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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집사

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3461 추천 수 0 2009.06.20 14: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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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6:1-7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39-040 / 1988.12.18/1989.01.08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사도행전 6 : 1-7


사도행전은 읽어갈수록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굳음과 주님께서 초대교회를 사랑하시고 능력과 직접적인 기적으로 간섭하시는 모습들을 여러 군데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일곱 집사를 세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은 종종 그런 의미에서 성령행전이라고도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성령에 관하여 약속이 이루어지고 성령충만한 일로 시작을 하고 사사건건 성령께서 직접 간섭하셔서 초대교회의 연약한 무리들에게 힘을 주고 지혜를 주고 또 기적으로 간섭하는 것을 목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기곡들은 그것 자체가 중심 내용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조금만 더 정신을 차려서 읽어보게 되면 이런 기록들은 초대교회가 얼마나 힘이 있었느냐? 당당했었느냐? 놀라웠었느냐라는 차원의 가록이 아니고 우리와 방불한 사람들의 모습들의 삶의 현장을 묘사한 것을 금방 확인하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초대교회에 모인 성도들은 지금 우리 모인 것같이 이런 식으로 모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보다 훨씬 힘있게 모였습니다. 왜냐하면 월씬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것보다 훨씬 힘있게 모였습니다. 왜냐하면 훨씬 나쁜 환경 속에서 모였기 때문에 주를 믿는 자들에 대한 핍박과 방해 속에서 정말 마음에 100%의 확신과 넘치는 기쁨이 없으면 모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모인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성령충만한 역사를 받았고 기적을 목격했을 뿐 아니라 기적을 친히 실현하기도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기도 하고 잡혀가서 감옥 문을 열지도 않고 빠져나온 일도 있습니다.

또한 초대교회 지도자들도 다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섬기던 제자들이고 그의 죽으심을 목도한 자들이고 부활과 승천을 본 자들입니다.


베드로 같으면 그가 지나갈 때 사람들이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지나쳐 가리를 바랄 만큼 위대한 사람이며 모인 사람 모두가 사도행전 기록에 의하면 기쁨이 충만하여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고 찬송하며 있는 것을 다 팔아 모두가 유무상통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 사이에 분쟁이 생겼습니다. 유대인이란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고 헬라파 유대인이란 가나안 땅을 떠나서 다른 나라에 이주하여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입니다. 같은 신자들인데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 사이에 그들의 돌아보아야 할 구제가 자기네 쪽 사람들에게 소홀히 됐다는 것으로 심각하게 싸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커다란 싸움도 아닙니다.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이 큰 싸움이 우리가 보기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 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기록을 보면서 성경 기록이란 도대체 어떤 시각과 어떤 원리와 목적을 가지고 기록한 것인가? 하는 데 대하여 새로운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데 있어서 많은 손해를 보는 가장 큰 이유는 성경을 기록한 목적, 좀더 직접적으로 얘기하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에 대하여 본인이 생각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입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여러 가지 기적을 봅니다. 기적 그러면 대표적인 것이 이런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끌고 쫓아오는 애굽 병사들을 피하여 홍해를 가르고 건넌 것입니다. 그런 기적 속에 건넜다 하는 기록이 성경에 있지만 조금만 더 읽어보면 그렇게 기적으로 인도되어 넘어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다 몰살합니다. 그럴 것이면 왜 꺼냈나 싶습니다. 아니 한 걸음난 더 들어가서 질문을 하자면 그런 기적으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꺼내실 수 있는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 들어가서 종 노릇 하게 했는지는 또 풀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애굽으로 들어가게 됀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근이 들어서 그렇게 됐습니다. 가나안 땅, 지금 말하면 팔레스타인 지방에 흉년이 들어서 애굽에만 곡식이 있고, 남은 온 세상 각지에 기근과 흉년으로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야곱과 야곱의 식구 전부가 애굽으로 들어가 거기서 한 400년 사는 동안에 애굽 사람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내가 너와 네 자손을 복 주리라 너와 네 자손으로 인하여 모든 나라 백성들이 복을 얻으리라고 약속받은 야곱이 그의 자손들과 함께 애굽의 객이 되고 거기서 노예가 되고 하나님의 기가 막힌 기적과 간섭과 지혜로 홍해를 가르고 열 가지 재앙을 내려 바로를 항복시키고 구출해 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습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저해하는 것들입니다. 성경에 많은 기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우리가 필요할 대는 그 기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죠? 다른 때 말고 이번에 우리 애만이라도 대학에 붙여 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 다 관두고 집이 홀딱 망해도 좋고, 굴러가던 차가 갑자기 강에 빠져도 좋으니까 어디 해 한 번 붙여 주시라는 것입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건지신 하나님, 그 기록이 사실이라면 우리 애 한 번 붙여 주시라는 것입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건지신 하나님, 그 기록이 사실이라면 우리 해 한 번 붙여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늘 당하는 질문들이고 시험거리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이 많은 기적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며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셨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도무지 체험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신 것인가?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가? 나를 귀히 여기시는가? 내가 믿는다는 것을 알고나 계시는가? 우리의 이런 생각이 우리를 한두번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런 일이 생기느냐? 전적으로 우리가 무식해서 그렇습니다. 답은 정확합니다. 무식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 번 보십시다. 대학 입시가 바로 지났으니까 그 예를 들기로 합니다. 대학 입학시험을 보는 데 무엇으로 들어갑니까. 대학교는 뭘로 들어갑니까? 돈으로 못 들어가고, 빽으로 못 들어가고 순전히 실력 갖고 들어갑니까? 돈으로 못 들어가고, 빽으로 못 들어가고 순전히 실력갖고 들어갑니다. 실력 없으면 시력이라도 좋아야 합니다. 저 앞에 앞에 옆에 앉은 사람 시험지가 보이면 괜찮습니다. 그때도 내가 본 시험지가 정답인 시험지여야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입학 시험만큼은 무엇으로도 안됩니다. 그것을 공평하다고 합니다. 거기다 대고 내가 이렇게 간절히 원했는 데 붙여주지 않았다. 우리나라 대학교 행정자들은 다 마음이 좁은 사람들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은혜니 자비니라는 말은 붙이지 않습니다.


