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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근거

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1793 추천 수 0 2009.06.19 20:50:06
.........
성경본문 : 행2:37-42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20 / 1988.05.22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지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행 2:37-42)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베드로의 설교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며 주님 앞으로 돌아오고 구원얻는 일이 생겼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쉽게 생각하면 성령충만을 입은 베드로의 능력있는 설교로 말미암아 많은 신자들이 생겼다는 식으로 생각을 이끌어낼 수도 있겠으나 여러 번에 걸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베드로의 설교가 그런 것을 의도하고 있지 않다고 했으며 그 결과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같이 베드로의 능력있는 설교로 말미암는 결과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사실 그렇게 보아도 잘못은 없습니다만 본문이 그런 의도를 갖고 있지 않고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방언 자체에 있어서 성령강림 이후에 사도들과 그때 마가의 다락방에 있었던 120문도들이 함께 누렸던 성령충만으로 인한 방언도 그것이 어떤 신비로운 체험이거나 비범한 방법이기 이전에 그것이 외국어였던 것을 생각해 보았었습니다.

말하자면 방언도 복음이 유대주의를 넘어선, 이스라엘 민족의 민족주의의 울타리를 넘어선 것, 즉 그것이 시사하는 바가 먼저 이해되어야 하듯이 베드로의 설교에 있어서도 먼저 시사되어야 했던 것은 이제는 구원의 날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흑암에 빛을 던지신다.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불러내고 계시다는 것이 그 설교의 주된 주제였던 것을 기억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것으로 인한 반응들도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가 어떻게 설득력 잇는 설교를 했느냐, 베드로가 성령충만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힘있는 설교를 했느냐가 아니라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듣는 심령들에게 간섭하사 주의 말씀을 듣게 하시며 주의 백성으로 불러내신다는 이야기가  이 사건의 줄거리입니다.

말하자면 성령강림, 성령충만, 베드로의 힘있는 설교의 결과로서 지금 삼천명이나 되는 새로운 신자를 불러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설교, 즉 베드로를 통하여 맡기신 구원의 복음에 관한 이야기들이 상대방에게 이해되도록 하시는 시대를 열었다. 이것이 이 사건의 골자인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의 설교들과 비교하면 더욱 확실해집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몇가지의 중요한 설교 중에 가장 대표적인 설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베드로의 설교이며 또 하나는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그런데 설교 자체를 놓고 볼 때 어느 쪽 설교가 더 치밀하고 미화되어 있느냐 하면 스데반의 설교가 더 미화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에서는 그의 가르침에 대한 묘사가 얼마나 멋진가 도는 얼마나 힘이 있었으냐에 대한 묘사가 없습니다. 스데반의 설교에는 그런 묘사들이 훨씬 많습니다. 사도행전 6장을 봅시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8-10절)

스데반에 대한 설명은 일단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고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다고 합니다. 좋은 말은 다 붙었지요. 그리고 7장부터 스데반의 설교가 진행됩니다. 그 반응이 어떠했느냐 하면. 아주 긴 설교를 끝내자 7:54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이라고 합니다. 드디어 그들은 스데반에게 돌을 던져 그를 죽입니다. 그러니 쉽게 생각하지 말아 달라는 얘기입니다. “봐라. 보잘 것 없었던 어부 베드로가 성령충만을 입자 단 한 번에 삼천 명이나 긁어 모았다.‘ 이렇게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자면 스데반은 베드로보다 치장이 훨씬 잘되어 있는데 베드로의 설교에 삼천명이 회개했다면 스데반의 설교에는 몇 명이 회개해야 맞겠습니까. 5만명은 모여야 적당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베드로의 설교의 결과가 아니고 또 스데반의 설교의 결과가 우리에게 이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힘이 있었기 때문에, 성령님이 함께 하겼기 때문에 삼천명이나 회심할 수 있었다고 하면 스데반의 은혜와 권능과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설교에는 몇 명이나 회심해야 합니까. 그러나 한 명도 회심치 않고 돌만 날라와 죽었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을 합니다. 저희 교회에 새로 등록하시는 분들을 위해 두 달에 한 번씩 새신자 환영회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좋아서 이 교회를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아니까 그냥 웃으며 기쁨으로 맞이합니다만 더 깊이 빠져 들어가면 설교를 잘 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당사자의 마음을 움직이사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을 기뻐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옷을 사 입을 때 곤색이 좋으냐 회색이 좋으냐 하는 식으로, 자기가 가진 색깔과 맞아서 그렇게 온 것이지 그 칼라가 유일한 내용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오신 분들은 성품이 좀 뾰족한 분들입니다.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와 달리….’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같은 성경이고 같은 주를 섬기고 같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교회나 다 그렇습니다. 같아요. 그러니 그런것에 속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셨고 여러분 마음에 간섭하사 여러분을 변화시킨 결과입니다. 이런 것들이 매우 중요하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11장을 찾아봅시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꾜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15-19절)

