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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종말관

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2067 추천 수 0 2009.06.24 23:53:53
.........
성경본문 : 행11:27-30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62-063 1989.06.18/06.25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붖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사도행전 11:27-30

사도행전 11:27-30에 이르는 이 본문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추적한 그런 줅리에서 벗어나 보이는 사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말씀이 어떻게 흥왕했는가?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더 많아졌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제자들과 믿는 사람들의 손을 통하여 큰 일을 이루셨는가? 어떻게 그들이 세상의 시험과 핍박을 극복하고 있었는가? 하는 기록들은 없고 느닷없이 천하가 크게 흉년들리라 하는 아가보 선지자의 예언과 그 일이 실제로 있었다 하는 그런 내용이 17-30절 사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은 가장 중요하게는 하나님이 역사와 세상의 주인이시다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고 이 세상의 주인이시고 우리 모든 인간의 주이시고 또 역사를 친히 주관하시는 역사의 주인이시다 하는 것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실제로 신앙생활을 해보면 이 말이 같는 뜻을 생각보다 적용을 잘 못하는 것이 신자들의현실입니다. 여태껏 우리가 살펴본 것과 다른 내용이 여기에 느닷없이 등장해야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런 것들 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을 전체적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사도행전에서 여러분이 기억하고 있는 사건들과 분위기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순절 성령강림 그것으로 인한 충만함, 기쁨, 방언, 앉은뱅이의 일어남,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사마리아의 회심, 구스 내시가 구원 받는 일, 여기저기 기적들이 사도행전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술를 믿어 그 수가 더했다, 말씀은 흥왕해 갔다. 모든 사람이 이 일을 보고 하나님을 찬송했다. 이런 것들이 사도행전에서 분명히 우리가 기억하는 분위기이고 사건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그것과 정반대 되는 내용들이 있었던 것도 기억하실 겁니다. 어떻게 유대인들과 제사장들이 믿는 사람들과 이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시기가 심했는가? 그래서 어떻게 그 일을 방해했는가? 저들을 붙잡아서 어떻게 감옥에 집어넣었는가? 어떻게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는가? 어떻게 예루살렘에 핍박이 생겨서 제자들을 제외한 모든 믿는 자가 흩어질 수밖에 없었는가? 유대인들이 쫓아다니면서 사도 바울을 방해했는가? 곤란스럽게 했는가?

사도행전이 무엇으로 끝납니까? 사도 바울이 잡혀서 감옥에 있는 것으로 끝납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바와 같이 말씀이 흥왕하고 기적이 일어나고 주를 믿는 사람들의 그 믿는 바 감동이 크면 클수록 세상이 변하고 약화될 것이라는, 우리가 갖기 쉬운 생각은 사도행전을 아무 곳에도, 그런 약속도 그런 사실도 기록된 곳이 없습니다. 그런 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자연스런 발상이냐 하면 여러분께서 어려운 일이 생기기만 하면 맨 처음에 기도하러 올 때 억울합니다.

하는 마음으로 뛰어옵니다. 하나님 이렇게 열심히 믿어 드렸는데 이러시깁니까?

