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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와 요한의 설교

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2853 추천 수 0 2009.06.20 13: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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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4:5-31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28-031 / 1988.9.11/9.18/9.25/10.9/10.30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장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어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층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 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원들 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세나 되었더라.   사도행전 4: 5-22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유일한 증인으로 부름 받은 사도들의 활동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한 일들과 저들이 남긴 업적들을 봅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지난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이들의 사역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자년 언제나 성공으로 끝나지 않고 언제나 실패로 끝난다고 했습너다. 이유는 이 세상을 지금 주름잡고 있고 힘으로 권세로 형동함으로 구가하고 있는 것들은 신앙이 아니고 세상을 사모하는 마음. 세상을 좋아하는 것. 이런 것들이 그 힘이고 지혜고 실력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5 절 말씀부터 22 절까지 이 긴 말씀을 놓고서 무엇을 살펴보아야 하냐면 우리를 협박하고 힘으로 누르고 주의 말씀을 증거한 자들을 다 죽이고 한 이 세력과 이 세상 앞에 주께서 신자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며 그것을 어떻게 수행하라고 하시는가 하는 점입너다. 이 문제를 제대로 풀지 않으면 오늘날 우리 신앙생활은 불가능해집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이 처음부터 능력으로 출발한 것을 압니다.

아버지의 약속한 것, 권능을 입을 때까지 기다리도록 되어 있는 것을 기억하고 또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주님께서 땅 끌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보호와 인도함 속에서 이 일이 수행된다는 것을 처음부터 약속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의 기록은 뒤로 갈수록 흐지부지해져서 영웅스러운 승리나 멋있고 폭발적인 결과들르 보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씩 둘씩 죽어가서 마침내는 마지막 주자인 사도 바울까지 감옥에 갇혀서 살다 만 것으로 흐지부지 되는 것을 보고 맙니다. 신자들이 이 세상을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데 있어  서 무엇을 해야 되며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가야 되는가를 모르면 그저 우리는 오직 하나의 싸움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실제로 세상의 삶을 모방하고 있고 세상 사람과 방불한 삶의 원리를 가지고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그렇지않으려고 할 때도 신앙적인 삶을 영위하면 살아남을 수 없고 또 신앙을 좇아가서 승리해 본 적도 없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신앙경험인 것입니다

정당하게 살고 믿음으로 살아서 무슨 좋은 결실을 본 적도 어떤 의미에서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행전으로 다시 돌아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권능을 주셨고 승리를 목적으로 하셨는데 우리가 잘못한 것인가 아니면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 없었는가? 하는 것을 성경말씀을 통해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해야 되는 것은 너무도 분명합니다.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그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첫 번째 분명한 이유입니다. 여기에 이론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수행하며 어떻게 그 사명을 감당 할 것이냐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특별히 사도행전에서 오늘 읽은 본문 5-7절을 보시겠습니다.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것이 얼마나 험악한 분위기인가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이 상황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교훈을 싫어하는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다 모여서, 즉 오늘날 식으로 애기하면 대통령, 대법관, 국회의장 뿐만 아니라 그들이 부리는 모든 사람들, 별단 장군들 그리고 동네 깡패까지 다 모여서 몇몇 안되는 사도들을 가운데 가둬놓고 너희가 무슨 권세로 무슨 힘으로 겁도 없이 일을 하느냐라고 협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이 일을 어떻게 수행했는가 보면 성령이 충만해서 그 일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된다고 애기하면 쉽습니다. 깊은 신앙과 흔들리지 않는 신앙에 서서 지지 않고 싸우면 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말에 모순이 있는 것이 성령충만해서 결국 사도들은 그 끝이 죽는 것입니다.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이 말하는 신자에게 주었던 힘. 너희는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그 권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같이 세상의 권세에 대하여 그것을 막아낼 우리의 어떤 비방이며 어떤 비결이며 특별한 어떤 방패며 우리만이 가진 저쪽이 모르는 기묘한 전략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은 아니지 않느냐 하는 것이 사도행전 기록의 일관된 설명입니다.

세상이 가진 권세. 세상이 던지는 돌을 막아내는 어떤 실력, 그것으로 인하여 저들을 항복시키는 기적과 권능을 사도들에게 맡긴 적이 없습니다. 물론 복음서에서나 사도행전 기록에서나 성경 여기저기에서 우리는 많은 기적을 대합니다만 기적이 기적으로 끝나는 것을 보지 못했고 기적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기록이 없습니다. 기적은 언제나 시작에 불과합니다. 주위를 환기시키는 정도지 기적으로 사람을 항복 시킨 적도 없습니다.

성령충만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한 사람을 항복시키는 방법으로 등장하기보다는 이미 항복한 사람에게 채워지는 것으로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기억하는 것같은 어둠의 권세, 세상의 험악한 힘에 대하여 신자에게 맡긴. 우리가 가진 바 내용을 저들에게 전하고 싸워 이기고 우리의 가야할 길을 완수하게 하는 어떤 힘과 비방으로서 준 것은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무엇으로써 수행하도록 하셨습니까? 이 질문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우리도 오늘날 어떻게 우리의 신자된 것을 유지하며 수행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으로 갑시다. “너희는 세상의 및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및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 : 14-16)

하나님께서 우리를 뭘로 부르시고 맡겼느냐 할 때는 증인으로 우리의 인생의 목표. 목적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수행하는 것으로 맡기셨느냐 하면 및이라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빛이 갖는 특징은 어두움과 대조되는 것입니다. 및은 어두움을 잡아먹어서 및이 아닙니다. 및이 임하면 어두움은 그 권세를 놓치게 되어 있습니다. 어두움이 짙어서 및이 가려지는 예는 없습니다. 어두움이 짙으면 짙을수록 및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밝은 낮에는 촛불이 힘을 잃지만 밤이 되면 그것도 대단한 힘을 발휘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및이란 참으로 이상한 것입니다.

그렇게 신자는 그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및이라는 것이 어떤 차원에서 우리에게 설명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에베소서 4장에서 좀더 살펴봅니다.우리를 향해서 및이라고 할 때 불신자를 향해서는 꼭 어두움이라고 합니다. 불신자와 신자 된 부분을 비교한 것을 잘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 4: 17-24)

옛 사람과 새 사람을 구분하는 데 있어 옛 사람은 무지하다는 표현을 쓰고 새 사람을 표현할 때는 진리로 살게 되었다라는 말을 씁니다. 아주 좁혀서 얘기를 하자면 예수를 아느냐 모르느냐,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 내세와 최후의 심판이 있는 것을 아느냐 모르느냐입니다.

그래서 및이다 어두움이다 이야기할 때 및, 그러면 무엇을 식별할 수 있는 깨우침을 얘기하는 것이고 어두움, 그러떤 그것을 깨우칠 수 없는 것을 얘기합니다. 및의 최고 사명은 그 및으로 무엇을 좇아가서 하는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및이 빛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유일한 일이고 전부입니다. 그의 책임은 및이 빛 노릇을 하고 있어야지 사실 다른 곳을 좇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그 및을 어디에 꽂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일 것입니다. 가로등같이 띄엄띄엄 세워 놓으실 것입니다. 가로등을 한 군데로 모아 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두움을 적당히 몰아낼 만큼 가로등은 적당히 띄어 놓고 실내에 조명을 해도 띄엄띄엄하지 한 군데에 모아 놓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나가 자기의 빛을 발하고 있는 것으로 그 근처에 어두움들이 추방을 당합니다.

그때 잘 보십시오. 빛이 어두웅을 칼질해서 쫓아낸다기보다는 나 자신이 빛인 것으로 내 주변의 어두움은 쫓겨나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너희는 옛날에 어두움이었지만 이제는 빛이다, 아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식으로 얘기를 하자면 그가 그를 힐문하고 협박하고 공갈을 놓는 세상의 권세자들 앞에 성령이 충만하여 하는 얘기가 뭐냐 하면 그의 빛 된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너희가 분명히 알라. 누가 이 일을 했느냐? 예수가 했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빛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누가 했나! 어디 한 번 싸워볼래가 아니라 성령이 충만하여 하는 일은 그들이 가졌던 권세를 뺏고 그들을 고꾸라뜨리고가 아니라 빛을 자신의 자신 됨을 유지하고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기로 해서 신자는 이 땅에 보냄을 받습니다. 그 외에 아무 무기도 없습니다. 거기에 신자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6장을 보면 이 싸움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명하고 아그립바 왕을 설득하기 위한 변호하는 말 속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행 26 : 1, 2). 사도 바울이 하는 얘기가 무엇입니까? 당신이 모르는 것을 내가 하나 아는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몰라서 이러고 있고 저 유대인들도 몰라서 나에게 이러고 있었습니다. 나도 몰랐을 때에는 저 사람들과 똑같았고 내가 더 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압니다. 이 아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모두에게 알리게 하려고 제가 여기 잡혀왔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회개해야 됩너다. 이것 외에 무기가 없습니다. 그것을 아는 자로서 자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신자의 유일한 무기요 책임이요 사명이요 살아있는 전 이유입니다. 나는 그것을 압니다. 그것입니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티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행26:24,25)

이것이 빛입니다. 이것을 안하면 신자가 아닙니다. 내가 미친 것이 아니라 나는 이제 압니다. 보았습니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하는도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26:26-29)

