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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찬송

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2202 추천 수 0 2009.07.02 00: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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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16:22-32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89 1989.12.31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배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사도행전 16 : 22 - 32

사도행전 16:22-22까지 있는 오늘 말씀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당연시되는 그러나 놀라운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채찍에 맞고 옥에 갇히어서 족쇄에 채워져 있는 바울과 실라가 밤중에 기도하고 찬송하니 지진이 나고 옥토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고 채웠던 착고가 다 풀어지는 그런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실라가 능히 그런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게 할 실력이 있는 사람이고 또 그런 실력이 없다면 이렇게 사도행전에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어려서부터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신앙 생활을 계속해 오면서 가졌던 큰 의심 중에 하나가 이런 사건을 대할 때마다 늘 일어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어려서 가졌던 신앙상의 큰 의문은 지금 이 사건보다 좀더 유명한 사건인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나 되어서야 아들을 하나 얻게 되었는데 그 아들을 하나님이 바치라고 하자 서슴없이 갖다 바쳤습니다. 이 사건은 제가 젊어서 신앙 생활을 하는 동안에 여러 번 아브라함의 신앙과 그 일에 대한 설교를 듣고 그런 신앙의 실천을 할 것을 요구받았었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에도 아브라함과 같아지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 보면 안되더라 이겁니다. 그래서 많은 좌절과 갈등을 겪는 중에 처음에는 ‘ 왜 나는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을 갖지 못할까?’하고 생각을 했었습니다만 좀 지나자 그 질문은 이렇게 변했습니다. ‘도대체 아브라함은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그렇게 좋은 신앙을 가졌을까?’ ‘아브라함은 도대체 어디서 그런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을까?’


그래서 오늘도 이 내용 중에서 도대체 바울과 실라는 어떻게 이런 신앙을 가질 수 있었을까? 이것이 저에게는 훨씬 관심의 초점입니다. 이 문제를 풀어 보려 할 때에 눈에 띄는 구절은 25절에 있는 바와 같이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했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이런 경험이 있겠습니다만 기도하고 찬송하는 일이 일반적으로 동시에 됩니까, 아니면 따로 됩니까?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찬송은 처절할 때 나옵니까, 형통할 때 나옵니까? 찬송은 보통 형통할 때 나옵니다. 그럼 기도는 좌절했을 때 나옵니까, 형통할 때 나옵니까? 기도는 좌절했을 때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여기서는 붙어 있는가 하는 것이 저한테는 이 사건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로 부각됩니다. 보통 기도는 더 이상 인간적인 방법이 없을 때 하는 것입니다. 일반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공통점일 것입니다.

예전에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어떤 간수가 그 글을 쓴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사형 언도를 받고 그 집행일을 기다리는 사형수들은 언제 죽을지 자신도 모르는 채 감옥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형 집행을 하기로 된 날은 간수가 와서 “당신 이제 사형집행이요” 이렇게 얘기를 하지 않고 “면회 왔다” 그런답니다. 누가 면회를 와서 나가자고 해서 따라 나오면 면회실로 가던 길 중간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는 곳이 사형집행소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이르면 간수가 이쪽으로 가라고 툭 친답니다. 그러면 그제서야 ‘아, 오늘이 집행받는 날이구나’하며 감전된 듯이 다 그 자리에 섰다가 예외없이 하늘을 한 번 쳐다본 후 잠시 후에는 고개를 뚝 떨구고 말없이 쫓아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의 모든 노력과 방법을 행하고도 수가 없을 때 마지막으로 쳐다보는 것이 하늘이다”이렇게 그분이 묘사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늘을 본다는 행위가 보통 기도로 나타납니다. 여러분들도 이번에 자녀들 입학 시험 치를 때라든가 혹은 어려운 수술을 받으신 분들은 다 경험하셨겠지만 이 방법, 저 방법 쓰고도 맨 끝에 하는 것이 기도지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아마 바울과 실라도 상당히 좌절감에 빠져서 기도를 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 기도 끝에 해답을 얻고 찬송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건 결코 바울과 실라를 평가절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사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와 찬송에 대해서 가장 많은 작품을 모아 놓은 성경이 시편인데 시편을 크게 둘로 나누면 찬송시가 있고 그 다음에 기도시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로 기도하는 것이고 하나는 주로 찬송하는 것인데 두로 갈수록 찬송시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같은 것은 다 찬송시입니다. 그런데 어떤 시편은 기도와 찬송이 어우러져 있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본 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성경의 사상입니다.

