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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절대성

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2114 추천 수 0 2009.06.26 22:2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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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13:44-49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74 / 1989.09.10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저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사도행전13:44-49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활동은 46절에 나타나는 것같이 우리에게 조금 놀라움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반대하고 저들이 전하는 일에 대해서 훼방을 놓자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라는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우리가 믿는 바 신앙의 도리들과 내용들을 남에게 전할 때 남들이 그 말을 처음부터 호감 갖고 듣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놀라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빈정거리기도 하는데 그럴 때에 우리가 여기 바울과 바나바 같은 태도를 짓는 다면 그것이 만족할 만한 태도라고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좀 다른, 굉장히 억세기도 하고 어찌보면 거만해 보이기도 하는 답을 제시하고 떠나 버립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왜 이런 발씀을 기록하고 있고 이런 태도를 우리에게 물려 주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추적하고 싶은 것은 지금 바울과 바나바가 하고 있는 전도 여행이 물건을 팔러 가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전도라든가 기독교의 신앙 내용을 누구에게 증거하는 것이 협상을 하거나 타협을 하는 것이 이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말하자면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사도행전 끝까지 계속되는 사도 바울의 전 선교 활동의 기본적인 태도는 굉장한 권위와 절대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이 부분에서 강조받아야 됩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의 내용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놓친다면 아무것도 될 수 없으며 그것이 오늘 여기 바울과 바나바의 태도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이방인을 위하여 보내진 사도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저의 말을 듣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방으로 가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마는 그 내용 속에는 그렇게 결과론적으로만 싑게 풀어서는 안되는 내용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사도행전 13장에는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이라’하는 표현이 일곱 번이나 나오는 점입니다. 5절에도 나오고 7, 26, 44, 46, 48, 49절에 이르는 일곱 번에 걸쳐 ‘하나님의 말씀이라’ 는 표현이 나옵니다. 물론 26, 49절에서는 다르게 표현했습니다만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것이 권위적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내용이 상대방이 알아듣도록 변형되거나 변질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타협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권위적이고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앞 장에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 갖는 객관성을 생각하면서 기독교의 객관성이라는 것이 합리적 객관성, 이해 가능한 보편성을 의미하지 않고 그 결과를 얻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모두에게 두루 퍼지고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진 은혜의 내용이라는 면에서 성경진리가 객관성을 갖는다고 했습니다. 흑암에 빛이 자주 비추어지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며 눈먼 자, 귀머거리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복음의 객관성이라 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가진 어떤 실력과 조건이 선행되어야 이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모두에게 차별이 없는 것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객관성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기독교 신앙의 절대성이라는 것도 그것이 절대적이고 유일하다는 것을 증거하고 납득할 만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경만이 옳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만이 신입니까?  다른 데도 있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거기에 대한 설명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기독교가 어떻게 다는 것과 다른가?  어떻게 다른 것보다 우월한가?  유일한가?  이것만이 진리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차원에서는 별다른 기록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우리를 가장 많이 당황 시키는 것은 그 첫 페이지를 열면서부터 느끼게 되는 충돌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첫째 날에 빛을 둘째 날에 하늘을’  하는 식으로 무조건적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지, 태초 전에는 무얼 하셨는지, 엿새 동안 다 만들고 쉬는 동안에는 뭘 하면서 쉬셨는지, 사탄이 와서 아담과 하와를 꼬이는 동안에는 어디에 출장을 가셨는지, 설명이 없습니다.

또한 선악과를 안 만들었으면 되는데 왜 만드셨는지, 또 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면서 아담과 하와가 따 먹는데도 내버려 두셨는지 설명이 없습니다. 그런 것으로 기독교가 그 절대성과 권위성을 주장 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그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다루는 내용의 중요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루는 내용의 중요성 그리고 믿음의 선택 문제, 기독교 신앙을 선택한 결과의 심각성 이런 것들이 기독교가 주장하는 절대성과 권위성입니다.

이것은 잘못 선택하면 영윈한 운명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외에 차선책이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주장하는 절대성이여 권위성이지 그 절대성과 권위성의 근거와 타당성을 제시하라는 차원에서는 설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내세우는 절대성과 권위성에 대해 우리 나름대로 반박을 하게 됩니다. 신자라고 다를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타락했기 때문이지요. 어떻게 타락했느냐 하면 자기를 낳아 준 부모도 몰라보는 자리에까지 왔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만든 하나님을 몰라보는 자리에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말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먼저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꼭 애들 기르는 꼴이 된 것입니다. 공부 열심히 해라 밤낮 나가서 놀고 먹기만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너를 키우기 위해서 엄마는 먹고 싶은 것도 먹지 않고 입고 싶은 것도 입지 않고 이빨도 다이아몬드로 할 것을 금 이빨로 하면서 그렇게 너를 키워따, 이러니까 자식이 한다는 얘기가 언제 엄마가 나를 위해서 먹고 싶은 거 안 먹고 입고 싶은 거 안 입었으며 언제 나를 낳는지 보여 봐라 하며 대드는 형편이 된 셈입니다.

