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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씻음과 회개

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2814 추천 수 0 2009.06.19 20: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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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2:37-41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21 / 1988.05.29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람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사도행전 2 : 37 - 41

오늘 우리가 생각해볼 사도행전 2장의 베드로 설교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지난주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베드로 설교의 결과라고 1차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유도하지도 않았고, 성경이 이 사건을 그런 식으로 유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루에 삼천명이나 회개한 사건을 놓고 볼 때마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했고 그 복음을 들은 자들이 회개했다고 이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37절에 있는 말씀 때문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이것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복음의 한 전도 형태입니다. 복음과 그 복음을 전하는 형태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가 늘 익숙하게 듣는 것은 ‘회개하고 구원을 얻으라’,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으라‘입니다.

제가 이 베드로의 설교에는 초청이나 설득의 의사가 없어 보인다고 말씀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다. 이런 일들이 이제 시작되었다는 해방을 알리는 고함이고 선언이었지, 와서 믿으라든가 와서 회개하라는 말조차도 그 곳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37절 이하에 있는 말씀들은 의아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전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듣는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였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와 나머지 사도들이 성령충만으로 인하여 그들이 전하는 내용에 신비로운 능력과 방법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자들의 마음을 깨우치시사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주심, 복 주심, 구원하심의 한 형상이라고 설명드렸습니다. 그것이 사실인 것을 오늘 본문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38절을 다시 보시면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는 이 말씀이 제가 드린 말씀의 아주 확실한 증거로 등장합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 같이 우리말 성경에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는다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원문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는 부분입니다.

헬라어로는,“         ”

영어로는, “Repent, and be baptized everyone of you in the name of Jesus Christ for the remission of sins."

제가 지금 어느 대목을 말하려고 이 원문을 동원하느냐 하면 우리말 번역에는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고 되어 있어 마치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그 결과로 죄 사함을 얻는 것으로 문맥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지금 영어로 얘기해서 ‘Repent, and be baptized everyone of you in the name of Jesus Christ ’까지 입니다. 그러니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죄 사함을 얻는다”(for the remission of sins)는 것입니다. 거기서 ‘      ’이라고 표현한 대목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구원 얻는 방법에 대한 등식입니다. 회개하면 죄 사함을 얻는다. 그러나 여기서 얘기하는 ‘    ’이라고 얘기한, 즉 영어로 얘기해서 for the remission of sins 하는 이 for 전치사 용법이 헬라어에서는 에이스(  )라고 나옵니다만 이 에이스의 용법이 사실은 우리말 성경에 번역되어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for라는 용법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같이 제일 많은 용법이 in order to입니다. 또한 for는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하기 위하여’만 있지 않고 ‘~이기 때문에’(because of)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본 본문이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입니다. 뭣 때문에? 죄 사함을 얻기 위함이냐, 죄 사함을 얻었기 때문에 회개하라는 것이냐는 문제입니다. 후자는 여러분이 별로 들어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제가 신기한 얘기, 남이 안하는 얘기를 하려고 이 얘기를 꺼내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제시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성경 전체의 사상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고 들어갈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12:41의 말씀을 찾아 보겠습니다. 여기에 바로 이 에이스 용법(  ), 즉 영어의 for 에 관한 용법으로 본문응 이해가기 가장 좋은 사건이 하나 나옵니다.

“심판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이 부분을 제가 헬라어로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          ” ‘요나의 복음을 듣고’란 뜻입니다. 여기 에이스가 영어에서는 “because be repented at the preaching od Jonah”, 즉 at 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 설교를 득고 저들이 회개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헬라어 용법상 제대로 비교를 하자면 우리 본문에 있는 것과같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죄 사함을 얻으리라”고 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성경대로 해놓고 보면 요나에 관한 마태복음 12:41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여 요나의 설교를 들었느니라가 됩니다. 말이 잘 안 맞죠? 저들이 회개한 이유는 요나의 설교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똑같이 에이스 용법입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 2장을 우리식으로 번역하면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회개하였느니라. 회개하라 그리하면 요나의 설교를 들을 수 있으리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이 됩니까?

