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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행16:26-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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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박영선 목사 |
| 참고 : | 사도행전 091 /1990.01.14 |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리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밤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사도행전 16 : 26 - 34
오늘의 본문 말씀 속에는 그 유명한 선포가 하나 있습니다. 31절에 있는 바와 같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이 바로 이 말씀에 순종하고 또 이 말씀을 믿었듯이 앞으로도 주께서 얼마든지 허락하시는 대로 많은 사람이 이 말씀대로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고 그 가정이 주의 복된 반열에 참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이 말씀의 전후 사정을 보면 이 말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과는 상당히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잘 이해해서 우리의 신앙이 좀더 넓고 깊어지기를 원합니다.
이 말씀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 등장하느냐 하면 간수가 이렇게 물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는가?” 그래서 “주 예수를 믿으라” 이렇게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간수는 왜, 무엇 때문에 구원을 얻는 방법을 물었습니까? 죄수들이 다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다가 바울과 실라를 만났기 때문에 이 질문을 하게 됐습니다.
다시 얘기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서 우리가 비교해 봐야 되는 것은 이 간수가 직면한 정신적인 혼란입니다. 그 혼란은 간수로서는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자결밖에는 그 일을 풀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데 대해 다른 사람들의 늠름한 것을 본 데서 일어난, 그가 여태껏 갖고 있었던 모든 가치 체계의 혼란에서 비롯된 질문입니다. 밤에 지진이 났습니다. 그래서 옥문이 열리고 그 매었던 족쇄가 다 풀렸습니다. 간수는 자다 뛰어 나와서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죄수들이 다 도망갔으리라고 지래 짐작을 하고 자결하려고 합니다. 왜요? 죄수를 놓쳤으면 그 죄값을 자기가 받을 테니까요. 그래서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네 몸을 해치 말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때 간수가 순간적으로 어떤 혼란 속에 빠지는지 잘 보십시오. 죄수가 다 도망갔으니 나는 이제 죽는 수밖에 없다고 절망했을 때, 자신보다 더 큰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인 그 죄수들이 문이 열렸는데도 안 도망가고 앉아 있더란 말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죄수들이란 갇혀 있으면 결국 죽음이나 그 비슷한 수준의 비참한 모습으로 끝나도록 붙잡혀 와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족쇄로 다 채워져 있으니까 죽을 권리도 빼앗기고 있지요. 그러니 간수 쪽에서 보자면 이 조수들이 도망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 도망가고 있다는 건 이상한 일입니다.
여기에서 ‘구원’에 관한 질문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 구원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이 이렇게 이해하셔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구원을 제가 지금 설명하려는 것 같은 영역으로만 이해를 합니다. 즉 그가 몸 담고 살고 있는 모든 환경과 조건을 자기 뜻대로 전환시켜 주는 것으로 믿음을 행사하고는 합니다. 이것을 조금 전 간수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뜻이 됩니다. 간수가 자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기가 몸 담고 살고 있는 그 현실과 상황, 조건 속에서는 탈출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죄수는 다 도망갔습니다. 자기는 그 죄수를 붙잡고 있어야 될 책임자입니다. 남은 것은 그 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 망신을 당하느니 먼저 죽자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말하자면 그의 절망은 지금 그가 겪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해 다른 해결책이 없다는 판단 속에서 나온 결론이고 그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절망의 크기이기도 합니다.