성경 기록은 이렇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사건이 있고 거기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는 사건이 있고 거기 하나님의 일하심이 나타나 각각에 필요한 국면이 있습니다. 그 사건에서 하나님이 밝히시려는 어떤 국면이 있습니다. 그것을 네 마음대로 갖다 붙이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대학 입학 시험을 놓고 부모의 간절함을 가지고 합격을 시키려고 그러지 말고 그 간절함으로 눈 밝히고 매일밤 때려서 공부를 시켰더라면 합격이 되는 겁니다. 학교 총장을 찾아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줄 타고 산에 올라가다 굴러 떨어지면 방법이 없습니다.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무슨 좋은 사람이다 착한 사람이다를 막론하고 공평하게 산에서 떨어지면 다치거나 죽습니다. 산에 갈 때 산 사람들끼리 약속을 합니다. 험한 산에 갈 때는 서로 손을 붙잡고 보조 자일로 연결을 하든가 해서 안전하게 가지만 떨어질 때는 손을 놓기로 되어 있고, 떨어질 때는 비명을 안 지르기로 약속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는 사람은 어차피 죽을 것인데 남아 잇는 사람까지 놀라게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안 떨어지는게 최고지만 떨어진다면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만화에서나 떨어지면 납작해졌다가 다시 펴져서 일어나지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대놓고 인수봉아! 저는 무정하다. 설악산아! 너는 양심도 없느냐? 이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심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중에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내는 꼼짝을 못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자의 입을 봉하시며 묶어논 죄수를 감옥 문을 따지도 않고 끌어내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기록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똑같이 하나님이 어떻게 죄지은 자를 싢어하시는가 하는 것이 있습니다. 땅이 입을 열어 하나님을 반대한 자를 삼키는 장면이 있고 하나님을 반대하는 자들을 어떻게 홍수로 엄벌했는가 하는 사건이 있으며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자기가 취하다가 벌레가 먹어 죽은 헤롯 왕의 얘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두 다른 국면인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에서 오해를 하고 있느야 하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시는 전능성과 권위와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랑을 내 욕심과 내 생각에 맞추려고 하기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이 장면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에 그를 따르는 신자들에게 어떻게 큰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긍휼로 간섭하셨는가와 그래서 그 사람들이 그때 다 천사였다라는 것과는 일치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보고 주님의 승천을 보고 성령님의 강림하심을 체험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수준은 이것밖에 안됐다라는 장면인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처음 교회에 와서 이것 때문에 당황을 합니다. 난 적어도 교회는 그러지 않은 줄 알았는데 합니다. 교회 가면 나는 싸움도 없을 줄 알았다. 사람들이 다 사랑할 줄 알았다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하시거나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모자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랑을 유보하신 적이 없다는 성경의 기록입니다. 누구까지 구했냐? 나 같은 것도 구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디모데전서 1 : 12 말씀을 보십시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아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해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머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 1 : 12 - 16). 성경의 기록은 우리가 어떤 자인가를 지적하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모나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복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면서 내가 해 달라고 하는 것은 왜 안해주시는가? 거기엔 또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키우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되 죄를 뽑아내시면서 사랑하시고 복 주시려고 하시지 우리를 방종하게 놔 두거나 죄를 짓게 놔 두거나 영원히 파멸의 길에 그대로 서 있게 놓아주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욕심내는 대로 다 주실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기록의 가장 중요한 원리요 성경 기록의 일관된 시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 생각을 어떻게 합니까? 내 욕심, 내 소원, 내 간절함으로 성경을, 그리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굳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칙은 언제나 이것 하나입니다.

갈라디아서 6 : 7 에 있는 것같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이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이 법칙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제 1원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거룩한 것을 요구하시고 거룩한 일에 방해되는 것은 끝가지 방해하십니다.


