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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

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2540 추천 수 0 2009.06.19 20:19:19
.........
성경본문 : 행1:6-8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04-006 / 1998.1.24/1.31/02.07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6-8

이 본문 말씀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아주 익숙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모든 신자들이 예수를 믿고 기독교 신자라고 자처를 하는 한 최고의 책임과 사명을 이 증인이 되는 것으로 삼고 있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며 우리의 삶의 더 주님을 닮고 싶어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꼭 그것만을 위해서 제시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 8절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이유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6절에 있는 것같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까!”하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이제 천국이 도래하는 것이고 이 세상 역사가 끝이 납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그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 속한 것이니 너희는 거기에 대해서는 알 바 없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증인이 되라는 얘기를 사명과 책임으로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게 일방통행식으로 생각하기에는 그 내용이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주어진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었으면 할 일이 뭐냐? 전도하는 것이다, 죽어가는 영혼을 주게 인도하는 것이다’라고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뜻이 본문의 의도하는 내용에 비해서 너무 축소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8의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이 갖는 그 폭과 깊이는 우리가 쉽게 생각하듯이 불신자들을 주께 인도하여 예수 믿게하는 그런 원색적이고 가장 단순한 얘기 만이 아니고 훨씬 더 깊은 내용을 포함합니다. 이 깊은 내용을 살펴보아서 우리의 신앙을 더욱 성경이 요구하는 대로 초점을 맞춰야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선 질문을 잘 이해해야 됩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이까.”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는 생각 중에 대표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은 그들은 그들이 구원 얻을 어떤 조건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선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유일한 대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금 우리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심정과 같은 것입니다. 자기들은 구원이 필요한 자가 아니라 구원을 얻은 자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그들이 생각하는 그것을 하나님이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언제 줄 것인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빨리 주께서 주의 나라를 임하게 하여 자기네들의 복받은 것과 옳은 것을 확인시켜 주시고 그렇지 않은 원수들을 빨리 멸망시키는 일이 일어나기를 고대하는 자들입니다. 거기에 대한 주님의 답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고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증인이 되는 일이다라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주의 나라 임하심이 이 때이니까”라는 질문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무엇이며, 거기에 대한 답이 왜 “증인”이라는 말로 등장하느냐 하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면 질문과 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됩니다.

그것은 마치 이것과 똑같습니다. 예전에 학교 다니던 시절로 생각을 잠깐만 돌려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이나 그 때나 마찬가지로 우리는 경쟁사회에서 컸고 언제나 등수와 합격, 불합격, 당락 이런 문제가 걸려있는 인생을 살아 왔습니다. 시험을 본다 할 때 좋아하는 학생들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시험을 본다 할 때 좋아하는 학생들이 누구입니까? 공부 잘하는 학생들입니다. 지금식으로 하면 앞 줄에 앉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느 학교나 키 작은 학생들이 공부를 잘했고 링컨이나 저 같이 키 큰 사람은 늘 못하곤 했습니다. 뒷자리에 앉아 있으면 역시 주의가 산만해져서 인생의 깊은 의미를 따지다가 공부를 못하는 예가 많곤 했습니다.

제자들이 말하는 주의 나라 임하심이 지금입니까?라는 물음은 그런 뉘앙스입니다. 이제입니까? 언제 합격자 발표합니까? 이런 뜻입니다. 지금 이 제자들이 가지고 있고 또한 유대인들의 최고의 관심사는 ‘나는 옳고 너들은 틀렸는데 옳은 것이 옳은 것으로 드러나고 틀린 것이 틀린 것으로 드러날 때는 언제인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이것이 모든 인간들의 유일한 종교적인 본능입니다.

나는 옳고 당신은 틀렸다. 이것이 신앙심을 갖는 모든 사람들의 인간적인 본능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앙심을 갖는 것도 옳으려고 갖는 것입니다. 이 참고서를 보면 공부를 더 잘 할 수 있다는 식으로 기독교를 믿으면 내가 더 옳은 사람이 된다는 발상이 ‘나는 옳고 저 사람은 틀리다’라는, 옳고 그름의 분별 차원에서의 내용 밖에는 가지지 못하는 예가 너무 많습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이 “증인”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슨 뜻이냐는 것입니다. 질문은 ‘누가 옳습니까. 옳은 것이 언제 확인됩니까. 언제 드러나며 틀린 것이 언제 벌을 받습니까?’인데 왜 그에 대한 대답이 언제이다가 아니라 그것은 알 필요가 없고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를 조금 더 추적해서 이 본문이 갖고 있는 확실하게 파헤쳐 보려고 합니다.

성경이 기독교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신앙의 본질,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나중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인간들을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심판하시는가 하는 것으로 살펴보는 것이 제일 빠를 것입니다. 누가 공부 잘했느냐는 시험 점수 발표나면 알 듯이 무엇이 신앙의 최고의 내용이고 경지이고 옳은 것이냐 하는 것은 성경이 마지막에 사람들을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심판하느냐 하는 것을 추적해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니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니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31-46절)

나중에 판단을 하시는데 한쪽에게는 ‘너희가 나에게 잘했다’하고 다른 한쪽에게는 ‘너희가 나에게 잘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잘했다거나 잘못했다고 판정받은 양쪽에서 다 놀란 것은 잘했다고 칭찬받은 쪽은 ‘언제 우리가 그렇게 했습니까?’이고 잘못한 쪽도 ‘언제 우리가 그렇게 안했습니까’라고 합니다.

여게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너희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고 지극히 작은 자에게 안한 것이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내가 구제를 했다, 좋은 일을 했다하는 문제에 그친 것이 아니라 좋은 일, 구제, 봉사, 헌신, 돌아봄의 대상에 더 관심이 있으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그래서 이 분별에서 꾸중을 들은 쪽은 언제 우리가 주님이 옥에 갇힌 것을 보고 안 돌아봤습니까. 언제 주님이 목마르신 것을 보고 우리가 마실 것을 안 드렸습니까. 주님이 목마르신 것을 봤을 때 우리는 했습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너희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통틀어서 최고의 대접을 받는 사람은 한국교회 목사일 것입니다. 어느 누구보다 대접을 잘 받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것은 인정이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는 것은 눈에 안 띄는 자이고 도와줘서 별 볼일 없는 자이고 생색이 안 나는 자입니다.

이것은 다만 구제에 관한 이야기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옪다든가 그르다는 일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불쌍한 자를 도와주었다는 데에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금 주님의 대답은 옳다, 그르다라는 그것 하나만을 절대적으로 추출해내서 이론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대상에 관한 문제로, 대인관계에 관한 문제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옳음도 그 옳음이 이론적이고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누구에게 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조금 더 추적을 해보십시다.