신자가 신자 됨으로서 갖는 가장 큰 몫은 내가 직면하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일차적으로 어떻게 신앙을 적용하고 있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만나를 주시는 분이니까 떨어졌던 내 아들도 기도만 열심히 하면 붙여 주고 아파서 내일 모레 죽을 우리 집사람도 살려 주는 식의, 말하자면 현재의 조건과 환경 혹은 내가 알고 잇는 가치 체계를 극적인 반전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능력자를 소유하고 있다는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더라 이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본문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려고 하는 것은 구원에 대한 새로운 의미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이 얘기 속에는 ‘네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지금 간수로서 죄수를 놓치자 죽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알고 있는 가치 체계 속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유행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세계는 넓고 생각할 것은 많습니다. 우리가 생각한 것이 전부가 아닌 것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한 마디로 ‘주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사도행전 16:31은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인간들이 무엇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을 합리성이라 합니다. 사람은 이성적이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합니다. 합리적이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합리적이란 말에서 이성적이라는 ‘리’자에만 초점을 기울이지 마시고 ‘합’자에도 초점을 모아 주십시오. 말하자면 인간은 하나의 시작과 끝이 분명히 이렇게 만나야만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갖는 이러한 사고 체계를 ‘합리성을 간다’고 하고, 그 합리성이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속에 고정되어서 그 벽을 허물지 않으려고 하는 체계를 폐쇄적 구조(closed system),즉 사고의 형태에 있어서의 폐쇄 회로라 하며, 이런 사람을 closed universe를 믿는 사람이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이해와 사고의 테두리 안에서만 세계를 보는 시각을 말합니다. 이것에 반해서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을 수 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개방적 사고형태(open system)라 하며 이런 사람을 open universe를 믿는다 합니다. 이 얘기를 왜 해야 되느냐 하면 오늘 상황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자결 시도 속에는 그의 사고 체계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가 갖고 있는 생각과 이해의 범주 내에서는 이것은 죽음으로 끝을 내는 수 밖에 방법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과 그가 알고 있는 경험과 그가 알고 있는 기대, 가능성 모든 걸 고려해도 결과는 죽는 것을 끝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주 예수를 믿으라”하는 선언은 “네가 생각하고 결론을 낸 것은 미흡하다”는 지적입니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네가 거기서 빠져 나올 방법이 있다”는 것이 주 예수를 믿으라로 지금 선언되는 것입니다.
참 다르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식으로, 천국 가느냐 지옥 가느냐, 행복해지느냐 불행해지느냐의 얘기가 아닌 전혀 다른 차원에서 복음이 지금 그 얼굴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전부라는 얘기가 아니라 복음 속에는 이런 중요한 또 다른 국면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우리에게 중요해지느냐 하면 이렇게 되면 전혀 얘기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얘기가 달라지냐 하면 기독교 신앙은 결과적으로 내세적입니다. 결과적으로 내세적일 때 그 내세적인 것을 행, 불행으로만 따지면 지금의 신앙은 현실을 사는 것과 내세를 기다리는 것 사이에서 별다른 차이를 갖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도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라면서 왜 우리 아버지는 일찍 데려 갔습니까? 그리고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이런 발상이 일어나기 쉽기 때문입니다. 내세적이라는 것은 현실 도피적이거나 행복한 것의 최고의 모습으로서 우리에게 사탕발림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시고자 하는 것이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정도가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스케일이 이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연수는 60, 조금 오래 살면 70,80세인데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비행기 타고 가고 우주선 타고 가서 달나라 가고 하는 그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세적이라는 말 속에는 빨리빨리 좋은 곳으로 가자, 황금 보석주는 집에 가자,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 없는 곳에 가자는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보고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 더 깊은 메시지로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과 이 삶과 우리의 시간이라는 것은 더 완전한 것, 더 중요한 것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요 목표된 것이 만들어지는 순간에 불과하지 이것이 궁극적인 목적지가 아니라는 내용이 포함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설사 감옥에 갇혀서 맥없이, 덧없이, 이름없이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평가되며 영원한 곳에서 더 완벽한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니까 조금도 절망일 수도 없고 비극일 수도 없고 원통할 것일 수도 없으며 그것이 자기를 흔들 수 없지만 이 간수에게 있어서는 이 땅이 전부고 여기서 사는 모든 것이 최후의 것이고 이 땅을 지나면 끝이니까 여기에 있는 것으로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해서 기고만장할 수도 있고 절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하는 말 속에는 “당신이 알고 있고 당신이 목표하고 있고 당신이 계산하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오”라는 아주 엄청난 도전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얘기를 우리는 전도를 할 때 많이 사용합니다. 여러분도 그런 얘기를 들어 보신 줄로 압니다만 “마음을 열고 이 말씀을 영접하시고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이런 말이 사실은 조금 미국식 표현이고 미국식 전도 방법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우리는 미국 좇아가는 나라이니까 기독교적인 차원에서도 미국 것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상 그 의미상 미국사람들이 쓰는 개념과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쓰이는 개념이 아주 별개의 것이 된 것 같이 틀리게 쓰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음을 여십시오.” 이것은 영어로 “Open mind”입니다. 그런데 mind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말로 마음이라고 번역을 하는데 마음이 머리에 있습니까? 가슴에 있습니까? 우리나라 사람은 마음이 가슴에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사람들은 마음이 머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식 표현에서 “Open mind”라는 것은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본 것처럼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당신이 이 땅에 태어나서 손에 들고 힘쓰고 인정하는 것이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이 땅에 살고 죽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당신의 생각은 closed system입니다. 당신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며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이 있으며 하나님이 인정치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면 당신은 큰일납니다. 머리, 즉 사고 체계를 여십시오.”이런 뜻입니다. 국민학교 다닐 때야 선생님이 “이건 이거야.” 이렇게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정답을 얘기합니다마는 대학교만 가도 교수님이 “이럴 겁니다. 내가 알기로는”이렇게 슬슬 발뺌을 합니다. 왜요?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많아지니까요. 점점 open mind 되는 것이지요. 인생과 역사, 이 온 우주에 대해서도 사람은 변해갑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변해갑니다. 그것은 늙는다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지혜가 생기는 것이지요. 분별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정말 다일까? 인생은 이렇게 죽고 끝나는 것일까?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목적 없이 살다가 공동묘지에서 끝나는 것일까?’ 생각해 봐야 됩니다. 그것을 열어 놓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니다”라는 정답이 뭡니까? “예수를 믿어라”입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만드셨습니다. 온 우주를 만드셨습니다.” 그 얘기입니다. 거기서 주 예수를 믿으라 하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결단을 해야 됩니다.