제가 말씀드리기를 만일 베드로의 설교가 설득에 관한 문제이고 그 설득의 열매 맺는 이유가 성령충만 때문이라고 한다면 성경자체의 모순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서 자체만으로 인간들은 모두 회심했어야 맞다고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성령님이 오셔서 베드로에게 간섭하여 한 것보다 더 직접적이고 더 원액이지 않습니까. 예수님 자신이 그 말씀을 하셨고 또 그 행하신 일에서 성령충만으로 말미암은 방언과 새 술에 취한 것 같은 그런 기쁨의 정도가 아니라 죽은 자가 살아나고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고 소경이 눈을 뜨는 여러 기적 속에서 그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같이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슬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에 호응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와 생명에 대하여 인간들은 반감만 갖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진리를 세례요한이 와서 얘기할 때 그를 미쳤다고 했습니다. 먹지도 않고 입지도 않고 밤낮 소리만 지른다고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는 죄인들과 함께 자리하고 함께 식사도 하시고 하니까 이제는 먹고 마시는 데만 정신을 팔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으로 무슨 핑계를 대서든지 그 얘기를 안 들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의 설교에서는 베드로가 얘기나 곱게 했습니까? 상상컨대 아마 세례요한 식으로 상당히 날카롭고 반감어리게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설교나 스데반의 설교나 다 너희들은 죄인이다라는 지적이었습니다. “너희가 분명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로 삼았느니라.” 너희가 죄인이다, 너희가 잘못했다는 그 지적밖에 없습니다. 아마 모르기는 몰라도 서슬이 퍼랬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의 설교에서는 그 설교를 듣고 이를 갈며 죽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사건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처음 등장시킨 것은 그 설교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찔리고 회개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회개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싶은 것이 사도행전의 베드로 설교와 그 반응에 대한 중요한 내용인 것입니다. 드디어 사람들이 영생에 대한 주님의 말씀에 정당한 반응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전체에 관한 얘기입니다. 구약이 전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따로 택하시고 그들의 정치와 역사에 간섭을 하십니다. 필요하다면 직접적인 개입도 하시고, 그들은 하늘로부터 우뢰소리같이 발하시는 소리도 듣고 지진이 나서 죽기도 하고, 여러 가지 기적을 목도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끝이 무엇으로 끝납니까.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로 끝이 나지 않습니까.

