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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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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 Nouwen, The Way of Heart,
이봉우 역, 마음의 길 (경북 칠곡: 분도, 2005. 7쇄) pp. 71-96.
본문 중에서 가톨릭 용어로 개신교 용어로 고쳐야 할 부분이 있어 몇 곳은 고쳤습니다.(예: 하느님→하나님 등) 그리고 가톨릭 용어라도 그대로 두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예: 강복. 사목 등을 축복, 목회 등으로) 고쳐도 문제는 없겠으나 저자의 뜻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대로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대로 옮깁니다. 대부분은 이해하기 어려움이 없을 듯하며 조용히 읽고 묵상하면 큰 도움이 될 줄 압니다.-고려수도원-
서론
아르세니우스(A.senlus)가 두 번째로 "주여 저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소서" 하고 청하였을 때, 그에게 대답한 음성은 "침묵을 지켜라" 하는 말뿐 아니라 또한 "항상 기도하라"는 것이었다. 항상 기도하는 것, 이것이 사막생활의 진정한 목적이다. 고독과 침묵은 끊임없는 기도에 대한 소명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단순히 고독이 분주한 일에서의 도피이고, 침묵이 시끄러운 환경으로부터의 도피라 한다면 고독과 침묵은 끊임없는 기도에 대한 소명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단순히 고독이 분주한 일에서의 도피이고, 침묵이 시끄러운 환경으로부터의 도피라 한다면 고독과 침묵은 쉽게 매우 자기중심적인 금욕주의의 형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독과 침묵은 기도를 위한 것이다. 사막의 교부들은 고독을 홀로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침묵을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생각했다. 고독과 침묵은 기도가 행해지는 자리이다.
"항상 기도하라"는 말의 축어적 번역은 "와서 쉬시오"이다. "쉰다"는 의미의 희랍어는 hesychia이고 헤서케즘( hesychasm )은 사막의 영성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헤서케스트는 끊임없는 기도의 길로서 고독과 침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헤서케스트들의 기도는 휴식의 기도이다. 그러나 이 휴식은 갈등이나 고통의 부재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것은 매우 격렬한 일상의 투쟁 한가운데서 하나님 안에 쉬는 휴식이다. 압바 안토니우스는 한 동료 수도자에게 그것은 "한 사람의 큰 과업에,‥‥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제 유혹을 견디어내는 데에" 속한다고까지 말한다. hesychia, 즉 끊임없는 기도에서 나오는 휴식은 설령 육체가 요구하고 세상이 요구하고 그리고 악마들이 시끄럽게 굴때 일지라도, 어떠한 희생을 치fm더라도 추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사막의 교모들 가운데 한 분인 암마 테오도라(Amma Theodora)는 다음과 같이 명확히 언급했다:
‥‥만일 우리가 평화롭게 살려고 할 때면 즉시 사악한 것이 와서 권태감(accidie)과 나약함 그리고 사악한 생각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압박한다는 사실을 우리 는 알아야 한다. 또한 그것은 무릎과 모든 지체의 질병을 통해 우리의 육신을 쇠약하고 나약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공격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우리의 영혼과 육신의 힘을 낭비시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병이 들어 더 이상 기도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경계하고 있으면 이 모든 유혹들은 사라진다.