그 결단이라는 것은 “네, 오늘부터 믿겠습니다”이러는 것이 아니며 입에다 힘 주고 말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걸려도 좋고 신중하신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마는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의 중간지대가 없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과 안 믿는 것은 삶에 있어서 얼마나 크게 차이가 납니까? 여러분이 만일 예수를 믿기로 결정을 하셨으면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 뺨을 대야 됩니다. 원수를 만나면 “아버지, 저 원수를 용서하소서” 해야 됩니다. 다르게 살아야 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마태복음 5장에 나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 : 43 - 45)
자, 여기 있는 말씀대로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결단이라는 말을 decision 이라는 영어 표현으로 쓸 때 신학적인 용어로 radical decision이라 합니다. radical하다는 것입니다. radical하다는 말은 급진적, 근본적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급격하다는 것이 아니라 중간 지대나 이 세상을 사는 법칙하고 적당히 공유할 수 있는 데가 없다는 표현입니다. 이 ‘예수를 믿는다’는 결정을 내리면 ‘오늘부터 금연한다’하는 식으로 삭발하듯 의지적이고 감정적인 차원에서의 단호함을 갖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는 동으로 가자는 얘기이고 하나는 서로 가자는 얘기만큼 다르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radical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왜 이렇게 엉터리로 사는 줄 아십니까? 단 하나의 이유 때문입니다. 그가 ‘믿는다’는 말을 무엇인지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다고 보통 얘기를 하지요? 믿음이 없는 것도 여러 가지입니다만 그중에는 ‘사용치 못한다’라는 차원 외에 ‘무지하다’는 것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말이 갖는 뜻의 많은 부분을 신자들이 놓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이 체계를 인정하면서 죽으면 천국 가기로 하는, 여기서는 여기대로 살고 죽으면 천국 가는, 그렇게 사는 식으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은 늘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필요한 모든 일을 허락해 주시는 능력자로만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은 알라딘의 램프입니다. 램프만 문지르면 나타나는 마왕이지요. 능력만 갖고 있지 실제 주인은 여러분인 것입니다.
이 신앙에서 벗어나셔야 됩니다. 이것을 벗어나지 못하니까 늘 세상에서는 세상 방법대로, 교회 와서는 교회 방법대로 살게 되고 여기 와서 하는 것이 하나도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거나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 온 건 전부 주택 부금 넣으러 온 셈입니다. 천국 주택 부금, 그것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가 힘을 잃은 가장 큰 이유입니다. 내세적이지 않습니다. 내세적이란 것은 오늘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실을 도피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더 큰 세계, 초월이 있다는 걸 알고 우리가 살고 있고 지금 당하고 있는 모든 것이 절대 우연이거나 값없는 것이 아니며 이 고통이 손해가 아니라는 것을 절대 체계 속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대학에 떨어지니까 애가 아니라 부모가 자살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세상에서는 학교 들어가지 못하면 이제 괄세밖에 받을 게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성경 구절은 어떻게 됩니까? “건축자들의 버리운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 하였느니라.” 세상이 인정치 않은 것을 하나님이 인정했습니다. 세상이 가치 판단을 하는 것과 하나님의 가치 판단의 기준은 전혀 다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 부분이 바로 여러분이 신자로서 이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이고 세상에서 절망하는 이유입니다.
