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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6:8-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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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영선 목사 |
참고 : | 사도행전 041/ 1989.01.15 |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리버디노, 구레네인,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사람들을 가르쳐 말 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사도행전 6 : 8 -15)
지난 주에 기독교적인 신앙의 내용이 초월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인식되는 과정과 우리에게 전달되는 방법도 꼭 초월적이지 않다고 했습니다.
내세, 영원 이런 일들은 분명히 이 세상의 지식으로 감지하거나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게 하실 때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써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제일 많이 동원하신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애들 키우는 일, 이렇게 나이 먹어 가는 일, 이런 일들을 통해서 인생이 무엇인가? 산다는 것이 무엇인ㄱ? 하는 데 대하여 조금씩 생각을 바뀌게 하고 사람들과의 생존경쟁 속에서 부딪치면서 성경이 하신 밀씀이 이렇게 참 정확하구나 하는 식으로 우리의 생각과 이성을 종용해 오시고 방향을 바꿔 오시는 방법을 써서 그 초월적인 내용들을 우리로 하여름 감지하게 하시고 결국은 믿게 하시는 방법을 제일 많이 쓴다고 했습니다.
성경이 기적을 많이 기록하고 있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은 우리에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되는 일 중의 하나가 됩니다. 왜냐하면 신비한 내용은 신비한 방법으로 온다는 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많은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 6 : 8 -15까지 읽은 스데반의 등장, 스데반의 행적을 보는 데 있어서도 이 기적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애냐하면 여기 8절에서 보는 바와같이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잘 아시다시피 오늘 본문에서 이미 체포되고 7장에서 설교를 한 편 한 다음에 돌에 맞아 죽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의문거리는 이것입니다. 성경에 분명히 기적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과 심판이 이렇게 자주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꼭 필요한 일에는 하나님이 간섭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에게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기사와 표적을 일으키게 하지말고 돌에 맞아도 죽지 않는 방탄복을 먼저 입혀 주는 기적이 더 소용되는 부분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만 해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고 복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런 경험과 확신없이 이 자리에 와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필요했을 때는 안 들어 주십니다. 아주 쉬운 예로 애를 학교에 안 붙여주십니다. 이번 시험에도 작년 시험에도 하나님은 오리발을 내셨습니다. 결정적일 때는 안 들어 주시고 싸구려는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백화점 세일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성경이 얘기하는 이런 기록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이며 그것을 어떻게 우리가 이해해야 되며 어디까지 믿어야 되는가 하는 것은 이제 우리들에게 사실 시급한 문제가 됐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런 일을 많이 경험해 오자 결국 적당한 선에서 믿기 시작해 버렸습니다.기대를 안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적이라는 것이 없다고는 안하지만 기대 안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 같이 기적이라는 방법을 하나님이 제일 많이 쓰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초월적인 내용을 우리속에 쌓아가는 방법으로 기적보다는 일상생활에 더 충실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하나님의 손길과 깨우침이 더 많이 있고 그것이 보편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기적이 있고 기적이 분명히 자리해야 되는 어떤 의무와 의미가 있을텐데 그것을 우리가 놓아버리는 것은 사실 신자로서는 굉장히 가난해지는 것이고 든든한 기초를 하나 포기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자니 우리의 일상생활의 경험 속에서도 이런 기적들이 사실 제대로 일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믿어야 하고 어디까지 기대를 해야 되는지 사실 우리가 혼동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의 가장 대표적인 구절을 하나 찾고 차근차근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가복음 16장으로 가 보십시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 : 18).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하신 약속입니다. 이런 표적이 따를거라고 그럽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새 방언을 말하고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고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그런데 저는 아직까지 한 번도 제가 기도해서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멀쩡하게 애도 잘 낳는데 어떤 목사님 애는 인큐베이터 안에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됩니까? 