설령 무릎의 나약함이 우리의 중요한 불평거리가 되지는 않는다할지라도 흔히 우리 사목자들에게는 기도를 멀리하기 위한 아주 재치 있고 세련된 구실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기도는 일찌기 사막의 교부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기도의 역할에 대해 살펴 보았다. 나는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도를 근원적으로 지성(mind)의 활동으로 보려는 경향에 대해 나의 의구심을 표시하고자 한다. 그 다음 나는 헤서케스트들(hesychasts)의 기도를 마음(heart)의 기도로 제시하고자 한다. 끝으로 나는 이 마음의 기도가 우리의 일상적인 사목의 중심이 되도록 하려면 어떠한 방식의 수련이 요구되는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지성의 기도
기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인 할 사목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기도가 자신들의 생활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목자들은 기도를 아주 적게 하거나 전혀 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기도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기도는 그들의 생활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는 있다. 그러나 이모든 "해야 한다는 것들" ( shoulds )은 실제에 있어 그들의 활동주의(행동주의)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항상 한 번 더 전화를 걸 곳이 있고, 한 번 더 편지를 보낼 곳이 있으며, 한 번 더 방문할 곳이 있고, 한 번 더 참석할 모임이 있다. 그리고 한 번 더 읽어야 할 책이 있고, 한 번 더 가야 할 파티가 있다.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이와 같은 일들은 극복하기 힘든 활동의 더미를 형성한다. 이렇듯 기 도의 관념에 대한 지지와 기도의 실행에 대한 지지 사이의 현저한 차이는 너무나도 눈에 잘 띄기 때문에 암마 테오도라가 아주 생생하고도 자세하게 기술한 바 있는 사악한 것의 계략에 우리는 아주 쉽게 넘어가곤 한다. 이러한 악마적 계략 가운데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근본적으로 우리의 제 지능과 관련된 지성의 활동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편견은 기도를 하나님과 이야기를 하는 것이나 혹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으로 한정시킨다. 그래서 우리들 대부분에게 있어서 기도는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리고 기도는 보통 아주 일방적인 일로 여겨지기 때문에 단순히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큰 좌절을 낳기에 충분하다. 만일 내가 하나의 문제를 제시하면 나는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을 기대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만일 내가 문제를 고안하면 나는 그 대답을 기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일 내가 기도를 청하면 나는 그것에 대한 응답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점점 더 내가 어둠 속에 대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될 때, 나는 곧 나의 하나님과의 대화가 사실은 독백이라는 것을 알아채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면 나는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즉, 나는 정말로 누구에게 말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인가 아니면 나 자신에게인가? 때때로 대답의 부재는 우리로 하여금 올바르지 못한 기도를 바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끔 하는데 대개 우리는 사기를 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속히 "이 모든 어리석은 짓"을 그만둔다. 우리가 숨바꼭질의 명수인 것처럼 여겨지는 하나님과 함께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가 있는 말을 요구하고 응답하는 실재하는 사람들과 함께 말하는 것을 더 원한다는 사실은 이런 관점에서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좌절로 인도할 수 있는 또 다른 관점이 있다. 그것은 기도의 의미를 하나님께 대한 생각으로 제한하는 관점이다. 우리가 이것을 기도라고 부르든, 명상이라고 부르든 그것은 별 상관이 없다. 여기서 기본적으로 분명히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과 당신의 신비에 대한 사상들을 생각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기도는 특별히 반성적 사고력이 우리의 강점 중의 하나가 아니라면 그것은 힘든 정신노동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고된 것이 된다. 우리는 다른 많은 실제적이고 절박한 것들을 우리의 정신 속에 이미 지니 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해 생각하는 것은 또 하나의 커다란 짐이 된다. 또한 절박한 관심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인 반면에 하나님께 대해 생각하는 것은 자연발생적인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특별히 더 그러하다. 하나님께 대해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자세한 조사나 분석을 요하는 주제로 만든다. 그러므로 여기서 성공적인 기도란 하나님께 대한 새롭고 지적인 발견으로 인도하는 기도이다. 마치 심리학자가 한 사례를 연구함에 있어 모든 이용할 수 있는 자료 가운데서 통일성을 발견함으로써 통찰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훌륭하게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해서 알려진 모든 것에 관해 깊이 생각함으로써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이처럼 하나님께 말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의 좌절 감내성(挫折堪耐性)은 아주 저조하다. 그래서 기도를 그만 두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책을 읽거나 또는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할 글을 쓰거나 설교를 쓰는 것이 미지의 세계 속에서의 그러한 정신적 방랑보다는 더 큰 만족을 주기 때문이다.