신자들이 하는 기도의 제일 절박한 시작입니다. 그저 울며불며 고무신 거꾸로 신고 교회에 뛰어들어 와서 하는 것이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저는 속았습니다. 내 이럴 줄 알았으면 안 믿어 드리는 건데. 십일조 도로 다 내놓아요.’ 이런 태도로 뛰어들어 옵니다. 기껏 거집말 안하기로 하고 사기치지 않기로 하고 악하게 살지 않고 정직하게 살기로 시작했더니 결과가 이것입니까 하며 여러분 언제나 이것으로 투덜대지 않았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바로 이 본문을 오해하고 있는 데서부터 얼어나는 부작용들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잘 믿고 진실된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이 여러분의 삶에 환난과 고통이 없어지고 우는 일이 없어진다는 보장으로 약속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쉽게는 이런 경험을 여러분이 다 가지셨을 겁니다. 보통 한 가정에 부부가 다 믿는다는 일이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보통 여자분들이 먼저 믿고 남편들이 나중에 믿는 경우가 허다한데 부닝니 처음에 예수를 믿고 나면 남편을 괄시합니다. 이 세상밖에 모르는 불쌍한 사람, 남편을 정신적, 종교적으로 경멸하기 일쑤입니다. 남편은 별 웃기는 여자 다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처음에 남편이 하는 일은 뭐든지 다 핍박이고  무지한 행위고 다 그렇게 이거다라고 여기다가 신앙이 조금 좋아져서 자라기 시작을 합니다. 그럴게 아니라 내가 믿어서 남다른 것이 뭐냐? 안 믿는 남편이지만 잘하자. 그래서 옛날보다 더 잘하고 더 열심히 하고 그러면 남편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아! 요거 만만하다. 이렇게 됩니다. 남편이 옛날에 성깔 팍팍 부릴 때는 아, 교회나 가라, 심방이나 다녀라, 그래서 조용할 수만 있다면 교회 가서 집사를 하든 장로를 하든 목사를 하든-뭐가 뭔지 모르니까-아무거나 해라 이런 마음으로 관대하다가 부인이 잘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배짱인 것입니다. 어, 너 예수 믿으면 나한테 화 못내지. 성질을 살살 부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이제 부인은 억울합니다. 하나님, 옛날에 제가 마귀 친구같이 굴 때는 남편이 고분고분 했는데 이제 천사 친구가 됐더니…. 남편이 개차반이다 이겁니다. 이럴 수가 있느냐 이겁니다. 저는 억울해서 옛날로 돌아가겠다 이겁니다. 이것은 성경에 약속되어 있지 않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마치 성경에 약속된 당연한 보상인 것처럼 요구하고 그것에 걸려 넘어집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복음의 흥왕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으로 인해 세상이 변하거나 믿는 사람들에게 대접이 좋아졌다는 것으로는 절대 연결되어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오늘 이 본문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해야되는 본문으로 등장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세상과 역사에도 주인이시라면서 예수 믿는 사람에게 왜 환난과 고통을 면하게 안해주느냐 하는 문제가 금방 생겨납니다. 예수 믿는 가치가 뭐냐? 예수 믿는 이익이 뭐냐? 그런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과 고통을 면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칫 잘못하면 이런 오해로 빠질 수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악한 권세와 하나님이라는 권세가 대등한 차원에서 싸우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악한 것들이 주장하고 있고 악한 것들이 그 세력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 허락하에 그렇습니다. 이것과 똑같습니다. 천국은 누가 다스립니까? 하나님이 다스립니다. 지옥은 누가 다스립니까? 사단이 다스린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옥도 하나님이 다스립니다. 지옥은 하나님이 진노의 대상자들을 가두어 벌주기 위한 하나님의 벌주는 장소입니다. 지옥을 사단이 다스리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고 불의한 것들이 득세하고 믿는 자들과 정당한 자들에 대하여 이 세상이 환난과 핍박을 안겨준다고 해서 그것이 세상 혼자서 그러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분명히 악한 자들이 득세하며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세력을 잡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그래서 독자적인 행동을 하되 그 반항하는 세력과 권위가 하나님과 대등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꼭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흉년이 듭니다. 이 흉년이 예언된다는 것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재가 아래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흉년과 악한 일, 죄악 된 일에 근거자가 아니십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는 악한 세력의 활동을 어쨌든 여기서 허락하고 계십니다. 놓아 두고 계십니다. 이것 때문에 악한 세력과 선한 세력이 대등한 세력이라고 믿지 말아야 됩니다. 먼저 해결해야 되는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금방 일어나는 질문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이런 악한 것들을 허락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잘살고 평안하게 놔 두시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여기에 중요한 답이 있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고통을 면하게 하자는 싸움은 아닙니다. 물론 천국은 이런 곳으로서 묘사하고 소망합니다. 다시는 전쟁이 없는 곳, 슬픔이 없는 곳, 눈물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이별하는 것이나 죽음이 없는 곳입니다. 그것이 천국입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에서 천국이 이 세상의 모든 환난과 고통 같은 것이 없는 곳으로서 그 묘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에 해하는 것이나 상하는 것이나 죽음이나 고통이나 슬픔이 없다고 얘기하는 것은 거기가 거룩하고 의로운 곳이라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입니다. 구원은 고통이 없는 장소로 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의로운 것이며 거룩하고 의로워져서 가야 되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 거룩과 의를 완성하기 위하여 인간은 환난과 고통을 통과해야 된다고 성경은 언제나 한결같이 주장합니다. 여러분이 자녀들을 키우는 생각을 하시면 금방 이해가 갑니다. 자녀를 키우는 데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배워야 할 공부 내용이고 그리고 하나는 아무리 때려도 부러지지 않는 막대기입니다. 이 두 가지 없이는 자녀를 훌륭하게 키울 재주가 없습니다. 제가 제 자식을 때릴 때는 잘 안 부러지는데 제 아내가 때리면 잘 부러집니다. 난 그 이유를 잘 모르겠는데 여가자 남자보다 손이 맵다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녀를 지금 어떻게 키우십니까? 말로 키우십니까? 안 됩니다. 패는 방법 이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출발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인으로 출발하지 않습니다. 첫째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알아들어도 그것을 행할 만큼 성실하지 않습니다.

다행인 것은 아무리 패도 애들은 쉽게 죽지 않습니다. 패고 패서 고쳐내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앞에 환난과 고통을 주시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렇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의와 거룩으로 완성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119편에 가 보시면 거기 시편 기자가 삶의 경험을 통하여 분명하게 이 문제를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119:71)

말로 해서 사람은 알아들을 만큼 선하고 의롭고 능력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환난을 통과해야 되는 가장 첫 번째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이 인생길을 우리에게 완화시켜 주시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식으로 얘기하면 흉년이 들자 신자들도 타격을 받더라 이겁니다 . 흉년들면 안 믿는 사람은 다 굶고 신자들은 살찌고 하는 법은 없습니다.

비가 오면 안 믿는 사람들은 우산을 받아도 비 맞고 믿는 사람들은 우산 안 들어도 안 맞고 한 번 비올 때 나가 서 보십시오. 그렇게 되나 안되나. 그런 식으로 하나님은 신자들을 위하여 배려를 하시거나 약속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 문제가 우리에게 왜 그렇게 중요하냐 하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결국 신자의 신앙 생활에 중요한 원리와 목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근자에 이르러 한국교회에 종말론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횡횡하고 있음을 봅니다. 특별히 휴거 문제와 주님의 재림의 날짜에 관한 문제들 중에 정당한ㄴ 얘기가 거의 없습니다. 거의 다 옳지 않은 얘기들이 시중에 횡횡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혹시 그 문제에 저촉되었을까봐 오늘 이 본문을 인용하여 그 문제에 관한 말씀을 좀 연결하려고 합니다.

휴거 문제를 생각할 때 제일 시중에 많이 퍼져서 사람들을 미혹케 하는 것이 마지막에 있을 대환난과 연결된 휴거에 관한 문제입니다. 환나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 본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휴거와 마치 환난을 면하는 특별한 하나님의 배려인 것처럼 소개되는 것은 성경의 전체 흐름과 맞지 않습니다.

