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행7:44-50 |
---|---|
설교자 : | 박영선 목사 |
참고 : | 사도행전 045 / 1989.02.12 |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난니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행 7:44-50)
우리는 몇 주에 걸쳐서 스데반이 행한 설교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졌던 삐뚤어진 신앙관을 스데반이 어떻게 무엇을 가지고 공격하며 시정하려고 하는가 하는 점들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데 같은 구약을 믿으며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왜 기독교와 유대교로 지금 나누어 있고 이 당시에도 한 하나님을 섬기며 한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쪽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고 한쪽은 박해하는 입장에 섰는가 하는 것들이 우리가 이 설교의 내용을 추적하면서 살펴보는 중요한 핵심이 되는 내용들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졌던 선민사상과 그것으로 인한 영적교만, 저들의 편견과 고집이 성경이 약속하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을 오해하게 만들었고 그것으로 저들이 자기네가 선 줄로 생각하고 남들을 심판하는 자리에 이르게 한 것을 지금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서 우리가 해부해 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한 선민, 즉 이스라엘 민족이 되었다는 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저들의 오해와 성경이 약속하는 것과의 차이를 보았고 또한 저들이 하나님 앞으로 받은 바 율법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저들이 주장하는 것과 스데반이 설교를 통하여 반박된 그 내용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저들이 가진 그러한 선민사상과 유대인들의 고집, 오해의 근거가 되었던 성전에 관한 얘기가 44 - 50 절까지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있어서 저들이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결국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뜻입니다. 그 다음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여기 있는 바와같이 성전을 저희가 짓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민족이라는 것은 저들이 갖는 신앙의 커다란 자부심이고 다른 모든 이방 민족과 저들을 구별하는 중요한 기준이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자기네 편을 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 확고한 신앙에서 나오는 저들이 갖는 증거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스데반은 그런 부분들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대해서 갖고 있는 저들의 오해된 신념을 성경 여기저기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만 대표적인 것으로 예레미야 7장에 있는 말씀을 먼저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땅에니라.” ( 렘 7 : 1 - 7 )
하나님꼐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성전 문 앞에 서서 일종의 경고의 말씀을 전하게 합니다. 경고의 말씀은 4절에 있는 것같이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입니다.
이 말의 뜻하는 바는 유대인들에게는 너무 쉬운 것입니다. 바로 예레미야가 이 성전에 서서 이 말씀을, 이 경고의 말씀을 하기 약 1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말을 하게 된 커다란 사건이 있었습니다.
앗수르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한 적이 있는데 유다왕 히스기야 때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군대장관 랍사게를 앞세워서 유대 도읍 예루살렘을 치게 합니다. 저들이 예루살렘을 완전히 포위해서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유대 백성이 두 가지밖에 나중에 선택할 것이 없었습니다. 항복을 하든가 아니면 굶어 죽든가 둘 중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포위상태가 얼마나 지독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서 그 성이 살아 남을 것과 앗수르 군대가 얘루살렘 성을 향하여 공격하지 못하고 하나님 손에 의하여 퇴패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앗수르 군대들이 자기네끼리 어떤 이유에서인지 혼란을 빚고 스스로 후퇴해서 물러가고 예루살렘 성이 기적적으로 구출을 받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한 뿌리 깊은 전통으로 남는 생각이 이것이 된 것입니다. 아! 이곳엔 여호와의 전이 있기 때문에 적군이 침범하지 못하는구나.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인데 누가 감히 와서 방해를 놓겠느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축소해서 얘기하면 그것이 설전이고 조금 확대하면 예루살렘 성이고 더 확대하면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요 하나님이 인정한 백성들이 사는 곳이다. 어찌 이방인들이 들어오랴. 이런 신앙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행전 7장에 나타난 이 스데반의 설교에도 실제로 이 문제가 이런 고소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6장을 봅시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사람들을 가르쳐 말 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 행 6 : 10 - 13 )
