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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2473 추천 수 0 2009.06.19 20:2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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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1:8-10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07-009 / 1988.2.14 / 2.28/03.06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는 말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사도들에게 명령을 내리십니다. 이 뜻을 마태복음 28:19 이하의 말씀에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그래서 이 증인이 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자를 삼을 것으로 명령하고 계시고 제자 삼아서 해야 할 일이 뭐냐 할 때 세례를 줄 것과 가르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
지난 주에는 세례를 주는 문제를 다뤘고 오늘은 가르침에 관한 것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가르친다고 하면 몇가지 잘 알고 있는 기본적이 조건들이 필요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있어야 하겠고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가르칠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관한 것은 다음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관한 내용을 우선 살펴보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영원한 나라를 준비시키며 영원한 나라의 확장과 그 나라의 백성들을 블러 모으는 일과 그리고 그 나라에 걸맞는 시민으로 가르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입술만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모범을 보여야 되며 삶의 원리요 목표요 자세요 근본적인 한 인격과 존재의 아름다움으로써 증언해야 될 것임을 성경이 여기저기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서 우리는 성경이 세상에게 증거하려고 하는 최고로 중요한 내용들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기를 원하는가 하면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복음서 자체가 그런 의도로 쓰여졌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을 보십시다.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30,31절)

생명을 얻는 것이 성경 기록의 첫 번째 목적이고 예수님이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에 관한 것은 거기에 부수되는 여러 가지 조건들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명이 뭐냐 하는 것입니다. 생물학적인 측면에서가 아닌 영적인 차원에서의 우리의 존재와 그것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계심, 뜻, 목적 이런 것들이 설명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것의 내용으로 들어가면 결국 그것은 진리에 관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 진리에 관한 것을 깨우쳐야 우리는 생명을 얻을 것이고 그 다음에 우리들이 좋아하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받는것만 앞세우고 그 앞에 있는 다른 것은 모두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성적을 받느냐 하면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를 하는 데도 내용이 있는 것으로 니혜롭게 해야합니다. 군대는 요령이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죠! 요령있게 해야 합니다. 밤을 세워서 해도 요령없이 하면 갑자기 성적이 올라가지 않습니다. 종종 학교에서는 그래서 실력과 관계없이 시력에 의해서 실력이 좋아지는 수가 있습니다.

복을 받는다는 문제에서 우리가 얻으려고 하는 것은 컨닝을 해서 복을 훔쳐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나 자신이 변화되는 것을 스스로 원해야 하고 훈련해야 하고 이루어 나가야만 합니다. 그것들을 성경에서 요구하고 있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될 것 속에 포함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고 가르칠 것 중의 그 가르침의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

결국 이런 싸움이 벌어집니다. 이 생명과 진리에 관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이며 60 평생이 전부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가치 체계 속에서 목표를 정하고 방법을 정하고 자세를 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고 우리가 몰표로 하고 있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꺼내면 서로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이 가르치라는 명령 속에는 이런 내용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알고 보고 소유하게 된 것은 너희밖에 모르는 것이다. 세상은 모른다. 그러나 너희를 통해서만이 이 비밀은 증거되고 이 비밀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다. 그리서 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명령은 우리에게 커다란 특권이며 동시에 책임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우리가 세상에서 꼭 붙잡고 있어야 되며 그것으로 증언해야 하는 것들, 그것들이 무엇이냐를 우리는 분명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디모대후서 4장에서 이렇게 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1,2절)

이것이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이 무엇을 근거로 해서 나오는 이야기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가치 체계, 영원한 시각을 갖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는 체계 속에서는, 그 생각 속에서는 말씀을 전파할 것이 없습니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 셍상이 전부가 아니며 오는 세상, 하나님 나라가 있으며 우리가 우리를 책임지지 않으며 하나님이우리를 만드셨고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알고 있는 자만이 가소 할 말이 있는 자입니다. 이런 배경과 이런 항복이 없으면 절할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 훨씬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차원보다는 전하라고 했으니 나는 전했다고 하는 책임 완수의 차원에서 10명씩 몇 명씩 전도했다고 하며, 일을 한 것으로써 책임을 다 했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의 문제입니다. 물론 실행해야 할 문제이지만 실행이전에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가 전해야 할 것이 어떻게 신적 기원을 가지는 것이냐 하는 싸움이 먼저라는 것을 잊지 않으셔야 됩니다. 세상이 모르는 문제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계속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혼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4:2-4) 