신자는 환난을 면하기 위해서 천국을 거거나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 휴거를 당하지 않습니다. 천국에는 거룩하고 의로워져서 들어가며 거룩하고 의로우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만나러 갑니다. 주님은 천국을 그의 자녀들과 백성들을 불러 영원토록 주와 함께 살게 하고자 만드셨으며 거기에 들어가는 여러 가지 조건 중 하나가 죄인 된 사슬로부터 우리를 꺼내는 십자가와 보혈을 허락하시고 그리고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겪는 여거 가지 어려운 인생살이 속에서 경견해지며 거룩해지며 흠이 없어져 주를 닮은 자로 완성되어 거기 오도록 의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휴거 문제가 뜻밖에도 마지막에 있을 대환난, 어떤 극심한 공포의 한 기간 신자들만은 주님의 특별한 간섭으로 모면한다는 것으로 신앙의 중요한 목표가 되어 있는 것은 신앙의 가장 중요한 원리, 십자가의 메시지가 약화되는 것으로 여러분을 오도합니다.

이것은 마치 많은 세상 사람들,  자연인들이 갖는 신앙심들과 같습니다. 자연인들이 갖는 종교적 본능은 두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종교라는 것이 초월을 그 중심 내용으로 한다는 생각과 그 다음 하나는 신의 진노를 면하는 것이 그들의 종교의 중요한 내용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들이 이 두 가지 내용을 그 근간으로 이루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하나님으로 믿지 않습니다. 너희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합니다. “너희는 다시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결국 나의 이익을 위하여 나에게 복 주시려고 나를 사랑하심으로, 나를 불쌍히 여기사 나에게 일어나게 하는 일이다라는 것이 신자가 갖는 하나님에 대한 굳은 믿음입니다.

혹 내가 천하 없는 죄를 졌다 할지라도 그래서 세상이 모두 이를 갈고 나를 향하여 손가락질을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만은 나를 영접하신다라고 믿는 것이 신자가 가지는 빼앗길 수 없는 확산입니다. 이 세상이 두 쪽이 나고 네 쪽이 나고 무슨 원자탄이 15번을 폭발해서 온 세상이 진토가 돼서, 백골이 진토가 돼서 넋이라도 있고 없고 간에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입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여기서 속지 마십시오.

어느틈에 우리는 하나님이 무서워졌고 세상이 종말을 향해 가면서 어려워질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고 사랑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관심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있는 동안 거룩해지며 주를 닮아가며 의로운 사람으로 나를 갈고 닦는 경건의 연습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성실한 자세로부터 어떻게 하면 고통을 면하느냐 하는 이상한 사행심이 조장되고 있는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여기 우르르 저기 우르르 쫓아가서 어떻게 하면 대환난이 닥치는 날에 매 안 맞고 고통 안 당하고 울지 않고 편안한 자리에 가서 ㅓ이 환난과 고통을 면할 것이냐에 모든 시선을 똗기 때문에 성실한 신자로서의 오늘의 삶을 살지 않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가시면 바로 지금 말씀드린 내용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3-17)

여기 17절 말씀이 그 휴거입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느날 구름 속으로 들림을 받는다 이겁니다. 공중 들림을 받는다 이겁니다. 이 내용이 갖는 분명한 내용은 지금 먼저 죽어서 잠자는 자들의 영혼 자들의 영혼은 주의 품에 가 있으되 육신은 땅에 썩어져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 상태에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이 다시 오는 날 그 육체가 변화되어 부활합니다. 그 모습 그대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던 육체로가 아니라 변화된 몸으로 부활하여 원래 주님의 품에 가 있었던 영혼과 합쳐 주를 만날 것입니다. 그때 우리 살아있었던 사람들은 죽었다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대로 이 몸이 변화할 것입니다. 왜 공중에 가서 만나고 땅에서 만나지 않느냐 그러면 이 땅은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지금 이 지구를 없애시고 새로운 하늘과 땅을 만드십니다. 새로운 하늘과 땅도 여기같이 자연계고 물질계일 것입니다. 거기에도 먹는 것이 있고 거기에도 무슨 바다가 있고 그렇습니다. 여러분 좋아하시는 것이 거기에 다 있을 겁니다. 아마 바둑도 있고 모르긴 몰라도 당구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문화가 있습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공중들림이라는 것이 마치 이 땅에 있으면 다같이 진흙 구덩이에 빠질 것인데 구름 위에 올라가 있어서 로얄박스에서 구경하고 있는 자리에 가는 이런 개념은 아닙니다.

휴거라는 것은 무슨 모든 신자들 중에 어떤 신자에게만 돌아오는 특별한 혜택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그때까지 죽지 않고 주님 오실 때까지 죽지 않고 있으면 그렇게 당할 것이고 죽었으면 죽은 자리에서 부활할 것입니다. 주가 더 잘났냐? 여기서는 살아 남은 자들이 죽은 자들보다 결단코 앞서지 않는다고 합니다. 죽었다고 해서 손해보지 않고 살아있다고 해서 더 잘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나중에 태어난 사람이 휴거하는 것입니다. 먼저 태어나서 먼저 죽은 사람들은 그때 죽었던 몸이 변화해서 부활할 것이고 그러면 우리가 나중에 살아서 휴거를 당하면 우리가 그럼 아브라함보다 낫고 다윗보다 낫고 모세보다 낫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휴거라는 것은 무슨 잘난 사람에게만 돌아가는 어떤 특별한 혜택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 얘기를 대환난과 연결해서 신앙의 중요한 소망을 주를 만나는 것, 거룩한 주 앞에 거룩한 자로 서는 것으로부터 고통을 면하는 것으로 사람을 살짝 끌어내리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뭘하고 싶어집니까? 신자로서 거룩한 신앙 싸움을 하는 데서부터 어디를 쫓아가서 휴거 티켓 하나 사는 사람으로 바꿔놓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관한 얘기를 이것과 연결해서 조금 더 봅시다. 데살로니가전서 5:1이하를 봅시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라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1-8)