왜 그런 말이 나올까요?  그 뿌리는 이겁니다. 물론 우리가 타락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지 못하는 이유도 있지만 하나님의 요구와 하나님의 명령하심의 절대성과 그 생명 됨과 진리에 대해서 우리가 반발하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걸 요구하는 겁니다. 자식들이 왜 부모 말을 안 듣습니까?  자기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애들의 바람은 나도 빨리 어른이 되어서 내가 하고 싶은 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아무도 말리지 않는 나이가 빨리 됐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인간들이기 때문에 신자라도 이 유혹에 빠지면 하나님 명령의 절대성과 권위성을 증명하라고 요구하게 되고 하나님이 하라는것의 심각함과 중요함이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맞지 않는 다고 말하게 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먹어도 먹어도 배는 안 부르고 살도 안 찌는 맛있는 음식과 아무리 아무리 써도 그치지 않는 무제한의 예금통장과 놀고 싶을 때는 잠도 안 잘 수 있고 싫은 일이 있을 때는 잠으로 때울 수 있는 것, 이런 맨 쓸데없는 것을 여러분은 좋아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은 다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말을 듣기 싫으니까 하는 소리가 ‘하나님이 정말 있는 거예요?  정말 날 사랑하세요?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이 맞는 겁니까? ’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실상은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하나님이 하라는 것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성경이 가지는 권위, 절대성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하고 싶은 방법등 모든 것을 성경이 금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갖는 그 죄악된 성품의 공통된 본성이 뭐냐 하면 자기가 신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왕이 되고자 하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을 내 손 하나로 움직이고 싶은 것입니다. 교만이고 유아독존입니다. 나만이 신입니다. 누구든지 내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싶고 내 손에서 갖고 놀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고 높아지고 싶으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리는 것입니다.

하기 싫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십니까? ’ 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내용들, 우리가 소유해야 되는 믿음의 내용들에 대하여 절대적이고 권위 있는 명령을 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요구와 부딪히기 때문에 권위와 절대 자체를 흔드는 싸움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절대성과 권위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 많이 대응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신다면, 쉽게 이번 겨울에 우리 자식을 대학에 붙여 주신다면, 이것만 올려 주신다면, 이 병만 낫게 해 주신다면’  한편 좀 더 신앙적인 표현을 쓰는 사람은 ‘꿈에라도 좋으니까 한 번만 만나 주신다면’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는 절대로 신앙이 좋아지지 않습니다.

왜냐한면 인간이 신앙 문제에 대해 반발하고 있고 흔들리고 있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권위와 절대성에 대한 싸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욕심과 하나님이 하라는 것 사이의 충돌인데도 사람은 늘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면서도 자기 편을 택하는 미련한 짐승들입니다.

여기가 바로 충돌하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사도행전 13장을 보면서 가장 놀라는 것이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이 하는 전도를, 내용을 설명하는 쪽에서 하지 않고 왕의 명령을 받고 나온 신하가 동네에 서서 ‘왕께서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라고 선포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왕께서 이렇게 하라고 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전도란 가서 설득하는 것 이전에 유일하신 하나님, 온 천하 만물의 유일하신 주권자께서 내가 이렇게 하겠다라고 정한 것을 가서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듣느냐 한 듣느냐는 상대방 책임입니다. 전하는 것만이 우리의 책임이지요. 여기에 전도의 사명이 있습니다. 듣느냐 안 듣느냐는 그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책임 소재의 기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이런 식으로 보십시다. 사동행전 17장으로 가봅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히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삶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22-31 )

자, 바울이 와서 전도를 하는 것 보세요.  ‘하나님이 이제 너희에게 회개하라고 공포했느니라. 회개하라. 돌이켜 회개하라. 하나님이 이제 구원의 문을 여시었다. 그동안은 구원을 받을 방법이 없었으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는 길을 여시었고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시게 하시고 그리고 이제 우리를 향하여 구원의 문을 열었으니 와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정말 천국 가는 것입니까?  진짜입니까? ’ 그것을 따질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고하시면 이렇게 해야 되고 저렇게 하라시면 저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니하면 망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선포이고 공포입니다. 협상이 아닙니다. 진리란 그것을 서로 투표해 가지고 여론에 의해서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신앙의 내용을 그렇게 선언합니다.