세상은 어떤 곳이냐 하면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는 곳입니다. 자신이 자신을 책임지고 목표와 방법을 자기가 산출해 내는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목표가 내 수중에 있지 않고 그것을 이루는 방법도 내 실력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알게 하셨고 그 길로 우리를 부르셨고 보게 하셨기 때문에 알게 된 자들이요 그래서 그 앞에 무릎 꿇어 늘 도우심을 구하는 자들로 있습니다. 우리는 나의 주인을 나로 삼지 않고 하나님으로 삼으며 나의 생각과 나의 모든 원래ㅣ와 달려가는 발걸음이 주의 은혜 속에 있기를 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늘 자기가 자기를 책임지는 방법으로 사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가 정한 목표가 있고 거기에 맞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우리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자연인으로서는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설명하고 설명해서 납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바 큰 신분적인 특권이고 책임입니다. 그것이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는 요구 속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이야기를 듣지 않습니다. 그들은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며 자기네 뜻을 이루기 위한 좋은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민주화라는 것도 사실은 인권에 침해를 받지 않으며 어떤 권력과 가진 자에 의해서 없는 자가 억눌림을 당하지 않는 차원에서의 민주화는 얼마든지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민주화라는 것이 진리를 향해 가고 선을 이루고 의를 이룰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서로의 이익이 합치될 때에만 같은 편이 되고 이익이 같지 않을 때는 적으로 돌아섭ㄴ이다. 그런데 이 이익이 뭐냐 하면 자기의 배부르고 편안한 문제입니다. 그것 외에 사람은 같이 친해지지 않습니다.

이런 속담이 있지요. ‘두 사람이 가까워지면 공동의 적이 생긴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람은 친해지지 않습니다. 무슨 이유로 우리가 사람끼리 친해집니까. 우리는 본래부터 경쟁자이며 적으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맞는 얘기입니다. 죄인들의 삶의 진실한 모습일 것입니다. 그것을 꺼내놓고 하면 손해 보니까 아닌 것같은 얼굴을 하며 갑자기 기습을 하려고 합니다. 겉으로는 폼나는 얼굴을 하고 다니지만 속으로는 다 전쟁 무기를 준비하고 다니는 사람들 아닙니까?  

결국 민주화란 사람과 사람끼리 모여 의를 구하지도 않고 선을 구하지고 않고 영원을 준비하지도 않고 진리를 찾지도 않고 생전에 잘 먹고 잘 살다 같이 죽자는 곳으로 갈 것입니다. 거기에 대하여 교회만은 이 진리와 이 명령과 이 책임을 지키고 있어야 됩니다.

교회의 유혹이 바로 이것을 지키는 것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말씀을 지키며 세상을 향하여 영원을 준비시키며 세상의 것을 좇아가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하자라는 이 중요한 증언을 목숨 걸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일에 동의해서 여러분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행히도 영원을 준비하기 위해서 모인 집단이라기 보다 세상에서 더 잘 살기 위하여 세상의 모든 방법 플러스 알파로 예수까지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갖는 가장 큰 약점입니다. 왜냐하면 영원보다는 눈 앞에 있는 것이 더 급한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세에는 이러이러한 일이 있을 것이다 하는 말세에 관한 증거에서도 제일 많은 것은 언제나 많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이 어디로 갈 것이냐. 마태복음 7장을 보십시오. 다수가 무엇을 할 것이냐, 다수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13,14절)