어디까지 믿어야 됩니까?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겠다 그랬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새 방언을 말하고, 새 방언이란 쉽게 얘기해서 외국어까지 포함됩니다. 새 방언을 유창하게 하는 것은 그만두고 이번 대학시험 보는 우리 애 영어하고 독일어나 좀 잘 보게 해주세요. 그것도 안해주신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이것을 풀기 위해서 우리 지난 주에 한 번 스치고 지나갔던 마가복음 11 : 22을 봅시다. 마가복음 11,16장을 풀어야 오늘 본문이 풀리고 사도행전과 아니 전 성경의 기록 방법과 의도하는 바가 조금 확실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 11 : 22 - 24)
이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됩니까? 우리가 만일 저 피아노보고 밖으로 나가라고 진심으로 믿고 기도하면 저 피아노가 밖으로 나가실 것을 믿으십니까? 해보고 되면 믿고 안되면 안 믿을 것입니까? 어떻습니까? 믿음이라는 말이 사실 이 본문의 힌트입니다.믿는다는가 의심치 않는다는 것은, 이 문제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결과에 있거나 방법에 있지 않고 우리의 기도를 듣는 인격자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집에 들어가서 스위치를 켜면 불이 들어옵니다.스위치를 끄면 불이 안 들어옵니다. 스위치를 켰는데 불이 안 들어오면 믿음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어디 휴즈가 나갔겠지 아니면 정전이 됐거나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스위치를 켰는데도 불이 안 들어왔다고 아! 나는 믿음이 없구나, 의심했구나 그래서 다시 무릎 꿇고 앉아서 진실된 마음으로 회개하고 의심없이 기도하면 불이 딱 들어오는 일은 없습니다.왜요? 그 일은 과학적인 사건에 대하여 대응하는 것이고 기도는 인격자에 부탁하는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이 내가 요구하는 결과와 사건을 향하여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기도는 언제나 내가 하나님께 나의 필요한 것을 기도했으면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는 적이 없고 그리고 우리를 향하여 사랑과 선함과 복 주시려는 마음을 갖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외면하실 리가 없습니다. 이것이 이 본문의 뜻입니다.
만일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그 결과가 나한테 필요한 것이 아니거나 해로운 것이기 때문이라는 뜻이 됩니다.그래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막 11: 24). 받은 줄로 믿으라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가복음 11 : 22 -24까지의 약속의 진정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라고 하십니다.주께서도 약속하시기를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내가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안 이루어지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해롭기 때문입니다.무엇이든지 됩니다.내가 기도했으면 그것은 응답받은 것입니다.내가 요구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라서 그 결과가 내 손에 안 왔거나 아직은 때가 아니라서 안 왔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16장을 보십시다. 아까본 대로 하면 이런 표적은 어떻게 됩니까?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늘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막 16 : 17, 18). 이런 일이 사실로 있습니까? 남에게 손을 얹어서 병이 낫습니까? 저는 제 허리도 아직 못 고쳤습니다. 불면증도 아직 못 고쳤고 두통도 아직 못 고쳤습니다. 우리 딸 눈도 크게 못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애가 아침마다 일어나면 눈을 크게 떠보는 습성이 생겼습니다. 그것 하나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눈이 안 커 집니다.
우리의 가장 필요한 부분들에 대하여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커다란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는 너희는 온 천하를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맡은 대상들이라는 것입니다.
흑암 중에 사는 백성들에게 사망의 그늘에 잠자는 영혼들에게 복을 주시며 구원의 도를 전하시며 저들을 불러 백성을 삼고자 하는 사랑과 집념과 긍휼과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이가 그 일을 행하는 데 있어서 사소한 일들로 방해받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것과 상응하는 구조를 이런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는 로마서 8장을 보십시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 : 35)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 : 38, 39)
바로 그 얘기가 이렇게 뒤집어져서 나옵니다. 너희가 뱀을 집고 독을 마셔도 죽지 않으리라.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서 저들을 끊을 자 없고 하나님이 그 사랑을 담아 구원을 베풀려고 보내는 이를 방해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시험삼아 뱀한테 손가락 물려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인가 아닌가를 확인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의 일을 이루시고 우리에게 베푸시려는 사랑과 은혜와 구원의 문을 진행해 나가시는 일에 있어서 무엇으로도 방해받지 아니하시고 무엇으로도 그 일을 중단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왜 이런 말씀이 필요합니까? 이것을 이제 사도행전 오늘 본문으로 끌고 와 보십시다.
