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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뱅이

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4001 추천 수 0 2009.06.20 13: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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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3:1-26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24-026 / 1988.06.19/6.26/07.03 

"제 구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 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그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으로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사도행전3:1-10

사도행전에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대표적인 사건은 오순절 성령강림입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베드로와 요한에 의하여 앉은뱅이를 고치는 사건이 나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들이 왜 처음에 이런 사건들을 서두에 놓아야 하고 그 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가 하는 것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비슷한 사건을 복음서에서도 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고 가르치시고 기적을 일으키시며 귀신을 쫓아내는 장면들을 얼마든지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당연히 기적이 있다고 주장을 하고 어떤 면에서 그 주장은 옳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있는 곳에서의 기적들, 복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기적들이 어떤 내용과 어떤 목적을 가지느냐 하는데 대해서는 아주 격론이 일고 있는 셈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행복해지고 병에 걸리지 않고 귀신이 꼭 쫒겨난다 이렇게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이 사건들을 그런 의미에서도 도입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 행전 3장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에 의하여 앉은뱅이를 고치는 사전과 똑같은 어떤 하나의 모형을 마태복음에서 우선 만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십시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번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변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러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마4:23,24)

복음서에는 이 기록이 많습니다. 복음을 전했다는 것과 귀신을 쫒아 냈다는 환자를 고쳤다 하는 것이 늘 같이 뭉쳐진 사건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으로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첫 번째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이 교회에 옮겨졌다 하는 지적이 사도행전 기록의 첫 번째 목적입니다. 다시 한 번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시면 주님의 재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명령이 내리고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던 초대교회의 삶은 유무상통하는 일과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곧 오늘 이 본문에서 보는 사건이 터집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만 혼자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들을 전하시고 그 권세를 시행하시며 제자들은 모두가 다 그일에 대한 대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오면 주님께서 하시던 일이 교회에, 즉 신자들에게 이양된 것을 보게 되고 여기서 바로 오늘날 교회가 가져야 하는 책임과 권리를 찾아보게 되는 근거 구절을 만나보게 됩니다.

마테복음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3:13-16)

주님의 공생애를 보시면 태어나시고 30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맨 처음으로 시작하는 사간이 세레 받은 일입니다. 성령님이 그에게 임하십니다. 그리고 4장 초기에 나오는 것같이 시험을 받으시고 또 조금 전에 읽은 대로 4:23 이하에 있는 것같이 복음을 실제로 전하십니다.

똑같이 사도행전도 이 예수님의 처음 공생애를 염두에 두고 배열을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성령이 임하고 천국복음을 전하되 그 전함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기적이 한데 어우러져 나오는 것으로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는 셈입니다.

교회에게 준 이 권세, 즉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이것이 어떤 권세냐 하는 것을 제대로 알려면 옛날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오셔서 했던 일로부터 우리가 이제 구원을 얻어 도대체 어떤 부름을 받았느냐 하는 것을 먼저 아는 것이 이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귀신을 쫒아낸다든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주님의 공생에 있어서도 천국복음을 전하는 것과 이것이 뒤섞여 나오고  사도행전에서도 초대교회에 허락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과 실행하는 일에서 왜 기적이 도입되느냐 하는 것을 조금 알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알 것은 이것이 우리의 불행을 면하게 하고 고통을 제하여 행복하게 하며 기쁘게 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12장으로 가면 이 부분에 대하여 대표적인 성경구절이 나옵니다.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된지라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쫒아내지 뭇하느니라 하거늘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 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쫒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서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블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쫒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리라 사람이 먼저 강한자를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12:22-29)