많은 사람이 가고 적은 사람이 간다는 이 얘기는 구원얻는 사람은 적고 지옥에 갈 사람은 많다는 비유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에 관한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동의하고 꾀를 짜고 지혜를 모아서 나타나는 결론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신앙 자체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늘 명심해야 된다고 얘기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디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혹 이런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의 이름으로 행했는데도 주님께 합격점을 받지 못하는 신앙생활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서 이러한 말세의 징조에 관해서 구약에서 이미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아모스 8장을 보시면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11-13절)  말세에 나탄알 징조 중의 하나가 말씀에 대한 기근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점점 역사가 발전되면서 물질 문명의 부요로 말씀의 기근을 낳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분의 신앙도 어려웠을 때와 편안할 때 어느 때가 더 좋았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어려웠을 때가 더 신앙생활하기에 좋습니다. 물론 어려울때가 꼭 신앙의 깊이가 깊어지는 조건으로 된다는 법칙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우면 이 세상에 대하여 미혹을 적게 받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세상 빨리 망하라는 생각 밖에는 안나지요. 기대할 것이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배가 불러지니까 어떻습니까? 일찍 죽기 싫고 예수님 다시 오신다는 얘기가 듣기 싫지요? ‘예수님 저 죽은 다음에 오세요’라고 말하죠!

주님 빨리 오신다는 것이 싫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느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니까 싫을 수 밖에 없어서 돈 있는 사람끼리 모여 바늘을 큰 것 만들어서 바늘귀를  8t트럭 타고 지나가도 되게끔 하자는 생각이나 한다는 말입니다. 사는 것이 재미있어서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의 기근이 생기지요.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원래 증거해야 하고 훈련시켜야 되는 것으로 교인이 모이지 않고 그저 복받으라는 것으로 교인이 많이 모이는 것은 교회와 목사에게 책임이 있는 것 이상으로 관객들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 영화를 보면 전부 황당한 거짓말로 지어낸 것만 나옵니다. 로보캅 같은 것이 왜 만들어집니까. 장사가 잘 되기 때문이죠. 멋진 작품 만들어도 장사가 안되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것이 관객 동원 1위라니 한심하죠. 아주 잔인합니다. 저야, 목회자 입장에서 여러분이 어떤 것을 좋아하나 해서 갔지만 여러분은 왜 갔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2장으로 가십시다. 우리가 얼마나 엄청난 책임을 갖고 있고 어떤 의미에서 권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인가를 분명히 확인을 해야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오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6-8절)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의 지혜로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게 하신 이 비밀을 우리의 생애를 통하여 땅 끝까지 모든 족속에게 전달되게 하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에 대한 충성입니다. 우리는 맡은 것에 충실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처음 입장을 생각하기 이전에, 상대방에게 어떻게 가르칠까 하는 방법론 이전에 내가 갖고 있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먼저 신경을 써야 됩니다. 그리고 그 귀함을 알고 있어야 되며 이 책임감이 앞서야 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 바로 그 일에 증인인 것입니다. 이것을 상대방에게 전하는 데 있어서 납득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고 말의 지혜나 학문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 때문에 상대방에게서 고난을 받을 수 있고 조롱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너는 말씀을 전하는 것에 힘쓰라는 디모데에세 주어진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날 민주화라는 물결 속에서 사람들은 가장 크게 기독교에 반한 운동을 동시적으로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 기억하실 것입니다. 한동안 민주화의 열기가 치열했을 때 젊은 반체제 운동가들 속에서 공격의 목표가 된 것 중에 교회가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왜 교회가 공격의 목표가 되겠습니까. 권위주의의 한 상징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학교, 관공서, 교회중에서 관공서는 이해가 가나 학교나 교회가 끼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거기에는 이런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와 함께 앉아서 자녀가 장래에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토론하고 투표해서 정하는 그런 일을 시행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여러분 자녀는 무엇을 하겠다고 하겠습니까. 아이들의 맨 처음의 대답이 무엇입니까.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를 잘해야 된다고 어른들은 말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공부를 꼭 잘해야만 훌륭한 사람이 되느냐, 에디슨, 처어칠, 등등 다 내놓으며 그 사람들은 공부 잘하지 않았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면 부모는 무어라고 합니까? 그 다음은 때리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때 자녀는 어떻게 반발합니까? 툭 하면 말대답한다고 하고, 밥 먹지 말라 하며 힘만 가지고 구타하니 자기 손으로 돈 벌 날만 기다립니다.

