장을 보시면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가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권능은 율법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50-58절)

이 말씀들은 전부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 완성된다. 그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고야 말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의 갈등은 그렇게 되고야 만다는 성경 말씀의 약속과 현실적인 나와의 차이에 있습니다. ‘이렇게 되고 완성된다고 하는데 나는 왜 안되는가’하는 것입니다. 거기가 바로 성령님이 등장하시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고후1:21). 하나님이 시작하셨으니 하나님이 끝내실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상태는 아닌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또 나옵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

성령님이 오셨다는 것은 그가 오셨으니 기쁘다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완성하시며 건설하시는데 있어서 가장 주된 대상물인 우리를 그 나라에 걸맞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로 만들며,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우리를 꺼내신 것같이 집념과 열심과 능력과 지혜로 우리 자신은 내적으로부터 변화시키는 작업을 하시는 것이 성령강림의 골자라는 것입니다. 그가 보증인 이유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변화가 성공될 수 밖에 없다는 우리 쪽의 확인이며 하나님 쪽에서 보자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실패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고린도 후서 5장에 또 나옵니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5-7절)

주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이 일을 시작하신 분도 하나님이요 결과 맺을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완성케 하기 위해 외적 조건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적 조건도 분명하게 성공으로 끌고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내가 애굽에서 너희를 꺼내 올 때는 내가 너희의 남편이 되고 손을 잡아 왔어도 너희를 빼앗겼지만 이제는 손을 잡기도 하고 마음을 바꾸겠다.너희 마음에 내 영을 주어 너의 마음으로부터 나를 따르는 자로 만들어서 이 일을 이루겠다’고 해서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게 와 계시는 것으로 보아 실패가 아닌 성공한다는 증거로 삼고 성령님이 실제로 변화시켜 줄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로마서 7장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도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5,6절)

옛날에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는 죄와 사망이 우리의 주인이어서 좀처럼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오사 우리를 주장하십니다. 이것을 어떻게 전개하느냐 하면 로마서 8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1-7절)

육을 좇으면 죄를 짓고 영을 좇으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지금 영을 좇느냐 육의  좇느냐의 선택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8절을 계속해서 보시면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8,9절)

앞에 있는 성경 구절을 보면, 우리가 착한 생각을 가지고 그 일을 하겠다고 하면 착한 일을 하고, 악한 생각으로 하면 악한 것을 열매 맺으리라 하는 선택에 관한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육신을 좇아 행하면 육신의 일을, 사망의 열매를 맺을 것이고 영을 좇아 하면 의와 생명의 열매를 맺으리라는 말씀같이 되어 있는데 9절에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우리의 선택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거꾸로 우리가 누구 손아귀에 있는가를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와 있으면 내가 그 성령을 좇느냐 안 좇느냐 하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게 와 있으면 나는 영에 속한자이고 영에 속한 자는 하나님 편에 든 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자의 존재론이 나옵니다.

신자는 어떤 의미에서 이중 인격자입니다. 자기 자신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나를 나 되게 하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존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취급하시느냐 하면 성령님이 하시는 것으로 나를 보십니다. 성령이 죄를 좇겠습니까. 성령은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것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으로 나를 평가하십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이 원하시는 것에 맞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상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며 그 둘 사이에 끼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령이 하신 일을 그 분 혼자 하신 것으로 보지 않고 내가 같이 했다고 보아 주셔서 그것을 나누지 않고 성령을 나에게 보내셨기 때문에 성령이 하시는 기도, 성령의 생각, 성령의 한숨, 성령의 하신 일을 내가 한 것으로 취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존재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취급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령은 우리를 대언하며 우리 대신 우리 몫을 하나님 앞에서 하시며 동시에 우리를 변화시켜서 성령이 우리를 전부 사로잡을 때까지 우리를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고린도 전서 2장에 가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10,11절). 복음에 관한 것입니다.

이 절의 앞에 있는 6-9절까지는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도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이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다고 합니다.

