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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행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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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영선 목사 |
참고 : | 1988.4.10 /5.1 |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1-4
사도행전의 기록 내용 중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 뭐냐고 하면 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일 것입니다. 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한 신자의 신앙의 색깔과 모습에 상당한 차이를 가져오게 합니다. 소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갖는 의미를 성경이 요구하고 지시하는 대로 이해하는 것이 사도행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사활이 걸린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드디어 오순절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시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같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있던 120명의 신도들에게 성령이 내립니다.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며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가직 우리가 살펴봐야 하는 문제는 이것입니다. 성령강림의 모습, 성령충만의 모습이 모든 신앙인이 가지는, 신자가 필수적으로 경험해야 되는 경험이냐 하는 것입니다. 즉 신자라면 누구나 이러한 성령충만의 확인과 분명한 경험, 그리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는 방언과 성령의 어떤 나타남이 그들에게 있어야 되고 인식되어져야 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성경이 그렇다고 얘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한국 교회가 사실 지난 70년 붕반부터 80년 초까지 어간에 가장 많은 혼돈을 자아냈던 것이 이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혹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은 얻지만 성령을 받는 것은 조금 더 고급한 신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고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 방언을 하게 된다는 식의 가르침이 한동안 한국교회를 강타했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사 성령의 나타냄과 성령께서 주시는 어떤 초월적인 간섭, 이런 것이 우리에게 감지되는 일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없으면 저급한 신자이고 누구나 꼭 이것을 경험해야 하는 필수적인 것이며 성령의 강림은 꼭 그런 형태로 나타나느냐 하는 데에 대해서는 저는 견해를 달리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이 문제를 취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밖에 나가서 그들이 보고 들은대로, 여태껏 배운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수난과 부활을 선포합니다. 그 일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놀라서 너희들이 왜 그러느냐 하면서 너희들이 다 새 술에 취했다라고 그들을 묘사합니다. “다 놀라며 의혹하며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행 2:12)
이 사람들이 완전히 돌아서 저런다, 말하자면 자기네들이 가진 주장과 견해를 저렇게 미친듯이 주장할 수 있겠느냐 싶어서 새 술에 취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그들에게 설명하는 그 유명한 베드로의 설교가 나옵니다.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9행 2:14-21)
요엘서에 나오는 예언을 인용해서 그들이 지금 처한 위치와 그들의 경험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인용된 17절 이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지금은 말세입니다. 말세란 시간적으로 끝이기 이전에 순서적으로 끝이라고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가 끝이니까 이 끝의 순서를 마지막으로 남긴 기간은 다 말세라고 했습니다.끝이 되기 위한 전 사건은 무어라고 했습니까? 재림이 끝이니까 초림이 끝이전의 최종적인 사건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초림하셔서 이제 승천하셨으니까 남은 일은 재림하시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러니 주님이 초림하셔서부터 말세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17절의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라”는 말씀이 ‘그 때가 되면 누구든지 성령을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겠다’는 얘기냐 하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내 남종과 여종에게 성령이 부어지는 것을 보거든 말세인 줄 알아라’가 되는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는 그동안 이 문제가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주께 구하면 성령을 받는다’라고 이 구절이 이해되고 있는데 이 구절은 다른 뜻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거든 이제는 말세인 줄 알아라’ 이런 말도 됩니다. 이것은 오순절 성령 사건이 예수를 믿는 모든 신자가 경험해야 되는 신앙 경험의 전형이 되는냐 아니면 오순절 성령 사건으로 인하여 이제부터는 ‘새 시대’라고 개막을 선언하는 것이냐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다시 보십시다.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든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29-33)
이 대목에 오면 조금 더 확실한 힌트가 나옵니다. 오순절 성령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사역이 완성되었기에 이제 성령이 오실 수 있었다는 쪽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껏 잘못 생각한 식으로 오순절 성령 사건을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성령을 받고 그것도 충만함으로 받을 수 있고 그리고 기도하고 열심히 구하면 방언도 하고 병 고침도 있고 예언하는 은사도 받을 수 있다, 마음의 기쁨이 폭발하는 경험들을 할 수 있다. 이 사건이 이런 것을 위한 기록으로, 그것을 위한 사건으로 의도된 것이 아닌 것 같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 두 가지 사건을 보면 그것이 아니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거든 이제부터는 새 시대가 시작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일의 결과로 이 일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 부분을 조금 더 추적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을 보시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1절). “곧 내가 저희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23-26절)
결국 구원을 얻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설정하고 계신 것은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 안에 계시고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 안에 계신 것같이 우리를 하나로 부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데 가장 큰 방해가 되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게 하시기 위한 선결 문제는 우리르 죄에서 꺼내는 것입니다.