권위를 갖고 있는 사람이 그가 가진 세력으로 상대방의 이익과 상대방을 존종히 대해야 할 모든 것을 짓밟고 그것으로 자기의 이익만을 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나쁜 것입니다. 이것을 독재라고 합니다. 그러나 권위란 그런 차원에서 생긴 말이 아니고, 설명을 해도 상대방이 납득하지 않지만 사실인 것을 시행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강요할 수 밖에 없는 것을 권위라고 말합니다.

쉽게 얘기해서 우리가 자녀들을 공부시키는 것입니다. 학교 안 갔을 때 잘했다고 하는  부모는 허클베리핀의  아버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는 신자답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신자답게 살았더라면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누굽니까 하고 물어야 마땅합니다. ‘나한테 와서 예수 믿으라고 하지 말고 너희나 잘 믿어라.’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향하여 하는 반대 아닙니까.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거의 실패한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말라기 2장에 가면 이 부분과 연관된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회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 너희가 내 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편벽되이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모든 백성 앞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7-9절)

오늘날 교회도 이 꾸중이 그대로 통용될 것 같습니다. 제사장은 여기서 우리 모두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신약에 오면 친히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백성이라고 합니다. 제사장이란, 하나님 앞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백성은 친히 못 들어가서 제사장이 가운데 중보자로 서서 하나님께 들어가 백성들의 죄를 대신 고하고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 와서 전해주던, 말하자면 중보자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들어가며 하나님을 압니다. 우리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갖다 전해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딴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고, 그가 아는 것, 본 것, 하나님 앞에 받은 명령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것을 가서 전하지 않고 딴소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 노릇을 해야하고 그리서 백성은 제사장으로부터 율법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하나님께 칭찬을 받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 질문을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목사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신자가 지켜캬 할 모든 신자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오늘 바로 이 문제들에 대하여 심각한 자기 성찰이 있어야 될 줄로 압니다.

이 세상은 끝납니다. 영원한 나라가 옵니다. 이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하여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존재와 모습과 원리, 방법, 자세, 인격을 통해서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는 사람으로서의 증언자이어야 합니다.

베드로 후서 3장에 있는 말씀으로 오늘의 설교 결론을 맺으려고 합니다. 거기에 우리만이 갖고 있는 가치체계, 영원한 나라의 소망, 그 속에서 살아야 하는 신자들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그것을 모르고 조롱하며 잘못 가고 있는가 하는 얘기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설명이 필요없이 오늘의 설교가 모두 여기에 함축되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글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흐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18)

이 목표를 가진 분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 존재가 세상에서 얼마나 귀한지 아시겠습니까? 나만이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보고 빛이며 소금이라고 하며 그 내용을 가르치라고 얘기 합니다. 우리만이 알고 있기에 우리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빛이 비춰지지 않고 소금이 그 맛을 잃어 버립니다. 그러면 영원한 나라의 증언은 끝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운명을 지고 있지 않고 시대와 역사와 민족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휜 옷 임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사도행전 1:9,10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는 가장 큰 이유를 하나님께 매어달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주를 위하여 헌신하는 마음과 주의 복음과 주의 나라를 위해서 충성할 마음을 갖고 있는 한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안 주실 이유가 없으며, 그리고 그 복은 주를 위하여 일 할 수 있는 모든 조건과 모든 기초에 관한 기본적인 충분한 보답일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했으니까 ‘내가 정당한 일을 하고 영적인 문제에 관하여 열심을 내는 한 먹고 입고 자는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원하고 계시고 우리가 더 많은 충성을 약속할 때 주께서 더 많은 것으로 주신다. 그래서 더 많이 주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와 재능과 열심을 주실 것이다‘라고 생각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이 얘기하는 바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당하는 어려움들은 그 어려움을 고쳐야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내가 만들어져 가는 일종의 학교 공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이상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신자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핵심이 되는 사명은 사는 것입니다. 사는 것. 이 말은 생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목숨을 유지하고 있으라는 뜻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신앙 생활이라고 하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쓸데 없는 일상 생활에서부터 구별해 내어 주를 위한 구별된 일을 하는 것이냐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신자의 일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명령까지 받았겠다 우리는 훨씬 많은 시간들을, 기회들을 포착하여 더 많이 주를 위한 어떤 일을 하는 것,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 일을 하기에 필요한 건강과 재물과 재능을 주셔야 하는 것이라고 신앙 생활을 연결시키고 있기가 쉽습니다.