마태복음 9장을 보면 성경이 설명하는 대인관계에 관해서 더 확실해지리라 믿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9-13절)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과 사사건건 충돌했던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 관원들, 종교적인 지도자들의 싸움거리는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였던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 계속 묻습니다. 왜 당신은 옳은 것을 하지 않고 그른 것을 합니까. 지금도 문제로 삼는 것이 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입니다.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는 것은 죄를 진 사람을 용납함으로써 죄에 대해서도 마음을 터 놓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죄를 싫어하고 의를 원하는 자라면 죄를 진 사람을 마땅히 꾸중하고 멀리해야 옳지 어떻게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십니까. 이로 보건데 당신은 의를 좇는 가사 아니라 죄를 사실상 용서하고 있는 공범자가 아니냐’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주님의 대답은 호세아 6장의 말씀을 인용하시면거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제사란 그런 의미에서 자기의 옳음을 증명해 내는 행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나는 옳다, 나는 틀린 일을 행하고 있지 않다하는 것보다 긍휼이 낫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옳다는 얘기를 할 때에는 그 옳음이 내가 하나님 앞에 용납받는 절대적인 바른 일을 했고 죄를 행치 아니하었습니다라는 느낌으로 인간들에게 이해되고 있는데 반하여 주께서 요구하는 옳음에 관한 문제는 남을 얼마나 용서하고 용납하고 사랑하느냐로 합격을 받아야지 남을 멸망시키고 손해를 끼치면서까지 나만 옳다, 나만 죄를 짓지 않았다는 식으로의 옳음은 성겨이 얘기하는 옳음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이것을 이해하기로 하십시다. 지금까지 얘기한 것의 결론으로 연결되는 것을 잘 보셔야 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므로 꼭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해가 안되면 외우십시오. 외우면 어느 날 이해가 됩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려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불의,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9-14절)

죄 지은 사람과 죄 짓지 아니한 사람 중에 어떻게 하나님이 죄 지은 사람에게 더 의롭다 하겠습니까? 말이 안 맞습니다. 한쪽은 나는 죄 짓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 사람같이 죄 지은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보고를 했고 하나는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했는데 왜 하나님이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한 사람을 더 의롭다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이해하기 쉽습니다. 한쪽은 교만했고 한쪽은 겸손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밤낮 죄 짓고 겸손하면 죄 안 지은 사람보다 나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범인들이 제일 재미없는 것은 죄 짓고 회개해서입니다. 악당은 악당다워야 주인공이 살아나지 악당이 빌빌거리면 주인공이 뚜렷해지지 않아 재미없습니다. 악역을 악역답게 해줘야 모든 사람의 공분을 삽니다. 저 천인공노할 악당를 누가 없앨것인가 할 때 아무리 바보같은 주인공이라도 악당이 너무 미웠기 때문에 악당만 쳐부수면 갑자기 멋있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비유는 겸손이나 교만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이 판정이 무엇을 근거로 해서 나왔느냐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로움이 왜 평가받지 못하느냐 하면 그의 의로움이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구분해서 나는 옳고 저 사람은 틀렸습니다라는 식의 의로움은 성경이 추적하는 의로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의로움은 그의 의로움이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끼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 나타나는 예수님을 걸고 넘어진 바리새인들의 모든 공격을 보십시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리고 왔을때의 논쟁에서 ‘이 사람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님이 어떻게 판정을 내리셨습니까? 그 여인을 옳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을 죽이지도 않았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께서 지금 추구하시는 옳음, 모든 신자에게 요구하는 성경의 의라는 것은 결국 그를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죄에서부터 돌이텨 살려내자는 싸움에 비해서 인간이 갖는 의는, 인간이 추구하는 종교심은 ‘나는 옳고 저 사람은 틀립니다. 하나님 빨리 오셔서 내가 옳으니 상을 주시고 저 원수를 멸망시켜 주십시오’ 이것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그것이 지금 사도행전 1:6이하에 나온 질문입니다.

‘주여 주의 나라의 임하심이 이 때니이까. 빨리 우리를 상 주시고 이 원수들은 다 죽여 주시옵소서,’ ‘아니다. 언제 그렇게 할 것인가는 아버지의 손에 있는 것이고 지금 네가 당장 해야 할 것이 있다면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인 제자들 입장에서, 주의 나라의 임하심이 지금입니까라는 요구 속에 그 민족과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모든 사람들을 심판해 줄 것을 요구하는 요청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증인이 됩니까? 그들이 심판을 요구하는 이웃들인 예루살렘, 유대만이 아니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은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붙잡고 있는 로마를 향하여 가고 있지 않습니까? 로마를 물리치거나 로마를 넘어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로마를 구원하기 위하여 복음은 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마저도 아시아로 가기를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그르 칼로 붙잡고 있는 로마를 향하여 복음을 꺼내도록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땅 끝까지 이르려ㅓ 증인이 되라는 중요한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요구하는 것들, 나는 토색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불의와 간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렸습니다라는 것이, ‘나는 저 사람과 다릅니다’하는 나 하난 합격점을 받는 식의 옳음으로 기독교를 이해하고 있다면 참으로 위험합니다. 성경은 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내 이웃이 얼마 만큼 이익을 얻고 은혜를 입고 있느냐로 나의 옳음을 점검하라고 요구하고 있지 나의 옳음이 저 사람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을이 예수님께 끊임없이 들고 나온 모든 것들, 안식일 논쟁이나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관한 문제나 죄인과 왜 식사를 함께 하느냐는 문제 등등이 모두 율법을 가지고 나오는 문제입니다. 그래서친히 율법사가 예수님께 이런 질문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계명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이에 대해 이렇게 한 마디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같이 사랑하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성경 어느 곳에서나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설명합니다.

갈라디아서 5:14을 봅시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모든 계명, 율법이라는 것은 전부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의로움은 죄를 짓지않았다, 나는 도적질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재물을 훔치지 않았다, 살인하지 않았다와 같이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제가 늘 이런 예를 듭니다만 이것은 열심을 가지신 신앙인들을 넘어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향을 똑바로 잡아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새벽기도하는 것, 금식기도하는 것,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하고 나면 꼭 웁니다. 새벽기도하고 나서 이런 명단을 만든다면 새벽기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들 잠자는 시간에 새벽기도 할 만큼 주를 사랑하며 주께서 요구하는 경지에 가고 싶으면 그의 한 걸음 더 나온 신앙적인 열심히 그로 하여금 남을 더 사랑하고 남을 더 용납하는 경지로 가게 해야지 왜 그가 열심을 낸 종교적인 행위가 이빨을 더 날카롭게 하는 것으로 바뀌느냐는 말입니다. 꼭 ‘선생님 언제 시험봐요?’하는 공부밖에 모르는 아이들처럼 왜 그렇게 가야 합니까? 주의 나라가 임하심이 이 때니이까? 그 질문밖에 없습니다.

천국을 사모하는 것도, 어서 오셔서 내가 괜찮은 사람이란 것을 빨리 증명해 주십시오라는 차원이라면 그의 신앙은, 그의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은 틀린 것이라고 성경은 말 합니다.

마가복음 3장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싸움인가 하는 것을 예수님이 실제로 당한 사건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실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거,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는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1-5절)

지금 이 사람에게는 손이 낫느냐 낫지 않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율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을 하시나 안하시나를 보려고 합니다. 고침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기쁠 것인가 그가 불구에서부터 나아진 기쁨에 동참하고 그가 지금 불구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은 간데없고 ‘고치기만 해봐라, 너를 율법을 어겼다는 것으로 걸어 죽이리라’는 생각만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바리새인들은 그 시대 유대인들 중에 정치적이 한 집단으로서 분리파라 하는 유명한 정치, 종교적인 집단이었습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대로 경건하게 살자고 모인 정치적이기도 하고 종교적이기도 한 특별한 엘리트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의가, 주를 향한 열심히,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주님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대단한 아이러니입니까?