문제는 전하는 자의 실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소경에 칼라 TV를 보여주는 셈이고 귀머거리에게 좋은 오디오로 음악을 들려준 셈이 됐다는 것입니다. 들을 줄 모르고 볼 줄 모르는데 전하는 사람의 방법과 테크닉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하고 싶었던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에서부터 구원을 얻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믿기 이전의 문제입니다. 해방되었다는 얘기가 상대방이 그것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와 상관없이 사실의 선포였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돌아보셨고 죄에서 꺼내셨다는 선초가 베드로의 설교의 가장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이제 그 말씀을 들은 자들이 이것을 알아듣게 되었다라는 것을 가장 큰 내용으로 한 기록이 본문의 그 반응들인 것입니다. 선택을 했다는 얘기 이전에 주의 말씀이 전차되는 것과 함께 그 말씀을 알아듣는 자들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주의 복음이 전파된 것을 우리가 선택하느냐 선택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허락하시고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며 방언을 허락하사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이 복음의 내용들이 전달되고 소개될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받아들이기까지 하는 일에 있습니다. 즉 성경적으로 얘기해서 구원을 허락하시는 일이 시작되었다는 것에 베드로 설교가 서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얘기하자면 성령님이 오신 것도 전하는 자의 힘과 능력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실패치 않게 할 간섭으로서의 성령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말하는 자의 실력으로가 아니라 듣는 사람이 알아듣도록, 듣는 사람이 이것을 배척하지 못하도록, 듣는 사람이 이 구원을 외면하지 못하도록, 듣는 사람의 심령에까지 간섭하는 것으로 성령강림이 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사도행전은 2장 다음에 하나의 사건을 연결합니다. 3장에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사건이 생깁니다. 이 사건을 잘 보십시오. 사도행전이 이 사건을 베드로의 이 설교와 그 반응 이후에 연결시킨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믿어집니다. 3:1~10을 봅니다.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로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앉은뱅이 자신이 일어날 것을 구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상대방이 그것을 해줄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어떤 하나의 기적이 일어나는 데 있어서 상대방의 믿음까지도 요구하지 않고 있는 사건입니다. 대상과 관계없이 누구에 의해서 일어나느냐 하면 순전히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문 앞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만납니다. 그런데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의 행색이 초라했던지 구걸도 안했던 모양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를 보라 합니다. 그래서 동냥을 하려나 하고 보니, 이쪽에서 무슨 문답이나 이제부터 하려는 일에 대해 네가 호응하겠느냐는 물음도 없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걸은 것입니다. 상대방이 그것을 받을 만한 조건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상대방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서 일어났지만 그것이 베드로와 요한의 믿음에 의해서 상대편의 결과가 됐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이후를 읽어 봅시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하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으니라.”(행3:11-16)

16절에 있듯이 이 일이 무엇으로 일어났느냐 하면 그 이름을 믿으므로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속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 일을 해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났다라고 생각할 수 있고 혹은 그것을 받는 사람이 그 일이 일어났다라고 생각할 수 있고 혹은 그것을 받는 사람이 그 일이 일어날 줄로 믿고, 가능한 줄로 믿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한 가지는 앉은뱅이 자신은 그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 무엇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을 일으킨 베드로와 요한의 믿음이 이 일을 행사케 했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본문은 그것까지도 부인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얘기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은 믿음이. 성령님이 내게 함께 하신 충만하신 능력이 무슨 일을 일으킨다는 것으로 베드로 설교의 결과와 그리고 앉은뱅이의 일어남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힌트는 처음에 나온 것 같이 12절에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분명히 부인합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우리의 힘으로도 아니었고 우리의 신앙으로도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왜 우리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으로 생각하느냐. 내 힘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그렇다고 믿음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16절에 있었던 것같이 그 이름이,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즉 이 얘기는 그 이름을 믿었기 때문에 오는 보답으로가 아니라 그가 친히 하신다는 성경적인 표현입니다. 내가 믿었기 때문도 아니고 당사자가 믿었기 때문도 아니라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에 이 일을 그분이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믿음이라는 것은 성경이 얘기하는 행위와 대치되는 용어로 쓰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행위라는 말은 일을 한다 안한다가 아니라 하나의 결과에 내가 원인을 제공하는 법칙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인을 만들어서 결과를 얻어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내가 주를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원인으로서 작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이 앉은뱅이는 그 자신이 앉은뱅이의 자리에서부터 일어날 아무런 조건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요구도 하지 않았고 믿음도 없고 거기에 대한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일으켰습니까. 주께서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앞의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남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어서, 성령의 감동이 있어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저들이 믿게 되었다가 아닙니다. 구원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 구원하신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는 작업일 뿐입니다.