여러분 자녀가 학교에 떨어졌다든가 여러분이 아프시다든가, 못배우셨다든가 하는 어느 것으로도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점수받는데 있어서는 남에게 밑질 것이 없습니다. 뒤질 것도 없고 여러분의 행복에 지장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일에도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목 매달고 있습니다. 다니엘서4장으로 가지요. 이 부분에 대해서 얼마나 정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하는 것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 되어 간 때입니다.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이 자기를 신격화해서 자기 형상을 본따 만든 신상에 절하도록 명령을 했습니다. 절하지 않는 자는 다 죽이기로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오라 명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 온지라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상현금과 야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다니엘 3 : 13 - 18)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신상에 절하지 않는 죄로 잡혀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식으로 얘기하면 용광로에 집어 넣는 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공갈은 이럽니다. “내가 세상에서 최고 통치자다. 너희는 거기서 살아날 아무런 힘이 없다. 내 말을 듣고 살겠느냐? 아니면 내말을 거역하고 죽겠느냐?” 그러나 셋이 뭐라 대답합니까? “우리는 당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능히 우리를 거기서 꺼낼 것입니다. 그러나 꺼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들어가겠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신파극같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여기에 굉장히 초점을 맞추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말하는 것을 보아라,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일편단심을 보아라”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틀린 건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속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너는 지금 내 목숨을 빼앗아 갈 수 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너는 지금은 내 목숨을 집어 넣고 남에게 절받는 입장에 있지만 나중에는 네가 만든 불보다 더 뜨거운 데 가야 되고 나는 여기 들어간 이 값으로 그런 불로 만들어낸 정금을 몇 톤이고 받을 것이다”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냉정하게 이해하셔야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그런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 속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닌, 영원과 진리 속에서 틔여진 시야를 요구하는 명령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으로 가서 믿음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보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히 11 : 1 - 3)
유물론이 전적으로 부정됩니다. 물건이 물건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모든 물건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보이는 것, 경험한 것, 지금 활개치고 있는 것이 궁극적인 가치도 아니고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시각입니다. 영적 시각입니다. 그것이 단 한마디로 오늘 “주 예수를 믿으라”로 소개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과학, 물질 한계 속의 세상으로부터 탈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탈출하지 못하는 이상은 예수를 믿을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이것을 믿기로 동의하신 분들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거기에 걸맞는가 보십시오.
디모데후서 4장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기억하기로 합시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딤후 4 : 1,2). 이 얼마나 정확한 말씀입니까?
여러분, 이번에 자녀들이 입학 시험에 성공하신 분들도 있지만 실패하신 분들이 훨씬 많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 떨어진 다음에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거 봐라 내가 뭐라 그랬느냐? 전자 오락하고 놀고 싶은 거 다 놀고 언제 학교 들어가냐? 전자 오락 잘한 것 가지고는 붙여 주는 회사가 없지만 네가 그것 잠깐 참고 좋은 학교 들어가면 그 다음에는 무슨 짓을 해도 좋다. 서울대학 나온 놈 하는 짓과 모르는 대학 나온 놈 하는 짓은 극이 다른거다” “네가 학교 다닐 때에는 공부안하고 땡땡이 치고 전자 오락하고 등록금 가져다가 딴 짓 하는 것이 잘나 보이지만 그게 잘난 것이 아니란다. 그때는 바보 같지만 놀고 싶을 때 안 놀고 다른 거 하고 싶을 때 안하고 죽치고 책상에 앉아봐라. 그 다음에는 뭐든지 다 된다. 뭐든지 다 된다.” 그러셨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일을 여러분들은 시행을 못합니다. 지금 잠깐만 참으시면 영원한 나라에서 멋지게 사실 수 있습니다. 떳떳한 낯으로 주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왜 노십니까? 애들하고 도대체 뭐가 다릅니까? 여러분이 신앙 생활 괜챦게 하는 게 뭐가 있습니까? 헌금 낸 것이 신앙생활입니까? 애들 등록금 내면 공부가 척척 됩니까? 아니지요? 가서, 공부를 하셔야지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수업 듣고 예습하고 복습하고 과외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이트클럽 가서 어떻게 복습을 합니까?
잠깐입니다. 여러분 나이가 지금 몇입니까? 어느날 거울을 들여다 보면 돌아가신 할아버님이 거기 계시지요? 이 세상에서 제일 짧은게 세월입니다.