예수 믿는 과정을 잘 보십시오. 예수를 여러분이 언제부터 믿게 되었느냐 하면 개인의 이성이 동의 할 때부터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여러분 마음에 먼저 오신 성령이 하나님 편에 들어서 신자가 됩니다.

실제적으로 내가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일 때는 내 안에 오신 성령께서 나를 부단히 간섭하사 이성의 눈을 뜨게 하고 난 다음입니다. 만일 나 혼자 공부한 것으로 좇아갈 수 있는 것이라면 복음의 복음된 은혜는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비밀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의 비밀은 여러분 마음 속에서 좋은 신앙에 대한 결심이나 열정이나 성실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신앙이 자라고 있다는 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 아닙니까?

여러분이 교회에 처음 나왔을 때 어떻게 나왔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부인의 성화에 못 이겨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나온 것 아닙니까? 그리고 오셔서 성경도 안 찾고 설교 시간에 졸기만 했는데 어느 날 친구가 기독교에 대해서 뭐라고 하니까 내가 할 말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늘 잠만 자고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이던 내가 언젠가 보니 이미 많이 알고 있고 하나님 편이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그냥 놔 둬도 크고 싸워도 크고 비, 바람 맞아도 크듯이 생명은 자랍니다.

우리는 얼마나 신비로운 존재입니까. 교회 성장론이나 신앙 교육이라는 것은 정리시켜 주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와 계셔서, 여러분을 주장하시고 여러분도 모르는 것을 여러분을 대신해서 기도하시며 안타까와하시며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사소한 대목에까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람으로 사실은 바꾸어 가고 간섭하고 인도해 가고 다듬고 완성시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강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그래서 고린도 전서 2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를 맺습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11-16절)

누가 주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그 깊은 사랑, 무한한 능력, 그 무궁한 지혜를 누가 알겠습니까?그런데 그 마음을 우리가 가졌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성령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쪽에서 볼 때에는 우리를 그렇게 보십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그와 한 치의 차이도 없이 부합되는 자로 완성되고야 말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 안에서 누리고 있는 자녀라는 신분과 성령이 여러분 안에 와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특권입니까? 완성을 향한 놀라운 현실적인 과정이며 엄연한 사실임을 기억하시고 다시는 절망하지 마시고 힘을 내십시오. 더 많이 항복하고 깨우침을 받고 여러분의 모든 정성을 모아 성경이 요구하는 것같이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며 악에게 지지 말며 그 나라가 오기를 고대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게 여러분의 여러분 되신 복락들, 영광들을 다듬어 나가시고 승리하시는 신앙생활을 권합니다

제목: 성령강림의 역사적 의미- 2
본문: 행1:4-5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사도와 함께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1:4-5