거룩한 곳이 어디입니까? 성전입니다. 조금 확대하면 예루살렘, 크게 확대하면 이스라엘 백성 전체입니다. 저들의 특권과 저들의 선택된 지위를 스데반이 공격하더라는 것입니다. 앗수르도 쳐들어왔다가 여기가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손 한번 대보지 못하고 도망간 성이며, 이 민족이며, 이 나라요, 이 성전인데 네가 감히 어디다 대고 공격을 하며 이방인과 우리가 동등하다는 등 다 같이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등 그 문지방을 헐어버렸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대답이 전부 이렇게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7장을 다시 보십시오. 2절입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 어디에 있을 때 하나님이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냐면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입니다. 메소포타미아라는 뜻은 제가 알기로 강 사이라는 뜻입니다. 유프라데스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세계사를 볼 때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근거지입니다. 바벨론과 페르시아, 앗시리아는 고대역사 속에서는 이스라엘에게 가장 두려운 적국입니다. 이스라엘 쪽에서 볼 때는 다른 이방 민족이 다 개, 돼지이지만 특별히 그쪽 동네는 개, 돼지 중에서도 훨씬 악질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 쪽에서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계십니다. 그래서 이방 민족이 쳐들어와도 이 민족에게 손을 못 댄 것이었는데 저들이 알기로는 여기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답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이 땅이 거룩하고, 이 전이 거룩하고 이렇게 지역적으로 민족적으로 구별된 하나님이 아니다는 얘기를 스데반이 사실은 사도행전 7장 전체에서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했다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게 자랑하는 그의 조상 아브라함을 어디서 만나주셨느냐 하면 메소포타미아에 와서 만나시는 것입니다. 심판자로서가 아니라 영광의 하나님으로서 만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들먹이는 스데반 설교에서 사실상 최고의 핵심입니다. 뒤에 와서도 그렇습니다.
33절을 보시면 모세 얘기도 이런 시각에서 쓰는 것입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여기는 시내산 앞입니다. 거기는 미디안 광야입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거룩한 곳이라고 인정하는 저들의 나라, 이스라엘의 국토가 아닌 곳입니다. 저들이 볼 때 거기는 이방인의 땅이고 버려진 땅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간섭 밖에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꼐서 모세를 만나 뭐라고 하셨냐 하면 네 발의 신을 벗으라 하십니다. 그렇습니까?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당장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자부심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이 예수 믿는 자들을 뭐라고 그랬습니까? 스데반을 지금 고소하면서 ‘저들이 이 거룩한 곳을 모독하는 말을 했습니다. 이 성전, 이 예루살렘, 이 이스라엘을 다른 것과 구별된 하나님의 유일한 사랑과 은혜와 긍휼과 약속의 대상들을 다른 곳과 동등하게 취급을 했습니다.’
이것을 저들은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바로 그 얘기입니다. 성전 이야기만 해도 뭐라고 얘기를 하는지 44절을 보십시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만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 행 7 : 44 )
성전은 원래 그 앞에 있었던 모형을 본떠 만들었습니다. 장막이 그렇습니다. 성막이 어디 있었느냐 하면 광야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니고 가나안 땅이 아니고 광야에서 이미 그 성막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명하셨습니다. 광야에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습니다. 광야다 가나안이다 하는 구별이 하나님에게는 없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라는 거짓말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성전을 갖고 있다. 우리는 유대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다. 이것이 저들의 신앙의 최고 핵심이고 내용이고 전부더란 말입니다.
저들이 갖는 이 사상을 조금 더 다른 부분으로 확대해서 보면 사무엘상 4장을 보십시다.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느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쳤더니 이스라엘을 대하여 항오를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전장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백성이 진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 있었더라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히브리 진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찜이뇨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가로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가로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들을 친 신들이니라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어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같이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육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었으며 하나님의 궤는 빼았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스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삼상 4 : 1- 11)
여기 하나의 전형이 나옵니다. 성전에 대해서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다,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다라고 외치는 저들의 사고방식의 전형이 된 것은 지금 블레셋과 싸우고 있는데 이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아주 불구 대천지 원수입니다.