이것을 좀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신명기 28장으로 가보십시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우리에게 요구하실 때 왜 그래야 되는가에 대한 어떤 납득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 자신의 권위를 근거로 해서 요구한다는 것을 보셔야 됩니다.

“네가 네 하나님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 28:1-6)

복이라는 것이 따로 있고 이 복을 얻는 방법을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의지하고 세상 방법을 쓰는데 반해서 신자들은 하나님을 동원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복은 따로 없습니다. 복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며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며 우리에게 기쁨과 풍성함과 영광을 주시는 것 그것이 복입니다.

이번에는 15절로 가 봅시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신28:15-19)

그러니까 왜 벌을 받고 어려운 일이 생기느냐 하면 내가 운전을 부주의해서, 공부를 못해서, 돈이 없어서, 실수를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버리면 그는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얼마나 권위적인가를 아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든 인간, 그리고 세상 모든 만물이 하나님이 복 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시면 꽝인 것입니다. 꽝 정도가 아니라 마이너스로 가는 것이지이요. 망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자녀들 공부시키는 문제 때문에 걱정이 많습니다. 서울대 학교가 문제가 이니라 서울에 있는 대학교 가기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는 부모들이 어떤 작전을 쓰기 시작했느냐 하면 일단은 외국에 보냅니다. 미국에도 보내고 호주에도 보내고 대만에도 보내고 여러 곳으로 보냅니다.

게다가 공부 아닌 방법으로 먹고 사는 방법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골프도 치게 하고, 테니스도 시키고, 피아노도 시킵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것이 절대 지혜로운 방법이 아닙니다. 그렇게 할 돈이 있으면, 아주 원색적으로 말씀 드려 헌금하세요. 하지만 헌금한다고 해서 잘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차피 버리는 돈일 바에야 교회에 버려 달라 이겁니다. 그렇다고 거기에다 쓸 돈을 교회에다 쓰면 하나님이 봐주냐 하면 하나님은 안 봐주십니다. 기왕 버리는 거니까 이상한 데에 버리느니 여기다 버려 놓으면 하다 못해 마음이라도 편하기 때문이지요. 옛날에 대한민국에서 제일 못사는 사람들이 어디에 살았는지 아십니까?  물론 뭐 그걸 어디라고 꼭 짚을 수는 없지만 서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과천, 개포동 이런 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수원, 안양 이쯤이면 거기에 그래도 살만한 근거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여기는 어느 곳에도 못살고 문 밖에서 나뭇짐이나 해서 팔아 연명하는 사람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개포동이 개도 포니타는 동네로 바뀔지 누가 알았습니까?  그렇죠?  그때 그 어디에 가서도 살 수 없어서 살던 데가, 갑자기 하루 아침에 땅값이 올라가지고 평당 공이 여러 개 붙는 땅이 된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우리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늘 하는 얘기입니다.