성령의 강림을 약속하시고 사도들로 하여금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까지는 그들의 사역을 시작하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예수를 믿은 경력이 조금이라도 있으신 분들이라면 성령강림에 관한 문제가 신앙생활에 상당히 큰 문제성을 안고 있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고 또 직접 목도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성령강림을 왜 약속하셨고 성령을 보내시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성경 자체에서 찾아봐야 되고 성경에서 설명하고 의도하는 대로 추적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 성령강림, 성령의 은사, 성령의 선물, 성령의 확인하시는 일들은 다른 사람과 내가 어떻게 다른가,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특별 취급을 받고 있는가 하는 데에 더 많이 오용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읽을 때에도 이런 것 때문에 많이 오해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성령강림 이후에는 한 번 설교에 삼천 명이나 회개시키는 역사를 일으켰으며 담대함을 가졌다, 성령님이 오시면 모든 신자의 신앙은 달라진다, 강해진다, 능력으로 가득차게 되고 기쁨과 자신감으로 충만하게 된다 하는 것으로 많은 신자들이 이해하고 있고 또 경험하고 있고 또 그런 사람들을 목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성령에 대한 약속을 그런 의미로 설명하거나 의도한 적이 없다는 것을 오늘 우리가 분명히 확인해 봐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종종 성령행전이라고도 별칭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초대교회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전파와 교회를 세우시는 것과 또 신자들의 모든 활동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셨는가 하는 것이 사도행전만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책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성경이 의도하는 것과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 사이에는 거리가 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일 처음으로 추적해야 하는 것은 성경이 성령 강림에 대한 약속을 어떤 목적과 어떤 의미로 약속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그의 누가복음 마지막에서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9). 성령강림에 대한 약속이 누가에 의하면 능력을 입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이 대부분의 신자들이 성령강림을 이해하고 있는 특징이 아닌가 싶습니다. 즉 성령이 오시면 능력을 받는다 하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으로 소개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아주 쉽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선 사도들에게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약속하시고 성령강림 이후에 능력을 받아서 나가 그들의 사역을 완수했다고 하면 이야기는 쉽습니다만 성경에서는 한 번도 하나님의 사역자들에게 그 사역을 우리가 생각하는 형태의 성공으로 약속한 예가 없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을 통틀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뜻을 먼저 나가서 전파하고 깨우치는 사역자들의 사역이, 그것으로 인해 상대방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것이다라고 약속되어 시행되는 적이 없습니다. 대표적인 것 중에 이사야거 6장을 보십시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 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8-10절)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전하기 위한 사역자로서의 일을 자청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의 사역자로 부르시고 보내십니다만 보낼 때의 약속이 네가 가서 하는 것을 아무도 못 알아 들을 것이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의 생애를 보내시는 동안에 늘 이사야 6:8 이하의 말씀을 언습하시곤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신약에서의 베드로에 관한 예언을 보십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요 21:18,19)

베드로의 끝은 분명히  순교인 것이 자명합니다. 그는 그가 원치 아니하는 죽음을 당해야 하고 그가 하고 싶은 일을 다 마치니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사도들에게 주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강림하셨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고  지혜를 얻고 능력을 입히었다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성령의 간섭과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은 여러 가지들, 예를 들면 예언을 한다든가 병을 고친다든가 감동이 있다든가 하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무엇을 위하여 허락하셨으며 약속하신 것인가 하는 문제에까지는 손이 닿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령의 간섭은 지금도 있고 또 있어야 마땅하고 우리가 마땅히 구해야 할 약속 중의 하나입니다만 그 뜻과 약속들을 우리 마음대로 오용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기대했던 것과 다르다면 성경이 성령강림,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사 함께 있게 하시는 이 일은 무슨 목적으로 약속하셨는가 하는 것을 추적할 필요를 다시 느끼게 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에 관한 약속은 구약 요엘서에 예언되었던 일의 성취라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요엘서 2장의 말씀을 봅시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28,29절). 또 신약에 나오는 성령강림에 대한 다른 설명을 봅시다. 요한복음 16장입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13, 14절)

성령을 보내시는 가장 큰 목적을 진리에 관한 깨우침, 진리에로의 인도, 진리 가운데서의 보호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말씀이 묘하게도 요엘서 2장에 있는 말씀과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오심과 성령을 약속하신 가장 큰 목적을 진리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래 일이라는 공통된 단어가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14:26은 진리에 관한 이야기를 이쪽으로 유도하고 있습니다. 16장에서는 다만 “저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고 했습니다만 14:26에서는 더 뚜렷하게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공통된 몇 가지 내용을 추리해야 됩니다. 장래 일을 말할 것이다 하는데 그것은 진리와 연관이 있다는 것과 또한 이 진리는 주님에 관한 것이라는 이 셋을 묶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24장에서 성령강림을 약속하시며 제자들이 사역에 들어가기 이전에 성령이 오시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 큰 이유 중의 하나를 능력에 두었던 것을 보았습니다. 능력을 입히우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신.구약을 통해 추적해 보면 능력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고 장래의 일과 진리에 관한 것으로 초점을 모으고 있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진리라는  차원에서부터 이 문제를 조금 추적해 보기로 합시다.