주님게서는 우리와 동거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속하러 십자가를 지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승천하셨습니다. 가시면서 요한복음 14장에 있는 바와같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하리라.”(1-3절)
처음 오신 것은 우리와 함께 있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없애려고, 죄에서 구원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오실 때는 같이 살려고 오실 것입니다.
궁극적인 구원의 목표라는 것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죄를 없이 해야 하며 우리를 죄인의 자리에서 부터 구원해 내야 됩니다.
죄를 씻어낸 것은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드디어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성령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이제 함께 하시기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다 완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것에 궁극적인 목표와 이유를 에베소서 2장에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0-22절)
하나가 된다는 것이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우리가 지어져 가는데 그 일을 위하여 먼저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지금 예수 안에서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시작하는 첫 번째 개막 테이프를 자르는 것, 공식적인 이 일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오순절 성령강림인 것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사 드디어 이제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제 우리는 하나가 된다를 공개적으로 역사와 온 우주 앞에 선포한 사건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인 것입니다. 이 사건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제 새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새 인간으로 완성될 것이다에 첫 테이프를 끊는 것과 같습니다. 즉 이제 신자란 존재론적으로, 운명론적으로 전혀 다른 사람이다 하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 오순절 성령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개인들이 어떤 경험을 했느냐 하는 것은 부수적으로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는 역사적이고 새로운 장을 여는 공식적인 개막을 선언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성령이 오신 것이 공개되고 객관화되고 외적인 표현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죠? 결혼식을 숨어서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부부입니다라고 모든 사람에게 공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에는 공개적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성령이 와 계시는 것이 공개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외적인 표현이 있고 어떤 감동이 있고 경험적인 것으로 오신 것을 설명하지 않고 다르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가장 확실한 증거는 우리가 여기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맨 정신으로 누구의 협박에 의해서 앉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가정의 평화를 위해 부인 따라 나오신 분도 있겠습니다만 그것도 하나의 핑계입니다. 어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것을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항복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이란 그 만큼 괜찮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세상이 두쪽이 나도 하는 것이 인간의 고집입니다. 그것 빼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에 차를 태워주기 위해서 왔다가 밖에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앉아서 기다릴 겸 들어왔다고 하지만 그것은 아직 여러분 마음에 만족스러운 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둘러대는 것이지 제가 보면 여러분 마음 속에도 성령이 와 계시기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렇지않고 여기에 와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오순절 성령강림 때와 같은 어떤 외적인 표징들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식으로 오도되어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것이 없으면 성령이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나를 다른 사람에 비해서 덜 사랑한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나를 좀 열등하게 취급을 한다고 하는 이상한 생각에 말려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사도행전 2장을 보시면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날 삼천 명이나 구원을 얻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 날에 대한 사도행전의 기록을 다시 봅시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37-42)
분명히 사도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성령을 받는다’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구원의 대열에 참여했는데 방언했다든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기록은 거기에 없습니다.
