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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적 삶

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2191 추천 수 0 2009.06.19 20:5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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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2:43-47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23 / 1988.06.12 

“사람마다 두려워 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2 : 43 -47

초대교회가 형성되고 나서 그 교회가 가졌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이냐고 할 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같이 유무상통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를 추적하지 않고 영원한 가치를 추적하는 일, 그것이 일차적인 특징이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더 살펴보려고 하는 특징은 기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의 신앙과 대조하면서 점검해봐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로 인하여 삼천 명이 회개를 하고 모인 모든 사람이 재산을 나누어 필요한 자에게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주를 찬양하고 전도하고 칭찬을 받고 합니다. 분명히 초대교회를 형성한 신자들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기쁨, 감격 그리고 생명감, 활동력이 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며 오늘날 우리는 이 말씀과 비교해 볼 때 어떤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은 예수를 믿으면 무조건 기쁘냐는 것입니다. 기쁩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상식적인 기쁨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 부분이 오해되면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슬픈 일이 있을 수 없고 절망이 있을 수 없고 아플 일이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흐를 위험성이 있습니다.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좀먹는, 기독교진리를 방해하는 모든 이단들의 가르침은 그 기쁨과 감격을 세상적인 성취로 슬쩍 바꿔 놓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얘기하는 기쁨이나 감격은 세상적인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에 관한 것입니다.

이 문제를 우리가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이 초대교회 신자들의 기쁨이 세상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를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을 봅시다.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치고 나자 그 일로 인하여 백성들이 너무 그들을 따르니까 대제사장들이 그들을 잡아다가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위협하고 놓아줍니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게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행 4 : 23-31)

이들이 가졌던 감격과 기쁨과 힘은 세상적인 일에서의 형통함과 성취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사도행전이 스스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쁨과 감격, 그들이 증언하는 일에 대하여 그 사회와 주변에 있는 인물들이 찬성하지 않습니다. 반대하며  위협하며 협박하며 그들을 파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14장으로 가면 조금 더 분명한 설명이 될 만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 여행을 떠나 성들을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는 장면입니다.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행 14 : 1 -7)

여기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문제에 주님께서 직접 간섭하시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저들로 하여금 표적을 행하게 하고 기사를 행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파를 진압하는 일에 그것이 쓰여지지 않습니다. 그들을 반대하는 무리의 위협하고 협박하고 능욕하는 일이 이것으로 인하여 감소되거나 진압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신자의 기쁨에 관한 이해입니다. 신자가 갖는 기쁨은 결단코 세상적 차원에서의 난관이 없어지거나 환경이 개선되거나 누구나 우리를 환영하는 것으로서의 기쁨과 감사가 아닙니다. 그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경은 신자의 신앙생활이 고달플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대표적으로 마태복음 10장을 보십시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 34 - 36 )

여러분,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여러분 가정에 평화가 생기고 이웃간에 행복한 결실들이 생기리라고 생각해선 안됩니다. 실제로 경험하신 것같이 여러분이 예수를 믿자 당장 여러분 집안에서부터 핍박을 받는 일이 있을 것이고 이웃 사람들 앞에 조롱을 받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형통하지 않습니다. 순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환영하거나 칭송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렵습니다. 사회에서 괄시받고 교회와서도 괄시받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일로 인하여 세상이 살기가 편해지고 나에게 이제 더 이상 근심, 걱정, 아픔, 고민거리가 없어진 것으로 인하여 기쁘다고 신자의 기쁨을 설명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본문 사도행전 2 : 43에서의 기쁨도 그런 식의 기쁨이나 그런 식의 감격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것은 고린도후서 12장의 기록에부터 우리가 실마리를 풀어야 될 것입니다.