이것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늘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여기서 걸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종교적 본능이, 인간적인 상식이 이런 차원에 머물러 있기가 좋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같이 사랑이라는 차원, 용서라는 차원으로 넘어 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우리는 종교심마저도 남을 죽이는데 더욱 잘 쓰는 사람들이지 남을 살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안식일을 깨는 한이 있어도 남을 살리는 게 급하다고 하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걱,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십니다. 그러나 모두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이 때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이 일을 행하자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고 성경은 지적합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혹시 누가 밉거나, 누구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구약에 의하면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율법을 받고 있는 동안에 밑에서 백성들이 딴 짓을 하고 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절하며 난리법석입니다. 하나님께서 노하셔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을 다 죽이고 내가 너로 새 민족을 일으키겠다.’ 이에 대해 모세가 뭐라고 기도했는지 아십니까? ‘이 백성을 다 죽일거라면 제 이름도 생명책에서 빼 주십시오.’ 이것은 아주 대단한 기도입니다. 민족을 사랑하는 모세의 마음이라고 볼 수 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알기 때문에 나온 기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런 사건을 기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경이 말하는 옳음, 신앙의 가장 큰 핵심은 한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법을 지키는 마음이 아닙니다.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자는 것이 법정신 아닙니까? 악하고 나쁜 길로 사람이 가지 못하도록 선한 길에로의 안내 아니겠습니까?

성경이 율법에 대해서도, 성경의 모든 요구에 대해서도 이웃 사랑이 율법의 완성, 율법의 마침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늘 명심해야 됩니다. 내가 아는 성경적인 지식, 내가 겪은 신비로운 경험, 모든 것을 동원해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유익하게 되는 것으로 쓰여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문제있는 신앙인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제일 좋은 사람인가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외로울 때 그리고 고달플 때 누구를 만나고 싶은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만나고 싶은 사람이 똑똑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여러분 아십니까? 만나면 똑똑한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말 한 마디만 하면 그것은 이렇고, 이 말하면 이것은 이렇다고 합니다. 다 안다는 듯이 얘기하며 잘난 척하는 사람을 만나서 무엇합니까?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그가 똑똑한 것이 증명되는 만큼 우리는 바보가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따뜻한 사람이 최고입니다. 편한 사람이 최고입니다. 우리애가 어떻고, 어떠어떠해서 속상하고 또 무슨 일은 이래서 안 좋고 하며 심각한 얘기를 하는데 눈을 껌벅거리며 너 점심 먹었니? 하는 사람이 최고입니다. 말하는데 벌써 눈이 바짝이면 피곤합니다. 그 똑똑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가 나오면 모든 사람을 서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얘기하면 입을 딱 벌리고 드고, 한 번 들었던 이야기를 또 들어도 똑같이 놀라며 듣는 사람, 이 사람이 최고입니다.

여러분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람, 한 번 마주쳐 인사한 사람까지 그리스도께 기도하는 제목에 넣어 주 앞으로 끌어오며 이익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야 여러분의 존내가 가치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여러분의 등뒤에서 가리움을 바고 하나님 저를 축복하시기 전에는 제 뒤에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면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그것이 말하자면 주의 나라가 임하심이 이 때니아까 하는 질문에 포함되는 내용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거시고 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그 답 속에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빌립보서 1장을 보면서 말씀의 결론을 내립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애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녀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20-24절)

사도 바울의 이 답을 잘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고생고생해서 지금 이 시간까지 와 있습니다. 그는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이고 주를 만날 것이며 지극한 영광과 상급 속에 영접을 받을 것입니다. 그는 죽는 것이 훨씬 나은 사람입니다만 살아있는 것이 이 글을 읽는 대상들, 빌립보 교인들, 그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그의 고생을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영광된 일인가 하기 전에 자신이 살아서 이익을 볼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나면 고생의 길도 기쁨으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가 있으므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가문과 동창들과 이웃들이 이익을 보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그런 땅 끝까지, 우리 주변 사람들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 있고 그 일에 우리가 증인인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은혜를 입고, 있게 되는가를 아셔야 됩니다. 주를 찾을 줄 모르는 내 친척, 혈육, 가문의 형제들, 내 동창들, 이웃들이 나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향기를 간접적으로 맡고 내 기도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 소개되고, 하나님이 나의 인생과 그들과의 접 촉 속에서 그들을 간섭할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존재입니다. 여기에 있는 말씀처럼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그러한  “너희”를 갖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그들 앞에 여러분이 나는 옳고 너희는 틀렸다라는 구별되는 자가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서라도 내가 더 살아야겠고 이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되리라는 입장에서 그들을 붙잡아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들은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여 요청하지 않지만 나는 알고 있기에 홀로 기도하며 안타까와하며 ‘너 회개하기 전에 죽으면 안돼’라고 부르짖는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생에 있어서 신앙의 정당한 방향입니다.

얼마나 많이 용서하며 얼마나 많이 용납하며 기도하며 안타까와하는 자인가 여러분 스스로를 반문하십시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성경적인 지시과 신앙생활의 경력이 ‘너는 아직도 멀었어’라는 것으로 여러분 표정에 쓰여지는 것이라면 안됩니다. 성형수술 하십시오. 여러분을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을 얻게 하며 긍휼과 자비를 펼치기를 기뻐하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하는 것으로 여러분의 인격과 표정과 삶과 모든 것을 바꿔 나가도록 채찍질하셔야 됩니다. 그것이 성경이 얘기하는 신앙의 방향입니다. 그럴 때에 여러분의 인생이 기적과 승리로 가득찰 것을 약속합니다

제목: 증인-2
본문: 행1:6-8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봇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6-8

사도행전  1:6-8까지의 이 내용에서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 질문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지금입니까? 그 때 주께서, ‘그 때와 기한은 아보지의 권한에 속하였으니 너희의 알 바가 아니다. 너희가 할 일은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는 일이다’라고 하신 것을 명심하셔야 됩니다.

성경은 언제나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물질계, 이 세상이 언젠가는 그 역사와 존재가 끝날 날이 있다는 것을 얘기합니다. 그 종말은 주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 이 행성 지구가 뜨거운 체질에 다 녹아나고 없어질 것이라고 얘기 합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그 돌연한 종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점진적으로 완성되는 어떤 목적을 향하여 이 세상의 종말은 계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를 혼돈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이 새상이 끝나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끝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고 숨쉬고 호흡하는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목적지이거나 고향이 아니기 때문에 끝을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끝내고 우리에세 영원한 처소, 본향으로 약속된 것이 올 것이며 그 오는 나라, 완성될 나라를 준비할 일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언제 어떻게 끝이 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관심이 아니어야 한다고 성경은 얘기하고, 그러나 도래할 나라를 준비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를 혼돈해서 오히려 이 세상이 언제 끝날 것이냐에 대해서 관심을 표명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종말에 대한 몇 가지 예언 중에도 1999년이라는 예언이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몇 년 남았습니까? 아주 심각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런 돌연한 종말만을 목표로 놓고 신앙을 부추기면 세상을 등지는 신앙의 형태가 생기게 마련이고 그 끝을 위해서 오늘 있는 것을 다 팔고 빨리 다 써 버리며 그것만을 몰두하는 현실 도피적인 신앙이 만들어 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부분은 우리가 관심을 가질 부분이 아니라고 합니다. 언제 어떻게 오느냐에 대한 관심이 아니고 종말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 종말은 이 세상을 끝내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영원히 허락될 나라를 세우는 것으로 이어지기 위한 끝인 것입니다.영원히 주어질 나라에서의 우리의 수준, 우리의 모습을 준비하며 그 나라를 건설하며 그 나라에 불러들일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아들이는 일에 참여하는 일이 우리의 현실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혼돈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고 증인이 되어야 하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현주소요 내용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서 이제 우리의 신앙생활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도대체 살아서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기다려야 하며 어떠한 일들을 우리의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펼쳐보여야 하는가에 굵은 선을 긋고 우리의 책임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실천하기 위한 조목들을 확인해야 됩니다.   

