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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행7:30-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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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박영선 목사 |
| 참고 : | 사도행전 044 /1989.02.05 |
“사십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홓해와 광야에서 사십년간 기상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모세라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사도행전 7 : 30 - 38
우리가 처음 스데반의 설교를 살펴본 바와같이 스데반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사역을 거부하고 있는 유대인들 앞에서 기독교 신앙 그 요체를 저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는 셈입니다. 특별히 기독교 신앙이 그 뿌리로 갖고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하나님께서 간섭하셨던 구약 전체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갖고 있는 시각, 신앙에 대하여 신랄한 공격을 행함으로써 그것이 어떻게 십자가와 연결되는가를 설명하는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 갖고 있는 저들의 선민사상, 저들의 우월감, 배타성에 대하여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그것을 저들의 선민사상의 첫째로 가지고 있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고 할례를 받고 있다는 저들의 민족관, 민족주의에 대해서 우리가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서 공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보려고 하는 것은 저들이 저들의 선민사상의 또 하나의 근거로 주장하고 있는 율법에 관한 스데반의 공격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중 모세에 관한 얘기가 사실 18-43절까지 등장을 합니다. 44절 이하는 성전에 관한 얘기가 나오고 긴 설명 속에 모세가 한 일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주제가 아니고 모세 자신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를 초점으로 해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주의깊게 봐 주시기 바랍니다.
35절부터 보십시다.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엣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행7:35-38)
모세가 그랬다, 모세가 그랬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그 사람을 너희가 거부했다. 이것 때문에 등장합니다. 모세가 무엇을 했느냐가 초점이 아니고 너희가 잘 아는 바와같이 너희가 그렇게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너희들의 과거 역사의 영광된 부분 중 대표적인 것은 이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누구냐 너희가 거부했던 사람이다. 이것이 초점입니다. 왜 이런 식으로 스데반이 설교를 진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율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모세가 등장하고 있는 것은 율법의 대표적 상징 인물로서 등장하고 있고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거부했다는 것이 결국 율법을 거부했다는 것으로 나중에 일치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세라는 인물을 등장시킨 스데반의 설교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하여 율법을 먼저 추적해야 됩니다. 율법이라고 하면 율법과 복음 이렇게 대치되는 단어로 대부분 알고 계실 것이고 또 율법의 집약된 내용으로 십계명을 쉽게 떠올리실 것입니다. 율법을 왜 주었느냐 하는 문제는 그렇게 신자들 사이에서도 정확한 개념을 알고 있는 이가 많지 않습니다. 율법의 의미가 뭐고 주신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가장 크게 유대인들과 지금 우리 신약시대 사람들 이것은 대칭되는 그리고 반대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유대인들과 지금 우리 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분명히 대조되고 대치되는 감이 있습니다. 저들이 알고 있는 율법은 구원의 방법이고 조건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알고 있는 율법은 구원의 조건도 아니며 방법도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3장으로 가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한 편지를 통하여 이 문제를 정확히 알기로 하십시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갈3:1-5 )
갈라디아 교회는 사도 바울로 말미암아 복음을 전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율법주의로 빠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믿는 것으로가 아니라 율법도 준행해야 된다는 구원의 조건에 율법주의가 스며들어와서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게 됩니다. 그러면서 저들에게 율법이라는 것이 어떻게 구원의 조건이 아니냐 하는 것을 아주 쉽게 이렇게 질문함으로써 증명해 냅니다.
너희가 성령을 왜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됐기 때문에 받은 것 아니다! 신자니까 성령을 받은 것 아니다! 언제 받았느냐? 율법을 지켜서 받았느냐? 예수 믿은 것만으로 받았느냐? 아주 쉬운 질문 아닙니까. 율법을 행해서 완전해지자 ‘합격!’ 그리고 성령이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자 성령이 오시지 않더냐.
회개했다는 것은 잘못했다는 것이지 잘못한 것의 값을 치렀다는 뜻은 아닙니다. 회개는 내가그것을 잘못했습니다 하는 것이지 잘못해서 내가 잘못한 만큼 팔을 자르거나 목을 자르겟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하는 것이지 잘못한 것에 대해서 어느만큼 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자 성령이 있습니다. 그 구원이 율법이더냐? 믿음 아니더냐 너무나 쉽고 분명한 답이 아니겠습니까.