누구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일주일이 하루보다 짧다.” 인정하십니까? 일주일이 하루보다 짧습니다. 하루가 그렇게 길어 보이는 데도 말입니다. 지나보면 일 년, 이 년이 얼마나 짧습니까? 십 년이 얼마나 짧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시행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똑바로 깨우치시고 마음을 집중하셔서 여러분의 깨우치심과 부름받은 것을 놓지 마시고 부끄럽지 않게 주를 만날 준비를 하시기를 권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 속에는 그 유명한 선포가 하나 있습니다. 31절에 있는 바와 같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이 바로 이 말씀에 순종하고 또 이 말씀을 믿었듯이 앞으로도 주께서 얼마든지 허락하시는 대로 많은 사람이 이 말씀대로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고 그 가정이 주의 복된 반열에 참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이 말씀의 전후 사정을 보면 이 말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과는 상당히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잘 이해해서 우리의 신앙이 좀더 넓고 깊어지기를 원합니다.
이 말씀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 등장하느냐 하면 간수가 이렇게 물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는가?” 그래서 “주 예수를 믿으라” 이렇게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간수는 왜, 무엇 때문에 구원을 얻는 방법을 물었습니까? 죄수들이 다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다가 바울과 실라를 만났기 때문에 이 질문을 하게 됐습니다.
다시 얘기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서 우리가 비교해 봐야 되는 것은 이 간수가 직면한 정신적인 혼란입니다. 그 혼란은 간수로서는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자결밖에는 그 일을 풀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데 대해 다른 사람들의 늠름한 것을 본 데서 일어난, 그가 여태껏 갖고 있었던 모든 가치 체계의 혼란에서 비롯된 질문입니다. 밤에 지진이 났습니다. 그래서 옥문이 열리고 그 매었던 족쇄가 다 풀렸습니다. 간수는 자다 뛰어 나와서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죄수들이 다 도망갔으리라고 지래 짐작을 하고 자결하려고 합니다. 왜요? 죄수를 놓쳤으면 그 죄값을 자기가 받을 테니까요. 그래서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네 몸을 해치 말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때 간수가 순간적으로 어떤 혼란 속에 빠지는지 잘 보십시오. 죄수가 다 도망갔으니 나는 이제 죽는 수밖에 없다고 절망했을 때, 자신보다 더 큰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인 그 죄수들이 문이 열렸는데도 안 도망가고 앉아 있더란 말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죄수들이란 갇혀 있으면 결국 죽음이나 그 비슷한 수준의 비참한 모습으로 끝나도록 붙잡혀 와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족쇄로 다 채워져 있으니까 죽을 권리도 빼앗기고 있지요. 그러니 간수 쪽에서 보자면 이 조수들이 도망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 도망가고 있다는 건 이상한 일입니다.
여기에서 ‘구원’에 관한 질문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 구원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이 이렇게 이해하셔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구원을 제가 지금 설명하려는 것 같은 영역으로만 이해를 합니다. 즉 그가 몸 담고 살고 있는 모든 환경과 조건을 자기 뜻대로 전환시켜 주는 것으로 믿음을 행사하고는 합니다. 이것을 조금 전 간수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뜻이 됩니다. 간수가 자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기가 몸 담고 살고 있는 그 현실과 상황, 조건 속에서는 탈출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죄수는 다 도망갔습니다. 자기는 그 죄수를 붙잡고 있어야 될 책임자입니다. 남은 것은 그 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 망신을 당하느니 먼저 죽자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말하자면 그의 절망은 지금 그가 겪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해 다른 해결책이 없다는 판단 속에서 나온 결론이고 그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절망의 크기이기도 합니다.
신자가 신자 됨으로서 갖는 가장 큰 몫은 내가 직면하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일차적으로 어떻게 신앙을 적용하고 있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만나를 주시는 분이니까 떨어졌던 내 아들도 기도만 열심히 하면 붙여 주고 아파서 내일 모레 죽을 우리 집사람도 살려 주는 식의, 말하자면 현재의 조건과 환경 혹은 내가 알고 잇는 가치 체계를 극적인 반전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능력자를 소유하고 있다는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더라 이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본문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려고 하는 것은 구원에 대한 새로운 의미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이 얘기 속에는 ‘네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지금 간수로서 죄수를 놓치자 죽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알고 있는 가치 체계 속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유행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세계는 넓고 생각할 것은 많습니다. 우리가 생각한 것이 전부가 아닌 것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한 마디로 ‘주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사도행전 16:31은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인간들이 무엇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을 합리성이라 합니다. 사람은 이성적이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합니다. 합리적이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합리적이란 말에서 이성적이라는 ‘리’자에만 초점을 기울이지 마시고 ‘합’자에도 초점을 모아 주십시오. 말하자면 인간은 하나의 시작과 끝이 분명히 이렇게 만나야만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갖는 이러한 사고 체계를 ‘합리성을 간다’고 하고, 그 합리성이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속에 고정되어서 그 벽을 허물지 않으려고 하는 체계를 폐쇄적 구조(closed system),즉 사고의 형태에 있어서의 폐쇄 회로라 하며, 이런 사람을 closed universe를 믿는 사람이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이해와 사고의 테두리 안에서만 세계를 보는 시각을 말합니다. 이것에 반해서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을 수 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개방적 사고형태(open system)라 하며 이런 사람을 open universe를 믿는다 합니다. 이 얘기를 왜 해야 되느냐 하면 오늘 상황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자결 시도 속에는 그의 사고 체계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가 갖고 있는 생각과 이해의 범주 내에서는 이것은 죽음으로 끝을 내는 수 밖에 방법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과 그가 알고 있는 경험과 그가 알고 있는 기대, 가능성 모든 걸 고려해도 결과는 죽는 것을 끝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주 예수를 믿으라”하는 선언은 “네가 생각하고 결론을 낸 것은 미흡하다”는 지적입니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네가 거기서 빠져 나올 방법이 있다”는 것이 주 예수를 믿으라로 지금 선언되는 것입니다.
