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3가지 금령

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2162 추천 수 0 2009.06.29 21:04:34
.........
성경본문 : 행15:19-29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83 / 1989.11.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아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15 : 19-29

 

오늘 우리가 생각할 말씀은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이 첫 번째 예루살렘 공의회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모세의 법대로 모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을 하는 바람에 이제 이방인 모두에게 ‘이것을 어디까지 지켜야 되는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믿음으로만이냐?’ 아니면 율법도 지켜야 되느냐? 하는 문제를 그 기독교의 뿌리가 되는 사도들로부터 공식적이고도 분명한 기준이 제시되어야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장로들과 사도들을 만나 이 문제를 의논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20, 29절에 나오는 것과 같이 몇 가지 금령을 제정하게 됩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과 피, 이렇게 우리말로 보면 4가지가 됩니다만 실제로는 3가지 금령을 내립니다.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구약 율법에는 피를 먹지 않도록 되어 있고 그 이유는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를 먹는 것은 생명을 해하는 표가 된다고 해서 금령으로 하고 있는데 목매어 죽인 것을 금하는 것도 동일한 원리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죽인 것, 말하자면 칼로 상하게 했다든가 하면 피가 흘러나오고 죽을 텐데 목매어 죽인 것만은 피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목매어 죽인 것을 먹는다는 건 피째로 음식을 먹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이 한 항목으로 들게 하면 음행, 우상의 제물과 더불어 이 3가지 금령이 되는 셈입니다.

문제는 이 금령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입니다. 왜 이 금령을 제정했느냐 하면 율법으로는 구원 얻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얻을 뿐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정한 겁니다. 즉 이 금령은 율법에 대한 오해를 없이 하기 위해서 만든 것인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구약의 십계명이 이제 신약에 와서는 이 3계명으로 줄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앞의 15 : 6부터 보시면 이 금령을 제정하는 데 있어서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했던 사도들과 장로들이 구원의 조건으로서 율법은 아무 문제가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행 15 : 6-9)

 

이방인이라는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유대인이 아니라는 정도가 아니라 율법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모든 사람과 율법을 준행한 적이 없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들도 구원하지 않았느냐는 베드로의 말입니다.

 

율법이 구원의 조건으로 등장한 적이 없지 않느냐? 이방인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 그럼, 구원을 얻었다는 걸 뭘로 아느냐? 저희도 우리와 똑같이 한 가지로 성령을 받지 않았느냐? 이것이 분명하게 이해되고 넘어가서야 이 금령이 제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3가지 금령은 절대 십계명을 3가지로 축소한 것도 아니고 구원을 얻는 조건으로 지켜야 될 의무와 책임으로서 신자들에게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해야 됩니다.

 

그러면 결국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고 피를 먹을 수 있고 음행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래서 도대체 이 문제가 뜻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더 살펴볼 필요가 있게 되는 겁니다. 저는 이런 말할 때는 겁이 나는데 나중에 가서 딴소리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상 제물을 먹을 수 있다” 어디 가서 이렇게 얘기하지 마세요. 그러지 마시고 무슨 얘기를 하다가 했는가를 꼭 덧붙여 설명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음행을 해도 괜찮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구원의 조건과는 상관이 없다는 차원에서 말입니다. 음행할 수 있는 기생 라합도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니 이건 오해하지 말자는 겁니다. 이제 우리가 무슨 윤리적, 도덕적, 율법적 차원에서 다른 짓을 한다 해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에서 끊기지는 않습니다. 어느 것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은혜를 방해하지 못합니다. 여기까지 이해가 되십니까?

 

이 점을 분명히 해놓고 이제 이 뜻을 점검하기로 하면 나중에는 왜 이 금령을 정했는가를 알게 됩니다. 이 금령은 하지 말라는 금령입니다. 그런게 이것이 구원의 조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하지 말라’ 그랬느냐 하는 것을 이해하기로 합시다.