전쟁이 한두 번 있는 것이 아닌 늘 싸우는 대상이었는데 싸우다가 져서 사천 명이 죽었습니다. 어떻게 했느냐 하면 여호와의 궤를 가져오자 모세의 율법이 들어있는 그 언약궤를 가져다가 그것을 앞장 세워서 우리가 싸우자 합니다. 저들이 무엇을 떠올리고 있느냐 하면 이것의 최고의 원형,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사건인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향하여 들어갈 때 저들이 광야에서 가나안을 들어가기 위하여 요단강을 건널 때 언약궤를 앞세워 요단강을 가르고 지나갑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입국하여 첫 번째 성, 여리고 성을 만났습니다. 여리고 성이란 역사상 최고로 든든한 성의 이름입니다. 그 성을 어떻게 무너뜨렸습니까? 언약궤를 앞세워서 일곱 바퀴 돌고 끝에 나팔을 불며 큰 소리를 지르자 성이 무너졌습니다.그래서 지금도 그러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가져다 싸우자, 언약궤가 들어오자 막 외쳤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때같이 적군이 무너질 것이라고 상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되고 그 전날 언약궤 없이 싸웠을 때 사천 명만 죽었는데 언약궤 놓고 싸워서 삼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건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한 의미로서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이 시간까지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갖고 있다던가 성전을 짓고 제사를 지낸다든가 하는 것이 어떤 주술적 마법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갖는 바의 의미, 말하자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듯이 성전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변화시켜야 되는 일들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예레미야 7장을 보십시다. 금방 하나님의 경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제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렘 7 : 4 - 7)
여호와의 전을 갖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기쁘심을 따라 사람이 변화되고 충성스러워지고 진심과 모든 마음을 합쳐서 하나님께만 한 마음을 바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전을 소유하는 이유이지 여호와의 전을 소유했으니까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예언하신 것과 같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지는 이유가 됩니다. 이것은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사상입니다. 이사야 58장에는 이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되는 대표적인 예가 등장을 합니다.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ㅍ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사 58 : 1, 2). 여기까지 잘 보셔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하나님을 사모합니다.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심은 어쩜이니까....” (사 58 : 2, 3)
딴사람 이야기같이 보지 마싶시오. 지금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 사 58 : 2). 하나님을 더 잘 섬기겠다고 하고 하나님의 뜻을 더 사모한다고 그러면서 와서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여기까지가 여러분 생각하고 똑같지 않습니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가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음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나의 기버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 58 : 3- 7)
자, 이것은 그대로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우리도 유대인과 똑같은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제일 좋은 신앙의, 신앙상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은 제가 알기로는 십일조 같습니다. 십일조와 기도. 이것이 한국교회의 최고의 신앙적인 기준이지 않는가 싶습니다. 그래서 십일조 안하면 그렇게 마음에 걸립니다. 헌금 떼어 먹으면 아무래도 불길합니다. 그것 내지 말지 몇 만원 떼고서 이렇게 불안하게 살아서 뭐하겠느냐, 자수하여 광명 찾자 그리고는 헌금들을 잘합니다. 그 다음 조금 열심을 낼 때에는 기도입니다. 가능하면 철야기도, 금식기도 등 괴로움을 자초합니다. 금욕적으로 나가고 그것이 우리가 갖는 한국교회들이 즐겨 갖는 두 가지 신앙의 아주 굵은 기준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 있는 그대로입니다.
뭘 못하냐 하면 그렇게 싸웁니다. 한국교회 교인들같이 잘 싸울까요. 그리고 또 그렇게 얄밉게 싸울까요. 말 잘하는 것, 세상에서 말 잘하는 것은 공산당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 아닙니까? 하나도 손해 안 보면서 사람 아주 죽이지 않습니까? 성을 내서 싸우는 것이 아니고 거룩하게 사람을 죽입니다. 껍질을 벗겨서 죽입니다. 금식이라는 것은 내가 얼마나 많이 굶었느냐도 아니고 얼마나 많이 나를 괴롭게 했느냐 금욕적이었느냐가 아니라 주를 닮아가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지금 경고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너희가 이곳이 여호와의 전인 줄 아느냐? 그럼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도 알지 않겠느냐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뭘 원하더냐?