이 사건을 여러분은 잘 이해하셔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하나님 편에 선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과 권세자들이 예수님을 나쁜 사람으로 몰아내야 될 입장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저들을 공격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자꾸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눈 앞에서 벌어지는 기적을 부인할 방법은 없고 그렇다고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어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자꾸 우겨서 오도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귀신을 쫒아내고 병을 고치자 귀신의 왕 바알새불을 힘입어 귀신들을 쫒아낸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답변하십니다. 어째서 귀신이 귀신을 쫒아내며 자기네끼리 싸우겠느냐! 그럴 이유가 없지 않느냐. 귀신이 쫒겨나면 그 귀신의 반대편이 들어왔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마치 빛과 어두움같습니다. 빛이 비치는 곳에는 어두움이 쫒겨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빛이 안 들어 온 자리까지는 어두움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둘은 섞여 있지를 못합니다. 빛이 들어온 만큽은 어두웁이 쫒겨나고 어두움이 들어와 있는 만큼은 빛이 안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만일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 내는 것이라면 하나님 나라가 들어온 것 아니겠느냐. 이어서 예를 드시기를 남의 집 물건을 빼앗으려면 그 주인을 먼저 꼼짝 못하게 항복시켜야 물건을 빼앗아 올 것 아니라는 말씀으로 이 말씀의 끝을 맺습니다. 여기에 귀중한 힌트가 있습니다. 즉, 기적을 일으키는 일들, 특별히 병을 고쳐내고 귀신을 쫒아내는 일이 복음전파와 함께 등장하는 일은 대표적으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망과 죄악의 종 된 자들입니다. 우리를 주께서 구원하시려면 먼저 우리를 붙잡고 있는 주인을 쳐서 항복시키기 전에는 우리를 자유케 할 수가 없습니다. 구원이란 우리가 주의 말씀을 듣고 동의하고 항복해서 마음에 감동하여 온 것이 아니고 우리를 붙잡고 있던 주인이 우리를 붙잡고 있던 힘을 빼앗긴 것이다라고 성경은 얘기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런 두 국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항복하고 죄인 된 것을 회개하고 돌아오는 우리의 돌이킴이 있는 것만큼 더 중요한 부분으로 우리가 모르는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붙잡고 있던 옛날 주인, 우리를 노예로 붙잡고 있던 주인을 예수님께서 물리치시어 우리를 자유케 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설명으로 출애굽 사건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붙잡고 있는 애굽이라는 나라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바로를 치는 것입니다. 바로가 항복을 해야 이스라엘 백성이 자유를 얻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렇게 바로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었으며 저주와 심판 아래 있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를 붙잡고 있던 사단 마귀의 무리를 쳐 물리치고 우리를 꺼낸다, 그 복음이다라는 뜻이 이런 기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이 갖는 가장 중요한 뜻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 이부분이 권세에 관한 싸움이며 일차적으로 우리와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들어와 이 흑암의 권세를 깨뜨려 우리를 꺼내는 문제라는 것을 우리가 꼭 기억을 해야 됩니다.

여려분은 골로새서에 가시면 구원이라는 것이 이렇게 표현된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1:13)

구원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동의, 우리의 결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아닌 제 삼자끼리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하자면 지금 베드로와 요한이 서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애기하는 데는 바로 이런 권세를 갖고 있는 것입나다. 교회와 신자란 이런 권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귀신을 쫒아내고 병자를 낫게 할 수 있다는 권세가 아니라 바로 신령한 의미에서 흑암의 권세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빛으로 생명으로 저들을 붙잡고 있는 흑암의 권세들에게 빛을 비춰 저들을 쫒아내고 눈 멀고 귀먼 자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해낼 수 있는 일을 부여 받고 그 권리와 권세를 갖고 있는 자로서 서야 하는 이 특권과 사명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은 것이 사도행전 3장 서두에 이 기적의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문제를 조금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이 얘기하는 신자와 불신자의 구별에 관한 설명을 조금 더 추적해 보기로 합시다.

에베소서 2장으로 갑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2:1,2)

성경이 불신자에 관해 설명하는 것 중에 불신자들의 특징을 불순종하는 자들이라고 하고 공중권세를 잡은 자들을 좇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세력, 어떤 악당에 잡혀 있는 포로라고 얘기합니다.

에베소서 4장으로 가십시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저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4:17-19)

여기도 나옵니다. 총명이 어두워져서 캄캄해졌다는 애기와 무지하다는 애기를 합니다. 무지하다는 애기와 어두움 속에 있다는 애기 거의 같은 뜻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길인지를 모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둠 속에 있다, 흑암의 권세 아래에 있다, 무지하다 하는 표현을 씁니다.

에베소서 5장으로 가면 불신자의 신자를 대비해서 하는 말로 합쳐 놓은 구절을 만납니다. “저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불신자와 신자를 나눌 때 가장 대표적인 설명들입니다. 그러니까 빛이다 하는 얘기는 마태복음에서 요구하는 것같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빛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생명과 영원과 절대를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불신자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는 자들입니다.