본문이 얘기하는 바는 신자의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그냥 살아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 하늘 보좌 우편에 가 계신 가장 큰 이유가 우리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으며 보이는 세상에서의 가치가 최고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가 영원한 것이며 절대적인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셨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 곁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엣 것을 찾아야 됩니다. 거기 계신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가 이 세상을 하직하는 날이 있꼬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지금 이 보이는 세상에서의 위협과 협박과 시헙과 유혹 속에서 만들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답을 갖고 있지만, 영원한 목표를 갖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이 나에게 어느 만큼 만들어졌고 쌓여졌는가를 이 세상의 삷과 부딪히면서 확인해 봐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것을 만들기 위하여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것들로 부딪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 가는 것이 신자에게는 최고의 사명입니다. 주께서 나에게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셔서 내가 그 기초 위에 서서 내 힘과 정성을 다 바쳐 주를 위해 무슨 할 일이 있는 자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 쪽이 주를 위해서 할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우리를 만드시기 위하여 시대와 역사와 환경과 일 속에 우리를 태어나게 하셔서 그 사람들과 부딪히는 매일의 자질구레하기 짝이 없는 지지고 볶는 속에서 영원한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을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어떤 업적을 남기는 싸움이 아니라 모든 일상 생활에서 영원한 것을 준비하는 자로서의 반응이요 영원한 사람으로서의 마땅한 자세와 실력을 키우기 위하여 이런저런 문제들에 대하여 부딪혀 나를 만들어 가는 일일 것입니다.

한 인간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국어. 영어. 수학만 잘해서 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배우고 가르친다는 것은 그가 가진 모든 능력과 용량을 키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과 과목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어서 그렇지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통하여 인내를 배우기도 하고 냉정을 배우기도 하며 또 어떤 때는 힘을 다하여 부딪히는 육체적인 집중법을 배우기도 해야 됩니다.

언젠가 한 권투 선수의 세계 타이틀 매치에 대한 관전평에 제가 아주 감동한 적이 있습니다. 이 챔피언은 도전자보다 실력이 없습니다. 펀치력에서와 테크닉에서도 현저한 실력차가 있었는데도 챔피언이 이겼습니다. 무슨 작전을 썼냐 하면 상대가 워낙 펀치력이나 테크닉이 좋으므로 챔피언은 한 대 때리고 붙고 한 대 때리고 붙고 하는 식으로 상대를 화나게 하는 작전을 썼습니다. 이를 보는 관중들이 다 야유를 합니다. 떳떳하게 맞서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그는 30초안에 다운될 지경입니다. 그래서 그 관전평이 이렇습니다.

클린치를 할 때 마다 챔피언의 등 근육이 푸들푸들 떨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도 때리고 치고 싶지만 참고 붙들고 있는 그것이 챔피언의 챔피언다운 실력이라는 것입니다. 맞서면 틀림없이 질 것이 뻔한데 뭐하러 기를 쓰고 덤빕니까. 그게 실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우리의 신앙 생활이 어떤 것으로 바뀌어졌느냐 하면 자기가 제일 잘하는 것으로만 신앙 생활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모든 문제에서 전 인격적인 훈련과 반응으로 나가지 않고 자기가 가장 잘하는 것, 영어면 영어, 미술이면 미술로 한 쪽으로만 신앙 생활을 국한 시켰습니다. 거기에 명분을 넣고 다른 모든 것을 안해도 ‘이것을 하고 있으면 나는 신앙인이다’하고 스스로 위안 하는 법을 개발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기도하고 성경보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을 그것으로 메웁니다. 그것을 하고 있는 한 나는 신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누가 공격을 하면 ‘이런 일을 하는 내게 감히 붜라고 하다니 사단들!’합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것은 대학 다닐 때 경험한 것처럼 시험 공부 안하다가 갑자기 벼락치기 할 때 책에서 가장 그럴듯한 문제를 3개 정도 테이프에 써 가서 그 문제가 나오면 다행이고 안 나오면 시험 문제를 지우고 내가 써 온 문제와 그 답을 쓰고 C를 받은 것입니다. 기억 나시죠? 그래서 성적표가 모두 오란씨였던 것을 말이죠!