너희가 구원 얻은 것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고 분명히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써 말미암지 않았느냐. 이것이 현실적이고 체험적인 차원에서의 신자들에 대한 아주 간단 명료한 사도 바울의 지적입니다. 율법은 분명히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구원의 조건은 예수를 믿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역사적 사건으로도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6절 이하에서 증명합니다. 구원을 언제 약속했느냐 그러면 아브라함 때 약속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밖에 데리고 나가서 하늘의 별을 보라. 내가 네 자손을 이 별과같이 하고 바다의 모래같이 많게 하겠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저를 믿으매 하나님이 이를 저의 의로 여기셨다’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첫 번째 실례입니다. 아브라함이 분명히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고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경 어느 곳에서나 아브라함은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오죽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록하는 신약의 첫 절, 마태복음 1 : 1에서도 아브라함이라는 단어로 시작을 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사도 바울이 덧붙이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언제 왔느냐? 아브라함에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약속, 뒤에 자그만치 430년 후에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럼 구원이 율법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면 율법이 먼저 주어지고 아브라함이 태어났어야 맞는데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고 첫 번째 구원을 얻는 그 방법을 믿음으로 해 놓고서 율법은 430년 후에 줬다는 것입니다. 그럼 아브라함은 구원을 얻은 것입니까, 못 얻은 것입니까?
율법주의로 따지자면 구원을 얻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이것이 사도 바울의 논증입니다. 그럼 우리에게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그럼 율법은 도대체 왜 주신 것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인 십자가 사건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라면, 다만 예수를 우리가 믿어 구원을 얻는 문제라면 율법은 왜 주신 것이냐? 로마서 7장을 보시면 율법을 주신 이유가 이렇게 등장을 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엇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롬 7 : 7 - 13)
율법이란 죄로 죄 되게 하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법이 없으면 죄가 죽었다는 말은 법이 있어야 범법해서 죄가 죄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문제가 많습니다. 누가 죄를 지었는데 거기에 대한 법이 없으면 그 사람을 기소 못합니다. 그것이 잘못한 것이지만 거기에 그 잘못을 하면 어떻게 한다는 기준이 없으면 죄이지만 죄라고 책을 못 잡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기준을 줍니다. 일종의 도량형기를 준 것입니다. 그 자나, 이 됫박이나 저울을 준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지금 저울에 달아서 기준 미만이고 자로 재서 기준 이하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이기 위해서 율법을 줬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기준에 미흡하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3절에 있는 얘기입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 들통이 났습니다. 이것은 시험 보기 전에는 공부 잘하는 사람하고 못하는 사람하고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누가 공부 잘해 보이냐 하면 밤낮 손들고 떠드는 사람이 잘하는 것 같습니다. 시험을 보면 그 사람의 실력이 폭로됩니다. 밤낮 손들고 떠들던 놈은 알고 보니까 지 이름 자밖에 못 쓰고 저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던 조그만 학생이 사실은 꽉 찬 답안지를 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우리의 영어 실력이 어디서 드러납니까. 갑자기 길을 가다가 외국사람이 길을 막고 말을 걸었을 때 드러납니다. 없는 데서는 잘하는데,우리끼리 있을 때 영어가 되는 것은 영어가 아니라 유식한 척하는 콩글리쉬입니다. 영어를 쓰는 사람을 만날 때 영어가 튀어나오지 않으니까 우리는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로 율법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이런 질문을 해야 됩니다. 13절에 의하면 율법을 선한 것이라고 합니다. 14절에도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합니다. 12절에도 그 결론이 더 분명하게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율법이 선한데 왜 우리를 죽게 만들었습니까? 율법이 선하고 의로운 것이고 신령한 것이라면 어찌하여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 모두를 자폭하게 하고 자멸하게 하며 숨고 도망하게 만들었습니까?