사실은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이 복음을 내용으로 전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적이 도입되곤 합니다. 기적은 이런 고서고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알고 있는 가치, 너희가 알고 있는 영역이 전부가 아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사람이 바다 위를 걸었다. 물위에는 물보다 무거운 것은 못 뜬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뜨느냐. 너희가 알고 있는 법칙이 전부가 아니다. 죽으면 끝이다. 그런데 어떻게 살았느냐. 죽음이 끝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다. 내세가 있다. 앉은뱅이가 어떻게 일어났느냐. 요즘같으면 외과수술로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거의 불가능한 일들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체계, 우리가 알고 있는 질서, 법칙이 전부가 아니다. 그것만 갖고 다 아는 척을 하고 큰소리치지말라. 너희가 무식한 것이다. 너희가 어두움 속에 있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기적이 같이 도입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단코 우리 아픈 자식을 빨리 낫게 해주십시오. 기도하며 낫게 해주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위하여 기적이 일차적으로 도입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믿는 사람을 편한케 하는 것이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원을 준비케 하는 것이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네 오른팔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어떻게 하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까? 잘라버리는 것이 낫다. 온몸이 성해서 지옥가는 것보다 외팔이로 천국 가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편안해서 예수 믿는 것이 방해될까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편안케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꼭 편하게 한 번 해주시고 내가 잘 믿나 안 믿나 한 번 보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태껏 안 해왔기 때문에 지금 그 모습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 믿은 것아닙니까? 세상 편하고 육신 편한데 예수 믿는 사람 봤습니까? 드뭅니다. 사람은 육신이 편하면 예수 안 믿게 되어 있습니다. 뭐가 급해서 예수 믿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갖고 있는 혹 세상살이에서의 불편함과 아우성이 있다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오늘날 이 자리에 오게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말씀과 만나게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으로 가시면 사도 바울 자신의 사명, 자신을 부르신 주님의 부름에 관한 설명 속에 이 부분이 아주 뚜렷하게 등장합니다.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님을 만난 장면을 자기 입으로 다시 애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과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26:15-18)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게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복음증거는 무감각하고 관심 없은 한 영혼에게 가서 갖은 수단을 써서 녹여서 예수 믿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에 대한 증거를 방법론적으로는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외로우십니까? 예수를 믿으십시오, 병중에 고민하고 계십니까? 예수를 믿으십시오. 사업에 실패했습니까? 교회로 오십시오. 이것은 분명히 전도의 좋은 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용이 되면 안됩니다. 성경의 내용은 결단코 우리의 세상 삶을 편하게 하며 세상에서의 승리를 약속하는 어떤 비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세상살이에 너무 재미있어 예수 믿을 이유가 없는 사람을 어떠한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사탕발림으로 꼬여낼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 모여 있지도 않습니다. 성경이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명한 일을 우리만이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라서 저 악한 무리들이 자기 휘하에 눈 멀게 하고 복음을 못 듣게 그들의 재산을 지키고 있는 곳에 우리만이 돌격대로 유격대로 그 흑암의 권세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특공대라고 애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르는 곳에 빛이 나고 우리가 이르는 곳에 소금이 맛을 내고 우리가 들어감으로써 빛이 들어가면 어두움이 물러가듯이 먼저 객관적인 전투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권세자들이라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회가 갖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하나의 조직체라는 의미에서의 교회가 아니라 교회라는 집단으로 모이든지 신자라는 개인으로 존재하든지 모든 신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이 권세와 이 책임을 가졌다는 것이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오늘 가르쳐 주고 싶은 내용입니다.

여러분이 대하는 한 심령 앞에서 저들을 봍잡고 있는 권세들이, 흑암이 여러분을 두려워해 도망가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은 모든 사람 앞에 은과 금으로 대배되지 말고 내게 있는 것으로 대비되어야 합니다. 너희가 배운 것보다 내가 더 배우고 너희가 가진 것보다 내가 더 가짐으로써 하나님이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이지 않은 것으로 그들 앞에 우리의 존재와 책임과 특권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이어야 되고 여러분 개인이어야 됩니다. 그것이 성경이 애기하는 신자의 책임이고 권세입니다.

다시 에베소서 5장으로 가면 이 말씀을 이렇게 연결하고 있는 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5:15-17)

이것이 오늘날 모든 신자들의 책임이고 권세입니다. 이것 이외에는 신자가 신자로서 서야 할, 살아야 할, 존재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내용도 없습니다. 이것을 뺏기면 주님이 말씀하신 것같이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다만 밖에 내버려져 밟히울 뿐이니라. 오늘날 교회가 꼭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날 신자가 꼭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와 그 많은 십자가와 그 많은 목사와 그 많은 신자들이 우리 나라 인구의 사분의 일 내지 오분의 일에 육박한다는 천만에 이르는 이 신자들이 신자로서 어떤 영적인 충격력과 신선함을, 그 힘과 권세를 유지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타락상에 가장 중요한 한 약점입니다. 교회가 이것을 잃었습니다.