우리의 신앙 생활은 그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옆에서 보면 이 사람이 신앙인이라는 것에 도무지 동의할 수 없는 데가 한 두 군데가 아닌데 본인은 기고만장합니다. 난 기도했고, 전도했고, 구제했다, 십일조냈다는 것들로 스스로가 도망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실제러 요구하고 있는 신앙의 훈련은 하나도 안 받고 있습니다. 

어떤 아이들에게나, 글을 깨치기 전에도 알 수 있는 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자기 이름입니다. 그레서 어디서든 자기 이름자와 같은 것만 나오면 아는 척을 합니다. 자기가 아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거기에 자기 이름을 한문으로 씁니다. 왠만틈 한문 아는 사람도 이름에 나오는 것은 어려운 것이 많아 본인 외에는 알 수 없는 한문이 꽤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 이름을 읽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상대의 한문 실력을 점치고 합니다. 그것은 마치 큰 영어사전에서 이상한 잘 쓰지 않는 단어 하나 외워서 이것 아는 사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람이 영어에 박학합니까. 아닙니다. 영어는 쉬운 것부터 배워야 합니다.  

마국인이 우리를 잘 이해 못하는 것이 I can not speak English well과 같은, 즉 영어 잘 못한다는 뜻의 영어는 잘 하면서 영어를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닥 실제로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언제나 I don't know니까. 그래서 내가 묻는 말에 대답으로 I don't know인지 그것이 유일한 speak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외국인 하나가 이렇게 놀립니다. I don't know, You don't know, We don't know.

우리는 전부 내가 아는 전공에만 상대를 끌어 놓고 비교하며 신앙인이라고 자위하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우리가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학교 과목을 학생인 우리가 정하지 않듯이 우리가 신앙인이 되기위하여 과목을 우리가 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실제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이런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목표를 정하면, 대부분 그것은 신앙 생활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훌륭한 일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해야 하듯이 여러분이 훌륭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일상생활적인 여러분의 생활을 신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정한 교과 과목 입니다. 여러분의 아내, 남편, 이 시대, 이 환경, 여러분의 지능지수, 이웃, 친척, 자식 이것이 과목입니다. 그들과 부딪히면서 신자로서 반응을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훌륭해지는 것 말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것을 자녀에게 가르치십시오. 세상에서 대접받는 것 말고 하늘 나라에서 대접 받는 것으로 세상의 유혹과 괄시를 이기고 나가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승리하는 사람들이 거들먹거리는데 시험 받지 않아야 하고 악을 악으로 갚고 싶은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칭찬받고 재면서 사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하나님이 저 사람을 이 세상에서라도 잘 살게 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두고봐라! 주님이 오시는 날 내가 널 짓밟겠다’하지 마시고 나의 길을 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왜 구제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이 잘못이겠습니까. 그런데 그것 하나밖에 없으며 그게 유일한 신앙의 내용이라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그것은 열매입니다. 그것은 과정이 아닙니다. 저는 이런 일을 볼 때 속상합니다.    