로마서 3장을 보면 그 답이 나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 : 19, 20)
19절 말씀이 우리가 로마서 7장에서 본 내용을 한 절로 함축한 것입니다. 율법이 있으므로 해서 모든 사람이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분명하게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자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마치 막막한 광야에다 놓고 혼자서 차 몰고 가라 하면 그가 8자로 차를 몰고 가든 뒤로 가든 옆으로 가든 굴러가든 그건 도로교통법 위반에 걸릴 것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차선이 없으니 일단 신호등도 없고 중앙선이 없으므로 무슨 짓을 하든 뭘로 잘못했다고 그러겠습니까? 차를 똑바로 몰지 못하고 비틀비틀 몰고 굴러가면 분명히 잘못하는 것이지만 거기에 대한 어떤 기준이 설정되어 있지 않으면 본인이 나는 내가 굴러가고 싶어서 굴러서 갔다 하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 법에 합격한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21절에 등장합니다. 우리 번역에는 빠져 있습니다만 본문에는 ‘그러나’라는 말로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정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롬 3 : 21 - 26)
율법으로는 분명히 구원 얻지도 못하고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법으로 주시지도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만 구원 얻게 했다 그럽니다. 그를 믿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본 로마서 3장에서의 재미는 이것입니다. 그 율법으로 우리가 모두 심판 아래 있고 벌받아 마땅하다라는 얘기와 십자가의 구원 얘기가 왜 둘이 붙어 나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조건으로 제시한 것이라면 여기 합격하지 못했기에 너희를 다 죽였다 그래야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율법과 이 십자가, 복음은 둘이 그렇게 상반된 성격을 가지는 것 같으면서도 언제나 둘이 붙어 다니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답이 이제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옵니다.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ㅇ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갈 3 : 19 - 22)
자, 이게 무슨 말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율법 안에 가둬 둠으로 예수를 믿는 구원을 주려 함이라고 합니다.이 상반되고 방향이 서로 대치 되어 보이는데 어떻게 엮어져 나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23절에 그 답이 나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 3 : 23, 24)
율법을 준 가장 큰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자인케 하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 입니다라고 고백함으로써 그럼 너 형벌을 달게 받아라 하고 끌고 가는게 아니라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피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로 오게 하려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게 하려고, 주께서 베푸시는 은혜아래 자복하게 하려고 율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부정적인 의미로 보자면 우리를 심판하는 것이지 우리가 죄인인 것을 고발하고 죄인인 것을 변명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나 적극적인 의미로 그렇게 부정적인 그의 임무를 하는 이유는 그러므로 너 혼자 네 문제를 처리하려고 하지 말고 은혜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 앞으로 가라는 것이 율법의 적극적인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라 합니다. 이 몽학 선생이라는 말은 옛날 잘사는 집에서 애를 학교 보낼 때 학교까지 탈없이 가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전차길 건너고 지하도 건너고 할 떄 길 잃어버리지 않고 차에 치지 않고 또 중간에 전자오락실로 도망가지 않게 학교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는 사람이 몽학 선생입니다. 그 사람 자신이 선생은 아닙니다.
율법은 자체가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거나 구원을 얻게 하는 방법을 그 안에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 때문에 우리 모두는 스스로가 자만하면서 살 수도 없고 하나님을 외면하며 살지 않고 하나님께 항복할 수밖에 없는 인도함을 받게 됐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의 구원이, 그의 예수 믿음이 회개와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경험하시지 않습니까. 회개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율법이 하는 일입니다. 넌 죄인이다. 넌 죽어 마땅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셨다. 사랑은 분명히 우리가 죄인인 것을 인정한 다음에서부터 옵니다. 복도 그렇습니다.
복이라는 것은 언제까지나 우리가 지옥 갈 자였는데, 영벌을 받을 자였는데 그렇지 않고 이제 영원히 복락을 누리게 됐다는 것으로서 복입니다.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아래 있었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됐다는 것에 복이 있습니다. 26, 2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래서 이제 이 문제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자, 유대인은 지금 무엇을 오해하고 있습니까? 저들이 가진 율법은 왜 저들을 십자가로 인도하지 못했는냐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공격은 너희가 율법을 가졌느냐 너희가 모세를 지도자로 인정하느냐 그렇다면 그 율법이, 그 몽학 선생이 너희를 왜 그리스도께 가지 못하게 하고 너희도 안 가고 남도 못 가게 막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데반의 지적입니다.
율법도 너희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고 이방인에게는 양심이 저들을 정죄하여 하나님 앞으로 갈 수밖에 없게 했다. 그래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원을 얻는 방법,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은 율법이라는 방법도 아니요 양심이라는 방법도 아니요 도덕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은혜의 구원밖에 없었다. 이것을 붙들지 않는 한 율법이니 양심이니 도덕이니 다 무의미하다.너희가 가진 율법은 왜 십자가로 가지 못했느냐? 그것이 스데반의 설교의 핵심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보았던 로마서 3장에도 다시 이렇게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 롬 3 : 27 - 30 )
자랑할 데가 없다는 것은 누가 누구보다 낫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구는 다른 방법, 이쪽은 특별한 방법, 이쪽은 저급한 방법으로 구원을 얻고 그 구원에도 등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은 자기가 우월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율법 때문입니다. 율법이 저들을 십자가로 인도하지 않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에서 차별이 없는 곳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중요한 문구입니다. 차별이 없다. 지금 여기서는 자랑할 데가 어디 있느냐? 할례자든 무할례자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원은 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는다.
유대인들아 너희가 가지고 있는 율법이 너희를 십자가로 인도하지 않았다면 너희를 회개케 하지 않는다면 그 율법은 헛된 것이니라. 아니 너희가 율법을 모르고 있는 것이니라.