신자의 기쁨의 근거는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후 12 : 7- 10)

사도 바울의 기쁨이 이것입니다. 주께서 어떻게 하면 내게 더 많이 머물며 나로 인하여 주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가를 아는 것으로 인한 기쁨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주를 위한 열심과 주를 위한 봉사 정신이 뛰어났습니다. 그가 건강을 구하는 것은 주의 복음을 더 많이 전하기 위하여, 주를 위해 더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답하시기를 네가 약할 때 오히려 내가 너와 더 많이 함께 할 수 있고 너를 통하여 나를 더 많이 나타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기뻐합니다. 내가 약하면 주께서 나와 함께 더 많이 하시사 내가 모자라고 연약한 것을 통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쓸 것이 있다 하는 이것이 그의 기쁨입니다.

빌립보서 1장을 보면 구체적으로 한 사건과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12 -18절)

이 기쁨의 근거를 잘 보십시오. 지금 사도 바울은 주를 전하는 일때문에 붙잡혀서 로마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좋아하는 것은 이 일로 인하여 감옥에 있는 모든 간수들, 지키고 있는 군사들이 자기의 잡힘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또 무슨 문제가 생겼느냐 하면 사도 바울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주의 일에 너무 많이 쓰이고 사람들한테 칭찬 받는 것이 배가 아파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잡힌 것입니다. 얼마나 핑계거리가 좋습니까? ‘하나님이 만일 그의 일을 실제로 맡길 사람을 골랐다면 왜 일하지 못하게 잡아 가두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얘기는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일하는 것을 시기하고 싫어했던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갇히자 더 열심히 전도를 합니다. 그러면서, 봐라, 실제로 하나님이 인도할 종은 우리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이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드시니까 그를 일 못하도록 감옥에 가둔 것이다. 우리가 진짜니까 우리에게 자유도 주고 건강도 주셔서 마음껏 주를 전하게 하지 않았느냐 합니다.

그러나 또 사도 바울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갇힘으로 시기하는 사람들이 날뛰니까 ‘그렇지 않다. 우리 선생님이 하시던 일을 우리라도 마저 하자’고 해서 나서서 일했습니다. 그래서 도 파로 나뉘어서 주의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집니다. 아무려면 어떠냐,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냐. 이것을 인하여 나는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것은 실제적으로 우리에게도 있는 시험거리입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봉사하다가 제일 크게 당하는 일이 뭡니까? 여러분이 한 일에 대한 마땅한 보답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교회 안에서의 봉사가 어려운 점은 언제나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한 일에 대한 마땅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사람이 뭐라고 그러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느냐, 그가 하시고 싶은 일을 이루셨느냐로 기뻐해야 합니다. 이것을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기독교인의 신앙, 그리고 기독교인의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충성심과 모든 일이 그리스도를 위하려는 관심과 열심에 지배받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기쁨, 기독교인의 신앙, 기독교인의 생활, 인생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심으로 지배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일하려는 관심, 그를 향한 열심으로만 지배받고 제어되며 그것이 그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시는가. 나를 통하여 무엇을 하시기를 기뻐하시는가. 이것이 최고의 관심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사도 바울은 그가 어떻게 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일로 인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느냐, 또 하나님이 그가 하시고 싶어하는 일을 실제로 하고 계시는가에만 관심을 쏟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만일 이것을 놓친다면 우리의 기쁨은 사라집니다. 우리가 곧 이렇게 묻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하라고 한 일을 했는데 돌아온 것이 뭡니까? 신앙을 지키고 정직하고 양심대로 살아 온 것에 대해 받을 보답이 뭐냐라고 묻기 시작하면 틀린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늘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세상살이를 하면서 가장 크게 당하는 신앙적인 좌절이 뭡니까?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는 살 수가 없다고 느낄 때가 아닙니까? 여러분이 세상에서 정확하게 양심대로 살아서 이익을 본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세상에서 정확하게 양심대로 살아서 이익을 본 것이 무엇입니까 없지요? 이익 본 것이 없습니다.

