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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사람들

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2189 추천 수 0 2009.06.22 16: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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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8:1-8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47/ 1989.02.26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되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사도행전 8:1-8

스데반이 슨교를 하고 8장에 이르면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있어서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모든 믿는 자들이 다 흩어졌다 하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리고 특별히 일곱집사 중 또 한 사람이었던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가서 전도한 얘기가 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기록의 가장 중요한 요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4절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4절)

다음에 빌립이 나오는 것은 그 흩어진 사람들 중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기에 등장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빌립이 흩어진 사람 중에서 가장 큰일을 했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처음 그 시작부터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사도들로부터 출발해서 스데반으로 이어지고 스데반에서 이제 흩어진 모든 사람으로 이어집니다. 물론 여기 핍박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었던 사도들이 뛰어났다는 것도 눈여겨봐야 되겠습니다만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는 사도들이 아닌 자들이 모드 복음 전파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식으로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하느냐 하면 바로 앞에 있는 스데반의 설교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등장했던 스데반의 설교는 유대주의를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공격의 가장 큰 초점은 너희가 자랑으로 여기는 것은 너희의 치장감이 아니라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로 너희를 인도하도록 의도되었던 것이다. 할례가 그렇고, 율법이 그렇고, 성전이 그렇다. 그러나 너희는 그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증명되지 않고 그것으로 너희 자신만 증명하는 방법으로 썼다. 거기에 비하여 주께서 무엇을 의도하셨는가를 안다면 자신을 죽여서까지 주님만이 증거되는 것으로 가는 것이 신앙의 올바른 태도다. 이것이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것이 스데반의 순교라 그랬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이 남들을 죽여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라면 올바른 신앙이란 자신을 죽여서라도 주님이 증거되는 것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유대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영웅이 필요합니다. 누가 어떻게 경건했는가? 흠이 없었는가 정당했는가 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이제 올바른 신앙의 차원에 들어와서 볼 때는 순교자를 요구하고 있지 영웅을 요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름 없는 순교자, 한 알의 썩는 밀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모습. 이것이 지금 사도행전이 그려내고 싶어하는 올바른 신자상이고 사도행전 기록의 일관된 흐름인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개인이나 교회적 차원에서라 할지라도 신앙의 가장 큰 병이 생명과 성령의 움직임이 사라지고 조직과 관리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교회적으로도 그렇고 신앙에 있어서의 가장 큰 병이 생명감과 성령의 주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직과 관리만 남게 되어 경직성을 띠기 시작합니다. 일종의 율법주의적 사고 방식이 생기기 시작하면 신앙은 극도로 부패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13장 말씀을 예로 들어서 그 뜻을 더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13장 말씀을 보십시다.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십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그러면 십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달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눅13:10-17)

이것이 바로 그 경직성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회당장 입장에서 볼 때는 옳고 그른 것을 지키는 것이 한 여인이 병에서 고침을 받는 것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무엇이 생명에 관한 것이고 무엇이 유익한 것이냐보다는 옳고 그른 것을 지키는 것이 자기에게 영광이 되고 치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 여인의 고생과 고난을 돌아보는 것은 없어지고 모든 문제에서 자신의 영광을 찾으려고 하는 것밖에는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유대주의적 발상이고 모든 자연인이 갖고 있는 심지어 신자라 할지라도 오해의 소지가 늘 많은 부분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일 많이 부딪치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인하여 내가 생색이 나지 않을 때 당하는 시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일, 내 구역에서 일어나는 일,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서 그 일을 통하여 내가 생색이 나지 않을 때 우리는 가장 크게 당황을 합니다. 그것에서 벗어나셔서 주님이 증거되기를 기뻐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이 발상이 성경에는, 말하자면 우리가 가장 크게 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속에 이미 깨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약에서 제일 유명한 인물 모세 같으면 이런 경우를 당하는 적도 있습니다. 민수기 11장으로 가십시다.

"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고하고 백성의 장로 칠십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여호와께서 그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그 녹명된 자 중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 두 사람이 진에 머물고 회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에게도 신이 임하였으므로 진에서 예언한지라 한 소년이 달려와서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하더이다 하매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가로되 내 주 모세여 금하소서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11:24-29)

이때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하여 굉장히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지도력에 대하여 아주 반대를 하고 항의를 합니다. 그래서 답답해 하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을 하나 주셨냐 하면 너희 이스라엘 백성 중에 유사 칠십 명을 모아 와라 칠십명의 장로를 모아오면 그들에게도 내 신을 부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내가 답답해 하는 마음, 저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알게 하는 일을 허락하겠다 합니다.