우리로 믿고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조건을 제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설교에서 강조한 것같이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그저 그 얘기를 듣는 자들이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며 구원의 반열에 들어오더라는 것입니다. 믿으십시오. 주일날 교회오면 점심은 제가 살께요. 이것이 아니고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소리를 쳤고 구원얻은 사람은 구원얻은 사람대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양쪽에서 손발이 서로 안 맞은 것입니다. 마치 앉은뱅이와 베드로같이.

베드로는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고 앉은뱅이는 구걸하고 있었는데 베드로가 지나갑니다. 앉은뱅이는 닭이 소 보듯 보면서 또 한 사람이 지나가는구나. 저 친구는 생긴 것을 보니 동냥을 해줄 것 같이 않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앞에 서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실은 사도행전의 가장 중요한 초석들입니다. 사도들의 성령충만에 의하여 어떻게 복음이 힘있게 뭇 심령을 두드리며 꿰뚫으며 지나갔느냐의 얘기가 아닙니다. 사도들을 높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지금 구원을 베풀고 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선조 아담이 타락한 그날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실 때 “그러나 여자의 후손으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모든 족속으로 구원을 얻게 하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불러내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렇게 누누이 예언하시고 약속하신 대로 드디어 그 일을 이루셨고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보니 죄인을 붙잡고 있던 악한 것들이 그 사망의 권세를 붙잡고 있던 심령들을 빼앗기더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의 말씀을 듣는 심령들의 눈을 밝히시고 그 영혼을 불러 일으키사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회개를 만들어 내시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기록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여기에 와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예수를 믿겠다고 열심을 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언제 성경을 제대로 읽었으며 언제 설교 말씀을 제대로 들고 참 그렇다고 해서 왔습니까. 와 보니까 참 그렇습니다였고 사실은 다른 이유로 인해 오지 않았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로 옵니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캥겨서 온 것이 많지요.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등등 여러 가지 이유를 댑니다만 근본적으로 따져보면 우리 모두 우리발로 온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이끌리어 이 자리에 왔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전 기록의 근거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행전 곳곳에서 성령충만하여,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주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는지라 하는 말들을 만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사람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자신만이 책임지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우리가 결정하고 우리가 책임졌을 때 우리는 다 어떻게 했습니까?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것같이 다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자기 생각이 옳은대로 했습니다. 죄를 짓고 죄를 마시며 죄를 즐겨했습니다. 빛이 세상에 왔을 때 외면했고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외면했고 주를 영접하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성령님이 오셨다는 것은 바로 능력의 사람이 된다는 것 이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그 상실된 마음과 죄의 정욕대로 버려 두지 않고 그의 영으로 우리에게 간섭하사 진리로, 행복으로, 영이란 것으로, 영생으로 우리를 간섭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원래대로 놔 두었더라면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같이 돌밖에 던질 줄 몰랐을 우리가 주의 영의 간섭으로 베드로의 설교 앞에 항복하는 일이 생겼다는 것이 베드로 설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나를 혼자 두기 아니하신다. 이것이 가장 큰 우리의 감사요 기쁨입니다. 나를 내 생각대로 놔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감사입니다. 오늘 비가 오지 않았던들 얼마나 심각한 일이 생겼을지 모릅니다. 비도 때 맞춰서 옵니다. 물론 우리야 날이 좋으면 날이 좋아서 감사하고 비가 오면 비가 와서 감사하다고 하는데 사실 알고 보면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우리 생각에 간섭하사 내 욕심대로, 내 생각대로 가지 않게 막아주셔서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위를 향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 생각을 위해서 성령충만을 요구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충만을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힘과 능력으로 요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절대 안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이런 시각에서 요구해야 합니다. 나를 내 생각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기쁘신 뜻대로 갈 수 있도록 간섭하시옵소서라는 시각에서입니다.