여기 있는 대로입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끊어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참아라. 죽어라.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라. 십자가를 지라. 죽도록 충성하라. 전부 그것입니다. 온유하고, 자비하며 오래 참으며 그런 것이지 여러분들이 요구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기도했으니까 십일조를 냈으니까 떳떳한 것입니다. 어찌 십일조를 다 낸 자와 십일조를 반만 낸 자와 같겠습니까. 같으면 안됩니다. 십일조 낸 사람하고 떼어 먹은 사람하고 하나님이 동등하게 취급을 한다면 성질 안 나겠습니까.
유대인들이 스데반에게 성질 내는 것이 그것입니다. 어찌 금식기도 한 사람하고 매일 배 터지게 먹은 사람하고 하나님 앞에 똑같이 취급을 받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억울합니다. 그때 스데반의 대답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너희를 찾았었느냐? 하나님이 너희에게 나타난 이유가 무엇이었냐? 유대인들을 향한 공격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받아야 되는 질문이고 답해야 됩니다.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답하셨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요한복음 4장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가졌던 이 쓸데없는 싸움에 대하여 주님께서 이러한 답을 하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갈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꼐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 : 20 - 24 )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신자들에게서 제일 무서운 것은 이렇게 와서 예배드리고 심리적으로 안심하고 돌아가는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는 것같이 왜 한국에서 큰 교회가 잘되시는지 아십니까. 숨을 소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왔는지 안 왔는지 누가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온 사람이 목사의 눈에 띄어서 뭘 시킬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숨었다가 가면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온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여러분이 변화하러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 마음에 있는 종교적인 어떤 불안감을 이것으로 희석시키기 위해서 온 것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라도 예배드리고 가야지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사실 큰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버릇이 되고 익숙해지고 여러분 양심이 무뎌지는 날이 옵니다. 조금씩 무뎌집니다. 매주일 가던 것이 한 달에 한 번이 되고 일년에 한 번이 되고 드디어 어느 날부터는 발을 끊게 됩니다. 하나님도 말로 하시다가 조금 강하게 하시다가 결국 여러분의 차를 낭떠러지에 굴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경험하고 오시든가 경험 전에 오시든가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렇게 하십니다. 그가 사랑하고 지명하여 부른 심령들을 놓지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의 전에 온 자들을 말만으로 예수를 믿게 놓아두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스데반의 설교에서 직면하는 바와 같이 꾸중하시고 지적하시고 변하라 명하십니다. 이 모든 말씀을 여러분이 받으시고 여러분이 응답하셔야 됩니다. 영화 보고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반응하셔야 되고 여러분이 결단하셔야 되는 일들입니다. 신자답게 변하십시오. 안하면 두렵건대 성경이 신구약 역사 전부를 통하여 증거한 것같이 하나님의 매를 맞습니다. 순종하고 따라오시면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들을 받으십니다. 그 복은 꼭 물질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고 신령한 것이고 그 복을 누리시게 되면 성경이 약속하는 바에 의하면 감옥에 들어가서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미치는 것입니다. 미치기가 싫어서 여러분은 중간에 서 있을지 모릅니다만 한 번 미쳐 보십시오. 미쳐 보지 않고는 모릅니다. 거룩하게 한 번 미쳐 보십시오.
오늘 스데반이 우리 앞에 서서 설교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보내 성전 앞에서 외치게 했고 하나님이 스데반을 보내어 우리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들으셔야 되는 설교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그 질문을 여러분에게 하시고 대답하십시오. 두려운 형벌을 받는 자리로 가지 마시고 기뻐하심과 잘했다 칭찬 받는 자리로 돌아오시고 여러분 생이 여러분 혼자서 사는 것과 하나님을 외면하고 사는 데서부터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함께 하는 삶으로 돌아와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같이 된 것을 여러분들도 부러워하시고 그의 죽음에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 보좌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보는 것처럼 여러분의 인생의 끝이 이렇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강력히 권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