이사야 1장을 보십시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 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 : 2 - 6). 하나님께서 지금 무엇을 꾸짖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안에서 커오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데 대하여 분노하고 계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성령님의 간섭도 많았고, 하나님의 간섭도 훨씬 놀라웠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내 기도는 듣지 않으신다 그럽니다.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초대교회의 그들은 하나님 마음에 맞게 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나타난 기적이 많았고 지금 우리는 말 안 듣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것같이 얻어맞은 것이 많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간섭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죄악 된 길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놓아두실 수 없기 때문에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쫓아갔던 세상의 헛된 길들을 막으시는 것을 여러분이 한두 번 당하셨습니까?


돈을 쫓아가고 세상의 부귀를 쫓아갔던 모든 일에서 여러분 얻어맞고 돌아올 수밖에 없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중에 아쉬울 것 없는데 여기 와 앉은 사람 누구 있습니까? 다 얻어터져서 온 것 아닙니까? 이래도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하시지 않고 지금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말임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사랑 안하신다면서요, 전지 전능하시다면서요, 온 천하 만물의 주인이시래면서요, 이것 한 번만 쥐 보세요 합니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에게 이렇게 하면 안되곤 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선생님 이 문제 한 번 풀어 보세요. 너 이리 나와, 합니다. 무엇이라 해야 맞습니까? 풀어 주세요, 그래야 맞습니다. 우린 지금 꼭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하나님 전능하시다면서요, 온 천하 만물이 하나님 것이라면 그럼 저 한 번 복 줘 보세요 합니다. 그러니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있는 대로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곳과 새로 맞은 흔적뿐인데도 돌이킬 줄을 모릅니다. 얼마나 무지합니까. 소도 그 임자를 아는데, 소도 나귀도 그 구유를 아는데 이 백성은 아버지 된 하나님을 모르는도다 너희가 맞을 수밖에 더 있느냐 그럽니다.


불신자들은 물론 많은 신자들이 곧잘 이렇게 반문을 합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너희들이 왜 그렇게 사냐? 합니다. 신명기 32장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경고입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 (신 32 : 12-21)


잘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아닌 분을 하나님이라 하고, 진짜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 오늘날 필요한 것을 주는 이를 쫓아다니자. 그래서 하나님이 이러기로 작정하셨답니다. 좋다. 나도 너희를 버려서 내 백성 아닌 자로 내 잭성 같이 대접받게 하겠다 이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믿지 않는데 왜 더 잘사는지 아십니까? 원래 우리가 더 잘살아야 맞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뭐 무슨 억하심정을 가지셔서 우리를 못살게 하고 우리를 괴롭힙니까. 무슨 하나님이 네로예요. 우리 괴로워 하는 것 보는 것이 즐겁습니까. 아닙니다. 왜 이렇게 됐습니까. 우리 신앙이 나쁘기 때문입니다. 신약 식으로 얘기하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오늘 있다 내일 아궁이에 던지울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는 꾸중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누가 먹이시고 입히시냐 하면 너희 천부가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천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하십니다. 그들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공중의 새와 백합화와 들풀에게는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그들에게는 창조주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도 하나님은 선하시고 의로우사 저희들을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하다못해 송충이의 털갈이도 하나님이 시켜 주십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원래는 저주해야 되고 매맞아야 되고 심판의 자리에 넣어야 될 자들에게 복을 주시겠습니까. 그것은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 기록의 전부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았고 내가 가라는 길을 가지 않았다. 어떻게 내가 너희를 놔 두겠느냐? 놔 두면 더 엉망진창이 될 텐데. 어느 부모가 그 자식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보고 놔 둔단 말이냐. 내가 너희를 찢고 너희를 때리고 너희를 종으로 안 팔 수 있느냐. 인생이 무엇인지 세상이 너희에게 약속했던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밝힐 수밖에 없지 않느냐. 너희 팔이 하나 잘라져 천국에 오는 것이 낫지, 성하고 지옥 가는 것이 낫단 말이냐. 그것이 성경의 기록입니다. 그래도 안 풀리시는 데 있습니까? 단 하나 이것 때문에 우리가 보는 성경 기곡과 성경 자체의 말씀과는 늘 거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케 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로 키우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세상에 맞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하나님 국회의원 한번 할 수 있게 그 힘과 능력과 지혜와 권세를 빌려 주십시오. 하나님 부디 제게 기적을 베푸사 이번에 학교 붙여 주십시오.’ 안됩니다.


우리 영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불행케 하는 것이 그분의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를 누구보다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잘못됨을 놓아두실 수 없는 분입니다. 그리서 이런 기록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언제 그의 간섭과 사랑을 중단한 적이 있습니까?