이것으로 인한 논쟁거리가 뒤에 나옵니다. 즉 사마리아 전도 사건과 에베소 교회에 있었던 사건을 말하면서 구원을 얻는 것과 성령이 내리시는 일이 구별된 사건으로 등장해서 구원을 얻는 것과 성령이 임하는 것은 다르다는 아주 중요한 논쟁거리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 구언을 얻으면 꼭 성령을 받는 것은 아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서 따로 기도해야 되고 성령을 받는 자는 좀 다른 고급한 신자다라는 식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제대로 믿으면 성령이 임하고 성령이 임하면 꼭 방언을 한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바로 맨 처음 사건, 맨 처으??? 얻은 신자들, 여기서도 그들이 구원함을 얻었으되 사도 베드로가 약속한 것같이 성령을 선물로 받는 다는 약속까지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원을 얻은데 성령의 임함에 대한 성령받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새 사람이 되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의미의 성령을 받는다는 약속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즉 그 신앙 고백을 갖고 있는 자에게는 성령이 와 계십니다. 그는 이제 그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 자신이 자신의 운명을 다 결정하는 자가 아닙니다. 창세기 6장을 봅시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1-3절)
말하자면 성령을 완전히 거두어 가 버리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드디어 살지 않기로 하십니다. 우리가 타락하고 나서 하나님과 분리가 되고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하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러운 자가 되었고 죄악 속에 묻혀 있는 자가 되었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악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 하나님께서 맨 처음으로 하신 일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 와서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구약식으로 성전에 가서 지성소에 제물을 갖고 들어가야만 하나님을 한 번 만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성령이 와 계시는 신인 합동의 존재론적으로 어디까지가 성령 하나님이고 어디까지가 인간인지를 모르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을 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위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9-11절)
이것이 신자의 존재론입니다. 신자의 존재는 이제 인간적인 측면에서만 평가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과 합작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망하면 성령 하나님도 망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나는 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여기 성경에 있는 식으로 하자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하여 산 것입니다. 나는 못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절망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것으로 우리라는 존재를 평가받지 않고, 같이 계시는 성령 하나님의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전능하시고 영광스러우시고 온전하신 것도 이제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망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포기할 수 없으며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혼자 결정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성령이 와 계십니다.
그런 존재로의 부름에 대한 첫 선언의 개막 테이프를 끊는 사건이 성령강림이라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갖는 의미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겪는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같은 역사적 사건의 반복은 아닙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인간에게서 더나셨던 하나님이 이제 다시 오사 하나 되는 일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시고 시작하신 사건이고, 그 일은 우리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완성되는 목표까지 가는 시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로 갈 것입니다. 가느 과정에 여러 단계와 가는 길마다에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함께 하시며 이 길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이 필요하다면 나타날 텐데 그것이 꼭 시작일 필요만은 없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각자에게는 시작의 모습으로서 성령강림이 체험될 수 있고 중간의 여러 과정으로 성령이 와 계시며 간섭하시는 것이 체험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꼭 방언일 필요도 없고 그래서 눈물 흘리면서 회개하는 모습일 수 만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은 부부가 결혼식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사랑하던 사람이 드디어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식 날이야말로 모든 사람들 앞에 이 사람이 부부가 된 것을 선언하는 날입니다. 공식적으로 모든 것이 허락된 날이므로 그날이 가장 행복한 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보면 어느 때가 가장 부부 관계가 좋습니까. 그것이 만일 연애할 때라면 여러분은 결혼 잘못하신 것입니다. 살면 살수록 행복하고 더 사랑해야지 살아갈수록 재미가 엇다면 그것이 무슨 결혼입니까. 물론 연애할 때보다 결혼해서의 생활이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연애 때는 생활이 없지 않았습니까. 사랑을 주고 받는데 생활이 개입이 안됩니다. 그때는 연지곤지 바르고 용돈 들고 만나서 놀려고만 하는 계획으로 시간을 잡아놓고 만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밤낮 행복했지요. 