언뜻보면 아무런 연관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성령에 관한 이야기가 능력, 진리,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것으로 모아지느냐 하는 것은 성경을 차근차근 추적해 보면 이것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이며 그리고 같은 내용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진리라는 이야기를 꺼낼 때 우선 이런 이야기로부터 출발하십시다.

성경이 신자와 신자 아닌 자를 나눌 때에 이 진리라는 단어로 나눕니다. 불신자는 진리에 의거해서 자신의 인생 목표와 방법을 삼지 않고 자신의 뜻으로 목표와 방법을 삼는 자이고 신자는 우리가 생각하고 깨우치는 것을 벗어난 진리와 절대와 영원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인생의 목표와 방법을 가지는 자라고 나눕니다. 이 얼마나 당연한 일입니까? 예를 들면 디모데 후서 3장과 같은 말씀입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13-15절)

불신자와 신자를 갈라 놓을 때 불신자의 생활에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거짓이라고 얘기 합니다. 진리를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진리를 아는 자입니다. 에베소서 4장으로 가면 설명이 조금 더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17-19절)라고 얘기합니다.

이제 성령님께서 오시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냐 할 때 진리라는 차원에서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원래 자기가 생각하고 경험하고 감각하는 테두리 밖에는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서 목표를 정하고 방법을 정하고 어떤 성취가 있고 실패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비해서 신자는 지금 보고 만지고 경험하는 것이 전부가 아닌 줄 아는 자들입니다. 영원한 나라가 있는 것과 이 땅을 지으신 하나님이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것을 담당하시는 이가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바로 이 진리를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 모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내용 속에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 속에는 언제나 이런 몇가지가 포함됩니다. 세상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나라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우월한 것이 아니라 그쪽이 우월하고 우리가 그쪽에 종속되어 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우리의 말 속에 십자가가 포함되고 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수 밖에 없다는 말 속에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고백이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이고,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라는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이 유일한 신 되심이 거기에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 속에는 이 모든 진리들이 함축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은 요엘서의 주장이나 요한복음 14장이나 16장에 나타난 성령에 관한 설명이 그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요엘서에서 성령을 우리에게 약속하실 때 너희 자녀는 장래 일을 말 할 것이다,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라고 표현했느냐고 하면 그것은 하나의 이유 때문 입니다. 장래 일이라면 우리가 70-80년 살고 죽는 이후의 일, 우리의 인생이 경험할 수 있는 길이보다 더한 영원이라는 시간과 영원이라는 역사와 영원이라는 나락 있음에 대한 깨우침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늙은이가 꿈을 꾼다고 한 것입니다. 나이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꿈을 버리게 됩니다. 이제는 죽을 날만 남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꿈은 젊은이들이 갖지 늙은이들이 갖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엘서에서는 분명히 성령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면 늙은이가 꿈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에게는 살아있는 것과 죽는 것 중 죽는 쪽이 더 행복합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군대에서 제대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령, 대령에서 옷 벗으라는 것은 소름끼치는 일이지만 병장에서 옷 벗거나 상병, 일병에서 옷 벗게 해주면 더 좋습니다. 왜입니까? 제대하고 살 사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대하고 끝이라면 곤란합니다.

신자란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이 땅의 삶은 잠시 지나가는 인생이거 영원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여기서 죽으면 그 다음이 있지 않습니까? 늙으면 늙을수록 꿈이 없고 소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꿈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천국에 가서 주를 뵈오리라, 이제 다가온다. 천국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왜 꿈이 없어집니까? 더 많아집니다. 그래서 늙은이가 꿈을 꾼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젊은이는 이사을 봅니까? 이 이상은 다를 이(異)자를 쓴 이상입니다. 젊을 때는 꿈이 많은 때입니다. 그림을 보면 미술가가 되고 싶고 음악회 가면 음악가가 되고 싶고 설교 들으면 목사되고 싶고 무엇이든지 다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그것들은 욕심에 속하는 데서 나오는 이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언제나 대통령이 되리라, 무슨 장관이 되리라, 과학자가 되리라 하는 등 인간의 생각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에게 이상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가 상상하지 못했고 그가 이해하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며 알지 못했던 세계가 있음을 습격을 받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이상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약속하신 이유입니다.