초대교회의 그 많은 기적과 간섭과 지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이 친히 함께 하셨음에도불구하고 여기 또 사건이 터집니다. 그러자 주께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집사를 또 보내주십니다. 이것 가지고도 안됩니다. 또 깨집니다. 또 망합니다. 성령께서 직접 관여하시고 참여하시고 말씀하시는 일돌이 사도행전에 가득하고 아니 성경 전체에 가득하고 아니 우리 생애에 가득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생애를 돌아보십시오. 어느 하루, 어느 한 순간인들 여러분이 혼자였던 적이 있습니까? 돌이켜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닙니까? 돌이켜보면 그때 이렇게 됐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그때 생각했던 것이 안돼서 울고불고 펄펄 뛰었던 일들이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레 잘됐다 합니다. 누구나 신자가 고백하는 추억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간섭하신 일 중에 우리가 불만스럽거나 후회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후회거리가 있다면 내가 그때 좀더 빨리 항복을 할걸. 좀더 빨리 깨우침을 가지고 회개할걸. 이 후회가 있을지언정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신자 어느 누구도 불만과 아쉬움이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성경에 기록된 것과 더 큰 기록들이 그것을 방불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기적들이 오늘도 있습니다. 왜요. 이 성경을 기록케 한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이 사건도 기록해 놓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기적을 다 누리지 못하고 얻어맞는 기적밖에 없고 충돌하는 사건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돌이켜 보십시오. 순종하시고 만들어져 가 보십시오.


종종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주일날 교회 가는 것은 좋은데 설교시간에 졸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설교를 시작하는 순간 세계 여행을 떠납니다. 비행기 타고 동경 갔다가 마닐라 갔다가 인도갔다가 파리로 해서 영국으로 해서 미국에 아직 안 갔는데 목사님 아직도 서론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가서 미국을 3바퀴 돌고 하와이 가서 집에 가도 좋은가 전화해 봤더니 아직도 ‘둘째’ 하고 있습니다.


지루한 것은 무슨 수를 써도 끝이 나지 않습니다. 설교를 제일 빨리 지나가게 하는 방법이 뭔지 아십니까? 듣는 것이 최고입니다. 듣고 있으면 제일 빨리 지나갑니다.


여러분 인생을 가장 복되고 가장 살찌게 사는 방법은 여러분은 신자이기 때문에 신자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의 매일의 생애속에서 기적과 기적보다 더 놀라운 일과 그보다 더 엄청난 일을 봅니다. 그것을 제쳐놓고 살면 여러분은 매일 매일이 지겹고 한숨이고 눈물이고 이놈의 세상 왜 확 안 뒤집히나, 이 생각밖에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에 기록한 모든 것들은 우리를 위하여 기록하셨습니다. 우리 생애를 말씀에 비추어 이제 제대로 나열해 보십시다. 하나님은 그럴 수 없이 선하시고 우리를 위하시는 분입니다. 그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을 감추시지 않는 분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감사거리로, 추억거리로 남을 것이 없게 됐다는 것은 우리의 불신앙과 가난함과 무지 때문입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길을 순종해 보십시오. 충성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놀라워질 것을 약속합니다. 우리의 모자라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배려와 인도와 그 속에서 마음껏 크는 여러분의 모습과, 그래서 보여지는 인생과 영원한 것과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것들을 인하여 여러분에게 찬송과 감사가 끊일 날이 없을 것을 약속합니다. 이 길에서 비껴 나가지 마십시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사도행전 6 :1-7)


성경 기록 중 특별히 사도행전에는 많은 기적이 있고 많은 감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어서 요즘도 심심치 않게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하는 운동도 있고 또 우리 마음속에도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졌던 이런 신앙의 감격들과 담대함들을 다시 한 번 회복했으면 좋겠다 하는 소원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난번 설교에서도 말씀드린 것같이 성경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 같은 감격적이고 놀라운 기록보다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기록들이 어떤 면에서는 더 많이 있습니다.


지금 사도행전 6장에 이르러 초대교회에서 집사를 뽑게 된 동기와 이유가 적극적인 의미나 이유 때문이 아니고 초대교회 내에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사이에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로 인하여 다툼이 생기고 반목하고 원망하는 일이 생겨 할 수 없이 집사를 뽑았다는 사실에 접할 때 우리는 사실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사도행전 기록에 대하여 선입관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그 시작부터 놀랍습니다. 주님의 승천이 있고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성령충만이 있고 방언이 있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하루에 5000명씩 회개하는 일이 있고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비상한 죽음이 있고 이런 일들 때문에 우리는 일곱집사를 뽑는 일에 있어서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다라는 것에만 시선이 모아집니다.