만나면 고기만 썰고 택시만 타고 다니고. 그러나 지금은 택시를 타기보다는 전철을 이용합니다. 생활이 개입되었기 때문에 치장하고 노는 것이 많지는 앟지만 살면 살수록 잘했다, 더 사랑한다 하는 것이 부부생활의 의도된 축복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꿈결같이 그때가 늘 좋아요.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언젠가도 예를 든 것처럼 연애할 때가 가장 크게 사랑을 하고 좋은 것 같지만 그때는 사랑이 뭔지 모를 때입니다. 그때는 불길만 요란합니다. 마치 산닭 위에 휘발유 붓고 불질러 놓은 것 같습니다. 불길은 요란하게 치솟았는데 불 꺼진 다음에 먹으려고 하면 털밖에 그을린 것이 없습니다 껍질도 다 안 타고 속은 먹을 수도 없습니다. 결혼을 해서 서로 깊은 사랑의 경지에 가는 것은 마치 삼계탕 할려고 일 주일 정도 삶아 놓은 닭 같지 않습니까. 어디가 뼈고 어디가 살인지 모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작입니다. 결혼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은 그때의 순수함, 열정, 방향성. 이런 뿌리를 연결하자는 의미에서 돌아가자고 해야 합니다. 그때의 감격으로만 돌아가자는 의미에서 초대교회를 운운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마치 늘 소녀 시절이 좋았어, 연애시절이 좋았어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 인생을 사는 동안에 열매를 맺을 생각은 하지 않고 반짝거리다가 꽃만 피우다 돌아가려는 것과같이 그것은 일종의 허영입니다. 그것은 책임없는 일이고 더 깊은 경지의 기쁨과 영광된 문제들에 대하여 모르는 소치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시면 안됩니다. 잘못하면 신자들도 이런 불행이 있습니다. 사람이 언제 제일 감격스러우냐 하면 예수 모르던 사람이 중간에 예수 믿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기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밤낮 그것만 하는 사람 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 에수 믿게 하고 그 감격만 연결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사명으로 부름 받은 사람이 한다면, 말하자면 전도자로서 그러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우리 신앙의 체계에 있어서도 그 연애 때의 감정, 결혼식 때의 행복같은 그런 감정의 연장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이제 성령은 우리 안에서 다르게 역사하십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거룩을 사모하게 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더 열심을 갖게 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더 아느 일에 나를 몰아가며 삶의 모든 분야에서, 나의 인격의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르 닮아가는 모습으로 몰고가는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주를 내가 사모하는 것들에서 어떤 식으로 경험이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방언이나 병 고치는 것으로만이 아니고 회개와 눈물로만이 아니고 어떤 산을 옮기는 능력과 기도하는 역사로만이 아니라 나를 아버지께서 거하실 처소가 되게 하고 거룩한 성전으로 완성되어 가는 일에 조그만 진전과 보충과 나아감으로써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적인 모습으로도 나타날 것이며 필요하다면 기적의 모습으로도 나타날 것입니다. 밤낮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말이 맞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우리가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여기서부터 더 발전적이고 지속적이고 완성적인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이 감격에만 묻혀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사건이 갖는 목표와 방향성을 향하여 우리의 발걸음을 떼어 놓는 자가 되어야 되고 그런 의미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룰 줄 아는 자로 서야 됩니다. 나의 감격과 행복을 구하지 말고 완성을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할 말이 있고 꺼내 놓을 것이 있는 자가 되지 말고 만들어져 가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1-4
우리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서 이제 우리만으로는 우리의 존재를 평가하지 않는, 말하자면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와 계셔 새 사람이 되었다 하는 신자의 존재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있을 때마다 등장하는 싸움거리는 이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방언을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추적을 해서 신자가 갖는 바 신자 된 특권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방언을 꼭 한다 하는 문제는 사도행전에서는 중요한 싸움거리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첫 성령강림에 있어서도 강조된 것이 방언이었고, 사도행전 8장에 가면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전도를 해서 그곳 사마리아 사람들을 예수 믿게 했는데 나주에 사도들이 그 얘기를 듣고 그곳을 방문합니다. 그때 사도들에 의해서 그들이 다시 성령을 받고 방언을 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전도받고 구원얻은 일이 있고 그 다음에 다시 나중에 사도들이 권하여 성령을 받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가면 에베소 교회에 이미 그 교인들이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로 말미암아 다시 안수를 받고 성령을 받아 방언을 하는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교파는 아니지만 ‘오순절파’라고 하는 파가 있었습니다. 특별한 교파는 아니고 뜨거움과 열심, 어떤 체험들과 은사들을 강조하는 신앙 노선을 걷는 자들을 오순절파라고 일컬었습니다. 그 오순절파는 장로교 안에도 있고 천주교 안에도 있습니다. 그런 신앙을 견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아주 중요한 근거가 되어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것 이상의 것들이 있다, 성령을 받고 성령이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은사들을 받는 것이 있는데 그거을 사마리아 전도 사건과 에베소 교회 사건을 근거로 듭니다.