참 다르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식으로, 천국 가느냐 지옥 가느냐, 행복해지느냐 불행해지느냐의 얘기가 아닌 전혀 다른 차원에서 복음이 지금 그 얼굴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전부라는 얘기가 아니라 복음 속에는 이런 중요한 또 다른 국면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우리에게 중요해지느냐 하면 이렇게 되면 전혀 얘기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얘기가 달라지냐 하면 기독교 신앙은 결과적으로 내세적입니다. 결과적으로 내세적일 때 그 내세적인 것을 행, 불행으로만 따지면 지금의 신앙은 현실을 사는 것과 내세를 기다리는 것 사이에서 별다른 차이를 갖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도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라면서 왜 우리 아버지는 일찍 데려 갔습니까? 그리고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이런 발상이 일어나기 쉽기 때문입니다. 내세적이라는 것은 현실 도피적이거나 행복한 것의 최고의 모습으로서 우리에게 사탕발림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시고자 하는 것이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정도가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스케일이 이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연수는 60, 조금 오래 살면 70,80세인데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비행기 타고 가고 우주선 타고 가서 달나라 가고 하는 그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세적이라는 말 속에는 빨리빨리 좋은 곳으로 가자, 황금 보석주는 집에 가자,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 없는 곳에 가자는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보고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 더 깊은 메시지로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과 이 삶과 우리의 시간이라는 것은 더 완전한 것, 더 중요한 것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요 목표된 것이 만들어지는 순간에 불과하지 이것이 궁극적인 목적지가 아니라는 내용이 포함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설사 감옥에 갇혀서 맥없이, 덧없이, 이름없이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평가되며 영원한 곳에서 더 완벽한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니까 조금도 절망일 수도 없고 비극일 수도 없고 원통할 것일 수도 없으며 그것이 자기를 흔들 수 없지만 이 간수에게 있어서는 이 땅이 전부고 여기서 사는 모든 것이 최후의 것이고 이 땅을 지나면 끝이니까 여기에 있는 것으로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해서 기고만장할 수도 있고 절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하는 말 속에는 “당신이 알고 있고 당신이 목표하고 있고 당신이 계산하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오”라는 아주 엄청난 도전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얘기를 우리는 전도를 할 때 많이 사용합니다. 여러분도 그런 얘기를 들어 보신 줄로 압니다만 “마음을 열고 이 말씀을 영접하시고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이런 말이 사실은 조금 미국식 표현이고 미국식 전도 방법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우리는 미국 좇아가는 나라이니까 기독교적인 차원에서도 미국 것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상 그 의미상 미국사람들이 쓰는 개념과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쓰이는 개념이 아주 별개의 것이 된 것 같이 틀리게 쓰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음을 여십시오.” 이것은 영어로 “Open mind”입니다. 그런데 mind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말로 마음이라고 번역을 하는데 마음이 머리에 있습니까? 가슴에 있습니까? 우리나라 사람은 마음이 가슴에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사람들은 마음이 머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식 표현에서 “Open mind”라는 것은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본 것처럼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당신이 이 땅에 태어나서 손에 들고 힘쓰고 인정하는 것이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이 땅에 살고 죽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당신의 생각은 closed system입니다. 당신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며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이 있으며 하나님이 인정치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면 당신은 큰일납니다. 머리, 즉 사고 체계를 여십시오.”이런 뜻입니다. 국민학교 다닐 때야 선생님이 “이건 이거야.” 이렇게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정답을 얘기합니다마는 대학교만 가도 교수님이 “이럴 겁니다. 내가 알기로는”이렇게 슬슬 발뺌을 합니다. 왜요?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많아지니까요. 점점 open mind 되는 것이지요. 인생과 역사, 이 온 우주에 대해서도 사람은 변해갑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변해갑니다. 그것은 늙는다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지혜가 생기는 것이지요. 분별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정말 다일까? 인생은 이렇게 죽고 끝나는 것일까?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목적 없이 살다가 공동묘지에서 끝나는 것일까?’ 생각해 봐야 됩니다. 그것을 열어 놓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니다”라는 정답이 뭡니까? “예수를 믿어라”입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만드셨습니다. 온 우주를 만드셨습니다.” 그 얘기입니다. 거기서 주 예수를 믿으라 하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결단을 해야 됩니다.