여러분 이것이 신자의 삶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이것 외에 우리에 맡긴 일이 없고 준 무기가 없습니다. 지식도, 권세도, 건강도, 돈도, 지위도 복음을 위한 무기로 모두에게 준 예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무기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내가 미친 것이 아니라 참되고 정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왜 안 믿으십니까? 나는 믿습니다. 나는 압니다.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4:18-20)

이것이 신자에게 준 유일한 무기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이것은 신자가 안 것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그의 인생과 존재로서의 빛입니다. 그가 진리를 추적하고 하나님을 알고 그것을 믿고 있는 것이 그의 삶의 참으로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난 사실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게 권세를 줬어도 우리에게는 그것을 주지 않습니다. 왜냐구요? 예수를 믿어 세상에서 잘 살게 되면 예수를 믿을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하여 교회를 나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준 무기는 우리가 본 것, 우리가 안 것, 우리가 깨달은 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변한 삶, 변화된 사실을 통하여 밝혀지는, 그래서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 된 우리의 삶 그것뿐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것을 확인하셔야 됩니다. 아까 보았던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우리에게 주었던 무기. 우리를 불렀던 우리의 우리 된 신분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마태복음 5: I4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우린 빛으로 부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 그것이 우리의 빛입니다

그러나 이 빛이 16절에 이렇게 연결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왜 빛이 착한 행실과 연결이 됩니까? 빛을 비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우리의 빛 된 것을 비춘다는 것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알고 깨닫고 믿는 것으로 우리의 변화된 인생으로 비추는 것입니다. 그것이 착한 행실입니다.

병든 자를 돌아보고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것만이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착한 일이기 때문에 착한 행실이라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모르는 것을 내가 압니다. 당신들이 못 본 것을 내가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나를 위하여 살지 않고 세상의

헛된 것을 구하지 않으리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나의 기쁨을 삼고 그것을 소원으로 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라는 것이 착한 행실이요 비추어지는 빛입니다.

에베소서 5장을 보십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 5: 8-10)

이것이 빛을 비추는 방법입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해 보십시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가장 큰 불행이 무엇입니까. 불이 꺼진 것 아닙니까? 불이 꺼질 뿐만 아니라 연기가 나니까 이것이 매연으로 공해가 되고 말았습니다. 신자들이 빛을 비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방에 연기만 꽉 차서 질식해서 죽게 되었습니다. 누가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아버지를 보게 됩니까? 누가 우리를 보고 놀라며 우리를 보고 쇼크를 받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신앙인들을 향하여 무어라 꾸중을 합니까. 우리보다 더 이기주의자들, 우리보다 더 교활한 것들. 사실 이런 말을 우리가 듣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심지를 깨끗이 하고 우리의 빛을 밝힙시다. 우리의 살아 생전에 우리의 무기가 내가 본 것, 내가 아는 것. 주의 기뻐하심을 입는 것이 나의 소망이요 자랑인 것이므로 우리의 인생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십시다. 그것 때문에 모든 사람이 우리를 보고 놀라게 하십시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것을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사도행전 4 : 13, 14를 보십시다. 이 말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베드로가 저들이 가진 권세를 뺏고 힘으로 눌러서 항복시킨 것이 아니라 베드로 자신이 너무도 당당히 하나님 편을 드는 것입니다. 그를 죽이고 없이 할 수는 있지만 그가 하나님 편을 들고 하나님 편에 서서 증거하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 나은 사람이 옆에 현실로 서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병 낫는다는 증거가 아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하나의 사실적 증거가 있을 때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를 믿더니 저 사람들은 다르다, 저 사람들은 분명히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는다. 솔직히 얘기하면 예수 믿는 것은 대단한 일이더라, 나는 아직 안 믿어지지만 내 자식들은 보내겠다. 이렇게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 증거가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우리에게 이 변화와 주를 사랑하며 주를 위해 목숨 바친 증인들이 없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만 우습게 여길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까지 욕하는 것입니다. 부끄럽지 않습니까?

우린 다 연약한 신자들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 있다가는 안되겠습니다. 점점 더 신앙이 나빠지는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고 물질주의는 너무 팽배하고 있고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위협이고 유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초기 때 이미 베드로를 위시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얼마나 놀랍습니까? 앞으로 얼마나 미련한 짓을 할 겁니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책임으로만 사명으로만 맡긴 것이 아니라 그 특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늘나라에 초대되는 그 영광스런 일들을 저들로 인해 이루시기 위하여 그들을 부르시고 그 일을 맡길 것을 약속한 명령이요 요구일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허락하는 복이 거기에 있는 것을 여러분 이해하시겠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 어두움의 권세를 쥔 권세자들과 위협과 협박과 교활하고 살육과 사나움이 팽배한 이 세상 속에 절뚝거리는 양 몇 마리를 빛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도 그렇게 보냄을 받습니다. 우리를 다시 돌아볼 때 여러분 과연 우리가 빛 노릇을 할 것 같습니까? 못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얘기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 요구이고 축복이지 않습니까? 이것을 시행하는 자만이 하나님 앞에 칭찬 받을 뿐만 아니라 성경이 약속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말을 여러분 생애에 누리시고, 맞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길을 걸어 주십시오. 여러분의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위하여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빛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내가 아는 것을 말 안할 수 없으며 내가 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천하만민 중에 예수 그리스도 이름 외에 소망이 없노라. 하나님의 말 듣는 것과 너희 말 듣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 판단해 보라.' 그 말이 우리의 소원이 되고 자랑이 되기로 하십시다.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장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어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층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4:5-12

사도들이 관원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그 문중들 앞에서 위협과 공갈과 살기등등한 분위기 속에 휩싸여 있다고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4:5 이하의 말씀이 전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세상의 권세는 신자가 갖고 있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이 그 권세를 갖고 있고 우리는 그 위협과 협박과 위험 앞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세력과 싸우는 무기로서 아무것도 준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준 유일한 무기가 있다면 우리의 우리 된 것을 제대로 지키는 것밖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세상이 가진 권세, 무기와 신자가 가진 권세, 무기가 실제적으로 충돌할 때에 그 전투의 양상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싸움, 그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고 싸움을 어떤 논리와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가를 알아야만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불신자들이 신자들을 위협하는 방법은 세상의 권세입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바와같이 세상의 직위. 세상의 힘으로 모여서 이들을 누르려고 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해서 이들에게 답변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다.

이것은 우리가 모를 리 없는 싸움입니다만 이 싸움에서 어떤 중요한 내용이 흘러나오느냐 하면 저들이 우리에게 협박하고 위협하는 일이 무엇이며, 우리가 그 위협과 협박 속에서 답변할 것이 무엇인가는 좀더 깊이 연구해야만 정답이 나옵니다.

세상이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예수를 놓아라 이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놓아라, 그러면 우리의 답은 못 놓겠다 합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싸움을 그것 이외의 것으로 가져가면 이미 지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내 자식을 학교에 붙여 주십시오, 이 병을 낫게 해주십시오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신앙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싸움의 목록에 끼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보고 십자가를 놓아라 이렇게 공갈을 놓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갖고 있는 권세와 이 세상에서 자랑하는 것들로 협박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 놓으면 깔아 버리겠다는 것이고 우리의 답은 덤비려거든 덤벼라입니다.

우리가 왜 이 싸움을 잘 봐야 되느냐 하면 여기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나에게 공격해 오는 것은 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내가 붙잡고 있는 십자가를 빼앗으려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 하면 내가 십자가를 붙잡았기 때문에 이 싸움이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고 저들이 나를 공격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하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 편을 들었으니 하나님도 내 편을 들어 주십시오 하면 이미 그 싸움은 지는 싸움입니다. 내가 하나님 편을 들었으니 하나님도 내 편을 들어 주십시오가 아니라 만약에 우리가 이 문제, 세상적인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손에 잡고 있는 예수만 놓으면 금방 해결됩니다. 세상은 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들고 있는 십자가, 내가 들고 있는 이 불을 끄려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내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싸움에서 잘 보시면 베드로가 저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이 불을 끄려고 하기 때문에 불을 높이 들려고 하는 것이지 너희는 무식하고 나쁜 놈들이라서 하는 개인적인 공격을 하고 있지 않습니디. 이것이 이 싸움에서 아주 두드러진 현상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많은 충돌을 봅니다. 불신자들이 믿는 자들을 공격하는 것과 신자들이 불신자들의 위협과 협박 앞에서 그들을 변명하고 그들의 신앙을 지키려는 영적인 싸움을 하는 답변들을 만납니다. 그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만 안 믿겠다고 하면 놓아 주겠다. 이 도를 전하지 말라 합니다. 전부 협박이 이리로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볼 것이고 제자들의 대답은 매를 맞아도 좋고 죽어도 좋지만 이것만은 놓치지 않겠다라는 것으로 싸움이 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먼 신자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가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느냐, 제대로 신자 노릇을 하고 있느냐를 확인하는 성경식의 판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고 있는가 전도하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신자 노릇을 하고 있느냐, 안하느냐를 묻지 않고 이렇게 묻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다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고 내가 신자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느냐를 아는 방법은 핍박을 당하고 있느냐라고 묻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핍박을 당한다는 것은 사도행전 4장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우리가 세상 권세를 갖고 있지 않고 불신자들이 세상 권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핍박이라는 것이 신앙생활의 진위를 가려내는 기준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습니까? 지금 마태복음 5:10에 나타난 핍박을 받는 문제는 의를 위하여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는 세상이 말하는 의와 다릅니다.