기도에 대한 이상의 두 견해는 지능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는데 높은 가치를 두고 있는 문화의 산물이다. 여기서는 모든 것은 이해될 수 있고 이해된 것은 통제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하나님 역시 해결해야 할 문제이고 우리는 지성의 격렬한 노력으로써 그 해결책을 발견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의 가운이 사목자의 공식 복장이고 설교단에 설 수 있는 주요 기준 가운데 하나가 대학교의 학위라는 것도 그렇게 이상한 것이 아니다.
물론 이것은 지능이 기도생활에 개입될 여지가 없다거나 혹은 신학적 반성과 기도가 서로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북미주 제 교회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지성주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교회 건물 밖에서 뿐 아니라 안에서도 바쳐지고 있는 지성지향적인 사목자의 공적 기도들이 만일 그들의 기도생활의 상태를 드러내는 표시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확실히 제 세미나에 참여하시기에 바쁘실 것이다. 어떻게 우리는 지성이 그의 한계를 넘어서 혹사 당하고 이미 일정에 잡혀 있는 많은 것에 또 하나의 기운이 빠진 활동으로 첨가되는 기도생활에서 그 누가 과연 진정한 영양과 위안 그리고 위로를 얻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지난 십 년 동안 많은 사람이 지능의 한계를 발견하였다. 더욱더 많은 사람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흥미있는 설교나 흥미있는 기도보다 휠씬 더 중요한 무엇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을 확실히 체험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성령운동은 이러한 새로운 추구에 대한 두드러진 응답이다. 선(禪)의 인기나 제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만남의 기법들의 시도 역시 하나님을 체험하고자 하는 새로운 욕망의 표시이다. 갑자기 우리는 "우리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갑자기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영역으로 통하는 길을 보여 달라는 요청을 우리가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우리의 기도생활의 위기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 우리의 지성(머리)이 하나님께 대한 관념으로 차 있다는 데 있다. 참된 기도는 마음에서 나온다. 사막의 교부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바로 이 마음의 기도에 대한 것이다.
마음의 기도
영혼을 하나님과 함께 머무를 수 있는 휴식으로 인도하는 헤서케시즘적(hesychastic) 기도는 마음의 기도이다. 매우 지성 지향적인 우리에게 있어서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고 마음에서 기도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특별히 중요하다. 사막의 교부들은 우리에게 그 방법(길)을 보여 준다. 그들은 기도에 대한 어떤 이론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구체적인 이야기들과 권고들은 후에 희랍 정교회의 영적인 작가들이 매우 인상적인 영성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 그 기초를 제공했다. 시나이 산과 아토스 산 그리고 19세기 러시아의 (영적 지도자들의) 스타트 시의 영적인 작가들은 모두 사막의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는 러시아의 신비적인 은수자 테오판(Theophan)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 마음의 기도의 가장 좋은 공식을 발견하게 된다:
기도하는 것은 지성과 함께 마음속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당신 안에 영원히 현존하시며 널리 만물을 내다보시는 주님의 면전에 서는 것이다.
모든 세기를 통해 기도에 대한 이와 같은 견해는 헤서케즘에 있어서 중심이 되어 왔다. 기도는 마음에 지성이 함에, 즉 구분이나 구별이 없고 우리가 완전히 하나라는 우리 존재의 일치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현존 안에 서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마음이 마음에게 말한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서 널리 만물을 내다보시는 주님의 면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의 마음이라는 말은 전적인 성서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 주위에서는 마음이라는 말이 부드러운 말로 통용되고 있다. 그것은 감상적인 생활의 자리를 의미한다. "비탄에 잠긴"(heartfelt)과 같은 표현은 흔히 마음을 우리의 생각들이 그들의 고향으로 알고 있는 냉정한 지성과 대조하여 정서들이 있는 따뜻한 곳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나 유대계 그리스도교의 전통에 있어서 마음이라는 말은 모든 신체적·정서적·지성적·의지적 그리고 도덕적 에너지의 원천을 의미한다.