구원은 얻었지만 성령 받는 일은 다른 문제다, 성령을 받으면 분명히 성경 어디에나 강조되는 것처럼 꼭 방언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 문제가 사실이 그러한가? 오순절 성령강림에서의 방언 사건이, 말하자면 성령이 오시면 꼭 나타나느 필수적인 현상이냐 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2:4을 보시면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사마리아 전도로 말미암아 일어난 방언과 에베소 교회에 있었던 방언은 여기에서 일어난 방언과 달라 보입니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방언은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며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 2:5-11)
여기서 말하는 방언은 외국어입니다. 지금 우리 신자들이 알고 있는 방언이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쓰는 대화용의 말이 아니고 신령한 언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그런 방언이 아니고 외국어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에서 방언이 두드러졌다고 하는 것은 성령이 오셨다라는 증거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심으로써 이제 우리에게 무엇을 시키시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이 방언이 그런 의미에서 성령이 와 게시다는 표징이 아니고 성령이 오셔서 시키시려고 하는 어떤 일 때문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언을 해야만 성령이 오셨다는 표라는 것은 조금 맞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외국어를 주시느냐 하면 문제는 자명합니다. 사도행전 1:8의 약속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성령은 이런 의미에서 주시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지금 이 방언은 성령이 오신 증거가 아니라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너희가 해야 할 일이 잇다. 그 해야 할 일, 땅 끝까지라는 전도의 책임의 영역을 위해서 주어진 결과인 것입니다. 그렇지요? 성령이 임하신 증거가 아니라 성령이 임하셔서 이제 우리에게 시키시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외국어가 등장하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외국어를 할 능력을 가졌다’라기보다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명령하시기를 이제 이 복음은 유대인만의 것이 아니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의 모든 족속에게 허락하신 것이라는 표로서 성령이 임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저받은 신자로서의 표가 아니라 이제 내가 너희들이 그동안 알고 있었던 것과 같이 유대인만의 주가 아니요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요 온 천하 만인의 아버지가 되려 하시며 나도 유대인만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온 천하 만인을 구하러 온 메시야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그들을 모두 구원받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져 이 일을 해결했으니 이제 너희는 가서 이 복음을 전하라. 유대인만이 아니다 온 천하 만인에게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자 이국어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 하면 외국어를 했다, 기도를 해서 성령을 받아 외국어를 할 것이다라가 아니라, 이제 성령이 임하시고 주께서 구속 사업을 완성하신 그 혜택을 누구에게까지 허락한 것이냐를 강조하려는 것이 오순절 성령강림에서 더 중요한 요점입니다. 내가 성령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방언을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구원을 얻는댜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며 대상은 어디까지냐 하는 문제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은 초대교회 유대인들에게는 사실은 획기적이고 어떤 의미에서 충격적인 하나의 사건인 것입니다.
구원이 유대인만의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만인의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는 것에 대한 사도들이 받은 성령의 감동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지금 사도들이 성령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외국어를 하게 되었다 하는 것은 그들이 성령을 받을 만한 실력이 있었고 그들은 다른 사람과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보너스로 외국어를 할 수 있게 해줬다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 모두는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얻으며 민족적인 구별로써 우열의 개념이나 혹은 더 이익받고 덜 이익받는, 그런 장해도 없는 구원의 대상이 전 민족 땅 끝까지라는 지적을 여기서 받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 성령강림과 방언을 허락하신 데에는 그 대상이 땅끝까지요 각 족속이라는 뜻보다 좀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뜻과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918절). 이 말씀에 응함입니다.
이제 오순절 성령강림을 이런 차원에서 봐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임하심을 체험하고 그 충만하심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외국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방언이 일차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쓰이는 언어이지 신령한 언어가 아니라는 것부터 이해를 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방언이라는 것을 만들어낸 것은 그 방언이 성령이 임했다는 증거이기보다 이제 구원의 대상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인 문턱을 넘어선 뜻이라는 것을 일차로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더 확인해야 하는 것은 이 일은 이미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기로 한 그 약속 속에 더 큰 의도와 목적하는 바가 있어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일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그 약속의 성취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방언을 주시고 나가서 전도하게 하는 것과 성령이 직접 한 심령을 두드리어 그를 얻는 것과 어느 쪽이 더 완벽하고 쉽겠습니까. 성령이 직접하는 것이 낫습니다. 여러분,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을 공부시켜서 대학 입시를 보게 하는 것과 선생님이 직접 시험 문제를 푸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성적이 좋겠습니까. 물어보나마나입니다.