자, 오늘 우리가 본 본문에 의하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스데반은 대단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고 그 얼굴이 천사 같았고 많은 기적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건은 어디로 가고 있느냐 하면 죽음으로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도 말씀 나눈 것같이 기왕 권능이 충만한 일과 기적을 일으킬 일들로 그에게 간섭하시고 하나님이 그를 지키실 바에는 돌 맞아 죽는 일부터 면하도록 먼저 했어야 옳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쪽은 놔 두고 쓸데없는 일은 도와주셨다는 말입니다.이것이 쓸데없다는 표현이 참 애매합니다만 남 도와주는 일, 기적 행하고 남 병 고쳐주지 말고 당사자가 죽지 않아야 될 것 아닙니까? 남은 고쳐내고 남한테는 좋은 일 다 해놓고 기적을 일으키고는 돌 맞아 죽었다. 여기서 앞서 한 얘기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겐 이런 표적이 따르리라 합니다. 어떤 표적입니까. 무슨 뱀을 집든지 무슨 독을 마시든지 해함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 돌에 맞는 것만은 없었기 때문에 돌에 맞아 죽은 모양입니다.
여기서의 얘기는 그가 가는 길이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길이라는 의미에서 기적이 도입되고 있습니다. 기적이 도입되는 것은 우리가 요구하는 목표와 결과를 이루게 하는 방법으로써가 아니라 그가 가고 있는 길이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보고 계시는 일이라는 뜻에서 기적이 도입됩니다.
자, 조금 더 풀기 위해서 하박국서 2장을 보십시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 : 4)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이것이 등장한 이유는 지금 하박국 선지자에게는 한 가지 풀리지 않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불의한 자들이 의로운 자들을 압제하고 일어나서 형통하게 삽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롭게 사는 자들이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을 외면하고 불법을 행하고 악하게 사는 자들이 의로운 자들을 수탈하고 짓밟고 큰소리치면서 잘먹고 잘삽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묻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이 답을 주십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우리가 생각하는 식으로 환경과 조건이 개선되고 우리가 요구하는 결과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으로 살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삽니다. 그래서 하박국서 3장에서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16절을 보시면 하나님 께서 어떻게 세상이 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더 고난을 받을 것인가를 쭉 이야기해 옵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합 3 : 16)
앞으로 얼마나 더 고난을 받을 것인가를 주의 계시를 따라 알고나니 지금까지 당한 것보다 더 큰 환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몸이 떨립니다. 그러나 이어서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 3: 17, 18)
저들이 우리를 짓밟고 승리한 것이 진정한 승리가 아니며 우리가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게 괄시를 받고 환난을 당하는 것이 내가 저들보다 힘이 없어서도 아니며 하나님이 저 불의한 자들 손에서 우리를 구할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며, 우리가 당하는 일을 하나님이 보고 계시며 저들이 나를 밟는 것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지금 당하는 일들이 우리에게 유익하고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불의한 자들이 불법을 행하여 사는 것같이 살지 않아서 당하는 여러 가지의 손해거리들, 억울한 일들이 우리에게는 풀리지 않는 일이 됩니다. 그럼 하나님, 우리도 불법을 행하고 우리도 행악하는 자들과 같이 악하게 살아서 이기라는 말입니까?