기도와 찬송이라는 전혀 반대되는 상황과 조건 속에서 나오는 것이 어떻게 하나로 묶여 있을 수 있는가? 동시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가? 하는 답을 우리는 거기서 얻어냅니다. 기도는 분명히 절망과 좌절과 무슨 다른 방법이 없는 곳에서 나오는 신음이라면 찬송은 모든 것이 얻어지고 형통할 때 일어나는 감사의 시입니다. 그 두 가지가 어떻게 동시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시편에서는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시편 6편으로 가보십시다.

기도와 찬송이 함께 있는 것 중에도 크게 나누면 이런 두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죄악과 잘못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하나님의 분노와 외면당함 앞에 절망하는 울부짖음 그리고 그 끝에 답을 얻은 찬송이 어우러진 시가 하나 있고, 본인의 잘못과 상관없이 원수들과 대적함으로 말미암아 절망 속에 빠져 있다가 기도하여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고 찬송하는 시, 이렇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시편 6편은 전자에 해당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시며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시 6 : 1 - 10)

기도가 어떻게 찬송으로 끝나느냐 하는 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이 시편 6편은 본인의 잘못과 하나님 앞에 외면당한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떨며 두려워하며 불안해 하며 절망 속에서 그를 찾는 기도로 시작을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돌아보시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를 팽개쳐 버리고 잊어 버리실지도 모른다.’ 그런 불안감속에 빠졌으나 그는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언제는 내가 잘나서 내 편을 들었더란 말이냐?’하는 것을 깨우칩니다.