요즈음 종말론 관한 얘기 중 이 휴거에 관한 얘기와 그 다음에 특히 나쁜 소문, 몇년도에 오신다, 1992년도에 오신다는 얘기까지 있습니다. 가장 짧은 예언은 제가 보증하면 1992년에는 분명히 안 오십니다. 1992년에 오신다는 얘기도 한창 있었지만 제가 보기에는 아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언제 온다는 얘기를 하는 것은 보통 다 이단입니다. 주님도 회피하신 답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영적으로 교만한 것이고 절대해서는 안되는 예언입니다. 성경이 하지 않도록 못을 박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는 날을 예언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드는 구절이 여기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살전 5:4) 하는 말씀입니다. 신자들에게는 그날이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왜 안 그런가 하는 얘기를 보십시다. 세상 사람들은 왜 모르죠? 밤에 도적같이 이르기 때문입니다. 왜 세상 사람들이 모르느냐 하는 얘기를 이렇게 합니다. 저희는 어두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왜 알죠? 우리는 낮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를 들면 우리는 도적이 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고 세상 사람은 도적이 온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성경적인 용어를 쓰자면 우리는 내세가 있음을 알며 이 세상은 끝이 있다는 것을 알며 주님이 다시 오는 것을 알고 하나 더 나가서 우리가 죽으면 주를 만나야 되는 것을 압니다.

주님이 언제 오시느냐 이전에 우리가 죽는 날 주님을 대면해야 됩니다. 주님이 내년에 오시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왜 도대체 거기에 관심이 많으십니까? 내년에 오면 다 팔아서 1년 동안 다 먹자 이겁니다. 백년 후에 오시면 괜찮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이 예배 마치고 돌아가시는 중에 안 돌아가신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사람은 주님이 오시는 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죽는 날이 개인적으로는 종말입니다. 거기에 주님이 언제 오시느냐 하는 것이 그의 인생을 ㅂ녀화시킬 아무런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이 설교 마치고 저젹예배 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릅니다. 특별히 이런 서울에 사는 이상 언제 자동차가 받을지 모르는 이 땅에서 그건 약속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언제라는 것을 안다는 의미에서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린 낮에 있습니다. 밤에 있는 자들은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7,8절)입니다. 저들은 여기가 전부인 줄 아는 무지한 자들이란 말입니다.

영원과 내세와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밤에 속했다. 앞을 못 본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 땅이 전부요 자기 한평생이 전부인 줄 알고 그것을 목표로 해서 삽니다. 내세를 준비하지 못하며 영혼을 준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이것이 낮에 속했다는 말이고 도적같이 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준비합니다. 언제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내세를 준비하는 겁니다. 그것이 종말론입니다. 여러분이 언제 죽든지 언제 주를 만나듣ㄴ지 주께서 오셔서 여러분이 주를 만나게 되든지 간에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언제가 아니라 언제 오셔도 괜찮을 사람으로의 준비입니다. 재산을 어떻게 처분하느냐가 아니라 영적으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매일매일을 쌓아가며 훈련하며 깊어져야 되는 싸움밖에 없습니다. 누가 얘기한 것같이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성경 한 구절을 읽겠다. 그렇게 되셔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얘기하는 종말관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세상이 이렇게 악하고 믿는 자들을 핍박하되 주님께서 놔두시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거룩해져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내세를 준비하고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디에나 그런 기록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3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13:17,18)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오늘날 현대 교회하고 아주 흡사합니다. 여러분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의 최고의 약점이 배부르게 된 것과 세상 사는 것이 재미있어지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게다가 예수까지 믿는 겁니다. 이것같이 큰 병은 없습니다. 그래서 요즈음 신자들을 대하면 영적인 갈급함이 없습니다. 이만하면 됐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남한테 해 끼치지 않고 살며 내가 성실하게 노력해서 내 돈 벌어서 ㅓ내 자식 잘 키우고 내가 하고 싶은 것 하고 특별한 죄를 짓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에 여러분은 여기있는 식으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좋은 교회, 좋은 목사까지 만났으니 큰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꾸짖습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꼭 지금 부요하다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우리나라가 지금보다 좀 많이 가난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많이들 걱정을 합니다.

한 10년만 한국사회가 조용해지고 노사분규 등이 몇년만 좀 참아준다면 한국 경제가 성큼 발전해서 일등 국가에 낄 것이다는 것입니다. 전 싫습니다. 전 정치가도 아니고 경제가도 아니고 전 목사로서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망해서 1960년대 후반쯤 경제 상태로 가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1년에 생일날고 입학식, 졸업식 때만 불고기 한 번 먹을 때가 좋았습니다. 가난하고 먹고 사는 것이 바쁘면 여러분은 죄 지을 틈을 조금 덜 가지게 됩니다. 고단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죄 지을 여유가 없습니다. 지금같이 돈 많고 시간 많으면 여러분이 만들어 내는 것은 모두 죄입니다. 점점 죄가 더 깊어진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점점 타락하고 점점 미치광이 짓으로 갑니다. 점점 더 이기주의로 가고 자기밖에 모르고 무정해지며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으며 인간미라는 것은 조금도 남지 않는 이상한 파충류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도 이미 그렇게 되었고 서구사회는 물론 그 병에 걸린 지 오래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자신하고 있는 것은 세상에서 잣니할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할 수 있는 것은 몇 개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사려됩니다. 여기서 돌이키셔야 됩니다.