우선 우상 숭배와 제물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우상의 제물을 피하라, 멀리하라 이겁니다. 여기서 분명히 ‘우상 제물을 먹을 수 있고 음행을 할 수도 있다’는 이 말은 신자라는 걸 전제했을 때 하는 말입니다. 신자라는 걸 전제해야 한다는 건 신자를 대상으로 해서 주어진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금령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금령이 아닙니다. 우상 제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신자란 이미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는 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 외에 또 다른 신이 있다고 인정을 하면 그는 일단 신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상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 제물 문제를 논하는 겁니다. 어떻게 논하는가 보십시오. 고린도전서 8장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 : 4-6)

 

자, 우상 제물 먹는 일에 대해서 왜 우리가 거리낄 게 없느냐 하면 우상이라는 존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원래 우상 제물이라는 건 그 우상을 신으로 인정하고 그 신을 경배하는 일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상이 우리에게는 뭘로 보입니까? 그냥 나무 조각품 내지 돌 조각품에 불과한데 거기에 놨던 떡을 왜 못 먹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으니까 우리에게는 더 이상 제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제물이지 우리에게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 8 : 7-9)

 

우린 괜찮습니다. 우리에겐 우상이 아닙니다. 그냥 헛된 짓인 것을 알기 때문에 음식 먹는 게 문제가 없는데,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저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데 제우스 신도 믿는구나. 그러면 하나님도 신이고 제우스도 신이고 신이 여럿 있는데 저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고 우리는 무슨 다른 신을 섬기는 거로구나’ 하는 식으로 오해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네 자유를 절제해라’ 하는 겁니다. 이 금령은 여러분 잘 보십시오. 이것을 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네가 소유하고 있는 신앙의 핵심이 남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그것을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이걸 안다면 지옥 가는 게 아니라 상급이 적고 하나님 일에 도움이 안되는 겁니다. 이걸 안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옥으로 보내지는 않습니다. 허나 우리가 믿는 바 우리의 신앙의 목적은 지옥 가느냐 천국 가느냐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풍요로운 영광 된 자리까지의 초청입니다. 그래서 이 금령을 제정하는 것입니다.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않자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들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 8 : 10-13)

 

이것이 이 금령의 골자입니다. 그래서 8장을 어떤 시각에서 사도 바울이 쓰고 있느냐 하는 것을 이제 되짚어 보겠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 : 1, 2)

 

죄가 아니라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린 무엇을 위해 부름받고 있냐 하면 지식만이 아니라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자리까지 부름을 받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을 때 예수님이 옳고 그른 것을 위해서 오시지 않고, 심판을 위해서 먼저 오시지 않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기 위하여 은혜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먼저 오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당신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는 일을 감수하는 것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일부터 하시고 그 후에야 심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가 아는바 지식에 자유함이 지식의 내용이 옳고 그르냐 하는 심판의 차원을 벗어나서, 내 이웃에게 사랑과 덕을 끼치는 자리까지 가기 위하여 마땅히 절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음행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전통적 가치관은 이 음행하는 일에 대하여 굉장히 가혹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우리나라 교계에서는 십계명 중에 제 칠계명인 ‘간음치 말라’ 하는 것이 가장 큰 무게를 가집니다. 대신 어떤 계명이 약화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는 것과 거짓말하지 말라 하는 것은 굉장히 약화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서구 사회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히 훨씬 무게가 큽니다. 아무튼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이 3가지 금령 중, 음행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음행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고, 그 내용상 가장 심각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여기에 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사회가 이 음행의 문제를 악습으로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이것이 용인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 조선시대 같은 때에 첩실을 두는 것이 용인된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고대 사회로 갈수록 부권이 강하고 여권이 낮아서 여자들은 노동력이나 쾌락의 도구로 많이 유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에서 용인되었으므로 범죄인 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교회에서 교회법으로 금령으로 제정하여 막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입니다. 13절 말씀부터 봅니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니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 : 13-20)

 

음행을 멀리하려고 하는 것은 그 시대가 가졌던 악습으로부터 신자들을 신자가 갖는 신앙의 거룩한 것으로써 저들과 구별짓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말하자면 신자들이 갖는 신앙의 고귀함을 윤리와 도덕적 차원에서도 그 내용의 어떤 부분들을 가능한 한 기독교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까지도 나타내기 위한 규칙으로서 이 금령이 주어지는 겁니다. 이런 악법들은 뜻밖에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백인 사회에 가면 인종 차별이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종 차별을 하는 곳에 가면 백인이 쓰는 화장실과 유색 인종이 쓰는 화장실이 다른데 “color man please" 하고 화살표가 되어 있고 장미꽃이 하나 꽂혀 있습니다. 백인들 쓰는 데는 안 껒아 놓고 유색 인종 쓰라고 하는 데는 꽃을 달아논 게 우대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우대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괄세하는 겁니다. 예의있게 괄세하는 거죠. 그렇죠? 웃으면서 능멸하는 겁니다.