마태복음 28장을 보시면 사도행전 1:8의 말씀을 확대해서 설명한 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19.20절)

여기에 세 가지 명령이 떨어집니다. 제자를 삼으라, 세례를 주라, 가르치라. 이 세 가지를 대 위임령이라고 합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이 세 가지 명령을 수행해야 합니다. 증인이 되는 일의 구체적인 내용이 이 세 가지 일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먼저 제자삼는 일부터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기에 쓰여져 있는 ‘제자를 삼으라’는 말은 재미있는 말입니다. 헬라어 원문으로는 이것을 마태튜어라는 말로 쓰고 있습니다. 영어의 mathmatics의 어원입니다. 제자를 삼는다는 것이 수학의 어원인데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뜻과는 다릅니다.

지금은 워낙 많은 인구가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집단으로 가르치고 지식의 전달밖에 못하지만 옛날에는 사제지간이 된다 하면 혈연관계를 맺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관계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부자지간의 밀접한 관계와 버금가는 관계였습니다. 옛날에는 제자가 되면 그 스승의 집에 들어가서 먹고 살면서 평생을 그와 같이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우리말로 도제(徒弟)라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즘은 다만 한 시간, 한 학기 지식을 전달받았다는 정도로 제자라는 말을 쓰기 때문에 이 말이 많이 약화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야 하는 증인이 되는 일,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있어서 우리에게 맡긴 커다란 명령인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 속에서 보통 신자들은 전도를 하라, 예수를 전하라, 복음을 전하라는 것으로 그 내용을 이해하고 있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지금 마태복음의 표현을 빌면 거기에는 전도하라는 단어를 쓰지않고 제자를 삼으라고 합니다, 물론 이 제자를 삼으라는 말은 전도를 하라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하라는 말을 쓰지않고 제자를 삼으라는 말을 쓴 데에는 주꼐써 그의 나라를 건설하시며 그의 나라의 백성으로 부른 우리들을 훈련하시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전도를 한다는 것과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상당히 다릅니다. 전도는 보통의 경우 선포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내용을 상대방과 의논을 하거나 토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제자를 삼으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더 집요하고 끈질겨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단어입니다. 한 번 가서, 논리적으로 전달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라는 명령이 그 속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를 삼으라는 것은 말하자면 내가 갖고 있고 증언하기를 바라는 내용들을 그에게 말이나 생각으로만이 아니라 나의 존재와 삶의 모습과 모든 것을 바쳐서 상대방을 설득하라는 책임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이 제자 삼는 일이 없어진 것이라고 봅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바라는 신앙의 형태는 교회생활에 참여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도 그런 요구들 때문에 몇 가지 일들을 타협해서 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새로 오시는 분들게 우리가 아는 척을 안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많은 분들이 이렇게 소개를 해오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제가 아는 누구가 다음 주에 교회에 올텐데,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아는 척을 하지 말아 주십시오.’ 요즘 부탁이 이렇습니다. 부담 갖기가 싫답니다.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은 하겠는데 오셨느냐, 심방할 테니 이름 적고 주소 적으라고 하는 말이 질색이랍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잘할 수 있다는 얘기지만 그 이상의 중요한 문제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 상태는, 여러분과 저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여러분은 제가 전달하는 신앙의 내용을 듣고 즐기고 가지 그것으로 여러분의 생활 속에 녹아 내렸는가를 제게 점검받는 것을 거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내 인격과 삶에서 어떻게 녹아 내리고 있는가를 점검받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 안 좋은 것은 못 본 척 하고, 여러분은 헌금이나 내기로 하고 저는 돈이나 받아 먹기로 하고 사실은 뻔히 알면서 그럴 듯한 얼굴을 하고 살아가는 공생하는 기생충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더 이상 목숨 거는 것으로는 쓰지 않기로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요즘 큰 교회가  잘되는 이유는 숨기가 좋기 때문입니다. 교인이 300명이 넘으면 목사가 이름을 다 외우지 못합니다. 그러니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구별이 없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뒤에 앉아서 조는 듯 마는 듯 있다가 가도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교회를 왔다 갔으니 사업도 잘되고 자식도 잘되리라는 스스로의 위안도 있고 어려우면 또 가서 기도하면 되거 믿는 것은 어차피 아니지만 그 아닌 것도 아닌 그런 위치에 여러분을 못 박아 두고 있는 셈입니다.

디도서 1장에 보면 교회에는 이런 분들이 있어야 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5-9절)

디도를 사도 바울이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장로들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 장로들을 세우는 이유가 저들로 하여금 생명된 말씀의 진리, 신앙의 내용들을 지키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장로는 어떤 사람을 뽑느냐 할 때 성령이 충만하고 신앙이 좋고 하는 얘기를 하지 않고 아주 실제적인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장로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느냐 하면 책망할 것이 없고 여럿이 아니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두어야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장로의 자녀들이 말을 안 듣는다든지 예수를 안 믿으면 자격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장로는 그가 갖고 있는 신앙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알아 가장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이것을 가장 귀한 것으로 가르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목사 자녀나 장로 자녀들은 다 예수 잘 믿고 순종 잘합니까. 안 그렇습니다. 훨씬 잘 안 믿고 말 안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부모가 낳지만 아이가 부모 마음대로 움직이는 로봇이 아니므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런 표현을 쓰는 이유는, 가장 실제적인 생활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드러난 것이 신앙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그의 말이 권위를 갖는 것입니다. 그의 말이 영향력을 갖습니다. 교회는 그러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어야 되고 불신자가 있는 세상에 나아갈 때 신자란 바로 그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 사람이 우리를 볼 때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어야 됩니다. ‘저들은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는 자들이며 이 세상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살지 않는 자들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그들의 양식으로 갖고 있는 자들’이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는 자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생명의 도전을, 진리의 자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그들이 등록금을 내고 등록을 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들 앞에 서는 것입니다. 아무도 숨을 수 없습니다. 지금 바로 그런 식으로 살지 않았나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점검해 봅시다.     

빌립보서 3장에 가면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나눕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17-20절)

우리는 그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목표는 땅엣것을 생각하며 배부른 것이 유일한 목적인 사람들입니다. 저희의 섬기는 신은 배라고 했습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쉬울 것이 없고 그 일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은 어떻게 삽니까? 오늘날 신자를 대하면 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겁이 납니다. 세상사람들이 신자를 더 악한 사람으로 평가 합니다. 훨씬 지독한 사람으로 평가합니다. 세상사람들은 그들이 배부르고 등 따뜻하기 위해서 공부 열심히 하고 권력 붙잡고 돈 긁어 모습니다. 그러면 신자들은 어떠한가 하면 권세 붙잡고 돈 모으는 것으로도 성이 안차서 예수까지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왜 믿으려고 하느냐 하면 배부르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으로 세상이 요구하는 길, 똑같은 목적을 두고 똑같은 짓을 하는데 세상 사람들의 총, 칼과 저들이 가진 모든 권세 위에 예수까지 믿어서 기도까지 하며 그 일을 이루려고 합니다. 성령까지 받아서 남을 해치고 자기가 성공을 하려고 합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 보면 기독교가 부흥되었던 시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있었고 외국에도 있었습니다. 그 부흥되었던 시기는 말씀의 흥왕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모든 신자들의 마음에 흘러 넘쳐서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나 기독교 역사에서 재미있는 것은 부흥이 그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예가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달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역사학자들은 어떤 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습관화해야 한다고 합니다. 내용의 전달 이전에 습관의 전달, 규칙의 전달이 더 급하므로 형식의 전달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형식주의라는 것은 늘 경계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형식의 전달이 없으면 내용은 훨씬 더 형식보다 끊어지기가 쉽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오늘날까지 그들의 신앙을 고집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신앙이 철저한 의식과 규칙으로 그들에게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할례를 받아야 된다든가 계명을 지켜야 된다든가가 형식주의로 흐르는 것은 몹시 잘못된 것이지만 그것이 유대인으로 하여금 유대 민족주의의 신앙이 끊어지지 않게 이어온 유일한 방법이라고 합니다.