지금은 모세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남은 백성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 늘 모세가 하는 일에 반대하니까 저들 중에 지도급 되는 인사 칠십 명을 모아오면 저들에게도 내 신을 부어 주어서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여 네 편을 들어 모든 이스라엘 일반 백성들이 네 뜻을 거역하지 않는 데 도움이 되게 하겠다. 그래서 칠십 명을 불렀는데 부름받은 자 중 두 명이 안 온 것입니다. 이 두 명은 진 중에 있다가 여호와의 신이 내려 강림할 때 저들도 진 중에서 예언을 하게 됩니다. 그 소식을 듣고 그 부관으로 있던 여호수아가 이를 금하라 그럽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여호와의 신이 내리는 것은 어떤 특별한 계층, 특권층에만 주어진 어떤 우월한 증표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위계질서가 파괴되고 권위가 땅에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에서 모세를 위하여 이를 금하라 그러자 모세가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합니다. 나는 모두가 선지자 되기를 원하노라. 그러니까 모세는 전혀 이 부분에서 자기가 다른 백성들보다 뛰어나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이 부분이 바로 기독교 신자들이 가져야 되는 아주 중요한 신앙의 핵심인 셈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것과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개념은 전혀 비례하지 않습니다. 전혀 무관합니다.

사도행전은 그렇게 기록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은 스스로를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 자신이 어리석은 자라는 것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표현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도행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셈입니다. 처음의 시작은 가장 영광스럽고 비교할 수 없는 어떤 특권층의 사람들, 사도들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사도가 결코 특권층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일을 그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스데반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흩어진 자가 그 뒤를 잇는 것입니다. 흩어진 자라는 것은 여기서 보면 환난과 핍박이 오자 견디어내지 못하고 도망간 그저 범상한 사람들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빌립입니다.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하자면 빌립이 한 일 때문에 빌립을 높이지 마십시오. 그 핍박이 오자 견디지 못하고 도망간 범상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사람은 그 사람들보다도 더 못한 바울인 것입니다. 바울은 핍박을 피해서 도망간 범상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사람은 그 사람들보다도 더 못한 바울인 것입니다. 바울은 핍박을 피해서 도망간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핍박을 주도한 사람이니까 우리 편에서 보자면 우리가 만일 북한 공산당하고 전투를 한다 그러면 누가 나가서 싸우는 것이 제일 든든합니까? 젊은 청년들이 나가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젊은 청년들이 없어서 노인들이 나갔습니다. 노인들도 안돼서 애가 나갔습니다. 그래도 안돼서 여자가 나가고 여자 중에도 여자 어린애 혹은 여자 노인네가 나갔습니다. 그것이 지금 흩어진 자입니다. 그것도 없어서 누가 나갔냐 하면 북한 공산당 포로를 내보낸 셈입니다. 그럼 그 전쟁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북한 공산당과 싸우는 데 저들 중에서 잡은 포로를 싸움터에 내보냈다 그러면 저들이 싸우겠습니까?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보이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 문제를 멋지게 풀어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1:26-31)

사도바울은 친히 이 글을 기록하면서 자기가 세상에 천한 것들이고 멸시받는 것들이고 없는 것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혼동을 일으키는 것은 사도 바울이 한 업적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업적 때문에 그를 위대한 사람이라고 자꾸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의 기록 목적은 그 인간이 위대했기 때문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이 아니라 그를 하나님이 쓰셨기 때문에 위대한 업적이 남았다고 얘기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늘 없는 것들, 천한 것들, 멸시받는 사람들을 쓴다고 분명하게 못을 박아 놓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주께서 이루신 일들이 엄청남에도 불구하고 그 일들을 이루심에 있어서 이런 어리석은 자들을 즐겨 쓰시는 이유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여기가 신앙의 핵심입니다. 자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의 재능과 열심의 산물로 기독교가 유지되거나 꽃을 피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능력과 주님의 지혜로 열매 맺고 꽃 핍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주 앞에 순종을 바치는 것이지 재능을 바치는 것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신자의 신심, 신앙적인 성품이 뭐냐 그럴 때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시기와 질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 시기와 질투가 나쁘다는 도덕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시기와 질투라는 것이 있다면 너는 남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기독교를 오용하고 있다라고 성경은 공격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대접을 받는가, 내가 어떻게 남보다 나은가라는 생각이 들어오면 기독교적 신앙의 발상은 아니다라고 성경은 자꾸 꾸짖습니다. 나로 인하여 남들이 얼마나 유익을 갖는가? 나로 인하여 주님께서 얼마나 잘 나타나시는가? 이것이 성경에서 최고의 핵심되는 내용들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고린도전서 10장으로 가 보십시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하라."(고전10:23-33)