마음에서 의식적인 감정이나 기분 그리고 원의 뿐 아니라 알 수 없는 충동도 일어난다. 또한 마음은 그의 이성을 가지고 지각과 이해의 중심을 이룬다. 끝으로 마음은 의지의 자리이다. 즉, 마음은 계획을 세우고 훌륭한 결정을 내린다. 따라서 마음은 우리의 개인 생활의 중심이 될 뿐 아니라 통합하는 기관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인격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하나님이 거처 하시는 곳일 뿐 아니라 또한 사탄(악마)이 그의 날카로운 공격을 향하는 곳이기도 하다. 기도의 장소는 바로 이 마음이다. 마음의 기도는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있던 상태에서 자신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기도이다. 그래서 우리의 전체 인간성에 영향을 준다.
사막의 교부들 중 한 분인 위대한 마카리우스( Macarius )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훈련하는 사람(즉 수도자)의 주요 과제는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말은 수도자가 자신의 기도를 감정으로 채우도록 힘써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기도가 그 인격 전체를 개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막의 교부들의 가장 깊은 통찰은 마음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마음을 통해 열려 있다. 시리아 사람 이사악(Isaac)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
보고(寶庫)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그것은 당신 안에 있으며, 그리하면 당신은 하늘의 보고를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주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한 곳에 들어가는 데 성공하면 당신은 두 곳을 보게 될 것이다. 하늘나라와 연결된 이 사다리는 당신 안에, 당신의 영혼 안에 감추어져 있다. 만일 당신의 영혼이 죄에서 깨끗해지기를 바란다면 당신은 당신이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의 가로 장을 그곳에서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존 카르파티오스(John Carpathios )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혼란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성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기도 중에 큰 노력과 투쟁을 해야 한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보증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 곳"(고후 13:5)으로서의 장소인 마음 안에 [직역하면 "심장 안에"(endocardial)] 있는 천국인 것이다.
사막의 교부들은 그들의 말을 통해서 기도에 대한 아주 전체적인 견해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그들은 우리의 지적으로 분석하는 습관으로부터 , 즉 하나님을 우리가 비평해야 할 많은 문제 가운데 하나로 삼는 우리의 습관으로부터 우리를 끌어낸다. 그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기도는 우리 영혼의 순수한 곳까지 스며들어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음의 기도는 우리 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흥미 있는 말이나 종교적인 정서에 국한되지 않도록 하는 기도이다. 이러한 기도는 그의 본성상 하나님의 진리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진리에도 영혼의 눈을 뜨게 하기 때문에 바로 우리의 전 존재를 그리스도로 변형시 킨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받아들여진 죄인으로 보게 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우리가 외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통찰력이다. 마음의 기도는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감출 수 없기에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 에 무조건 내맡기는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마음의 기도는 진실한 기도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과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많은 착각을 폭로하고 우리를 자비로우신 하나님과 죄인의 참된 관계로 인도한다. 이 진리는 우리에게 헤서케스트의 "휴식"을 가져다준다. 이 진리가 우리 마음에 정착할수록 우리는 세상 생각에 의해서 덜 산만해지게 되고 보다 더 전심으로 우리의 마음과 우주의 주님께로 향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될 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마 5:8)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현실이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매우 분주하게 사목직을 수행하는 가운데 어떻게 마음의 기도를 실행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제 우리가 우리의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바로 마음의 기도의 수련 문제이다.
기도와 사목
수도자들도 아니고 사막에도 살지 않는 우리는 어떻게 마음의 기도를 실행할 수 있겠는가? 마음의 기도는 우리의 매일의 사목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대답은 기도의 규칙인 일정한 수련의 형식화에 있다. 이런 수련을 형식화하는 데 있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마음의 기도의 세 가지 특징을 들 수 있다:
* 마음의 기도는 짧고 단순한 기도로 양성된다.
* 마음의 기도는 끊임이 없다.
* 마음의 기도는 포괄적이다.