6 : 8을 보시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역시 초대교회는 집사들도 다르다. 지금 목사들은 그때 집사만도 못하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끔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본문을 소상히 살펴보면 이 일 자체가 우리가 갖고 있는 기대와 선입감 때문에 그때 집사들은 달랐다. 은혜와 진리와 성령이 충만헀다. 이러한 쪽만 보아서 그렇지 실제로 지난번에 살펴본 바와같이 성령이 충만하고 모이기를 힘쓰고 밤낮 모여 찬송하고 기도하고 감사하고 자기 것을 다 팔아서 재물을 내놓고 서로 내눠 쓰고 양보하고 핍박을 받고 협박을 받아도 그 일을 기뻐하고 한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르고 있는 것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싸우고 있고 다투고 있고 그리고 그 문제를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도들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드디어 집사를 뽑아라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사도 사도행전 식으로 따지자면 사도들이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너, 너, 너, 이렇게 해야 되는데 너희들이 뽑아라. 그래서 우리는 이런 일을 보ㅁ면서 성경이 왜 이런 식의 기록을 했을까? 이런 내용들을 그렇게 길고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겨서 우리에게 무슨 경고를 하고 싶고 무슨 내용을 전달하고 싶어 하시는 것인가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


지난번에도 이 본문을 가지고 말씀을 드릴 때 성경에는 뜻밖에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다른 기록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아주 이상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드셨을까? 왜 인간의 타락을 막지 않으셨을까? 거기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왜? 내 자식이 떨어져야만 하는가? 이해할 수 없어도 사실립니다. 기도했고 열심을 부렸고 모든 정성을 다 바쳤는데 왜 떨어졌을까? 그것이 납득이 안 가는 것은 안 가는 것이고 사실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난 이해할 수가 없다라고 얘기하는 것과 그런 일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가 하나님 있는 것을 안 믿어 합니다. 그러나 조금 있다 보자 합니다. 그대는 지옥 가서 이제는 믿습니다 합니다. 그럼 지옥 가서 믿으면 좀 덜 뜨거우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을 먼저 악게 된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 싸움에서 우리가 무엇에 걸리느냐 하면 그러면 왜 성경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 같은 식으로 내용을 설명하거나 그 내용을 우리에게 주입시키지 않고 이런 식으로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 성경이 이렇게 쓰여졌더라면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더라면 하는 요구와 그 다음에 하나는 뒤집어서 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과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고집만 부리느냐 하는 두가지 상반되 문제를 인식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설명하는 방법과 우리를 납득시키는 방법이 나쁜 것이냐 아니면 우리가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냐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성경은 좀더 성경다워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기독교다워라. 누가  하나님이 어디 있어라고 하면 입이 쫙 찢어지든가 그러면 확실하지 않습니까. 난 교회 안 다 하고 딱 뒤돌아섰더니 땅이 쫙 갈라지면서 빠질 뻔했다든가 하면 다 믿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보면 그런 기록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거짓말했다가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그러니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그런 일이 있으니가 우리 기대도 점점 더 그리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주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어 보십시다.


마가복음 11장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 : 22 - 24)


이것이 분명히 기독교 신앙답습니다. 믿음으로 구하면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어고 관악산 보고 서해바다에 가 있으라 그러면 울릉도 옆에 가 있을 것입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어도 독도에게 더 커지라 그러면 더 커질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주님께서 당신의 입으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그 말한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않으면 그대로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구한 것은 받은 줄로 여기라 그랬습니다.


실제로 그런 기도를 저도 여러 번 해봤고, 제 주변에서도 이 문제로 인하여 상담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한 번도 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아주 대표적인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예전에 섬기던 어떤 교회에서 주일학교 5학년인 어린이가 아버지와 함께 주일날 아침 교회를 오다가 가벼운 교통사고가 났는데 충돌하면서 아버지가 머리를 앞 유리에 받았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충돌이었는데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좀 어지럽다 합니다. 조금 있자 조금씩 조금씩 정신을 잃어 가서 드디어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딸 아이가 가면서 차에서 나, 병원에 도착해서나 계속 바로 이 말씀같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빠를 살려주십시오. 믿었고 의심치 않았습니다. 점점 악화되어서 그날밤에 돌아가셨습니다. 뇌 안에 뇌출혈이 되어서 처음에는 오히겨 정신이 멸쩡하다가 점점 피가 많이 흘러 나오면서 뇌기능을 마비시키고 혼수상태에 들어가고 드디어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그 애가 경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쁜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바로 여기가 오늘 우리가 확인해야 되는 구절인 것입니다. 이 말씀이 사기인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율법이라 할지라도 그 일점일획도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랬습니다. 하물며 주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겠습니까? 없어질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사실이 아니냐는 일입니다. 이 말의 뜻이 무엇인가는, 쉽게 얘기해서 나는 단순한(simple) 사람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신비주의적 경향을 가진 완전주의자들과 신앙의 충돌이 생깁니다.


성경이 그랫으면 그대로 믿자. 그럼 이 산이 저쪽으로 옮겨진다. 그럴 필요가 없어서 우리가 안 구할 뿐이다. 그러니까 단순한 신앙가들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그래서 자기네들은 기쁘고 모든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는 것으로 그렇지 않은 신앙인들을 주눅들게 하는 충돌이 현실 생활 속에서 신자들에게 있습니다.