그런데 이 문제만은 우리가 그대로 쓰고 있단 말입니다. ‘회개하라 그리하면 죄 사함을 얻으리라’는 형식이 우리에게는 익숙합니다. 그렇지 않고 이 요나의 설교에서도 있었던 것 같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죄 사함을 우리가 얻었느니라 그러므로 회개하라.’ 이것이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가장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은 회개마저도,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마저도 구원을 얻어내는 우리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발상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회개하라”는 것은 구원을 얻었으니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에 대해 ‘회개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등식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회개는 잘못했다는 ‘회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회개는 감정적인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그 단어는 감정적인 용어가 아니라 행동입니다. 네가 가는 길이 틀렸으니  돌아서라입니다. 울고불고 땅을 치고 가슴을 찢지 마십시오.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그것은 애통해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내가 가는 길이 틀렸기 때문에 딴 길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가던 길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네가 예전에는 죄인이었고 죄가 네 주인이었기 때문에 그 길을 갈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너를 구원하였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았으니 나오라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울고불고가 아니라 우선 나와야 합니다. 불났다 그러면 우선 나와서 누가 불 놨느냐고 해야지 그 안에서 누가 불질렀느냐고 말하며 타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는 회개 자체가 구원의 조건이기 때문에 누가 많이 울었느냐의 싸움을 합니다. 회개란 누가 더 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애통해했느냐 아파했느냐가 아닙니다. 죄 씻음은 우리가 한 일의 결과가 결단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문제로 얼마나 많이 강조했는가를 기억해보십시오. 마지막 만찬에서 잔을 나누시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니라. 너희 죄를 씻기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피로 죄가 씻어지지 우리가 회개로 죄가 씻어지지 않습니다. 회개가 저를 씨는 조건도 방법도 아닙니다.

주님이 씻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우리가 생각할 때 말이 안되는 방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시편 65편을 보십시다.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1-3절)

여기서 3절을 다시 잘 보십시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나는 죄 짓고 왔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입니다. 거기에 무슨 회개가 있습니까? 죄 사함을 얻을 조건이 진술되어 있습니까? 죄가 나를 이겼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 지금 죄 짓고 왔습니다. 나 죄 짓고 왔으니 주께서 씻어 주셔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꼭 애들이 밖에서 나가 놀다가 오줌 싸고 와서 “엄마! 뭐해. 오줌 쌌는데 팬티 갈아 입히지 않고”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잘못했어요. 너무 노는데 빠져서 오줌 싸는 것도 미처 몰랐어요. 다시는 안 그럴 테니 새 것으로 입혀 주세요” 가 아니라 “뭐하고 있어요. 불편해 죽겠으니 빨리 새 것 내놔요” 라는 식으로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끼?

요한일서 1장을 봅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9절)

이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의 아주 핵심되는 부분입니다. 죄를 자백하면 죄를 씻어 준다고 합니다.

옛날에 사또가 죄 지은 사람을 앞에 놓고 뭐라고 합니까. 이실직고 하라고 하죠. 그래서 ‘예, 맞습니다’ 하면 잘하였도다. 가라 그럽니까? 그런데 왜 이실직고하라는데 안하죠? 하면 터지니까 ‘아닙니다. 참말로 억울합니다.’하며 끝까지 우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실직고하면 그냥 용서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여기에 바로 기독교 신앙의 어떤 진수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죄 사함, 죄 씻음에 관한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사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해내시고 씻어내신 것입니다. ‘주님, 내 죄를 씻어 주십시오. 내가 씻을 방법이 없습니다.’ 무엇으로도 씻지 못하냐 하면 회개로도 씻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우리가 어찌할꼬” 라는 반응을 보인 청중들에게 하는 얘기도 그것입니다. 죄를 씻어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죄를 씻어 이제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 삼았으니 회개하라는 것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사도행전 26장의 사도바울의 회심에 관한 사건을 봅시다. 회개라는 것이 어떤 것이냐는 것을 분명히 보려는 것입니다.

회심에 관한 문제입니다. 죄 씻음과 회심의 상관관계 입니다. 사도바둘이 붙잡혀 가서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명하는 자신의 생애에 관한 문제입니다.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쫓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ㅇ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지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도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로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너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행 26:4-21)