본문으로 가보십시다. 사도행전 7장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맨 처음 서두에 말씀드린 것 같은 그 초점들을 우리가 살펴본 율법에 내용을 놓고서 봅시다. “저희 말이 누가 너희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행 7 : 35).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려고 모세를 보내고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거절했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금 스데반이 너희가 모세를 거절했다는 것이 지금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는 율법을 거부했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을 보면 알지 않느냐 이것입니다. 모세가 저들을 데리고 홍해를 건넜습니다. 저희는 아니라고 우겼습니다.
유대인들아 너희는 아니라고 그랬다. 모세가 너희 앞에 서는 것을 너희가 거부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세웠다. 뭘로 확증됐느냐? 저가 실제로 너희 민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지 않았느냐. 그렇죠. 너희는 지금도 똑같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방법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보낸 분이 아니라고 그러는구나.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시고 사망에서 부활의 자리로 우리를 옮기셨느니라. 우리는 오늘도 똑같이 거부하고 있다. 무엇 때문이냐? 너희가 자랑하는 율법 때문이다. 너희는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요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니라.
이 설교를 듣고 저들은 화가 났습니다. 저들의 뿌리가 흔들리고 저들의 자부심과 긍지의 근거가 무너지고 이방인들이 저들과 동등하다는 얘기에 너무 화가 나서 로마의 속국으로 있는 때의 이스라엘은 사형 집행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죽일 때도 빌라도 총독에게 재가를 받아 로마 병정들에 의하여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만 이때는 너무나 화가 나서 스데반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였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이제 스데반의 설교를 우리에게 돌려야 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과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적인 지식, 신앙적인 내용들이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유대인입니다. 내가 괜찮아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나아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덜 된 사람은 보통 신자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대인들하고 똑같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처럼 덜 된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의 인사가 샬롬입니다. 평안을 비는 것입니다. 그런데 샬롬이라고 했는데 상대방이 나중에 알고 보니 유대인이 아닙니다. 유대인인 줄 알고 샬롬이라고 했는데 아니면 돈 주고 무릅니다.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저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데 있어서도 안식일에는 얼마 이상은 못 간다 어느 일만큼은 못한다라는 기준이 있습니다. 어느 이상은 일이 됩니다. 그 일 중에 돈도 얼마 이상 갖고 있으면 그것도 일로 칩니다. 제가 그 정확한 액수는 모르지만 우리식으로 하면 만원 이상 갖고 있으면 그것이 일이 되는 것입니다.
뉴욕에서 만난 유대인 하나가 저와 같이 택시를 타고 가다가 안식일 시간이 된 것입니다. 저녁부터입니다. 차를 내리자고 하고는 주머니에 있는 돈을 막 꺼내더니 운전 기사에게 다 줬습니다. 택시 운전사가 왜 그러냐 했더니 자기는 유대인이고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데 지금 안식일에 일한 쪽에 드는 만큼의 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액수를 전부 운전 기사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럴 바에는 날 주지 왜 운전 기사를 주냐 그랬더니 ‘너는 그래도 내 친구 아니냐 네가 비록 유대교인은 아니지만 어떻게 너를 죄짓게 할 수 있느냐? 저 사람이야 내가 모르니까 주지만’ 이라고 합니다.
다른 모든 일에서는 순 엉터리고 이기적이고 말도 안되면서 그것을 지키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하는 얘기 중에서 제일 꼴보기 싫은 것이 그래도 하나님은 아실거야. 혼자서 별 더러운 짓 다 해놓고 하나님은 내 마음을 아실거야. 이것은 우리가 제일 잘못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는 것을 늘 놓치 않아야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로 가야 됩니다. 율법을 통과하지 않고 내가 십자가로 단숨에 가면 회개가 없고 겸손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감격이 없고 만족이 없습니다. 꼭 이렇게 요구하게 됩니다. 하나님 믿어 드렸으니까 당신도 나한테 줘야 될 것 아닙니까? 이 세상 사람들 다 안 믿는 예수 믿어 드렸는데 당신은 왜 가만히 계십니까?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집안에 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떳떳하게 대듭니다. 아니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제는 겁이 없고 회개와 감격이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바쁜 시간에도 여기까지 찾아오신 여러분의 마음속 깊이 있는 생명과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자꾸 낮아지시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을 정죄하시고 그리하여 십자가밖ㅇ에는 없노라 하는 고백으로 자꾸가서 그리스도만 붙잡고 여러분의 신앙 인격과 남은 생이 주 안에서 복되기 위하여 더 많이 엎드리는 일로 여러분을 채찍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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