 

이런 예는 뜻밖에 많습니다. 제가 유학시절 들렸던 어떤 미국인 가정에서는 제가 신학을 하러 왔다는 걸 알고 대접을 해준 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집 꼬마가 이렇게 질문했던 것을 들었습니다. “엄마 저 사람도 우리랑 똑같이 천국 가?” 그러니까 그 어머니가 뭐라고 대답을 했냐 하면 제가 잘못 들었기를 바랍니다. “같이는 가는데 상은 달알 어떻게 똑같겠니?” 그러더라구요. 아, 이런 괘씸한 일이 있습니까? 나중에 천국 가면 그 여자만은 꼭 한번 확인해 보려고 그럽니다.

 

인종 차별 같은 것이 분명하게 악법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서구 사회가 흑인들을 노예로 만들 때 신앙적 근거를 갖고 썼다는 걸 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가나안 족속을 멸절하라는 명령을 받고 들어간 것을 거기까지 확대 해석해서, 흑인들은 하나님이 백인들의 종으로 믿고 썼으니 말입니다. 이런 것들을 깨우치며 영혼이 동등하다는 것과 기독교 내용의 진수들을 사회적인 악법에서부터 구별시키는 것으로써 저들에게 펼쳐 보이는 일로 삼고저 해서 이 금령이 제정된 겁니다.

 

우리 사회는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술, 담배를 금지시켰는데 사실은 같은 맥락입니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제일 놀란 것은 열 살짜리, 열한 살짜리가 담배를 피더라 이겁니다. 왜냐하면 일찍 장가를 가서 어른 표가 뭐였냐 하면 술, 담배하는 거였거든요. 여러분 서부 활극에서도 보셨겠습니다만 커크 더글러스나 버트 랑카스타가 술집에 와서 “위스키 더블” 그래 봤자 반 잔도 안되게 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린 뭐예요? 완전히 세수대야에다 먹잖아요. 그래서 더욱 놀란거죠.

 

그래서 그것을 금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구원을 얻고 못 얻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름다운 규칙입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지켜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가면서는 아편을 금지시켰는데 그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조금 전 본 바와 같이 ‘피’입니다. 이 금령을 정한 이유에는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행 15 : 21)는 단서가 붙습니다. 이때 이미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기도 하고 그리이스 침공을 받기도 하고 이제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고 해서 유대인들이 산지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자기네 종교를 지켜서 어느 곳에서나 회당을 짓고 자기네 종교를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 유대인들에 의해서 기독교의 뿌리인 구약의 모세의 율법이 상당히 많이 전달됐는데 그 뿌리로부터 열매를 맺은 기독교적인 신앙이 이것과 너무 처음부터 크게 충돌하는 것으로 인하여 제3자에게나 당사자에게 오해가 없게 하려는 배려가 여기 숨겨져 있습니다.

 

피와 목매어 죽인 것, 이 부분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아주 엄격한 율법적인 기준을 갖고 있으므로 그들과 크게 충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데 서로가 거치는 돌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 금령을 제정합니다. 말하자면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결정한 이 3가지 금령들의 의의는 ‘죄냐 아니냐’라는 기준도 아니고 구원의 조건으로서도 아니고 보다 높은 배려의 차원이란 것입니다. 기독교의 내용이 이방인들에게 전달될 때 저들로 하여금 이 내용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최소한의 도움이라도 되게 하기 위해서 또 기독교의 뿌리가 되는 율법을 갖고 있었던 유대인들 당사자들에게도 이 복음이 시험거리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의 의미에서 이 금령이 제정되었다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이방인들에게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오해되거나 다른 것과 섞이지 않게 되고 유대인들은 실족치 않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지난 번 율법이 어떻게 은혜와 손을 잡느냐 하는 것을 설명해 드린 것과 연결해 보시길 바랍니다. 결국 율법의 완성이 사랑인 것과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 게 아니라 구원을 얻으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들은 이 금령을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복음을 함께 나눌 연약한 심령 혹은 아직도 복음을 받지 못한 그늘에 있는 심령들에게 이것이 전달될 때 방해될 만한 요소들을 미리 절제하고 규제하기 위하여 제정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자으로 가 보시겠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 : 23b, 24). 이것이 골자입니다. 그래서 거기 다시 우상 제물에 관한 얘기가 나옵니다만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전 10 : 25-28)

 