난 이번에 기도했더니 우리 애는 됐다. 당신은 안된 것 보니까 기도를 안했을 것이다. 했다. 그럼 의심했을 것이다. 의심 안했다. 그럼 사기다. 이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것이 굉장히 복잡해집니다. 나는 그러면 내 믿음이 없었던 것이냐? 나는 나도 모르게 의심을 한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바로 성경을 보는 데 있어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성경 기록에 어떤 원리와 어떤 방법을 채택하셨는가를 알아야 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따지기로 하십시다. 요즈음 제일 많이 나오는 광고 중 하나가 차 광고입니다. 자동차가 굉장히 많이 팔리고 있습니다. 그럼 자동차를 팔 때 대부분 어느 모습을 찍어서 광고에 내보냅니까? 앞 모습, 옆모습이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세부사항 중에 무슨 엔진을 썼고 무슨 방식을 썼으며 연료 소비율이 어저구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제가 자동차를 보았을 때 앞부분을 거의 대부분의 시각 속에서 보고 옆면이 조금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쪽 꼬리가 보일 수 있습니다. 내가 헛것을 본 것이 아니고 딴 차를 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꼬리 부분을 확인하려면 그쪽에 가서 보는 것이 제일 확실합니다.


성경 속에는 한 가지 말씀을 하실 때 하나님께서 어느 부분을 주된 그 대상으로 놓고 말씀하셨는가가 그때마다 다릅니다. 내가 차를 정면에서 보았을 때 정면을 설명하면서도 측면과 후미가 약간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쪽을 주로 다룬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시각에서 본 후미와 그 시각에서 본 측면을 그 시각에서 본 것으로 가져가면 곤란해집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을 전문으로 다루는 신학의 한 분야를 조직신학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푼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푸느냐 하면 그 분야에 관한 한 더 확실하고 자세한 다른 설명들로 보충을 받는 것입니다.


기도에 관한 보충을 받으려면 이것만으로 기도를 꽉 붙잡지 말고 기도에 관한 더 좋은 설명을 쫓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놓고 집사 뽑은 이야기를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기대에 의하면 집사들은 봐라 초대교회 집사들은 다르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다. 권능이 충만했다. 기사를 행하고 얼굴이 벌써 천사처럼 빛났다. 그 시대에 갔으면 저는 집사도 못할 것입니다. 얼굴이 천사 같지 않으니까.


대표적인 예로 집사 뽑는 얘기에 가장 좋은, 그것만을 주로 다룬 성경 구절은 댸모데전서 3장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함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딤전 3 : 1 - 4).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 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딤전 3 : 8 -12)


자, 성령과 지혜와 권능이 충만한 것을 구체적으로 풀면 한 마디로 얘기해서 평범한 사람입니다.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를 얼마나 했느냐? 철야기도를 얼마나 했느냐가 아니고 남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대표적인 것으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 아내나 세 아내의 남편이 되지 말라는 말입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을 잘 다스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에게는 단정함을 요구합니다. 지지고 볶고 나오지 말고 단정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과 지혜와 권능이 충만하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 문제가 주된 초점이 아니므로 더 확장을 할 수 없습니다만 바로 우리가 여기서 놀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집사가 된다, 하나님 앞에 집사로 부름을 받는다, 일꾼으로 부름을 받는다 하면 기도하면 이루어지고 눈을 감으면 환상이 보이고 성경을 읽으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입을 열면 모든 사람이 항복하는 권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그러한 기대와 사실은 그런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신비로운 방법이란 반이성적이고 몰상식한 것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자, 신비주의란 마태복음 11 : 22 이하의 기도 얘기를 놓고 봅시다. 쉽게 얘기해서 믿고 의심치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내년에는 전부 붙도록 기도합시다. 될 때까지 기도합시다. 안되면 또 합시다. 금식을 해서라도 어떻게 해서라도 하늘보좌를 움직여 우리 하나님이 미국, 소련 이런 데 쳐다보지도 말고 우리나라, 아니 우리 교회만 쳐다보게 합시다. 이렇게 가면 시세말고 얼마나 폼납니까.


그러나 뜻밖에도 성경은 그런 요구를 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 참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런 오해가 생겼느냐 하면 우리가 생각할 때 종교는 그럴 것이다 하는 발상 때문입니다. 왜? 근거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기독교 내용 자체가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학문과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1장에 가면 신앙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이렇게 대표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 : 6)