이것을 물어보면 분명합니다. 여러분 일주일 동안 생활하면서 얼마나 간절히 주를 찾을 일이 있습니까? 옛날에는 배고파서라도 주를 찾았습니다. 지금은 찾을 일이 없습니다. 이것만큼 심각한 것을 없습니다. 사람 하나 망치려면 건강하게 해주고 돈주면 잠깐이면 망합니다. 한 석달이면 망합니다. 오래갈 것도 없습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가난해서 망한 나라가 없습니다. 부요해서 망한 나라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의미에서 가난할 것입니다. 여기 있는 식으로 얘기해서 너희에게 불로 연단한 금이 있느냐? 이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뻘겋고 퍼렇고 얼룩덜룩한 옷 말고 이 영적으로 거룩한 옷을 여러분이 갖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입어야 됩니다. 불로 연단한 금, 흰 옷, 이런 것을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치 않지만 환난을 주실 수밖에 없다 그럽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이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겪어 나가시는 인생살이에서 여러분이 직면하시는 모든 어려움들은 여러분에게 복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시겠습니까? 그것을 인정하셔야 됩니다.

처음에도 말씀드린 것같이 하나님은 늘 우리 편이십니다. 내가 만나는 어떤 사건, 그것이 내 잘못으로 인하여 일어난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의 죄과대로 우리가 행한 대로 갚지 아니하십니다. 우리의 잘못을 꾸짖으시되 고치게 하려고 꾸짖으시며 매를 대시되 우리를 좋게 하려고 매를 대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나쁜 버릇, 미련한 것, 무지한 것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할 수 없이 이 곤고한 인생을 우리에게 요구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계와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물론 우리 개개인의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여러분 지금 사는 모습 가운데서 고통 받으시는 분이 있습니까? 어려운 분이 있습니까? 잘된 일입니다. 감사한 줄 아십시오. 그 속에서 여러분이 불로 연단한 정금같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믿고 기다리십시오.

여러분 편안하십니까? 조심하십시오. 여러분 지금 부족한 것이 없습니까? 조심하십시오. 지금 여러분 마약 먹고 정신이 몽롱해 있는 것일 것입니다. 영적으로 경건하고 깨어 근신하는 자 치고 살찐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은 반대하는 핍박과 환난으로가 아니라 이 마약으로, 이 평안함으로, 완전히 수렁에 잡아 넣습니다. 여러분이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부름을 받고 있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로 요구받고 있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마십시오.

깨어 근신하여 기도하십시오. 자기를 쳐 복종케 하며 경건을 연습하는 일을 위하여 어금니를 물고 일어서셔야 됩니다. 어린 아이같이 밤낮 징징거리고 먹어 살쪄 굴러다니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과 이 역사와 세계의 주인이 되사 우리를 벌 받는 자리에 누워있지 않게 하시고 깨어 일어나 주께서 복 주시는 자리로 인도하시고 잡아 끄시고 매를 때리시고 각성케 하신다는 것을 인하여 감사하시고 충성된 마음으로 그 뒤를 쫓기로 결심하십시오.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사도행전 11:27-30

사도행전 11:27-30에 이르는 간단한 말씀 속에서 지난주에 이어 성경적인 종말관에 대하여 좀더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온 천하만물을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중에 특별히 역사의 주인이 되신다는 얘기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닌 것을 알고 다가오는 세상이 있으며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며 주님께서 언젠가 오셔서 이 역사의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것을 믿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고난을 면하고 고통을 면하는 식으로 기대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고통과 슬픔이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자신으로서는 거룩하며 영광스러워져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사상에서의 환난과 고통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지난 주에는 특별히 환난이라는 것이 신자에게는 어떻게 필요한 문제인가 하는 것으로 내세론적 시각을 가지는 데 있어서 환난을 면하는 것으로 우리들의 천국관이나 종말관이 고정되지 않기를 말씀을 통하여 권면했습니다.

이제 오늘 하나 더 덧붙여서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거기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지난 주에 이어서 우리가 이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데살로니가전서 5장으로 갑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르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낱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및음과 사람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1-8)

종말론에 관한 여러 가지 미혹하는 소문들 중 말세에 대한 징조, 주님이 다시 오심에 대한 공포감, 그리고 거기에 있는 여러 가지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요소들이 근자에 한국교회에도 많이 침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시중에 나가보시면 보이스사에서 나온 종말에 관한 책들은 거의 다 틀려 있습니다. 제가 그 출판사하고 특별히 개인적으로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얘기해서 대새주의적 종말론은 보통 틀려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보이스사는 그 세대주의적 종말관을 많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뜻밖에도 종말론에 관해서 좋은 책이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당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는 언제 종말이 오고 종말의 징조가 뭐냐 하는 것이 거의 그렇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말을 믿고 있습니다. 또한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날 언제 오시트냐에 대한 싸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어느날 오시느냐 하는 것 때문에 시중에 많은 얘기가 있고 지난 주에도 잠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제일 가깝게는 1992년에 오신다 하는 얘기가 시중에 근거없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 얘기를 어느 분이 하셨다 그래서 간접적으로 알아봤더니 당사자께서는 그렇게 얘기한 적이 없다 그러십니다. 그런데 하여튼 누가 한 얘기인지 모르게 가장 가까운 종말에 대한 예언은 1992년입니다. 몇년 안 남았습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재산 다 팔아서 교회 헌금이나 꽉 하시죠? 그런데 어느날 오신다 하는데 대하여 사람들이 성경이 요구하지 않는 예언을 하며 쓸데없는 호기심을 자꾸 재촉하는 이유가 지금 읽는 데살로니가전서 5:4에 있는 말씀을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하는 말씀 때문에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날이 예측 가능하다는 얘기들이 나오게끔 되었습니다. 그건 무지의 소산입니다. 무식하면 담대해진다는 것이 가장 큰 약점입니다. 무식은 혼자 다니지 않고 고집과 담대함을 꼭 동반합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인데 또 하나 이것과 덧붙여서 말씀드릴 것은 언제 오신다 하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이런 얘기까지 합니다. 그날과 시간은 아버지께 속한 것이다라고 하며 주님이 얘기하셨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해에 관한 것은 제한하지 않았다 이겁니다. 그날과 시간만 하나님께 속해 있지 몇 년도 몇 월이냐 하는 것은 우리가 찾아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미혹된 사람들은 굉장히 심각합니다. 결혼도 안하겠다고 하고 장사도 안합니다. 이제 3년 남았는데요? 그럽니다. 얼마나 열심히 그날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하고 그저 산기도나 다니고 사람들 만나면 빨리 재산 처분하고 나랑같이 기도원이나 다니자고 얘기하는 분을 제 주변에서도 여럿 만나고 있습니다.