‘하나님은 그의 인자와 그의 성실하심과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무궁하신 능력과 사랑으로 나를 편들어 주셨지, 내가 언제 하나님 앞에 상받을 만해서 하나님 앞에 상을 받고 하나님께서 나를 편든 적이 있었더냐 말이다. 내가 지금은 잘못했지만 하나님이 나를 그것으로 버릴 분이냐 말이다.’ 이 귀중한 것을 깨닫고 분명히 자신을 얻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서 절대 얼굴을 돌리지 않는 분이며 비천하고 미약하고 그 가슴을 찢고 회개하고 범죄하여 방법이 없는 것을 인하여 세상 사람들은 나보고 너는 끝장 났다고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저를 외면하시지 않을 것을 제가 믿습니다. 나를 놀리던 자들이 오히려 부끄러움을 받을 것이요, 나는 주 앞에 돌아왔으니 주께서 나를 버리시지 않고 다시 영광스럽게 회복시켜 줄 것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그래서 기도와 그 처절의 극을 달리던 상황에서 찬송이 나오게 되고 전혀 상반된 상황 속에서 나와야 될 기도와 찬송이 함께 묶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형태는 시편 44편으로 가서 보십시다. 이번에는 조금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인의 잘못이 문제가 아니라 상황과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이 이제 이 기도를 하고 있는 당사자를 좌절케 하고 두렵게 하고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이게 만든 상황 속에서 기도하여 답을 얻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심으시며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을 밟으리이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수치를 당케 하셨나이다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리이다.(셀라)”(시 44 : 1 - 8) 자, 지금 그를 치러 오는 자 대적들로 인하여 이 사람이 곤궁한 입장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 급박하고 다른 해결책이 없어보이는 이 자리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나님이 어떻게 도우시는 분인가를 회상해 보니 옛날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 주었던 일은 지금 상황보다 더 나빴었던 때도 더 멋지게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따져 보니까 애굽에서 나올 때 우리 손으로 나온 것이 아니요 홍해를 건널 때 우리가 우리 배 타고 우리 노 저어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 건너게 하셨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시며 구름 기둥, 불 기둥으로 인도하시며 아침에는 만나, 저녁에는 메추라기로 먹이셨지 우리 손으로 심고 거두어 먹었던 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지금 당한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이는 것 같은 이 촉급하고 다급한 절망과 불가능의 상태 속에서 불가능과 절망 때문에 결국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기도하다 보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 편을 드는데 세상의 힘이 하나님보다 우세해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적이 있더냐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 깨달음이 그로 말미암아 찬송으로 그의 기도를 마치게 하더라 이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6편에서 그가 자신의 못남과 실수와 죄악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그가 은총을 입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을, 내 못난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와 긍휼로 우리를 다스리신다 하는 찬송으로 결론 맺을 수 있었듯이 지금 시편 44편에서도 보는 바와같이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일이 사면초가요 도무지 묘수가 없어 보이는 것 같지만 온 천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필요하다면 해를 멈출 것이요 필요하다면 바다를 갈라서라도 우리를 그가 기뻐하시는 자리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의 신음과 고통에 찬 비명은 찬송으로 변하게 되더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성경 어디서나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사상인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지금 사도행전 16장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저들이 밤중까지 무엇을 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때까지 기도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거기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 : 25). 게다가 ‘죄수들이 듣더라’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들이 상당히 울부짖었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2차 전도 여행을 떠났는데 바울은 그의 전도여행 동안에 한 번도 환대를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1차 전도 여행때는 에베소서에 들렸다가 돌에 맞아서 죽을 뻔 했었지요? 사람들이 내다 버렸었습니다. 그런데도 일어나서 다시 돌아 갔었고 이제 2차 전도 여행을 떠나서 아시아에서는 일을 잘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몰아내셔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왔더니 반기는 자 아무도 없이 여자 몇명 만난 것 밖에 없었고 그리고 이제 힘을 쓸 만해지니까 붙잡혀서 매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아마 절망을 했었던 것이 훨씬 자연스러웠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절망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호소하고 울부짖었을 것이고 그 울부짖음이 이제 우리가 시편에서 본 바와 같은 경로를 밟아 찬송으로 결실되는 것을 봅니다.

그 시편에서 깨달은 것을 여기서도 깨달았을 것이라는 증거를 좀더 찾아보기로 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으로 갑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 : 8,9) 자, 여기서 우리는 오늘 이 사건에 대한 아주 중요한 힌트를 얻게 됩니다. 바울과 그 일행일 아시아에서 어떤 환난을 당했느냐 하면 ‘아, 이제는 죽었다. 이제는 끝인가 보다’라고 생각할 정도의 환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스스로 생각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우리에게 이런 환난을, 그것도 목숨이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환난을 당하게 하실까?’ 그가 얻은 결론은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그것이 본문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십시오. 자, 이제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혀서 매 맞고 족쇄를 차고 있습니다. 착고에 붙잡혀 있습니다. 수갑을 차고 있는 셈이지요. 그가 거기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전도할 대상도 없고 누구한테 호소할 사람도 없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멋진 것입니까? 고린도후서 1 : 8,9에서 지금 읽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이제는 죽었다라고 생각하자 누구에게 밖에 호소할 수 없었던가요? 하나님에게밖에 호소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무엇을 알았다구요? “하나님으로만 힘을 삼아라”는 진리입니다.

손발이 다 묶였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매 맞았습니다. 그러자 뭐밖에 할 수 없습니까? 기도밖에 할 수 없습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를 막을 때 매를 때릴 수도 있고 감옥에 가둘 수도 있고 사람을 못 만나게도 할 수 있지만 기도를 막을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큰 비밀이고 또한 신자들이 맨 처음 알아야 되는 진리입니까!