세상의 의와 선과 예수를 믿는 자의 의와 선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의와 선, 즉 박수를 받는 의와 선은 사람의 가능성과 자존심을 부풀려 주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에베레스트를 정복했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 사람을 시비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같은 인간의 능력을 과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확장시켜 주고 확인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찬사를 보냅니다. 같은 인류의 이름으로 같은 인간의 이름으로 나의 자신감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얘기하는 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핍박, 우리의 불빛 됨에 대한 문제는 인간을 처절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누군가를 확인시켜 질식케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적인 의를 추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좌절과 절망에 빠지게 하며 몸부림치게 하며 화로다! 나여 죽게 되었도다라고 고함치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를 하든가 아니면 그 불을 끄든가 둘 중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에서 바로 우리의 신앙이 인간적인가 기독교적인가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 때문에 심판, 내세, 생명, 저주, 구원, 이런 단어들로 자기 자신을 확인해야 되는 작업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믿지 않는 자들, 함께 항복하지 않는 자들로부터 핍박을 자초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3:16을 봅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을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것으로 너무 쉽게 얘기하면 여러분 마음속에 믿지 않는 것이 이상합니다. 복권 사듯이 하나 사 두라는 것입니다. 당첨되면 굉장한 것이고 아니면 별것 아니지 않습니까. 500원 주고 하나 샀다가 되면 1억 타는 것이고 안되면 그냥 비행기 만들어서 날려보내면 되는 그런 식의 '사랑‘이라고 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을 동시대 사람들이 믿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았는지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I7절부터 이렇게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 17-21)

예수님이 오셨는데 안 믿는 것은 및보다 어두움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빛이 저들의 추한 모습과 자기 자신의 가난한 모습을 비추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는 자에겐 고마운 빛이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에겐 이 빛만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바라바를 살려낼지언정 예수는 못박고 싶은 것입니다. 이 싸움이 우리 앞에 있는 것을 보셔야 됩니다. 모든 싸움을 보십시오.

예를 들면 사도행전 2장입니다. 사도행전은 처음부터 이 싸움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 36. 37)

스데반의 설교에서 똑같은 반응을 봅시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행 7:52-54)

어느쪽으로도 찔립니다. 회개케 하는 쪽도 찔림을 받고 회개를 하지 않고 이를 갈고 핍박을 하는 경우도 찔립니다. 저들이 그들의 가난한 모습을 보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며 우리를 용납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아야만 될 존재였던 것으로 자기가 확인되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가 확인되기 이전에는 그 사랑에 감동할 수가,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가슴을 찢는 회개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그런 불이 비추는 것이 싫습니다. 네가 무엇인데 불을 비춰 우리의 얼굴의 더러운 것을 드러내느냐 이것입니다. 불을 꺼라. 행복하게 살고 있는 우리에게 뭣 때문에 불을 비취느냐! 불을 꺼라. 불 켜는 자가 있으면 죽인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여기가 핵심입니다.

다시 마태복음 5장으로 가십시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습니다.' 의를 위하고 주를 위하여 왜 우리가 핍박을 받습니까? 저들이 도대체 왜 마음에 찔립니까? 이 복은 9절의 화평케 하는 자의 복과 연결이 돼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습니다. 우리는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화평케 했으면 하다못해 노벨 굉화상을 주든가 감사장이나 표창장을 주지 왜 우리에게 돌을 던집니까. 이 화평케 하는 것이 인간과 인간끼리 우리가 얼마나 잘났는가. 우리가 이번 올림픽을 통해 한 민족의 우수성을 잘 나타냈는가, 우리 자신의 기능성, 자족성, 괜찮은 우월감과 자존심을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십자가 앞에 세우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핍박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평케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를 세우는 싸움이기 때문에 그 앞에서 우리의 죄인 된 것을 고백하며 거꾸러지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스렸던 것을 확인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은 울며 회개하는 일을 만들어 내든가 아니면 언제 너보고 이런 소리를 하라고 했냐 하며 돌 들고 쫓아오는 일밖에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착한 것으로 상 받기 위하여 지금 빛을 들고 있지 않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로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우리가 말하고 만나는 사람 앞에 십자가를 들이대는 자로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좋아하겠습니까? 싸움의 형태가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4장의 싸움입니다. 이것이 무슨 싸움이냐 하면 네가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행하고 있느냐! 뉘 이름으로? 이 말은 뭘 의미합니까? 왜 잘살고 있고 평안한 데 와서 평지 풍파를 일으키느냐. 우린 다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행해서 이 성을 소란하게 하고 우리의 삶을 뒤흔들어 왜 마음을 불안하게 하느냐 이것입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가 얘기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건드려? 날 건드리면 혼나!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날 건드리면 하나님이 가만 놔 둘 줄 알아? 저들이 가진 세상 권세에 대하여 우리가 가진 영적권세로 누가 잘났느냐, 누가 더 세냐라고 충돌하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너희가 몰라서 그랬느니라. 너희가 가진 권세로 나한테 협박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 하나님이 이 일을 했다. 너희가 안주하고 있고 너희가 속고 있고 너희가 자랑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 아느냐. 너희들의 앞날이 얼마나 큰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지 아느냐. 모르면 안된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당신 앞에 나를 보냈습니다.

이것이 이 싸움에서 신자들이 내놓는 내용과 선언의 속마음인 것입니다. 그들을 향하여 복수하거나 그들을 괄시하는 것이 아니라. 맞습니다. 당신네같이 나도 몰랐습니다. 사도행전 26장에 나왔던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나도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갖고 예수 전하는 자들을 싫어해서 이들을 핍박해야 하는 줄 알고 나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아닙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아니 모여 서 있는 모든 형제들이여 당신들이 모르고 그렇게 한 것을 내가 압니다. 내가 오늘 이렇게 결박당한 것 외에는 당신네들이 다 나와 같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싸움입니다. 싸우지 마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곧 이 싸움에 말려드는 것입니다. 저들이 우리를 그의 힘과 권세로 누르는 것같이 나도 저들과의 싸움에 내가 깨우친 것, 내가 안 것, 하나님이 나를 대접해준 것을 인간과 인간의 싸움으로 전락해 버릴 위험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빛을 든 것이 아닙니다. 빛을 들라는 것은 이 영적인 싸움에서 화목케 하는 자로 화평케 하는 자로. 부름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이 빛에 직면했을 때 괴로워하고 눈이 부시다고 눈을 감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돌을 던질 것이 지명한 것을 인정하셔야 됩니다. 그러면 불쌍하니까 불을 잠깐 감춰야 되지 않는가? 아니오! 그것을 깨우치지 않고는 이리로 넘어올 수 없습니다. 그들을 꾸중하기 위해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화평케 하고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른 것입니다.어두움이 짙으면 짙을수록 불을 밝혀야 되듯이 세상이 우리를 대하여 이를 갈면 갈수록 더 우리 다워져야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정체입니다. 핵심입니다. 이것을 떠나서 싸움을 하게 되면 세상 사람들은 절대로 항복하지 않습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 싸움이 자칫 조금만 실수를 하면 우리와 그 사람간에 개인과 개인의 능력과 자존심의 싸움으로 발전할 소지가 많습니다. 그것을 조심하셔야 됩니다.

우리를 보는 사람들이 나로 말미암아 정죄감을 받고 그것 때문에 나를 물어뜯는 것으로 보셔야 됩니다. 그것을 괴로워하지 마시고 기뻐하셔야 됩니다.

사도행전으로 다시 가서 이 기록들이 얼마나 기가 막히게 그 모든 사실들을 언급하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오늘 본 사도행전4 : 23입니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악당들이 저렇게 모여와서 주의 일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런 방해꾼들이 있으리라고 한 그대로 정말 그렇게 되더이다. 그 얘기만은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께감사하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범죄를 더 감추기 위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더 끝까지 하더이다입니다. 인간은 빛을 비춰도 빛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니 더욱 더 주의 빛을 밝히사 저들이 무너질 때까지 우리도 포기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도망가지 않게 하옵시고 저들이 다 항복할 때까지 주여! 주의 빛을 더욱 보호하시며 능력으로 함께 하사 주께서 작정하신 사랑과 뜻을 중간에 거두지 마옵소서.