우리 집사님들 중의 한 분이 요즈음 실제로 이런 일을 당했습니다. 어느날 밤 주차장에 차를 대다가 깜박 실수를 해서 먼저 주차해 있는 차를 받았습니다. 많이 부서졌습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옛날 같으면 물론 그냥 왔지요. 그러나 이제는 신앙인으로서 그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그 주변에 가서 묻기 시작했습니다. 주차장 주인도 찾아가고 인근에 있는 사람들에게 차 주인이 누군가,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는가 물으니 이틀이 넘게 주차됐는데 주인이 누군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주차장 주인에게 연락처를 주면서 주인이 오면 연락을 부탁한다고 하고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그 차에 연락처를 써서 꽂아놓고 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며칠이 지난 후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펄펄 뛰기 시작하면서 ‘눈이 있소 없소부터 시작해서 차 몬 지는 얼마나 됐소, 면허증 좀 봅시다. 받아도 어떻게 이렇게 받는단 말이요’라고 하면서 아우성을 칩니다. 슬그머니 화가 났습니다. ‘아우성칠 일이 아닙니다. 내가 뺑소니를 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정당하게 물어주기 위하여 잘못을 인정하고 연락처를 줬는데 왜 난리요. 얼마 들었는지 말만 하면 되지’ 하며 울컥 나오는 화를 감추고 좋게 말해서 같이 수리소에도 가고 이리저리 하루 온종일 같이 다니면서 그의 화를 풀어주고 잘 처리를 했습니다.

원하는 것 다 고쳐줬습니다. 뒤를 받았는데 앞의 헤드라이트도 고쳐주고 안에 인테리어도 고쳐주고, 그러나 끝까지 그 사람은 좋은 얼굴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문득 다음부터는 이러지 말까보다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모습으로 영광을 받으셨고 하나님이 이 혼탁한 세상에 한 줄기 빛을 비췄을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 사람은 돌아가서 분명히 마음 속으로 ‘그 사람, 아무리 난리를 쳐도 웃던데!’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 생각을 안했으면 할 수 없지요.

우리는 우리 자녀에게 정당하게 살라는 것을 먼저 가르쳐야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르친다고 해서 여러분의 자녀가 이 세상의 자녀보다 더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문득 이런 시험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주님, 제 자식은 주일날 공부시키지 않고 교회에 보냈습니다. 정직하게 행하라고 했습니다. 컨닝하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공부만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신앙적으로 살아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랬는데 왜 아프게 하십니까. 왜 학교에 떨어지게 하십니까. 그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일과 그의 생명을 이웃에게 전하는 일에 우리를 좋은 모습으로도 부르시고 나쁜 모습으로도 부른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 얘기는 뒤에 이렇게 연결 됩니다. 빌립보서 1장을 봅니다.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들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19 - 21)

그러니까 우리의 삶의 이유, 지금 이 초대교회 신자들의 삶의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그들의 존재와 그들의 언행에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되는 일이 있다는 보람과 책임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 신자가 살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우리 이웃에게도 역사와 시대 앞에서도 우리가 하려는 일은 나와 내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되는 일 외에는 관심이 없어야 됩니다. 내가 살아서 주를 영화롭게 하는 일로 부름을 받는다면 살 것이요 나를 죽여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되신다면 죽음을 불사하겠나이다. 이것이 우리의 마땅한 기쁨이요 소원이어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 돈을 많이 주세요. 그러면 제가 많은 일을 하지요.’ 주님은 거지가 아닙니다. ‘주여 제게 높은 자리를 주시옵소서. 그러면 제가 주를 위하여 권세를 쓰겠습니다.’ 주는 비천한 분이 아닙니다. 주께서는 온 우주 만물을 만드셨고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거꾸로 알고 있습니다. 은행에 찾아 가서 백억만 꿔주세요. 그러면 제가 십억 줄께요 하는 것과 똑같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모든 신자들이 이런 시각과 원리와 목표에서 그들의 기쁨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들의 삶에 생명력을 활동력으로 확신으로 담대함으로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행전 5장을 다시 보시면 이 모든 것을 요약할 수 있는 사건이 하나 등장합니다. 사도들이 다시 잡혀서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지 말라는 공갈과 협박과 그리고 매를 맞고 풀려나는 장면입니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40 -42)