갈릴레이가 종교 재판을 받고 “지구가 돈다는 얘기를 취소하라.”하니까 취소하고 나왔습니다. 왜 취소했지요? 그래도 돌 것이니까요. 그가 취소한다고 해서 돌던 것이 안 돌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무엇으로도 하나님 일을 방해받지 않습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기대하고 예상하는 방법과 방식을 일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배우는 것이 바울에게도 중요하고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기도를 막을 방법이 없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잘 입고 잘 살기 위한 방법이 아니듯이, 즉 그걸 방해하는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을 방해할 수 없듯이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도 형통한 세상적인 환경과 조건으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제거하고 제한을 두는 것이 하나님이 이 땅에서 그 분이 하시고 싶은 일은 하는데 방해가 되지를 않는다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찬송할 수 밖에 없지요. 그것을 사도 바울이 집중적으로 기록한 데를 찾아가 봅시다. 빌립보서 4장입니다. 빌립보서는 나중에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끝에 로마에 압송되어 가서 로마의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로마의 감옥에 바울이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빌립보 교회에서 바울에게 위문품과 함께 위문단을 보냅니다.

그래서 그 위문품을 받고 기뻐하며 이 소식을 전합니다. 빌립보교인들이 감옥 생활의 어려움을 위로하는 마당에 자신이 처음 감옥에 갇혔던 곳인 빌립보 감옥 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빌립보서를 쓰는 것입니다.

아마 그때 갇혔던 것과 비교해서 이 글을 쓰는데 그 내용들을 다 함축시키지 않았나 싶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 : 10 - 13)

바울의 지금 그 고마워하는 편지의 내용을 분명히 보셔야 됩니다. 너희가 나를 생각해 준 것은 참 기쁘다, 그러나 궁핍한 것을 채워줘서 기쁘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못 입고 있는데 입을 것을 보내 줘서 기쁘다 이것은 아닙니다. 내가 못 먹고 있는데 먹을 것을 보내 줘서 기쁘다 이것도 아닙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되어서 기쁠 뿐이다, 왜냐하면 나는 입었다, 못 입었다, 먹었다, 못 먹었다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 - 13). 즉 바울은 먹고 못 먹는 것, 입고 못 입는 것으로는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를 흔들 수 있는 것은 그에게 능력 주시는 자 주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얘기하는 것은 오늘 우리가 사도행전 16장 본문에서 그가 기도함으로서 배운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가 배운 건 이것입니다. 그의 기도를 감옥과 채찍과 착고가 방해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일을 세상적인 어떤 것으로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을 배운 것을 통하여 배부른 것과 배고픈 것이 그가 하는 일, 하나님이 하는 일을 흔들 수 없고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사실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어떤 건물을 벽돌로 짓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큰 건물을 지으려면 벽돌이 많이 필요합니다. 벽돌이 만장 있을 때 지은 집과 천 장으로 지은 집은 규모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벽돌로 지은 집은 벽돌이 많을 수록 큰 집이 되고 벽돌이 좋을 수록 좋은 집이 됩니다. 벽돌이 적으면 작은 집이 되고 벽돌의 질이 떨어지면 허름한 집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벽돌로 지은 집은 벽돌이 좋으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벽돌을 빼면 집이 없어집니다.

바울이 하는 얘기는 그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과 내가 가는 길은 세상의 것, 먹는 것, 권세, 입는 것으로는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그것으로 도움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으로 지은 집이 아니라는 뜻이므로 그것을 뺏는 것으로는 무너지지도 않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때리는 것으로는 이 일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에게 권세를 주는 것으로도 이 일은 도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번에 대학 입시에 여러분 자녀들도 많이 실패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합격했다는 소식을 제가 세 가정밖에 접수하지 못했습니다. 그 외에는 다 안된 것이 분명한데 여러분 그것때문에 세상적으로 낙심하시고 마음이 상하신 것은 이해를 하지만 그것으로 신앙 문제가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좋은 학교를 들어가는 쪽이 하나님 앞에도 영광이 되지 않습니까?”라고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이 사상과 어긋납니다.