여기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셔서 데살로니가전서 5:4에 있는,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한다 하는 말은 지난 주에도 잠깐 이 말씀을 드린 것으로 압니다만 믿지 않는 자들이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있고 자기가 죽는 것이 인생의 끝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끝이 아니요 저 세상이 있는 줄 알고 있고 인간이 죽는 것이 끝이 아니요 죽은 다음에 심판이 있으며 영원한 상을 받든가 영원한 형벌을 당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빛의 자식이라 하지 않습니다. 더 더욱 여기도 7절에 가서 보시면 어두움에 있다 하는 말을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는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밤과 낮의 구별은 어두움과 빛의 구별, 장님과 눈뜬 자의 구별, 영적으로 그래서 어두움에 속했다 밤에 속했다 하는 것은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이 죄악인 줄 모르더라. 그것이 하나님 앞에 진노를 쌓는 일인 줄 모른다. 무지하다는 차원에서 밤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면 신자는 밝히 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산 것이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되고 영원을 준비해야 되고 무엇이 하나님 앞에 칭찬받는 것이며 무엇은 벌받는 것인가를 아는 자라는 의미에서 낮에 속했다 빛의 아들이다라는 말을 씁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좀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에베소서 5장으로 갑니다. 거기 어두움과 빛을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 5:8-11)

전에는 너희가 어두움이었는데 이제는 빛이라.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는데 어두움의 일은 열매 없는 일이다라는 것입니다. 열매 없는 일이라는 것은 그가 한 일이 가치있는 것을 쌓아가는 일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누구만 열매가 있느냐 하면 빛에 속한 자만 열매를 맺습니다. 빛의 열매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학교 다닐 때 공부를 하는 것은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열매가 생깁니다. 그러난 노는 것은 쌓이는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잠은 잘수록 더 자게 만들고 쾌락은 쾌락을 부르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무엇을, 어떤 열매, 가치있는 어느 지위에 도달케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어두움에 속한 일이라 그러고 열매없는 것이라 합니다. 빛의열매라는 것은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하고 그것을 쌓아 나갈 수 있는 자로서 우리를 빛의 자녀라, 낮에 속하였다 합니다.

우리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분명히 했습니다. ‘저들은 밤에 속했으니까 도둑이 오지만 우리는 낮에 속했으니까 도둑이 오지 못한다, 알게 온다’가 아닙니다. 낮에 속했다는 것으로 주님이 언제 오시는가를 계산하는 것으로 요구하지 않고 일상사로 요구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다시 에베소서 5:14를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

자, 어두움에 속했다가 이제 빛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5,16)

성경적인 종말관은 주님 빨리 오십시오가 아닙니다. 결단코 주님 빨리 오십시오, 언제 오실까? 빨리, 빨리 세월이 갔으면 좋겠다. 이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오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필요한 시간이고 그 시간이 빨리 지나서 결과가 와야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가 있기 위한 시간으로써 주어져 있기 때문에 시간을 아껴야 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세월을 아껴라, 세월을 아껴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17절).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어리석ㅇ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 시간들을 아껴야 됩니다. 그래서 주님 오심을 대비해야 됩니다. 주님이 오시는 것을 알고 있고 재망하고 있습니다. 주님 오실 때 부끄럽지 않기 위하여 오늘을 준비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1분1초인들 헛되게 보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1천 광음인들 불가경입니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하여 주님 오시는 날에 완성된 자로 서기 위하여 부끄럽지 않기 위하여 지금 최선을 다하여 훈련하고 있어야 됩니다. 세월을 아끼고 어리석지 않아야 되고 지혜로워야 됩니다. 깨어 있어야 되고 근신해야 됩니다. 이것이 신자가 같는 정당한 성경적 종말관입니다.

그래서 18절 이하에 여러분이 잘 아시는 이 요구가 나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성령 충만을 받는다는 것은 가슴 속에서 무슨 사이다가 튀는 것 같은 느낌이 아닙니다. 그런 일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성령 충만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자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면서 그의 백성으로 요구되고 있는 거룩과 영광의 완성을 향하여 오늘을 준비하고 주님 기뻐하시는 일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싸움을 하는 것을 성령 충만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술 취하지 말라는 것과 대비되어 있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방탕하다는 얘기는 부패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쾌락을 쫓고 더러운 짓을 한다는 것을 방탕이라 하지 않고 허비하고 있고 낭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공부는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놓치면 공부를 못합니다. 그 시간을 아껴야 됩니다. 공부해야 될 때 공부 안하고 연애하고 영화구경 다니고 그러는 것을 낭비했다고 그럽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방탕하다 그러는 겁니다. 그럴 틈이 없습니다. 종말론을 잘못 알고 있으면 이것을 빨리 어떻게 뛰어 넘어서 주님을 빨리 만나고 싶은 것으로 사람을 몰아가서 최고의 유혹거리, 잘못된 종말관이 신자들을 성실하게 자신을 영적인 사람으로 다듬어 나가는 일을 포기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심하십시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조심해야 될 것은 하루하루를 쌓아 열흘을 만들고 열흘을 쌓아 한달을 만들고 한달을 쌓아 일년을 만들고 일년을 쌓아 평생을 만드는 것을 무엇 하나로 넘자고 하는 것입니다. 산기도 한 번 하면 충실한 하루는 될 수 있을지언정 산기도 하루를 하면 평상시 열흘을 대신하는 것은 없습니다. 뭐든지 하루는 하루밖에 안됩니다. 그 하루 하루를 쌓아서 평생을 만드셔야지 어디 한 군데 가서 박수치고 기도해서 평생을 바꿔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유혹에 빠지지 마십시오. 그래서 이 싸움은 성령충만 한 일, 주님 오시는 날을 기다리는 사람으로서 세월을 아끼고 지혜로워야 되는 일이 에베소서 5장~6:9에 이르도록 일상사로 요구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부부문제입니다. 남편과 아내 문제, 부모와 자식의 문제 그리고 사회에서 상전과 종의 문제로 요구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종교적인 행위를ㄹ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결국 주께서 부르신 완성된 몸으로 드러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는 그 장소, 그 시간, 그 환경에서 주의 사람으로 자신을 닦아가는 싸움인가 모릅니다.