정직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간섭해 주셔서 환난을 막아 주시고 저들이 사기쳐서 잘먹고 잘살면 우리는 정직한 것으로 잘먹고 잘사는 방법을 줘야 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신자들이 겪는 오해거리란 말입니다. 성경의 얘기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정직하게 살면 지고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왜 지고 당하는 것을 놔 두싶니까? 지고 당하는 것이 절대 손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손해가 아닐 뿐만 아니라 지고 당하는 억울한 일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라 그렇습니다. 할 말있습니까? 여기가 이제 신자가 걷는 정당한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식물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이 세상적인 조건이 아무리 처절해지고 각박해져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일들은 내가 저들만 못해서 당하는 일들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시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일과 당하는 일들은 그것이 나에게 유익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시키는 일이고, 세상의 불법자들이 저렇게 나서는 일들은 저들이 잘나서 나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저들을 나서게 놔 두는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입니다. 즉 이 세상은 하나님이 외면한 가운데 각각 힘센 사람이 아우성쳐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 보고 있고 하나님이 허락한 그 길로밖에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면서 점수 메기고 있습니다.그렇다면 걱정이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사도행전 6장의 정당한 답입니다. 스데반에게 허락했던 권능을 행하는 일, 병자를 낫게 하는 일, 민간에 나타낸 그 많은 표적과 기사들로 그가 이 세상에 불법한 자들을 짓누르고 웃사람이 되거나 그가 정당하다는 것이 증명되거나 그를 향하여 던진 돌들을 째려봤더니 그들이 다 녹아 없어졌다든가 하는 것으로는 안 가고 그 많은 기적이 쓸데없는 것으로 사용되고 왜 죽음으로 그가 끝을 맺어야 되느냐?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는 그가 죽은 것이 하나님이 모르고 있는 틈에 세상이 와서 그를 삼켜 버린 사건이 아니라 그가 죽어가는 것을 하나님이 보고 있고 하나님이 인정하고 있고 하나님이 요구하고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가는 길이 힘이 없고 저들이 힘이 세기 때문에 졌습니다.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세상의 힘 가진 자가 하나님 밑에 있는 우리를 잡아다가 돌로 쳐죽인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죽음을 지켜보고 허락한 길이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아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간섭이 중간중간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적을 행했다든가 권능을 행했다는 것이 이 사람의 삶과 죽음을 내가 보고 인정하고 결재했노라는 뜻이란 말입니다. 그에게 허락한 기적들로 그가 당할 아픔과 처절함과 죽음을 면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죽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마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가 오늘 있었던 것같이 스데반의 죽음 때문에 오늘 우리가 또 여기 있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무슨 증인 노릇을 시키느냐, 십자가의 도를 지키며 그리스도 예수의 걸은 길을 뒤쫓는 인생으로 믿는 자들을 요구하시는 것이 사도행전이 기록하고 싶은 내용입니다.
주를 의지했더니 몰랐던 외국어를 한다. 주를 의지했더니 기도만 하면 하루 세끼 밥이 천정에서 떨어진다가 아니라 병든 자에게 손을 얹었더니 누구나 벌떡벌떡 일어나더라가 아니라 나의 필요한 것을 기독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공급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영원한 나라와 영생에 관한 것으로 그 밑걸음이 되는 한 알의 씨앗으로 쓰고 계시다는 것으로 스데반의 생애가 기록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의미하게 죽고 도태돼서 없어지고 생존경쟁에서 낙후하는 것으로 죽는 일은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슨 복으로도, 뱀으로도, 무슨 방법으로도 우리를 막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십니다. 한 알의 썩는 밀알을 만들기 위하여 십자가의 도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우리를 죽이십니다. 그것은 의미있는 길이요 우리에게 가장 복된 길이요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명입니다. 그것이 스데반의 생애고 오늘 사도행전 6장에서 보는 기록의 가장 중요한 원리입니다.
