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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행5:27-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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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박영선 목사 |
| 참고 : | 사도행전 038 / 1988.12.11 |
“저희를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가로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그러하니라 하더라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 하고자 할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사도행전 5 : 27 -42
예수의 이름과 복음을 전하던 사도들이 잡혔다가 주의 사자들에 의하여 기적적으로 풀려나고 또 다시 오늘 잡혀갑니다. 여러 가지 심문을 받고 공갈과 협박을 받은 후에 풀려나기는 합니다만 채찍에 맞고 풀려납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려는 것은 이 일에 대하여 사도들이 어떠한 이해와 어떠한 가치를 두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41절)
주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자로 여김을 받았다 하는 것이 왜 기쁨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기독교가 가르치는 고난의 의미를 오늘은 추적해보려고 합니다.
제일 대표적인 것은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고난에 대한 평가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이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 5 : 10, 11)
첫 번째 기억할 것은 신자들의 생애가 그리고 신자들이 신자 된 그 증거가 세상에서의 환난과 핍박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여긴 이런 뜻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고 세상이 좋아하는 것으로 우리의 소원을 삼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다르고 세상이 평가하는 것과 우리가 평가하는 것이 다릅니다. 여기에서 세상과의 충돌이 있고 세상으로부터의 배척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그 말씀을 주님께서 분명하게 해 두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아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 : 18, 19)
우리늬 신앙생활이 정확한가 아닌가를 알려면 세상과 어느만큼 짝하느냐 세상에서 어느만큼 시선을 돌리느냐입니다. 물론 이것은 세상살이를 불성실하게 하거나 외면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세상이 추구 하는 것, 가치있고 영원하고 진리되는 것이 아닌 것, 눈앞에 있는 것, 세상에서 만족하려는 헛된 것을 구하는 그런 원리와 자세와 목표에서부터 진리와 영원을 준비하는 자로서의 자세와의 비교입니다.
전혀 일체 될 수 없고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고난과 핍박에 대하여 적극적인 평가를 하는 것이 더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고 세상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으며 세상이 주려는 상을 우리가 기뻐하지 않는 것 때문에 일어나는 환난과 핍박이라면 적극적인 의미에서 영원한 나라를 물려받을 사람으로서 훈련되어야 됩니다. 그것이 로마서 8장에 이렇게 기록됩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 : 17)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욥기 23장을 보면 고난받는 욥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저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그럽니다. 그래서 욥기의 결론은 내가 주에 때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었더니 이제는 눈으로 봅니다 하는 자리까지 갑니다.
이런 신앙상의 진전, 주께서 요구하는 수준, 높이와 깊이와 넓이와 크기가 충만한 자리로 가는 이일 때문에 우리에게 시련과 고난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나타난 사도 바울식으로 이야기하면 우리가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광된 중한 것을 이루는 것이라 그럽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지금 본 로마서 8장에 의한 이 말씀을 근거로 추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로서 그와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기뻐했다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살피려는 본문에 조금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당한 것은 지금 저들의 신앙을 넓히는 것으로 받은 고난은 분명히 아닙니다.
앞에서 주의 사자들이 와서 꺼내 주었다든가, 성령충만을 받았다든가 하는 데서는 새로운 힘과 확신을 얻는 도움이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 채찍질당하고 놓여나는 것은 세상이 우리 편이 아니다 하는 것이 증명되었을지 몰라도 저들 자신의 신앙을 깊이 하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사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을 왜 기뻐했는가? 기쁨으로까지 갔다는 것은 좀 다르므로 세상이 우리 편이 아니다를 확인한 것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럼 주님께서 받으신 고난을 성경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를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입니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 : 10)
누가 온전케 된다고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되었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5장에 조금 더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히 5 : 7 - 9)
주님께서 고난을 받아서 온전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왜야하면 주께서 고난을 통하여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피상적으로 이해하면 주님께서는 이 일을 당하기 전에는 부족한 것이 있었는데 이 일을 당하므로 온전하게 되었다는 얘기갸 됩니다. 말이 안 맞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충만하시고 부족한 것이 없으시고 모자라는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로마서 2장으로 얘기를 하면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입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고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입니다. 만복의 근원이십니다.
그가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고 아직도 모자란 것이 있어서 훈련을 받아야 되고 더 채워야 할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2, 5장에 나온 이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면 이런 뜻입니다. 그가 하시려는 일, 구속사역이 이 순종을 통하여, 고난을 통하여 그의 사역이 온전하게 성취되었다는 듯이지 그분 자신의 어떤 부족함이 이 일을 통하여 채워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이 말씀을 제가 조금 더 확대하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 :5 -11)
자, 주께서 어느만큼 큰 권세와 이름을 가졌습니까? 모든 이들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의 입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얻은 상급입니까? 그가지신 십자가 때문입니다.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구속사역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지위를 높였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왜 안되냐 하면 구약성경의 대주제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오신다입니다. 메시야가 온다입니다. 그럼 신약의 대주제는 무엇입니까? 메시야가 오셨고 다시 오신다입니다. 신구약성경 전체의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요 사건과 내용 전체가 그분에 관한 것입니다.