이것이 사도 바울의 자기 변명입니다. 여기서 보면 사도 바울이 처음에 뭘 하겠다고 하했느냐 하면 9절에 있는 것같이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14절 하반절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16절에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아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증인으로 보내어 너를 내 증인으로 삼고 그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 너를 보내겠다.‘ 그래서 19절에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내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디에서 회개한 것입니까. 그 음성을 듣고 약속을 듣고 회개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 그가 구원을 얻었고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까? 회개 전입니까? 후입니까? 회개 전입니다. 그를 부르신 것이 그로 회개케 한 것이지 그의 회심이 그를 사도로 부름 받게 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최고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사도 바울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부름은 얼마나 많은 것을 시사하는지 모릅니다. 그가 회개해서 주님이 ‘너 기특하다. 내 큰 일에 너를 써야겠다’가 아니라 ‘내가 너를 이방인의 종으로 삼고 많은 사람에게 증인으로 세우기 위해 내가 너를 택하여 불러 세웠다. 그러니 너 나를 발길질하지 말고 내 말을 듣고 나가서 내 증인이 되라’ 하심으로 그가 거기서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여태껏 주를 반대하던 길로부터 주의 말씀을 듣는 쪽으로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합니다. 저리로 가다가 이리로 돌이킨 것입니다. 울고불고 하지 않았습니다. 눈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얼마나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가슴아파하고 죄송스럽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이 구원을, 죄 씻음을 얻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회개하라는 것은 대 사면령 같은 것입니다. 모든 민족 백성, 잉글랜드 백성에게 여태껏 지은 과거의 죄를 묻지 않고 돌아와 양민이 되라는 대 사면령이 내렸다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자는 사하고 안 돌아오는 자는 죽이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대 사면령이 내렸으니 돌아오라. 더 이상 악한 길에 서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까지 불렀으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회개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그의 자녀로 불렀으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악한 길에 서지 말라, 죄를 짓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다. 전에는 너희가 몰라서 그랬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지 않느냐. 이제는 우리가 죄 씻음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지 않았느냐. 이제는 너희가 빛의 아들처럼 살아야 될 것 아니냐.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회개하라는 것은 여러분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럴듯한 얼굴로 앉아 있지만 지난 일 주일도 그렇고 내일부터 또 그렇게 사실 것 아닙니까. 회개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교회에 왔을 때만 신자인 것처럼 하지 말고 세상에 나갔을 때 누구나 아는 신자라는 유니폼을 입자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를 다시 보면서 회개라는 문제를 조금 더 살펴봅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2:1-6)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주께서 나를 구언해 주신 것을 감격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인이었고 죄에 굴복하고 있었고 죄의 종으로 죄밖에 짓지 않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고 나를 자녀 삼으셨고 이제는 의로운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을 깨우치고 여태껏 내 욕심대로 살던 것을 돌이키고, 여기에 있는 것 같이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참다운,의로운 길을 걷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는 구원을 결실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의미에서 구원된, 우리에게 결실된 구원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3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이렇게 외칩니다. 구원이 어디로서 말미암았는가?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1,2절)

우리는 뮙니까?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까? 아닙니다. 믿음으로 얻습니다. 그런데 사실 믿음이라는 말이 쓰일 때는 무엇이 쫓아 다니는지 아십니까? 들음이라는 단어가 쫓아다닙니다. 듣고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것을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회개가 용서의 조건이 아니듯이 믿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회개는 용서받아야 할 조건이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에 돌이켜야 하는 요구요, 믿었다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고 구원을 시켜준 하나님의 방법일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행위와 반대되는 입장에 서고 들음이라는 단어가 붙어 다닙니다.

믿음이 자생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나로부터 출발하고 나로부터 발전한 것이 아닌 것을 확인키 위하여 꼭 들었다는 얘기를 씁니다. 들었다는 것은 내가 믿은 것이 내 안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전해진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좀더 확실히 하기 위해서 로마서 10장을 봅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9절)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면 이제 믿음을 어떻게 설명하나 보십시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롬10:10-14)

그렇습니다. 그의 이름을 부르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으니까 주님이라고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려면 내 주먹을 믿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믿으니까 그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 다음에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라고 합니다. 들어야 믿는다고 합니다. 스스로 만들 수 없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누군가 전했으니까 듣습니다.

그 다음에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누가 메시지를 줘서 ‘너 가서 해라’ 그래서 왔다는 것입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그래서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야 함과 같으니라.” 누가 보냈다고 합니까? 하나님이 가서 대 사면령을 선포하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날을, 하나님이 너희를 부르셨다는 것을 외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외칩니다. 그래서 듣고 보니까 그렇더라는 말입니다. 우라가 한 일이 틀렸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무나 큰 일을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듣던 자들이 ‘어떻게 해야 옳습니까.’ 그러니까 베드로가 말하기를 ‘여태껏 한 짓은 좋다. 이제부터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인생을 살자’는 것입니다. 밤낮 새벽기도 나와서, 골방에 앉아서 징징 울지 말고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공부 잘해라 한 마디 할 때마다 열 번은 너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한다. 너 성경말씀대로 살아야 된다. 그리고 공부도 잘해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증권 사면서 하나님 지혜를 주소서. 그러지 말고 말입니다.