형식주의도 무섭지만 내용주의는 더 무섭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전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요구들을 가장 원색적으로 펼쳐야 하는 규칙과 명령으로서의 형식을 지키지 않으면 그 신앙은 여러분의 것으로 굳어지지 않습니다. 자녀에게도 전달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웃에게도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훨씬 힘써야 되는 것은 가장 원색적인 규칙들입니다. 주일을 지키십시오, 그리고 성경책을 보이게 들고 다니십시오. 이것은 아주 좋은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더 굳게 만들고 여러분을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물론 우리는 반발하는 시대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런 얘기가 공공연한 얘기였습니다. 신앙이 좋을수록 심장에 가깝게 성경책을 들고 다녔습니다. 심장에 가깝게 성경책을 들고 다니기만 하면 무조건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꼴보기 싫어서 오른손에 들고 흔들며 다녔습니다. 옛날에 목사님들의 목소리는 창을 하는 국악인처럼 목소리가 쉬도록 폭포수에 대고 고함을 질렀고 소나무 뿌리 캐는 목소리였습니다. 옛날에는 저도 목소리가 좋았으나 하나님께 기도해서 목소리를 나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지나고 보면 그 형식주의를 반대한 것이 우리로 하여금 내용주의라는 우리의 실력을 무시한 지점까지 끌고 가게 되었습니다. 즉 그러다보니 신령한 내용들을 고수하는데 손해를 봤습니다.

저 개인적인 간증거리도 많습니다. 저는 사람을 처음 만나면서 엄숙을 떠는 것이 싫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늘 풀어놓고 사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역시 목사가 덕이 안되더군요. 앞으로는 좀 근엄할 작정입니다.

십일조를 내라는 소리는 참 어려운 얘기 중의 하나입니다. 당연한 성경의 요구인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십일조 낸 것을 목사 혼자 다 차지한 예가 많아서 헌금 내라는 소리가 싫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안했습니다. 그랬더니 여러분도 안했고, 안하더니 결국은 여러분이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십일조 내라는 소리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로 돌리십시오. 헌금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나는 내용주의자다’하는 바람에 많은 형식들을 놓아 버렸고 형식을 놓자 그 안에 담을 내용마저도 떨어뜨린 지점에 와 있더라는 것을 정직하게 돌아볼 때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한 달 헌금 생활을 돌아보시면 십분의 일을 안 내게 됩니다. 우리 교인의 가정이 천 이백쯤 되는데 십일조 내는 가정은 백 가정이 안 됩니다. 나머지는 이름 없이 내다가 간혹 잊고 그냥 지나칠 때가 있어서 처음에는 지난 것까지 계산해서 헌금을 내지만 그것이 누적되면 아주 잊기도 하고 너무 많이 밀려서 낼 엄두도 못 냅니다. 이렇게 되면 꼭 십일조를 내야 되는 것이냐고 묻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 마음도 어떤 그릇에 넣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절대로 형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우리가 신앙의 내용을 쏟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 마음으로 감동하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흘러나올 최소한의 원색적인 규칙을 지키지 못한다면 2차, 3차적인 더 높은 차원으로 나가는 것은 더 안됩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교과서에 낸 문제도 틀리는데 응용 문제를 무슨 수로 맞춥니까?

제가 학교 다닐 때 보면 우리나라 교육이 암기력 위주인 것을 알게 됩니다. 누라 머리 좋고 똑똑한가는 암기력으로 얘기합니다. 그래서 머리가 좋지 않은 사람은 열심히 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제가 외국에 유학가서 들은 얘기는 한국 유학생은 hard worker라는 말을 듣지 excellent 하다는 말은 못 듣습니다. 우리 신앙도 내용적이고 원리적인 측면으로는 안 들어가고 열심히 한 것에 불과합니다.

저는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큰 문제를 그 내용이 무엇으로 가야 하느냐는 놓친 채로 열심히 했다는 것 밖에 없다는 것으로 봅니다. 그 감동만이 남아있지 감동한 것으로 내가 바라보는 영원한 나라를 향하여 진전되어지는 것으로는 적용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늘 그 수준입니다. 교회생활에 익숙하고 성경 내용에 익숙한데 사람이 커가는 것이 없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형식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우리가 가진 내용들을 머리에서 머리로 전달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제자를 삼으라. 그래서 여러분은 이 문제에 대해서 각자가 결정을 하셔야 됩니다. 세상을 살기 위해서 기독교를 들먹이지 마시고 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세상을 꿰뚫어 지나가는 사람의 실력과 지식을 이제 겸비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성경에 있는 내용을 전달하고 그것을 듣고 머리를 끄덕이고 동의하는 것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습관으로 젖어듭니다.

본문 중 여기 ‘증인’이라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에서 ‘증인’은 헬라어 원어로 ‘마르테르라’인데 이것은 영어의 martyr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martyr는 순교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증인이 되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 사실 자기가 항복한 내용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심각한 싸움입니다. 그 심각한 없어졌다는 것이 현대 교회의 큰 병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배가 불러서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신앙은 자유당 시대 때가 제일 좋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이전이 더 좋았습니다. 배가 불러지면서 교회는 복음의 가장 중요한 내용을 놓아 버렸습니다. 교회는 치자하기에 바빴고 사업을 하기 시작했고 업적을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커지고 멋있어지며 웅장해지며 멋진 사회사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선교도 훌륭한 일입니다만 선교가 어떤 국력의 신장같이 교회 실력의 한 모습이 되었지 사랑하는 마음,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진리의 진리됨의 폭발력은 많이 희석되어진 느낌입니다.

이것을 어디에서 볼수 있느냐 하면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런 목숨을 건, 뼈를 깎는 싸움이 아닌 남은 힘의 싸움들이기 때문입니다. 잉여분에 관한 것입니다. 전도도 선교도 교회에 나오는 것도 여러분이 갖고 있는 어떤 체력, 경제력, 정신력의 잉여분에 관한 것으로, 존재의 본질에 관한 것으로 그것이 없으면 쓰러질 정도로까지의 문제로 충돌하고 있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신앙 수준이 낮아서 거기까지 이르지 못하는 것은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 수준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책망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부여받은 명령과 부름받은 일이 얼마나 복된 것이며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나 하나의 존재가 얼마나 많은 이웃들 앞에 커다란 문제입니까?