그것이 이 싸움입니다. 우리가 깨우친 복음의 핵심들과 우리의 항복한 내용들을 전할 때 우리의 눈물과 진심으로 호소한다고 저들이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우리의 싸움은 바로 그것입니다. 저들이 우리를 향하여 이를 갈아도 저들이 나를 향하여 이를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추한 모습을 직시했기 때문에 저렇게 괴로워하는 것임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어떻게 죽습니까? 그의 설교에 대해서 아무도 항복을 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에 찔려 이를 갈았습니다. 이를 갈고 돌을 던집니다. 스데반은 '천사 같은 얼굴이 돼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옵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이것이 신자의 싸움입니다. 이것이 싸움의 본질이고 핵심이며 언제나 싸움의 형태는 그렇게 나타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여러분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 싸움을 포기한 듯이 보이지 않습니까. 신자 모두가 이 싸움을 포기했습니다. 왜 그렇게 됐습니까? 여기서 당하는 이 고통과 자존심 상하는 일에 대하여 교회가 가르치지 않고 여러분들도 싫어하기 시작했습니다. 먹고 살 만해지자 여러분 모두가 쾌락을 구하는 쪽으로 훨씬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가장 큰 시험이 무엇이냐 하면 육신적으로 잘살게 된 것입니다. 원하옵기는 지금 여러분이 하는 사업이 망하고 건강을 놓쳐서 주를 붙잡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되기 싫으시거든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이것을 분명히 깨우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맡기신 일을 하지 않고 여러분 좋은 일만 한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복 주실 이유도 없고 지키실 이유도 없습니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습니다. 신자로 살면서 제일 큰 불행은 신자로도 대접 받지 못하고 불신자로도 대접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신자같이 살려니 그것도 못하겠고 신자로서 살자니 그것도 못하겠고 들어오지도 못하고 나가지도 못하고 딱 하나 할 수 있는 것은 밖에서 주차 안내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실 겁니까? 돌이키십시오. 신자 된 힘과 그 특권과 사명을 소유하시고 여러분의 생애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시는 신자로서 이제 돌이키시기를 바랍니다. 그 속에서 나타나는 기적과 자랑과 승리를 체험하기로 하십니다. 회복하기로 하십시다. 지지 말기로 하십시다.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장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어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층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4:5-12

앉은뱅이를 일으킨 이 사건으로 인하여 사도들이 당시에 권세자들과 첫 번째 충돌을 가집니다. 저들의 질문을 여러분이 조심해서 봐 주시기 바랍니다. 7절 말씀을 봅니다.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것은 당연한 질문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어디 나가서 길을 넓히고 길을 고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렇다면 적어도 구청장의 이름을 갖고 가야 됩니다. 행정관리 체제에 어떤 책임자의 명령이 있거나 또 그럴 만한 신분이거나 둘 중의 하나이어야 합니다. 자신이 그 신분을 갖고 있거나 아니면 그 직위에 있는 자의 명령을 갖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이어야 맞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묻습니다.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그러나 사도들이 뭐라고 대답을 했느냐 하면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나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재미있는 점은 여기에 왜 이름이 등장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뒤의 1I절을 보면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 나옵니다만 왜 나사렛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냐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중요한 초점입니다.

12절에도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나옵니다. 여기도 이름입니다. 이름이라고 하면 당사자를 가리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고 여기서는 어떤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출애굽기 3장을 보십시다. 출애굽 사건에서 바로 오늘 사도들이 당하고 있는 이 일과 똑같은 사건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이 사건으로 비교해 보면 오늘 본문이 갖는 내용의 뜻이 좀 더 분명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 6-10)

이것이 모세를 부른 이유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당장 이렇게 묻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11절). 모세 자신이 자신에게 반문한 것이지만 내용은 얼마나 똑같은가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행전에 나타난 베드로와 요한에게 그 당시의 권세자들이 너희가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했으며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하느냐 하고 묻는 것과 모세가 지금 내가 누구관대 갑니까 하는 것은 흡사한 내용인 것입니다. 내가 그 일을 할 신분과 능력이 있습니까? 자격이 있습니까? 권세가 있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여기도 이름이 나옵니다. 무슨 권세로 했느냐, 뉘 이름으로 왔느냐. 모세도 여기서 똑같이 묻습니다. 내가 누구관대 가며 누구 이름으로 왔다고 해야 됩니까. 하나님이 답을 주십니다. 15절까지 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회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니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여할 나의 표호니라.”(출 3: l4, 15)

그래서 이제 모세가 갑니다. 바로 앞에 가서 서자 모세가 하는 말이 ‘나의 하나님이 내 백성을 보내라고 했다’ 라고 하자 바로가 어떻게 했습니까?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0가지 재앙이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출애굽기 6장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 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출 6: 1-8)

우리는 예수를 믿으며 어떤 생각이 있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만 외치면 귀신도 쫓겨가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면 일어나 걷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어찌 보면 우리가 갖는 신앙에서 가장 신나는 부분이고 가장 기대하고 있는 부분이고 가장 강한 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안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에게 지팡이를 던지면 뱀이 되고 품에 손을 넣었다가 꺼냈더니 문둥병이 발하고 하는 기적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바로 앞에 서자 바로가 더 살기 등등하고 더 크게 항거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옛날보다 더 압제했 습니다. 벽돌을 구어야 하는데 짚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은 모세 때문에 더 고생을 한다고 그럽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대를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로가 거꾸러지고 우리가 뚫고 지나가는 세상이 절을 하고 모여 서서 박수를 칠 것이라고 기대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를 바로 앞에 서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너를 보낸 것은 이 세상을 주관하는 것이 바로가 아니고 나이기 때문이며 이 역사의 진행이 바로의 뜻대로 되지 않고 내 뜻대로 될 것이며 내가 너희 조상에게 약속한 것같이 그 신음하던 자리에서 꺼내기 위해 너를 보내노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가는 것이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가면 이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해결이 되리라는 차원으로 보냄을 받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출애굽 사건에서 그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똑같이 지금 사도행전에서도 이 싸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하는 것은 어떤 주술적인 효과나 부적같은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면 귀신이 쫓겨났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면 죽은 자도 살아나고 앉은뱅이도 일어납니다만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의미가 아넙니다. 왜냐하면 우선 이름이라고 강조한 것을 추적해 보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가노라 하는 얘기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꺼내기로 했기 때문에 내가 왔다라는 의미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러면 적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주술적인 효과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선 이름부터 알아야 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기록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 18-21)

예수라는 이름이 무엇입니까? 구세주입니다.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러 오는 자입니다. 그러면 그 이름을 누가 지어주는 것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대면 상대방이 도망가고 내가 소원하는 것이 되는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뜻이 무엇이냐가 가장 잘 묻어있는 표현으로의 이름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을 보십시다. 예수님의 탄생과 예수님이 하실 일이 무엇이냐에 대하여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예언한 것이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들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훌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눅 1 : 68-79)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무엇을 의미합너까? 하나님께서 그 약속하신 대로 그의 은혜와 긍휼을 따라 이 일을 하실 것입니다. 다른 이름으로 오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의 종 메시야가 예수라는 이름으로 왔다는 것이 모든 내용에서 제일 중요한 믿음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갖다 붙이는 것으로 우리가 요구하는 어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끄떡도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옛날 바로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권세자들이, 세상이 도무지 무너질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서 거기에서 싸울 수 있으며 무모해 보이는 신앙의 전투를 하는 것은 결국 이 온 우주만물을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계시며 그분이 이 일을 하시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는 것입니다. 저쪽에서 넌 뭘 믿고 그러느냐 하면 내가 수리수리 마수리 주술을 외우면 너는 넘어진다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입니다.

누가콰음 10장을 보십시다.이 문제를 우리가 좀더 설명을 잘해야 됩니다. 이제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하는 부분에 대하여 여러분이 오늘 가장 좋은 답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 : 17)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말에 대해서 우리가 가장 오해하고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대기만 하면 꼼짝을 못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기 좋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때 뭐라고 그럽니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오라 그러면 나옵니다. 그런데 거기서 왜 이름이라고 그럽니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할 때 예수님을 대신해서 예수님을 앞세워서 그런 뜻으로 예수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어떤 증명서. 행정명령 서에 찍혀있는 관인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걸음 더 들어간 깊은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것 중에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파 어떤 기적을 행하는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것 중에 제일 많은 것이 뭡니까? 기도입니다. 모든 기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합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대표적인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요 14 13).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 : 14).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 15 : l6).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층만하리라.“(요 I6: 23, 24)

그래서 우리는 기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갖다 붙이면서 주술적인 효과가 있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고 붙이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빽을 가지고 모든 것이 된다 하는 것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만 성경에서 이름을 강조하는 데는 다른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8장을 보면 이것과 전혀 다른 기도가 나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 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 : 19, 20)

l9절에 의하면 두 사람의 합심이 기도 응답의 조건으로 돼 있고 20절에는 내 이름으로입니다. 둘은 어떤 의미에서 평행법적입니다. 평행법적이라는 것은 같은 내용을 다른 표현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 이름으로 모였다는 말과 두 사람이 합심했다는 말은 같은 뜻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합심해서 기도하는 데는 어떤 뜻이 있느냐 하면 나는 아버지와 뜻이 같기 때문에 내 이름으로 구할 때 나와 뜻이 같은 것이 되고 나와 뜻이 같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같은 기도를 할 때는 언제나 응답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으로 다시 가서 아까 읽은 본문을 보십시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 14: 10-14)

주님이 주님의 이름인 “내 이름”을 주기 위해서 무슨 말부터 진행시키시느냐 하면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때는 내 안에 있는 것이고 내 안에 있으면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고 뜻이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합심하는 적이 없다 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어떤 경우에도 합심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합심할 때는 딱 하나 하나님 안에 들어와 있을 때만 합심합니다. 이것을 꼭 명심해 야 합니다. 합심해서라는 것은 우리가 아버지의 뜻에 부합된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어떤 경우에도 부합하지 못하는 이유가 각각이 다 신이고 주인이고 상대는 언제나 신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싸웁니다.