인생이 뭐냐,세계가 뭐냐,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 우리는 누구냐, 이러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깨우침이 성경 말씀으로 뿐만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그 쪽으로 인도하시며 간섭하기 위하여 약속된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제일 필요한 것은 이런 것 아닙니까?

내가 어느 목적지를 분명히 선정하지 못하면 사실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신앙은 참으로 이상해서 그가 정당한 목적지로 가고 있느냐, 정당한 방법으로 가고 있느냐는 하나도 안 따지고 그가 얼마나 열심히 있느냐만 따집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신앙을 점검하는 방법같이 아주 우스운 것이 없습니다. 누가 열흘을 금식했다고 하면 그 사람이 뛰어난 사람이고 그래서 그 다음 목표는 열 하루, 열 이틀이 되어 갑니다. 또 ‘40일 금식 3회 실시’라는 것을 명함에 써서 다니는 웃지 못 할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기도했느냐, 내가 얼마나 금식했느냐가 자랑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것이 얼마나 목적지에 접근되었느냐로 나타나야 합니다. 지난 1년 동안 한 잔도 안 자고 대학입시를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 떨어졌습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기왕 떨어졌으면 지난 해에 많이 놀았다고 해야 말이 맞지 않습니까? 실컷 놀아서 떨어졌지 밤새워 했는데 떨어졌다면 밤 새면서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목적지를 향해 가는 진전, 누적, 쌓임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우리의 신앙이 마치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점이 가장 큰 약점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런 부분에서 앞에서 우리가 읽은 디모데 후서 3장에 나오는 것 같이 저들이 속도 모르고 살고 있다면, 우리는 알고 있는 자들 아니냐 하는 것이 우리의 능력으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 봅시다. 아주 오래전 20년도 넘은 때입니다. ‘자랑과 정열’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프랭크 시나트라와 소피아 로렌, 케리 그란트가 배우로 나온 것으로 기억합니다. 배경은 스페인 내란입니다. 민란이 일어나서 반란군들이 성을 공격하러 가는데 아무 무기가 없어서 어디서 큰 대포 하나를 구했습니다. 반란군의 장이 프랭크 시나트라이고 그 애인이 소피아 로렌인데 이 반란을 돕기 위해서 영국에서 장교 한 명이 밀파됩니다. 그 사람이 케리 그란트라고 기억이 납니다.