그러면 왜 학생들에게 공부를 시켜서 학생들로 하여금 시험을 보게 합니까. 목적이 정답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보내느냐가 아닙니까. 지금 외국어도 그렇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무슨 외국어가 필요합니까. 성령이 꽉 잡으면 그만이지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여기에 있는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그들이 외국어를 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은 외국어를 했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같이 이제 주님께서 우리를 보내어 그의 일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의 성취입니다. 그 속에는 우리를 어떻게 요구하시느냐가 있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가서 죽어가는 영혼을 붙들어 오는 것만이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같이 시험 문제에 정답을 쓰는 것만이 문제라면 선생님들이 가서 직접 시험보는 것이 제일 빠릅니다. 그럴바에는 성령이 가셔서 일하는 것이 낫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예수 믿는 사람 때문에 예수 믿는 데에 도움을 받았습니까. 손해를 봤습니까.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 주변에서 예수를 믿습니까. 혹은 안 믿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 대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꼴보기 싫어서 안 믿는 사람이 그만큼 또 있습니다. 그렇죠? 여러분 남편 중에서 혹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 집에 가서 조용히 물어보십시오. 왜 안 믿느냐고. 틀림없이 당신 때문이라고 그럴 위험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쓰십니다. 그것은 얼마나 큰 비밀인지 모릅니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 속에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관계와 같은 관계로써 우리를 이제부터 대접하고 초대한다는 놀라운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좀더 확실히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성경이 묘사한 것 중 대표적인 것을 추적해 봅시다.
그 사건이 얼마나 오순절 성령 사건과 흡사한가를 보면 여러분이 참으로 놀라운 기쁨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봅니다. 마태복음 3장을 봅시다.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13-17절)
이것은 아주 재미있는 사건입니다. 주님게서는 성부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하시고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안타까움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러 오십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곧 성부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성자 예수님의 일에 대하여 성부 하나님은 늘 기뻐하시고, 성부 하나님의 깊으신 뜻에 대하여 성자 하나님은 한 번도 이의 없이 순종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십니다. 그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 다 하나님의 뜻과 합치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제부터 성자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성부 하나님이 인정 하신다는 공식적인 선언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소리까지 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지금 오순절 성령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그들에게 외국어를 준 것은 결국 이들에게 내가 너희들 모든 민족들에게 말할 수 있게 했다라고 함으로써 이들이 하는 말은 하나님이 전하고자 하는 말이요, 이들이 전하는 내용은 내가 기뻐하는 일이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만일 하나님 앞에 흡족한 자들이 아니라면 그 가는 길을 막아서지 않겠습니까. 마치 발람이 하나님의 뜻을 못 알아 듣자 천사를 내려 당나귀를 막듯이, 만일 하나님이 보실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하나님 편을 들기에 부적합한 자라면 하나님이 우리의 입을 열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외국어를 그들에게 주사 사도행전 2:5 이하에 나오는 것같이 일본에서도 오고 대만, 싱가폴, 필리핀에서도 오고 소련, 몽고에서도 왔는데 우리나라 말로 다 듣는다 하는 그 얘기는 지금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내려오신 데 대해서 성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이 아들은 내가 기뻐하는 자요 너희들은 이 아들의 말을 들으라’고 히시듯이 지금 이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하는 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이요 우리의 발걸음과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비밀들을 펼치시기로 하며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비밀과 온갖 뜻들을 함께 나누시기로 한 대상이다 하는 뜻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었더니 성령이 오시더라, 성령이 오시니까 방언이 나오더라 그것으로 기뻐할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기뻐할 문제지만 그러나 그것 이전에 이쪽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부르셨느냐.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전서 2장으로 가면 우리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9절)
이것을 이렇게 오해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늘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니 너희를 불러내신 자를 선전하며 전도하는 일을 책임맡아야만 된다’라고 이해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전도할 책임이 있고 사명이 있다는 그 차원만이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고, 너희가 어떤 자들이 되었기에 너희의 입술과 너희의 인생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자가 될 수 있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얼마나 높은 존재가 되었기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우리에게 다 맡겨 놓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수 많고 부족하고 완악한 우리들이 도대체 어떤 부름을 받았기에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과 우리를 고쳐내시는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면서 마음 놓으시고, 기뻐하신 것같이, 우리가 도대체 어떤 존재가 되었기에 하나님이 땅 끝까지 모든 족속을 구언하는 일을 우리에게 맡겨 놓으시고 마음이 놓으시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우리 같은 것들한테 구역장을 맡기시고 어떻게 하나님이 안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대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가가하는 것보다 성경이 얘기하는 대로 하자면 우리가 괜찮은 사람일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보자면 한심하지만 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을 보십시다. 예수님의 사역을 다시 한 번 이런 시각으로 보십시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게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29절)
여기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과 분리된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언제나 지키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또 이렇게도 합니다. 성자 예수님에게 성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유는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고 기대에 어긋나는 일을 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 쪽에서 성자 하나님을 보면 언제나 흡족하고 만족스럽고 기쁜 것입니다. 예수님쪽에서 봐도 그렇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에 어긋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게 주님은 아버지의 보냄을 받았고 말하자면 지금 우리도 그렇게 주님이 보냄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존재냐 하면 성자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또 우리는 우리를 보내신 이의 기쁘신 뜻을 늘 기쁨으로 순종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드문데 성경에서는 그렇다고 합니다. 여러분 실제로 그런지를 잘 기억해 보십시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여기에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마태복음 28장을 봅시다. 성령이 오셨으니까 성령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방언을 하고 전도를 하게 되었다 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 : 8-20)
무엇과 대응이 됩니까. 조금 전에 요한복음 8장에서 본 바와같이 아버지께서 항상 나와 함께 계시도다, 항상 나와 함께 계셔서 지키시고 나는 또한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늘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늘 나와 함께 하신다입니다.