마태복음 5장의 말씀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 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4-16절)

말로가 아니 행동으로 이 행동은 또 종교화된 행동만을 의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생활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이 재미있는 것은 우리를 빛으로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 여기서 말은 되라는 곡물을 재는 그릇입니다. 등불을 그 속에 넣어 뒤집어 엎어 놓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비취게 하기 위해서 불을 켜서 가장 높은 자리에 놓습니다.

신자를 삼으면 하나님께서 그 신자를 모든 어두운 곳 위에 갖다 놓고 비취게 하기 위해서 그를 빛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이가 공부 잘하게, 남편도 건강하고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은 뭐든지 잘되게 해달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기독교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녀에게 우리가 가르쳐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십시오. 여러분 자녀를 왜 공부 잘하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한 인간이 한 세상 생활,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생활해야 한다는 면에서는 얼마든지 그렇게 시켜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그것밖에는 우리의 자신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에 공부, 공부 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됩니다.

여러분이 며느리나 사위를 얻을 때 무엇을 보고 얻는가를 보십시오. 집안보고 얼마나 건강한가 보고 얻는 것은 헛된 것입니다. 어느 날 교통사고라도 당해보십시오. 그 본 것이 아무리 완벽에 가까웠다해도 다 헛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을 보십시오. 그러나 신앙 보고 얻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신자로서 부족합니다. 이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신자인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주를 믿으며 주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신자답지 못합니다. 우리는 빛인데 연기 밖에는 내고 있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완전 공해입니다. 우리의 특권,우리의 사명, 우리의 영광된 소망들을 여러분 놓치지 않기를 권합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제자를 삼으라. 여러분, 이것이 갖는 엄청난 내용들을 다시 반추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짧은 인생 살이에서 영원을 준비하는 사람인 것을 놓치지 마시고 오늘 배부르기 위해, 세상이 우리를 위협하는 것 때문에 우리의 중요한 목표들을, 복된 내용들을 놓치고 하는 것을 부끄러운 줄을 아는 원래의 신자된 자세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제목: 증인- 3
본문: 행 1:7-8
설교자: 박영선 목사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1:7,8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계속 생각해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 하는 때와 시간에 관해서는 우리가 준비할 문제가 아니지만 그 나라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이 증인이 되어야 하는데 이 증인이 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모든 사람들로 제자를 삼는 일이라고 마태복음 28:19,20에 나와 있습니다.

앞에서 이런 부분을 비교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왜 전도하라든가 교화해라, 신자를 만들라 쪽으로 가지 않고 제자를 삼는다 하는 것으로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만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고 현재 우리 기독교계가 쓰고 있는 표현대러 하자면 사람은 구원을 얻을 정도보다는 더 깊은 하나님의 요구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인간의 삶의 모든 현장에서 보고 배울 것이 있는 녹아난 그의 인격이고 그의 버릇이고 그의 사상이고 모든 면에서 드러나는 어떤 것으로 전달되어야 하는 내용이고 요구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그 제자를 삼으라는 내용 속에 구체적으로 할 두 가지 일은 세례를 주는 것과 가르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8:19부터 다시 보시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자를 삼아라. 그리고 그 ‘제자를 삼은 자들, 제자가 된 자들에게 해야 하는 것이 꼭 두 개가 있는데 세례를 주는 일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케게 하는 것이다’라고 나옵니다. 세례를 주라는 명령이 왜 제자를 삼는데 수반되느냐 하는 것을 오늘 살펴보려고 합니다. 세례를 준다 하는 것이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여기에서 사용된 뜻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 세례를 준다는 것이 어떤 증서를 발행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확인하는 것, 증명하는 것, 그런 뜻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어떤 목적가 어떤 결론을 준비하는 것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주라 하는 것이 그렇게 함으로써 누구에게 도장을 찍어 준다든가 무슨 K.S. 합격증, 납세필증과 같이 어떤 것이 다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래서 이 세례를 주라는 것이 성경에 어떤 뜻으로 쓰여져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그래서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살피려는 세례를 주라는 내용 속에 들어있는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성경에서세례를 준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 몸으로 연합됩니다. 성경이 하나가 되었다는 얘기를 할 때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었다는 뜻과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뜻과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신자끼리도 한 몸으로서 하나가 되었단 는 통일성에 관해서 말합니다. 그러니까 세례를 주라는 뜻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 몸으로 가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 그의 지체로의 연합, 통일을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통 쓰고 있는 교회라는 단어는 먼저 건물, 조직, 기구를 뜻하지만 성경에서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으로의 연합을 먼저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편리하도록 하나의 기구로 나타난 것이 조직체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도 설명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지키라”(3절).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무엇이 하나이냐 하면 4절의 몸이 하나이고 부르심의 소망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라. 그래서 ‘하나’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우리가 통일되어 있는가, 나뉘어 있지 않고  하나인가, 연합된 하나인가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세례라는 말에 대해서도, 교회라는 말에 대해서도 그뜻은 보다 넓고 할 얘기가 많지만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살펴본 것은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가르치라는 문맥 속에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나라가 임하심이 이 때이니까, ‘아니다 . 그 때와 기한은 아버지의 권한이고 너희의 알 바가 아니고 너희의 할 일은 그 나라를 위해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하여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일이다’. 이 제자를 삼아서 꼭 해야 하는 것이 두 개 있는데 세례를 주는 일과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역사를 끝내고 우리에게 약속된 나라가 언제 시작될 것이냐 하는 시간과 기한은 우리가 정할 것이 아니지만 그 나라가 올 것은 분명하고 우리는 그 나라에 초대되고 있고 그 나라를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홀로 하셔야 할 일이 있고 우리가 할 일이 있는데 우리가 할 일은 증인이 되는 일이요 모든 사람을 제자 삼는 일이요 제자를 삼아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가르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어떤 목표를 향하여 우리가 해 나가야 될 일이지 기다리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해야 될 일이라는 것은 지금 완성되어 있지 않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세례를 주라는 것은 세례를 주고 도장을 찍어서 더 이상 손 볼 것이 없다는 완제품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세례를 줌으로써 제자를 삼는 일이고 제자를 삼아서 이제 완성시켜야 하는 일의 시작이며 과정이고 방법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로 부름받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의 몸으로 부름을 받는다 하는 일은 부름을 받는 것이 복된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 해야 할 심각한 새로운 과제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신 것은 참 잘된 일이나 나오셨으니 들으셔야 되고 예배드리고 변화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자녀들이 학교에 가는 것만으로 끝이 아니고 가서 배우고 깊어지고 커져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번 입학시즌이 끝나면서 저희 교회에 쓴 맛을 본 자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합격하고 불합격했다는 것이 기쁨으로 끝이나고 슬픔 그대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합격해서 기쁘면 그때부터 기쁜 그대로 영원토록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얘기는 어린이 동화에나 나오는 것입니다. 수석으로 입학해도 1학년 끝에가서는 낙제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배우러 들어갔고 더 크기 위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세례를 주라는 이야기 속에 바로 그러한 요구와 내용이 전개되는 것을 우리가 만나게 됩니다. 먼저 기어해야 할 것은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우리를 그 몸으로 부른이 세례가 우리에게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0-22)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데 이것은 그 안에 부름을 받은 모든 사람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한 함께입니다.