이 큰 대포를 끌고 가면서 정부군에게 들키지 말아야 합니다. 산길로 숨어서 가다가 어느 강에 도착했습니다. 강을 건너야 하는데 건널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케리 그란트가 부력 계산을 해서 뗏목을 만들어 그 위에 대포를 실으려고 합니다. 소피아 로렌을 사이에 두고 프랭크 시나트라와 케리 그란트가 삼각 관계가 됩니다. 용감한 것으로 치면 프랭크 시나트라가 앞서겠지만 영화의 대부분의 줄거리가 싸우러 가는 데까지여서 프랑크 시나트라는 고함만 쳤지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속수무책 입니다. 모든 면에서 케리 그란트에게 지는 것입니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속상하던 판에 강을 건너고자 하는 케리 그란트의 모습이 보기에 한심합니다. 대포는 큰데 뗏목 몇 개 수수깡 같이 붙여 놓고는 그 위에 대포를 띄우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띄우면 가라 앉는다, 쇠는 물보다 무겁지 않느냐 그러니 어떻게 띄우느냐고 말합니다. 그러자 케리 그란트가 대포가 뜰 만큼의 부력을 계산해서 뗏목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프랭크 시나트라는 띄웠다가 가라 앉으면 어쩌느냐고 해서 둘은 치열하게 싸웁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거기에 대한 진리가 없으면, 사실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그것은 시험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띄웠다가 빠지면 할 수 없고 안 빠지면 다행이다라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절대절명의 순간인 것입니다. 그때 자신있게 말합니다. ‘띄워봐라! 띄워서 가라앉으면 나도 넣어라.’ 이말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래서 넣었더니 뜨는 것입니다. 다들 놀라지만 안 놀라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뜰까 안 뜰까를 염려한 것이 아니라 뜨는 것을 당연히 안 사람 쪽에서는 놀랄 일이 없습니다. 뜬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의 능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진리를 아는 자가 그의 인생과 시간과 노력이 누적되어 갈 수 있는 목표와 방향과 방법을 알고 있는 자들을 능력있는 자라고 지금 지칭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성령은 우리에게 보내지는 것입니다. 진리에 관한 깨우침과 그 사실에 관한 현실적인 준비와 실천을 할 수 있도록 성령님은 약속된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남과 비교하여 펄펄 뛰는 것은 내가 얼마나 남과 다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정말 주님의 사랑을 알았으면 남보다 더 양보하고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그런데 하나도 양보 안 합니다. 싸움만 잘하고 밤낮 하는 자랑은 성령을 받아서 속이 사이다같이 튄다고 합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능력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병이 나았다. 그런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나타남을 허락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확인입니다. 그러니 사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는 고달파집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의 그 기록들이 제시하고 있둣이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진리의 깨우침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쉽게 회개하고 항복하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말을 안 듣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에게 주실 뿐만 아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서 간섭하셔서 우리가 우리의 뜻대로, 미련한 대로 결정을 하거나 실수를 하지 않도록 우리를 제어하시기로 한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달플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다.

자녀들을 키우면서 볼 때, 자녀들이 부모가 있는 것을 고마워 할 때가 많습니까? 귀찮아 할 때가 많습니까? 귀찮아 할 때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모의 큰 책임 중의 하나가 자녀가 자기네들 마음대로 인생을 살지 못하게 간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욕 중의 가장 큰 욕이 저 놈들은 부모도 없나, 부모가 있다면 어떻게 저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었는가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은 부모를 달가와 하지 않습니다.   

톰 소여의 모험을 보면 톰이 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워하는 사람이 허클베리 핀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안 가도 되고 세수를 하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어도 시비거는 사람이 없습니다. 흠이 있다는 손으로 집어 먹을 음식이 늘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지 누가 무어라고 하는 적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겪는 아주 신비로운 경험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바로 우리의 계획과 뜻과 욕심대로 모든 것이 되지 않도록 간섭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보십시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8:26-29)

성령이 직접 빌립을 좌우합니다. 빌립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아는 바도 없고 예지한 바도 없고 필요성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성령께서 그를 강권하여 이 광야로 내보냈고 이 내시를 만나게 하십니다. 그가 전혀 모르던 일에 그가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적 사건이라는 의미와 우리가 지금 인정하는 사건 속에서 이 일이 진행되어 있으니까 빌립이 대단한 사람이겠습니다만 빌립 입장에서 보면 어느 날 갑자기 기도하고 있는데 성령이 오셔서 광야로 가라고 호통쳐서 몰아낸 것입니다. 광야는 좋은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계획대로였다면 여러분 중에 이 자리에 있었을 사람이 몇 없었을 것입니다.

역시 사도행전 13장을 보시면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를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게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슴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1-4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성령께서 간섭하셔서 바나바와 바울을 보냅니다. 초대교회에서 만일 사람들끼리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을 하고 사람을 뽑았다면 누구를 뽑았을 것 같습니까? 아마도 베드로와 요한을 뽑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첫 설교에서도 이름을 남긴 자이고 성전 앞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일을 담당했던 대표적인 사도들 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뜻 밖의 사람을 지목합니다. 이 둘은 원래 열 두 사도들에 끼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더욱 사도행전 16장에서는 성령께서 훨씬 더 강하게 간섭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는데 성령이 이렇게 간섭하십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열이 허락치 아니하시는지라.”(6,7절)