눈 감고 아웅하는 것 같지요? 그 시대의 고기와 육류는 전부 국가적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진 다음에 시장에 나왔습니다. 순전히 식용만은 위한 도살장이 없었습니다. 모든 육류가 다 제물이었으니까요. 그것을 먹으면 국가적 우상을 섬긴다는 뜻이 됩니다. 그것 외에는 다른 데로 육류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 말씀드린 것과 같이 신자에게는 하나님 외에 신이 없습니다. 무엇을 먹든지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남이 ‘그거 제물이다’ 그러면 먹지 말라 이겁니다. 왜요? 그럼 그 사람이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아 저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우리나라에서 섬기는 신도 믿는구나’ 이렇게 오해할 테니까 하지 말라 이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먹어도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고전 10 : 26). 모두 다 하나님의 것인데 다른 신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고전 10 : 29, 30)

 

내 양심과 내 신앙과 자유가 왜 남 때문에 방해를 받겠습니까? 내 자유가 남의 것입니까? 남의 판단을 받을 겁니까? 그러나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도록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유대인에게나 헤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지 않아야 됩니다. 내 양심은 내 것이고 내 신앙 자유도 내 것이지만 이제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내 신앙 양심은 내 것만이 아니요 내 이웃의 것이며 내 신앙 자유는 내 것만이 아니요 내 이웃의 것입니다.

 

만일 내가 알고 깨우친 바 구원과 진리를 내 것만이라고 고집하고 남은 나 몰라라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빚진 것도 없고 우리에게 답답할 것도 없는 분입니다. 주닙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전혀 자신을 돌보심이 아니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죄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댜. 따라서 우리가 가진 바 신앙의 내용, 신앙의 양심, 신앙의 자유도 내 것만이 아닌 것입니다. 주께서 자기 것만으로 갖지 않으셨기 때문에 내 양심과 내 자유도 내 것만이 아니요 내 이웃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금령들이 구속력을 가집니다. 가능한 한 지금 이 시대를 살면서 여러분은 사치하거나 허영하지 않기를 부탁합니다. 그러나 혹시 누가 화려하게 입고 사치한다고 해서 흉보지는 맙시다. 이것으 법도 아니고 죄의 기준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것같이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는 겁니다. 누가 잘 차려 입고 오면 저는 이렇게 합니다. “야! 참 멋있습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삐쭉거리지 않습니다. 또한 누가 슬퍼하고 어려워 하면 “어휴, 어떡하면 좋습니까?” 그리고 기도합니다. 잘 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할 일이 없을 뿐입니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하는 것만 다를 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가서 뭐라고 그럴 게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 입은 그 옷이 얼마짜리인데 그거 입어가지고 되겠느냐고 싸울 필요가 하나도 없어요. 그 기뻐하는 것이 그분에게 있어서는 어쩌면 여태껐 어렵게 살다가 한번 처음 반짝 해본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아무렇게나 가서 뭐라고 그럴게 아닙니다. 내버려 두십시오. 절제 부분은 결국 본인이 해야 되는 것이지 옆에서 요구할 것이 아닙니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이런 원리들을 어떻게 써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룰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6 : 13-15). 잘 보십시오. 결국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모른다는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 : 2)

 

우리가 아는 진리에 대한 지식, 진리로 인한 자유가 나만을 위하여 있지 않고 이웃을 위하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잊고 누구에게나 율법적인 줄자를 대기 시작하면 심판으로 가기 쉽습니다. 또한 심판으로 가면 거기는 꼭 투기와 질투와 당 짓는 것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 13절에서 15절 이후에 ‘육체를 좇지 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된다고 깨달은 그것을 또 율법적으로 써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언제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으로 가야 됩니다.

 

오늘 우리가 깨우친 이런 것들이 우리 개인의 신앙과 교회 분위길로 정착되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 금령들은 이웃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에게 제정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여러분에게 새로운 율법이 되어 남에게 들이대는 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웃을 위해서 절제 하랬잖아요.” 이러며 남을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이 금령을 제정한 이유는 이웃 사랑입니다. 거치는 것이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결과적으로 모두를 다 은혜 아래,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로 몰아 가려는 것입니다.

 

그걸 가지고 다시 칼질을 하지 말아 달라는 말입니다. 다 깨우친 것 같으면서도 다시 넘어집니다. 우상 제물에 참여핮지 말라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오해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보면 이런 문제도 생깁니다. 오늘날 가장 뜨거운 문제로 등장한 것은 선조들에 대한 제사를 지낼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참, 어렵습니다. 정답이 없습니다. 할 수도 있고 또 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제사는 더 이상 종교적인 행위가 아닌 것이 많습니다. 제사가 그냥 미풍양속인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에게는 분명히 종교적인 행위입니다. 종교적인 행위면 안해야 됩니다. 미풍양속이라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든 그 뿌리가 무엇입니까? 종교성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금해야 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혈연 관계를 찢고 목숨을 건 싸움으로까지 갈 필요가 있느냐? 이러면 애매해집니다.