이 싸움을 해야 됩니다. 부부간의 갈등 속에서 남편은 주님의 모습을 담아내는 신자의 모습을 연습해야 됩니다. 매일 같이 자고 같이 깨고 같이 싸워야 되기 때문에 부부만큼 철저히 서로 훈련하는 대상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꼴보기 싫으면 안보면 됩니다. 부부는 안 볼 수가 없ㅅ브니다. 그래서 부부만큼 훈련이 잘되는 경우가 없습니다. 이것을 대부분의 성도들이 잊고 삽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 부분을 묻어버리고 회피하고 신앙생활 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안됩니다.

부부는 끊임없이 갈등을 겪고 끊임없이 시비가 생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요? 둘다 똑같이 죄인으로 만나서 주를 믿어 주님의 모습과 신자의 모습을 그 없는 실력에 시행을 하려니까 여러 가지 시행착오가 생기고 어려움이 생깁니다.

또한 부모와 자식입니다. 여러분이 자식을 잘 키울 수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난번 어떤 사람하고 잠깐 상담을 하눈 중에 상대방이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자녀 교육을 어떻게 하십니까? 그래서 있는 힘껏 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있는 힘껏 하는 것이 뭡니까? 어떻게 하면 자녀를 잘 키울 수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정답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자녀를 잘 기르른 방법은 없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자기 자식이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결과가 좌우되는 비법이 있다고 믿으십니까? 없습니다. 부모가 부모의 책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최선입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책임을 포기하지 않아야 됩니다.

어느 경우에도 자식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은 우리 손에 없습니다. 그가 잘되고 못되는 것을 최선을 다해서 안타까워하지 우리 마음대로 여기 단추 누르면 이리가고 여기 단추 누르면 저리가는 식으로 우리 자녀가 기계같이 우리 마음대로 놀아나겠습니까? 못 합니다. 거기서 뭘 배웁니까? 최선을 다해도 되지 않는 일에서 여러분의 속을 썩으시고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신앙인이 되서야 합니다.

자녀가 얼마나 공부를 잘하느냐가 부모의 무슨 잘난 결과가 아닙니다. 자식이 학교 떨어지는 것이 부모가 못나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요 기도를 덜해서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다 예수 믿는 집 자식들만 잘하던가요? 서울대학교 붙은 애들이 밤낮 신자입니까? 아닙니다.  올림픽 금제달 딴 사람이 다 신자 아닙니다. 산신령께 정한수 떠놓고 백일지성을 드려서 금메달 땄다고 양정모 씨 어머니가 그러셨습니다.

꼭 신앙이라는 것이 우리가 요구하는 것같이 그런 결과를 만들어 내는 비법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이 일들을 통하여 성경은 우리가 거룩해질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에베소서 5:25부터 보십시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25-27)

주님 다시 오십니다. 그 날을 우리는 대망하고 있습니다. 예, 하도 고통스러워서 빨리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오시면 우리가 곤란합니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데 오시면 곤란합니다. 준비하시게 합니다. 하나님은 학교에서 시험 보는 것같이 떨어뜨리려고 입학시험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좋은 성적을 얻는 괜찮은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권면하십니다. 그리고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월을 아껴야 됩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술 취하고 방탕해서 이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됩니다. 울고불고 아우성치면서, 부부싸움도 하시고 자녀하고 너 죽고 나 죽자도 하시고 직장에서도 아휴 네가 어쩌다 이 회사에 들어 왔는고, 어쩌다 이런 친구를 고용했는고 하는 속썩음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닦여 나가는 일을 주님 앞에서 확인하시고 여러분의 인생을 포기하거나 외면하거나 도망가시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종말관입니다.

로마서 12장으로 가 보십시다. 로마서는 1~11장까지 구원에 관한 얘기를 설명합니다. 이방인도 구원을 얻었다. 이스라엘 백성도 결국 구원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 모두를 구원했다 하는 얘기를 한 다음에 이제 신자들에게 신앙생활의 현실적 요구를 해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우리 전 존재가 신앙 인격ㅇ로 완성이 돼야 됩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산 제사로 우리를 드려야 됩니다. 받으실 만한 산 제사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를 갈고 닦아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그래서 12:3~15장 마지막까지 아주 잡다한 자질구레한 일상사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믿음이 약한 형제에 대하여 비평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아야 되는가, 어떻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아야 되는가? 어떻게 악한 법이라 해도 따르며 악한 권세 앞에도 복종해야 되는가? 어떻게 사회 질서를 지키며 국가와 국가의 이 질서 체계, 순종하는 자가 돼야 되는가? 그런 얘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 2절을 확대한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하는 얘기입니다.