오늘 여러분 중에 많은 분이 그냥 구경만 하러 오셨을 수 있습니다. 다른 교회와 비교해서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분명히 다릅니다. 우리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교회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지 않은 한 여러분은 늘 오실 때마다 부끄러워하셔야 됩니다. 저에게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 여러분의 소원이 더 주를 닮고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충성되이 한 것으로 만족하기까지는 여러분 스스로에 대하여 화가 날 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십자답게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하나님은 교회를 허락하시고 주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신자답게 사십시오.

머리에 띠를 두르고 혈서 쓰고 나가서 아우성치지말고 신자답게 여러분 가정을 지키시고 여러분 회사와 이웃 앞에 저 사람 분명히 다른 사랍이다. 영원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은과 금을 누리는 사람이 아니다 하는 지적을 받아 내십시오. 우리가 가진 것은 나사렛 예수인 것을 증명해내십시오. 그것이 되지않는 동안은 될 때까지 하셔야 됩니다. 세 번해서 안되면 네 번하십시오. 오백 번 해서 안되면 육백번 하십시오. 될 때까지 하셔서 신자로서 하나님 앞에 인정 받으시고 세상 앞에서 여러분이 빛이고 소금이라는 뜻이 무엇인지를 여러분 생애에서 체험해내십시오. 그것을 하기 전까지는 여러분이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제목: 앉은뱅이(30) - 베드로의 기적
본문: 행3:16-26
설교자: 박영선 목사


“그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 한 줄 아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같이 이루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산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었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하였고 또한 사무엘 때부터 몸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사도행전3:16-26

우리는 지남 몇주에 걸쳐서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왔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성경이 말씀하고 싶어하는 내용들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이 하나의 기적을 도입할 때 그 기적 속에서 어떤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어떤 것들을 우리에게 증명하고 알게 하고 싶어서 기적을 도입하는가라는 것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지막으로 이 사건을 생각해보려고 하는 것은 이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 사도 베드로가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고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해서 그는 이 사건을 놓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회개하라입니다. 그런데 왜 결론이 회개하라는 것으로 떨어지는가 하는 점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핵심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서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에는 도대체 어떤 내용과 어떤 뜻이 있길래 이 사건을 이용하여 이 사건을 보고 그들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을 향하여 회개하라 하는 말이 나올 수 있었는가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베드로는 분명히 이 사건이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리나.”

그러고 나서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입니다. 말하자면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킴 이 사건은 베드로가 보기에는 이런 내용의 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육신의 불구자가 완전함을 얻은 것과 같이 이 사건 속에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치시는 능력으로 간섭하시며 베푸시는 은혜야 말로 몸을 성케 하는 것이 주 목적이 아니라 불구되어 있는 우리의 영혼을 일으키는 것, 죄악과 사막의 그늘에서 잠자고 있는 우리의 영혼을 깨우치는 것이 원래 목적이다라고 이 사건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에는 회개하고 돌이켜 죄없이 함을 받으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너희가 불구 된자가 일어나 성하게 된 것을 본 것 같이 우리의 영혼이 성하게 되리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만 대입해서는 아직 회개하라는 베드로의 외침은 연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기독교적인 내용을 전할 때에 이 회개하라는 우리의 선포가 지금과 같이 끈이 끝까지 닿아 있지 않은 어떤 괴리 현상을 목도하곤 합니다. 한 사람에게 기독교의 기독교 된 것을 전할 때에 당신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불구자가 성하게 된 것같이 당신 영혼이 성하게 됩니다. 그래야만 됩니다라고 요구를 할 때 듣는 사람이 당신이나 그렇게 해서 잘먹고 잘살라는 반발의 말을 들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는 안됩니다.

다시 본문을 보시면 여기 회개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나쁜 형편에서 좋은 형편으로, 불리하고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데서 형통한 곳으로의 나아짐이 아닌 것을 이제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26절까지 보시면 이런 상황 속에 있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즉, 16절로 가서 이 단어에 주목해 주십시오. “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하는 것을 어느 대목에 단서로 넣으려고 하는가 하면 21절에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로 이제 그 내용을 이끌려고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속에는 단지 육체의 불구가 완전해진 것같이 정신 아니 영적인 불구가 완전해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너희들 눈으로 목도한 이 불구가 성한 사람이 되는 기적 사건같이 죄악으로 불구된 세상, 이 역사가 완성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여기에 회개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베드로가 두가지 각도에서 이 기적 사건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훨씬 중요한 문제는 우리 개인이 어떻게 영적으로 죽은 자인가,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회개해서 우리의 영혼을 고침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이 불구 된 자가 성하게 된 것같이 죄악이 관영한 세상 악한 것들이 주관하고 있는 세상이 하나님의 목적하신 바와 계획하신 바와 그의 성실하신 계획에 따라 결국 회복되는 날이 온다라는 역사적인 시각에서의 비교인 것입니다.