짧은 기도들에 의해 양육됨
우리의 수다스러운 문화적 배경에서 우리가 너무 많은 말을 사용하는 것을 억제하도록 하는 사막의 교부들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듣는 것은 중요하다:
압바 마카리우스(Abba Macarius)는 "사람은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 원로는 말했다. "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무 필요가 없다. 손을 펴들고 '주여,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그리고 당신이 아시는 대로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말하면 족하다. 그리고 만일 갈등이 심하게 일어나면 '주님, 도와주소서'라고 말하라. 그분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아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푸신다."
존 클리마쿠스(John Climacus)는 한층 더 명백하게 말 한다:
당신이 기도할 때 장식적인 말로 자신을 표현하려고 하지 마시오. 왜냐하면 흔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가장 물리치지 못하고 받아들이시는 것은 한 작은 어린이의 간단하고 반복적인 표현이기 때문이오. 당신의 지성이 많은 말을 찾음으로써 신앙심을 혼란시키지 않도록 하시오. 세리의 말 한마디가 하나님의 자비를 얻기에 족했소. 믿음을 가지고 한 겸손한 간청이 우도를 구하기에 족했소. 기도중의 많은 말은 흔히 지성을 환상과 분산에 얽매이게 하기 마련이오. 진심에서 우러난 말은 그 본성상 지성을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소. 당신이 기도 중 어떤 말에 만족이나 혹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 그 지점에서 멈추시오.
이 말씀은 기도하는 데 있어 언어적 능력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람들, 즉 우리에게 매우 도움이 되는 시사이다. 한마디 말의 조용한 반복은 우리로 하여금 지성을 가지고 마음으로 내려가도록 돕는다. 이 반복은 주술(마력)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 마법을 걸거나 혹은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의 말을 듣도록 강요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반복되는 한마디 말이나 문장은 그때 마다 점차로 우리를 집중시켜 그 중심으로 향하게 하고 내적인 정적을 조성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도울 수 있다. 우리가 단순히 조용하게 앉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다리려고 하면 우리는 모순된 생각과 관념들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오 하나님, 오셔서 저를 도와주소서" 혹은 "나의 주님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와 같은 아주 간단한 문장을 사용하거나 혹은 "주님" 또는 "예수님"과 같은 한마디 말을 사용하면 그 기도에 의해서 우리는 혼란에 휩싸이지 않고 그것이 보다 쉽게 우리를 지나쳐 가게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간단히 그리고 쉽게 반복되는 기도는 서서히 우리의 마음에서 혼잡한 내적 활동을 물아내고 그 안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머물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을 만들 수 있다. 그러기에 이러한 반복되는 기도는 마음으로 내려가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사다리와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떠한 말로 기도해야 할지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제 요구와 그 순간의 제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데 일반적으로 성서의 말씀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이 같은 단순한 기도방식은 우리가 그것에 충실하고 그것을 규칙적으로 실행하면 우리를 서서히 휴식의 체험으로 인도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으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적극 개방시킨다. 또한 우리는 이 기도를 매우 분주한 날에도 수행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이른 아침에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다"라는 말을 가지고 하나님의 현존 안에 앉아서 이십 분을 보내면 우리 자신이 서서히 마음에 작은 둥지를 치고 거기서 우리의 바쁜 날의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설령 우리가 말을 하고, 공부를 하고, 정원을 가꾸고, 건축을 하고 있는 동안일지라도 그 기도는 우리 마음에 계속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원한 이끄심을 의식하도록 할 수 있다. 마음의 기도의 수련은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라고 불리는 의미 가 무엇인지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에 이르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든 간에 하나님의 보살피시는 행위에 대한 내적 체험을 하는 데 있다.