예수 믿고 주 안에 들어와 제대로 신앙적인 깊이를 가져야 드디어 합심이 됩니다. 아버지의 뜻에 일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는 뭐라고 했습니까? 마태복음 18 : 19에 합심하여 구하라가 20절에서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입니다. 앞에는 주의 이름으로 모이면 하는 조건이었고 19절에 있는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라는 말과 20절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은 같은 뜻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의 뜻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이름으로라고 하는 것은 지금 이 병자가 어떻게 나았느냐고 너희가 묻는다면 내가 너희에게 밝히 말하노니 너희가 십자가에 죽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았느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이름’으로의 의미는 아버지의 뜻으로 나았느니라, 그 뜻은 아버지께서 구원을 베풀고 계시고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고 계시고 우리를 회개하라 부르시고 그 일을 지금 진행하고 계시기에 나도 여기서 있다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왔느냐 하니까 거기에 대한 대답이 하나님이 이 일을 예언하셨고 약속하셨고 드디어 시작하셨고 이제 진행하고 계시며 우리는 그 일의 증인이요 먼저 그 열매를 얻은 자요 그 일이 우리에게만 그친 것이 아니라 여기 병자도 낫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그것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만 붙여 놓으면 가서 돈 주고 부적 사다가 집안에 놓는 식으로 안심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 싸움이 아닙니다. 그래서 종종 어떤 시험을 받느냐 하면 왜 예수를 믿었는데 골리앗이 안 넘어지냐는 것입니다, 그토록 많이 갖다 바쳤는데 왜 입장권 하나 안 나오느냐 이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전혀 그떻게 싸우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 가서 망신당하고 세상 권세자들 앞에서 죽임을 당하는 일은 계속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방해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일은 계속되고 또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는 자요 그 길에 선 자요 그 약속이 실천되는 것을 나와 이웃 속에서 보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이 싸움에 감히 성령이 충만하여 서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15장의 문제를 보십시오. 거기에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 이름으로 구하라가 어떻게 전개되어 있는지 보십시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 : 13-15)

그러므로 내 이름으로 구하라가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내 이름으로 구하라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아버지께서 지금 무얼 하고 계시고 어떻게 하시고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아는 차원에서라는 것입니 다. 그런 차원에서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말을 갖다 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을 봅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요 16 : 23-27)

그러므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것이 너희가 내게 구하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는 이런 중개를 하는 뜻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내게 구하고 아버지를 밝히 알고 그래서 너희가 아버지의 뜻에 맞는 기도를 직접 아버지께 드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입 니다. 내가 주님께 에기하면 주님이 그 말을 받아 저희를 봐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서 부탁을 해 다시 우리에게 오는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것은, 말하자면 그 날에는 너희가 아버지를 밝히 알게 될 것이요 아버지께서 무엇을 하시며 어떻게 하시며 지금 무슨 일을 추진하고 계신지 너희가 다 밝히 알게 될 것이요 그 날에 너희가 기도하고 다 응답 받을 것이라는 그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므로 그 입장에 서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없고 승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이 바로 그 얘기를 확실하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 4 : 6-10)

너희가 지금 펄쩍뛰지만 강물은 흐르고 있다. 너희가 지금 모르고 이렇게 하고 있다. 너희가 역사를 거스리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있다. 너희는 모른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너희 눈이 밝아지고 그렇지 않으면 거꾸러져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계획하였고 또한 이미 시작하셨고 진행하시고 이렇게 넓게 벌써 열매를 만드셨다. 이것이 사도들로 하여금 그들을 반대하고 핍박하는 자들 앞에 감히 서게 하는 무기요, 그들 신앙이 담대한 이유인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놀기도 하고 천국도 가는 길이 없나. 양 다리를 걸치는 방법은 없나 이것입니다. 그래서 끝에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 : 12)

하나님이 이 방법을 쓰시기로 했기 때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세상에 살 때는 세상에서 잘난 척하고 살고 죽어서는 천국 가서 잘난 대접 받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밖에 없습니다. 나사렛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에 그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숩니다. 저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으며 우리를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속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도 마찬가지여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을 편하게 살고 내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들을 풀어나가는 것으로 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저가 우리를 흑암과 죄에서 꺼내며 하나님을 알고 의와 거룩과 성결로 부르시고 있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고 쾌락을 따르고 이 세상에서 잘먹고 잘살다가 죽어서는 또 천국가는 법으로는 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구원이 시도된 적이 없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이 없습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이젠 여러분이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점검하고 싸우셔야 할 일만 남아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고 그 일을 어떻게 이루시는가를 아셔야 됩니다. 그 자리에 서십시오. 그 자리를 놓치면 우리도 모르게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의 자리에 들어가고 가롯 유다같이 가고 사도들을 핍박했던 대제사장이 되고 그들의 문중이 되고 그때의 서기관들과 관원들이 됩니다. 잠깐이면 그 길로 빠지게 됩니다. 얼마 안 남았습니다. 여러분의 살아 생전에 주를 만날지도 모르고 물론 죽은 다음에 만날 가능성이 훨씬 많습니다만 그러나 짧습니다. 제가 이번에 몸이 아프고 눈도 좀 나빠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나이가 몇이냐고 해서 40이 넘었다니까 그때 한 번 간답니다. 50이 넘으면 또 한번 가고. 마음은 아직도 13세인데 어느 날 문득 추석을 맞이하고 보니까 싹 간 것입니다. 옛날에 매던 빨간 넥타이가 어울리지 않고 옛날에 입던 청바지가 어울리지 않는 나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더욱더 그렇습니다. 거울 붙잡고 어떻게 주름살 좀 펴 볼까 하시지 말고 이것 하셔야 됩니다. 이것을 안하면 신자로서는 참 불행한 것입니다. *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 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원들 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세나 되었더라.”    사도행전 4: 5-2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이 말씀은 굉장히 담대한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사도들을 붙잡고 힐문하며 협박하는 바로 이들이 고백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이고 그 이름으로 이 도를 전하지 말라고 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다른 이름은 없다라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갖고 있었던 신앙의 담대함과 믿음의 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살피면서 본 바와같이 주께서 주의 도를 사도들에게 부탁하시고 하늘나라의 비밀과 하늘나라의 건설을 사도와 우리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그 일을 시행하는 동안 환경이 개선된 적이 없고 사도의 말을 들어야 할, 말씀을 받아야 할 심령들이 거기에 호의적이었던 예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이들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라고 선언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때와 방불한 상황과 조건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데 도움이 됐던 때가 없었습니다만 그때 사도들이 이 고백을 했던 시대에 비하면 오늘날 우리는 너무도 대강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이름이 없다라고 선언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싸움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환경과 조건이 좋아져서 이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곳에 있어서 이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담대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를 잠깐 생각해보십시오. 이때보다 횔씬 더 나쁜 조건 속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과학문명의 발달로 지금 모든 현대인들은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합리성에 근거해서만 진리를 규명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합리성에 의해서 진리를 규명하려 했던 이 과학문명의 결론이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성과 보편성이라는 것이 현대사회의 특성 중의 하나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진리는 서로 비슷비슷하게 알고 있는 것이지 누가 남보다 더 뛰어나게 독특한 진리를 알 수가 없다고 하고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것에 선이니 진리니 하는 것도 그때그때마다 통용되는 것이지 절대 진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지적으로나 인격적으로 고매한 자를 설명할 때는 고집이 없는 사람, 편견이 없는 사람, 관대한 사람을 높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국민학교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어려서 이것은 이거다라고 딱 집어 줍니다. 대학교수 정도 되면 그저 이런 것이지 딱 집어서 얘기를 안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학문 분야에서도 정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답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정답을 알 만큼 우리의 지식과 지혜가 깊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고 세상은 다 그런 것이지로 얘기하기 시작해서 절대라는 말을 편견과 옹고집 속에 가둬버렸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오늘 본문에 있는 것과같이 다른 이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다라는 말이 그런 의미에서 현대인들은 배타적이고 독선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옹졸해 보입니다. 자기가 할 얘기만 하고 남의 얘기엔 절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을 말쟁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는 말은 하나도 안 듣고 자기가 하는 말만 막 하고 우리가 말하려고 하면 눈 감고 기도나 하고 그리고 획 도망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심방 온다고 하면 겁이 납니다. 심방 와서 자기 할 말만 하고 밀어부치고 갈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분명한 정리를 하고 넘어가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상이 우리에게도 침투되어서 꼭 기독교만 옳겠는가 하는 데에 대해서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말하는 것같이 화합, 이해, 용서 이런 것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이 요 근래 신문지상에서 본 바와같이 수녀들과 비구니들이 합쳐서 정말 남북과 동서의 긴장보다 더한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을 실현했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절에 가서 찬송가를 부르고 교회와서 찬불가를 부르고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것을 화합이라고 그럽니다.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것은 화합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식하면 간장하고 기름하고 섞어서 쓰고 물하고 술하고 섞어서 씁니다. 옛날 에스키모나 또는 구라파에 아직은 조금씩 그 습관이 남아 있는데 중한 손님이 오면 부인을 내어 줍니다. 얼마나 멋있는 화합입니까? 그것이 무슨 화합이며 사랑입니까?

그런데 영적인 문제에 들어오면 우리는 돌아버리니 무식한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정직하다는 것과 무식하다는 것은 같은 얘기가 아닙니 다. 난 모른다고 하는 것이 관대한 것이 아닙니다. 무식한 것입니다. 무식할 때는 입 다물고 있는 것이 그나마 도리입니다. 무식한 것이 큰소리 치고 자기 무식을 강요하면 이것은 갈 데까지 간 것입니다. 말세의 큰 징조가 뭐냐 하면 무식한 사람들이 고함을 지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화합입니까? 그것이 어떻게 관용입니까? 무질서요 혼돈이요 패역한 것입니다. 우리가 옹졸합니까? 진리란 것은 이런 것입니다. 진리 자체가 배타적이고 세상 사람들이 얘기하는 대로 옹졸 할 수밖에 없습니다. 2 더하기 2는 4입니다. 시험문제에 2+2 하면 4라고 써야 정답입니다. 아닌 것은 틀린 것입니다. 그때 옹졸하다고 합니까? 2X3=6입니다. 6자를 무지하게 못 써도 맞고 순금으로 7이라 고 써도 틀립니다. 다이아몬드로 8이라고 박아도 틀리니 그것은 별 도리가 없습니다. 2X4=9하면 틀립니다. 그래서 구구단을 외웁니다. 물론 내가 가게에서 천원을 내고 920 원어치 물건을 사서 거스름을 50원만 줬다 그러면 '에이 까짓것 30원'하고 그냥 올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관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6X6=35를 1밖에 안 틀렸는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안되는 것입니다. 6X6=36이지만 300원만 내세요 하는 것은 됩니다. 이들은 다른 문제입니다.