사도 바울이 초창기에 많이 흔들렸던 것 중에 하나가 이것인 것 같습니다. ‘주의 일을 하려면 내가 건강하고 옷도 잘 입고 길이 형통한 쪽이 낫지 않습니까?’라고 생각했었던 모양인데 하나님은 그래서 처음부터 그의 길을 언제나 환난과 핍박의 길로 인도하셔서 그로 말미암아 세상적인 조건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우선하셨습니다. 마음에 사형 선고를 내리게 했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어떻게 하려 하셨습니까? 오늘 빌립보서 4:13에서 보는 바와 같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려 하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조건으로도 신자가 가는 길은 도움을 받거나 방해를 받아서는 안됩니다. 그에게 능력 주시는 자가 하나님뿐이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여러분은 훨씬 더 많은 세상의 좌절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자녀가 어느 대학에 들어 갔든지 그것으로 절대 하나님이 여러분 자녀를 통해서 하실 일을 방해받지 않으시며 여러분 자녀도 그것때문에 하늘 나라에서 상급을 덜 받지 않습니다.

신자들이 꼭 예수를 믿게 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저를 동원합니다. 그런데 제가 꼭 예수 믿게 하고 싶은 사람에는 보통 두 부류가 있는데 첫 번째 부류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인 경우, 즉 남편, 자식, 부모, 가장 가까운 친구인 경우에 꼭 저 사람을 천국에서도 만나고 싶어서 어떻게든지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해 함포 사격을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님도 오시라고 그러고 목사도 오라고 해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것은 크게 기뻐할 일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부류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지위가 있거나 돈이 있는 사람을 예수를 믿게 하려고 그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도 분명히 예수 믿어야 됩니다. 돈 있고 권세 있다고 해서 안 믿어도 좋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믿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 의도 속에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 사람 예수만 믿게 하면 교회에서 큰 일을 할 사람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돈 많은 게 무슨 도움이 됩니까? 제가 목회를 해 보면 제일 어려운 사람이 누구냐 하면 사회적인 대접을 받는 사람과 돈이 있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신앙에 거침돌이 많이 됩니다. 왜냐하면 밖에서 대접받는 것에 이미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교회 와서 이렇게 별볼일 없는 대접을 받는 것은 못 참습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판단해 보십시오. 당구장에 가면 눈이 크냐 작으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잘 치는 사람이 거기서는 주인공인 셈입니다. 또 유도장에 가면 유도 잘 하는 사람이 최고입니다. 그 사람이 들창코냐 아니냐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교회 오시면 영적인 능력이 앞서는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돈이 있느냐? 사회적인 지위가 뭐냐 하는 건 도무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침돌이 됩니다. 겸손하게 맨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스스로에게도 걸리고 교인들도 그 영향을 받아서 좀 이름있는 사람이 오면 쩔쩔 맵니다. 아닙니다. 사정없이 괄세하셔야 됩니다. 그것과 무관하셔야 됩니다.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힘이 무엇입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를 분명히 소유하고 계십니까? 그분이 일하시는 것을 세상이 어떤 방법으로도 방해할 수 없는 것을 믿으십니까? 