‘내가 이 세상의 것을 추구할 정열과 욕심을 거룩하고 선한 일에 쓰리라’ 그렇게 바꾸라는 말입니다. 즉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우리야말로 그런 의미에서 다 예수 그리스도를 앞세우지 못하고 이 계명을 따라 살지 않으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이웃을 사랑하며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다 회개치 못한 것입니다. 회개하십시오.

예수를 믿었고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하니까 여러분은 회개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차 갖고 오셔서 좋은 곳에 놓고 오십시오. 그런 것으로 이웃 앞에 시험거리가 되게 하지 마십시오. 악쓰고 싸우지 마십시오, 악으로 악을 갚지 마시고, 세상에서 자존심 세우고 싸우는 경쟁 때문에 하나님을 외면하는 일들에서 돌이키십시오. 이것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옷 입으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은 죄 사함을 입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며 생명과 진리를 증거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 부름에 맞에 사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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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52 마가복음 큰 광풍 타고 비상하기 막4:35-41  김필곤 목사  2010-08-21 2816
15851 출애굽기 승리의 삶을 위하여 출17:8-16  김필곤 목사  2010-07-25 2816
15850 출애굽기 모세는 어떻게 위대한 모세가 되었는가? 출3:1-12  이정수 목사  2010-07-19 2816
15849 잠언 화목케 하는 생활 잠17:1  민병석 목사  2010-04-28 2816
15848 출애굽기 열등감을 극복하라 출4:10-17  이중표 목사  2013-01-06 2815
15847 유다서 사랑하는 자들에 대한 권면 유1:17-25  황찬호 목사  2010-10-13 2815
15846 레위기 양각 나팔소리 크게 울릴 때 레25:8-3  김이곤 목사  2007-12-12 2815
15845 요한일서 종말론적 신앙이란? 요일3:2-3  박신 목사  2012-02-28 2814
15844 누가복음 뒤돌아 보지 않는 섬김 눅9:57-62  김남준 목사  2011-11-12 2814
» 사도행전 죄 씻음과 회개 행2:37-41  박영선 목사  2009-06-19 2814
15842 설교자료 토종목사가 전하는 토종복음의 정체 -방인근 목사 설교비평  정용섭 목사  2009-05-08 2814
15841 히브리서 성숙해진 믿음 히11:20-22  이정원 목사  2014-01-25 2813
15840 이사야 우리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 사55:1-13  정용섭 목사  2010-08-16 2813
15839 이사야 이사야 -그 작은 가시나무 새 사9:6-7  박창원 형제  2008-06-20 2813
15838 여호수아 기적보다 나은 믿음 수6:20-21  김남준 목사  2013-04-08 2812
15837 마태복음 복음전파에 힘쓰라 마28:18-20  한태완 목사  2012-07-07 2812
15836 누가복음 하나님이 기뻐하는 마음 눅7:36-50  이한규 목사  2012-06-19 2812
15835 마가복음 부활의 소망으로 일어섭시다. 막16:1-13  김필곤 목사  2011-03-15 2812
15834 출애굽기 삶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 출14:10-14  이한규 목사  2010-01-21 2812
15833 창세기 돼지 저금통 file 창38:1-19  태승철 목사  2009-07-05 2812
15832 사사기 남은 자 인생과 나머지 인생 삿21:13-25  이한규 목사  2013-08-09 2811
15831 창세기 아브라함의 소명과 복 창12:1-20  한태완 목사  2011-03-31 2811
15830 이사야 피곤할 때 사40:30-31  한태완 목사  2013-10-16 2810
15829 사도행전 행복을 만드는 기술 행28:11-15  이한규 목사  2010-03-09 2810
15828 창세기 풍요의 갈대아 우르와 약속의 가나안 땅을 맞바꾼 아브라함 창12:1-5  김경형 목사  2013-02-16 2809
15827 누가복음 정의가 숨 쉬는 세상 만들기 눅19:1-10  김필곤 목사  2012-07-30 2808
15826 사도행전 콜럼버스의 배를 타고 있는 신자들 행7:1-8  박신 목사  2012-01-21 2808
15825 누가복음 인생에 꼭 있어야 할 2가지 눅8:16-18  이한규 목사  2011-07-16 2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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