우리나라의 옛날 집들은 기둥을 세우기 위한 주춧돌을 먼저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지었지만 유대인들의 집 짓는 법은 주춧돌을 놓지 않고 모퉁이 돌을 놓습니다. 건물을 사각형으로 짓는다면 한쪽 모퉁이에 기둥이 될 만한 큰 돌을 놓고 거기서부터 벽을 양쪽으로 짓되 그 큰 덜을 의지하여 건물을 지어 나갑니다. 밑에 주춧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쪽 코너가 기초가 되는 셈입니다.     

그 모퉁이 돌이 주님께서 되십니다. 그 분을 의지해서 거기에서부터 이어져서 그리고 거기에 부름받은 모든 신자들이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 지어져 간다는 말은, 부름을 받아 모퉁이 돌과 연합을 한 것은 시작에 불과하고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서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까지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이야기 속에 포함되 있는 교회라는 기관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도 우리가 제자를 삼아 꼭 가르쳐야 하는 부분입니다. 어디까지 지어져야 하느냐 하면 에베소서 2:22에 있는 것 같이 ‘예수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 즉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2,13)라고 확대되어 있습니다.

누구 만큼이냐면 주님 만큼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건물을 지을 때 지하 2층을 파면 지상 6층 내지 10층, 지하 10층을 팠다면 지상은 100층을 쌓습니다. 이렇게 기초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기둥을 지름 2m짜리로 세웠다면 그 건물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모퉁이 돌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그 옆에 판자집을 짓지 않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리가 짓는 집에 주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모퉁이 돌이 되어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 모퉁이 돌에 걸맞는 집을 지어갈 것은 자명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모두 하나님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가도록 하라는 것이 세례를 주라는 얘기 속에 포함되어 있는 요구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주라는 것이 어떤 물건이 완성되었다든가 이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요 빼앗길 수 없는 하늘 나라의 시민이라는 도장을 찍는 작업이기 전에, 이것이 제자를 삼는 과정과 그 목적에 구체적으로 제시된 방법인 것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름받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고 연합하여 훈련을 받는 일에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목적이 있는가 하는 것을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은 누구와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도 하나이며 예수 그리스도와도 하나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모든 성도들 간에도 하나입니다. 이 하나 된 것을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힘써서 지켜야 합니다. 이 힘써 지키기 위한 구체적인 요구는,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니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운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 어떻게?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는 것입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얘끼 속에  포함된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요구되는 모든 내용들은 잘 음미해 볼 만한 것들입니다. 겸손, 온유, 참음, 사랑, 용납, 평안. 이것들을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 아닙니까? 무엇을 하는데 성령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까? 하나 됨을 지키는 데 성령의 열매가 동원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얼마나 오해하고 있느냐 하면 내가 진실된 마음을 가지고 가면, 내가 열심을 품고 가면 그때에 비로소 나에게서 사랑이 나오고 온유가 나오고 희락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식으로 이야기해서 무념무상의 대자대비한 마음까지 갖고 자기의 마음을 비우려고 합니다. 성경은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실제적으로 내가 쟁취해야 되는 목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마음이 생겨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은 이런 일들을 해야 하는 싸움이라고 얘기합니다. 사랑이 생겨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해야겠구나라고 뼈속 깊이 실패와 좌절과 상처 속에서 배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을 전면적으로 뒤집어 놓을 문제가 여기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된 마음을 가지고 나오고 상대방도 진실된 마음을 가지고 나온다면 교회에 싸움이 왜 있다는 말이냐. 이것이 제일 많은 문제입니다. 상대방도 주를 믿고 나도 주를 믿으며 주를 위해 일했는데 왜 충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은 진심과 진심이라는 것만으로 화해를 하고 서로 좋고 박수칠 만큼 간단한 동물이 아닙니다.

사자와 호랑이 중에 어느 쪽이 더 많이 남아 있는가 하면 사자가 호랑이 보다 많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호랑이는 흉포해서 자기가 먹을 것이 아니더라도 가서 죽이지만 사자는 배가 부르면 옆에 누가 있는 것을 상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동물은 배가 부르면 딴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배가 부르면 훨씬 더 난리를 핍니다. 배가 고팠을 때는 배를 채우는 것만이 목표였는데 배가 부르면 정신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모방하고 있는데 이는 볼행한 일입니다. 미국의 범죄는 전부 정신병리학적 범죄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 말로 “make fun", 우리말로 하면 심심해서 재미로 했다고 합니다. 남의 생명을 빼앗고 남을 재난에 빠뜨리게 하는 것을 심심해서 하는 것입니다. 배는 부르고 공부는 하기 싫고 할 것은 없고 그래서 오토바이 타고 가다가 받기도 하고 머리도 이상하게 깍고 색도 칠하고 자기들은 담배를 끊자고 하면서 우리에게는 피라고 하는 그들을 어떻게 보십니까. 사람만큼 악랄하고 죄악에 쉽게 물들어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배부르면 만족해 하는 정도로 요구하시지도 않을뿐더러  그렇게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단순하게 배부르면 됐잖느냐 하는 것으로 끝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저도 주님 사랑하느냐 나도 주님 사랑하니 우리는 하나라고가 쉽게 안됩니다.그것은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는 국민학교 1학년 산수인 것입니다. 그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부름을 받고 있고 하나님이 무리를 완성시키려고 하는 목적지는 다시는 싸움이 없고 다시는 추위도 없고 비가 와도 피해서 떨어지고 황금보석 꾸민 집에서 살고 밥도 금이고 번데기도 보석이고 이빨은 레이저로 살아가는 그런 식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을 훨씬 정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을 벗어나 영적이고 초월적인 어떤 경지에의 초대이며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과 회락과 화평이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설명할 방도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과 회락과 화평이라고 말합니다. 더 이상의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서 그 훈련을 여기서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배우느냐 하면 우리가 얼마나 죄에 빠져 있고 남을 무는 데 익숙하며 진심을 가지고도 충동할 줄 밖에 모르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선한 것이 없음을 배웁니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에서 우리는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것을 비로소 배우는 것입니다.그것을 위하여 교회를 요구하고 있고 제자를 삼으라. 그리고 꼭 세례를 주어 교회에 그를 불러 들이라. 조직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하는 그 몸으로 불러들이라. 신자들끼리 한 몸이 되는 훈련을 시키라는 것입니다. 해야 됩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 어려운데 무엇을 돕는 것과 교회적으로 돕는 것은 어느 쪽이 더 일이 신속하고 잘 됩니까? 게인적으로 하는 것이 쉽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혹시 그런 사람이 있으리라고 봅니다. 큰 교회에 돈을 내봤자 일년 결산하는 제직회때 먹고 무슨 친목회때 먹고 헌금하니까 자기들끼리 먹기만 한다고 해서 개인적으로 아는 개척 교회에 십일조를 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쨋든 1차적으로는 좋은 마음이고 진실된 마음과 현실적인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한 고달픈 교회가 실제적으로는 도움을 받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 교회를 세우신 목적인 인간이 훈련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 돈을 교회에 내 놓으십시오. 그러면 당회에서 싸우고 제직회에서 싸우고 돈 안 낸 사람이 돈 낸 사람에게 뭐라고 하고 또 돈 낸 사람은 안 낸 사람에게 뭐라고 하며 서로들 난리를 펴서 싸우다 보면 깎이고 깎여 묵사발이 되어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1년 내내 싸우는 곳이 교회입니다. 매년 싸웁니다. 새벽기도 나와서 싸우고 본 예배에 나와서 성가대 하면서, 주일하교 맡아서 싸웁니다.