또한 우리가 그 앞에 나가는 것을 세상이 무엇으로도 방해할 수 없다는 것도 믿으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당연히 찬송하셔야 됩니다. 아직도 징징거리고 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응답을 안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 신앙이 별볼일 없으신 것입니다. 본인의 신앙 없는 것을 반성해야지 하나님이 응답 안하신다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막을 수 있는 것이 또한 세상에 없는 줄을 우리가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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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sort 조회 수
15124 누가복음 말씀을 듣고 눅10:35∼37  우제돈 목사  2010-02-27 2024
15123 마태복음 작은 일에 충성 마25:14-30  우제돈 목사  2010-02-27 3375
15122 시편 걸작품으로 사는 신앙인 시18:1-6  김필곤 목사  2010-02-28 2570
15121 열왕기상 작은 것으로 넉넉히 사는 삶의 원리 왕상17:8-16  김필곤 목사  2010-02-28 2938
15120 마가복음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막4:1-9  김필곤 목사  2010-02-28 2871
15119 이사야 빛 속에 사는 자들이 누려야 할 것들 사9:1-7  김필곤 목사  2010-02-28 2195
15118 누가복음 좋은 이웃 눅10:29-37  김필곤 목사  2010-02-28 2316
15117 사도행전 기도하고 찬미하매 행16:25-34  김필곤 목사  2010-02-28 2541
15116 열왕기하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 왕하7:3-10  김필곤 목사  2010-02-28 2261
15115 느헤미야 수문앞 광장의 부흥회 느8:5-12  김필곤 목사  2010-02-28 3401
15114 에배소서 살아난 자 엡2:1-7  강종수 목사  2010-03-01 1770
15113 출애굽기 이기면 살고 지면 망한다 출17:8~13  조용기 목사  2010-03-01 2250
15112 마태복음 상한 갈대 마12:20  조용기 목사  2010-03-01 2537
15111 사도행전 삶과 희망 행2:25~29  조용기 목사  2010-03-01 2127
15110 갈라디아 십자가와 부활 갈2:20  조용기 목사  2010-03-01 3660
15109 누가복음 물거품과 고독 눅15:11~32  조용기 목사  2010-03-01 2101
15108 골로새서 용서와 화해와 사랑 골1:20~22  조용기 목사  2010-03-01 2165
15107 출애굽기 오! 주여 나는 어찌하오리까? 출14:1~14  조용기 목사  2010-03-01 2388
15106 사도행전 꿈과 환상 행2:17  조용기 목사  2010-03-01 2202
15105 시편 감사가 생활화되어야 한다 시50:14~15  조용기 목사  2010-03-01 2098
15104 디모데후 말씀을 수호하라! 딤후3:14-4:5  정용섭 목사  2010-03-03 2124
15103 이사야 거짓 예배, 참된 예배 사1:10-17  정용섭 목사  2010-03-03 2633
15102 이사야 전적으로 새로운 세상! 사65:17-25  정용섭 목사  2010-03-03 1908
15101 로마서 희망의 하나님 롬15:1-13  정용섭 목사  2010-03-03 2419
15100 마태복음 임마누엘 예수 마1:18-25  정용섭 목사  2010-03-03 3237
15099 마태복음 예수는 예언의 성취! 마2:13-23  정용섭 목사  2010-03-03 2843
15098 마태복음 하늘이 열리다! 마3:13-17  정용섭 목사  2010-03-03 2551
15097 이사야 캄캄한 땅을 비추는 빛 사9:1-4  정용섭 목사  2010-03-03 2161
15096 열왕기하 혼합주의 신앙을 혁파하라! 왕하23:1-14  정용섭 목사  2010-03-03 994
15095 빌립보서 기쁨에서 평화까지 빌4:4-9  정용섭 목사  2010-03-03 2338
15094 마태복음 영적 각성 마24:36-44  정용섭 목사  2010-03-03 2410
15093 이사야 거룩한 길이 열린다! 사35:1-10  정용섭 목사  2010-03-03 1961
15092 이사야 성탄에 참여하는 길 사62:6-12  정용섭 목사  2010-03-03 2375
15091 이사야 야훼의 영광과 빛 사60:1-7  정용섭 목사  2010-03-03 2031
15090 고린도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고전1:1-9  정용섭 목사  2010-03-03 2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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