오늘날 스데반은 여기 저기 있습니다. 여러분도 스데반이고 저도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의 기록은 결국 죽으므로 사실 기적이라는 것이 무의미합니다. 기적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얼굴이 천사같이 빛난 것도 중요하지 않으며 그가 죽으면서 하늘 문이 열리고 예수님께서 보좌 우편에 서 계시는 것을 보는 것도 사실은 무의미합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스데반은 죽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입니다. 그 나머지는 그의 죽음이 무의미하지 않고 헛되지 않고 세상에 져서 그냥 도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 기적 없이 스데반같이 죽는 일만 남는 것입니다. 나머지 기적은 무의미합니다. 기적을 이루는 것은 그것 자체로는 일이 아닙니다. 죽는 것이 일이므로 그것만이 사명입니다. 스데반은 최초의 인물이고 우리에게 남겨둬야 할 증인이므로 그에게는 기적이 있었고 천사같이 빛나는 것이 필요했고 죽으면서 하늘 문이 열릴 필요가 있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린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을 아는 자입니다.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말 없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말 없이 묻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면서 제일 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묻히는 것 아닙니까? 내가 누군지 드러나지 않고 한 번도 각광을 받지 못하고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게 그냥 흐지부지 되는 것같이 못 참을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스데반 때문에 사도 바울이라는 인물이 등장을 합니다. 스데반 때문에 사도행전은 사실 빛이 납니다. 사도행전을 가장 빛낸 사람이 누구냐? 그러면 사실 스데반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같이 사실 사도행전에서는 스데반이 그 뒤를 이은 가장 멋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진 사람으로 그리스도를 뒤쫓는 증인으로 우뚝 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모습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우리가 놓칠까봐 스데반은 많이 치장됩니다. 이제 우리가 그것을 다 봤으면 이것을 확인해야 됩니다. 여러분 파묻혀 계십니까? 다른 이들이 여러분이라는 존재를 따로 구분해서 기억 못하십니까? 아주 스데반다운 것입니다. 여러분, 남들이 알아주십니까? 여러분 “데반” 정도 됩니다. “스”는 없어지고 “데반”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인생인가를 여러분은 아셔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한 순간 한 사건도 우리를 외면하고 계신 적이 없고 내가 가는 길도 그의 인도하심과 원하심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의 죽음은 소중한 것이고 나의 살아있음도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만 하늘나라의 비밀을 세상에 펼치십니다. 스데반 좋아하지 마시고 여러분을 부르시고 여러분 인생을 복되게 하시고 여러분을 통하여 비밀과 생명을 펼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그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하는 자리로 돌아오십시오.
모든 기도와 기적을 도입해서 먹고 마시고 사는 것을 자꾸 요구하지 말고 하나님이 이 온천하를 지으신 그 능력보다도 더 큰 능력으로 지키시고 나라는 존재를 귀히 여기시고 내 인생과 나의 존재와 나의 발걸음과 눈길과 입술을 통하여 그 비밀을 펼치신다는 사실로 인하여 감사하십시오.
스데반 같은 것 좋아하지 마십시오. 천국 가면 우리가 스데반보다 훨씬 낫습니다. 물론 가 봐야 알지만 하여튼 격려용으로는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대 스데반이나 사도 바울보다 뒤쳐진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때 스데반을 일으키고 바울을 일으키다가 기운이 다 빠져서 이제는 마술과 요술을 시행할 힘이 없어진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궁무진한 그의 지혜와 능력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엘리야를 부르시고 다니엘을 부르시고 그렇게 스데반을 부르신 것 같이 오늘날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그렇게 부르시고 그때 힘있게 외치신 그의 은혜와 긍휼의 복음을 우리를 통하여 외치시고 그때 나타내신 위엄과 사랑과 존귀와 영광을 지금도 우리를 통하여 나타내시를 기뻐하십니다. 문제가 있다면 우리들이 세상 사는 데 너무 미쳐서 우리가 주를 외면하고 있을 뿐입니다.
주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과 주를 위하여 쓰임받는 일보다 행복하고 편안하게 사는 일에 너무 몰입되어 있어서 원망밖에 모르는 응석받이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셔야 됩니다.
이제 거기서 돌이켜 나오십시오. 스데반같이 서십시오. 스데반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스데반 이상으로 부름을 받았으니 신자의 승리와 영광과 존귀를 여러분이 외면하지 마십시오.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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