복이란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인정치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벌인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우리 하나님외에 어느 곳에도 닻을 내릴 곳이 없고 근거할 곳이 없습니다. 생명과 진리와 복을 받아낼 곳이 없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얘기하는 모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며 우리가 믿는 바를 얘기할 때도 무엇을 근거로만 얘기해야 하는냐 하면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설명은 권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만하냐, 안하냐라는 것으로는 그 진리와 권위가 좌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으로만 그것은 진리요 권위입니다. 우리가 받다들이지 않으면 우리의 손에 있습니다. 다니엘서 9장으로 가 보십시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현실화되었는가, 우리가 신명기 28장에서 보았던 축복과 저주의 약속이 실제로 어떻게 임했는가 하는 것을 다니엘서 9장에서 봅시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욕은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날과 같아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이 가까운데 있는 자나 먼데 있는 자가 다 주께서 쫓아 보내신 각국에서 수욕을 입었사오니 이는 그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이다 주여 수욕이 우리에게 돌아 오고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마는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사유하심이 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들에게 부탁하여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범을 행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단 9:3-10)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국력이 없어서?  정치, 문화, 군사, 경제력에서 뒤져서요?  아닙니다. 하니님이 이스라에를 바벨론에게 넘겨 주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이 어떻게 멸망했습니까?  저들의 도덕과 윤리가 땅에 떨어지고 특별히 하나님 미워하는 일로 치달았기 때문입니다. 내분이 일어나거나 외적이 쳐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루 아침에 하늘에서 유황불을 내려 다 태워버리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심판자요, 주도자요, 우리의 복을 위하여 우리에게 유일하게 길을 제시하시며 요구하는 분입니다. 그분 외에 우리가 말을 들을 자가 없으며 요구에 응할 대상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울과 바나바가 지금 복음을 들고 와서 전하는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오! 너희가 안 들었느냐?  좋다. 그럼 나는 간다. ” 그것이 이유입니다. 교만이라는 차원에서 하면 안됩니다. 불성실해서는 안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공포하라고 한 내용은 은혜요 긍휼이요 사랑이므로 우리가 더 많이 섬기는 자세와 인내함을 갖고 이것을 선포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으로 변질되거나 타협될 수 없는 것만은 마음에 분명히 기억하고서 이 증인 노릇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계속해서 나중에 이렇게 요구합니다. “이 백성을 돌이켜 주십시오. ” 돌이키기 위해서 무슨 독립 비밀 결사가 새기는 것도 아니고 외국의 어떤 나라에 도움을 청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 하나입니다. 9절에 있는 것과 같이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사유하심이 있사오니” (단9:9a). “이제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겠다고 허락하시면 무슨 일, 어떤 상황에서도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어디서 보았습니까?  출애굽 사건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신앙적으로 싸우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든든케 하고 여러분을 모든 세상의 위협과 유혹 안에서 튼튼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저금이고 건강이고 지위라면 여러분은 참으로 불행한 겁니다. 여러분을 흔들 수 없는 것은 이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고 내가 그의 기뻐하시는 길 가운데 있는 한 그 무엇도 우리를 흔들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악쓴 사람은 나중에 지옥에 가서 이빨이 몽땅 빠질 겁니다. 우리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불안해 하며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내 영혼아! 너는 어찌하여 근심하며 걱정하며 불안해 하는고’.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자꾸 놓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하나님이 하라는 것 사이의 갈 등을 대등하게 하고 있어서 우리의 싸움은 생겨납니다. 그것을 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누구시며 세상이 무엇인가를 비교하십시오. 그러면 갈등이 있을 수도 없고 전투가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건 말도 안되는 싸움이니까요. 그럼 분명해집니다. 하라는 대로 순종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살아 생전에 그 열매와 그 기쁨을 맛볼 것이고 죽어서 다시 천국에 가서도 영원무궁토록 아주 지겹도록 행복하게 살아가는 날을 경험하실 겁니다. 이것을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근거는 이것뿐입니다. 그 타당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와 절대적 지위에 있습니다. 그분이 이 땅을 만드셨고 우리를 만드셨고 천국을 준비하셨고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의 영원한 복을 준비하시고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분을 붙잡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신앙이 승리하시기를 바라고 세상과 사람에 의해서 흔들리지 말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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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5 사도행전 출발과 끝 행18:9-11  박영선 목사  2009-07-02 1625
1724 사도행전 의지적 예정 행18:5-11  박영선 목사  2009-07-02 1769
1723 사도행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행18:1-4  박영선 목사  2009-07-02 3064
1722 사도행전 철학과 과학 행17:22-31  박영선 목사  2009-07-02 1576
1721 사도행전 코카콜라 행17:16-21  박영선 목사  2009-07-02 2360
1720 사도행전 성경을 상고함 행17:11-14  박영선 목사  2009-07-02 2486
1719 사도행전 주 예수를 믿으라 행16:26-34  박영선 목사  2009-07-02 3465
1718 사도행전 신앙의 구걸 행16:26-34  박영선 목사  2009-07-02 1711
1717 사도행전 기도와 찬송 행16:22-32  박영선 목사  2009-07-02 2216
1716 사도행전 점치는 여인 행16:16-23  박영선 목사  2009-07-01 1995
1715 사도행전 여자, 루디아 행16:11-15  박영선 목사  2009-06-29 2183
1714 사도행전 동역자 행16:6-10  박영선 목사  2009-06-29 2176
1713 사도행전 신앙과 기질 행15:36-41  박영선 목사  2009-06-29 2329
1712 사도행전 3가지 금령 행15:19-29  박영선 목사  2009-06-29 2172
1711 사도행전 은혜로운 율법 행15:1-5  박영선 목사  2009-06-29 1749
1710 누가복음 우시는 예수 눅19:41-44  강종수 목사  2009-06-28 1819
1709 사도행전 율법주의 행15:1-5  박영선 목사  2009-06-26 1871
1708 사도행전 교회의 직분 행14:23-28  박영선 목사  2009-06-26 2356
1707 사도행전 적극적 신앙 행14:21-28  박영선 목사  2009-06-26 1692
1706 사도행전 간섭으로서의 환난 행14:20-28  박영선 목사  2009-06-26 1872
1705 사도행전 세상의 대접 행14:8-18  박영선 목사  2009-06-26 1675
1704 사도행전 근거 행14:1-7  박영선 목사  2009-06-26 1637
1703 사도행전 성직 행13:50-52  박영선 목사  2009-06-26 1807
» 사도행전 기독교의 절대성 행13:44-49  박영선 목사  2009-06-26 2114
1701 사도행전 기독교의 객관성 행13:13-41  박영선 목사  2009-06-26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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