진리란 스스로가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하는 법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기독교에 대해서 얘기할 때 절대적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악의적으로 얘기하는 것같이 배타성과 독선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너다. 그 외에 다른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45장을 보십시다. “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아 너희는 모여 오라 한가지로 가까이 나아오라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능히 구원치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니라 너희는 고하며 진술하고 또 피차 상의하여 보라 이 일을 이전부터 보인 자가 누구냐 예로부터 고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45 : 20-22)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공개적인 질의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의지하지 않고 너의 힘을 의지하고 우상을 의지하고 산 자들아 너희가 얻은 것이 무엇이냐? 대적에게 쫓겨서 도망다니는 것, 불행한 일과 형벌 받은 일밖에 없지 않냐! 거기엔 힘도 없고 생명의 양식도 없지 않느냐! 그래서 너희 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아! 그러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현실적으로, 정신적으로도 가난해지지 않았느냐! 다 내게로 오라. 나무 우상을 갖고 다니는 자들아, 우상에게 절하고 정성 쏟은 것으로 얻은 이익이 뭐냐. 너희끼리 물어봐라. 나무로 해서 틀렸나, 그러면 다음엔 쇠로 해볼까. 아니 쇠보다 금이 낫겠지. 금으로 한 자에게 물어보고 다이아몬드로 한 자에게 물어봐라. 그것으로 얻은 이익이 무엇인가를. 내가 처음부터 그러지 않더냐. 나 외에는 너희에게 양식을 줄 자도 없고 좋은 것을 줄 자도 없고 구원을 베풀 자도 없다고 처음부터 그러지 않더냐! 나 외에는 없느니라. 예! 이것이 우리 기독교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이유입니다. 진리이기 때문이고 정답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7장을 보십시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흥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 17: 26-30)

노아가 방주를 준비하던 때는 흥수가 나기 전입니다. 비도 안 왔습 니다. 그래서 방주를 만들 때는 세상 사람들이 다 놀렸습니다. 노아는 다니면서 이제 곧 다 죽는다, 흥수가 난다 했을 것입니다. 와라 와라 할 때 사람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수영 잘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소돔 고모라의 멸망 때도 그렇습니다. 곧 이제 불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가자 했는데도 롯의 사위까지 안 따라왔습니다. 이렇게 재미있는데 왜 다른 곳에 가느냐는 것입니다. 지금은 재미있겠지만 그러나 곧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신자는 그런 사람입니다. 곧 주님께서 오십니다. 곧 내세가 도래합니다. 역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죽으면 심판대 앞에 섭니다. 여러분 오래 살 것 같아서 그럽니까?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미친 운전 기사가 서울에만 천 명이 넘습니다. 언제나 미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미친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다발성 미친 증세가 일어납니다.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사십니까. 다른 이로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 마음에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사십니까. 우리는 마치 다른 구원도 있는 것같이 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살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3:16 말씀 후에 끝을 이렇게 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 : 36)

예수 믿는 방법 이외에는 구원을 얻을 방법이 없고 진리를 소유하는 방법이 없고 하나님께 인정 받는 방법이 없습니다.

왜 우리는 옹졸합니까? 어떻게 우리만 옳겠습니까. 불교에도 뭐가 있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유교에도 뭐가 있고 마호멧교에도 뭐가 있겠지 왜 우리만 있겠어요? 왜 사람들이 그렇게 편협해요? 그렇게 말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싸움을 지금 안하고 있습니다. 이 신앙생활을 포기해버렸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큰 문제입니다. 여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배티적이고 독선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진리 자체의 성격입니 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크게 반성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태도도 배타적이고 독선적이어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얻는 방법이 우리에게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과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따라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내용이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며 절대적이라는 것과 이것을 전하고 증거해야 하는 우리의 태도가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라는 것은 얘기가 다릅 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그의 신앙을 불신자들에게 전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크게 실패하고 있는 것은 이 진리를 갖고 있는 우리가 은혜를 입은 자가 아니라 원래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행하므로 기독교가 저 사람들 앞에 배타적이라는 욕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진리의 배타성, 즉 그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기독교 진리의 권위와 절대적인 것이 증거되기 전에 그것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광신 혹은 배타성, 편협성이 기독교를 막아 놓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을 보십시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그러나 내가 긍훌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 1 : 12-16)

여기서 사도 바울이 그가 알고 있는, 그가 맡은 바 복음의 복음 된 것, 그 진리 영생에 관한 것을 선언합니다. 무엇을 강조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 일을 내게 맡긴 이유는 똑똑하거나 내가 다른 사람보다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보다 못한 자다. 얼마나 못났느냐로 따지면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보다 못났고 그의 얘기를 빌자면 만삭되지 못한 자, 팔삭동이고 지진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나를 세워서 왜 유독 나에게 이 일을 맡겼느나?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이 절대적인 진리, 다른 방법이 없는 이 구원의 문을 모든 사람에게 열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디가 독선적이고 어디가 포용성이 있어야 되는가를 구별해야 됩니다. 이 방법, 예수를 믿는 방법 외에는 다른 구원의 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제시되었느냐 그럴 때에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은혜와 사랑과 긍훌과 자비로 허락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입니까? 내가 갖고 있는 진리, 내가 맡고 있는 구원의 내용은 절대적이고 독선적이고 배타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알리려고 하는 내 입장과 자세에 있어서는 내가 그 사람 앞에 엎드려 발을 핥아주는 한이 있어도 이것만은 알아 주십시오라는 태도로 그 앞에 서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나 사도 바울을 택했느냐 하면 내가 모든 사람보다 못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중요하냐면. 나를 구원한 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공의와 그의 진노하심과 엄위하심에 도 불구하고 저런 자를 구원했다고 하면 내가 가면 물론 받아 주시겠구나 이렇게 되라고 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들고 나온 복음, 생명의 진리가 무섭고 유일하고 독선적이고 배타적이고 절대적 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제시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훌과 자비로 말미 암아 그것을 듣고 그 앞에 항복하는 심령들이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라고 찬미하게끔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1 : 12 이하의 말씀은 17절에 이렇게 끝납니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흘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여러분이 갖고 있는 신앙을 점검하십시오. 그 신앙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이 없다라고 여러분을 붙잡아 매고 있습니까? 게다가 내가 산다는 것으로 인해 모든 내 이웃들 앞에 이 절대적인 진리, 유일한 구원의 방법이 하나님께서 은혜와 긍휼과 자비와 사랑으로 나에게 베푸셨고 나에게 그렇게 부탁했다는 것을 실시하고 있는가 점검해 보셔야 됩니다.

사도행전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 : l9)

이것은 우리가 분명하게 알고 믿고 소유한 바 진리의 진리 된 권위 입니다. 절대성입니다. 그러나 그 일로 말미암아 누구를 밀어내거나 심판하거나 열등감을 조성하지 않습니다.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으니.” 왜 그들을 놓아 줬습니까?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 영광을 그들이 받기 위헤 이 싸움을 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일을 통하여 자신을 증명하고 자신이 잘났다고 외치고 남들을 누르고 그들을 욕했다면 누가 옳은가 보자 하고 박치기라도 했을 것이고 그들을 붙잡아 형벌에 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관원들이 할 말이 없었던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이 없다라는 진리의 이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얘기가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심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바 기독교 십자가가 이것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때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 안으로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 기쁨과 감격과 은혜 속에 모두를 동참시키며 그것을 은혜로써 모두의 생명의 양식으로 허락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신자가 아닙니다. 신자의 신자 된 진리, 절대적 권위, 유일한 길을 걸어야 되는 우리의 우리 된 다른 방법이 없는 우리의 유일한 길을 지키는 것과 그것을 모두에게 나누어 주고 모두 함께 기뻐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마음을 동시적으로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 내용을 우리가 방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그 절대적인 싸움을 하십니까?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라는 말씀을 여러분의 삶의 모든 현장과 부딪치는 사건 속에서 유일한 답으로 인정하고 사십니까? 그 일 때문에 고민하고 갈등하십니까? 그리고 내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다른 사람 앞에 나의 잘남과 나만은 구원을 받았다라는 구별하는 자랑으로서가 아니라 이 유일한 진리에 모두를 초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마음에 동참한 은혜와 긍훌과 자비와 사랑과 오래 참음과 겸손과 안타까움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는 배타적이다, 독선적이다. 그래 너희들 잘났으니 너희끼리 잘해서 천당가라 너 가는데는 안 쫓아 가겠다라는 반응밖에 못 얻어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신앙보다 결코 뒤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시키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부르셨고 그들에게 허락했던 성령의 은사와 마음의 기쁨과 충만한 능력을 오늘도 주시고 그들은 사도행전 기록없이 이 일을 처음 시작했지만 우리는 그것 외의 기록도 모두 갖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안하고 있다면 우리 책임입니다. 열심히 하셔야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대강 살고 얼마나 타협해 버렸는가에 대해서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 자신을 말씀 앞에 점검해 보시고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교회답게 만들기로 하고 신자답게 살기로 하십시다. 그래서 이 외침을 외친 사람들의 기쁨과 그 자랑과 그 승리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 쓰시는 그 기적의 인생을 체험하는 길로 들어서십시다.