그들이 지금 매 맞고 협박과 공갈 속에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사적으로 모이든 공개적으로 모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전도하는 것을 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세상에서 당하는 어려움과 아픔과 핍박과 환난을 저들이 기쁨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어떤 기쁨입니까?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 받은 것을 기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편안하게 사시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렇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너는 잘 먹여주고 가만히 놔둬야 그나마 예수라도 믿을 사람이니까 그냥 놔둔다’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것이 복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불행한 일 중의 불행한 일이고 괄시 중의 괄시입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인하여 고난과 오해와 조롱을 받는 자리에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입니다. 주께서 친히 십자가의 길을 걸으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이 이 세상으로부터의 오해요 외면이요 경멸이요 핍박이요 환란인 것을 몸소 보이셨으며 우리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명명백백하게 기록된 예언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18 -20절)

여러분이 무엇을 위하여 오늘 이 자리에 모이셨습니까. 세상을 좀 더 안락하고 편안하게 살기 위하여 혹시 이 자리에 오신 것은 아닙니까. 어떻게 오셨어도 좋습니다. 여러분이 무슨 생각과 무슨 요구를 갖고 오셨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답은 이것입니다. 세상에서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안락을 위하여 기독교를 이용하려고 모인 사람들은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런 답이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오해와 비난과 핍박을 각오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가 믿는 예수를 핍박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이를 갈거나 창을 겨누기 위하여 모이고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는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우리도 예전에는 그 무리 속에 있었던 것을 인정하고 우리를 불러내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우리에게 알게 하신 영원한 소망과 생명을 저들에게 나타내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은혜를 증언하기 위하여, 더 많이 하나님의 사람같이 되기 위하여, 우리의 소망을 더욱 든든히 하고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이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모일 때마다 한 번 더 우리 이웃들이 나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억하고, 하나님의 사람다운 모습을 보게 하는 일들이 쌓여 나갈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모든 목표와 소망과 간절한 기대와 기쁨은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통하여 그의 일을 이루시고 그의 은혜와 사랑과 생명을 전하는 일을 기뻐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삽니다. 내가 약한 것으로 실망하지 않는 것은 약한 것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쓰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그 좌절이 나의 게으름과 무지의 소산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낮추시고 좌절시키사 거기서 영원한 것을 증명하실 일이 있어 부른 부름 때문입니다. 게으름을 방조하는 것이 아니요 연약함과 무지함을 격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싸움에서 질 이유가 없지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세상 사람들과 함께 세상적인 것을 목표로 하여 싸우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영원한 것을 준비하며 증거하면 그것을 위하여 주 앞에 쓰인 바 되는 것을 인하여 오늘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름앞에 늘 순종하여 그가 나를 통하여 나타내시는 일 때문에 기뻐하며 자랑하며 힘내며 뛰어다니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의 말씀을 우리의 결론으로 삼고자 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 7, 8절 )