 

그가 믿음이 어려서 가문에서의 요구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드디어 할 수 없이 타협했다면 그가 강해지기를 기다리며 우선은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를 먹이고 입히고 훈련시켜서 나중에 이기게 만들어야지, “너 그랬어. 넌 우리 교회 쪽을 향해서 쳐다도 보지마.” 이건 안되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신자들의 제일 큰 허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왜 사랑이 없습니까? 심판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율법과 계명들이 싸움하는 칼이 되고 있습니다. 이웃을 위한 절제, 연약한 것을 기다려 주고 돌아보는 그 마음이 없습니다. 사랑이란 반드시 두 팔 벌리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마주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리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돌이킬 가능성에 대하여 주 안에서 믿고 기다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그 은혜를 간직하고 그 은혜를 펼치는 사람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이 3가지 금령의 중요한 원리요 의미입니다.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717 사도행전 기도와 찬송 행16:22-32  박영선 목사  2009-07-02 2202
1716 사도행전 점치는 여인 행16:16-23  박영선 목사  2009-07-01 1976
1715 사도행전 여자, 루디아 행16:11-15  박영선 목사  2009-06-29 2168
1714 사도행전 동역자 행16:6-10  박영선 목사  2009-06-29 2156
1713 사도행전 신앙과 기질 행15:36-41  박영선 목사  2009-06-29 2308
» 사도행전 3가지 금령 행15:19-29  박영선 목사  2009-06-29 2162
1711 사도행전 은혜로운 율법 행15:1-5  박영선 목사  2009-06-29 1736
1710 누가복음 우시는 예수 눅19:41-44  강종수 목사  2009-06-28 1803
1709 사도행전 율법주의 행15:1-5  박영선 목사  2009-06-26 1846
1708 사도행전 교회의 직분 행14:23-28  박영선 목사  2009-06-26 2340
1707 사도행전 적극적 신앙 행14:21-28  박영선 목사  2009-06-26 1666
1706 사도행전 간섭으로서의 환난 행14:20-28  박영선 목사  2009-06-26 1862
1705 사도행전 세상의 대접 행14:8-18  박영선 목사  2009-06-26 1670
1704 사도행전 근거 행14:1-7  박영선 목사  2009-06-26 1623
1703 사도행전 성직 행13:50-52  박영선 목사  2009-06-26 1789
1702 사도행전 기독교의 절대성 행13:44-49  박영선 목사  2009-06-26 2097
1701 사도행전 기독교의 객관성 행13:13-41  박영선 목사  2009-06-26 1692
1700 사도행전 살라미에서의 바울 행13:4-12  박영선 목사  2009-06-25 2416
1699 사도행전 헤롯 왕 행12:18-25  박영선 목사  2009-06-25 3662
1698 사도행전 하나님의 지혜 행12:12-17  박영선 목사  2009-06-25 2381
1697 사도행전 하나님의 방법 행12:12-17  박영선 목사  2009-06-25 2612
1696 사도행전 연속성과 불연속성 행13:1-3  박영선 목사  2009-06-25 2239
1695 사도행전 성경적 종말관 행11:27-30  박영선 목사  2009-06-24 2067
1694 사도행전 고넬료 행10:1- 11:18  박영선 목사  2009-06-22 3990
1693 사도행전 애니아와 도르가 행9:32-43  박영선 목사  2009-06-22 2566
1692 사도행전 든든히 서가는 교회 행9:23-31  박영선 목사  2009-06-22 2840
1691 사도행전 바뀌어진 바울 행9:10-30  박영선 목사  2009-06-22 2311
1690 사도행전 바뀌어진 사울 행9:1-9  박영선 목사  2009-06-22 2597
1689 사도행전 민족주의를 넘어서 행8:14-17  박영선 목사  2009-06-22 1557
1688 사도행전 마술사 시몬 행8:9-24  박영선 목사  2009-06-22 3066
1687 사도행전 빌립 집사 행8:5-8  박영선 목사  2009-06-22 3569
1686 사도행전 흩어진 사람들 행8:1-8  박영선 목사  2009-06-22 2181
1685 마태복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마27:38-42  강종수 목사  2009-06-21 2121
1684 사도행전 스데반과 성전 행7:44-50  박영선 목사  2009-06-20 2029
1683 사도행전 스데반과 율법 행7:30-38  박영선 목사  2009-06-20 1863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