하나님께서 늘 나와 함게 하시기 때문에 내 멋대로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내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 편입니다.
신자는 주님께서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는 자이기 때문에 내 멋대로 할 수 없는 자이며 그래서 성령이 와 계시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주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를 놓아두시지 않는 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지금 성령이 오셨더니 마음의 기쁨이 있고 이런 은사가 나타났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실 수 있도록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음 놓고 땅 끝까지 모든 족속의 영혼을 우리에게 맡기실 수 있어서 우리에게 방언을 허락하시고, 지금 오순절 강림 식으로 얘기하자면, 그래서 신자들은 뛰어나가 기쁨으로 그 일을 시행하는 자 되고 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느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자신의 존재가 자기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실수하고 실패합니다만 이제는 우리가 우리 하나만으로 우리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우리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어긋난 일을 하실 리가 없습니다. 내가 성령을 섭섭하게 하고 안타깝게 하는 일은 있어도 성령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안타깝게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로 지금 부름을 받았고 그래서 모든 것이 허락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가 오순절 성령강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대목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르 이제 어떻게 인정하시느냐 할 때 마태복음 16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게 복이 있도다 이를 내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내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
늘에서도 풀리리라.”(16 - 19절)
부부같은 존재입니다. 제가 파란색을 좋아하는데 제 아내가 베이지색을 좋아한다면 제가 무슨 색의 옷을 입을 것 같습니까. 우리가 저녁식사를 하러 나갔는데 저는 돈까스를 좋아하고 제 아내는 스파게티를 좋아하면 무엇을 먹게 됩니까. 어느 쪽이 보통 양보를 합니까. 양보한 쪽이 남편이든 아내이든 양보할 때 할 수 없이 양보합니까. 기쁨으로 양보하게 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를 그렇게 부르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내가 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다 안하실 리야 없지만 말하자면 우리를 그렇게 부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내가 싫다고 하면 하나님도 싫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하면 하나님도 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물론 거기에는 하나님이 좋다고 하면 우리도 좋아하는 그런 부분이 생깁니다. 죄의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을 더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여튼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우리의 인생에 우리의 개성들을 쓰시면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히 의미있는 일입니까.
우리에게 방언을 하게 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그의 주민등록증과 인감도장 및 저금통장까지 맡기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오순절 성령강림에서 교회에 베푸신 축복입니다. 허락하신 특권입니다. 여러분은 신자가 되었다는 것을 무슨 일을 해야만 된다, 죄를 졌느냐 안 졌느냐 이런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차원에서만 돌아볼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그 부르심을 입은 상급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그 선포에 대하여 여러분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깊은 감사가 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그 영광과 특권을 놓치지 않고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동역하시기를 원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대등한 관계로 여러분의 의견을 들으시며 여러분의 인생을 요구하고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감사와 찬송이 있고 정말 승리와 기대 속에서 여러분의 인생을 거는 것입니다. 남에게 이 특권들을 빼앗기지 마시고, 허락된 것들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시간만 보내는 게으른 신앙생활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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