초대교회 성도들을 기쁘게 했던 것은 이것입니다. 오늘날도 주께서 모으신 백성들이 모여 신앙을 고백하며 우리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그 신앙고백 속에 이 고백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지금 분명히 이 목표를 새롭게 해야 됩니다. 우리는 영원을 준비하는 자입니다. 이세상 것을 요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세상 것과 너무나 구별되는 것입니다. 타협할 수 없습니다. 양 다리를 걸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초대교회의 분명한 두 가지 특징입니다. 영원한 것, 진리되는 것, 그것을 깨우치고 바라보고 달려가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고 세상의 위협과 유혹에 타협하지 않았던 그들의 선명한 노선을 증거하는 것, 그것이 초대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가진 자들의 기쁨, 그것이 오늘날 우리 모든 신자들의 기쁨이어야 됩니다. 그것 없는 다른 것의 기쁨이라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앙이 잘못됐다고 생각해도 틀림 없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을 기쁘게 하신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도 기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의 싸움과 세상의 유혹에 말려들어 세상의 박수를 받는 것으로 여러분을 점검하니까 신앙생활이 귀찮고 괴로운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가 부름받은 부름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생을 나누어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직분인가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고 세상이 여러분을 어떻게 핍박하고 방해를 해도 이것이 방해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여러분의 매일의 삶과 생활의 현실 속에서 여러분의 입술에 넘쳐나는 찬송을 막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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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종말론적 삶 행2:43-47  박영선 목사  2009-06-19 2191
1676 사도행전 죄 씻음과 회개 행2:37-41  박영선 목사  2009-06-19 2814
1675 사도행전 흔들리지 않는 근거 행2:37-42  박영선 목사  2009-06-19 1793
1674 사도행전 새 시대를 여는 설교 행2:32-36  박영선 목사  2009-06-19 1972
1673 사도행전 베드로의 설교 행2:22-36  박영선 목사  2009-06-19 3311
1672 사도행전 오순절 성령강림 행2:1-4  박영선 목사  2009-06-19 3338
1671 사도행전 제자도 행1:8-10  박영선 목사  2009-06-19 2470
1670 사도행전 증인 행1:6-8  박영선 목사  2009-06-19 2540
1669 사도행전 성령강림의 역사적 의미 행1:4-5  박영선 목사  2009-06-19 2732
1668 사도행전 동적인 신앙 행1:1-3  박영선 목사  2009-06-19 3057
1667 스바냐 늦기 전에 해야 할 일 습2:1-3  한태완 목사  2009-06-18 2062
1666 스바냐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습3:17  이한규 목사  2009-06-18 3412
1665 스바냐 배반자의 최후 습1:6  한태완 목사  2009-06-18 1908
1664 스바냐 하나님의 사랑 습3:17  한태완 목사  2009-06-18 2201
1663 스바냐 여호와의 날을 선포한 선지자 스바냐 습1:1-13  한태완 목사  2009-06-18 3698
1662 학개 내일의 영광, 오늘의 격려 학2:1-9  곽주환 목사  2009-06-18 2171
1661 학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학1장  이한규 목사  2009-06-18 2367
1660 학개 교회는 축복의 전당 학2:6-9, 19  김홍도 목사  2009-06-18 2415
1659 스가랴 우리 교회의 경건 슥7:4-14  오대식 목사  2009-06-18 2171
1658 스가랴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4:6  김양인 목사  2009-06-18 2866
1657 스가랴 나보다 더 위대한 계획을 세우신 하나님 슥10:6-12  배성환 목사  2009-06-18 1920
1656 스가랴 은총과 간구의 심령을 부어 주소서 슥12:7-14  배성환 목사  2009-06-18 2278
1655 스가랴 복음 전파의 결과 슥9:15~17  이성희 목사  2009-06-18 1968
1654 스가랴 내가 돌아왔은 즉 슥1:7~17  옥성석 목사  2009-06-18 1746
1653 말라기 그 날이 이르기 전에 말4:1-6  이장우 목사  2009-06-18 2239
1652 말라기 무슨 말이 나옵니까? 말3:13-18  이장우 목사  2009-06-18 1796
1651 말라기 내개로 돌아오라 말3:7-12  이장우 목사  2009-06-18 1945
1650 말라기 주께서 임하실 것이라 말2:17-3:6  이장우 목사  2009-06-18 1659
1649 말라기 무슨 까닭으로 이러십니까? 말2:10-16  이장우 목사  2009-06-18 1726
1648 말라기 생명과 평강의 언약 말2:1-9  이장우 목사  2009-06-18 2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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