만일 이때 성령께서 막지 아니하셨으면 구라파보다 아시아가 문명이 앞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성령께서 아시아로 못 가게 해서 결국 로마로 가서 유럽으로 복음이 먼저 전파되고 서쪽으로 돌아서 미국을 거쳐서 우리나라에 늦게 들어왔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이 하고자 하는 일이 선한 일이고 필요한 일 임에도 불구하고 막으셨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을 보내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 일단 없고 또 선한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과 방법으로  할 줄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들을 배워야 하며 거기에 있는 것을 습득해야 하며, 우리가 고쳐져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나의 삶과 존재와 나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이 일을 우리는 우리 힘으로는 감당치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사 우리에게 이 일을 넉넉히 하도록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게 된 기록이 말하자면 사도행전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받는 위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손에 맡겨두지 않으신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하는 것을 배웁니다. 그것이 우리를 게으르게 하거나 가만히 있어도 좋다는 약속은 아닙니다. 우리는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하며 있는 힘을 다해 충성을 약속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법과 마음에 대해서 얼마나 연약한 자이고 미련한 자인가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신경써야 하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에 대하여 민감할 준비를 하며 민감하게 반응할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보다 우리의 생각에 민감하고 우리의 욕심에 훨씬 많이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내 욕심에 사로잡히면 종교적인 행위와 종교적인 열심을 부리면서도 하나님 뜻에 합하지 못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성령께서 이제 우리 안에 계시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사 우리로 장래를 내다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진리로서 우리에게 깨우치사 우리를 그리스도의 뒤를 좇는 자로 만들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 신앙이 얼마나 쉽게 하나의 스타가 되고 사람들 앞에서 구별된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서 툭 튀어 나올 수 있는가를 여러분의 신앙생활 속에서 많이 두렵게 점검하셔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요한에게 바울에게 성령강림을 허락하시고 방언을 하게 하시며 기뻐 뛰게 하시며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게 하셨지만 그것이 그들의 개인적인 욕심을 위하여 쓰여질 수도 없고 쓰여진 적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그들의 뼈를 묻었고 소리없이 죽어갔던 기록이 사도행전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신앙의 욕심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주를 향하여 가진 모든 열심과 속에서부터 일어나는 정열이 무엇을 위해서인가를 점검해 보셔야 됩니다. 여러분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몇 십 년의 인생이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까?

미국의 어떤 유명한 예언가에 의하면 서기 2100년 이전에 뉴욕과 로스엔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가 핵전쟁에 의해서든지 지진에 의해서든지 다른 공해에 의해서든지 잿더미가 될 것 이랍니다. 맞느냐 안 맞느냐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그곳으로 가려는 허황된 꿈은 꾸지 마십시오. 미국에 가서 사는 것을 시비하는 것이 아니라 기껏 우리의 목숨은 그런 식이기 때문입니다. 이것 하나는 약속

할 수 있습니다.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이 지구가 종말을 고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뉴욕과 로스엔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뿐만 아니라 이 세상 전체가 종말을 고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여러분과 제가 죽는 날은 앞으로 50년도 남지 않았습니다.

준비를 왜 못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안에 허락되어 있는,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이 여러분을 말씀으로 인도하여 여러분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것으로 간섭하는 것을 왜 물리치고 여러분이 사회에서 이루어야 할 업적과 남보다 못하지 않다는 자기 집념을 위하여 자존심을 세우는 일 밖에는 신경을 쓰지 못합니까? 왜 남에게 지지 못하며 양보 못하며 악에게 져서 악으로 악을 갚는 시험에 말려들고 있습니까? 왜 여러분 마음에서 평온을 빼앗기며 주님이 칭찬하시는 자리에서 떠나 사람들이 박수치는 자리에 가 있습니까? 돌이키셔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이 혼자가 아니 것과 그런 이유로 부름을 받지 않았던 것을 마음에 다시 한 번 깨우치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삶을 새삼스럽게 결심하는 이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박영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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