이 불구된 자를 완성시킨 것같이 이 세상을 완성시키려 하시고 이 세상을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건져내사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몰고 가실 것이다. 그러니 너희가 세상을 좇고 죽어 있는 영혼으로서 세상 풍습을 좇고 악한 욕심을 좇는 데서 돌이켜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시는 이의 목적과 뜻에 부합하는 것으로 너희의 생각을 바꾸고 길을 돌려야 된다. 그래서 회개하라 이렇게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들은 특별히 우리 한국교회 신자들에게는 약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사야 11장으로 가보십시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6-9)

하나님이 마지막에 이런 나라를 세울 것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상하는 것이나 해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바다물에 들어가도 숨이 막혀서 죽을 일이 없을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축구를 하다가 태끌을 해도 발목을 다치거나 피부가 찢겨질 일이 없을 것입니다.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고 사망이나 이별하는 것이나 슬픔이나 애통이나 고통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사건들은 말하자면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세울 나라의 성격을 설명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에 이런 뜻이 더 먼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11:1-5) 입니다.

이새의 뿌리에서, 이새는 다윗 왕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역사를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런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하시려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기도 하고 성격이기도 합니다. 천지를 하나님이 만드셨고 그 끝을 계획하고 그 끝을 향하여 지금 세상을 친히 만들어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 천하만물의 주인이시고 역사의 주관자십니다. 그를 방해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의 뜻과 계획에 맞도록 생각을 바꾸고 길을 돌이켜라. 회개하라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세상은 끝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지금 우리가 평가하는 식으로의 가치를 주장하지 못하는 나라가 옵니다. 돈이 최고가 아니고 명예가 최고가 아니고 이 세상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최고가 아닌 나라가 옵니다. 죄악과 불의한 것들이 우리를 주장하던 세상이 끝이 날 것입니다. 거기는 오직 사랑이 있고 기쁨이 있고 찬송이 있는 나라가 올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사야 11장은 천국을 얘기하지, 천국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천국이 얼마나 복될 것인가를 우리에게 설명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사도행전 3장 베드로의 설교도 그 차원에서의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 신자들이 종종 이용하는 식으로 보험 팔러 다니는 것같이, 그러다가 죽고 나서 정말 천국이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세례나 받아 놓으시고 등록이나 해 놓으면 그 때 혹시 알아요? 우리 교회 목사님은 몹시 신령하시니까 곤란할 때 빽이 좀 되실거예요. 이런 식입니다.

지금 회개하라는 것은 이런 식의 얘기가 아닙니다.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의 얘기가 아니라 사실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역사가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고 누가 주장하고 있고 주장하는 일이 무엇을 원하고 있으며 무슨 계획을 지금 추진하고 있느냐를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오늘 앉은뱅이 사건을 계기로 한 베드로 설교의 가장 중요한 요약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병들고 약하고 더러운 것들이 새롭게 된다. 그러나 새롭게 되었다는 자체가 지금 베드로의 설교 핵심이 아니라 그것이 새롭게 되는 쪽으로 세상 역사가 진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다시 사도행전 3장으로 가셔서 베드로가 이 말씀을 뒤에 이런 얘기들로 이어가고 있는 것을 주의해서 보셔야 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행3:22,23)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해 주던 자입니다. 모세가 죽게 되었을 때에 백성에게 유언합니다. 나중에 나 같은 자를 하나님이 너희 중에 세울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그의 말을 듣지 않은 자는 죽을 것이다. 지금 이 말씀은 예수님의 권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와서 하실 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와서 전하시는 말씀들은 이 온 세상 만물들을 지으시고 주장하시고 인도하시는 이의 생각과 뜻인 것입니다.

거기에 어긋나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고기가 물 밖에 나와서 국회 의사당 계단에 앉아서 사진을 찍었으니 돌아가실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진흙탕이라도 물 속에 있어야 됩니다.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선지자를 여호와께서 다시 세우리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그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멸망 받을 것이다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길이 아닌 곳으로 가게 되고 생명이 없는 곳으로 가게되므로 그것이 베드로 설교의 회개하라의 근거인 것입니다.