끊임없음
마음의 기도의 둘째 특징은 그것이 끊임이 없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사도 바울의 명령을 어떻게 따르느냐는 문제는 사막의 교부들 때부터 19세기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헤서케즘파에 있어서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해 왔다.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의 중요성에 대한 많은 예를 헤서케스트적 전통의 두 말기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사막의 교부들 시대 가운데 메쌀리안들(Messalians)이라 일컫는 한 경건주의 종파가 있던 시대가 있었다. 이들은 지나치게 영성화된 기도에만 접근하고 육체 노동은 수도자들에게 부적당한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었다. 이 종파의 몇 몇 수도자들이 압바 루치우스(Abba Lucius)를 만나러 갔다:
그 원로는 그들에게 "당신들이 하는 육체노동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들은 대답하기를 "우리는 육체노동에는 손을 대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합니다."라고 했다. 그 원로가 그들에게 다시 먹지 않느냐고 묻자, 그들은 먹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이 먹고 있을 때는 누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합니까?" 그러고는 다시 그 원로가 그대들은 잠을 자지 않느냐고 묻자 그들은 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그들에게 묻기를 "당신들이 자고 있을 때 누가 당신들을 위해 기도합니까?"라고 했다. 그들은 그 원로에게 대답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원로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이렇게 묻는 나를 용서하시오. 그러나 당신들은 당신들이 말하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고 있소. 내가 당신들에게 육체노동을 하면서도 어떻게 끊임없이 기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겠소. 나는 갈대를 물에 적셔 새끼를 꼬면서 하나님과 함께 앉아 '하나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당신의 크신 선하심으로 그리고 당신의 한없는 자비심으로 저를 저의 죄에서 구하소서'라고 마음으로 기도하지요," 이렇게 말한 후 그가 그들에게 이것은 기도가 아니냐고 묻자, 그들은 그것을 기도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하루를 일과 기도로 보내면서 대체로 돈을 열세 푼을 버는데 나는 내 돈의 두 푼을 문 밖에 놓아두고 나머지 돈은 음식을 위해 지불합니다. 문 밖에 놓아 둔 돈 두 푼을 가져간 사람은 내가 먹거나 잠잘 때 나를 위해 기도를 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나는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이행할 수 있는 것이오."
이 이야기는 "다른 많은 일로 분주한 우리가 어떻게 끊임없이 기도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매우 실제적인 대답을 제공한다. 그 대답은 이웃을 함께 수반하는 것이다. 나의 자선 행위를 통해 나의 이웃은 나의 기도의 동반자가 되고 나의 기도를 끊임없는 기도로 만든다. 메쌀리안들과 관련된 문제가 없던 19세기에는 보다 신비적인 응답이 주어졌다. 우리는 그것을 <순례의 길>(The Way of the Pilgrim)이라 일컫는 러시아의 농부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에서 발견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나는 크리스찬인데 나의 행위로 말미암아 나는 큰 죄인이다.‥‥ 성신강림 후 제24주일에 나는 기도를 하기 위해 교회로 갔다. 거기에서는 데살로니카 사람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첫째 편지가 낭독되고 있었는데 여러 가지 말 가운데서 나는 "끊임없이 기도하라"(살전 5:17)는 말을 들었다. 나의 지성의 주의를 집중시킨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바로 이 성서 구절이었고, 그래서 나는 어떻게 끊임없이 기도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 다른 일들에 관여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농부는 교회마다 돌아다니며 설교를 들었는데 그가 바라는 대답은 얻지를 못하였다. 마침내 그는 한 거룩한 영적지도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말하기를:
"끊임없는 내적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 정신의 계속적인 열망이다. 이러한 위안이 되는 실천에 성공하기 위해 우리는 좀 더 자주 하나님께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도록 간청하지 않으면 안된다. 더 기도하라. 그리고 더 열렬히 기도하라, 기도가 어떻게 끊임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당신에게 알려주는 것이 바로 기도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다."
라고 했다. 그다음 그 거룩한 영적 지도자는 그 농부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었다. 순례자로서 러시아를 여행하는 동안 그 농부는 이 기도를 그의 입술로 수천 번을 암송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그 기도를 참된 동반자로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어느 날 문득 그는 그 기도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입술에서 자신의 마음으로 옮겨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끊임없이 고동을 치고 있는 나의 마음(심장)이 마치 맥박이 뛸 때마다 그 안에서 기도의 말들을 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나의 입술로 기도하는 것을 포기했다.