성령충만이 자랑으로 나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감사로 나와야 됩니다. 옳소이다 하는 고백으로 나와야 됩니다. 그때 나를 그렇게 안하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하는 것으로 나와야 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하늘나라의 주님앞에 설 것이고 그 간섭에 의해서만 우리는 하늘에서 ‘아이고 그 남포교회에 같이 앉아 있더니 여기서도 같이 앉아 잇는군요’라고 얘기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끼리 우리 생각대로 걷는다면 여기서는 같이 앉아 있다가 하늘나라에서는 같이 않아 있지 못할 가능성이 100%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과 베드로의 설교와 그 반응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리고 싶으신 복된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이 감사와 기쁨과 자랑이 오늘 이 말씀을 들은 모든 심령들 위에 흔들리지 않는 근거로, 가장 깊은 자랑으로 자리하셔야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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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7 사도행전 종말론적 삶 행2:43-47  박영선 목사  2009-06-19 2191
1676 사도행전 죄 씻음과 회개 행2:37-41  박영선 목사  2009-06-19 2814
» 사도행전 흔들리지 않는 근거 행2:37-42  박영선 목사  2009-06-19 1793
1674 사도행전 새 시대를 여는 설교 행2:32-36  박영선 목사  2009-06-19 1972
1673 사도행전 베드로의 설교 행2:22-36  박영선 목사  2009-06-19 3312
1672 사도행전 오순절 성령강림 행2:1-4  박영선 목사  2009-06-19 3339
1671 사도행전 제자도 행1:8-10  박영선 목사  2009-06-19 2470
1670 사도행전 증인 행1:6-8  박영선 목사  2009-06-19 2540
1669 사도행전 성령강림의 역사적 의미 행1:4-5  박영선 목사  2009-06-19 2732
1668 사도행전 동적인 신앙 행1:1-3  박영선 목사  2009-06-19 3057
1667 스바냐 늦기 전에 해야 할 일 습2:1-3  한태완 목사  2009-06-18 2062
1666 스바냐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습3:17  이한규 목사  2009-06-18 3412
1665 스바냐 배반자의 최후 습1:6  한태완 목사  2009-06-18 1908
1664 스바냐 하나님의 사랑 습3:17  한태완 목사  2009-06-18 2201
1663 스바냐 여호와의 날을 선포한 선지자 스바냐 습1:1-13  한태완 목사  2009-06-18 3698
1662 학개 내일의 영광, 오늘의 격려 학2:1-9  곽주환 목사  2009-06-18 2171
1661 학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학1장  이한규 목사  2009-06-18 2367
1660 학개 교회는 축복의 전당 학2:6-9, 19  김홍도 목사  2009-06-18 2415
1659 스가랴 우리 교회의 경건 슥7:4-14  오대식 목사  2009-06-18 2171
1658 스가랴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4:6  김양인 목사  2009-06-18 2866
1657 스가랴 나보다 더 위대한 계획을 세우신 하나님 슥10:6-12  배성환 목사  2009-06-18 1920
1656 스가랴 은총과 간구의 심령을 부어 주소서 슥12:7-14  배성환 목사  2009-06-18 2278
1655 스가랴 복음 전파의 결과 슥9:15~17  이성희 목사  2009-06-18 1969
1654 스가랴 내가 돌아왔은 즉 슥1:7~17  옥성석 목사  2009-06-18 1746
1653 말라기 그 날이 이르기 전에 말4:1-6  이장우 목사  2009-06-18 2239
1652 말라기 무슨 말이 나옵니까? 말3:13-18  이장우 목사  2009-06-18 1796
1651 말라기 내개로 돌아오라 말3:7-12  이장우 목사  2009-06-18 1945
1650 말라기 주께서 임하실 것이라 말2:17-3:6  이장우 목사  2009-06-18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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