이것이 믿음의 내용입니다. 두 가지로 나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이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이 세계가 전부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어디 있냐! 지옥이 어디 있냐! 그렇게 얘기하지 말아라 이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입니다. 아! 그러니까 천왕성, 명왕성 다음에 안 보이는 세계. 이런 물질계가 아닌 영적인 세계, 영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속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상 주시는 이시라는 뜻은 그의 모든 존재의 주인이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상과 벌을 주고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며 존재와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그것이 믿음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이라든가 우리 인간의 이성이라든가 경험만으로는 포착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신비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과학적인 증거나 객관적 논증으로 어떻게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비롭고 초월적인 것이기 때문에 신비롭고 초월적인 방법으로 이해된다는 것은 얘기가 다릅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내용과 신비한 내용을 우리에게 인식시키는 방법으로 우리가 잘 아는 방법을 훨씬 많이 쓰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간섭하셔서 하는 것,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일들은 결국 성령님께서 우리의 지각을 밝히시고 우리의 이성을 조명하사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세계로까지 우리를 깨우쳐 주시는 작업이지 눈 감고 주문을 외었더니 하늘로부터 그냥 은혜가 번개같이 내려와서 내 가슴속에 박히는 식으로 결론이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생각하고 내가 확인하는 모든 방법을 외면하고 그냥 어떤 설명할 수 없는 방법, 초월적이고 신비한 방법으로 수행되어야 그 방법이 좋은 것이다라는 생각 속에 파묻혀서 신앙생활을, 말하자면 그런 돌연한 사건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으로 오늘 내가 해야 되는 일을 보류하는 핑계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수행하시는 데 있어서 성경말씀으로 우리에게 설명을 하기도 하고 우리 인생을 통해서도 설명을 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은 인생 경력이 긴 것과 많이 비례합니다. 같은 신앙이라도 젊은이가 갖는 신앙과 연륜이 쌓인 신앙과 다릅니다. 꼭 신앙이 그것으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형성된 신앙이 얼마나 깊고 오묘한 졍지에 가느냐 하는 것은 인생이라는 경험이 굉장히 큰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믿을 리가 없고 아무리 설명해도 믿지 않았는데 어떤 특별한 체험 때문에 예수를 믿은 사람이 있다 그럽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든가 귀신이 나간다든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차가 뒤집혔는데 하늘이 열리면서 밝은 빛 속에 주님을 봤다는 것은 뭐냐는 것입니다. 보통 그런 일을 경험한 사람들은 간증을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은근히 자기가 하나님께 특별한 대접을 받은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과시하기 일쑤입니다만 불행히도 사실은 그런 특별한 체험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무슨 방법으로도 안돼서 할 수 없이 때린 사람들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내세가 있다.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이 물질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살아오면서 성경이 한 말이 맞다. 정말 사람은 악하구나. 어쩌면 이럴 수가 있는가로 이 말씀이 맞다. 하나님, 정말 하나님 계신 것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좀더 분명히 제게 알려 주십시오.


이렇게 항복해 오는 것이 정상적인 방법인데 그렇게 안됩니다. 아무리 해도 안 듣습니다. 어떤 경험을 해도 점점 엉뚱한 곳으로 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방법은 나중에 하나밖에 안 남습니다.


사실을 먼저 경험시키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나 여기 있다.’ 이런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무슨 방법이 없습니다. 최후로 차가 구른다든다, 다리가 부러진다든다, 이런 식으로 돌이키는 방법으로라도 그 사람을 항복시킵니다. 이것이 사실이구나.내세가 있구나. 하나님이 계시구나를 확인시켜서 항복시킨다는 뜻이지 하나님은 꼭 한 사람을 함복시킬 때 그냥 멀쩡하게 가던 차를 세 바퀴 돌린 다음 나 여기 있다 하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굉장히 중요한 뜻이 이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 이것을 나눠야 되느냐 하면 이 문제야말로 신자 된 여러분이 신자로서 성숙해가는 데 있어서 일반적으로 영양공급을 어디서 받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에게 확인새키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기도하고 말씀을 봅니까? 말씀을 본 것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우리가 잘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완악하다. 우리는 게으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하신다. 예, 저는 충성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서 기도해야 하고 그러면 혈서 쓰고 머리띠 두르고 둥성, 충성 할 때가지는 충성스러운데 살아보니까 안됩니다. 당장 콩나물 살 때부터 싸웁니다. 살아보니까 내가 입으로 외쳤던 것만큼 실력을 안 가졌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행사가 있을 때는 그게 폼나게 나오는데 생활 속에서 해보니가 금방 안 나옵니다. 저의 딸애가 제일 못하는 것은, 동쪽에는 소방서가 있습니다. 뒤에는 우체국이 있습니다. 그럼 우체국은 어느 편에 있습니까? 서쪽! 그럼 철수는 남쪽을 향하여 섰습니다. 남쪽에는 경찰서가 있습니다. 뒤쪽에는 시청이 있습니다. 시청은 어느 쪽입니까? 하면 서쪽, 합니다. 야. 왜 서냐? 아까 아빠가 뒤는 서라고 그랬잖아요 합니다.