그 결단이라는 것은 “네, 오늘부터 믿겠습니다”이러는 것이 아니며 입에다 힘 주고 말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걸려도 좋고 신중하신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마는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의 중간지대가 없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과 안 믿는 것은 삶에 있어서 얼마나 크게 차이가 납니까? 여러분이 만일 예수를 믿기로 결정을 하셨으면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 뺨을 대야 됩니다. 원수를 만나면 “아버지, 저 원수를 용서하소서” 해야 됩니다. 다르게 살아야 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마태복음 5장에 나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 : 43 - 45)
자, 여기 있는 말씀대로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결단이라는 말을 decision 이라는 영어 표현으로 쓸 때 신학적인 용어로 radical decision이라 합니다. radical하다는 것입니다. radical하다는 말은 급진적, 근본적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급격하다는 것이 아니라 중간 지대나 이 세상을 사는 법칙하고 적당히 공유할 수 있는 데가 없다는 표현입니다. 이 ‘예수를 믿는다’는 결정을 내리면 ‘오늘부터 금연한다’하는 식으로 삭발하듯 의지적이고 감정적인 차원에서의 단호함을 갖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는 동으로 가자는 얘기이고 하나는 서로 가자는 얘기만큼 다르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radical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왜 이렇게 엉터리로 사는 줄 아십니까? 단 하나의 이유 때문입니다. 그가 ‘믿는다’는 말을 무엇인지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다고 보통 얘기를 하지요? 믿음이 없는 것도 여러 가지입니다만 그중에는 ‘사용치 못한다’라는 차원 외에 ‘무지하다’는 것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말이 갖는 뜻의 많은 부분을 신자들이 놓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이 체계를 인정하면서 죽으면 천국 가기로 하는, 여기서는 여기대로 살고 죽으면 천국 가는, 그렇게 사는 식으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은 늘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필요한 모든 일을 허락해 주시는 능력자로만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은 알라딘의 램프입니다. 램프만 문지르면 나타나는 마왕이지요. 능력만 갖고 있지 실제 주인은 여러분인 것입니다.
이 신앙에서 벗어나셔야 됩니다. 이것을 벗어나지 못하니까 늘 세상에서는 세상 방법대로, 교회 와서는 교회 방법대로 살게 되고 여기 와서 하는 것이 하나도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거나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 온 건 전부 주택 부금 넣으러 온 셈입니다. 천국 주택 부금, 그것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가 힘을 잃은 가장 큰 이유입니다. 내세적이지 않습니다. 내세적이란 것은 오늘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실을 도피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더 큰 세계, 초월이 있다는 걸 알고 우리가 살고 있고 지금 당하고 있는 모든 것이 절대 우연이거나 값없는 것이 아니며 이 고통이 손해가 아니라는 것을 절대 체계 속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대학에 떨어지니까 애가 아니라 부모가 자살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세상에서는 학교 들어가지 못하면 이제 괄세밖에 받을 게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성경 구절은 어떻게 됩니까? “건축자들의 버리운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 하였느니라.” 세상이 인정치 않은 것을 하나님이 인정했습니다. 세상이 가치 판단을 하는 것과 하나님의 가치 판단의 기준은 전혀 다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 부분이 바로 여러분이 신자로서 이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이고 세상에서 절망하는 이유입니다.