우리는 선한 의도는 있지만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이 없는 자들입니다. 처음에는 열심도 생기지 않고 결심도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겠다고 결심을 해도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공부하기 싫다고 말하는 자녀가 있습니까. 공부를 잘하는 자녀와 공부를 못하는 자녀 중에 어느 쪽이 더 공부에 열망이 있습니까. 언제나 못하는 쪽이 더 열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못합니까. 열심은 있는데 절대로 의자에 앉지를 않습니다. 놀면서 짬짬이 고민을 합니다.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왜 공부를 안할까. 나는 이래서 될까. 늘 공부를 하려고 돌아오면 너무 피곤해서 자고 아침에 하자고 합니다. 그래서 깨면 꼭 늦게 일어납니다. 그러고는 일찍 깨우지 않았다고 하며 어머니를 원망합니다. 자명종을 사달라고 해서 사주면 온 동네만 시끄럽게 하고 자기는 안 일어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열심히 실제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해보셔야 됩니다. 여러분, 교회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들어와서 맨 뒤에 숨지 마시고 사람들 옆에 끼어서 싸우기도 하고 울기도 하십시오. 이 훈련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가 무엇을 훈련하는 곳이며 교회가 무엇이 분명히 유지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오늘 꼭 알고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교회는 이 두가지가 꼭 유지되어야 하고 그것이 유지되는 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훈련받아야 됩니다. 두 가지 중의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수권입니다. 그만이 머리이십니다. 또 하나는 그 안에 부름받은 모든 신자들의 동등함과 다양합입니다. 이 두 가지를 우리는 지켜야 됩니다.

에베소서 4:15로 가면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어디까지 자랍니까? 그에게까지입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런데 그에게서만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어 큽니다. 우리 몸을 봤을 때 명령은 어디에서만 떨어지게 됩니까? 머리에서만 떨어집니다. 머리에서 명령하지 않았는데도 팔,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일 때는 중풍병에 걸린 경우입니다. 머리가 명령 안해도 팔, 다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간질이 걸렸다고 합니다.

오늘날 신자들의 최고의 병이 뭔지 아십니까? 성경이 얘기하고 있는 신앙과 성경이 얘기하고 있는 교회를 떠나서 여러분이 설정한 목표를 뺏기 위해서만 교회를 이용하고 있고 신앙을 이용하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오고 여러분이 요구하고 있는 것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고 마음에 있는 어떤 불안감 때문에 헌금을 내서 때우는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는 우리가 세워 놓은 목표에 기독교를 오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통수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로부터만입니다. 그가 하라고 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지니라’. 앞에서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서 가장 많이 요구되었던 것이 성령의 열매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힘써 지키십시오. 모든 문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나뉘는 것이니 나뉘지 마십시오. 싸우지 말고 져서 연합하십시오. 상대방이 말도 안되는 짓을 하고 상대방이 나를 긁어대도 누가 옳으냐 해서 갈라서지 마십시오. 누가 옳으냐를 따지는 것은 결국 갈라서는 심판에까지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지면 안 갈라섭니다. 그러면 일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교회는 일하는 기관이 아니고 이 훈련을 받는 곳입니다.

교회가 훈련해야 할 가장 큰 일은 국가를, 시대를 위하여 무슨 역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거기서 부름 받은 모든 신자들이 이 훈련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서 누가 더 지는가, 누가 더 양보하는가, 각각 부서에 들어가십시오. 교회 일에 참여하셔서 교회라는 데가 얼마나 복잡한 곳인지 배우시고 성질내시고 집에 가셔서 울고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서 크셔야 합니다.그것이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 이유를 놓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우리 교회가 무엇을 했다, 우리 교회에 어떤 분이 나온다는 얘기는 다 유치원 때 우리 아빠는 부자다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을 보면 신자들의 동등함 신자 사이의 하나 됨에 관하여 이런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가라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1-4절)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신자들의 성품이 나옵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ㅈ’이 아닌 ‘ㅅ’인데 모두 낮게라고 씁니다. 나보다 남을 높이십시오. 무엇을 근거로 해서 그러느냐 할 때 5절 이하가 중요한 답이 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니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5-8절)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는데 유일한 원리가 있었다면 복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결국 신앙이란 믿음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시지 않겠느냐 하는 믿음의 싸움입니다.

신자들이 싸움이 있다든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것에 대해 듣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뭡니까? 교회에서는 주님이 더 잘 알지 몰라도 세상 사는 것은 제가 더 잘 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 가만히 계시고 제가 나오라고 할 때 나오십시오.’ 자기 혼자 다 판치고 사는 것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왜 저런 원수가 왔을까 하는 것은 주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왜 이 일을 허락지 않으셨을까? 이것도 주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보다 지혜로우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우리보다 우리를 더 아끼시며 사랑하시며 선하시며 의롭다는 것을 왜 모르십니까. 아니 안다고들 합니다. 그러면서도 함께 해보면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일을 해보면 모든 것이 드러나고 우리가 누구이며 주께서 요구한 것이, 우리에게 비교적 피와 살이 되는 그 훈련장이 교회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내용 속에 세례를 주라는 것이 포함됩니다.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교회 치장용으로 가지 않나 생각합니다. 밖의 사람들에게 드러날 교회 행사는 많은데 부름을 받은 각자의 일은 없습니다.

오늘날 제자의 도는 너무 기술적이고 방법론적이고 사업적으로 외적인 업적을 이룹니다. 그러나 이 사도들의 도는 외적인 업적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사업적이지 않고 내적이고 부름을 받은 당사자들에 관한 싸움입니다. 우리 교회는 왜 이것을 안하느냐, 저것을 안하느냐, 이런 것 저런 것을 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일에 대한 관심 이전에 이 교회에 찾아오신 여러분 자신이 이교회에 나와서 무엇이 변하는가 무슨 충돌이 있는가 거기에 관심을 집중시켜야 됩니다.

제자도라는 것이 신자들을 활용해서 무슨 일을 시켜 먹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꼭 만리장성 같고 궁전 짓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런 일들이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일들을 할 때가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교회가 신자들을 모아서 어떤 일을 위해서 써 먹기 위해 쓰여지는 곳이라고 저는 믿지 않습니다.

제가 요구하는 것은 그것보다 여러분이 변해 달라는 것입니다. 돈내고 일하고 가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변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돈내는 것이 쉽고, 사업을 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전도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그것 말고 여러분이 변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최거의 목표로 내건 것이 성품적인 싸움입니다. 성경이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일흔번에 일곱 번 용서하십시오.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 뺨을 대십시오. 

그 싸움을 하시겠습니까? 그것을 위해서 주께서 그의 제자들을 보냈고 그 열매가 여기까지 오게 된 셈입니다. 우리도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섭취해야 되고 우리의 내용으로 가져야 되고 우리가 보여줄 것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얼마나 큰가, 교회에 오면 만사 형통한다가 아니라, ‘이 사람들은 다른 데서 살고 있고 다른 분의 명령을 받고 살고 있구나. 이 사람들은 세상을 목표로 살고 있지 않구나’ 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잘 드러나는 사람으로 변해달라는 것입니다. 악착스럽게 세상을 추구하는 것으로만 살지 마시고 하늘 나라를 준비하는 사람으로 여러분들의 매일매일의 삶에 주님께서 요구한 이 문제들을 싸움의 내용으로 삼아달라는 것입니다.

시장을 가시면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 주 앞에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제부터 해야 할 싸움의 내용은 주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하기로 약속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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