세상은 이렇게 모래성이나 쌓고 있는 데가 아닙니다. 남편 바람 피는 것에 관심 갖고 당신 그러면 나도 그런다 하는 그런 곳이 아닙니 다. 우리는 할 것이 많은 족속입니다. 기도할 것 많고 안타까워해야 할 것 많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해야 할 것이 보통 많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너 고스톱하냐! 나도 한다. 너 뭐 하냐 나도 하겠다 할 때가 지금 아닙니다. 정신 차리시고 세상의 유혹과 시험과 그 재미에 빠져 쓸데 었는 일에 여러분의 인생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마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사도행전 4:29~31

앉은뱅이를 고친 이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잡혀갔다가 여러 위협과 공갈을 당하고 어쨌든 마지막에는 풀려납니다.그리고 돌아온 장면입니다. 돌아와서 동료들과 만나 그 당한 일을 얘기하고 함께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29,30절에 있는 기도를 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예수를 믿으면 병이 낫는 일이 자신에게 생기는 것과 또 병을 고치는 일들에 능력을 받는 것들을 사모하게 하는 근거가 되는 기록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식의 기도문이 아닌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됩니다. 23절부터 돌아가서 다시 한 번 본문의 내용을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행4:23-26)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두 가지로 나옵니다. 하나는 온 천하만물의 주인이시며 온 천하만물의 창조주 되십니다 하는 고백이 있고 또 하나는 이 역사가 하나님 손에 있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그 역사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습니까?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하나님이 그러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그러하오니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고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인 것입니다. 쉽게 이런 뜻이 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상태에서 제일 나쁜 것이 예수를 믿고 그 힘을 환경이 개선될 것으로 요구하는 기도가 신자들 중에 제일 많습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춥지 않게 해주십시오. 늘 따뜻하게 해주십시오입니다. 그러니까 이말씀 뒤에 있는 것같이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종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하소서’는 자칫 잘못 읽으면 그런 내용으로 오해되는 것입니다. 적들의 세력을 격파해 주소서. 저들의 세력을 물리쳐 주소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 능력을 주소서. 이것은 같은 얘깁니다. 춥지 않게 해주소서나 추워도 낵까 추운 것에 손해보지 않게 나에게 따뜻한 옷을 주십시오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추운 날씨가 되지 않게 하시든가 추운 날씨가 와도 춥지 않을 털오바를 주시든가는 둘이 똑같은 기도입니다. 능력을 주소서가 난관을 극복하는 것으로 등장하는 것은 안됩니다. 굉장히 어려운 얘깁니다만 지금 사도들이 당하고 있는 것은 생명의 위협입니다. 저들이 전하고 있고 저들이 증거하고 있는 내용 때문에 지금 모든 권세자들이 저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죽이려고 합니다. 우리 식으로 쉽게 생각하자면 나에게 천이라는 힘을 주십시오. 그래서 맞닥뜨렸을 때 졸도하게 해주십시오. 그런 의미의 담대함이 아닙니다.

무엇을 어규하는가? 담대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담대함이 무슨 의미의 담대함인지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으리가 알아야 할 것중 첫 번째가 이것입니다. 저들이 당하고 있는일을 당연하다고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저들이 당하고 있는 일을 없어아 될 일이 생겼다든가 그 일을 내가 꼭 극복해아 한다고 따지지 않습니다. 그 일은 당연 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24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묘사입니다. 하나님은 온 천하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인이십니다.똑같이 역사에도 주인이십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대적할 것이며 반대할 것임을 알고 계신 분이며 어떤 의미에서 세상의 역사를 그렇게 놔 두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힘을 동원하고 있고 그 반대 세력은 힘을 모아서 하나님께 오고 있지만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이것이 없어야만 하나님의 일이 성공이 될 텐데라는 개념이 사도들에게 없습니다. 사단이 없었다면 하나님이 성공했을텐데, 주님이 안 돌아가셨을 텐데 하는 이런 개념이 없습니다. 사단이 없었다면 우리가 타락을 안했을 텐데 하는 개념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성경은 사단이 벌받을 놈이라고 얘기를 하지만 사단 때문에라고 얘기한 적은 없습니다. 죄 떄문에라고도 얘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범죄했기 떄문이라고 애기합니다. 사단이 없었더라면, 죄가 없었더라면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 질문의 틀린 점입니다. 우린 뭐라고 생각합니까? 선악과가 없었더라면, 하나님이 사단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이 죄라는 것을 세상에 존재시키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왜 이 모양이 되었었겠는가라고 물고 늘어집니다. 성경은 그 문제에 대해서 절대로 사단과 죄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타락했고 우리가 범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닥치는 모든 환난과 고통과 난관을 꼭 없애야 한다든가 반대세력을 꼭 꺾어야 된다든가 그 세력을 이길 힘이 있어야 된다고 그 난관을 없애는 것으로 능력을 등장시키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말하자면 앞으로 가면 갈수록 환난이 더 심해 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협박만 당하고 놓여났지만 다음엔 채찍 맞고 놓여나고 그 다음에는 감옥에 갇히고 드디어는 죽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일들에 대하여 불평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꼭 확인해야 될 일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시면 처음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베드로의 설교에도 이대목이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우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일응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외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행 2 : 14 - 20)

성령 받은 일을 설명하면서 맨 처음으로 한 말이 이것은 놀랄 일도 아니고 이상한 일도 아니다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진 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누가 만들었는지 기억이 분명치 않습니다만 시멘트를 구워재는 화로 용량이 약 200쯤 됐습니다. 단위는 가마인지 말인지 갤론인지 부셀인지는 모르겠는데 1000이 나올 수 있는 화로를 만든 것입니다. 5배나 용량을 크게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200으로 용량을 제한한 것은 골고루 구워져야 하니까 그것을 더 크게 했을 때는 타는 부분도 생기고 설게 되는 부분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밥을 할 때 가마솥같이 크면 밑이 넓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골고루 익기 위새서입니다. 그것이 만약 좁고 길면 틀림없이 밑엔 타고 위에는 설 것입니다. 그래서 가마솥이 넓적합니다. 그러니 시멘트 구워내는 화호도 200이 최고였지 더 이상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1000 이상을 만들어냈을 때는 다 비웃었습니다. 드디어 실험해 보기로 한 것입니다. 실험을 해서 보고가 나왔습니다. 400이나 되니까 다 환호를 하는데 그것을 만든 당사자는 불만입니다. 왜 불만입니까? 10짜리로 만들었는데 400이 나왔으니 뭐가 기쁘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아 다른 사람들이 기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200밖에는 안된다고 했는데 400이 나왔으니까 1000짜리는 놓치고 400이나 되더라 하여 박수를 친 것입니다. 그러나 당사자는 불만이어서 더 해봐라 해서 그 결과가 800이 나왔다는 보고가 왔어요. 그러니까 사장이 좋아서 껑충껑충 뛰는데도 당사자는 불만인 것입니다. 사장이 물아봤죠. 기쁘지 않느냐고. 그러자 그것은 1000짜리입니다 하고 결국 1000이 되서야 기뻐했습니다.

지금 사도들의 고백이 그것입니다. 너희들 우리가 성령충만을 받아서 그러는 것이 이상하냐? 영어도 불어도 하고 라틴어도 하니 이상하냐. 이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 중에 극히 일부분이다. 그 위에 뭐야. “또 내가 워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그리고 주께서 친히 강림하시는 날이 올 것이라. 그리고 너희를 모아 영원한 나라를 시작하리라. 지금 이 모든 것은 극히 일부분입니다. 물론 베드로 쪽에서는 기쁩니다. 왜 안 기쁘겠습닊만 다른 사람들이 보고 놀란, 나 방언하나 했다 하며 기뻐하는 것,  400쯤 됐다고 해서 기뻐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천짜리요 만짜리요 럭짜리입니다. 그런 자세들이 있어야 됩니다.

곤고한 일에 직멱해 있고 처절한 현실에 부딪쳐 있지만 사도들이 놀라지 않는 것은 당연한 과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고 이얼들로 인하여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으며 그 이롤 마땅히 통과해야 하는 그 길목인 것뿐입니다. 놀랄 일이 없습니다. 맞습니다. 온 천하만물을 만드시고 주장하시고 역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이 일도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의 기도가 있다면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함 때문에 하나님의 목표와 목적하심을 놓고 눈 앞에 있는 위험에 타협해서 영운한 자리로 가는 열차에서 뛰어내리지 안헤 하옵소서. 그것만이 그들의 기도입니다.

적들의 반격을 완화시켜 주십시오라든다, 그것을 극복할, 그래서 어려움을 당하는 일니 없도록, 추위를 느끼지 않을 옷을 주십시오가 아니라 이 정도의 위험 때문이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인도하시고 지금 진행하고 계시는 그 일에서 내가 뛰어내리는 미련한 짓하지 않게 해주십시오입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사도들의 기도의 본질인 것입니다.