저쪽이 불의한 방법과 악독한 방법으로 형통한 것을 인하여 마음의 시험을 받아 네가 지금 하나님을 만나 훈련하고 있는 의와 거룩을 포기하고 악한 것에 물들어 상재방 앞에 서는 유혹에 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같은 신자일 수도 있고 안 믿는 신자일 수도 있고 원수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악한 정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악한 것과 불의한 방법으로 이 세상에서 득세하며 의로운 자를 핍박하며 이 세상에서 형통하게 사는 것 때문에 네 마음에 시험이 들어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완성을 준비하는 일에서 미끄러지지 말라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 선으로 악을 이겨라.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것을 하는 동안 우리는 굉장히 괜찮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 있는 가장 큰 싸움이 지금은 완전히 계급 투쟁이 되어 버렸습니다.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들과 혁신을 부르짖는 사람들 간에 충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있는 자들이 쾌락과 현실 도피로 갈 수도 있고 그것에 기생하는 폭력과 범죄가 들끊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에서 여러분이 무엇을 보십니까? 신자로서 얼마나 마음이 상하십니까? 그래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도대체 이런 것들을 보면서 나는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이런 마음이 드십니까? 우리를 뒤흔드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온같 유혹과 공포와 시험 받을 만한 모든 얘기들 속에서 여러분을 지켜가는 싸움을 하십니까?

편안하고 좋은 환경에서가 아니라 이렇게 유혹과 시험과 공갈이 횡횡하는 곳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그것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일부러 힘든 물건을 끌고 가지 않아도 거센 물결에 들어가서 거기 떠내려가지 않고 넘어가지 않고 버티고 있으면 근육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 이 한국사회는 영적으로 자신을 훈ㄹ녀하는 데는 가장 좋은 장소일 수도 있습니다.

싸움이 일상사에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것이 내가 신자로서 버티고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주를 대망하는 사람입니다. 내일 오시든 십년 후에 오시든 천년 후에 오시든 주를 만나는 사람으로 내가 닦여 있어야 합니다. 사실 그런 의미에서라면 하나님,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더 주십시오. 그러는 것이 낫습니다.

여러분이 옛날에 시험 보실 때 어려운 시험이 자주 있었죠. 모의고사 등 시험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수학 같은 것은 20점 맞기 바쁘게 냈습니다. 종 칠 때 돼서 선생님 시간 좀 더 주세요. 그러는 사람은 공부 잘하는 사람입니까? 못하는 사람입니까? 누가 선생님 시간 조금만 더 주세요 그럽니까? 공부 잘하는 사람이 꼭 시간을 더 달라고 합니다. 못하는 사람은 벌써 쓸 것 다 쓰고 못 쓸 것 다 포기했어요. 그런데 종이 안 칩니다. 나가기도 창피하고 나가면 선생님한테 내고 나가야 되는데 쓴 것이라고는 이름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냅니까? 이제나 저제나 종 언제 치나 기다리고 있고 쓰는 학생만이 그 안 돌아가는 머리로 푸느라고 시간이 모자랍니다.

성실한 신자일수록 오히려 주님 좀더 늦게 와 주십시오. 그러는 법입니다. 나 자신의 완성을 위해 또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그러나 이판사판이라면 빨리 오십시오. 시간이 흘러봤자 나아질 것이 없는데요 합니다. 훨씬 나쁩니다. 주님 빨리 오십시오는 신앙적으로 별로 그렇게 칭찬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주님 오시지 마세요. 이것은 아닙니다. 나 여기서 재미있게 살고 있는데 와서 훼방 놓지 마십시오. 이것은 순 악당입니다. 이것은 신앙도 아닙니다만 우리 신앙이라는 것은 훨씬 목표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초점이 되는 것이 오늘 사도행전 11:27 이하의 말씀입니다. 흉년이 듭니다. 그 흉년에 신자도 불신자도 동일하게 다같이 피해를 봅니다.  그래서 그 일을 신자들은 기도해서 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어떻게 하다 보니 흉년이 들었는데 먹을 것이 없습니다. 만나게 보내주십시오. 이런 일은 없습니다. 어떻게 면합니까?

최선을 다해서 면합니다. 십시일반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모아서 넘깁니다. 그렇게 넘어가야 됩니다. 우리 일상생활을 성실히 수행하십시오. 그 속에 온갖 우리의 영적인 훈련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만나는 사람, 만나는 사건, 시기, 환경, 생각을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유익되도록 하나님의 사람으로 점도 없고 티도 없고 주름 잡힌 것도 없이 완전해지도록 좋게 코스를 만들어 놓고 계십니다.

우리를 복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달아 우리를 깨끗케 하려고 피를 흘리게 하신 분입니다. 주를 대망하십니까? 그의 오심을 기다리십니까? 열심히 사십시오. 매일매일을 열심히 살아 주의 사람으로 자신을 닦아 가십시오. 깨어 계시고 술 취하여 방탕하지 마십시오. 세월을 아끼십시오. 지혜 있는 자가 되십시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의 받으실 만한 산 제사로 바치기 위하여 애를 쓰십시오. 이 세상의악한 유혹과 도전과 시험에 지지 마십시오. 주의 사람으로 살아 주께서 언제 오시든지 주께서 인제 됐다 하시는 날 기쁜 낯으로 주를 만나기 위하여 늘 준비하고 계십시오.

여러분 지금 슬픔을 당하고 계십니까? 좌절 속에 있습니까? 어려움과 근심이 있으십니까? 그것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닦아가는 일임을 인정하십시오. 겉사람은 부피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십니다. 우리가 당하는 이 세상에서의 어떤 좌절과 어떤 고통도 그리고 아무리 힘든 일들도 우리를 하나님의사람으로 닦여 나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집 짓고 이 세상에서 사는데는 평생 방해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닦여지는 데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는 줄 기억하시고 성실한 마음과 충성된 마음과 인내심을 가지고 더 많은 열심을 품고 주를 사랑하시며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쌓아가는 것으로 영위하여 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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