여러분 자녀가 학교에 떨어졌다든가 여러분이 아프시다든가, 못배우셨다든가 하는 어느 것으로도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점수받는데 있어서는 남에게 밑질 것이 없습니다. 뒤질 것도 없고 여러분의 행복에 지장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일에도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목 매달고 있습니다. 다니엘서4장으로 가지요. 이 부분에 대해서 얼마나 정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하는 것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 되어 간 때입니다.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이 자기를 신격화해서 자기 형상을 본따 만든 신상에 절하도록 명령을 했습니다. 절하지 않는 자는 다 죽이기로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오라 명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 온지라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상현금과 야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다니엘 3 : 13 - 18)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신상에 절하지 않는 죄로 잡혀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식으로 얘기하면 용광로에 집어 넣는 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공갈은 이럽니다. “내가 세상에서 최고 통치자다. 너희는 거기서 살아날 아무런 힘이 없다. 내 말을 듣고 살겠느냐? 아니면 내말을 거역하고 죽겠느냐?” 그러나 셋이 뭐라 대답합니까? “우리는 당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능히 우리를 거기서 꺼낼 것입니다. 그러나 꺼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들어가겠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신파극같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여기에 굉장히 초점을 맞추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말하는 것을 보아라,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일편단심을 보아라”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틀린 건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속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너는 지금 내 목숨을 빼앗아 갈 수 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너는 지금은 내 목숨을 집어 넣고 남에게 절받는 입장에 있지만 나중에는 네가 만든 불보다 더 뜨거운 데 가야 되고 나는 여기 들어간 이 값으로 그런 불로 만들어낸 정금을 몇 톤이고 받을 것이다”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냉정하게 이해하셔야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그런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 속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닌, 영원과 진리 속에서 틔여진 시야를 요구하는 명령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으로 가서 믿음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보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히 11 : 1 - 3)
유물론이 전적으로 부정됩니다. 물건이 물건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모든 물건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보이는 것, 경험한 것, 지금 활개치고 있는 것이 궁극적인 가치도 아니고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시각입니다. 영적 시각입니다. 그것이 단 한마디로 오늘 “주 예수를 믿으라”로 소개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과학, 물질 한계 속의 세상으로부터 탈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탈출하지 못하는 이상은 예수를 믿을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이것을 믿기로 동의하신 분들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거기에 걸맞는가 보십시오.
디모데후서 4장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기억하기로 합시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딤후 4 : 1,2). 이 얼마나 정확한 말씀입니까?
여러분, 이번에 자녀들이 입학 시험에 성공하신 분들도 있지만 실패하신 분들이 훨씬 많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 떨어진 다음에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거 봐라 내가 뭐라 그랬느냐? 전자 오락하고 놀고 싶은 거 다 놀고 언제 학교 들어가냐? 전자 오락 잘한 것 가지고는 붙여 주는 회사가 없지만 네가 그것 잠깐 참고 좋은 학교 들어가면 그 다음에는 무슨 짓을 해도 좋다. 서울대학 나온 놈 하는 짓과 모르는 대학 나온 놈 하는 짓은 극이 다른거다” “네가 학교 다닐 때에는 공부안하고 땡땡이 치고 전자 오락하고 등록금 가져다가 딴 짓 하는 것이 잘나 보이지만 그게 잘난 것이 아니란다. 그때는 바보 같지만 놀고 싶을 때 안 놀고 다른 거 하고 싶을 때 안하고 죽치고 책상에 앉아봐라. 그 다음에는 뭐든지 다 된다. 뭐든지 다 된다.” 그러셨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일을 여러분들은 시행을 못합니다. 지금 잠깐만 참으시면 영원한 나라에서 멋지게 사실 수 있습니다. 떳떳한 낯으로 주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왜 노십니까? 애들하고 도대체 뭐가 다릅니까? 여러분이 신앙 생활 괜챦게 하는 게 뭐가 있습니까? 헌금 낸 것이 신앙생활입니까? 애들 등록금 내면 공부가 척척 됩니까? 아니지요? 가서, 공부를 하셔야지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수업 듣고 예습하고 복습하고 과외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이트클럽 가서 어떻게 복습을 합니까?
잠깐입니다. 여러분 나이가 지금 몇입니까? 어느날 거울을 들여다 보면 돌아가신 할아버님이 거기 계시지요? 이 세상에서 제일 짧은게 세월입니다.
누구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일주일이 하루보다 짧다.” 인정하십니까? 일주일이 하루보다 짧습니다. 하루가 그렇게 길어 보이는 데도 말입니다. 지나보면 일 년, 이 년이 얼마나 짧습니까? 십 년이 얼마나 짧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시행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똑바로 깨우치시고 마음을 집중하셔서 여러분의 깨우치심과 부름받은 것을 놓지 마시고 부끄럽지 않게 주를 만날 준비를 하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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