하박국서 3장을 보면 같은 신앙의 고뱅이 나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이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니라도 나는 어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 : 17, 18)

이것은 뻔한 고백같습니다만 그리 쉬운 고백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박국서의 시작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박국서는 전부 이문제 하나 때문에 쓰여진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아주 중요한 의문거리가 생겼습니다. 질문이 1 : 2 이하에 이렇게 나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합 1 : 2 - 4)

하박국 선지자가 가장 놀란 것은 하나님이 온 천하만물의 주인니시오 천하의 대주재이신데 세상에는 의로운 자가 불의한 자에게 피해를 보고 산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들이 더 잘살고 강포한 자들이 선한자들을 압제해서 잘먹고 잘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이럴수 있습니까? 하박국서 1장 이후와 2장에 연속해서 이런 답이 나옵니다. 네가 지금 당하고 있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역사는 더 혼탁해지고 강포한 것과 불의한 것들이 권세를 잡고 흔들리라. 실제로 그랬습니다.

이 세상의 역사를 보십시오. 선한 자가 이 세상 역사의 주도권을 쥐지않고 악한 무리들이 그 주도권을 쥐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 하나님 두려워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국익을 위해서만 싸우는 세상 평화를 해치는 악당들이 언제나 정권을 붙잡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정치는 모릅니다만 신자호서 보면 자명합니다. 왜 정치가 이꼴이냐 하면 여당 지도자든 야당 지도자든 자기네 이익이 맨 처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정치가가 되느냐. 잘먹고 잘살고 싶은 사람이 정치가가 됩니다. 애국자가 아닙니다.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입신 양명하고 싶은 사람이 정치가가 될 뿐입니다. 신자중에 정치가가 없느냐?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기를 신실한 자로 하여금 한 니라의 역사를 주장하게 하는 일이 하나님에게는 거의 없습니다. 애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늘 십자가라는 방법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일을 시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권세를 잡고 지식을 잡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펼치리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지는 방법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서의 답은 그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지금 당하는 것도 억울한데 더 강포하고 더 불법이 있단 말입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답을 주셨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때 깨닫습니다. 이것이 지나가는 한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국가대표 축구 선수들이 태릉 선수촌애서 합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몇 시쯤에 깨울 것 같습니까. 아침에 일어나고 싶은 대로 일어나서 밥 먹고 12시에 모이자. 이런 합숙소는 없습니다. 6시면 깨웁니다. 지난번 양궁 선수들 어떻게 훈련시켰다고 그럽니까? 어떤 상황에서나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 며칠씩 밤잠을 안 자는 훈련도 시키고 자는 것을 갑자기 깨워서 사격도 했다고 합니다. 축구 선수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맨 처음에 뭐부터 할 것 같습니까. 밥 먹고 사우나부터 들어갈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토끼 뜀 뛰고 계단 오르락 내리락하며 구르고 심장이 쿵쿵 뛰도록 할 것입니다. 그것이 벌받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들만이 얻은 영광 된 직분입니다.

그것을 하바국이 깨닫는 것입니다. 불법이 횡행하고 강포가 판을 치는 이 땅에서 신자가 환난을 당하는 것은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만이 정말 불이구아, 우리만이 횃불이구나, 우리만이 소금이구나, 우리만이 생명의 유일한 연장선이구나,  하나님이 이 혼탁하고 죄로 물든 이 세상에 우리를 통하여 저들을 깨우치시며 불러내는구나, 저들이 우리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우리 앞에서 도전을 받는 것이고 내 존재로 말마암아 저들이 어쩔줄 모르는구나 하는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은 무화과나무가 무성한 것이라거나 포도나무에 열매가 있는 것이라거나 감람나무에 소출이 많은 것이나 밭에 식물이 있는 것이나 우리와 외양간에 양과 소가 많은 것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일이 준행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는 존재 자체,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존재로서 이미 충분하고 이미 너무나 소중하고 그것으로써 더 이상 다른 것은 쳐다볼 수 없는 것이 감사한 일이다 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그렇게 고백이 나옵니다. 맞습니다. 저 원수들이 저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나도 예전에 저러했을 때 예수를 보내신 것같이 저들이 원수짓하는 데 나를 하나님을 아는 자로 여기 못박아 놓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남은 일이 있다면 이 공갈과 협박과 생명의 위협과 육체의 고난으로 인하여 내가 선 이 자리를 내가 알고 있는 이 생명의 진리를 내가 입다물고 주저앉지 않게 담대케 하소서임니다. 돈 잘 벌게 해 달라구요? 아이 좋은 학교에 붙여 달라구요? 세상에 이런 못된 기도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영광된 사람으로 부름을 받고 있고 그런 존재로 지금 우리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를 아셔야 됩니다. 이것이 하박국의 고백이고 오늘 본문에서 본 사도행전 4장의 그 고백입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하옵소서.’ 활동이 활발해지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시각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움직이신다, 역사를주도해 나가신다. 그 결국이 눈 앞에 있다. 이 자리에서 떨어지는 자는 손해다. 내가 거기에 부름을 벋았고 그 일에 쓰임을 받고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이냐. 마음껏 써 주시옵소서입니다. 그래서 담대히입니다.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역사가 하나님의 손에 있고 하나님의 일하심에서 내가 빠져나오지 않아야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쓰고 있다는 것도 아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8 : 9)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과 존귀의 모습으로 보내시지 않고 종의 모습으로 보내시며 레이저 무기와 비행접시 태워서 보내시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방법,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고 하나님의 능력의 방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해지심이 우리를 부요케 한 것같이 하나님은 지금도 모든 사람을 부요케 하기 위하여 먼저 부름 받은 우리의 가난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야말로 하아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방법임을 깨우쳐야 됩니다. 우리의 삶과 현실이 어떤 위협과 환난과 고통 중에 있다 할지라도 오직 주 예수의 이름만이 나타나소서. 우리의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는 것과 우리가 기도하여 축복을 얻어내는 모든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므로 우리의 삶과 죽음에 우리의 존재와 행함에 오직 주께서만이 증명되시옵소서. 그것이 증명되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순교를 당해도 좇고 핍박을 받아도 좋고 오해를 받아도 좋고 괄시를 받아도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존재를 이 무궁하신 지혜와 뜻 가운데 지키고 계시고 인도하심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본 사도들의 기도의 핵심입니다. 여러분 지금 당장 기도하라고 하면 무슨 기도부터 하시겠습니까? 입시철이 다가오고 있으니 우리 아이 서울 대학에 붙여 주십시오. 이것이 유일한 기도이지 않습니까. 우리 남편 건강하게 하시고 돈 많이 벌어오게 하십시오. 이 외의 기도를 하신 적이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 중에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는 분이 계십니까? 왜 불의한 자들은 저렇게 잘살게 되고 나는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왜 이리 곤란한 생활을 하는가. 그런 억울함이 혹시 없으십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결국 선을 상으로 갚으시고 악을 벌로 갚으십니다. 억울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되는 싸움은 이것뿐입니다. 그런 유혹과 시홈에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난님. 이런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하나님이 안 보고 계시는 것도 아니고 악한 세력이 주의 계획을 뒤집어 놓은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못박음을 뭐라고 묘사했습니까. 시편 2편에 있는 본문을 인용해서 사도행전 4장이 얘기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시 2 : 1). 허사입니다. 미련한 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웃으십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 남편 건강하고 돈 벌어오고 우리 아들 좋은 학교 붙여 주십시오 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웃으십니다.

여러분이 지금 살아있고 가고 있는 인생에 궁극적인 욕심이 뭡니까. 무엇을 쌓고 있습니까? 무엇을 쌓고 무엇을 만들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의 기도가 그렇게 결정이 됩니까. 아니 기도나 하십ㄴ까? 주께 요구할 것이 있기나 합니까. 이것이 우습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 요구할 것도 없는 인생으로 전락하지나 않았습니까? 오늘 사도들의 기도가 여러분의 기도가 되기까지 여러분 마음은쉬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을 기뻐하는 것과 지금 잠시 보는 세상이 지나가는 과정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당하는 일을 인하여 영원한 것을 팔아먹지 마십시오. 지금 내가 아무것도 안 갖고 있고 늘 지는 것 같지만 내가 하나님 편을 들고 있고 세상에 지지않고 있다면 하나님은 나를 통하여 충분히 역사하십니다. 죽음을 통하여 부활생명을 만들어내신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로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고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심으로 온 세계를 불러내신 하나님이 여러분 생각에 아무것도 아닌 여러분의 존재와 여러분의 모습과 여러분의 실력을 가지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만들어내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크게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실력을 배야할 필요도 없고 소유할 것도 없습니다. 주께로 맡기십시오. 주께서 나와 내 가정과 내 운명과 아니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와 국가와 역사를 주장하시는 것으로 인하여 여려분 감사하십시오.

주께서 일하시는 그 일과 방향에서 떠나지 않기만을 나의 미련함과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떨어지지 않기 위한 기도 외에는 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애에서 놀라운 기적을 목도하실 것입니다 늘 감사와 찬송이 끊이지 않는 삶을 여러분이 경험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서경은 여기에다 이 내용들을 기록해 놓고 우리에게 남겨준 것입니다. 사도들만의 한 번 지나간 사건들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그들의 삶에서 분명히 누려야 하고 누릴 수 있는 것이고 누리기까지 쉬지 않아야 되는 내용이기 때문에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이 기도가 오늘 말씀을 들은 여러분의 마음에 바로 새겨져서 죽는 날까지 잊혀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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