만일 빌립보서 2장에 있는 식으로 주게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쁘셔서 그의 이름을 높였다라고 얘기를 하면 누구든지 십자가를 지고 내 마음에 맞도록 일한 자는 내가 이름을 높여준다. 이렇게 현상이 붙어야 됩니다. 이 일을 치러주는 자는 나라의 반을 주고 내 딸을 아내로 주겠다. 이것은 동화책에 나오는 식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내가 너희를 구원하리라. 너희가 하늘 끝까지 흩어져 있더라도 그날엔 내가 너희를 모으리라. 흑암에 앉아 있던 자에게 빛을 비추리라. 죽음과 사망의 골짜기에 누워있던 자들을 내가 불러내리라. 그러기 위하여 내 기름 부은 종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리라, 보내리라, 보내리아. 신약에 오면 보냈다, 보냈다. 다시 온다. 이것입니다
고난이란 첫째로 세상의 원리와 우리의 삶의 원리가 다르기 때문에 빚어지는 갈등과 반목 때문에 격는 고난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 우리가 세상이 쫓아가는 식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두번째 고난은 우리의 수준보다 더 크고 더 놀아은 것을 하나님이 요구하시기 때문에 생기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 더 분리해야 할 것은 그 고난이,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세상이 우리를 반목하기 때문에 또는 내가 부족한 것을 채워야 하는 훈련 때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빚어지는 고난은 그 일이 주께서 은혜를 베푸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사건으로 준비되어 있고 그리고 그 일은 내가 아니면 할 수 없기 때문에 내 생애에 있곤 하는 고나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것을 밝혀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을 성경에서는 저가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었다인데 그건 우리가 아는 대로 주님이 부족했다가 온전한 자리에 이루었다는 뜻은 분명 아닙니다.
그의 온전함은 그가 하셔야 되는 일, 그래서 시행되어야 되는 일을 말합니다. 빌립보서 2장의 이 일도 주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를 높인 것으로 보입니다만 끝이 그렇게 안되어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ㅇ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니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 : 9 -11) 로 끝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일을 했으므로 하나님이 그를 높였다라는 데 초점이 있지 않고 이런 놀라운 일을 준비하셨고 그 일을 위하여 예수를 보낸 이가 하나님이다가 궁극적인 결론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에서 이 고난을 신앙으로 이겨야 된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고난을 통과하고 나면 저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일을 내가 짊어지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이웃들, 아직도 주를 모르고 흑암의 권세에 잡혀있는 자들에게 베푸실 은혜와 긍휼과 자비가 있으며 사랑이 있는데 그 일을 나 아니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 아니면이라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이 일을 시키려고 만든 일이다라는 개념에서의 고난이라는 말입니다. 사도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을 준비하셨구나. 우리 생애에 이런 것을 준비해 놓으셨구나. 그일을 나보고 하라고 그러시는구나 그 일은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는 것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말할 수없는 은혜와자비와 지혜와 능력으로 준비하신 것이요, 그의 선하심과 의로우심과 자비하심과 사랑의 산물이란 차원에서의 기쁨이란 말입니다.
야고보서 1장을 보십시오. 여기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아픔들이 이겨야만 되고 이기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 주는 일, 그 이상의 차원이라는 것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 : 2 - 4)
일단은 이렇게 보입니다. 우리가 당한 모든 시련과 어려움에서 잘 견디어야 한다. 그것을 견디면 더 온전해지고 흠 없게 될 것이다. 그러면 쉽게 얘기해서 예수님의 고난을 성경이 표현한 대로 추적한 것같이 잘하면 상 받는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제대로 지셔서 높아지셨다. 이런 개념으로 이해를 하면 다음 구절이 맞지 않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 : 5)
이 5절이 그 다음에 붙어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5절은 2,3,4절에 있는 일의 정답입니다. 시험지 내어 주면서 80점 이상 받으면 내가 너한테 상을 주겠다 하고 모르겠거든 뒷면을 봐라, 뒷면에 해답이 있다. 그러면 말이 안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당하는 일이 내가 합격하느냐? 불합격하느냐의 일이 아니라 해야 되는 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잘 견디면 상 받고 못하면 벌받는 차원에서의 얘기가 아닙니다. 그러면 그 하라는 일을 왜 우리에게 맡겼을까요. 그 이로 인하여 나에게 상 받을 일이 있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실 은혜와 자빈와 긍휼한 어떤 대상이 우리 주면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 : 4, 5 말씀부터 봅시다. 예수님의 수난의 모습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주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10절에 가면 그 이유가 분명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주께서 오셔서 당한 수난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시킨 일입니다. 주님 앞에 제시한 시험 문제가 아닙니다. 너, 하면 이만큼 높여 주고 못하면 이렇게 낮춘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절대 실패하시지 않은 일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실패할 수 없는 사람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이루자 그 일을 이룬 주님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찬송과 영광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정하셨고 이루시고야 만 것이므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도 그 이야기입니다. 너희가 어려움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겨라 그것은 너희를 온전케 할 뿐만 아니라 그 일을 너희에게 맡기신 이가 그것을 감당케 하여 너희에게만 유익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처리하는 동안에 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전달되도록 너에게 마련된 것이다.