여기서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에 이르는 또 다른 방법을 배운다. 그 기도는 내 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혹은 육체노동에 집중하고 있을 때일지라도 내 안에서 계속 진행된다. 이제 기도는 생활을 통해서 나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적극적인 현존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자선 행위와 우리 마음 안에 계신 예수님의 기도의 활동을 통해 우리의 하루 전체가 끊임없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수도자인 루치우스나 러시아의 순례자를 그대로 본받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바쁜 사목직을 수행하는 우리도 끊임없는 기도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고전 10:3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랑하고 일하는 것은 우리가 이따금 생각하는 하나의 관념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내면의 끊임없는 영광송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포괄적임
마음의 기도의 마지막 특징은 그것이 우리의 모든 관심사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지성을 가지고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현존에 참여하게 되면 그때에 우리의 정신적 성향들은 모두가 기도가 된다. 마음의 기도의 힘은 그것을 통해 우리의 지성에 있는 모든 것이 기도가 되게 하는 데 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읍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매우 중요한 서약을 한다. 그러나 슬픈 일은 이와 같은 말이 흔히 선의에서 나온 관심의 표시로만 남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성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속으로 내려가는 것을 배우게 되면 그때에 우리 내적 생활의 일부가 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치유라는 현존으로 인도되고 우리 존재의 중심에 계신 그분에 의해서 감동을 받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말들의 무력한 신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 존재의 중심인 마음이 하나님에 의해서 전 우주를 감싸 안을 만큼 커다란 당신 자신의 마음으로 변형된다는 것은 신비이다. 기도를 통해 우리 마음은 모든 인간의 고통과 슬픔, 모든 갈등과 괴로운 일, 모든 고문과 전쟁, 모든 기아와 고독 그리고 불행을 지탱할 수 있는데, 그것은 어떤 위대한 심리적 혹은 정서적인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즉,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29-30). 예수께서는 우리가 전 세계의 짐이요,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겪는 인간의 고통을 포함하는 짐인 당신의 짐을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짐은 가벼우며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 주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변형될 때 그것을 지탱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와 사도직의 밀접한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노고에 지친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인도하는 수련은 사목직의 수련일 뿐 아니라 또한 기도의 수련이다. 사목직이 단지 우리가 사람들과 그들의 문제에 대해 많은 걱정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한,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거의 조절할 수 없는 수많은 활동을 의미 하는 한, 아직 우리는 우리 자신의 좁고 불안한 마음에 몹시 좌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걱정들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인도되어 거기서 기도가 되면 그때에 사목직과 기도는 하나님의 똑같은 포괄적인 사랑이 드러내는 두 개의 표시가 된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마음의 기도가 짧은 기도로 양육되며 끊임없고 포괄적인 것인지를 보았다. 이 세 가지 특징은 마음의 기도가 영성생활과 모든 사목직의 호흡이고 생명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사실 이 기도는 단순히 중요한 활동이 아니라 우리가 말로 표시하고 싶은, 그리 고 우리가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새로운 생활의 중심이다. 기도가 개인적인 수련을 요구한다는 것은 마음의 기도의 제 특징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독특한 기도가 없는 한 독실한 기도생활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는 성령께 대해 지금보다 귀를 더 잘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살고 일하는 모든 사람을 계속해서 기도 안에 포함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수련은 우리가 산만하고 단편적이며, 그리고 흔히 실망시키는 사목직에서 통합되고 전체적이며, 그리고 매우 만족시키는 사목직으로 옮기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것은 사목직을 쉽게 만들지는 않겠지만 단순하게 만들 것이며 사목직 을 달콤하고 열성적으로 만들지는 않겠지만 영적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목직을 고통이 없고 노고가 없게 만들지는 않겠지만 참된 헤서케시즘적인 의미의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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