그 다음에는 북쪽을 향하여 섰습니다. 북족에는 마을 회관이 있습니다. 등뒤에는 짜장면 집이 있습니다. 짜장면 집은 어느 쪽에 있을까요? 그러면 딱 나를 쳐다봐요. 북쪽을 향하여 섰으니까 반대가 어디일까는 생각 안합니다. 서, 동, 남 정답이 나올 때까지 부릅니다. 드디어 맞추었죠. 남. 그땐 그 문제를 하는 동안에는 다 맞춥니다. 눈치를 봐가지고 맞춥니다.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몰라요. 동서남북을 차례로 불러서 다시 합니다. 그 답을 쓴 것이 그 사랍의 실력이 아닙니다. 나가서 자기가 동네를 찾아가 봐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인의 실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물론 지금이라도 천군천사를 보내 나를 불수레에 태워서 진행시킬 수 있고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뛰어난 이름을 주실 수도 있으며 권세를 줄 수도 있고 부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안하고 그분의 사랑과 지혜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지금같이 시시한 것이 아닌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를 이해해 달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쌀 보냈고, 연탄 보냈고 했는데 어느날 뼈에다가 도배한 것처럼 말라서 나타나 굶어죽게 되었다고 오면 다시 링겔 꽂고 비타민 먹이고 하는 것은 분명히 뭔가 잘못돼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과 복 주시는 방법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묘수, 어떤 주문을 외움으로써 하늘로부터 그냥 깡통이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여러분의 신앙 성장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기록 전체가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보십시오. 살고 지지고 볶고 한 얘기뿐입니다. 외국과 싸운 얘기, 당한 애기, 포로로 끌려가 다시 돌아온 얘기, 그런 속에서 하나님을 배우며 알아가며, 기뻐하며, 놀랍게 변화해 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 교회에 뭐가 있었으면 좋겠습니까? 스데반 같은 집사 하나만 있어도, 아니요 지금 있는 우리 모든 교우들로 너무나 충분하고 꼭 맞는 것입니다. 싸우고 지지고 볶고 원망하고, 흉보고 그것이 다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나면 여러분이 조금씩 바뀌어가고 어느날 문득 무섭도록 성장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는 방법이요, 복 주시는 보편적인 방법입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을 충성되이 사시고 일어나는 모든 사소한 일들을 귀하게 여기실 줄 알아야 됩니다. 그것들이 모두 내 보약인 줄 아셔야 됩니다. 애들 밥 먹을 때 우리가 제일 많이 요구하는 것이 편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편식하지 말라. 골고루 먹어라. 파도 먹어라. 마늘도 먹어라. 다 먹으면 몸에 이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 생애에 일어나는 어떤 일도 하나님이 걸러 보내지 않고 지켜 보내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그것을 믿으십니까?


우린 그렇게 믿으면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것을 믿는다. 그러면 당장 비가 와도 이렇게 피해서 떨어지고 진창에 발을 디뎌도 떠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이 진창에 발 담그면 구두에 흙 묻고 양복 바짓가랑이에 진흙 튑니다. 마땅합니다. 우산 안 쓰고 빗속을 거닐면 완전히 감기 드는 것 당연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도 모르는 어떤 부분들이 크고 고쳐지고 쌓여나가고 튼튼해져 갑니다.


이것이 신자의 신자 된 큰 특권입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능력과 지혜로 여러분 앞에 펼쳐논 기회들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존재와 허락된 인생을 소중히 하시고 감사하시고 승리하시기를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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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 사도행전 간섭으로서의 환난 행14:20-28  박영선 목사  2009-06-26 1862
1705 사도행전 세상의 대접 행14:8-18  박영선 목사  2009-06-26 1670
1704 사도행전 근거 행14:1-7  박영선 목사  2009-06-26 1623
1703 사도행전 성직 행13:50-52  박영선 목사  2009-06-26 1789
1702 사도행전 기독교의 절대성 행13:44-49  박영선 목사  2009-06-26 2098
1701 사도행전 기독교의 객관성 행13:13-41  박영선 목사  2009-06-26 1692
1700 사도행전 살라미에서의 바울 행13:4-12  박영선 목사  2009-06-25 2416
1699 사도행전 헤롯 왕 행12:18-25  박영선 목사  2009-06-25 3662
1698 사도행전 하나님의 지혜 행12:12-17  박영선 목사  2009-06-25 2381
1697 사도행전 하나님의 방법 행12:12-17  박영선 목사  2009-06-25 2612
1696 사도행전 연속성과 불연속성 행13:1-3  박영선 목사  2009-06-25 2239
1695 사도행전 성경적 종말관 행11:27-30  박영선 목사  2009-06-24 2067
1694 사도행전 고넬료 행10:1- 11:18  박영선 목사  2009-06-22 3990
1693 사도행전 애니아와 도르가 행9:32-43  박영선 목사  2009-06-22 2566
1692 사도행전 든든히 서가는 교회 행9:23-31  박영선 목사  2009-06-22 2840
1691 사도행전 바뀌어진 바울 행9:10-30  박영선 목사  2009-06-22 2311
1690 사도행전 바뀌어진 사울 행9:1-9  박영선 목사  2009-06-22 2598
1689 사도행전 민족주의를 넘어서 행8:14-17  박영선 목사  2009-06-22 1557
1688 사도행전 마술사 시몬 행8:9-24  박영선 목사  2009-06-22 3066
1687 사도행전 빌립 집사 행8:5-8  박영선 목사  2009-06-22 3569
1686 사도행전 흩어진 사람들 행8:1-8  박영선 목사  2009-06-22 2181
1685 마태복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마27:38-42  강종수 목사  2009-06-21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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