24절을 보시면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은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사무엘 때부터 모든 선지자들이 이 때를 가리켜 얘기했다. 즉 예언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역사가 우연에 의해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주관자가 있고 그 주관자가 의도하는 바가 있고 그 의도한 대로 세상이 만들어져 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2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리라.”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는 너의 본토 친척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어 너로 창대케 하고 너를 인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얻게 하리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하리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이야말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모두에게 지금까지 유효한 하나님의변함 없으신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뭔가 다시 한 번 기억해 보십시오. 아브라함만을 축복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아 모든 민족으로 너의 씨를 통하여 구원 얻게  하리라는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이루사 그 씨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피를 흘리시고 부활케 하사 이제 바로 그것을 약속하시고 그렇게 세상을 이끌고 계시는 이가 그렇게 결론을 내고야 말 것이기 때문에 먼저 너희에게 보내사 그 악함에서 돌이켜 회개하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보라 예수를 믿는 믿음이 너희가 보던 이 앉은뱅이를 성하게 했느니라.’ 이것을 증거로 삼는 것입니다. ‘그와 똑같이 이 세상을 새롭게 할 날이 온다, 다시는 해함이 없고 상함이 없는 나라가 온다, 하나님이 역사를 끌고 가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악한 것들과 부패한 것들과 죄악 된 것들을 멸시하고 주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을 위하여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 그러기 위하여 그 자리에 있기 위하여 너희에게 먼저 복을 얻게 하기 위하여 그 악함을 버리고 홰개하라 명하느니라.’

이것이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에 대해서 너무나 많이 감상적인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에수를 믿으면 마음이 어떻게 평안해지고 예수를 믿으면 사업이 어떻게 번창하는가, 예수를 믿으면 자식이 어떻게 공부를 안하고도 좋은 성적을 얻는가? 공부를 안하고 좋은 성적을 얻으려면 기도의 방법이 아니라 시력이 좋아야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 짝이 되든가 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기독교를 소개하지 마십시오. 그런 식으로도 믿지 마십시오.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진리이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하나님이 주장하시고 인도하시고 결론 맺을 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어쨌든 알게 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명합니다.

회개하십시오! 여러분의 생각을 돌이키십시오!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쾌락을 좇으며 세상 풍습을 좇고 공중권세 잡은 자를 뒤쫓는 자리에서 돌이키십시오. 이제는 여러분이 이 말씀 앞에 여러분 스스로를 점검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고 있는가, 경건을 연습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는가. 나의 인생과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로 서 있는가, 신령한 문제에 대한 지혜와 능력을 구하고 있는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가, 주의 이름을 인하여 핍박을 받는가, 여러분에게 물어보셔야 됩니다.

여러분 자라실 때 부모님이 여러분 공부 잘하라고 한 것을 상기해 주십시오. 그런 기록이 베드로의 기록인 것입니다. 저들이 핍박을 받으며 이 일로 인하여 모든 사람 앞에 증오의 대상이 되며 곤란을 당하며 여러 시험과 유혹 속에 서 있었지만 이 일들에서 돌이키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저들의 유혹에 타협하지 않은 이유가 그것입니다. 이것은 눈 앞에 있는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지혜 있기를 원합니다. 충성되기를 원합니다. 생각을 바꾸시고 길을 돌이키십시오. 돈을 좇고 세상을 좇는 데서 돌이키십시오. 그 나라가 너무나 분명히 눈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오셔서 앉아만 있다 가지 마십시오. 더 열심히 주를 사랑하기 위하여 주님에 대해 더 알기를 소원하십시오. 더 열심히 기도하여 여러분의 영안을 밝혀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알게 해 달라고 매어달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그 기업의 풍성한 것들, 그 소망의 영광된 것들을 알게 해 달라고 하십시오. 그런 것들은 목사에게 맡기지 마십시오. 그것만은 여러분이 직접 누리시고 주의 말씀으로 권면 받은 것같이 돌이키셔야 됩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신자 모두가 마땅히 해야 될 일인 줄을 마음 속에 기억하시고 돌아가셔서 이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세상을 향하여 여러분의 욕심이 여러분을 주장하거든 하다 못해 악을 쓰던 이 목사의 눈이라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복을 위하여 여기 기록된 대로 하십시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이것은 베드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을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그 길에서 여러분의 영광을, 기쁨을, 승리를 누리면서 사는 신자의 삶을 영위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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