이것이 신앙입니다. 유대주의와 가장 대표적으로 대조되는 신앙의 본질입니다. 유대주의적 발상이라는 것은 내가 거룩하고 내가 정당하다는 것을 중명하기 위하여 남을 심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범법자를 골라냄으로써 내가 범법하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남을 심판하고 죽요야 내가 정당한 것이 드러납니다. 세상 사는 방법이 그렇습니다. 내가 잘 났다는 것을 남을 떨어뜨려야, 남을 낙오시켜야 내가 정당하고 내가 우수하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이와 비슷하게 시험보는 제도가 있습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자연적인 인간들의 생존경쟁법이요 심판하고 죽이는 법이라면 신앙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가 죽어서 남을 구하는 방법입니다. 율법의 최고의 핵심도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이웃으로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내 이웃을 위하여 유익이 되며 이웃을 위하여 죽을 자세가 되어 있지 않고 저들을 죽여 내가 존재하며 저들을 죽여 내가 증명이 되는 그런 자세를 갖고 있다고 느껴지면 유대주의인 줄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부러 그 자신에게나 제삼자에게나 이 일을 분명케 하기 위하여 못난 자들을 쓰시는 겁니다. 못난 자들을 썼다고 해서 주께서 하시는 일이 방해받거나 약화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하여 전세계사가 변합니다. 바울은 어디로 오고 싶어 했습니까. 아시아로 오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를 아시아로 보내시지 않고 유럽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세계사의 흐름, 문명의 흐름, 세계사의 주도권은 서구로부터 지금 서진해오고 있습니다. 이탈리아로 가고 영국으로 가고 미국으로 가고 이제 동양으로 오고 있습니다. 만일 그때 사도 바울이 동쪽으로 와서 이란과 인도 쪽에서 시작했으면 우리가 아마 백인들을 식민지로 그리고 저들을 종으로 부리고 여태껏 살다가 이제쯤 기독교가 저들에게 들어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짜신 계획입니다. 거기에 사도 바울이 부름을 받았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조그만 인물인가, 평범한 인물인가 하는 것은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전혀 방해되는 소가 아닙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쓰시고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과 여러분이 나누는 대화는 세계를 바꿔 놓을 수 있는 중요한 내용들이요, 그런 권위와 그런 약속들에 관한 것임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 사람에 있어서는 그들의 운명이 바뀌어지는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우리만이 영원과 진리와 생명을 소유하고 있고 증명할 수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 관을 씌워주거나 빛을 비춰주어서 증명해 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십자가의 방법입니다. 그 일이 감추어져 있는 것으로 인하여 여러분이 맡은 일을 소홀하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직장 가시고 이웃을 만나시고 평범한 대화를 만나는 모든 것 속에 이 세계사를 바꾸실 수 있는 분의 모든 것이 함께 감추어져 있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사도 바울을 우러러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를 쓰신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을 지키고 인도하고 함께 하고 있다는 것으로 인하여 놀라셔야 됩니다.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지금 이 세계 역사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자 된 여러분의 삶을 소중히 여기시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평범하고 조그맣게 감춰 놓으신 것을 큰 비밀로 소유하고 계셔야 됩니다. 드러나고 높임을 받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빌립과 스데반과 바울만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저들은 많은 흩어진 신자들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어떻게 놀라운 것인가? 주께서 어떻게 함께 하시는가를 여러분 생애에서 친히 누리십시오. 여기 기록된 모든 것같이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주님이 여러분을 지키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하여 새로운 힘과 용기와 기대와 믿음의 눈을 뜨고 여러분의 삶을 충성되이 하도록 긴장하시고 깨어 있으시고 기도하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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