이사야 식으로 얘기하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나의 일이 아니고 그것을 당함으로써 우리가 찔림으로써 저들이 나음을 얻고 우리가 채찍을 맞으므로 그들이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여태껏 당한 것이 정말 그럴까? 여태껏 많은 고통과 많은 고난과 슬픔과 좌절과 그런 기가 막힌 외로음들을 겪으셨을 텐데 정말 그것이 지금 성경이 말씀하는 식으로 평가되는 것일까. 맞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지 않으십니까? 마태복음 25장입니다. “인다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이믐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 25 : 31-40)
마지막 날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우리가 도무지 예상하지 못했던 환대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눈물 흘리고 신앙인으로 당하는 모든 고난에서 여러분이 처신하는 행들, 거기서 갖는 여러분의 신앙적인 갈등, 아픔, 눈물이 절대 헛되지 않습니다. 주께서는 세고 계십니다. 네가 그때 이 일로 인하여 고민했었느냐? 이 일로 인하여 네가 눈물 흘렸느냐? 이것으로 인하여 네가 속을 상하고 나한테 무릎 꿇고 기도했었느냐? 그것으로 인하여 옆에 있던 이 사람이 회개했고 이 사람이 돌이키고 이 사람이 이렇게 됐느니라.
우린 그날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많은 열매들을 거둘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참외 깎아 먹다가 씨가 너무 많아서 그냥 속에 있는 것 집어던졌는데 나중에 이거 다 당신이 심은 겁니다. 합니다. 아니 언제 우리가 참외를 심었습니까? 당신은 모르시겠지만 그때 연애할 때 여기 오셔서 먹고 당신께서 여기다 심은 것입니다 합니다.
말하자면 우리 인생에서 겪는 누물 흘릴 일, 한숨 쉴 일, 아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모든 일들이 그냥 있는 일도 아니며 그것이 나 하나만을 위하여 있는 일도 아니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금 보지 못하는 신비하고 놀라운 방법, 감춰진 방법으로 펼쳐내시는 그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과 사랑과 용서와 인내의 많은 열매들을 뿌려내시는 사건이고 시간이라는 것을 기억하신다면 여러분들도 여기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아픔과 고난에 대하여 감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가 적은 것은 그런 일들에 대한 깨우침이 적기 때문이고 경험이 적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덜 일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도 이런 일 때문에 제일 괴로워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왜 예수를 믿었는데 신나는 일이 없는가? 왜 예수를 믿었는데 남같이 승승장구하지 못하는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보람 있는 일이 얼마 없습니다. 이번에 애들 학교 붙으면 기뻐할 일 정도입니다. 이번에 개각하는데 이름이 거론됐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흘린 눔룰 한 방울도 헛된 것이 없고 여러분이 쉰 한숨 한 번도 하나님이 기억치 않는 한숨이 없으며 열매맺지 못하고 돌아오는 것이 없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뜻은 너희 뜻과 다르다. 비가 내려서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곡식을 키우는 것같이 우리의 인생고 그냥 이렇게 세월만 흐르고 한숨 쉬다가 그냥 밀려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천국에 가서 주님과 대면하여 여러분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무한하게 풍성하게 맺어낸 열매들 앞에 입을 다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 제일 장사 잘되는 것은 면류관 가볍게 해주는 풍선 장사가 제일 잘 된다고 합니다. 모두가 너무 무거운 면류관을 써서 거기서 목 디스크가 제일 많고 풍선 달아주는 장사가 최고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소중하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모든 발걸음과 여러분의 인생의 모든 사소한, 가장 사소한 문제에까지 그의 지극한 능력과 사랑과 지혜로 간섭하고 계획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감사할 줄 아십시오. 감사하도록 신앙의 눈을 뜨도록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발걸음과 여러분의 말과 여러분의 존재가 얼마나 귀하고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에 대하여 여러분 새삼스럽게 신자 된 기쁨과 자랑을 가지시고 얼마 남지 않은 생를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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