작년에 비가 많이 와서 수재 의연금을 모을 때 국민학생들이 참가한 모습을 신문에서 봤습니다. 그것을 보고 싫은 마음이 드는 것은 애들이 그 나이에 수재 의연금을 모으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 시킨 것입니다. 부모든 학교에서든 누가 시켜서이지 그 나이에 비가 많이 와서 다른 사람들이 어렵게 살겠지라고 생각하는 아이는 없습니다. 만약에 누가 시키지 않고 스스로 했다 해도 비정상입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해야 어른들이 좋아하는가에 대한 눈치지, 아직은 왜 필요한가에 대해 깨우치는 아이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전체 분위기가 그런 것을 본인이 스스로꺠우쳐서 할 만큼 자유스럽지 않았었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를 가르칠 때 말이 되고 의사소통이 되는 민주적인 방법으로 자녀를 교육시키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그렇게 해야 된다고 외우는 것입니다. 국민학교 3학년이 수재 의연금을 내는 정도니 크면 얼마나 홀륭한 어른이 될까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오히려 그런 행동이 그 아이가 잘 크는데 지장이 된다는 것을 빨리 파악해야 합니다. 그 나이는 남의 눈치나 보고 자기 생각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스스로 묻고 실패하고 하는 때이지 벌써 정답을 찾아 낼 나이가 아닙니다. 본인의 생각과 본인의 여러 가지 능력을 다 동원해서 만든 결론이 아니라 누군가가 밀어 낸 결론이기 때문에 그 아이를 망치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에도 전도를 하거나 구제를 하는 일들이 열매로 나타나기 위한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 과정이야말로 삶인 것입니다. 과정이 생활이고 만들어진 일은 결국 이룬 일이고 열매이고 결론입니다. 그런데 또 우리는 이 결론을 나열하고 있지 모두가 과정이 없습니다. 모두가 모여서 결론을 나열하는 법에만 익숙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대접 잘 받는 괜찮은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을 알고 있지 그렇게 되는 과정을 겪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둘로 나눠서 삽니다. 세상에 나가서 사는 법과 교회에 와서 엄숙 떠는 법을 양손에 들고 사는 교활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앞에 부딪히는 모든 삶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생활이 있고 사회생활이 있고 먹고 살아야 하는 눈 앞에 부딪힌 일들이 있습니다. 거기서 영원을 준비하십시오. 그 모든 일에 대해서 내가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점검하십시오. 그게 신앙 생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훨씬 더 많이 실패합니다. 정답을 알고 있는데 정답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고민하고 갈등하고 울부짖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체념도 해야 합니다. 그런 기간들을 거치고 거치고 거쳐서 드디어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이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또 이상하게도 그런 신앙 생활로 모두가 자신을 치장하고 있는, 속은 썩어 있으면서도 안 그런 얼굴을 하고 있고 남에게도 할 말 없고 스스로에게도 항복 못하니까 신앙 생활에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려 놓은 그림이지 피가 없고 살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으로 가서 이 문제의 결론을 내립시다. 여기에 있는 것을 가만히 보시면 이런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어떻게 큰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세상이 그들을 유혹하고 협박하고 덤벼든 데 대하여 그 모든 일에 미혹받지 않고 시험들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자기의 갈 길을 갔느냐 하는 데 그 초점을 둔 것을 보게 됩니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로와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11:33-40) 

믿음의 위인들에 관한 설명입니다. 그들이 어떤 일을 찾아갔다고 묘사하지 않고 그들이 삶에 부딛힌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영원한 목적지를 가는데 불어치는 바람과 칼날과 돌과 환난과 핍박과 경멸과 시험을 뚫고 걸어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어떤 길을 선택해서 이런 방법과 이런 디딤돌로 저기를 갔다가 아니라, 내가 일을 정하고 내가 삶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환경과 시대와 이런 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정하시 것입니다. 그 속에서 부딪히는 모든 일에 대하여 영원한 목표로 가는 일에 이것으로 구부러지지 않고 갔다는 것이 믿음의 위인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설명입니다.

우리들도 중요한 싸움을 합니다. 나는 큰 일을 못하니까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큰 일이 아니라고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주를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죽눈 것같이 오늘 사소한 문제에서 영원하 ㄴ나라를 걷는 사람들로서 유혹과 환난과 시험을 이겨내는 것이 동등한 대접을 받는 일이고 동등한 목적지를 향하여 내딛는 한 걸음입니다. 그 한 걸음이 쌓여서 영원한 나라로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 매일매일 그런 의미에서 목숨을 건 싸움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직까지는 대부분 실패한 여정이었을지 몰라도 실패됭 수 없도록 운명되어진 사람이고 그 싸움이 매일, 그리고 가장 사소한 것으로, 평범한 것으로 우리 앞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이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하십시오. 그것을 고쳐달라고 하지 말고 그것으로 인해 내가 영원을 준비하는 데 이익을 본다는 것과 그 길을 구부러뜨리려고 이 유혹과 시험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매일의 싸움에서 승리하시고 하루하루가 분명히 주께 가까이 가는 영원한 나라의 사람다워지는 일이 어느 만큼 진전이 있는가로 늘 자기를 점검하는 깨어있는 사람으로 살아 가시기를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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